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비잔틴 문화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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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문화의 번영〔槪說〕[편집]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 불리는 제2문화의 황금기는 9, 10세기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개화기를 맞는다. 특색은 고대고전(古代古典)의 부활이며, 헬레니즘의 전통을 중히 여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제1 황금시대를 잇는다. 수도의 대학은 9세기 중엽에 재흥하고, 성상(聖像) 파괴 운동 시대의 부진을 회복한다. 벌써 테오필리오스 황제(재위 829

842) 시대에 궁정은 매우 화려하여 이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9세기의 포티오스, 10세기의 수이나스(『레키시콘』의 저자), 그리스 사화집(詞華集)의 케파라스, 콘스탄티누스 7세(재위 911

959)의 문화적 재산 목록 등 일반적으로 백과전서적 문화로서, 독창성이 결여됐었다고 평가되지만 그래도 하나의 문화적인 완성을 이룩한 것이다. 유명한 다프니와 오시오스 루카스 수도원의 모자이크는 그 당시 예술의 대표작이며, 이콘 숭배의 부활에 의해서 그 규모를 더해 간다. 사본(寫本) 예술로는 파리 시편(詩篇)이나 산 마르코의 시편 등이 있다.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 예술뿐만 아니라 세속 예술도 그 자태를 나타내고, 궁정 예술은 수도를 중심으로 장려하기 그지없었다. 또 경마장·대(大)시장 등이 나, 성 소피아 교회·궁전 등 외에도 많은 수도원이 있었으며, 그 당시의 수도는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훌륭한 도읍이었다. 이것은 주위의 나라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와 함께 경제도 번영하여 견직물·칠보·공예품·장신구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계의 부(富)를 집중시킨 것이다. 국가 기구를 완성하고, 수도에 있어 길드 제도도 마찬가지였지만 제국 몰락의 원인이 된 귀족의 대(大)토지 소유 또한 왕성했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편집]

Macedonian Renaissance

제국 제2의 문화 황금시대인 10세기의 마케도니아 왕조 문화를 말한다. 콘스탄티노플 대학은 863년 바르다스에 의해 재건되어 고전 부흥의 중심이 되고, 총주교 포티오스는 그리스 고전 문화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 이 시대는 비잔틴 문화의 정점이며, 수이다스, 케파라스 등 위대한 학자가 나타나고, 백과전서적이기는 했으나 세련되어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성 마르코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멀리 서구에까지 크게 영향을 주었다. 기조(基調)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정신과 헬레니즘이며 다른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육자가 되었다. 수도는 바로 이 르네상스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무역도 왕성해지고, 서구와 아시아의 접점(接點)으로서 이 시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성상 예배의 부활[편집]

聖像禮拜-復活

9세기에 우상 파괴 운동은 제2기에 들어가지만, 843년 마침내 황비 테오도라에 의해 성상 숭배가 부활한다. 8세기의 성상 파괴 운동은 카를 대제의 대관(戴冠) 등의 영향을 서구에 끼친다. 레오 5세(재위 813

820)가 815년 종교회의를 열어 성상 숭배를 금지시키자 스토디오스 수도원의 테오도로스 일파가 몹시 반대했지만 그 수도원은 박해를 당하고, 국내는 심한 혼란 상태가 되어 다음 미카엘 2세 시대에는 그 상태가 극도에 달한다. 테오필리오스(재위 829

842)는 파괴 운동 최후의 황제이다. 832년 격렬한 박해 칙령에 의해 수도원을 강압하지만, 마침내 오리엔트 정신에 대한 그리스적 종교 감정이 승리를 얻게 된다. 성상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숭경(崇敬)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도 이 날을 기념하여 그리스 정교회는 축제일로 하고 있다.

