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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성악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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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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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na Patti(1843-1919) 19세기 후반 최대의 소프라노 가수의 한 사람으로 꼽혀 가창상의 전형이라는 정평을 받고 있다. 양친이 가수라는 혜택받은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가족과 함께 마드리드로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형부인 스타코슈에게 성악을 배웠다. 1859년 뉴욕에서 <루치아>를 불러 데뷔하였고 그 때는 '작은 프로린다'로 불렸다. 이후 구미 각지로 초청되어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 출연하였을 때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미화 5천달러의 출연료를 요구하여 크나큰 화제가 되었다. 그녀의 성질(聲質)은 서정적인 것에서 드라마틱한 범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음넓이(音域)도 매우 넓어서 그 가창(歌唱)의 박진적인 표현과 아름다운 무대의 모습은 당시의 사람들을 뇌살하였다. 흔히 '패티처럼'이라 불릴 정도로 가창의 전형으로 정평이 나 있다.

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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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e Lehmann(1848-1929) 그녀의 아버지는 가수였던 아우구스트 레만이고, 어머니는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이며 하프 주자였다.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가창을 배워, 1865년 프라하에서 <마적(魔笛)>의 제1동자(童子)로 데뷔하였다. 1870년에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베를린에 초빙되었고, 1876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출연하였으나, 1884년에는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전향,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서 이졸데를 불렀다. 미국에서 데뷔한 것은 이졸데와 <제신(諸神)의 황혼>의 브룬힐데였다. 그 후 미국 체재가 너무 길어지자 노한 독일 황제는 1891년 이후 독일로 돌아오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입국 금지가 풀려 1896년에 다시 바이로이트에 출연, 두 대륙에 걸쳐 활약하였다. 170곡의 레퍼토리를 가졌고, 최고의 가창표현을 보인 그녀는 역사적인 가수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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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llie Melba(1861-1931) 본명은 헬렌 포터 미첼(Helen Porter Mitchell)이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태생의 소프라노 가수. 1887년에 브뤼셀에서 데뷔하였다. 그녀의 신선한 목소리는 널리 사람들의 애호를 받아 레코드 녹음도 많았다. 영국 여왕 앞에서 노래를 불러 '딤'(勳爵士)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으며 책도 쓴 재원이다. 그녀가 이름 붙인 피이치 멜바로 널리 알려져 있다.

테트라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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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a Tetrazzini(1871-1940) 20세기 초엽을 장식하는 대(大)프리마돈나 시대의 한 사람이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언니인 에바와 함께 성악을 배워, 1903년 피렌체에서 <아프리카의 여인>의 이네즈역으로 데뷔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와 북미에서 활약을 계속하였다. 1907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서 <춘희>와 <루치 아>를 불러 크나큰 반응을 일으켰으며 그녀의 매력있는 명쾌한 목소리와 뛰어난 콜로라투라의 기교, 거기에 스타카토의 가창에 뛰어난 점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은퇴 후에는 <노래의 생애>(1921)와 가창의 입문서 <어떻게 부를 것인가>(1925)를 저술하는 한편 후배의 지도 양성에도 힘썼다.

갈리구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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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lita GalliGurci(1882-1963) 20세기의 초엽을 장식한 이름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 밀라노에서 태어나 처음은 피아노에 뜻을 두어 1903년 1위로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고 피아노과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 뒤 마스카니에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인정되어 1908년 로마 왕립가극장에서 <리골레토>의 지르다 역으로 데뷔하였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노래 부른 뒤 1916년 시카고에서 지르다를 다시 불렀으며, 1920년에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춘희>를 불러 일약 명성을 떨치었다. 한때는 목을 앓았으나 1935년에 수술한 결과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다음해 시카고에서 미미를 불러 재기를 꾀하였지만 지난날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국적을 옮겨 1936년 산타페에서 은퇴,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그녀의 경묘한 목소리의 기교는 정평이 나 있다.

