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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현대의 사상/현대사회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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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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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근대사회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를 세 지주(支柱)로 하여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할 수 없었던 훌륭한 문명사회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적 대립의 모순을 드러내어 내부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된 식민주의 내지 제국주의(帝國主義)는 그들의 목표이던 아시아·아프리카 후진 사회에 민족주의를 성장시켜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에서는 조화를 이루어 오던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의 세 지주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상극·대립하여 분열되니 첫째는 자유주의를 극대화하고 다른 것을 모두 부정하는 무정부주의(anarchism)로, 둘째는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전면 거부하고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계급투쟁을 우선시킨 사회주의로, 셋째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밀착시키고, 자유주의를 전면 부정한 파시즘(fascism)으로, 넷째는 제국주의 전쟁을 비판·반성하려는 노력이 평화주의 운동으로, 끝으로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휴머니즘 운동으로 각각 전개되어 현대의 사회사상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근대 과학이 이룩한 특이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새로운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이념적인 해석이나 주장보다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회과학·역사학 내지 인간학을 정립해 보려는 노력도 없지 않았으니, 모르건의 진화론적 민족학, 베버의 비교사적(比較史的) 방법에 의한 사회과학, 토인비의 문명비평, 프롬의 사회학 등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19세기에 출현한 진화론, 정신분석학, 실증주의, 변증법 등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병리를 진단하고 모순점을 밝혀 현대인의 과제를 깨우쳐 주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사상의 주조는 역시 사회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이다. 왜냐하면 현대가 근대의 지양 혹은 연속이라는 의미에서 현대는 역시 근대 사회사상에 대한 수정, 절충, 부정, 회의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사회는 그들 사회만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자신을 동양 사회로 확장·이식시키는 가운데 전연 다른 새로운 전통과 사상을 수용하고 그 영향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구미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동양에 이르러 오히려 군국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를 탄생시켰고, 그들의 사회주의는 서구에서 러시아를 거쳐 극동에 이르는 동안에 오히려 마르크스-레닌 주의, 수정주의, 사회민주주의와 민족공산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의 후진 사회에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와 민족해방운동으로 형성된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은 어느 사이에 그들 구미사회에 침투되어 이데올로기 대립을 완화시켰고 국제 세력의 다원화(多元化), 자주노선(自主路線)의 표방 등을 출현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계가 다원화되고 이질적인 여러 사회의 공존이 운위되어, 사회사상이 이와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과 비례하여 여러 사회가 오히려 동질화(同質化), 평균화(平均化)되어 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양 사회와 서양 사회가 동질화되어 가고 자본주의 진영 내에 평균화가 이루어지듯이 사회주의 진영도 차츰 평준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양 진영간의 질적인 차이가 크게 둔화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있었던 자본주의 사회 내의 반체제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에의 자유화 운동은 다 같이 현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어디서나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현대 산업의 메커니즘과 물질지상주의의 오류를 반성하고 사회구성원 전체의 참다운 복지와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 체제도 자신의 부자유 상태와 관료화의 위험을 반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상사상(思想史上) 언제나 그래왔듯이 인간의 문제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르게 문제될지라도 역시 인간문제의 본질은 인간성의 참다운 해방과 보존에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 진전되리라고 전망된다. <洪 善 熹>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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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主義

민주주의(데모크라시)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dmos(인민)와 Kratia(지배)가 결합된 dmokratia, 곧 '인민의 지배'라는 뜻이다. 이러한 다수자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가 한 사람에 의한 지배나 소수자에 의한 지배와 비교할 때 보다 훌륭한 정치사상이며 정치형태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시민혁명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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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主義-條件

오늘날 민주주의의 내용은 복잡하고 다의적이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되려면 최소한 ① 국민의 기본적 인권 존중, ② 권력의 전제화(專制化)를 억압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들의 확립――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국가(예컨대 절대주의 국가, 전전의 일본, 파시즘 시대의 독일, 이탈리아를 생각해 보라)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확립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사상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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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權思想-發展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중되고 그 때문에 여러가지 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다는 사상은 시민혁명기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권리에는 양심·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에 정신적 자유와, 정당한 이유 없이 적절한 법적 수속을 거치지도 않고 체포·감금·처벌되는 것을 금하는 인신(人身)의 자유와 위정자가 자의로 국민에게 과세하고 경제활동에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의 불가침 등 경제적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기본적 권리는 국가권력으로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유권(自由權)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홉스, 로크, 루소, 페인 등의 사상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여러 권리는 영국의 '권리장전(權利章典)', 미국의 '독립선언', 프랑스의 '인권선언' 등에서 보장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을 지도한 것은 시민계급이었으므로 자유권의 내용에는 유산자(有産者) 본위라고 생각되는 점도 있었고 또 전 국민의 인권보장으로서는 미흡한 면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전 국민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점이다. 전 국민의 인권을 진정하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전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들이 만든 법률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 좋다는 사상에서 19세기 초엽부터 선거권의 확대가 도모되어 점차 각국에서 참정권이 인권의 내용으로 첨가되었다. 영국에서는 1832년에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실시되고, 제2차대전 후까지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남녀 보통·평등선거제가 채택되었다.

또 하나는 사회권(생존권)이 새로이 인권보장의 체계에 첨가되었다. 산업자본주의가 확립된 19세기 중엽 이후, 선진 제국에서는 빈·부 차가 점점 심해져서 빈곤·실업 등의 문제가 중대한 정치·사회 문제가 되어 자유권 중 경제적 자유권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가는 종래처럼 개인의 사적(私的) 생활이나 경제활동에는 간섭하지 않고 자유방임주의나 야경국가(夜警國家)의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되고, 경제·노동·후생·사회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복지(사회)국가의 입장을 택하게 되었다. 약한 입장에 있는 노동자를 법률로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 증대를 인정하는 노동법이 각국에서 제정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재산 소유를 공공복지(公共福祉)의 입장에서 제한하여 사유재산 불가침 원칙을 수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최초로 헌법에 규정한 것은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1919)이었으며, 영국에서는 1870년대부터, 미국에서도 뉴딜 정책을 통해 사회권적 입장에 선 입법이나 정책이 실시되었다.

'세계인권선언'(1948)에서는 이상의 자유·참정·사회권을 기본적 인권의 세 가지 체계로 보았고, 세계 각국도 체제의 차이에 따라 역점의 상위는 있지만, 어쨌든 이 세 가지 인권을 헌법에 의해 보장하고 있다.

민주적인 정치제도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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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的-政治制度-發展

인권을 참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이 법에 따라서 통치(법의 지배)하는 것이 필요하며, 한편으로는 권력의 전제화의 방지가 요구된다. 대의정치와 3권분립주의는 근대 민주정치의 두 기둥이다.

의회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는 것, 또 권력의 분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최초로 명확히 밝힌 사람은 로크였다. 영국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의회를 중심으로 하고 내각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가 거의 확립되었고, 미국에서는 몽테스키외적인 대통령·의회·재판소에 엄격하게 권력을 분립시키는 대통령제가 확립되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책임제를 각국의 조건에 따라 여러가지로 혼합한 정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의회제도는 채택하지 않고 있으나, 소비에트 최고회의나 중공의 인민대표대회 같은 대의정치를 채택하고 있다.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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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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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主義 마르크스 주의는 하나의 커다란 사상적 조류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나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현실 사회 및 정치와 관련을 가지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려는 실천적 성격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 주의의 창시자들, 곧 마르크스 및 엥겔스는 그들의 입장을 '과학적 사회주의(科學的社會主義)'라고 자칭하였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이론,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의 기본 조건에 관한 학설이다. 특히 '공산주의'라고 할 때에는 사유재산을 철폐한 후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특히 만인이 필요에 따라서 소비할 수 있는 고도의 사회주의 사회) 그 자체 및 이를 목표로 하는 실천 활동을 말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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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的社會主義-空想的社會主義

과학적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로부터 구별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명칭이다.

그런데 이른바 '공상적'인 사회주의 사상은 매우 오래 전부터 있었다. 단지 그중에서 마르크스 등이 특히 문제로 삼은 것은 19세기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 후에 발생한 사회주의 사상, 곧 프랑스의 생시몽 및 프리에, 또한 영국의 로버트 오언 등의 사상을 말한다. 이 사상은 '공상적'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매우 날카로운 비판으로서, 단지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공상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공상적인 것으로부터 과학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하나의 결정적인 점은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의 개조를 자본가의 양심에 기대하고 또는 좋은 자본가의 출현을 기대한 데 대하여, 마르크스 주의는 사회 개조사업, 곧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를 세우는 일을 새로 등장한 노동자 계급 자신의 힘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전에 따라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나 모순의 해결을 그 모순 때문에 이익을 얻는 자본가 계급에 기대하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이른바 피해자, 곧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사회개조의 힘을 기대했던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의 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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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主義-部分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생활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으로서 크게 나누어 경제학, 혁명 이론 및 정치학, 철학이라는 세 개의 구성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단,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세 부분에 대응해서 세 개의 원류(源流)가 전개되고 있다.

마르크스 주의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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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主義-經濟學

경제학은 18세기 중엽 이후 가장 일찍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인 영국에서 고전경제학(古典經濟學)으로서 나타났다. 곧 애덤 스미스, 리카도에 의하여 대표되는 부르주아지의 고전적인 경제학인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 경제학은 이러한 고전경제학을 계승하면서 이를 비판하여,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비밀 또는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발전 법칙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의 노동력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자본가 계급에게 팔고 자본가 계급은 이 상품에서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취한다는 이른바 잉여가치론을 세웠다.

마르크스 주의에서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구별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은 사실 생산물의 분배나 소비 면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요,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러한 현상이나 결과를 낳는 기본적인 원천은 물질적인 생산방법, 곧 자본가가 노동자를 채용하여 상품을 만드는, 앞에서 말한 방식에 있고 여기에서 빈부(貧富)의 불공평(不公平)이나 불평등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 주의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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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主義-政治學

일반적으로 혁명이론은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주로 프랑스에 존재하였고, 인간의 과거 역사에서 계급투쟁의 역사를 인정하는 학설조차도 마르크스 이전의 프랑스 왕조(王朝) 시대의 역사가들(기조 1787-1874, 티에리 1797-1877 등)이 이미 주장한 바 있었다. 단지 그것을 근대 노동자 계급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독재라는 과제로까지 이론을 확대한 점에, 다시 말하면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필요하다고 한 점에 마르크스 주의 이론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마르크스 주의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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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 主義-哲學

마르크스 주의 철학은 '변증법적 및 사적(史的) 유물론'이라고 불린다.

원래 유물론은 오래된 것으로서 철학의 역사는 유물론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특히 17, 18세기부터 영국에서, 또한 18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서 적지 않은 수의 유물론자가 출현하였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인 조건, 사상적인 준비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은, 인간이란 태어날 때는 말하자면 '백지(白紙)'와 같아서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생활상이나 성격상 여러가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주로 사람들의 생활환경, 사회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다.

단지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수동적(受動的)으로서, 각자의 사회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만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환경을 바꾸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해결을 역시 현명한 군주(君主), 현명한 입법자(立法者)의 출현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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辨證法的-史的唯物論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이나 이를 계승한 독일의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에게서 학설을 배우고, 헤겔의 철학에서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종래의 기계론적(機械論的) 유물론,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형태로 변형시켰다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이란 요컨대 우리가 사물을 볼 때에 사물을 고정적인 상태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연관과 함께 그 끊임없는 발전을 본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 또는 사유재산제를 생각할 때에도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떼어낼 수 없는 제도가 아니라 어느 시기에 역사적으로 성립하고 변화하고 발전되어 온 것으로서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견지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해를 인간사회의 역사에 입각해서 고찰한 것이 '사적 유물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실증적 연구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인류의 사회가 아직 계급 차별이나 빈부 차별이 없었던 원시공동체(原始共同體) 시기로부터 빈부의 차, 사유재산제가 조금씩 생긴 고대노예제(古代奴隸制)로 나아가 여기에 비로소 계급사회가 성립한 것, 또한 봉건제 사회가 생기고 이를 이어서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증적·이론적으로 분명히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적인 대립이나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이며, 특히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 전위인 정당의 힘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는 것을 허황하게 예언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수정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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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民主主義(修正社會主義)오늘날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은 자본주의 경제가 상당히 발달한 서유럽 제국에서 공산주의와 구별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사회를 전진적으로 민주화하면 사회개량을 통해서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된다는 사상과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특히 독일에서 매우 복잡한 역사적 변화를 거치며 정립(定立)된 것으로서, 초기에는 마르크스 주의 자체를, 후기에는 그 수정을 일컫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이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848년의 3월혁명은 실패하고 50년대가 되어서도 국내에는 봉건제도가 뿌리깊게 남아 있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약했다. 따라서 일찍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대신해서 선거권 획득을 비롯하여 언론·출판·단결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요구를 내걸고 싸우는 한편 사회주의를 목표로 삼았다. 이미 1863년에 라살이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전독일노동자협회'를 조직한 데 대하여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제1 인터내셔널'을 모방하여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1869년에 아이제나하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이윽고 전자의 라살파(派)와 후자의 아이제나하파(派)는 비스마르크 반동체제와 대항하기 위하여 1875년에 고타에서 합동하여 처음으로 노동자의 전국적 조직인 '사회주의노동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은 아직 약했고 라살 주의의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사회주의자 진압법이 폐지된 1890년에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SPD)이라 개칭되고, 다음해에 카우츠키가 기초한 '에르푸르트 강령(綱領)'을 채택하여 마르크스 주의가 사회민주주의의 중심사상이 되었으며, 1917년의 제2 인터내셔널 붕괴시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러시아에서도 레닌은 '사회혁명당'에 대하여 볼셰비키를 '러시아사회민주당'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독일사회민주당'이 결성된, 같은 1890년대에 이미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수정론(修正論)이 대두되었다. 독일의 자본주의 경제도 19세기 말에는 드디어 강대해지고 또한 사회민주당도 의회정당(議會政黨)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공산당선언>이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말한 계급 분해나 대립의 격화, 중간계급의 몰락론, 공황론, 그리고 혁명론에 대해 재검토하자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우선 게오르크 폰 포르마르나 브루노 센랑크('수정'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가 이러한 요구를 제기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전개한 것은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1899)였다. 베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해서 반드시 계급분해나 대립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거꾸로 끊임없이 중간계급이 출현하고 또한 공황이나 빈곤화가 약화되며 경기변동(景氣變動)에 적응하는 능력이 커지므로, 종래와 같은 파국적인 자본주의 붕괴론은 잘못이라 생각하고, 노동조합이나 의회를 통해서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를 전취함으로써 전진적인 개량의 축적에 의해서만 사회주의가 실현된다고 제안하였다. 우리는 이 사상에서 수정사회주의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카우츠키는 같은 1899년에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써서 자기 나름의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옹호하였고, 로자 룩셈부르크도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수정주의를 기회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논쟁을 '수정주의 논쟁'이라고 부른다.

베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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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ard Bernstein (1850-1932)

독일사회민주당의 수정 마르크 주의자.

철도 기관사였던 유태인의 일곱째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가정이 가난했기 때문에 일찍 실업계에 진출, 은행원이 되어 이 때 자본주의의 모순을 통감했고, 1872년에는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878년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진압법이 통과된 것을 기회로 윤리적 사회주의자 헤히베르크의 비서로서 스위스로 이주하고 취리히에서 사회주의 신문 <조치알 데모크라트>지를 편집했다. 이 신문의 편집을 통해서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접촉을 하고 또 카우츠키와 결맹했다. 1888년에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런던으로 피신하였으며 여기서도 편집을 계속했다.

1890년에는 독일사회민주당은 진압법이 발효중임에도 불구하고 143만 표의 선거득표를 얻어 비스마르크 체제를 붕괴시키게 되는데, 이 무렵부터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정당과 의회정치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의회주의(議會主義)를 통해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1890년대에 들어서자 독일 자본주의는 호경기를 만나 엥겔스나 카우츠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으므로 베른슈타인은 다시금 고전적인 마르크스 주의자가 말하는 자본주의 붕괴론이나 중간계급 몰락을 현실에 비추어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 주의에 의문을 품고, 1894년의 당 내부의 농업문제 논쟁을 통해서 마르크스 이론의 수정을 시도하기 시작했으며, 1896년부터 일련의 <사회주의 제 문제>를 썼다. 이 논문들은 당 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다시 이 수정의견을 공식화한 것이 주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1899)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901년에는 귀국했으나 당내 논쟁은 카우츠키나 베벨의 중간파와 로자 룩셈부르크나 리프크네히트 등의 좌파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어, 우파의 핵심인 베른슈타인의 수정 문제는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의회정치활동도 활발히 벌여서 귀국한 다음해(1902)부터 1918년의 패전시까지 거의 국회의원직에 있었다. 또 수정주의의 잡지 <사회주의 월보(社會主義月報)>에 관계하고 <사회주의 자료집>을 편집하는 한편 마르크스·엥겔스의 왕복서한 편집에도 참가했다. 전후 한때 정부에도 관계했으나 고독한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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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主義-前提-社會民主主義-課題 (1899)

수정마르크스 주의를 체계적으로 논한 베른슈타인의 주저.

19세기 말의 유럽, 특히 독일의 자본주의 경제는 순조로운 발전을 보았으나 정통 마르크스자들이 기대한 바와 같은 중산자계급의 계급분화(階級分化)나 노동자계급의 빈곤화가 반드시 일어나지는 않았다. 또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진압법하에서도 독일사회민주당은 더욱 강화되어 갔고 의회내에서의 세력도 크게 신장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정세의 변화를 보고 베른슈타인은 고전적인 마르크스 주의 수정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1896-97년 <노이에 자이트>에 일련의 수정주의 논문을 기고했으나, 당 내외에 이상한 반응을 일으켰으므로 다시 이 책을 써서 자기의 주장을 체계화하였다.

첫째로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생산의 집적(集積)에 따라 계급구성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2대 계급으로 분해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주식회사의 보급에 따라 자본가의 수는 증대하고 고액소득자가 증가하며 소경영(小經營)도 변함없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공황에 대한 적응능력도 증가하여 이미 일반적인 공황은 일어나지 않게 되고, 노동조합이 발전하면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적 권리가 전 대중에게 침투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국론(破局論)'이나 '빈곤화론(貧困化論)'에 의한 자본주의의 자연붕괴론은 오류이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임무는 블랑키적인 폭력주의를 배척하고,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에 의한 노동자의 향상과 민주주의적 개량을 점진적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곧 당내에서 카우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반박을 받았다. 이를 수정주의 논쟁이라고 한다. 이 책은 여러 번 판을 거듭했으며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카우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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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Johann Kautsky (1854-1938)

제2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로, 대표적인 이론가 중의 한 사람.

극장 배경화가의 아들로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서 공부하고 1875년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에 입당, 마르크스 주의와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처녀작 <다윈과 사회주의>를 썼다. 그 후 리프크네히트나 베벨과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1883년에 후의 사회민주당 기관지 <노이에 자이트(신시대)>를 창간했으며, 이후 1917년까지 동지의 편집에 종사했다. 그 동안 1891년에 엥겔스를 도와서 <에르푸르트 강령>을 기초하고 다음해에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을 써서 라살 주의를 추방했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다음에는 당내에 베른슈타인을 선두로 하는 수정주의가 대두되었는데,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당의 강령>(1899)에서 반박하는 동시에 신칸트파 마르크스 주의에 대해서는 <윤리와 유물사관>(1906)으로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옹호하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좌파에 대해서는 <권력의 길>(1909)로 반론을 펴서 중간 입장을 취했다. 제1차 대전때 점차 고립하여,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1918)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함으로써 레닌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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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Bebel (1840-1913)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독일사회민주당의 지도자로 사회주의 사상가.

보병연대 하사관의 아들로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몸은 쇠약했지만 어릴 적부터 학문에 무척 흥미를 가졌다. 가난한 가정에서 4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13세에 선반공이 되어 각지에서 수업했다.

1861년에 '노동자교육협회'에 가입하고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었다. 60년대에 독일 노동자계급이 점차 자각됨에 따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1869년에 '사회민주노동당'을 아이제나하에서 창립하고, 1875년에는 아이제나하파를 라살파와 합동시켜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발족시키고, 이어서 90년대의 '독일사회민주당' 설립에도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당내에서 극좌적·아나키스트적 경향과 함께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와 싸워 중앙파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부인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라이프치히 부인교육협회에 협력하면서 1879년에 주저 <부인론>을 공간하여 부인 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베벨은 1867년부터 북독일동맹의 의원, 이어 1871년에는 제국의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일시 중단은 있었으나 1913년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제국주의 정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일시의 중단은 있었으나 1913년 사회주의 진압법에 반대하여 의회 내부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기초를 쌓았다.