테오도라[편집]

Theodora (508?∼548)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비천한 신분으로 콘스탄티노플 경마장 마구간 문지기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 경마장의 무희(舞姬)였다고 한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대제의 통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니카의 반란 때에는 대제를 보호했으며, 명장 벨리사리우스로 하여금 반란을 진압시킨 다음에는 명실 공히 대제의 비(妃)로서의 존경을 받았다. 대제가 원했던 로마제국의 서방 부흥을 위한 원정보다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동방 통일을 중요시하여, 그 지역의 크리스트교의 한 파(단성설(單性說)에 기초를 둠)를 지지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안을 상주(上奏)하는 등 남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 정교회의 성립[편집]

-正敎會-成立

867

1054년에 로마가톨릭에서 분리하여 나간 교회를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라고 한다. 1054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에 전파된 크리스트교로 동서(東西) 양 교회의 분열은 각기 그 지방의 종교적 전통의 상위점에서 오는 것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우상숭배 논쟁과 교황권 문제였다. 우상숭배 논쟁은 842년에 해결을 보았으나, 교황권 문제는 9세기 콘스탄트노플의 총주교(總主敎) 포리오스의 취임에 발단하여 발생했다. 서로마의 교황은 그 우월권을 주장하고 동로마는 총주교의 독립을 주장하여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이 항쟁은 10세기경의 교황 레오 9세와 총주교 미카엘 케라리오스의 사이에서도 되풀이되어, 1054년에 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는 분열되었다.1453년 로마제국이 투르크에게 멸망되자, 그리스 정교도는 이슬람교도의 압박을 받고 중세(重稅)에 시달렸으나, 1830년 그리스의 독립과 동시에 그리스의 교회는 투르크 지배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 1878년에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독립과 동시에 교회도 또한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989년 키예프 공(公) 블라디미르가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이래, 크리스트교는 러시아에 침투, 동로마 제국 멸망 후에는 그리스 정교 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교회의 지지로써 러시아를 통일, 1589년에는 러시아의 총주교 관구가 설치되어 교회는 황제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고,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여 크리스트교는 번영하였다. 1917년에 수립된 소비에트 정권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잃었다.

불가리아 왕국[편집]

-王國 Bulgaria발칸에 있는 국가. 다뉴브 강 하류, 발칸 산맥에 따라 흑해에 면해 있다. 민족 대이동기 직후 남하한 슬라브인(人)을 몽골계의 불가리아인이 격파하고, 681년에 건국하여 슬라브화되고, 그리스 정교(政敎)로 개종했다. 10세기초, 시메온 1세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나, 963년 동서로 분영되어 1018년에는 둘 다 비잔틴 제국에 합병되었다. 1186년 이반 아센 1세가 또다시 독립, 발칸 제일의 국력을 과시하였으나, 1241년 이반 아센 2세가 암살된 후에 국위는 쇠퇴하여 1396년 투르크에 합병되었다. 19세기에 들어 투르크의 세력이 퇴조함에 따라 민족주의가 성하게 되자,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875년 불가리아 학살사건은 이를 강렬하게 자극하였다. 1878년의 러·터 전쟁 결과, 베를린 회의에서 투르크의 종주권(宗主權)하에 자치를 획득하였으나,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열강의 간섭과 국내의 대립에 있어 혼란에 빠졌다. 1908년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고, 1912년에 발칸 동맹을 체결한 다음 투르크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영토분배에 관해 다른 동맹국의 공격을 받아 제2차 발칸전쟁에 패배하자, 3국동맹(三國同盟)측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동맹측에 가담, 참전하였다가 패배하여 뇌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후 농민당·공산당·군부 등 사이에 정권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30년대에 들어서자 파쇼 국가와 접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압력으로 추축국측에 가담하였으나, 1944년 소련군이 진입하여 체제의 변혁이 진행되고, 1946년 와정이 폐지되어 공산국가가 되었다.

불가리아 30년전쟁[편집]

-年戰爭

986

1014년에 걸친 비잔틴과 불가리아(Bulgaria)와의 전쟁이다. 10세기의 불가리아는 그리스도교화(化)하였고 영토도 넓어 제국의 위협이 되었다. 시메온의 사후(927), 사무엘이 재흥한 불가리아와는 30년간이나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로크토누스(불가리아인 학살자)라고 불릴 만큼 격렬하게 싸웠다. 승리한 후에는 재건에 노력했다.

동로마와 사라센[편집]

東-

사라센(Saracens)군이 838년 다시몽, 아모리움에서 동로마 제국의 테오필리오스에게 승리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863년에 패배할 때까지 제국을 괴롭혀 왔다. 이 제국의 승리는 아랍과의 관계에서의 전환점이 되어 아시아에 대한 제국의 공세를 강화하게 되며, 10세기에 이르러 사라센에 대한 화려한 성과를 이룩하고 동방에서 세력을 넓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