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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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ldine Farrar(1882-1967) 20세기 초엽에 명성을 떨친 이름난 소프라노 가수. 그녀의 뛰어난 가창과 보기 드문 미모, 게다가 독일 황태자와의 사랑으로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메를로즈에서 태어나 보스턴과 뉴욕에서 음악을 배운 뒤 19세 때 베를린 궁전가극장(지금의 국립가극장)에서 <파우스트>의 말그리타 역으로 데뷔하였다. 필리 레만의 추천으로 1906년까지 궁전가극장의 멤버로 각광을 받았으며 1904년부터는 몬테 카를로, 바르샤바 등에서 미미, 마르가레테 등 많은 역을 맡아 불렀다. 1906-1921년의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있었던 화려한 무대는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이며 미국에서의 최초의 <나비부인>(1907)을 비롯하여 많은 미국 초연의 역을 맡아 30곡, 493회의 출연횟수를 헤아렸다. 무대 외에는 영화 <잔 다르크>, <카르멘>에도 출연하는 등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레퍼토리의 광범위함은 놀라우며 레코딩된 곡만도 205종을 헤아린다. 1967년 3월 미국의 오페라 팬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코네티컷에서 별세하였다.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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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sabeth Schumann(1885-1952) 베토벤의 <제9>의 초연 등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소프라노 가수. 헨리에타 존다크의 딸로 독일의 메르제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부친의 피를 이어받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함부르크 음악원에서 알마 샤드로에게 사사. 1910년에 함부르크 가극장에서 <탄호이저>의 엘리자베스를 불러 데뷔하였으며 그 성공으로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초빙됐다. 그리하여 마침 지휘를 맡고 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인정을 받아 그 후로는 그의 작품의 소개에 힘썼다. 1919년, 슈트라우스의 추천으로 빈 국립가극장으로 옮겨 프리마돈나로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대전 직전,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4년 미국에 귀화하여 많은 제자의 육성에 힘썼다.

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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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te Lehmann(1888-1976) 베를린에서 태어나 마틸데 마링거에게 사사하였다. 1909년 함부르크에서 <마적(魔笛)>의 제1동자로 데뷔를 하여 1914-1938년 사이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활약을 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나크소스의 아리아도네>나 <그림자 없는 여인> 등의 초연에 주역으로 참가하였다. 1934-1945년 동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하는 한편, 세인트 바바라에서 문하(門下)의 교육에 힘쓰고 훗날 미국에 귀화하여 많은 후배를 지도하였다. 그 뛰어난 가창과 음악성은 오페라뿐 아니라 독일 가곡의 세계로도 돌려져 시의 낭독에 뛰어난 천분을 보였다. 취입 레코드도 SP시대에 수가 많았으며 특히 슈만의 가창 등은 전형적인 것이라 하겠다. 저작도 많으며 문하생의 교육을 맡아 많은 공적을 남겼다.

스페르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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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hita Spervia(1895-1936)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 태생인 소프라노 가수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 데뷔한 이후 세계 각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카르멘>의 화려함과 팔랴의 <에스파냐 민요집>이 풍기는 향토색 짙은 가창은 정평이 나 있으며 모두 레코드화하여 후세에 남아 있다.

플라그스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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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sten Flagstad(1895-1962) 노르웨이의 소프라노 가수이며 1913년 오슬로에서 <저지(低地)>의 누리 역으로 데뷔하였다. 1933년 단역으로 바이로이트에 등장하였을 때 그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1935년부터 메토에 초빙되어 바그너의 곡을 다수 상연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심원하고 완벽한 발성을 들려주어 20세기에서 잊을 수 없는 가수의 한 사람이다.

달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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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i DalMonte(1898-1975)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이탈리아의 대(大)프리마돈나. 본명은 만토니에타 메네그에르이며 베네토의 모리아노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는 피아니스트를 지망하였으며, 손가락을 다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그 아름다운 소리가 인정되어 바르바라마르키시오에게 사사, 성악을 배우게 되었다. 1916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의 빈카피오레 역으로 데뷔하였으며 훗날 명가수 피니 코르시에게 배웠다. 그 후 토리노에서 토스카니니의 인정을 받아 <제9>의 독창자로 뽑혔고, 이어 1922년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리골레토>의 지루다로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 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으며 레코드도 많다. 패티의 전통을 계승하는 옛 형태의 프리마돈나로서는 최후의 가수이며 그 경묘한 가창에는 특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트라우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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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 Traubel(1899- ? )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한 왕년의 대(大)프리마돈나의 한사람.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공부한 뒤 1925년부터 리사이틀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 작곡자의 추천을 받아 담로시의 <조국없는 남자>의 마리로서 메트로폴리탄에 데뷔, 1939년의 지크린데의 역으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1941년에 플라그스타드가 떠난 이후 메트로폴리탄에서 최고의 바그너 가수로 인정되었으나, 1953년 지배인인 빙과 의견이 충돌하여 메트로폴리탄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멕시코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말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저작 등을 계속하였다. 만년의 모습은 영화 <나의 마음속 깊이 그대를>에서 볼 수 있으며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그의 가창은 왕년의 대가수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다.