부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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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論 (1879)

베벨의 주저로 원명은 <부인과 사회주의>.

1860년대에 독일의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운동도 점차로 조직화되었으며, 1865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최초의 부인회의가 열렸다. 베벨은 이 라이프치히 부인교육협회에 적극 협력하고 부인의 사회적 해방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여 이 책을 썼다.

베벨은 우선 부인의 지위를 원시사회로부터 근대까지 역사적으로 고찰한 후 현재의 부인문제를 다루었는데, 부인의 남자에 대한 인간적 종속과 프롤레타리아 부인의 경제적 종속이라는 2중의 종속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2중의 종속으로부터 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녀의 완전한 사회적 동등권이 실현되어야 하고, 보다 중요한 것은 부인노동자를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해방하는 일이며, 이 점에서는 남자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 계급대립을 폐지함으로써 남녀동등권도 실현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민주당이야말로 그 기수라고 역설하였다.

사회주의 진압법 밑에서 관헌의 눈을 피해 1879년에 출판된 이 책의 초판은 베벨의 가장 좋은 협력자였던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쳐졌다. 여러 번의 증보를 거쳐 1946년에 55판이 나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부인운동에 이 책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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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ian 社會主義

1884년 1월 런던에서 창설된 지식인의 사회주의 연구단체인 '페이비언협회'사람들이 제창한 사회개혁에 대한 주장.

페이비언 협회는 지구전법(持久戰法)으로써 명장 한니발을 격파한 고대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의 이름을 따서 "강한 인내로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때가 이르면 파비우스와 같이 과감히 공격하라"는 것을 모토로 하여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단체이다. 그 중심인물이 되어 그 후의 발전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당시에는 무명의 문인이었던 쇼와 그의 권유로 참가한 시드니 웹(1859-1947), 그의 아내 베아트리스(1858-1943), 그레엄 월리스(1858-1932) 등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특색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이상주의적·도덕주의적이라는 것, 둘째는 의회에 의한 사회주의화를 주장한 것, 셋째는 점진주의적 정책을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의 그린 등의 인격주의 사상, 강화되어 가던 노동자의 정치적 발언권, 상식적이고 온건한 영국의 국민성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은 쇼 등의 노력에 의해서 정당운동으로 전개되어 1893년의 독립노동당 결성에서 1906년의 노동당 결성에 이르게 되었다. 제1차대전 이후로는 라스키 등 젊은 회원의 발언에 의해 더욱 현실적인 정책이 연구되었다. 지식인들이 요구하는 이 도덕주의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주의자들에게서 미온적이고 소시민적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루어 보수당의 탈피를 촉진했고, 또 노동당 정권에 의해 구체화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공헌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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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영국의 극작가·비평가·사회주의자.

더블린에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여 초등교육을 받고는 취직했으며, 후에는 런던에 나와 소설을 썼으나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렸다. 이 무렵 미국의 사회주의자 헨리 조지(1839-1897)나 마르크스를 읽고 감동하여 사회주의로 전향하였다. 1884년 결성된 페이비언 협회에 일찍부터 참가하여 시드니 웹과 함께 이론적 지도자 선전활동의 투사가 되었다. 그 기념비적 업적이 <페이비언 사회주의 논집>(1889)이다.

그 후는 사회주의 운동을 행하는 한편 극작가·비평가로 입신하여 기지에 찬 수많은 희곡을 써서 정치나 사회를 비평하고 영국 근대극의 확립자가 되었다. 그중에도 '생명력'의 철학을 말한 <인간과 초인(超人)>(1903), 통렬하게 현대문명의 병폐를 지적한 <메트세라로 돌아가라>(1921) 등이 유명하다.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비전쟁론자(非戰爭論者)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회주의는 현실의 사회조건 속에서 실현가능한 것부터 손을 대자는 유연한 것으로 부동의 신념이나 고정적인 교의(敎義)와는 다른 것이다. 한 번의 총선거나 하나의 법률로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그는 믿지 않는다. 실제 생활에 밀착된 경제활동의 개선이 사회주의 실현의 제1보이며, 이는 의회의 입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사회개혁의 원리는 페이비언 협회의 계몽활동이나 노동당의 정치활동에 반영되고 또한 그의 극작·평론 전체에 침투되어 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 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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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ian 社會主義論集 (1889)페이비언 협회 소속 회원 7명은 런던에서 민중 계몽활동의 일환으로 강연회를 열었다(1887-88). 이 책은 쇼가 이 강연을 정리·편집한 것이다.

내용의 구성과 필자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사회주의의 기초>-경제(쇼)·역사(시드니 웹)·산업(윌리엄 크라바크)·도덕(시드니 오리비에), 제2부 <사회조직>-사회주의 체제하의 재산권(그레엄 월리스)·사회주의 체제하의 산업(아니 베잔트), 제3부 <사회주의에의 이행>-이행(쇼)·전망(휴버트 브란트).

여기서 주장된 이상주의·의회주의·점진주의의 원리는 그대로 페이비언 협회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혁명과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 주의 운동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국인 사이에 퍼져서 노동당의 착실한 발전을 보았다.

라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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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ld Joseph Laski (1893-1950)

영국이 낳은 20세기 최대의 정치학자.

하버드·런던 등 여러 대학의 강사·교수를 역임, 체미(滯美)중에는 보스턴의 경찰관 스트라이크를 변호하여 '라스키 사건'을 일으켰다. 실제 정치면에서는 페이비언 협회에 입회(1926), 노동당에도 입당하여 1936년에 집행위원, 1945년 선거의 대승에서는 위원장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사상발전은 다원적 국가론(多元的國家論)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치학개론>(1925)에서는 새로이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덧붙여 다원적 국가론을 수정하고 자연주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1929년 이래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계급대립의 격화, 자본가의 뉴딜 정책에 대한 공격, 파시즘의 대두라는 현실에 직면하자, 라스키는 마르크스 주의에 접근하여 의회주의에 의혹을 품고 계급국가론(階級國家論)을 주장하게 된다. 한편 <영국에서의 의회정치>(1838), <미국 대통령제>(1938)에서 학문적 연구를 결실시켜 정치제도의 학문적 현실을 해부하고, 개인적 자유의 존중·옹호라는 영국의 전통적 정신의 입장에서 파시즘, 공산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주저에는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자유>(1930), <신앙·이성·문명>(1944) 등이 있다.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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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國家-自由(1930)라스키의 대표적 저작. 전체는 서론(緖論), 제1장 서론(序論), 제2장 정신적 자유, 제3장 자유와 사회, 결론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근대국가에 있어서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탐구하고, 특히 정치권력 밑에 있는 사람들이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권력 자체가 따라야 할 행동기준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당시 극히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자기의 이윤 추구를 위해 국민 대다수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 독일·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는 한편 소비에트에서는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통적인 유럽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상기한 라스키의 문제의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스키는 이 책에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권력의 제한과 사상·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 또 자유의 조건으로서 평등의 실현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국가를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두는 국가관에 반대하고, 우리들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국가가 우리의 자유나 행복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가에 달렸다고 하는, 이른바 국가를 수단으로 보는 전통적인 영미형(英美型) 국가관을 전개하고 있다.

신앙·이성·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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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理性·文明 (1944)

라스키의 주저 가운데 하나.

제2차대전에서 연합국측의 승리가 이미 확실시되던 시기에 씌어진 책으로, 이제는 전쟁의 승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 자유의 승리가 전후에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라스키는 새로운 가치체계나 신념의 창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책은 '어떤 역사적 분석의 시도'가 부제인데, 당시 두 개의 세계에 의해 대표되고 있던 사회기구나 이데올로기 대립의 문제를 고대세계에 있어서 원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들어와 구이교문명(舊異敎文明)과 격렬한 대립을 벌였던 역사적 드라마와 대비하여 파악하고, 현대에 있어서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는 고대 로마제국의 몰락기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모든 문명의 몰락기이다. 이러한 시대의 재생(再生)은 일찍이 그리스도교가 이룩한 최대 기여인 개성 완성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도 포함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재건에 달려 있다.

생디칼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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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dicalisme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노동조합이 하는 투쟁에 국한하고, 한편 노동자의 투쟁형태를 노동자 자신의 직접 행동에 한정시키려고 하는 노동운동 및 이론이 생디칼리슴이다.

이 사상은 노동자(전적으로 육체노동자)의 역할을 특히 중요시하고, 노동조합을 이러한 노동자의 이익을 가장 순수하게 대표하고 그들의 운동을 추진하는 것으로 본 데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생디칼리슴은 사회주의 정당의 의회 활동뿐만 아니라, 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생디칼리슴에서는 노동자의 직접행동이 있을 뿐이며, 이 경우 제네스트가 최고의 전술로서 중용된다. 제네스트야말로 자본주의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탈취하는 결정적인 수단인 것이다.

생디칼리슴을 이론화한 것은 소렐이며 그의 주저가 <폭력론>이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 프루동, 베르그송, 니체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반의회주의(反議會主義)와 행동주의는 당시의 노동자 및 지식인의 환영을 받았으나, 후에 그의 이론은 파시즘에 이용당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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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cho syndicalisme

사회주의의 정당의 의회활동을 배척하고 노동자의 직접 행동만으로 자본주의를 파괴하려고 하는 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쉽게 결합된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그것이며, 이 경우에는 새로운 사회에 있어서도 정치적 국가는 인정되지 않고 그 대신 노동조합의 연합체에 의한 경제 관리만이 인정된다. 이 사상은 1920년대에 특히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성행되었다.

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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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Sorel (1847-1922)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생디칼리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

셰르부르에서 태어나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중퇴하였다. 25년간 정부의 토목기사로 근무한 후 1895년부터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마르크스 주의의 영향을 받아 베른슈타인 주의에 반대하고 반민주주의·반의회주의의 입장을 취했으며 의회주의적 운동을 계급에 대한 배반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의회의 위선에 대해 폭력의 윤리성을 주장하고 그 구체적인 형태로서 노동조합의 제네스트(총파업)를 주장했다.

1910년경, 그는 프랑스 노동운동이 의회주의로 기울어진 데 실망하고 이에 반발하여 왕당파(王黨派)의 반민주주의 운동 '악시옹 프랑세즈'에 접근했으나 러시아 혁명과 함께 다시 사회주의로 돌아와 1919년에 <레닌 변호론>을 쓰고 사회주의자로서 죽었다.

그의 주저로는 <폭력론>(1908), <진보의 환상>(1908), <마르크스 주의의 분해>(1908) 등이 있다.

폭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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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力論 (1908)

생디칼리슴의 대표적 이론가 소렐의 주저.

1906년 <사회주의 운동>지에 발표되었던 여러 논문을 수록한 이 책은 생디칼리슴의 복음서로서 여러 번 판을 거듭하였다.

소렐은 '프롤레타리아 폭력'을 계급투쟁의 정당한 표현이라고 보고, '총파업'은 그 구체적인 발현형태(發現形態)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폭력의 윤리성을 주장하고,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를 통렬히 공격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폭력'은 결코 부르주아지의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반대하는 것이 된다.

또한 소렐은 총파업에 역사철학적 의의를 인정하고 '총파업의 신화(神話)'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대중이 받아들이는 신화가 없는 한, 어떠한 혁명운동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생디칼리슴의 총파업이 바로 이러한 신화라고 한다. 총파업은 노동자 대중의 가장 고귀하고 심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적 직관을 갖게 한다.

신화를 역사의 변혁과정에서 하나의 원동력으로 파악하는 그의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도 주목할 만한 관점이다.

프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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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의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

프랑스 동부 브장송의 통 만드는 집 아들로 태어났다. 인쇄소의 교정 등을 보면서 독학으로 다방면의 공부를 하고, 1840년에는 <재산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특히 책이름과 같은 질문에 대해 "재산은 훔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말은 유명하다. 이 책은 마르크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1844년 파리에서였으나 1846년 프루동이 공간한 <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에 대해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1847)을 써서 전면적인 비판을 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영구히 끊어졌다. 1848년의 2월혁명 후, 프루동은 국민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인민은행(人民銀行)'의 설립을 제창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프루동은 경제문제만이 아니라 정치나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사회주의의 기초에는 자유·정의·평등의 관념이 있고, 이에 호조주의(互助主義)·협동주의가 첨가된다. 한편 그는 노동자의 단결이나 정치 운동에 반대한다. 그것은 하나의 압제에 다른 압제를 대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사상은 아나키즘에 연결된다. 프루동 주의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이며, 프랑스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산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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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41)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출세작. 이 글로 그는 일약 유명해졌다.

프루동은 이 책을 프랑스 혁명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하며 무정부주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 프랑스 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그것은 한 인간의 주권(전체주의)에 대신하여 다수의 인간의 주권(민주주의)을 세운 데 지나지 않고, 양자는 모두 타자에 대한 의지의 강제라는 점에서 원리상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모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은 인간 억압의 사회적 기초인 재산제도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재산은 일체의 악의 근원이며, 따라서 재산의 사회적 평등 없이는 정치적 평등은 있을 수 없다. 프루동은 '재산은 훔치는 것'이라고 보는데, 법이 권리로 인정하는 재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근대적인 재산제도 밑에서는 첫째로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고용관계가 불평등한 교환의 관계이며, 이 불평등에 의한 이익이 축적됨에 따라, 둘째로 자본가가 분업과 협동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를 무상으로 손에 넣음으로써 훔치는 것으로서의 재산은 더욱더 축적되어 간다. 그런데 이것은 기구적(機構的)으로 촉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일체의 부는 수많은 노동자의 협업에서 나오는 '집합력(集合力)'의 소산이므로 집합력이 가령 자본가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라도 자본가의 독점에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귀속시켜야 마땅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집합력의 소산으로부터 자기의 생명과 자손의 유지에 필요한 부분을 노동과 교환하여 획득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대략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가진 이 책은 19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마르크스도 높이 평가하였다.

아나키즘(무정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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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chism 無政府主義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사회가 정말로 자유로운 사회이며, 따라서 모든 권력·권위를 부정하고 권력의 가장 완성된 형태인 국가는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고대 중국, 고대 인도에서 이미 아나키즘 사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포리테스(국가에 관심이 없는 자)를 찾아헤맨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세계사상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리는 스토아파의 창시자인 키프로스의 제논, 강대한 대국보다는 무기가 없는 소국에서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 노자(老子),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를 설파한 장자(莊子) 등은 고대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고대 아나키즘이 과거를 찬미하는 복고조(復古調)로 채색된 데 반하여 근대 아나키즘은 미래에 희망을 두고 있다. 근대 아나키즘은 근대사회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한 것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사상이다. 근대사회는 법과 국가와 자본제의 세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데 이 세 기둥이야말로 근대사회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원흉이며, 이 기둥을 쓰러뜨려야 비로소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가 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대를 넘어서는 방법을 둘러싸고 근대 아나키즘은 계몽적 아나키즘과 행동적 아나키즘의 두 유파로 갈라진다.

계몽적 아나키즘은 그 기둥에 직접 부딪쳐서 그것을 쓰러뜨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둥의 둘레를 파서 자연히 쓰러지게 하는 노선을 택한다. 곧 민중 자신의 자주적이며 자치적인 생활의식이나 집단조직을 촉진하여 감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고, 이것이 성숙되었을 때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사회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정의>(1793)의 저자 고드윈(1756-1836), '재산은 훔치는 것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 철저한 유아론자(唯我論者)인 시티르너(1806-56),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등이 계몽적 아나키즘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이에 대해서 힘으로 기둥을 쓰러뜨리려 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의 도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행동적 아나키즘이다. 행동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인 바쿠닌은 "파괴하는 정열은 또한 창조하는 정열이다"라고 하며, 근대사회, 특히 이를 지탱하는 세 기둥의 철저한 파괴 없이는 새로운 사회는 창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행동적 아나키즘 운동은 19세기 말경에는 암살·폭동·무장봉기를 전술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파괴=창조라는 사고에 의거한 전술이었다.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귀족 출신인 크로포트킨은 행동적 아나키즘 이론의 대성자로서 <빵의 약탈>(1892), <상호부조론>(1902) 등 많은 저술이 있다.

행동적 아나키즘은 20세기가 되면서 노동조합운동과 결합하여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으로 발전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혁명적 생디칼리슴이라고도 하며, 생디카(노동조합)에 의해 직접행동으로 근대사회의 세 기둥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결정적인 무기로 보는 것은 제네스트(총파업)이며, 정당에 의한 의회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근대 아나키즘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승리하자 한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후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는 소비에트·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예컨대 1936년의 에스파냐 내란에서 소비에트·마르크스 주의는 에스파냐 민중의 이익보다는 자기 나라의 국가이익을 우선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자유를 요구하는 헝가리 민중을 탱크로 탄압한 1956년 헝가리 의거 때였다.

또 제2차대전 이래 현저하게 강화된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를 불문하고 도대체 이래서 좋은가 하는 의문을 발생시켰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한때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아나키즘이 다시금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가라는 것, 국가와 자본제의 결합, 법·국가·자본제의 삼위일체에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이 아나키즘이었기 때문이다.

바쿠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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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러시아의 혁명가. 서구 아나키즘 운동의 지도자.

귀족 출신. 페트로그라드 포병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안 있어 퇴역하고 모스크바로 나와 스탄케비치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 그룹과 사귀고 독일 관념론을 연구했다. 베를린 대학에 유학한 후 파리로 가서 프루동, 마르크스, 리게(1802-80) 등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쿠닌의 국제적 아나키스트로서의 파란많은 생애가 시작되었다.

1848년 3월혁명이 일어나자 파리, 프라하, 드레스덴 등 각지에서 폭동을 선동하였으나 실패하고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1861년 시베리아를 탈출, 런던으로 갔다. 1863년 폴란드 폭동의 실패와 러시아에서의 반동의 승리로 말미암아, 슬라브 민족이 혁명궐기할 때가 다가왔다는 환상이 무너진 바쿠닌은, 나폴리와 제네바에서 국제 비밀결사의 조직화와 혁명적 아나키즘 이론의 탐구에 전념하였다. 1868년 제1 인터내셔널에 참가하였으나 마르크스파와의 격심한 투쟁 끝에 헤이그 대회에서 제명되었다(1872). 실의와 고독 속에서 베른에서 병사하였다.

바쿠닌은 국가권력을 절멸시키고 그 폐허 위에 자유로운 근로자 단체의 연합으로 이룩되는 비국가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어떠한 국가조직도 억압의 수단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고 자각적인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정치조직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최하층민의 폭동 등 직접 행동에 기대를 걸었다.

크로포트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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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tr Alekseevich Kropotkin

(1842-1921)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지리학자.

귀족 출신. 근위학교를 졸업하고 카자흐 연대 소속 장교로서 시베리아 지구의 지리학적 탐험대에 참가. 이 동안에 답사한 아무르강 유역과 만주 북부의 지리학·인류학상의 연구성과는 핀란드 빙하층의 조사와 함께 그의 지리학자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1872년 스위스 여행을 계기로 혁명가가 될 것을 결의하고 제네바에서 제1 인터내셔널과 접촉했다. 시베리아 핀란드의 농민, 쥐라 산지(山地)의 시계직공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체험한 것은 그의 아나키즘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1 인터내셔널에서는 바쿠닌파에 속했었고 귀국 후 나로드니키 운동에 참가,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874년에 체포되어 76년 탈출, 런던을 거쳐 스위스로 건너가 79년에 혁명적 신문<반역자>를 창간, 바쿠닌이 없는 서유럽에서 아나키즘 사상의 선전을 전개했다.

1883년, 프랑스 법정에서 5년 금고형이 선고되고 86년 은사에 의해 석방되자 런던으로 갔다. 러시아 혁명 후 귀국하기까지(1927) 런던에서 저술에 전념했다.

'대중의 창조성'과 '공동체 원리(共同體原理)'의 이상화(理想化)에 기반을 둔 크로포트킨의 '무정부 공산주의(無政府共産主義)' 이론은 바쿠닌의 전면파괴론(全面破壞論)과는 달라서 혁명에 의하여 폐지되어야 할 낡은 사회체제에의 윤리적·사회적 비판이며 무엇보다도 미래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무계급사회로의 이행기(移行期)에 있어서의 국가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곧 국가를 소멸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자치공동체(自治共同體)로 새로운 연합형태를 구성하도록 호소하였다. 상호부조(相互扶助)는 사회진화와 윤리적 진보의 주요인(主要因)이며, 이 요인의 작용을 받는 한 국가의 소멸은 '무정부 공산주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제1차대전 때는 조국방위전쟁을 지지하여 '계급협조'를 주장, 고립되었다. 11월혁명에 승리한 후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반대하면서도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의의는 인정했다.

아나키즘의 이론가로서 유능한 크로포트킨은 저서가 많은데 주저로는 <빵의 약탈>(1892), <상호부조론>(1902), <프랑스 대혁명사(大革命史)>(1909)가 있다.

상호부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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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互扶助論 (1902)

크로포트킨의 주저. 아나키즘 사상의 고전적 저작.

맬서스의 인구론, 생존경쟁에 의한 자연도태를 진화의 지배적 요인으로 보는 다윈 학설, 특히 T.H. 헉슬리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였다. 사회를 이루고 연합과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생활하는 종(種)이 적자(適者)로서 생존하고 동종간(同種間)의 개체적 투쟁보다는 유해한 환경에 대한 연합전이 중요하다.

동물계에 보편적인 이러한 생태를 사회생활에 적용한다. 착취자에 대한 투쟁은 진보적인 의미를 갖지만, 권력을 목적으로 하는 투쟁은 전횡과 폭정으로 전락한다.

미래사회(未來社會)는 국가의 출현으로 상실한 '코뮌의 원리'를 회복한 자치적 여러 단체의 자유로운 연합(聯合)이 아니면 안된다고 크로포트킨은 열렬히 주장한다.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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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ism

내셔널리즘은 극히 복잡·다의(多義)한 개념이다. 내셔널리즘 개념이 다의적인 것은 내셔널리즘의 기반을 이루는 네이션이라는 말 자체가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말의 국가·국민·민족이란 세 가지 뜻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국가는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구성요소로 하는 인위적(人爲的)인 구성체이다.

그 특색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정립되는 정치체(政治體)이며 권력구조라는 데 있다. 국민은 이 정치체 안에서 일정 주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것은 민족과는 달라 반드시 인종이라는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닌, 정치적으로 편성된 인간의 집단이다. 민족은 특정 인종 가운데 언어나 기본적 생활양식을 공동으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며, 국민과는 달라 자연적인 성격과 역사적 내지 사회적 성격을 아울러 가진다. 국가, 국민, 민족 이 셋 중 역사상 맨 처음에 출현한 것은 국가이다. 출현 당시의 국가는 근대적인 민족의식 위에 세워진 국가는 아니고 압도적인 무력(武力)과 종교적 권위 밑에 통합된, 아니 차라리 지배자의 권력에 종속된 인간의 집단이었다. 국가가 역사를 움직이는 단위로 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권력기구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백성이 스스로를 위해 국가를 지배하는 단계부터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백성은 비로소 국민이라 불린다. 즉 국민은 시민국가(市民國家) 내지 근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출현하는 것이다.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국민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다. 민족의 차이에 대한 의식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나 그것은 민족의 두 성격 중 자연적 성격에 대한 의식이며, 다른 일면인 역사적·사회적 성격에 대한 의식은 그보다도 나중의 것이다. 더욱이 민족이 국민에 대신하는 국가의 유일한 구성요소라는 자각과 주장이 행해지게 된 것은 유럽에서도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내셔널리즘이란 요컨대 네이션의 독립·통일 및 발전을 지향·추진하려는 사상과 운동의 총칭이거니와 내셔널리즘의 담당자를 네이션의 세 뜻, 즉 국가·국민·민족 중 어느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것은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다. 국가주의란 국가를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 생각하며 그 권위와 의사에 절대 우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려는 사상과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국민주의는 국민의 이익과 권위를 옹호하고 확립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근대국가의 형성을 지향하는 사상과 운동을 말한다고 하겠다. 민족주의는 민족을 제일의적으로 생각하며 그 독립과 발전을 꾀하려는 사상과 운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車 基 璧>

근대 내셔널리즘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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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 nationalism-展開

E. H. 카는 근세 이후의 내셔널리즘의 발전과정을 3기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nationalism and after). 제1기는 문예부흥 이후의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빈 회의로 끝나는 시기이다. 제2기는 프랑스 혁명의 소산(所産)을 계승하면서 1차대전을 거쳐 베르사유 강화회의로 끝나는 시기이다. 제3기는 1870년 이후에 시작되는 국가의 근대적 통일의 소산을 이어받아 1차대전에서 2차대전의 발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는 시기이다.

제1기는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에서 시작된다. 절대주의 국가들이 중상주의 정책

추구로 인한 각 국가간의 격심한 경합에서 근대 내셔널리즘의 맹아(萌芽)를 본다. 그러나 그것과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결정적 차이는 국민적 요소의 결여에 있다. 프랑스 혁명은 그러한 절대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백성 스스로가 백성을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려고 단행한 혁명이다. 이에 비로소 국민이 성립하였고 근대 내셔널리즘의 확고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프랑스 국민에 힘입어 거의 유럽 전역을 정복하였고, 이에 따라 근대적 내셔널리즘이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제2기는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戰後) 처리로서의 빈 체제(그것은 대국의 국가적 이기주의에 의거해서 유럽을 정치적으로 재편성한 것이었다)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하여 1차대전의 발발로 정점에 달한다. 이 시기의 내셔널리즘의 특색은 1차대전의 발발에 의해서 상징될 수 있다. 즉 그것은 1870년 이래 점차 성립한 국민국가의 권력증대 욕구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경제권과의 모순이 빚어낸 전쟁이었다.

제3기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하여 1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으로 시작된다. 베르사유 체제는 몇몇 강대국의 국가이익에 희생되고 있는 소수 민족의 복잡한 요구가 1차대전을 야기시켰다는 데 대한 반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민족자결 원칙은 전승국에는 적용되지 못함으로써 그런 원칙에 의거하는 세계의 재편성은 이룩되지 못했다.

카는 이 시기의 내셔널리즘의 특색을 이루는 요소들로서 1) 새로운 사회층이 국가의 실질적인 성원 속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사실 ―― 국가의 사회화, 2)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 또다시 눈에 띄도록 결합하게 되었다는 사실 ―― 경제정책의 국가화, 3) 국가의 수가 증가한 사실 ―― 내셔널리즘의 지역적 확장 등 셋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것이며 나머지 둘은 그것에 부수하거나 조장하는 데 불과하다. 즉 보다 많은 국민이 국정(國政)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과, 그 경제적 안정의 욕구를 국가권력에 의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요구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상호의존 관계를 수립하고, 그것이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조정불능의 극점에 이르렀을 때 2차대전이 발발했다.

이렇게 보면 카가 말하는 내셔널리즘의 제1기 중 첫시기인 절대주의시대는 국가주의의 시기, 제1기 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서 제2기에 걸쳐 국민주의의 시기, 그리고 제3기는 국민주의와 민족주의는 병진하지만, 민족주의가 역사의 동인(動因)으로서 새로 등장했다는 의미에서 민족주의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車 基 璧>

현대 내셔널리즘의 기본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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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 nationalism-基本動向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듯이 내셔널리즘은 주로 근대유럽에서 국가·국민·민족으로 그 담당자를 옮김에 따라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의 양태(樣態)를 지니면서 전개되었지만, 2차대전 후에는 민족해방이라는 현안(懸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아(亞·阿) 후진지역에서 노도와도 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전후 내지 현대의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면 자연 아·아의 내셔널리즘 ―― 민족주의를 주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아 신생국의 민족주의는 기실 민족 없는 민족주의이다. 그런 나라들은 대개 서구제국의 식민지가 독립한 것이지만, 식민지 지배에 편리하도록 그어진 경계를 그대로 국가의 경계로 하여 독립했기 때문에 국가의 경계와 민족의 경계가 일치되지 못한다. 원래 신생제국에서의 '민족적' 계기는 대개 독립을 위해 결집된 심정윤리(心情倫理) ―― 운명공동체적 심정에 의거하는 것이었으므로 독립을 달성하면 여태까지의 일체감은 당장 청산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 일체감을 그런대로 공중분해(空中分解)시키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1세대의 지도자가 가지는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이 제1세대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어떤 이유로 유효성을 상실했을 때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되고 말았을 민족에 다시 한번 효력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 재상징화(再象徵化)를 통해 민족주의가 재차 고취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아 신생제국은 우선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의 내실(內實)이 결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신생제국에서의 민족이 심정적 허구이면 허구일수록 시간이 경과하면 자동적으로 민족이 '국민'으로 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국민이고자 하는 계기와 의사가 '민족' 내부에 결여되어 있으므로, 신생제국에서의 '국가'는 그 대체물(代替物)을 찾아 '국가주의'적 국가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국가주의에는 계약적인 권력위탁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자연 비민주적인 독재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다음 경제적으로는 모처럼 얻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져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식민지적 종속경제를 지양하고 국민경제를 확립함으로써 자립경제를 이룩하려는 신생국가의 경제적 민족주의는 1970년대에 이르자 비동맹국회의나 유엔 무역개발회의와 같은 민족주의 형태의 추세로 뒷받침되어 자원민족주의의 집단화 형태를 취하면서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車 基 壁>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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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cism

파시즘 운동은 1919년 무솔리니가 조직한 '전투적 파쇼'(1921년대에 '파시스트당'으로 개칭)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부터 40년대 전반에 걸쳐 유럽, 남미 제국, 극동에서도 같은 운동이 일어났다.

발생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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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生-原因

파시즘 발생의 기본 요인은 제1차 대전 후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의한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곧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관성적 공황(慣性的 恐慌)과 사회혁명의 진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금융독점자본(金融獨占資本)의 폭력적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국제적인 대립과 전쟁의 위기가 심각해져서 국내정치는 항상 불안정하고 계급대립이 격화된데다 정치·경제의 불안, 부패에 대한 도시 소시민이나 농민의 절망과 고립감, 인텔리겐치아의 니힐리즘·정치적 무관심이 겹쳐 강력한 권위적 리더십을 대망하게 되어 파시즘 발생의 원인이 조성된다.

그리고 제1차 대전 후 파시즘이 일어난 나라를 보면, 근대국가의 형성이 늦게 시작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급격히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져 사회제도가 이질적이며, 특히 농업 부문에 있어서 봉건적 여러 관계가 뿌리깊게 남아 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전통과 경험이 얕은 나라들(독일·이탈리아·일본), 또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현저히 뒤떨어진 나라들(에스파냐·포르투갈) 등이다.

발전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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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展-形態

파시즘의 발생이나 진행의 속도, 형태는 각국이 놓여 있는 일정한 조건에 따라 다른데, 어쨌든 이러한 나라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일정 한도의 긴박성을 띠며, 혁명의 전위 조직 파괴를 주목적으로 하는 반혁명조직이 국가 내부에 비공식적인 집단, 또는 민간의 정당·결사로서 등장한다. 지도층은 현역·예비역 장교, 우익 정치가, 폭력단 간부 등으로 그 주변에는 정상적인 사회진출 루트에서 탈락한 지식인·제대군인·하급관리·소매상점원 등 불만분자들이 결집한다. 이러한 운동은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에 대항하되, 그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여 본격적인 파쇼 정당(독일·이탈리아)이 되고, 정권을 수립하는 것도 있으며(이것이 전형적인 것으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일본과 같이 천황제(天皇制)에 있어서의 군사·관료기구의 독자성을 확대 활용하여 파쇼적 기구로 전용하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도 있다.

파시즘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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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cism-人權

파시즘의 주된 목표는 혁명 전위조직의 철저한 파괴에 있으며,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파시즘이 정말 두려운 점은 그러한 목표달성 과정에서 지배체제에 반대하는 민중의 모든 자극적 집단조직화를 위협과 폭력에 의해 방해하고, 사상·양심·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자유권을 박탈하며, 또 이러한 인권을 보장하는 여러가지 민주적 제도들, 예컨대 의회제·의원내각제·재판제도·지방자치제 또는 정당제·노동조합조직을 파괴하면서 파시즘의 정통적 이데올로기를 대중의 생활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내면으로부터 획일화하면서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다.

따라서 파시즘 지배는 단순히 혁명의 전위조직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일체의 민주주의적 사상이나 제도까지 철저히 파괴한다. 그리고 자기국가·자기민족을 지상이라고 하는 초국가주의·배타주의·선민사상·지도자 원리에 입각하는 대중의 자발적 사고에 대한 경멸, 부인의 사회적·정치적 활동능력의 경시, 전쟁의 찬미와 군국주의, 사회과학의 위험시와 군사과학의 중요시 등 일련의 정신적 경향이 나타난다. 제2차대전이 파시즘과 전 민주주의 국가의 대결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세계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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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聯邦

국가의 주권을 부정 내지 제한하여 각국을 구성원으로 성립하는 연방제의 세계국가(世界國家).

이 세계국가는 세계정부를 갖게 되므로, 세계연방을 실현하려 하는 운동은 '세계연방운동' 또는 '세계정부운동'이라고 불린다.

이 사상은 계몽주의 시대의 칸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영구평화론(永久平和論)을 사상적 원류로 한다. 제1차대전 후 국제연맹이 여러가지 결함으로 말미암아 세계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제창되었다. 제2차대전 후 세계연방운동은 급속히 보급되어 각국에서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러한 운동은 대전 중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原爆)이 투하된 것, 핵무기 출현으로 인한 인류멸망의 위험성 증대 등에 의해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세계연방운동은 구체적인 제1보를 내디딘 것이다.

1946년, 14개국의 세계연방주의자가 룩셈부르크에 집합하여 '세계연방정부를 위한 세계운동'을 조직했다. 다음에는 스위스의 몬트루에서 23개국의 51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제1회 총회를 열고 '몬트루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다시금 세계전쟁이 일어나면 인류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세계연방정부의 수립에 의해서만 인류는 영원히 전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연방정부 창설의 6개 원칙으로서 전 세계의 가입, 국가 주권의 제한, 세계법의 적용, 초국가군(超國家軍)의 창설 등을 열거하고 있다.

1948년에는 세계헌법의 '시카고 초안'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목표로 하는 획기적인 세계연방안이었다. 그 내용은 의무와 권리의 선언, 세계정부의 권한, 연방회의, 대통령, 입법부, 대법원과 최고재판소, 호민관(護民官)과 세계법 등이다. 그 특징은 정의를 평화의 기초로 하고 각국 군대를 대신하는 세계경찰군의 창설, 인종적 차별의 폐지, 빈곤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중점으로 하고 있다. 1956년에는 명칭을 '세계연방주의자 세계협회'로 개칭하였다.

1963년 8월에는 도쿄에서 제11회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군비철폐의 평화유지면' '세계연방의 도의면' 등이 토의되고, "전쟁 없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즉시 행동을 취하라"는 '도쿄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세계연방운동은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착실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연방제의 세계국가란 이론적으로는 세계의 인민이 주권을 갖는 것이며, 세계헌법 및 세계법은 모든 세계의 인민을 직접 구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단계에서 세계국가의 건설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 크게 대립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세계연방을 세계적 단일국가로 구상하여 각국의 군사권이나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모든 통치권을 최대한으로 세계국가에 집중시키려는 견해이다. 둘째는 세계연방을 세계기구로 보고 항구평화 실현을 위해 각국의 주권 중에서 군사권만을 세계국가에 집중시키려는 견해로,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국제연합의 기구를 근본적으로 재편성하여 국제연합을 개조해서 세계연방을 실현시키려고 한다. 최근에는 후자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세계연방운동은 국제적으로는 '세계연방주의자 세계협회'와 각국 국회의원들의 단체인 '세계정부를 위한 국회의원 세계협회'가 있다.

현재의 세계정세로 보아서 연방제의 세계국가 실현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그러나 세계연방운동은 세계에 항구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장래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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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sm

'휴머니티'라는 말은 인간성, 인간다움, 인류, 자비, 친절, 교양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휴머니즘'은 이러한 것 중의 어느 것을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사상 내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휴머니즘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어떠한 의미에서든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역사적·사회적인 운동으로서 나타난 것은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르네상스기의 일이었다.

중세의 이상적 인간상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하느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학문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행복, 연애, 가정생활 등의 인간적인 기쁨은 물론 인간성을 신장해 가는 것은 아직 충분히 인정되지 못하였다. 때로는 이러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신 중심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인간다운 인간을 동경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했던 고대인(古代人)들에게서 순수하고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로마의 문예를 배우고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교양)에 의해 신 중심의 사고방식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해방되려고 하였다. 실로 고대야말로 그들의 동경 대상이요, 이상향이었다. 르네상스가 '문예부흥'이라 번역되고 이 시대의 휴머니즘이 '인문주의(人文主義)'라고 불리는 까닭도 이 점에 있다. 우리는 그 대표를 페트라르카나 에라스무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또 인간다움이나 인간성의 해방을 예술이나 자연탐구에서 구한 것이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였다. 그들은 개인의 능력, 개성, 생명의 충분한 발현에서, 곧 '만능인(萬能人)'에게서 이상적 인간상을 찾았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들은 도시(예컨대 피렌체)의 상인이나 귀족을 파트롱으로 하는 문화인이었다. 그들은 고전적 교양에 숙달하기는 하였으나 현실을 비판하고 해방시키고, 인간다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만의 자유나 인간다움에 자아도취되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을 '귀족적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을 거쳐, 서구에서는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 시민사회의 사상적 원리는 개인의 자유이며, 이성이며, 합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적 자유주의 또는 이성적 합리주의, 곧 인간(개인적) 중심주의의 정점이 17, 18세기의 계몽주의이다. 그 대표적 사상가가 로크, 흄, 스미스, 루소, 볼테르, 칸트 등이다.

이성이나 합리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는 계몽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성의 미적(美的)·정서적인 조화로운 발전을 중요시하는 것이 '신(新)휴머니즘'이다(빈켈만, 레싱, 헤르더, 괴테, 실러, 훔볼트 등이 대표자이다). 계몽주의나 신휴머니즘을 우리는 '시민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이윽고 새로운 모순에 봉착했다. 이 근대시민사회는 인간의 자유·평등이나 풍요한 진보·발전을 추구하고 그 실현을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생활은 매일매일 금전에 지배되고, 돈을 찾아 헤매고 있다. 특히 일하는 사람들(노동자)은 가난과 실업과 병고와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훌륭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는데도, 따라서 새로운 불평등이나 새로운 예속 관계가 생기고, 거대한 전쟁에 의해서 사람들의 생존조차 위협받고 있다. 인간은 인간다움에서 쫓겨나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쫓아 광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엇이 우정이냐! 무엇이 자유냐! 무엇이 평등이냐! 무엇이 평화롭고 풍요한 사회냐! 무엇이 교양이냐! 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것이 소외 내지 인간성 상실이라고 말하는 문제이다. 이 시대, 이 현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가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된 상태, 소외(인간다움에서 쫓겨나 인간다움을 상실한 것)는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에서의 인간소외의 근본적 원인을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의 구조 그 자체 속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근대의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이 기계화·대중화·평범화·일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상실한 슬픈 상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여 자기 자신의 자주성·개별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실존주의적 휴머니즘). 또는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를 관철시킴으로써(니체·사르트르), 또는 역으로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함을 거부하고 겸허하게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며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충실하게 함으로써(키에르케고르·야스퍼스·하이데거, 마르셀).

그러나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해, 특히 핵무기의 출현에 의해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놓여 있다. 체제나 사상의 차이를 넘어서서 세계평화가 오늘날처럼 요청되는 때도 없었으며, 인류의 평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오늘날처럼 절실히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없었다. '인류 휴머니즘'(톨스토이·로맹 롤랑·토마스 만·슈바이처 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새로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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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에비치) 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

러시아의 작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백작 집에서 태어나 순진하고 시적인 유년시대를 보냈다. 1844년 카잔 대학의 동양어학과에 입학, 다음해 법과로 옮겼으나 분방한 사교와 향락 생활 때문에 중도 퇴학. 그 동안에도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저작을 애독했는데, 특히 루소의 영향은 그 후의 톨스토이의 행동·사상·작품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851년 카프카스에서 육군에 지원하고 산지 토벌작전(山地討伐作戰)에 참가하는 한편 <유년시대>(1852)를 썼다. 1854년 크림 전쟁에서 민중 속에 잠재한 영웅적 정신과 전쟁의 허망함을 체험했다. 퇴역 후 유럽 여행에 나섰으나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가 깊어진 채 귀국, 정치적 개혁보다도 인간적 개혁에 관심이 깊었던 톨스토이는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농민 자제의 교육에 종사하였고, 교육사업에 대한 정열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1862년 18세인 소피아와 결혼. 그 행복한 가정생활과 세와스트포리의 공방전(攻防戰)에서 얻은 전쟁관, 인생의 의의나 인간의 사명에 대한 고찰이 세계문학에서도 희귀한 웅대한 로망 <전쟁과 평화>(1864-69)로 결실을 맺고, 제2의 대작 <안나 카레니나>(1875-77)에 의해 예술적 완성의 정점을 보였다.