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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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a Berger(1900- ? ) 독일 태생의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로서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헤터 베케르와 메리타 히르체르에게 배웠다. 1925년, 드레스덴에서 <마적(魔笛)>의 제1동자로 데뷔하였다. 1928-1931년 사이에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음악제에, 그리고 1934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주로 베를린 시립오페라, 국립오페라, 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 등에서 불렀으며 훗날 메트로폴리탄을 비롯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1955년에 은퇴하여 함부르크 음악원에서 후배를 지도하였다. 그 문하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는 리타시트라이를 들 수 있다. 베르거의 목소리는 투명한 아름다움과 젊음에 넘쳐 있으며 특히 독일 가곡에 뛰어났다.

밀라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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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ka Milanov(1906-1989) 본명은 쿤치라고 하는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태생의 소프라노 가수이다. 프라하와 뉴욕에서 배워 1927년 류브리아나에서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으로 데뷔하였다. 1928년 이후 자그레브의 주요 가수로서 350회나 불렀으며 토스카니니의 인정을 받아 1937년 이후 메트로폴리탄가 극장에서 활약, 특히 피아니시모의 아름다움은 정평이 나 있다.

알바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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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ia Albanese(1913- ? ) 이탈리아의 바리 태생. 주젭페 바르다살레테데스키에게 사사하여 1932년에 밀라노의 리세오극장에서 공연된 <나비부인>으로 데뷔. 그 후 이탈리아 정부 주최의 콩쿠르에서 우승, 그 후부터 이탈리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40년에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초빙되어 도미(渡美), 1945년에 미국 국적을 얻었다. 메트로폴리탄에서도 <나비부인>의 가장 일본적인 요소를 잘 표현한 가수로 정평이 있으며, 특히 이 역(役)과 <라보엠>의 '미미'에 훌륭한 자질을 보였다. 성질(聲質)은 리리코 스핀트로서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감정표현에 뛰어나 1940년경부터 1950년까지는 메트로폴리탄의 여왕으로서 활약하였다.

슈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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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Stader(1911- ? ) 스위스의 소프라노 가수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여 카룰르스루에와 취리히에서 배운 뒤 뉴욕으로 건너가 데레제 슈나베르의 문하가 되었다. 1939년 제네바의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어 잘츠부르크에서 릴리 레만상(賞)을 받았다. 주로 모차르트의 가곡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슈바르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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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sabeth Schwarzkopf(1915- ? ) 폴란드의 야로트신에서 태어났으나 당시는 독일 영토였으므로 독일의 소프라노 가수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루라 미시그바이너에게 사사하였으나 그 무렵은 메조 소프라노 가수로 간주되었다. 1938년에 베를린 국립가극장과 계약, <나크소스의 아리아도네>의 체르비네타를 불렀으며 그것을 들은 왕년의 명소프라노가수 마리아 이보긴이 감동하여 그녀를 선천적인 소프라노 가수로 키웠다. 1942년에는 빈 국립가극장과 계약, 잠시 로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역을 불렀으나 1947년 리리코 소프라노로서 안정된 가창을 들려주게 되었다. 그 심원한 감동을 주는 가창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가곡에도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영화 <장미의 기사>에서 마르샤린의 명연(名演)을 비롯하여 레코드로도 우리의 귀에 익은 명가수이다.

귀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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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de Gueden(1917- ? ) 빈 태생인 오스트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1939년 취리히에서 케르비노의 역으로 데뷔하였다. 빈 국립가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의 구사가 특징이며 또한 오페레타에 적격인 경묘한 가창의 솜씨도 놀랍다. 오스트리아의 '궁정가수'의 칭호를 갖고 있다.

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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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git Nilsson(1918- ? ) 현대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의 한사람. 스웨덴에서 태어나 1946년에 스톡홀름에서 <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역으로 데뷔하였다. 바그너, 베르디의 작품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바그너의 작품이나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트롤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가수이다.