1880년대가 되면서 가끔 자살의 유혹을 받을 만틈 톨스토이의 사상적 동요는 커져서, 드디어 종교에서 구원을 구하게 된다. 그 동안의 구도자 톨스토이의 내면적인 드라마를 <참회록>(1880-82),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반 이리이치의 죽음>(1886)이나 최후의 장편 <부활>(1898-99)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910년 구도자로서의 자기모순과 가정불화를 피하기 위해, 농민으로서 소박한 생활을 할 생각으로 가출했으나 얼마 후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톨스토이 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은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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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극작가·평론가·평화운동가.

부르고뉴주의 클람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인 가톨릭 신도.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로마 유학 후 모교 및 파리 대학의 음악사 교수. 이 무렵부터 극작을 시작하여 <성왕(聖王) 루이>(1893), <아에르트>(1898), <이성의 승리>(1899)를 '신앙의 비극' 3부작으로 썼다. 또 '고뇌를 이기고 환희에 '이르는 <베토벤의 생애>(1903)나 미켈란젤로, 톨스토이 등 위대한 영혼의 전기를 썼다.

이 무렵 불후의 명작이라고 하는 <장 크리스토프>(1904-12)의 집필에 전념. 이 작품에서 롤랑은 베토벤이 모델이라고 하는 한 음악가의 영혼 형성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보불전쟁으로부터 제1차대전 직전까지의 유럽 사회와 문명을 냉혹하게 비판하여 소설가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롤랑은 제1차대전에 대해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하여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스위스에서 반전평화(反戰平和)를 주장하고 정치평론집 <전쟁을 넘어서>(1915)와 소설 <피에르와 류스>(1920) 등을 썼다.

제2의 대하소설 <매혹된 혼>(1922-33)에서는 20세기 초엽부터 파시즘의 징후가 불가피한 것으로 증대되어 가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이 개인주의에서부터 사회주의로 탈피하고 그 영혼이 환상에서 해방되어 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파시즘이 대두됨에 따라, 롤랑은 점차 공산주의에 접근하여 문학활동과 함께 반파시즘·반자본주의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제2차대전 중에도 나치스에 대항하면서 정신적 자서전 <내면의 여로>(1942) 등을 저술하고 파리 해방 후(1944)에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휴머니즘을 싸워서 지킬 것을 주장하고 실천한 로랑은 정녕 금세기 최대의 전투적 휴머니스트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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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Thomas Mann (1875-1955)

독일 태생의 20세기 소설가·평론가.

뤼베크시의 부유한 곡물상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형 하인리히 만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실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뮌헨으로 가서 화재보험회사의 견습사원이 되었다. 얼마 후 처녀작 <전락(轉落)>을 발표, 시인 데멜의 인정을 받고 회사를 퇴직. 1901년 자기 집의 몰락을 그린 장편소설 <부덴부로크가(家), 어느 가족의 몰락>을 발표하여 문단에서의 지위를 확립. 2년 후에는 주옥 같은 단편소설 <토니오 크레겔>을 발표. 30세에 수학교수의 딸 카치아와 결혼. 얼마 후 <대공전하(大公殿下)> <베니스에서 죽다> 등을 완성. 1912년 부인이 폐병으로 스위스의 고원요양소(高原療養所)에 입원하자 부인을 간호하며 요양소에서 3주간 체재. 이때의 견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 장편소설 <마(魔)의 산>이다. 제1차대전이 시작되자, 조국을 변호하기 위해 보수적 입장에서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등을 발표, 논쟁을 통해서 거꾸로 민주주의가 휴머니즘의 정치적 표현임을 알았다. 1924년 <마의 산>을 출판. 그 후 1943년에 완성되는 4부작 <요제프와 그 형제>를 쓰기 시작했다. 1929년 노벨 문학상 수상. 그 해에 파시즘을 예고한 단편소설 <마리오와 마술사>를 발표.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외에 강연 여행을 나가 그대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1938년 아메리카로 이주. 대전 후 장편소설 <파우스트 박사>를 출판, 또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괴테에 관한 평론을 썼다. 1952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단편소설 <기만당한 여자>, <사기사 페릭스 쿠루르의 고백> 등을 발표. 1955년 실러 150년제 때에 동서 양독일에서 강연. 8월 취리히에서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만의 사상적 발전은 대개 3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니체나 쇼펜하우어 등의 영향이 강한 시기로 생(자연)과 정신, 시민과 예술가를 대립 관계로 보는 인생관을 볼 수 있다. 중기는 결혼으로부터 <마의 산> 완성까지의 시기로, 사랑에 의해 대립적 인생관을 극복하려고 한다. 후기는 <마의 산> 이후로 정치적으로는 나치즘에 저항한 시기, 초기의 페시미즘을 극복하고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에 서서 새로운 휴머니즘의 사상을 전개했다.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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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Schweizer (1875-1965)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철학자·음악가·의사.

독일 영토 엘자스(현재는 프랑스의 알사스)주의 카이저스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 27세에 동대학 신학과 강사. 30세 때 탄생일에 아프리카에서 의사가 되어 흑인구제사업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13년 3월 부인과 프랑스령 람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개원. 제1차대전 발발과 함께 포로로 자택에 구금되었다. 이 대전에 직면하여 문화의 재건을 생각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 <문화철학>의 기초 이념 '생의 외경(畏敬)'을 터득한 다음 독일에 돌아왔다. 1919년 스웨덴의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연속강연을 의뢰받고 다음해에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강연이나 오르간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4년 2월,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병원을 재건하고 점차 확대시켜 나갔다. 1928년 괴테상 수상, 제2차대전 중 병원의 경영이 어려웠으나 여러 곳에서 보내온 원조로 병원을 유지하였다. 1953년 10월, 전년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다음해 11월 수상. 말년에는 원수폭(原水爆) 실험 금지를 호소하였다. 1965년 9월, 람바레네의 병원에서 '밀림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던 90년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후반생을 람바레네에서 보낸 관계로 전문적 저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철학·신학·음악 등 각 분야에 명저를 남기고 있다. 철학에서는 학위논문 <칸트의 종교철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주저 <문화철학>에서는 현대문화의 퇴폐를 비판하고, '생명의 외경'의 윤리에 의한 문화재건을 역설했다. '생명의 외경'이란 생명을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예수전연구사>, <메시아성(性)의 비밀과 수난의 비의(秘義)> 등으로써 신약학(新約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음악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파이프오르간의 명연주가로 알려져 있다. 저작으로서는 '음(音)에 의한 화가'라는 새로운 바흐상(像)을 확립한 명저 <바흐>가 유명하다. 기타 <오르간 제작과 오르간 기술> 등이 있다.

나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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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이 책은 슈바이처가 56세 때 쓴 반생의 자서전.

슈바이처는 행복했던 유년시대부터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경영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자기의 생활체험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몰락을 우려하는 한 사람으로서 문화의 퇴폐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간단하기는 하지만 '생명의 외경'에 의한 문화 재건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문명비평서이다.

내용은 유년시절,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의 학문과 예술의 연구, 원시림의 의사가 되려는 결심, 의학 공부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 후의 람바레네에서의 병원 개원, 제2차대전 중의 포로생활, 스웨덴으로부터의 연속강연의 의뢰, 람바레네 병원의 재건 등이 간결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끝으로 현대의 정신적 퇴폐에 대해서 저자는 '생명의 외경'에 의해서 인생의 기초와 방향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생명의 외경'에는 체념, 세계와 인생에 대한 긍정,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나의 인식은 비관적이지만, 의욕과 희망은 낙관적이다"라고 인류의 장래에 대한 확신을 휴머니스트의 입장에서 힘있게 선언한다.

이 책은 슈바이처의 생애와 사상을 아는 데 가장 적합한 책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독서이다.

문화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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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哲學 (1923)

슈바이처의 주저.

저자는 24세 때, 어떤 회합에서 "우리들은 아류자(亞流者)가 아닌가?"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현대 문화의 분석과 비판을 '우리들 아류자'라는 제목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1차대전에 직면하여 문화재건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한 지 얼마 후 '생명의 외경'이라는 기초 이념을 파악하고 <문화철학>의 집필에 착수했다. 문화철학의 구상은 4부로 되어 있다. 제1부 <문화의 퇴폐와 재건>, 제2부 <문화와 윤리>, 제3부 <생명의 외경>의 세계관, 제4부 <문화국가>에 대해서 등이다. 제1부와 제2부는 출간되었으나 제3부와 제4부는 미간이다.

저자에 의하면 문화는 몰락하고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은 이상주의적 세계관의 상실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개인과 국가의 물질적·정신적 진보가 실현되어, 그것이 개인의 내면적 완성에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문화관을 완성시키고 내부에서 기초를 부여하는 것이 '생명의 외경'이다. '생명의 외경'의 윤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외경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생명을 외경하는 것이다. 이 근본법칙에서 생기는 문화신념(文化信念)에 의해 문화는 재건되는 것이다.

<문화철학>은 슈바이처의 대표적 철학서 및 문명비평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니힐리즘(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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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hilism

虛無主義

기성의 가치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니힐)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

우주·인생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본래의 니힐리즘은 19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곧 서구 근대 시민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그 후에 올 장래의 가치에 대해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있어서 소시민층의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시민사회를 역사적 진보의 완성으로 성화(聖化)시키는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철학은 그리스적 지성과 유대적 신앙의 대담한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강제적인 결혼은 중매자인 헤겔의 죽음과 함께 파탄을 일으켰다. 합리적·실증적 정신의 발달에 의해 그때까지 가치 목적을 한몸에 집중시키고 있던 신에의 신앙이 상실되었을 때, 그 후에 남겨진 적나라한 자연의 실상(實相)은 가치의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니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무한한 불안과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 철학에 반발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근대시민들의 생을 잠식하고 있는 니힐한 기분이 짙게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또 헤겔 좌파의 맹장 포이어바흐의 무신론(無神論)을 철저히 밀고 나가 강렬한 에고이즘의 입장을 세운 독일의 '자유파(自由派)' 사상가 슈티르너의 자리를 무(無) 위에 놓음으로써 자기 이외의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향수하려는 무정부주의적 니힐리즘 철학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니힐한 시대풍조는 드디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1)의 청년 주인공 바자로프에 의해 니힐리스트라는 하나의 인간상으로까지 결정(結晶)되었다. 철저한 과학적 실증주의 입장에서 일체의 기성 질서나 가치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 자유주의를 투르게네프가 '니힐리스트'라고 명명한 이래로 니힐리즘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신인(神人) 예수에 대한 소박한 신앙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신(人神)의 입장에서 서려고 하는 니힐리스트들의 삶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필(靈筆)에 의해 신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무서운 인격분열의 절망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사조로서의 니힐리즘의 저류를 철저히 적발하여 이를 명확한 하나의 사상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니체로서, 니체는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고귀한 자가 비소(卑小)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본래의 가치체계라고 하는 권력의지설(權力意志說)의 입장에서 니힐리즘을 분석하여 '수동적(受動的) 니힐리즘'과 '능동적(能動的) 니힐리즘'의 두 유형을 발견한다.

'수동적 니힐리즘'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니힐리즘은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능동적 니힐리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니힐리즘'이야말로 니힐리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확실히 근대 합리주의의 문화는 여러가지 형태로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를 일으켜서 잠재적인 니힐리즘을 준비하고 있다. 니힐리즘은 이 잠재적 니힐리즘과 성실하게 대결하여 거기에 숨어 있는 우상숭배적인 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진실한 가치의 탄생을 이룩하려고 한다.

물론 니힐리즘 자체는 환영할 만한 손님은 못되지만 적어도 현실도피적인 무관심주의나 찰나적인 향락주의보다는 훨씬 진지하고 성실한 생활태도의 소산인 것이다. 타협을 거부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만이 우상숭배적인 삶의 허망함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허무를 우러르고 허무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허무를 허무로서 직시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도 역설한 것처럼 현실의 삶이 허무에 잠식되고 있을 때, 이러한 삶에 대해 절망하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할 수 없는 중증(重症)의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은 거기에 안주할 서식처는 아니지만, 진실한 삶에 도달하기 위하여 경과해야 할 현대인의 필수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전체적 목표와 그 목표달성을 위한 온갖 부분적 수단의 본말관계(本末關係)를 전도하는 것이 잠재적 니힐리즘의 참된 원인이다. 이러한 가치전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는 인생을 위한 합리(合理)이지, 합리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생의 철학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니힐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의해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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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의 작가.

스파스코에의 부유한 지주의 2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지주의, 특히 전제적인 어머니의 농노에 대한 학대를 보고 농노제(農奴制)에 대하여 증오를 품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묘사와 서정성(敍情性)을 바탕으로 농민의 비운(非運)에 대한 동정과 농노제에 대한 증오를 그린 투르게네프 문학은 이렇게 싹튼 것이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페테로그라드 대학으로 옮기고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여 헤겔 철학을 연구. 유학 중에 스탄케비치, 바쿠닌 등과 알게 되고, 귀국 후에는 벨린스키, 게르첸 등과 사귀었다. 평생의 연인 비아르드 부인(프랑스의 오페라 가수)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52년 단편 시리즈 <사냥꾼 일기>(1847-52)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필치로 교묘히 그리면서도 농민의 어두운 비참과 아름다운 인간성을 겸손한 필치로써 리얼하게 그렸다. 그것은 당시 러시아의 기본적인 사회제도인 농노제에 대한 비판이며 날카로운 고발이었기 때문에 그 무렵에 쓴 고골리에 대한 추도문을 구실로 관헌으로부터 1년여의 칩거 명령을 받았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외국(주로 프랑스)에서 보내고 플로베르를 위시하여 모파상, 도데 등과 친교를 맺었으나 그 동안에도 그의 관심은 러시아 사회의 동향에 쏠려 있었다.

1855년 장편소설 <루딘>으로 러시아 문단에서 부동의 지위를 얻었다. 이어 <귀족의 집>(1858), <전야(前夜)>(1860) 등에서 귀족 인텔리겐치아의 '사냥꾼'으로서의 역사적 운명과 높은 이상을 행동에 결부시키는 새로운 타이프의 평민 인텔리겐치아를 그렸다.

1860년대 유물론의 대두와 잡계급(雜階級)으로부터 지식층이 진출하는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태동을 정확히 파악한 투르게네프가, 시대의 과도기에 나타나는 니힐리즘을 테마로 귀족적 문화를 대신할 새로운 민주적 문화의 도래와 그 담당자를 힘있게 형상화한 것이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1862)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탁마한 소품집(小品集) <산문시(散文詩)>(1882)에도 러시아의 운명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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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러시아의 작가·사상가.

군의관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페테로그라드 육군공과학교를 졸업했으나 문학에 뜻을 두고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5)에서 짓밟힌 개성 속에 간직된 깊은 인간성을 묘사하여 비평계의 절찬을 받았다. 그 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페트라셰프스키의 비밀조직에 가담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계획적인 특사로 집행 직전에 사형을 면하고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보냈다.

이 유형지에서의 경험이 복역 후의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 결실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시베리아 체험의 정밀한 관찰에 의한 농노제의 고발이 있고, 인간의 고뇌와 운명에 대한 강한 관심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는 정신적 좌절, 사회주의적 환상의 파탄 등 그의 세계관에 깃들여 있던 비극적 모순의 성숙된 전환을 볼 수 있다. 간질 발작이 잦아지고, 도박에 열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사회평론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는 1870년대에 걸쳐 슬라브주의에 가까운 '대지주의(大地主義)'의 반동적 입장에서 러시아가 가야 할 독자적인 길과 구세주적 사명을 제창하고 그리스정교(正敎)에 입각한 계급협조와 도덕적 자기완성의 철학을 주장하고 있다.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 <미성년>(1875), <카라마조프 형제>(1875-80) 등 대표작에는, 러시아와 서유럽에서 사회적 여러 관계가 격심하게 붕괴되고 있던 시대의 현실과 사회사상·인간심리와의 날카로운 모순, 인간의 혼의 고뇌가 예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세기(世紀)의 아들입니다. 불신과 회의의 아들입니다. 오늘까지, 아니 관이 덮여질 때까지(나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이러한 갈망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두려운 고민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 갈망은 나에게 반대 논증이 증가하면 할수록 더욱더 영혼 속에서 강렬해집니다."

이러한 비극적 모순은 잔인과 온순, 폭력과 무저항, 무신론과 신앙, 악과 선에의 인격이 분열로 나타나 심리분석과 예술적 형상을 통해서 인간성의 깊은 곳을 엿보게 한다.

모순에 찬 그의 예술적 방법은 세계의 문학과 미학(美學) 사상에 복잡한 영향을 끼쳐 실존주의 사상의 한 기점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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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

자유주의는 17, 18세기의 시민혁명기(市民革命期)에 근대 시민계급의 중심적 사상 원리가 되고, 그 후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사상 내용에 변경을 가하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조류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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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的自由主義

자유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사상 원리이므로 시민혁명의 승리로부터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확립기에 걸쳐서 대략 대성된다. 사상적 계보로서는 홉스, 로크, 루소, 페인 등의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으로부터 시작되어 벤담, 밀 등의 공리주의(功理主義)에 의해 확립된다. 그것은 신분제적(身分制的)인 봉건사상에 대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평등이라는 사상을 근저에 갖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정치적 자유와 국민주권주의(國民主權主義), 인신(人身)의 자유 등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그 사상원리는 현대 여러 국가의 헌법에서도 자유권적 기본권(基本權)으로서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그러나 시민혁명을 지도한 것은 근대 부르주아지였으므로, 여기서의 자유는 당연히 일부 사회층의 특권적 자유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국가나 정부는 자유·평등한 개개인의 자발적인 동의 계약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국민 주권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선거권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었다. 또 '야경국가관(夜警國家觀)'이나 '사유재산의 불가침', '계약 자유의 원칙'만 하더라도 당시 급속히 자본을 축적하여 산업자본주의의 확립에 매진하고 있던 부르주아지에 적합한 이론이었다. 따라서 산업자본주의가 확립되고 자본과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대립이 격화되는 1860-70년대 이후,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여러 국가에서 커다란 수정을 불가피하게 겪었다.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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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自由主義

자유주의 전환은 주로 경제적 자유의 면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자유주의의 중추적 이론이었던 '사유재산 불가침'의 원리는 일부 자본가 계급에게는 적합한 것이었지만, 무일푼 노동자 계급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특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회의 태반이 괴로움을 받는 것은 민주주의에 배치된다 하여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는 재산권도 제한을 받는다는 사상이 등장하였다. 또 유산자 계급이 납부한 세금을 세 부담을 갖지 않은 경제적 약자를 위해 사용한다는 사상도 등장하고, 사회정책적인 의미에서 여러가지 사회보험제도나 의무교육제도도 확립되었다. 또 노사(勞使)는 대등한 인격이므로 당사자간에서 임금·노동조건을 정한다는 '계약자유의 원칙'도 노동력이 부족하고 개인의 기술을 중요시하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통용되었지만, 기계생산에 의한 대량의 노동인구가 존재하게 된 산업혁명시대 이후에는 노동자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되었다. 노동자는 호황·불황을 불문하고 열등한 노동조건·저임금·빈곤·실업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속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옹호하고 그 권리를 보장하는 여러가지 노동입법(勞動立法)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종래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사회적 관련에서 재파악되고 있다.

J. S. 밀이 <자유론>에서 단결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그 최초의 징후이지만, 신자유주의는 그린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선(善)은 인격의 완성이며, 자유는 이를 위한 수단이라 하고, 따라서 자유에는 외적 강제(外的强制)가 없는 자유(소극적 자유)와 강제가 따르는 자유(적극적 자유)가 있다 하고, 국가가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후 수정자본주의(修正資本主義), 복지사회 국가관(福祉社會國家觀)이 자본주의 제 국가의 지도원리가 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이러한 사상을 최초로 명확히 규정한 헌법이며, 자본주의의 번영이 다른 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어 온 아메리카에서도 대공황 이후에는 뉴딜 정책을 채택하여 수정자본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빈곤, 실업의 근원이라고 하여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폐기하려는 것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수정자본주의를 철저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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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將來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제 국가의 중심원리이며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길은 실로 요원하고 험난하다. 자유주의가 본래의 자유와 평등이 균형잡힌 사회라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면 자유주의는 점차 매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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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本主義

자본주의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는 그 취하는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특질은 첫째 이윤획득을 위한 상품생산, 둘째 노동력의 상품화, 셋째 생산의 무계획성에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M.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질이란 자유 노동의 합리적 조직을 수반하는 시민적 경영자본주의에 있다고 한다. 그 관념적 특징은 신교적(新敎的)·시민적 합리주의에 근거하고 고대 자본주의의 영리충동을 합리적인 윤리적 규범으로 인도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는 생활의식을 산출한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수한 윤리관에 뿌리박은 직업관이라고 하였다. 또한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에는 서로 다른 두 인구 집단, 즉 생산 수단의 소유자인 경제 주체와 경제객체인 노동자가 시장을 통하여 결합하고 협동하는 영리주의와 경제적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유통경제조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주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곧 사유재산제도·영리추구(營利追求)·자유경쟁(自由競爭)이 그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사기업(私企業)이 사유재산과 자유계약에 입각하여 영리본위의 사적 계획에 의해 생산 활동을 한다. 그리고 생산된 생산물은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에 따라 상품으로서 매매된다. 이러한 시장은 봉쇄되지 않고, 자유로이 개방된 경쟁의 장소가 된다. 물론 매매는 화폐에 의존하므로 화폐신용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은행제도가 행하여진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유통경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의 노동자는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자유로운 인격을 가지며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매각하여 임금을 받아 생활을 영위하여 간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은 개방되고 기업은 끊임없는 경쟁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므로 기업가는 소비자를 최대한도로 흡수할 방책을 강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하고 새로운 상품을 보다 싸게 소비자에게 공급해야 한다. 슘페터는 이것을 이노베이션(산업적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계기는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귀속하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경제적 진보를 위한 근원적 형태가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이룩된 기술발달은 반드시 사회·정치·문화의 발달과 수준을 같이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에는 이에 적합한 사회환경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근대 시민사회라고 불리는 것과 같이 근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와 더불어 성장·발전한 것이다.

독점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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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占資本主義

이상과 같이 자본주의하에서는 경제의 유효한 자원배분이 이루어지고 기술혁신이 실현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한 소득분배까지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유경쟁 그 자체도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독점으로 이행되며, 생산의 무계획성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공황이 내습하고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이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산업의 근대화 과정은 기업에 있어서의 고정자본 증대,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를 고도화시킴으로써 마침내 자본의 산업간 자유이동이 불가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하였는데, 자유경쟁의 원칙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질서가 이를 자극함으로써 이윤율의 저하현상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기업가들이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고 이윤 총액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생산규모를 확대하고 생산량을 무한히 증대시킴으로써 과잉생산이라는 고질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경에서 탈피하고자 기업가들이 제각기 제품의 가격을 출혈적으로 인하시키자 소위 공도경쟁(共倒競爭)에 빠져 다수의 산업자본가들이 몰락하는 동시에 잔존한 소수의 대자본가들은 재빨리 결합하여 경쟁을 배제하고 독점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의 집중·집적을 급속히 진척시키면서 시장을 독점하는 거대한 독점체를 형성함으로써 독점자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을 규제하는 것은 '최대이윤의 법칙'이다. 독점자본의 최대이윤법칙 추구는 상대적으로 노동자의 실질임금 저하, 부등가 교환을 통한 농가 실질소득의 감퇴, 중소기업의 몰락 및 정체를 초래하여 전반적으로 국내의 유효수요를 감퇴시킨 결과, 이것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의 고도화와 함께 구조적 실업을 야기하고 공황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은 협소해진 국내시장의 보완책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급급하게 되고 급기야는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고 그것이 지니는 본래의 제도적 우월성을 발양(發揚)시켜 가자는 것이 수정자본주의(修正資本主義)라고 할 수 있다.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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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aynard Keynes (1883-1946)

영국의 경제학자.

이튼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성(印度省) 근무. 1908년 모교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념. 화폐론을 담당. 제1차대전 후 재무성 수석대표로서 파리 평화회담에 출석했으나 혼자서 가혹한 배상안에 반대하다가 회의 도중에 사직하고 귀국, <평화의 경제적 귀결>(1919)로 자기의 주장을 세상에 물었다. 이후 1920년대를 통해서 보수당 정부의 디플레 정책이나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 복귀에 반대하여 논진을 전개. 대저 <화폐론>(1930)의 화폐가치에 대한 기본방정식(基本方程式)은 학계에 대한 중요한 공헌으로 유명. 주저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은 케인스 혁명이라고 불린다. 이론적 변혁을 근대경제학에 일으켰다. 제2차대전 중에는 재무대신 고문회의 멤버, 영국은행 이사가 되었다. 또 국제다각청산제도(國際多角淸算制度)를 입안하여 브레턴 우즈 기구의 성립을 위해 활약. 영미금융협정(英美金融協定) 체결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경제이론은 연대를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시대에 G. E. 무어를 중심으로 하는 클럽에 참가하여 받은 사상적 영향은 <인도의 통화와 금융>(1913)에서의 금환본위(金煥本位)의 이점 강조, <화폐개혁론>(1923)에서의 관리통화제도(管理通貨制度) 제안 등에서 볼 수 있는 지성(그에게 있어서는 일부 엘리트를 의미했다)에 의한 사회의 의식적 관리 요구나 <확률론>(1921)에서의 불확실성(不確實性) 문제의 중요시, <자유방임주의의 종언>(1925)에서의 자유방임정책 비판 등에서 볼 수 있는 바 벤담 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평생 일관하여 나타나 있다. 주저 <일반이론>에서 전개된 유효수요(有效需要)의 원리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 밑에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자발적 실업(失業)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여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던 당시의 만성적인 불황의 원인을 밝히는 동시에, 여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재정지출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 후 경제이론의 발전에 획기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독점자본의 발전에 따른 국가권력의 경제적 기능 강화·확대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했다.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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雇傭·利子-貨幣-一般理論 (1936)

이 책은 1930년대의 대공황에 직면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자동조정작용(自動調整作用)을 믿어온 전통적 경제이론이 만성적 대량실업이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을 때, 자유방임정책을 취하는 자본주의 경제 밑에서는 비자발적 실업의 발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근대경제학의 틀 안에서 논증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케인스는 우선 전통적 이론에서의 완전고용(完全雇傭)의 자동적 성립이라는 잘못된 가정 위에 선 사상을 분석·비판한 후에 유효수요의 원리라고 하는 적극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유효수요의 원리에 의하면 사회의 경제활동 수준 및 국민소득 수준은 유효수요, 곧 상품구입을 위한 화폐지출에 의해 좌우된다. 이 유효수요는 소비지출(消費支出)과 투자지출(投資支出)로 되어 있다. 소비지출은 일반적으로 소득의 증대에 따라 증가하지만, 소득 중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체감(遞減)한다. 한편 투자지출은 자본의 한계효율(限界效率, 투자의 예상이윤율)과 이자율에 의해 결정되는데, 자본의 한계효율은 자본의 증대와 함께 체감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자율은 일정한 하한(下限)을 가져 그 이하에서는 화폐를 빌려주기보다는 현금으로 보관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투자를 무한히 확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 사회의 활동 수준과 국민소득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유효수요가 부족하여 완전고용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며, 따라서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한다. 케인스는 이와 같이 이론을 전개한 후에 끝으로 이 이론의 경기순환(景氣循環) 분석에 대한 응용의 시사, 이 이론의 근원인 중상주의 사상(重商主義思想) 고찰, 및 이 이론으로부터 도출(導出)되는 사회철학에 대해 간단한 고찰을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케인스가 근대경제학의 흐름 속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체제적 모순에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게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일찍이 자본주의의 약진기(躍進期)에는 개인적 미덕인 동시에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지렛대였던 저축이 이제는 유효수요를 감소시키고 사회적 생산력의 더 이상의 발전을 저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합리성과 사회의 합리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단지 그에 의하면, 이 모순은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하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모순이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발생시키는 모순은 아니다. 여기에서 국가의 재정지출정책 및 저금리정책(低金利政策)에 의해 모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나온 것이다. 이 수정자본주의의 경제학은 많은 경제학자가 참가하여 케인스 학파를 형성하였고, 또한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번영 유지를 위한 유효수요 창출정책(有效需要創出政策)으로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따라서 케인스 경제학과 대결하지 않고는 현대자본주의를 말할 수 없다.

사회과학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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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科學思想家

20세기, 특히 1930년대 이후의 세계는 과도기·변동기로서의 성격을 짙게 갖고 있다.

곧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파시즘의 성립과 붕괴, 새로운 사회체제=사회주의의 현실화와 발전 등 정치·경제·사회상의 세계사적 변화, 또한 과학·기술의 엄청난 진보와 이에 따르는 사회생활의 변모 등을 보았다. 또 종래의 유럽 중심의 문화·사상에 대해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국가 및 여러 민족이 세계사에 등장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상황이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의 진전 가운데서 다시금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사회과학·철학 분야에서 토인비, 호이징가, 슈펭글러, 그리고 E.H. 카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와 대결했다. 그들은 유럽 세계의 재검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극,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문제 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한편 이러한 경향은 20세기적 상황이라고 불리는 사회생활, 사회형태의 변화에 대한 분석과 결부되어 현대사회에 관한 구조적 분석 및 그 안에서의 개인 문제에 대한 해명에 사회과학자의 관심이 쏠리게 했다. 그 가운데서 월리스, 리프만, 듀이, 만하임 등은 현대사회의 특질과 구조를, 프롬, 리스만, 밀스 등은 현대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정신구조, 사회적 태도, 의견 등을 추구하였다. 관료제화(官僚制化)의 진전에 따르는 조직과 인간의 문제, 개인의 원자화(原子化)·분산화(分散化) 현상, 현대의 소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이 이루어졌다.

위기·변동기로서의 현대사회의 파악은 이것과 대응하는 각 민족·문화의 비교연구 및 개인의 내면적 생활·행동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켜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고 기능주의적(機能主義的) 경향을 발생시켰다. 말리노프스키나 베네딕트 등의 사회학, 사회심리학, 인류학 연구로 이 경향은 대표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들은 직접적·간접적인 형태로서 마르크스 주의와의 대항 또는 동조관계를 나타내 마르크스 주의와의 관계 없이는 파악하기 힘들다. 특히 현대 아메리카의 사회과학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 주의의 여러 명제에 대해 이론적·사상적으로 검토한다는 형태를 취한다. 이때 막스 베버의 방법론, 연구업적이 하나의 중요한 조류를 이루고 또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흐름이 사회과학자 속에서 눈에 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해 전체적·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개개의 과학 분야의 세분화·전문화를 넘어선 총합화를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연구의 기본적인 동인(動因)을 법칙적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실천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현대 사화과학 사상가의 공통된 자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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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헨리) Lewis Henry Morgan(1818-1881)미국의 사회학자·인류학자.

뉴욕주 오로라에서 태어났다. 1840년 유니언 칼리지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후에는 뉴욕주 의회의원, 합중국 상원의원, 합중국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한편 그 동안에 약 40년간 이로쿼이족(族)의 친척관계·가족제도를 연구하고 또 중앙 정부를 움직여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척관계·가족제도에 대한 보고를 수집하고, 더 나아가 미개 민족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의 진화론적 민족학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하는 <고대사회(古代社會)>(1877)를 완성하여 당시의 학계와 마르크스·엥겔스 등 사회주의자와 유물사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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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社會 (1877)

모건의 주저. '야만으로부터 미개를 거쳐 문명으로 인류가 진화해 온 과정에 대한 연구'라는 부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윈의 생물진화론에 자극을 받아 쓴 사회학적 연구서.

전체는 4편으로 나누어졌는데, 제1편 '발명과 발견에 의한 지력(知力)의 발달', 제2편 '정부(政府) 관념의 발달', 제3편 '가족 관념의 발달'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⑴ 인류의 발전단계를 야만·미개·문명의 세 단계로 나누고 야만과 미개는 다시 하기(下期)·중기(中期)·상기(上期)로 세분하였다. 그리고 모계씨족제(母系氏族制)의 이로쿼이족은 미개의 하기, 부계씨족사회(父系氏族社會)인 그리스·로마는 미개 상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는 주로 생활자료의 생산 진보를 기초로 하여 이러한 시대 구분을 하였다. ⑵ 다음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씨족제도의 연구에서는 인류사회는 모권제로부터 부권제로 발달해 왔음을 입증하고, ⑶ 또 원시사회 사회조직의 원리는 혈연에 기반을 두었다가 후에는 지역과 재산에 기반을 둔 정치사회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⑷ 가족에 관해서는 원시사회에서의 난혼(亂婚)이 행해지고 야만·미개·문명사회에서의 발달에 대응하여 혈족혼가족(血族婚家族), 반혈족혼가족(半血族婚家族), 대우혼가족(對偶婚家族), 가부장제가족(家父長制家族)으로 발전하고 문명단계에서 일부일부제가족(一夫一婦制家族)이 나타났다고 한다. ⑸ 또한 재산제도에 대해서 원시공산제(原始共産制)로부터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발전경로를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 책은 당시의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크스, 엥겔스 등도 이 책을 높이 평가했고, 특히 엥겔스의 <가족·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은 모건의 연구성과를 채택하고 있다.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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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Max Weber (1864-1920)

독일의 경제학자·사회과학자.

독일 서부의 직물업자의 일족인 막스 베버의 장남으로 에르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동부 독일의 국수주의(國粹主義)·군국주의(軍國主義)적인 융커(동부 독일의 대지주)와는 대조적인 서부 독일의 시민 기질을 계승했으나, 그 이상으로 프랑스에서 망명한 위그노 귀족의 자손인 모친 및 그 일족의 이지적·윤리적 독신(篤信)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 및 법제사학(法制史學) 연구를 계속하고 베를린 대학 법학강사(1892), 베를린 대학 조교수(1893)를 거쳐 프라이부르크 대학 경제학 교수, 하이델베르크 대학 경제학 교수가 되고 그 동안에 마리안네와 결혼했다(1893).

1897-98년경부터 격무에 시달려 신경질환을 앓게 되어 약 4년간 교직 연구를 중단했다. 1903년 <사회과학·사회정책학 잡지>의 편집을 통해 학계와의 새로운 접촉을 시작하고 다음 해에는 아메리카 합중국을 방문했으며, 또 앞의 잡지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기타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후 베버는 건강상의 이유로 대학교수직에 안정할 수 없었으나, 제1차대전 중 육군병원의 감독장교로 근무한 이외에도 죽기 직전까지 초인적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며 틈틈이 정치에 관한 집필이나 강연을 하였다.

베버의 업적은 법학·경제학·사회학 등 광범하지만 제1차대전 전후의 독일이라는 관점에서 근대 유럽 사회와 문화의 특질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독자적인 비교사적 방법(比較史的方法)에 의해 구명한 성과는 사회과학계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주저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5), <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1919)이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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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stan­tism -倫理-資本主義精神(1904-5)

막스 베버의 주저의 하나.

처음 베버 자신이 편집자의 한 사람이었던 <사회과학·사회정책학> 잡지 제20-21권에 발표되고 후에 원논문이 야기시킨 활발한 논쟁, 특히 반대와 비판에 대한 베버의 응수와 각주(脚註) 등을 첨가하여 <종교사회학논집> 제1권(1920)에 수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인용·번역되는 것은 후자이다.

이 논문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였으나, 경제발전과 종교운동의 인간관계를 매우 한정된 독자적 관점과 용어법(用語法)에 의해 추구하였기 때문에 브렌타노, 좀바르트 또는 토니(1880-1962) 등이 이 책에 대해 전개한 이른바 자본주의 기원 논쟁에서도 쌍방의 논점은 충분한 관련을 갖지 못하였다.

곧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전적으로 종교신앙의 특정한 형태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가 그 주된 담당자인 '산업적 중산자층(産業的中産者層)'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금욕적 직업윤리(禁慾的職業倫理)의 형성에 대한 이른바 주관적 자극제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공헌한 비율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에 대해 이러한 금욕적 윤리를 단련하고 보급시킨 객관적 조직이라는 측면을 베버는 다른 논문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러 섹트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고찰했다).

그리고 베버의 궁극적 의도는 근대 자본주의가 왜 서유럽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을 합리적 생활 태도의 형성을 방해하는 영혼의 장해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이 왜 가톨릭 또는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등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도들 사이에서 준비되었는가 하는 문제설정 속에서 해명하는 데에 있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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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政治(1919)

막스 베버의 주저 가운데 하나.

1918년 독일의 패배와 혁명·제정(帝政)의 붕괴라는 역사적 변혁 속에서 베버는 정치적 실천(독일민주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입후보)을 뜻했으나 실현되지 않고, 다음해인 1919년(죽기 전 해) 뮌헨 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동대학의 학생집회에서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대학교수가 자기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학생을 지도하는 것을 엄격히 나무라지만, 이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있어서도 패전국 독일의 정치에 대한 만만치 않은 관심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정치가 행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무엇인가, 또 무엇을 연구할 수 있는가 하는 직분론(職分論)을 말하고 있다. 이 강연 논문은 <정치논문집>(1912)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정치'의 정의, 지배의 3유형('전통적' '카리스마적' '합법성'), 직업정치 성립의 역사와 그 종류, 정당조직 등을 논한 다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자가 가져야 할 자격과 정치적 모랄에 대해 베버의 견해가 솔직히 표명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논문은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함께 베버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아는 데에 가장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곧 그가 요구하는 정치적 지도자상은 격렬한 정열과 냉정한 관찰력을 통일하고 그것을 몰주관적(沒主觀的)인 책임감에 의해 지탱하는 인간인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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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學問 (1919)

막스 베버의 주저 가운데 하나.

<직업으로서의 정치>와 함께 뮌헨 대학의 학생집회 강연. 같은해 단행본으로 간행되었고, 후에 <학문론논집>(1922)에 수록되었다. 내용을 보면, 우선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외적 조건(대학교수 취직과 승진)에 대해 독일과 미국의 사정을 비교한 다음, 이 논문의 중심 테마인 학문의 내적 조건 및 학문의 직분(職分)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는 더욱 전문화되고 나날이 진보되는 학문의 세계에서 살려는 자는 자기의 전문영역에 전적으로 파묻힐 것, 그러나 그 업적은 늘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인 운명을 감수할 것 등이 요구된다.

또한 학문이 사실의 객관적 인식에 노력하는 전문적 '직업'인 이상 사실판단(事實判斷)과 가치판단(價値判斷)을 엄격히 구별하고 학자로서의 교사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당파의 입장에서 학생을 지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끝으로 학문의 직분으로서 ⑴ 예측에 의한 외계(外界)의 지배, ⑵ 사고훈련(思考訓練), ⑶ 명석성이 지적되었다.

이상과 같은 베버의 견해 중에서 '전문폐쇄(專門閉鎖)'나 '교단금욕(敎壇禁慾)', '가치판단 배격' 등의 과도한 강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비판이 있으나 그의 주관에 의존하지 않는, 또는 가치전제(價値前提)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베버에 의하면 학문을 지탱하는 가치이념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학문은 학문 자체를 갖고는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학문의 직분은 일정한 가치전제로부터 내적 정합성(內的整合性, 內的無矛盾性)을 갖고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을 언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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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ner Sombart (1863-1941)

독일의 사회학자·경제학자.

중부 독일의 에르메스레벤에서 국민자유당(國民自由黨)의 대의원인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시절에 슈몰러(1838-1917)와 멩거(1840-1921)의 이른바 '경제학 방법 논쟁'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토지제도를 연구한 후, 브레멘의 상공회의소에 근무했다. 1890년에 브렌타노의 후임자로 브로츨라프 대학에 초빙되어 <사회주의자와 사회운동>(1896)을 썼고, 종래의 역사학파의 노동자 복지정책으로부터 마르크스 주의에 접근했으나, 이윽고 사회주의를 과학으로부터 분리하고 마르크스 주의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사회정책에 관심이 강해서 1904년 막스 베버와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를 편집하고 역사학파를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1917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서 1902년부터 발표해 온 주저 <근대자본주의> 전3권(1927)을 완결했다.

좀바르트의 특색은 경제지향과 경제조직에 의해 경제의 발전단계를 해명한 데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 자본주의는 영리원칙(營利原則)과 경제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교환경제조직(交換經濟組織)이며, 막스 베버와 같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고려하지 않고 그 담당자는 고리대금업자나 상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경제학 방법론에 관한 저작 <세 개의 경제학>(1930)이 있다.

트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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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Troeltsch (1865-1923)

막스 베버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철학자·사회학자·신학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894년 하이델베르크 신학교수, 1915년 베를린 대학 교수. 트뢸치의 학문 영역은 다채로워 신학·종교학·윤리학·역사철학·문화사·정신사·종교사회학 등에 관한 방대한 저서가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현대의 문화적·종교적 전체상황을 인식하기 위해 근대세계 형성의 여러 원인을 찾고, 또 그리스도교와 일반문화 상황과의 역사적 관련을 결정하기 위해 고대까지 고찰을 소급시켰다.