제프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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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mgard Seefried(1919- ) 오스트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에서 배우고 1939년에 아헨에서 <아이다>의 '수녀(修女)'를 불러 데뷔하였다. 1943년 이후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지녔으며 개성적인 가창을 들려주었다. 오스트리아의 '궁정가수' 칭호를 가졌으며 남편은 슈나이더이다.

델라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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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DellaCasa(1919- ? ) 스위스 부르크도르프 출생. 마르카마가레테 헤자에게 사사. 1941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타이틀 롤 부름. 모차르트·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가 장기. 1943년에 취리히시립오페라 극장에서 <라 보엠>의 미미를 불렀으며, 그 후 얼마 동안 배우·콘서트 가수로서 활약했다. 194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아라벨라>의 즈덴카를 불렀고,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멤버가 되었다. 1950년에 잘츠부르크음악제에서 부른 <카플리치오>의 백작부인으로 주목받았으며, 1952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출연했다. 1974년에 은퇴했다.

테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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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ta Tebaldi(1922- ) 1950년대부터 1960년대는 테발디와 칼라스의 2대 프리마돈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이 강렬한 칼라스에 대하여 테발디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정통적(正統的)인 폭의 넓이를 지니며 그 가창이나 발성은 참으로 모범이 될 만하다. 페사로에서 태어나 모친의 고향인 파르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파르마의 보이토 음악원을 졸업한 뒤 당시 푸치니 가수로 알려졌던 카르멘 메디스에게 사사. 1944년 로비고에서 <메피스트페레>로 데뷔하였으며 그 뒤 토스카니니의 오디션을 받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초청되어 <오텔로>의 디즈데모나 역을 맡았다. 그러나 1965년에 약 1년간 목소리의 조정 때문에 무대를 떠났으나 곧 회복, 주로 미국에서 활약하였다.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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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Callas(1923-1977) 전후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로 테발디와 함께 프리마돈나로 불리며, 그녀만큼 저널리즘의 주목을 받은 가수도 드물다. 그리스에서 이민한 양친 아래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때 모국으로 돌아와 아테네 음악원에서 유명한 히다르고와 마르키안디에게 배워, 1938년 아테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역으로 데뷔하였다. 그 뒤 1947년에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951년부터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노르마>, <안나 보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였으며 1957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그녀의 폭넓은 성역(聲域)과 뛰어난 기교, 그리고 훌륭한 무대에서의 연기(演技)는 명가수 릴리 레만 이후의 명소프라노로 높이 평가됨과 동시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중후한 이졸데 역에서 경묘한 루치아까지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더구나 그 뛰어난 극적 표현과 완벽한 가창은 비할 바가 없다고 하겠다. 한때 이탈리아 부호 메네기니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뒤 그리스의 해운왕 오나시스와 결혼하였으나 또다시 이혼하여 세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레코드는 수없이 많으며 그 어느 것이나 모두 명연(名演)의 영예를 지니기는 하나 그러한 레코드도 무대 위에서 보이는 그녀의 진가를 충분히 전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무대를 전개하였다. 1965년경부터는 점차 무대에서 멀어진 듯한 느낌이 있으나 그 현대적인 창법과 스케일이 큰 연기 및 가창표현은 감히 뒤를 따를 사람조차 없을 정도이며, 만년은 파리에서 살았는데 그녀가 혹시 출연하면 입장료가 두 배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로스안헬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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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a De LosAngeles(1923- )본명은 빅토리아 로페츠.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태생의 소프라노 가수이다. 바르셀로나 음악원을 졸업한 뒤 1947년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그 후부터 유명해졌다. 1951년에 메트로폴리탄에 등장, 그 매혹적인 소리와 무대는 현대의 대표적 소프라노로 평가되었다.