둘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영원히 절대적 가치와 일시적 가치를 구별하는 초역사적 가치를 추구하여 역사의 흐름에 방향과 규범을 주려고 하는 이상주의적·실천적 입장이다. 이 상반되는 두 개의 연구 방향을 하나로 결합시키려는 긴장이 그의 전 학문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주저로는 <역사주의와 그 문제들>(1922), <그리스도 교회와 집단의 사회이론>(1922), <르네상스와 종교개혁>(1923) 등이 있다.

퇴니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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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T

nnies (1855-1936)

독일의 사회학자.

독일 서북부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서해안에 있는 아이델슈테트 지방의 지도적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예나·라이프치히·본·베를린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고, 1887년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1년 킬 대학의 사강사가 되어 그 후 1933년 나치스에 의해 해임되기까지 동대학에 관계했으나, 그동안 정교수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제1차대전 중을 포함해서 8년 동안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자유로웠던 그는 진보적인 운동에 참가하고 협동조합운동에 장래를 걸었다.

퇴니에스의 이론과 사상은 주저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데, 게마인샤프트는 전근대적인 공동사회를, 게젤샤프트는 근대적인 이익사회(利益社會), 즉 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하며, 퇴니에스는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게젤샤프트가 미래의 자유로운 게마인샤프트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 점은 정치사회학 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론(世論)의 비판>(1922)에서도 명백히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판단이나 의견의 상품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퇴니에스의 사회학 체계화는 <사회학서론>(1931)에서 볼 수 있다.

1909년 이래 오랫동안 독일 사회학회 회장을 맡아 보았으며 1936년 사망했다.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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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meinschaft and Gesell­schaft (1887)

퇴니에스의 주저.

초판에는 <경험적 문학 형식으로서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으나 제2판(1912)부터는 '순수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제1편 '주요 개념의 일반적 규정'은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라는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해 이론적 규정을 하고, 제2편 '본질의지(本質意志)와 선택의지(選擇意志)'에서는 앞의 두 유형의 사회를 지탱하는 인간의지의 두 가지 존재양식을 논하고, 제3편 '자연법의 사회학적 기초'에서는 게젤샤프트의 형성 이념을 제공한 자연법, 정의의 이념으로서도, 피억압자 계급의 강령으로서도 전개될 수 있는 자연법에 대해 고찰하고, '결론과 개관'은 게마인샤프트로부터 게젤샤프트로의 사회발전을 결론짓고 있다.

게마인샤프트는 개인의 주체성이 없는 공동사회를, 게젤샤프트는 개인 원리가 우월한 이익사회를 의미하며,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의 발전을 말하는 퇴니에스는 게젤샤프트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피안에 개인원리에 입각한 게마인샤프트가 부흥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분석 방법은 얼핏 보아 형식주의이지만 홉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회과학의 고전에 의거하여 확립된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라는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귀르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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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Gurvitch (1894-1965)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사회학자 중 한 사람. 러시아에서 태어난 후 프랑스에 귀화.

출생지는 러시아의 노보로시스크. 페트로그라드 대학(현 레닌그라드 대학)을 졸업. 1919년 톰스크 대학 교수, 1921년부터 3년간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에 프랑스로 가서 1928년 귀화. 1929년부터 31년까지 파리 대학에서 자유강의를 했다. 이 무렵까지 그의 주된 관심은 법철학과 사회철학에 있었으나 이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이어서 파리 대학의 사회학 담당 교수로서 사회학 이론의 체계화에 노력하여 전통적인 뒤르켐 학사회 학자가 되었다.

그의 방법론상의 입장은 '변증법적 초경험주의(超經驗主義)'라고 불린다. '초경험주의'란 실증주의를 포함하는 종래의 경험주의자 선험적 명제(先驗的命題)의 정당화 수단이 되거나, 직접적인 경험에만 사로잡혀 일면화(一面化)에 빠지는 한계를 넘어서서 경험의 모든 차원과 태도에 충실하려고 하는 다원적 방법태도(多元的方法態度)를 의미한다. 한편 변증법이란 이 경우 경험의 가동성(可動性), 그 여러 요소의 가변적(可變的)인 상호 침투, 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방법태도로서, 초경험주의는 변증법에 통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론에는 마르크스 주의적 변증법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방법태도로 사회학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 <사회학의 현대적 과제>(1950)이며, 그의 사상의 독창성은 <사회적 결정론(社會的決定論)과 인간의 자유>(1955)에서 결정론 내지 인과론(因果論)을 이해하는 데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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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할레트) Edward Hallet Carr (1892-1982)라스키와 함께 현대 영국의 대표적 정치학자.

1916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후에 웨일스 대학 국제정치학 교수(1936-46). 제2차대전 중에는 정보성의 외교부장(1936-40), <런던 타임즈> 논설위원(1941-45).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고, 그의 '소비에트 혁명'이나 '현대 소비에트의 분석'은 상당한 정평을 받고 있다.

주저로는 <칼 마르크스>(1934), <서구 세계에 있어서의 소비에트의 충격>(1947), <새로운 사회>(1951), <볼셰비키 혁명>(제1권, 1958) 등이 있다.

새로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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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1951)

E. H. 카가 1951년에 BBC(영국방송협회)에서 한 연속강연을 정리한 것.

제2차대전 후의 새로운 시점에 서서 영국 국민에게 우리가 오늘날 어떠한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가, 또 금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평이하면서도 격조 높게 호소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선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역사가의 태도를 말하는데, 19세기 말 이래 슈펭글러 등의 비관적인 역사관에 반대하는 한편, 역사적 사건이나 전통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유토피아 사상에도 반대하고 역사가의 임무는 현재 및 미래를 지배하는 문제 위에 과거의 빛을 던지는 데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음은 현대에 있어서는 자유방임적인 '야경국가(夜警國家)'의 시대는 지나가고 '복지국가(福祉國家)'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질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 기아와 실업이라고 하는 경제의 채찍에 대해서 노동의 결과에 대한 노동자의 몫을 늘리고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며 산업을 국유화(國有化)하는 시대, 곧 사회주의가 새로운 자유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의 대중민주주의는 이전의 특권계급의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 평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하고, 대중사회화 상황 속에서 개인의 자유나 이성이 억압되고 있는 데 대해 새로운 의미에서의 이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또 현대는 사회개혁과 식민 독립의 시대로 변화하였음을 지적하고 금후에는 이와 같은 노선을 따라가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따라서 유럽의 사회적 평등과 대량실업(大量失業)을 방치하고 아시아의 혁명적인 민족적 이상을 이해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역사에 역행하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현대의 자유는 정치적 활동 및 정치적 노력의 목표로서는 만인을 위한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소비에트형과는 달라서 전통적인 자유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만인평등의 이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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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Wright Mills (1916-1962)

미국의 대표적 사회학자.

텍사스 대학 졸업 후 메릴랜드 대학에 근무하는 한편, 정부나 주(州)나 각종 단체의 위탁조사를 하였으며, 1946년부터 컬럼비아 대학 교수를 역임. 막스 베버,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의 뛰어난 사회과학 방법을 흡수하면서 현대사회 분석에 가장 유효한 방법론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주된 연구영역은 사회 각층의 분석에 있으며, 지배계급, 중류계급, 노동자계급에 관한 여러가지 논문이 있다. 미국의 지배계급을 분석한 <파워 엘리트>(1957), 중류계급을 분석한 <화이트 칼라>(1951) 등이 있다. 또 현대 국제정치에 관해서도 발언을 하였는데 <쿠바의 소리>(1960),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1960) 등의 저작이 있다.

화이트 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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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collar (1951)

밀스의 주저.

부제 '아메리카의 중류계급'이 말해 주듯이, 현대 아메리카 사회에 있어서의 신중간층(新中間層)의 역사적 성립 과정,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그 역할과 지위, 의식구조를 사회학 및 사회심리학적 방법을 써서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밀스는 이 책에서 신중류 계급의 주요 구성부분을 중·하급의 관리직(管理職), 전문직, 지식계급, 판매원, 사무원이라 하고 이를 화이트 칼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대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신중류 계급이 증가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 따라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분석하려면 일찍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은 자본가 계급 대 노동자 계급이라는 공식이나 2대계급의 대립에 의한 중간 계급의 소멸이라는 이론만으로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레비 브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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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en Levy-Bruhl (1857-1939)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프랑스의 철학자·사회학자.

파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9년 고등사범학교 졸업. 1885년 리세 루이 르그랑의 철학교수, 1895년 고등사범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1898년 소르본으로 옮겨 1902년부터 철학사 강좌를 담당, 1908년 이 강좌의 정교수가 되었다.

1900년 무렵까지는 전적으로 콩트의 실증주의를 계승하는 철학자로서 철학사를 연구하고 <오귀스트 콩트의 철학>(1900) 등을 저술했으나 그 후로 사회학적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뒤르켐 학파의 멤버가 아니었고, 어떤 점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판을 받기는 하였으나, 뒤르켐의 영향을 받았으며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있다. 특히 사회적 사실로서의 도덕에 관한 과학(習俗學)을 세우려는 지향에서 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높인 것은 미개사회의 사유구조(思惟構造)에 대한 일련의 연구로, 그중에서도 <미개사회의 사유>가 저명하며, 이 책은 새로운 학문영역을 개척한 독자적 업적으로서 그 후의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개사회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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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開社會-思惟 (1910)

레비 브륄의 주저.

'서론'은 주로 타일러(1832-1917)를 대표자로 하는 영국 인류학파의 원시인의 심성(心性)을 영혼설에 의해 설명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에 할당되고 있으며, 이것은 이 책에 일관된 기조가 된다. 전체는 4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원시인의 심성이 근대인의 심성으로부터는 유추(類推)할 수 없는 전혀 별개의 신비적 성격을 가지며 이러한 신비적 성격은 사물간이나 주체와 객체간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며, 이러한 심성은 전논리적(前論理的)인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제2부는 위의 사실을 원시인의 언어와 산수에 의해 검증하고, 제3부에서는 원시적인 여러 제도에 대해 검증한다. 제4부는 이 원시 심성(原始心性)으로부터의 이탈과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논리적 심성이 강인하게 남아서 이중의 심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원시인의 심적 구조에 독창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근대적 사유가 미개적 사유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뒤르켐 학파는 양자를 전혀 이질적인 논리구조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 이 책을 비판하였다.

크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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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etto Croce (1866-1952)

현대 이탈리아의 철학자.

중부 이탈리아의 아쿠이라에서 태어났다. 나폴리 대학의 교수로서도 활약하였으나, 철학·역사의 평론을 주로 하는 잡지 <비판>을 창간·편집하여 이탈리아의 정신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1903-37).

1910년 이후 상원의원, 1920-21년 문화상에 취임하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즘 정권 수립 후에도 반(反)파시스트적 언론활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제2차대전 말기에는 무솔리니 정권에 반항하고, 바돌리오 정권을 도왔고, 1944년 이 정권의 문화상으로 취임하였다. 또 전후엔 왕정(王政)을 반대하고 자유당을 지도했다.

크로체의 사상은 헤겔 철학의 비판적 연구(<헤겔 철학에 있어서의 산 것과 죽은 것> 1907)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탈리아의 고전적 철학자 비코(1668-1744)의 역사철학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대에 비코 철학을 소개한 사람으로서의 공적도 크다(<조반니 바티스타 비코의 철학> 1921).

그의 철학 체계는 헤겔 주의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현대의 생의 철학의 입장을 받아들여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이었던 실증주의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의 주저로는 <정신의 철학> 4권-<미학>(1902), <논리학> (1905), <실천철학>(1909), <역사서술의 이론과 역사>(1915)가 있다.

역사서술의 이론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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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敍述-理論-歷史 (1915)처음에는 1915년에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나 다음해에 이탈리아어로 출판, 전4권으로 된 <정신철학(精神哲學)>의 제4권으로 넣었다.

크로체에 의하면 정신은 직각(直覺, 예술), 개념(논리학), 경제행위, 도덕행위의 여러 단계를 통해서 발전한다. 그리고 존재는 생이며 생은 생성발전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인 것이므로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바로 역사철학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철학>은 '미학' '논리학' '실천철학'의 3부작에 이 책을 첨가하여 비로소 완결을 본 것이다.

내용은 '역사서술의 이론'과 '역사서술의 역사'의 두 부분으로 되었으며, 역사서술로부터 역사철학을 비판하고 동시에 역사철학(歷史哲學)으로부터 역사서술(歷史敍述)을 비판한다는 이중적 비판의 자세가 일관되어 있다. 곧 19세기의 역사철학이 실증적 역사연구를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철학적 사변에 의해 일정한 역사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 대해, 크로체는 주어진 역사서술이라는 현실 속에 나타나는 역사상(歷史像)을 철학적으로 고찰한다는 태도로 역사철학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는 철학과 역사, 이념과 현실, 현재와 과거, 또는 비판과 자료, 보편과 특수라는 각각의 2원성적(二元性的) 변증법적 통일을 주장하고,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종래의 역사서술적 이론상의 오류의 실례로서 문헌학적(文獻學的) 역사, 시적(詩的) 역사, 실리주의적(實利主義的) 역사, 경향역사(傾向歷史) 등을 지적한다. 새로운 역사서술에 의거하는 새로운 역사철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들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크로체는 끝맺고 있다. 역사서술에 있어서 현재의 생명이라는 요소를 강조함에 의해서 그는 20세기에 있어서 역사주의 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베른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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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Bernheim (1850-1942)

독일의 역사가.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지만 기독교에 귀의하고 1883년부터 1920년까지 북부 독일의 그라이프스바르트 대학 교수.

<중세의 시대권과 그 정치 및 역사서술에 대한 영향>(1918) 등 저술이나, <독일제국 의회 조례집(條例集) 1400-1410> 3권(1882-88) 등 사료편집으로 중세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업적을 갖지만, 그의 이름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주로 역사적 방법론에 대한 저술 때문이며, 그 주요한 것으로서는 <역사연구와 역사철학>(1880), <역사학 방법교본>(1889), <역사학 입문>(1905) 등이 있다.

니부르, 랑게, 드로이젠 등에 의하여 이룩된 19세기 독일 역사학의 뛰어난 업적을 배경으로 역사학 연구의 구체적 방법을 계통적으로 개괄한 의의는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베른하임에 있어서는 이미 역사학의 이론(史觀)과 방법론의 통일이 상실되어 전자의 창조력 고갈로 후자의 면밀한 기술론(技術論)이 공허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역사학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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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學 入門 (1905)

베른하임의 역사학 방법론에 관한 주저. <역사학 방법교본>을 압축, 요약하여 평이하게 다시 쓴 것이 <역사학입문>이다.

전체는 3장으로 되어 있으며, 제1장에서는 역사학의 발전과정과 다섯 개의 대표적인 역사관을 소개한 다음 역사학의 개념과 직분을 논하고, 제2장에서는 역사학의 작업영역을 밝히고, 끝으로 제3장에서는 본론인 역사학 방법론을 전개하고 있다. 사료 수집·정리→사료 비판→사료 해석→인과적 관련의 파악→서술의 순서로 역사연구의 실제적 방법을 명시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요령 있는 입문서라고 하겠다. 그러나 제1장의 역사학 본질론은 역사철학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 견해를 그다지 말하고 있지 못하며, 제3장의 방법론과의 필연적인 연관도 인정하기 힘들다. 이 점에서 이 책의 결함을 지적할 수 있으며, 역사학과 역사철학이 서로 유리되어 전자가 오직 많은 시대와 영역에 대한 전문학(專門學)으로 분화되어서, 무한한 사실(史實)의 검증에만 몰두하는 이른바 '역사주의의 위기' 현상을 학문적으로 표현한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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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가·문명비평가.

<영국 18세기 산업혁명사 강의>(1884)의 저자 아놀드 토인비의 조카.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이며 열렬한 사회개량주의자, 어머니는 역사가이며 여성으로서는 영국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아테네의 영국고고학원(英國考古學院)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1912년 모교에서 특별연구원 겸 지도교수로 취임. 1915년 외무성의 정치정보국에 들어갔고, 1919년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중동문제 담당 정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였다. 그 해부터 1924년까지 런던 대학의 비잔틴사·근대 그리스사 교수. 1925년부터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1943년 다시 외무성에 들어가고, 1946년 파리 평화회의 정부 대표. 그 후 1955년 은퇴할 때까지 런던 대학 국제사 연구교수.

고대 그리스·로마사의 전문가로 출발하여, 토인비가 슈펭글러의 문화형태학(文化形態學)을 이어 받아 그 독자적인 웅대한 구상을 <역사의 연구>를 통해서 전개하게 된 경위는 <나의 역사관>(<시련에 선 문명>에 수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계 제 문명의 흥망 원인에 대해 슈펭글러는 독일류(獨逸類)의 선험적 방법(先驗的方法)에 의해 독단적·결정론적(決定論的)으로 설명하려 하였으나, 토인비는 이러한 실패를 넘어서서 영국적인 실험주의(實驗主義)에 의해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 빛나는 성과는 거시적인 시야와 유니크한 이론 때문에 전문적 역사가보다도 일반 독자들에게 문명사가(文明史家)로서 불후의 명성을 떨쳤다.

그의 주저로는 <역사의 연구> 외에 <세계와 서구>(1953), <한 역사가의 종교관>(1956), <헬레니즘>(1956) 등이 있다.

역사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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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硏究 12권 (1934-61)

토인비의 주저.

1934년부터 1961년까지 실로 28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들여 완성시켰다. 일반 독자에게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미국인 서머벨에 의해 제10권까지를 요약한 축쇄판(縮刷版)이 두 권으로 나왔으며, 이 축쇄판은 토인비도 칭찬한 바 있다.

내용을 보면, 역사연구의 단위는 국가나 시대가 아니라 문명사회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세계사의 제 문명을 21개로 분류하고, 이 문명의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에 공통된 역사법칙성(歷史法則性)을 구명하면서,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문명사관(文明史觀)을 전개하고 있다. 토인비의 문제의식은 슈펭글러와 마찬가지로 서구문명의 운명에 대한 회의적인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중간에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그리스도교 본래의 정신으로 복귀하는데, 미래를 기대하고 있던 그의 종교적 비전이 제7권 이후부터는 한층 어두운 그림자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명의 흥망 원인을 설명하는 독자적인 이론으로서 '도전(挑戰)과 응전(應戰)' '창조적 소수자(創造的少數者)와 지배적 소수자(支配的少數者)' '내적(內的) 프롤레타리아트와 외적(外的) 프롤레타리아트' 등은 탁월한 것이며, 이것은 서구중심사관(西歐中心史觀)을 탈피한 해박한 지식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관점과 함께 이 책의 최대 공헌일 것이다.

시련에 선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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試鍊-文明 (1948)

토인비의 주저. 13편의 논문을 모은 책으로 제목은 그중의 한 논문 제목을 딴 것. 현대 세계의 분석에 중점을 둔 것(2편), 주로 특정한 문명을 고찰한 것(3편), 저자의 역사관·문명관·종교관을 논한 것(8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들에 일관된 것은 <역사의 연구>에 결실되고 있던 저자의 독자적인 문명사관이며, 그것이 그때 그때의 주제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연구>를 독파하기 위한 안내서, 또는 이 대저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재빨리 이해하기 위한 다이제스트로서도 편리한 문헌이다.

특히 서구문명의 장래를 예측하기 위한 근거를 세계 여러 문명의 전개와 조우(遭遇) 속에서 구하려고 하는 저자의 자세, 그리고 문명세계를 신의 왕국의 한 영역으로 파악하고 모든 고등종교의 핵심(궁극)에 그리스도교를 설정함으로써 복수문명(複數文明)의 상대주의로부터 서구문명을 구출하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는 <역사의 연구>에서보다 솔직하고 명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호이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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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 Huizinga (1872-1945)

네덜란드의 역사가.

프로닝겐 태생. 그의 집안은 16세기 이래 대대로 재세례파(再洗禮派)의 목사로 봉직한 가문이었으나 아버지와 맏형이 처음으로 가문의 전통을 깨뜨리고 의학을 전공하였으며, 호이징가는 자연과학에는 거의 흥미를 갖지 못하고 일찍부터 문학, 미술, 역사에 비범한 관심과 재능을 발휘하였다. 1891년 프로닝겐 대학에 들어가 비교언어학을 전공, 다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배우고, 1897년 학위 획득 후에는 할렘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근무하였다. 1903년 암스테르담 대학의 사강사를 겸임, 1905년 프로닝겐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5년 라이덴 대학으로 옮겨 1940년 독일 점령군에 의해 강제로 폐쇄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그동안 암스테르담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언어학부 및 사학부 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45년 2월 네덜란드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서전(<역사에의 나의 길> 1947)에서 인식론적·철학적 흥미를 결여한 정신적 반맹인(半盲人)이라 자인하고 있으나, 개인의 영혼의 감동·공명이 역사학적 인식의 핵심이라 믿고 꿈이나 환상, 아름다운 생활에의 동경이 문화형성에서 맡는 역할을 강조하는 매우 개성적인 문화사가(文化史家)이다.

주저로는 <중세(中世)의 가을>(1919), <에라스무스>(1924), <문화사에의 길>(1930), <호모 루덴스>(1938) 등이 있다.

중세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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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 (1919)

호이징가의 주저로, 그의 명성을 확립시켜 준 걸작.

부제 <14-15세기 프랑스, 네덜란드에서의 생활형식과 정신형식의 연구>가 말해주듯, 14-15세기의 이 지방 문화는 르네상스의 싹이 트는 것을 보여주었다기보다 오히려 중세의 종말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한 시대의 현저한 특징은 그 종말에 가장 명확히 나타난다. '가을'은 한 시대의 쇠퇴를 의미하는 동시에 시대정신이 극한 상태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내용은 22장으로 나누어졌고, 각 장이 독립된 단편처럼 보이나, 그것은 마치 만화경(萬華鏡)에 비치는 그림과 같은 것으로서, 동요하는 것, 한정할 수 없는 것, 다의적인 것 속에서 역사의 본질은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취급된 주제는 생활의 기조, 생활감정과 그 표현형식으로서, 이러한 점에서는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르네상스 문화>의 저자 부르크하르트의 방법을 계승하고(이러한 의미에서 그를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있으나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를 명확히 중세로부터 구별하고 근대적이며 자유로운 정신운동이라고 본 데 대해, 호이징가는 르네상스 속에서 신구(新舊) 문화 요소의 착종(錯綜)된 혼재(混在)를 인정하려고 한다.

만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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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Mannheim (1893-1947)

헝가리 태생의 사회학자.

만하임은 부다페스트 대학을 위시하여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배웠으며 철학, 특히 인식론을 전공하였다. 독일의 대학에서 공부한 후, 일시 헝가리에 돌아와 1919년 벨라쿤(1886-1930)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참가하였으나 백일 남짓해서 반혁명군에 의해 혁명정부가 붕괴하였으므로 다시 독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사강사가 되고,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 나치 정권 수립과 함께 그의 사상 경향 때문에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자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런던 대학의 긴즈버그 교수와 라스키에 의해 런던 대학 정치경제학원의 사회학 강사로 추천되었다.

그의 연구는 경력에 의해 관심이 규제되고 있는 면이 강하나, 제1기는 학위논문 <인식론의 구조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 인식론에 중심이 있고, 제2기는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 연구, 그 성과인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망명 후의 만하임은 현대사회의 진단 및 교육·사회계획에 중심을 두고, 나치즘에 대한 민주주의 옹호의 관점을 명백하게 내세우게 되었다. <재건기(再建期)에 있어서의 인간과 사회>가 이 시기에 개정(改訂) 영어판으로 간행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계획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교육을 중요시하였고 1945년에는 런던 대학 교육학 주임 교수가 되고 또한 유네스코의 유럽 부장으로 사회적 실천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나 1947년 1월 9일 53세로 별세했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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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ologie-Utopia (1929)만하임의 주저 가운데 하나.

1924년의 논문 <역사주의>, 25년의 논문 <지식사회학의 문제>, 26년의 논문 <정신적 형상(形象)의 이데올로기적 및 사회학적 해석> 등을 이어서, 칼 만하임이 전면적·본격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 1929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이다. 만하임은 당시 A. 웨버, 막스 쉘러(1874-1928) 등과 함께 독일에 있어서의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상의 연구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는 실증주의적 입장(사적 유물론, 뒤르켐, 예루살렘 등)과 형식적 선험주의(形式的先驗主義)(신칸트파의 가치철학)를 받아들여 역사주의=상관주의(相關主義)의 입장에 섰다.

그리고 역사적 지식, 이데올로기의 '존재피구속성(存在被拘束性)'을 주장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부분적 이데올로기 개념, 전체적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나누고, 전자는 오직 상대의 일부분만을 인정하려고 하며 심리학적 평면에 있어서 기능화(機能化)하고 이해심리학(利害心理學)을 끌어들이는 데 대해, 후자는 세계관 전체를 문제로 하고 집합체주체(集合體主體)로서 파악하고 정신학적 평면(精神學的平面)에서 기능화하고 객관적 구조관련(構造關聯)을 의도한다고 하여 전자로부터 후자에로의 발전을 생각했다. 역사적으로는 첫째 의식철학(意識哲學)으로부터, 다음에는 전체적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사화(역사주의·헤겔), 그리고 마르크스 주의에 있어서 부분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전체적 이데올로기 개념과 결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의는 자기의 입장 자체의 이데올로기성(性)을 보지 않는 것이 결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 주의를 특수한 이데올로기 개념이라 하고 이에 대치하는 일반적 이데올로기 개념의 입장을 취하고 몰가치적(沒價値的)·전체적 이데올로기 개념과 평가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구별하며, 상관주의의 입장에서 사회학적 시대진단학(時代診斷學)을 제창하고, 그 주체는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부동하는 인텔리겐치아라 하였다. 근본에 있어서 만하임이 상대주의를 취하고 엘리트 주의의 입장에 선다는 결점이나 문제는 있으나, 이 책이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해 기본적 고찰을 가한 업적은 그 후의 연구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말리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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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nislaw Kasper Malinowski (1884-1942)폴란드 태생의 인류학자.

처음에는 자연과학 연구에 종사하고 크라크푸 대학에서 물리학·수학을 전공, 1908년에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병중에 프래저의 <금지편(金枝篇)>을 읽고 인류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라이프치히에서 비셔, 분트에게서 배웠다.

1910년 런던으로 건너가 셀리그만, 웨스터마크에게서 배우고 런던 대학 강사로 취임, 38년까지 동대학의 인류학 주임교수로 근무했다.

192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 강사로 근무하고, 후에 코넬·하버드 대학 등에서 강의, 강연을 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깊었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하고, 39년 예일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멕시코의 자보테크족 조사에 종사했다. 1942년 동대학의 정교수 취임을 승낙했으나 임명 전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리노프스키는 오스트레일리아, 트로브리안드 등 조사에 참가하고 영국의 전통적 진화주의(進化主義)에 기능주의(機能主義)와 사회심리학적 방법을 가해서 기능적 분석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정의적(正義的) 측면의 의의를 강조하고 이를 동태적(動態的)으로 해명하는 그의 방법은 현재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주저로는 <서태평양의 항해자>(1922)가 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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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太平洋-航海者 (1922)

말리노프스키의 주저. 셀리그만, 웨스터마크 밑에서 인류학 연구에 종사하던 말리노프스키가 1914년부터 21년에 걸쳐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안드를 중심으로 행한 3회의 조사보고이다.

라드크리프 브라운의 시사에 따라 <마이르의 원주민> <파로마트로브리안드 제도(諸島)의 사자정령(死者精靈)> 등 논고에 이어서 이 책을 발표했다. 실태조사는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파악할 뿐 아니라, 문제 가설의 설정에 따라 이론적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것, 정령관념(精靈觀念)이나 의견은 사회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 사회제도와의 관련과 개개인의 태도 및 의견의 내면성 추구의 중요성 및 집합심리(集合心理)와 욕구충족의 관점을 채택할 것을 강조하고 원주민의 생생한 활동을 그려서 임상적(臨床的) 연구로서 획기적인 업적을 이 책에서 보여주었다.

베네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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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h Fulton Benedict (1887-1948)

미국의 인류학자.

바사 칼리지를 졸업한 후 시인으로서 활약하였으나 수년 후 여학교 교사가 되었고,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한국·중국·일본인의 이민생활을 접촉하고 풍속 습관에 흥미를 가졌다. 1919년 컬럼비아 대학의 보아스 교수 밑에서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民話)나 종교의 비교연구를 하였다.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동대학 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근무하고 인류학과의 주임으로 일하기도 했다.

<국화와 칼> <문화의 여러 양식> <민족> 등의 저서가 있으며, 베네딕트의 인류학적 입장은 사상·행동의 의미 및 정서를 심리학적으로 해명하여 미개민족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1928년의 최초의 논문 <남서부문화(南西部文化)에 있어서의 심리학적 유형>에 이미 이러한 방향이 나타났고, 그 후의 연구에서 결실되었다. 그리고 사회사상(社會事象)을 문화양식으로 파악하는 방향을 취하여 역사주의·기능주의와 함께 '양식주의(樣式主義)'를 탄생시켰다. 또 오늘날 미국 문화인류학의 주요한 흐름인 문화와 퍼스낼리티 연구, 국민성 연구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만년의 연구 대상이 된 것은 제2차대전의 전쟁 수행과 관련하여 독일, 일본, 루마니아, 타이 등이며, 미개사회의 연구라기보다는 근대화된 민족의 문화양식의 비교 연구에 노력하였다.

국화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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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花- (1946)

베네딕트의 주저.

미국 학자에 의한 일본 연구로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간행되어 지금은 사회학, 문화인류학 계통에서 정평을 받고 있는 서적 중의 하나이다.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대일전쟁(對日戰爭)중 선전활동의 일환으로서 전시정보국(戰時情報國)의 의뢰를 받아 일본인 2세 및 포로들과의 인터뷰 등을 진행시킨 연구로 약간의 자료적 제약은 있으나 인류학상의 이론을 구사하여 부제에 있는 바와 같이 일본 문화의 형태를 밝혔다.

베네딕트는 구미(歐美)의 문화와 일본의 문화를 구별하고, 그 문화의 핵(核)이 되는 것은 전자에는 '죄' 의식이며, 후자에는 '수치' 의식이라 말하고, 일본의 문화는 '수치의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일본인의 생활 문화양식에 일관된 것으로서, 개인의 사회화 과정, 여러가지 사회관계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를 실증하였다. 구미문화가 그리스도교를 근간으로 형성된 데 대하여 일본의 문화가 갖는 유교적·무사도적 측면을 강조하고 전체적으로 일본 문화를 명백히 하였다.

일본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구와의 관련이 충분히 파악되지 않은 점, 심리학적 분석에 약간 치우쳤다는 점 등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일본의 여러가지 풍속·관습까지 세밀히 분석한 유니크한 연구이다.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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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h Fromm (1900-1980)

독일 태생의 정신분석학자.

처음에는 사회학을 연구, 이어 정신분석학으로 바꾸고 학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심리학 논문으로 획득했다. 1934년 나치스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강사직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후에 미국으로 귀화하여 컬럼비아 대학 국제사회연구소, 베닌튼 대학 교수를 거쳐 멕시코 국립대학 교수가 되었다. 리스만 등과 함께 <카운슬 포 코레스폰던스>의 동인으로, 또 <더 리버레이션>의 집필자로 활약하여 평화운동에 공헌하였다. 동구(東歐) 제국에서도 강연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 활동을 하였다.

프롬은 호르네이, 카디너 등과 함께 신프로이트파, 프로이트 좌파라고 불리며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고 있으나 그 사고의 근저에는 나치즘에게 추방된 개인적 체험과 이로 말미암은 반파시즘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1935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이어 <인간에 있어서의 자유> <정신분석과 종교> <정상적 사회>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인간의 승리를 구해서>를 비롯하여 정신분석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당면한 과제에 대한 추구도 하고 있다.

그의 윤리적·사회적 사상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주장과 철학적 체계화의 의도가 실증성의 희박으로 나타났으나, 현대사회에 대한 인간론적(人間論的) 관점으로부터의 분석은 커다란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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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逃避 (1935)

에리히 프롬의 대표적 저작.

첫째는 니치즘의 이상심리(異常心理)에 대한 분석, 또는 나치즘 성립과정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점에서, 둘째는 사회적 성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특색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경제적 분석은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사회구조적 분석은 막스 베버에 의거하며, 다시 여기에 프로이트의 방법을 가해서 분석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나치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중산계급이며, 중산계급이 사회경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화의 길을 걸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나치즘에 흡수되어 나치즘을 지탱하게 된 과정에 주목하고,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요인인 중산계급의 사회적 성격이 사회구조상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 개념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배운 것으로 생각되며, 종래의 마르크스 주의의 토대와 의식(意識) 또는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규정성(規定性)에 관한 견해에 대해 제3의 요인으로서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나치즘의 분석에 주안을 두면서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자유' 문제를 다루며, 자본주의의 현대에 있어서의 기구와 이를 초래하는 노동·집단·조직의 기계화에 의한 자기소외(自己疏外)의 요인을 중요시하고, 사회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와의 관계, 상호규정성(相互規定性) 등을 밝히려고 한다.

사회적 성격의 개념 자체는 반드시 명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의 인간적 상황에 대한――특히 나치즘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부터의 분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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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論

인생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중심 테마로 하여 이를 생·사·사고(思考)·행위·정념(情念)이라는 사태의 여러 각도로부터 통찰함으로써 밝혀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인생론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동양 특유의 것이 있다. 이 말은 예컨대 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든 학문의 기초학을 목적으로 인간을 지식·감정·도덕 여러 면에서 철저히 분석한 '인성론(人性論)', 신체론이나 정신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규정까지 포함하는 '인간학' '인간론'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인간을 하나의 객체(客體)로서 말하자면 대상화해서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인간을 처음부터 '인생'이라는 애매한 전체에 해소시키고 이를 생각하는 의식 자체 속에 용해된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생론이 갖는 이러한 성격은 한국에서의 자연, 사회구조, 그리고 이러한 것과 관계하는 사회구조의 특수성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인생론은 더욱 원리적인 것으로부터 더욱 통일적인 의미연관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과 구별되어야 하며, 또 객체가 되어야 할 것을 객체화하는 일이 적다는 점에서 학문 일반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 성격 때문에 인생론은 매우 간접적인 시사, 또는 반대로 단적인 단정을 많이 포함하게 되고 읽는 사람에게 이해나 납득이 아니라 요해(了解)나 수용(受容)을 구하는 비유가 많은 단편(斷片)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생론이라는 개념은 동양적인 것이지만, 보통 이러한 장르에 속한다고 지적되는 몇 가지 서구 사상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의 모랄리스트들, 알랭, 예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저작이다. 확실히 이들은 행복이나 정념을 흔히 거론하고 잠언이나 아포리즘 등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점에서 인생론과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합리적 판단을 기반으로 자기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갖고 사상의 체계적·포괄적 서술에 노력한 알랭을 인생론이라는 항목에 묶어둘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너무나 크며, 오히려 이렇게 묶어둠으로써 그의 사상이 갖는 의미와 가치의 정당한 파악이 방해되는 위험성이 증대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 다른 저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요컨대 인생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서구 사상을 읽을 때는 인생론이라는 우리말의 고유한 이미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 모랄리스트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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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moraliste-傳統모랄리스트란 인간에 관한 고찰을 에세이, 잠언, 단편(斷片) 등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에 대한 프랑스의 호칭으로 '뫼르스(moeurs)를 취급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된다. 뫼르스의 어원은 라틴어의 모스(mos) 내지 모레스(mores)로 풍속, 습관, 규칙 또는 개인의 경우에서 말하면 정신상태, 성질, 생활습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뫼르스를 취급하는 사람들인 모랄리스트는 도덕가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나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현실을 탐구하는 경우, 모랄리스트는 추리(推理), 추론(推論), 혹은 원리의 적용에 의한 이해, 해석 등의 방법을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관찰이나 직관에 의존하며 형식적으로 체계를 구축하려 하지 않는 그들의 서술상의 특징도 이 방법상의 특징과 관계가 있고 이른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프랑스인 특유의 감각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모랄리스트라는 말은 18세기에 만들어졌는데, 거슬러 올라가서 16세기의 몽테뉴(<수상록>), 17세기의 라 로슈푸코(<잠언>), 파스칼(<팡세>), 라 브뤼예르(<카라크테르>)도 모랄리스트로 지목된다. 그 후의 대표적 모랄리스트는 18세기의 보브나르그(1715-1747 <성찰> <잠언>), 샹포르(1741-1794 <잠언·수상·일화>), 리바로르(1753-1808 <수첩>), 19세기의 주베르(1754-1824 <수상록>) 등이다.

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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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본명은 에밀 오귀스트 샤르티에(

mile Auguste Charter, 1868-1951)

프랑스의 사상가.

모르타뉴 오 페르슈에서 태어났다. 에콜 노르말을 졸업. 로리앙, 루앙의 리세 교수를 거친 후, 파리의 앙리 4세 리세에 옮겨 1933년 은퇴시까지 이 학교의 교단에 섰고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앙드레 모로아는 루앙 시대의 학생이다. 동시에 1906년 이후 <루앙 통신>이나 지 등에 발표한 글로 유명해졌다. 알랭 자신은 사생활을 말하는 경우가 매우 적고,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경향까지 있으나 책상 하나, 의자 둘, 침대가 있을 뿐인 간소한 살림이었던 듯하다. 단지 피아노가 한 대 있어서 그는 손가락 하나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쳤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구체적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데카르트류(類)의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데 특색이 있다. 곧 체계가(體系家)가 무시하기 쉬운 일상 세계의 각종 일에서 재료를 얻지만 이런 세계에 대한 작용의 전제, 세계를 변혁하는 힘으로서 인간의 합리적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의지를 중요시한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의지를 갖는 것에 의해서만 상황을 개선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이런 신념은 정치나 예술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기조가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권력에 대해서 개인주의적 자유를 지키는 입장, 예술에 대해서는 예술영감설(藝術靈感說)을 부인하고 이성과 의지가 소재에 질서를 부여하여 혼란해지기 쉬운 상상력을 제어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알랭은 프로포라고 하는 비교적 짧은 서술을 이어 가는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미지가 풍부하고 간결한 문체는 매력적이며 때로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일찍부터 애독자가 많았다. 그러나 알랭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이러한 문체를 즐기는 정신적 자세로는 파악하기 힘든 견고한 합리주의라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주저로는 <정신과 정념에 관한 81장>(1917), <행복론>(1928), <나의 사색의 자취>(1936) 등이 있다.

정신과 정념에 관한 8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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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情念-章 (1917)알랭의 주저.

명석 판명이라든가 기하학적 정신이라는 기반을 가지면서도 프랑스의 철학이 전통적으로 체계화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흥미있는 문제이며, 프랑스에 철학 개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적이 매우 적은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알랭도 대부분의 경우 체계적 정비를 도외시한 서술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러한 가운데도 "이론상 또는 실천상의 철학의 중요 부분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 <정신과 정념에 관한 81장>은 알랭에 있어서도, 또 프랑스 철학 전체에 있어서도 드문 예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자기의 사상이 질서정연한 서술을 감당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일종의 실험적 지향을 가진 의도적인 시도였던 듯하며, 스스로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철학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써 놓은 셈이다"라고 일부러 주석을 붙일 정도인 것이다.

전체는 7부 81장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감각에 의한 인식에 대하여'는 감각적 인식에 있어서의 이성의 작용을 분석하고 추출(抽出)하고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아무 뜻 없이 지각하는 경우에도 이미 어떠한 예상이 포함되어 있고, 만일 '거리라는 틀'이 없으면 풍경은 혼란한 인상의 집적(集積)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촉각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감촉을 하나로 정리하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곧 아무리 간단한 지각에도 이성의 작용이 가해지며, 이성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알랭은 감각적 인식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구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명백히 칸트의 입장을 전제하면서 시간·공간을 지각성립(知覺成立)의 형식, '감수성(感受性)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어떤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지각되는 것은 외계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의 다양성을 질서있게 정돈하는 이러한 형식을 구비한 정신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활동을 개시하는 정신은 조직자(組織者) 또는 조화(造化)의 신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1부에서 명백하게 된 형식·내용이라는 도식(圖式)은 제2부 '질서있는 경험에 대하여'에서도 약간 국면을 바꿔서 강조된다. 곧 경험이라는 것은 아무리 단순하더라도 관념의 참가가 있어서 비로소 경험으로 성립한다는 것, 자연이 자연으로서 알려지기 위해서는 역시 지적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제3부 '논증적(論證的) 인식에 대하여'에서는 언어에 의해 사고되는 경우의 지적 작용이 음미되고, 이하 제4부 '행위에 대하여', 제5부 '정념에 대하여', 제6부 '도덕에 대하여', 제7부 '의식(儀式)에 대하여' 등 각 장에서는 인간의 실천적 측면이 해명되고 있다. 각 부 각 장에서 알랭은 정신의 작용을 여러가지 형태로 다루고 있는데, 그러한 서술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이러한 지적 작용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반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941년에 증보 개정되었고, 제목도 <철학원론>으로 바뀌었다.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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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福論 (1926) 알랭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서 우리들 자신의 합리적 판단과 이에 바탕을 둔 의지를 중요시하는 그의 사상적 입장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전체는 93개의 프로포로 구성되어 있다. 합리적 판단은 예컨대 '명마(名馬) 이야기'라는 프로포에 잘 나타난다. 여기서 명마 브케파르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우리는 원인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원인에 대한 판단이야말로 불쾌나 불편을 감하는 기본적인 첫걸음이며 매우 뛰어난 인간적 작업임이 시사되고 있다. 의지의 중시라는 점은 '의사(醫師) 플라톤'이나 '맹세해야 한다' 등의 프로포에서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행복이 타력(他力)에 의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와 행복을 갈라놓는 최대의 요소이며, 행복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 스스로 결의(決意)하고 결심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은 심신의 양호한 상태와 분리할 수 없으나, 이러한 상태는 예컨대 신체의 건강은 체조에 의해, 마음의 좋은 상태인 낙관주의는 스스로 이를 결의하고 맹세함으로써 각기 자기 힘으로 만들어내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비관주의는 기분에 속하고 낙관주의는 의지에 속한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유쾌한 존재이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촉진하기 때문에 행복은 '의무'이며, 또한 스피노자를 본받아 '미덕'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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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Hilty (1833-1909)

스위스의 법학자·정치가, 종교적 저술가.