서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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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Sutherland(1926- )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태생인 소프라노 가수이며, 현재 벨 칸토 창법의 제1인자이다. 1952년 시드니에서 구센스의 <유디스>로 데뷔, 런던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1961년에 영국 궁정가수의 칭호를 받았다. 남편은 벨 칸토 연구자이자 지휘자인 리처드 보닝이었다.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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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tyne Price(1927- ) 미시시피주의 조네스 지방의 라우레르에서 태어난 프라이스는 어릴 적부터 성가대 등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주립대학 재학 중에는 흑인가수인 폴 로브슨의 인정을 받아 장학금으로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배워, 프로렌스 페이지 킴볼 여사에게 사사하였다. 1952년에 파리의 '20세기 음악제'에서 버질 톰슨의 <4인의 성자>가 초연되었을 때 데뷔하고 그 뒤 전흑인협회(全黑人協會)가 주최한 <포기와 베스> 오페라단의 베이스로 세계 각지를 순회 연주하였다. 이 때 포기의 역을 부른 윌리엄 워필드와 결혼하였으며 1954년에 뉴욕의 타운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어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캐스트로서 등장하였다. 다음해 NBC 방송을 통해 전 미국에 방영된 <토스카>로 성공을 거두었다. 카네기홀의 오디션을 받을 때 카라얀에게 인정받아 빈 국립가극장에 초청되어 <아이다>를 불렀으며 또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였다. 1960년대에는 라 스칼라 극장에 출연하였다. 그로부터 세계의 대프리마돈나로 존경을 받았으며 1961년에 메트로폴리탄 시즌 업 첫날에 출연하는 등 화려한 활약이 계속되었다. 목소리는 리리코하며 특히 높은 음넓이의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고 레퍼토리도 매우 광범하다.

크레스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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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ne Crespin(1927- ) 프랑스 마르세유 출생. 파리음악원 졸업. 쉬잔 세스브롱 비즐 졸업. 1950년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엘자역 맡음. 바그너·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프랑스 가곡 부름.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프랑스계 최고의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활약했다. 프랑스 가수로서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명성을 얻은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포레, 드뷔시 등의 프랑스 가곡에서는 결이 곱고 우안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표현은 <장미의 기사>의 원수 부인도 적격이어서 이 역으로 코벤트가든왕립오페라극장과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에 데뷔했다. 1958년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는 <파르지팔>의 쿤드리를 불렀고 디스크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의 브륀힐데와 지클린데도 불렀다. 당연히 최고의 호평을 받은 역이었던 원수 부인도 1969년에 솔티 지휘로 디스크화되었다. 후에는 오펜바흐의 <제를스틴 대공비> 등 오페레타도 레퍼토리로 했다.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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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etta Stella(1929- ) 테발디, 칼라스 등과 함께 최후의 대형가수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프리마돈나로서 그 비할 바 없는 미성(美聲)과 뛰어난 용모는 절찬을 받고 있다. 특히 비극적인 여주인공으로서 오페라에서는 없어선 안될 가수였다. 이탈리아 페르지아에서 태어나 1950년에 스포레토의 콩쿠르에서 <트로바토레>의 레노라 역으로 입상하였다. 다음해의 베르디 사망 50년제 때에는 로마 가극장에서 델 모나코의 상대역으로 뽑혀 <운명의 힘>의 레오노라를 불렀다. 1953년에 라 스칼라 극장, 1956년에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의 화려한 무대에 초청되었으며 1958년의 푸치니 탄생 100년제에서 푸치니 주연자상을 받아 명실공히 이탈리아의 프리마돈나의 지위를 확립시켰다.

카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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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serrat Caballe(1933- )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리세오 음악원에서 배운 뒤 스위스의 바제르에서 데뷔하였다.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는 1965년에 뉴욕의 오페라 협회에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부른 뒤부터이며 곧이어 메트로폴리탄의 화려한 무대에 등장,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가창의 섬세한 처리와 뛰어난 템퍼러먼트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스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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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ta Scotto(1934- ) 이탈리아의 사보나 태생. 16세 때 밀라노로 가서 유명한 기라르디니와 오발르토에게 사사하였다. 1953년, 밀라노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춘희>의 비올레타로 데뷔하였다. 그 해에는 이미 테발디, 델 모나코 등의 명가수와 함께 카타라니의 <와리>의 소년 월터 역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서 데뷔하였다. 1957년에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단이 에딘버러 음악제에 출연하였을 때 <몽유병의 여인>의 아미나 역을 칼라스를 대신하여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에는 영국의 음악비평가상 '1964의 가수'에 뽑혔으며 다음해부터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출연, 세계의 프리마돈나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정확한 가창과 콜로라투라의 뛰어난 기교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일인자로 꼽혔다.