스위스의 베르덴베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다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연구했다. 22세에 박사 학위를 얻고 런던, 파리에 유학. 그 후 변호사 개업. 1868년 논문 <민주정치의 이론가(理論家)와 이상가(理想家)>를 발표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1873년 베른 대학 교수가 되고 국법학(國法學)과 국제법을 가르쳤다. 그 후 국회의원, 군사재판장, 헤이그의 국제중재재판소(國際仲裁裁判所)의 스위스 의원을 역임하였다. 77세에 제네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힐티는 다망한 생활을 보내는 중에도 끊임없이 양서를 가까이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서와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단테의 작품을 애독했다. 그는 법률학·정치·사회문제 등에 대하여 많은 논문과 저작을 썼다. 그중에서도 <행복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의 종교적·윤리적 저작은 유명하며 그의 명성을 높여준 것들이다. 그의 사상의 기본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이러한 저작에는 깊은 신앙, 풍부한 인생경험, 박식 등에 바탕을 둔 인생론이 전개되어 있다.

힐티는 종교적·윤리적 저작에 의해 '스위스의 성인'이라고 불리며 세계 각국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주저는 <행복론>(1891-1899),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1901-1919) 등이 있다.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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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1899) 힐티의 종교적·윤리적 저작의 대표작. 이 책은 세 권으로 되어 있다. 1891년 어떤 사범학교 교지(校誌)에 기고한 논문을 정리하여 제1권을 출판하였다. 이 책이 호평을 얻어 기고(寄稿)나 강연 의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원고를 바탕으로 1895년 제2권, 1899년에 제 3권이 출판되었다. 제1권에서는 일을 잘 하는 법, 좋은 습관, 시간을 만드는 법, 행동 등. 제2권에서는 죄와 우수, 교양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혼, 인생의 단계 등, 제3권에서는 두 종류의 행복, 신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등을 다루고 있다. 힐티에 의하면 행복은 모든 사람이 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富), 명예, 건강, 개인적 권리, 애정 등은 너무나 불안정해서 영속적인 행복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또 덕(德), 일, 인인애(隣人愛) 등도 현대와 같이 염세적 기분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행복을 이룩해 주지 못한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과 결부된 유익한 일에 있을 따름이다. 하느님에의 신앙에 의해 죄와 우수가 제거된다. 사람은 하느님을 깊이 믿고 유익한 일에 전념할 때 참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힐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으로 이상주의적 입장에서 인생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영어, 프랑스어 등 수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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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19)

힐티의 주저.

이 책은 2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1901년에 출판되었다. 제2부는 힐티가 어떤 독자의 희망에 따라 쓴 원고를 사후에 딸이 보충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본문은 달력처럼 365일로 구별되고 하루에 단문(短文) 하나씩이 배당되어 있다. 제1부의 서언에서 이 책의 목적을 말하고 견디기 어려운 불면(不眠)의 원인과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힐티에 의하면 잠 못 이루는 밤을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조용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반성·사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는 자기 자신과 말을 하거나 공상에 잠기지 않고, 하느님과 이야기하거나 충실한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 외에는 좋은 서적, 특히 성서나 아름다운 찬송가를 읽는 것이 좋다고 권고한다.

본문의 내용은 그 자신의 사색과 생활체험에 바탕을 두어 다종다양하다. 힐티는 성서를 원천으로 하는 이상주의의 입장으로부터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지침을 구체적으로 힘있게 말하고 있다. 본문에는 성서, 자작시(自作詩), 찬송가 등이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특히 성서의 인용은 자유자재여서 그의 깊은 신앙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의 지침을 주고, 병이나 불행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위안과 희망을 주고 있다.

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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構造主義

1960년대 초기부터 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각 분야의 학계(學界)에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새로운 사상형식(思想形式)으로서, 인문현상(人文現象)을 전체적이며 유기적인 구조와의 관련에서 포착, 또는 모형(模型-모델)을 원용(援用)하여 이 구조의 해명을 지향(指向), 역사적 ·시간적인 경과를 기술(記述)하기보다 그것들의 발생·생기(發生·生起)를 가능케 한 구조 내지 시스템의 분석을 중시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구조주의는 종래의 이른바 주의(主義)·사상(思想)과는 달리 근대에 있어서의 모든 과학의 내부 연구방법의 갱신으로서, 각 연구분야에서의 재래 연구 테두리의 근본적인 비판을 통해 이룩되어 온 것으로 결코 단일 '사상'으로 정의지어질 성격의 것이 못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어로 구조주의를 Structuralismes라고 복수형(複數形)으로 표현되는 수가 많음은 시사적(示唆的)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특징은 현재 구조주의의 중심인물로 간주되고 있는 레비 스트로스의 사상 형성에도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구조주의가 사상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확립하게 된 것이 1960년대 초기로서, 레비 스트로스가 그의 저서인 <야생(野生)의 사고(思考)>(La Penses Sauvage)(1962) 가운데에서 사르트르를 비판, 반(反)인간주의, 반역사주의의 시점(視點)을 요청했을 때부터라고 하겠다. 현상(現象)의 인간적 의미나 역사의 연속적 생성(生成)은 겉보기뿐임에 불과하며, 과학적 분석은 그것들을 해체(解體)하여 그 바닥에 간직된 비인간적 제구조, 비연속적 체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때까지의 사상계(思想界)의 인간주의적 관심에 대한 강력한 반동(反動)을 촉구하는 것이 되어, 이윽고 푸코에 의해 그의 철학적 테제가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구조주의가 60년대 프랑스의 유행사상으로 나타났음은 갖가지 특수 사정에 그 연유를 찾을 수 있겠으나 현대과학의 방법에 따른 문제 제기로서는 이 운동이 경시될 수 없다. 이것이 기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철학적 기초는 아직도 미확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알튀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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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lthusser (1918-1990)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48년에 철학교수 자격을 획득. 귀스돌프의 후임으로서 고등사범학교 철학교수에 취임. 제2차대전 중의 항독(抗獨) 레지스탕스 당시부터 공산당에 속하여 당내(黨內)에서의 이데올로기 쇄신을 꾀했었다.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마르크스의 재평가(再評價)를 제창. 그에 의하면 초기 마르크스의 이른바 소외론(疏外論)은 단순한 통일체(統一體)인 정신의 자기소외로서 모든 것을 낳게 하는 헤겔적(的)인 전체성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성숙된 마르크스에 있어서 전체성은 단순한 본질의 표현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조화(構造化)된 복합적 총체로서 경제적인 것을 최종심(最終審)으로 하면서 복수(複數)의 심급(審級)으로서 중층적(重層的)으로 결정된다. 중층적 결정이라는 것은 원래 프로이트나 라캉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분석 용어인데 알튜세르는 요소에 대한 구조의 효과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개념을 옮겨 바꾸는 것이다. 이른바 변증법적 모순으로서 야기되는 갖가지 운동에 관해서도 '이동(移動)', '응축(凝縮)' 등 정신분석에 유래되는 개념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주저(主著) <마르크스를 위해>(Pour Marx 1965), <자본론을 읽는다>(Cire Capital 1965).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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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Foucault (1926-1984)

비엥느 보아치에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1960년에 박사학위를 획득. 68년부터 파리의 반센 대학 교수, 70년 이후는 콜라주 드 프랑스 교수. 과학사(科學史)·사상사(思想史)의 인식론 분야를 개척, 서유럽 문명의 역사상 사고형식(思考形式)의 구조 변천을 모색하여 70년대 이후의 유럽 사상계에 새 기운을 가져온 공이 크다.

주저(主著) <정신병과 심리학>(Ma­ladi Mentale et Psychologic 1954), <고전시대(古典時代)에 있어서의 광기(狂氣)의 역사>(Histoire et beraison:Histoire de la l'age Classique 1961), <언어(言語)와 사물(事物)>(Les Mots et les Choses 1966), <지(知)의 고고학(考古學)>(L'Archeologic du Savoir 1969).

언어와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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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語-事物 Les Motx et les Choses (1966)푸코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

그는 여기서 유럽 근대사상사를 3개의 시대로 구분, 각 시대의 여러 사상을 가능케 해온 고유의 '지(知)의 장소'(에피스테메)를 상정(想定)한다. 르네상스기에서의 '유사(類似)', 17세기 고전시대에서의 '표상(表象)', 19세기에서의 '역사'의 관념은 근대에 있어서 제각기 단절(斷絶)되어 나타난 3개의 에피스테메를 표현하는 것이며, 현대사상이 집착하고 있는 '인간'이란 관념은 흔히 믿어지듯이 철학적 사색의 영원적(永遠的)인 주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르네상스나 고전시대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19세기적 에피스테메에 의해 가능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에서는 이 에피스테메 자체가 몰락하는 중이기 때문에 정신분석학과 민족학(民族學)은 모두 인간이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에 이르러 그 지(知)를 가능케 하는 무의식의 구조를 노정시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바탕으로 하여 푸코는 신(神)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함을 예감한 니체에 공감한다. 그러나 반(反)인간주의적 테제는 또한 마르크스 주의자인 알튜세르에게 있어서의 사적(史的) 유물론 해석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 되기도 했다.

지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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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考古學

L'archeologie du savoir (1969)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고고학의 대상은 문화의 전체성이 아니라 사상(史上)에 나타나는 수많은 언설(言說), 그것들을 구성하는 언표(言表) 및 그 한계나 형식을 규정하는 모든 법칙의 총체로서의 집장체(集藏體=archive)에 있다고 한다. 이것들은 언어학의 대상과는 다르나 언설을 분석하는 데에는 그 대상, 양식(樣式), 개념, 주제 등의 통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분산(分散)에서 규칙을 발견하고 파생(派生)의 체계를 기술(記述)해야만 한다는 점 등, 방법론적으로 새로운 언어학과의 친근성을 시도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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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furt 學派

한때 자유시였던 서독 프랑크푸르트시의 시민들에 의해서 1914년에 세워진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근대 시민정신의 표상이었으며, 이 대학에 부설된 사회연구소를 요람으로 형성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바이마르 공화국 건립 이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독일의 정치·사회에 미친 영향을 종합과학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그 개혁을 처방하려는 비판적 사회이론의 운동으로 출발하여 현재 구미 사회과학계에 그 자리를 확고히 굳혀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는 본래 철학부가 중추였으며 프랑크푸르트 시민의 자유정신의 전통에 상응해서 철학부는 철학적 제문제와 사회적 제 문제를 연결시킴으로써 사회와 서민생활에 관련된 연구를 그 목적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테오도로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 등 철학 정교수인 동시에 사회학 정교수이기도 한 그들과 비판적 사회이론의 주류를 이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및 유르겐 하버마스(1929- ) 등이 철학과 정치학 또는 사회학 교수로서 그 주류를 이루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이나 영원한 절대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생활, 문화, 경제, 정치 등에 관하여 비판적인 사상을 전개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현대의 역사과정을 외면적으로 기술(記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를 파악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변혁할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비판적 사회이론, 약칭해서 비판이론(die kr­itische Theorie)은 시초부터 보다 나은 사회에 관한 사상에 사로잡혔었다. 그 이론은 자본주의와 전체주의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이었다. 사회연구소의 기관지 <사회연구>에 명시되었던 바와 같이 비판이론은 20년대에 출현한 파시즘의 잔학성과 폭력성 공산주의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현대의 사회 과정 조사는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등 개별과학의 종합적 접근이 필요했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러한 시도를 강조했다.

비판적 사회이론의 제1기는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비판이론(Die Kritische Theorie, 제1·2권, 1968)의 출간으로 대표되며, 제2기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미국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연구활동을 하는 기간에 그들이 공동집필한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

rung, 1947)>을 계기로 특정지어지는 변화이며, 제3기는 아도르노가 낸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 1975)>과 30년대 초부터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공동연구자로 활약했고, 또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던 마르쿠제의 저서 <1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1964)>과 이 학파의 젊은 후계자인 하버마스의 <후기 자본주의 정당성 문제(Legitimation sprobleme im Spatkapitalismus, 1973)>로 규정된다.

<車 仁 錫>

호르크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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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Horkheimer (1895-1973)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20년대 말의 유럽 사회는 자본주의의 자멸과 자유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사회민족주의의 무력(無力)이 입증되는 경제위기에 봉착했었다.

당시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결대안으로 공산주의와 민족사회주의가 나타났다. 호르크하이머가 이끌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들은 경제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제 요인이 사회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해명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의 유래를 독점자본주의에서 찾았다. 근대 서구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합리적인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마련했으며,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이 사회의 미래를 한결 밝게 전망하게 했지만 거대한 생산체제가 인간을 그것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인들은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고 조화할 수밖에 없다. 개인은 주체성이나 자아를 버려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적 정치제도는 고도의 생산성을 올리는 데는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관료기구(官僚機構)가 필요한 경제적 현실에는 이미 맞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진정 인간이 아닌 역사적 상황에서 경제적 생활양식의 화신이 되어 버린다고 호르크하이머는 말한다.

아도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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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W. Adorno (1903-1969)

아도르노는 계몽적 이성의 부정적(否定的) 전개과정을 부정하는 '부정(否定)의 변증법(辨證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보편화와 개념화를 지향한다. 모든 것을 개념으로 통합하고 동일체(同一體)하려는 것이 이성의 특징이다. 특수성은 일반개념 안으로 포함된다. 이성의 원리는 통일의 원리이며, 이는 지배의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지배의 원리는 동일률(同一律)의 지배와 같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바로 이 지배의 원리로 연결되는 이성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것을 통일화하는 이성의 지배에 대한 철저한 고발과 비판과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것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가 기존질서의 고정화와 절대화에 저항하고 그것을 부정할 때, 어떤 유토피아가 전개된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빛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하며, 이에 비추어 현실은 비판되고 부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현실을 경험적으로 기술(記述)만 하는 실증주의는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이 유토피아는 희망이며 현실부정의 힘이 된다. 아도르노는 이 힘을 타자(他者)라고 하며, 현실을 구(救)하려는 신이가도 하다는 것이다. 이래서 아도르노의 타자사상(他者思想)을 부정적 신학(否定的神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마르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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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ert Marcuse (1898-1979)

아도르노의 부정(否定)의 변증법에 따라 부정적 사유가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긍정적 실증주의와 모순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마르쿠제에서도 같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고도 기술사회에서는 부정의 변증법이 정지상태에 있다고 판단한다. 현대사회의 부정성(否定性)을 지양할 수 있는 주체나 실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산업사회에서의 억압적인 전체주의적 경직성을 용해(溶解)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이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의의이다.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의 변증법적 발전이 부재(不在)되고 모든 상이성(相異性)을 동일화하는 풍요사회에 대한 관찰이 그의 근본문제가 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있어서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면 마루크제에 있어서는 사회의 전면관리(全面管理) 수단이 되었다. 테크놀로지의 원리가 지배의 원리이며,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정치적 전체주의와 같은 것이 된다. 전면적으로 관리된 사회에서는 이의(異議)는 있을 수 없으며, 만일 있다면 그것은 변태(變態)이고, 비정상(非正常)으로 낙인받는다. 정치적으로 봉쇄된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간의 대립은 있을 수 없으며, 1차원적 사유가 있을 뿐으로, 이러한 조건에서 부정의 변증법은 정지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성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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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社會學

여성이 처한 예속적이며 열등한 지위를 극복하고 평등을 얻기 위해 불평등한 요소를 찾으려는 노력이 다방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사회학은 이러한 불평등의 기원을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려는 입장이다. 특히 가족제도와 사회구조가 여성을 열등케 하고 예속적인 지위로 조건화했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이 남자와 같이 평등한 위치를 갖고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변화는 물론 가족제도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의 사회학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제까지 인간관계 및 생활환경을 너무 오랫동안 남성 권력 중심의 사회구조로서 제한해 왔기 때문에 현대의 남녀관계와 여자의 속성이 자연적(自然的)이며 천부적인 것으로 의식화되어 왔고,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가족제도상의 불평등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여자를 차별하는 인간관계가 차이있는 기질을 함양한다고 보고 사회구조의 변화와 동시에 가족제도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의 사회학은 경제구조적인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엥겔스로서 그는 <가족과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를 가족구조의 발달과 경제구조로 연결지어서 설명한다. 특히 여성은 인간이 가진 최초의 사유재산이라고까지 주장하며 사유재산제도와 계급사회구조의 발달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카렌 색스(Karen Sacks)는 엥겔스가 주장한 대로 사유재산제도 그 자체가 반드시 남녀불평등의 결정요인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오히려 국가경제에 있어서 공적 부문은 남자가, 사적 부문인 가사(家事)를 여자가 담당한 데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여성이 담당하고 있는 가사에 대한 보수가 계산되어 지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사람은 가사 노동의 임금화는 오히려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에 머물러 있을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 성의 사회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회화 문제이다.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t)는 <성의 정치학>에서 부권제(父權制)의 중요한 제도는 가족이라고 주장하며 "큰 사회의 대리 역할을 하는 가족은 그의 성원(成員)으로 하여금 적응하고 순응하도록 격려할 뿐만 아니라 가장을 통하여 그의 시민을 통치하는 부권제 국가 정부의 한 단위로서 행동한다"고 하며 부권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는 철저한 사회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서 부권제가 다수의 인구(여성과 아동)를 종속시키는 정치적 형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산과 전통적 이익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결혼은 재정적 결합이고 개개의 집은 기업체와 아주 비슷한 경제적 실체로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줄리에트 미첼(Juliet Mitchell), 보부아르, 에드문트 달스트룀(Edumund Dahlstr

m) 같은 사람들은 남녀관계의 개선이나 평등은 새로운 가족제도의 모색을 통해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보부아르는 여성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 한 남녀가 평등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남녀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회구조, 특히 가족제도의 개편 혹은 새로운 가족형태의 모색은 성의 사회학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방면의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김 행 자>

성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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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政治學

성(性)의 사회학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 각 분야에의 여성 참여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절실한 요청으로 제고(提高)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예가 정치와 권력에서의 여성의 소외현상 탈피 노력을 들 수 있다. 특히 정치발전의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한 나라일수록 사회 전반에서의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커지기 때문에 남녀차별을 제거하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정치라고 보는 주장이 성의 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이런 면에서는 여성 문제를 정치학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파악하려는 학자들은 가치의 재분배,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도 여성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점을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커스텐 아문젠).

이와 같은 성의 정치학에 접근하려는 대표적인 학자는 진 커크패트릭(Geane Kirkpatrick), 커스텐 아문젠(Kirsten Amun­dsen), 그리고 케이 볼스(Kay Boals)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t)도 속한다. 커크패트릭은 정치체제 내에서 정책결정자로서의 여성의 제한점, 문제 등을 연구하여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남녀평등을 추구하려 하고, 커스텐 아문젠 등은 정계에서의 여성의 소외현상을 '침묵하는 다수(silenced majority)'라 지적하고 성에 대한 편견이 현대사회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며 또한 용납되고 있는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여성문제의 해결은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케이 볼스는 성의 뚜렷한 구분을 사회나 정치체제가 하고 있기 때문에 남녀가 불평등하다고 보며, 어느 개인(여자)의 경험이 결코 그 여자 혼자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고 체제나 사회구조로 인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외에 케이트 밀레트는 남녀관계를 정치적인 관계로 보고 정치를 권력이 구조화되어 있는 관계나 한 집단의 사람들이 다른 집단을 통제 조정 배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념으로 정의하며 가부장권제도를 중심으로 남녀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金 幸 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