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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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Moffo(1935-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인에서 태어난 소프라노 가수로서 커티스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메르세델로파르토와 루이지 리치에게 사사하였다. 1955년 9월, 스폴레토의 실험극장에 초빙되어 <돈 파스칼레>의 노리나로 데뷔, 다음해인 1956년 1월에 이탈리아 방송협회의 텔레비전에서 <나비 부인>을 불러 일약 명성을 떨치었다. 그 뒤 빈, 로마 등 각지로 초청이 되어 프리마돈나로서 활약하는 한편, RCA와 계약하여 폭넓은 활약을 개시하였다. 1961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을 가진 뒤 미국의 대표적 소프라노로 인정받았다. 성량은 결코 큰 편은 아니나 풍부한 지성을 간직한 가창은 훌륭하다.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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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yneth Jones(1936- )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배운 뒤 취리히의 국제 오페라센터에서 공부하는 한편 취리히 가극장에서 데뷔하였다. 1965년 솔티의 지휘로 런던에서 <발퀴레>의 리크린데를 불렀을 때는 '제2의 로테 레만'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1966년엔 바이로이트에 초청받았으며 계속 많은 활동을 하였다.

베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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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degard Behrens(1941- ) 독일의 바렐 태생.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 졸업. 1971년 프라이부르크 시립극장 공연. 바그너 등의 독일 오페라 부름. 법률을 공부하다 성악으로 전환했다. 1973년 뒤셀도르프의 라인 독일 오페라에서 부른 <마탄의 사수> 중 아가테가 호평을 받아 이 오페라 극장에서 몇몇 배역을 부르고 취리히와 런던 등지에 객연하였다. 1977년 카라얀에게 인정받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살로메>의 타이틀 롤을 불러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제1선에 등장, 전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여주인공이라든가 <피델리오>의 레오노레 등을 불렀다. 1983-1985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니벨룽겐의 반지>의 브륀힐데로 성공을 거두었다. 강력함과 섬세함을 고루 갖춘 드라마틱 소프라노이다.

술리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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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ns Suliotis(1942- ) '제2의 칼라스'로 주목받은 그리스 태생의 소프라노 가수. 이탈리아에서 메르세데스 르코팔트에게 배우고 1964년에 나폴리의 산카를로 가극장에서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 산투차로 데뷔하여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1966년에는 라 스칼라극장에서 <나브코>를 불러 그 뛰어난 성량과 극적 표현으로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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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city Palmer(1944- ) 영국 첼튼엄 태생. 길드홀 음악학교, 뮌헨 음악대학 졸업. 1970년 퍼셀의 오페라 <디오크리지언>을 퀸엘리자베스홀(런던)에서 공연. 모차르트·로시니·몬테베르디·라모의 오페라 등을 노래함. 1970년 이후 솔리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콘서트 가수로 활약했다. 1973년에 휴스턴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으로 데뷔하여 <마적>의 파미나 등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이 밖에 로시니, 쇤베르크, 근대 프랑스 가곡 및 콘서트 가수로서도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장기로 하고 있다.

메조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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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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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e Stignani(1904-1974) 20세의 전반을 장식하는 이탈리아의 메조 소프라노의 한 사람. 나폴리에서 태어나 1925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가극장에서 <아이다>의 암네리스를 불러 데뷔했다. 1925년에서 1956년 사이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돈 카를로>의 에보리 공녀(公女), <노르마>의 아다르지자, <조콘다>의 라우라, <트로바토레>의 아주체나를 특기로 불렀다. 1937년 이후는 주로 런던의 코벤트가든왕립가극장,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활약하였다. 스티냐니의 목소리는 풍부한 울림을 지니며 음넓이도 높은 다(C)음까지 자유롭게 부르며 때때로 드라마틱한 소프라노의 역도 하였으며 연기 역시 목소리와 함께 극적인 표현력에 넘쳐 있다.

시미오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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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lietta Simionato(1910- ) 그녀의 뛰어난 가창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났으며 특히 <아이다>의 암네리스, <트로바토레>의 아즈체나는 달리 비할 바가 없을 정도의 명연(名演)이다. 북이탈리아의 포를리 태생으로 1933년에 피렌체의 벨 칸토 콩쿠르에서 우승, 라 스칼라 극장의 무대에 올랐으며 레퍼토리는 59곡을 헤아린다. 또한 그 발자취도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미치고 있으며, 1966년 2월, 피콜로 스칼라에서 개막된 모차르트의 <황제 티토의 인자>를 최후로 은퇴하여 로마에서 후진 지도에 힘썼다.

스티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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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 Stevens(1913-? )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한 메조소프라노 가수로서 뉴욕 태생이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셴레네에게 배웠다. 졸업 후 유럽으로 건너가 빈의 숏다에게 사사, 1936년 프라하에서 [미니용]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였다. 1938년 이후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초빙되었으며 또한 다음해에는 그라인드본 음악제에 출연하였다. 매우 개성이 강한 가수이며 다채로운 뉘앙스로 절찬을 받았다. 더욱이 [카르멘], [삼손과 데릴라]의 데릴라, [장미기사]의 옥타비안, [조콘다]의 라울라, [오르페우스] 등에서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었다.

바르비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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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ora Barbieri(1920- ? ) 트리에스테 태생의 메조소프라노 가수로서 그 중후한 가창과 감동적인 표현의 탁월함은 정평이 있다. 1940년 피렌체에서 데뷔하여 그 이후 라 스칼라 극장,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많으며 특히 에보리 공녀(公女), 아즈체나, 암네리스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외에 카르멘, 오르페우스 등을 특기로 하였다.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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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a Ludwig(1924- ) 독일의 대표적인 메조소프라노 가수로, 1920년대에 빈 폴크스 오페라에서 가수로 활약하였던 양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후에 아헨 가극장의 지배인이 되었으며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음악의 초보를 배우고 후에 페리체, 프니미하체크에게 사사. 1946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박쥐>의 오르로프스키로 데뷔하였다. 그 후에 다름슈타트, 하노버, 함부르크의 가극장과 계약. 1954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케르비노를 불렀으며 다음해에 빈 국립가극장과 계약하였고, 1959년에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초빙되었으며 나중에는 베를린의 독일 오페라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지성적인 가창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가곡의 분야에서도 알려져 있다. 바리톤 가수 발터 베리의 부인기도 하다.

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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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a Gorr(1926- ) 본명은 마르가리타 가이메르트라는 벨기에의 메조 소프라노 가수로서 1949년에 안트워프에서 프리카의 역으로 데뷔. 1952년 로잔의 국제콩쿠르에서 제1위를 차지하였고, 파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58년에는 바이로이트, 1962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하였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깊은 뉘앙스는 널리 인정되어 역량을 발휘하였다.

베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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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esa Berganza(1935- ) 에스파냐의 메조 소프라노 가수. 마드리드 출생.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성악을 배우고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밝고 투명한 목소리와 풍부한 표정의 서정적인 창법은 남프랑스에 데뷔했을 때 이미 완성되고 있었다. 1957년 엑스 앙 프로방스 음악제에서 <코지 판 투테>의 도라벨라로 오페라에 데뷔한 후 곧 제1선에서 노래 부르게 되었다. 1957년 에이크스 안 프로방스의 음악제에서 드라베를라의 역으로 데뷔하였다. 1957년에는 라 스칼라 극장, 그 다음 해인 1958년에는 그라인드본 음악제에서 케르비노를 불러 그 매력적인 가창과 풍부한 목소리로 일약 명성을 떨쳤다. <세비야의 이발사>의 로지나, 도라벨라, <카르멘>의 타이틀 롤,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 등 많은 역에서 최고의 가창을 들려준다. 독특한 목소리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에서 두드러지며, 콜로라투라 역시 훌륭하고 탁월하다. 가곡에는 정평이 나 있다.

코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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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orc za Cossotto(1935- ) 시미오나토가 은퇴한 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 가수이며 박력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와 극적인 가창은 정평이 있다.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 태어나 토리노 음악원을 졸업, 1957년에 밀라노의 라스칼라극장에서 프랑크의 <카르멜파(派) 수도녀의 대화>가 이탈리아에서 초연되었을 때 작곡자의 발탁으로 데뷔하였다. 이어 <나비부인>의 스즈키, <나브코>의 페네나 등을 불렀으며, 1958년에는 옥스포드 음악제에 초빙되어 <안나·보레나>에 출연, 절찬을 받았다. 1964년에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칼라스와 <노르마>로 공연하였고, 1967년에는 라 스칼라 극장의 몬트리올 만국박람공연에서 <트로바토레>의 아즈체나를 불러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의 일인자로서 기반을 굳혔다.

범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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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Bumbry(1937- ) 미국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태생의 흑인 메조소프라노 가수로서 그 음악적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1961년에 바이로이트 바그너 음악제의 <탄호이저>에서 베누스로, 또 1966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카라얀 지휘의 <카르멘>에서 주역으로 발탁, 초빙되었다. 보스턴 음악학교와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후 왕년의 명가수 로테 레만에게 사사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정평이 있는 피에르 베르낙에게 사사하였다. 1960년에 스위스의 바제르 가극장의 지휘자 바르비조에게 인정되어 데뷔하였다. 같은 해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 초빙되어 <암네리스>와 <카르멘>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육감적인 동시에 음악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흑인 특유의 비브라토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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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하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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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ine SchumannHeink(1861-1936) 체코 태생의 콘트랄토 가수이며, 후에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드레스덴에서 <트로바토레>의 아즈체나로 데뷔하였으며 레퍼토리는 약 300곡이나 되고 그 예술의 영역도 넓다. 또한 가곡에도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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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 Anderson(1902-1967) 토스카니니에게 '백년에 한번 있는 목소리'라고 격찬을 받았다는 필라델피아 태생의 알토 가수로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처음으로 출연하였다. 1925년에 실시된 뉴욕의 신인 오디션에서 1위를 차지하여 악단에 데뷔, 1938년에는 하버드대학, 1941년에는 템플대학의 명예박사를 수여받았으며 흑인영가에 새 경지를 개척한 명가수뿐만 아니라 인종평등의 상징으로 존경받아 흑인의 정신적 지지를 받았다. 1967년 뉴욕에서 사망.

페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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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hleen Ferrier(1912-1953) 영국의 랭카셔 태생의 뛰어난 알토 가수이며 초기는 오라토리오나 가곡을 불렀으며, 그 뒤 브리튼의 <루크리시아의 능욕>에서 그라인드본으로 출연하였다. 얼마 후 브루노 월터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많은 가곡을 불렀으며 지적인 가창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41세 때 암으로 요절하였다.

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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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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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Tamagno(1850-1905) 19세기 말에 활약하여 벨 칸토의 전통을 전한 최고의 테너 가수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뛰어난 목소리와 성량은 콘서트 홀의 창과 샹들리에를 진동시켰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토리노에서 태어나 가극장의 합창단원을 거쳐 1873년에 도니체티의 <폴리우토>로 데뷔하였다. 다음해 팔레르모에서 <가면무도회>의 리카르도를 불러 '트럼펫 같은 목소리'라는 평을 들었다. 1877년에 라스칼라극장에서 폰키엘리의 <낭비자>의 초연으로 데뷔, 이어 베르디의 <오텔로> 초연에서 타이트롤을 불러 절찬을 받았다. 1891년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의 초빙을 받았으며 1902년에 은퇴하였다. 그는 오페라 사상(史上)에 남는 대(大)테너의 계보상에 뚜렷이 남는 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다.

카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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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Caruso(1873-1921) 이탈리아 벨 칸토의 전형이라고도 하며 20세기 초엽의 최대 테너 가수로 알려져 있다. 밀라노에서 태어나 1894년에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레르리의 <아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목소리는 순식간에 전 이탈리아의 인기를 차지하였다. 당초에는 리리코 테너였으나 1902년에 멜바와 몬테카를로에서 <리콜레토>를 부른 뒤부터 더욱 이름을 떨쳤으며 남성적인 박력을 한층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03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여 '그레이트 카루소'로서 메트로폴리탄의 황금시대를 장식하였으며 40곡 600회의 공연을 기록하였다. 1920년 복막염으로 나폴리로 돌아와 고향에서 서거하였으나 그 역사적인 목소리와 명연(名演)은 당시 발족한 레코드에 기록되어 영원히 그 예술을 전한다.

슬레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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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Slezak(1873-1946) 체코의 테너 가수로서 파리에서 데 레스케에게 사사하여 1896년에 <로엔그린>의 독창자로 발탁되어 데뷔하였다. 베를린, 빈 등지에서 활약한 후 1909-1913년까지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출연하였다. 성량이 크고 유머에 찬 가창은 사람들의 애호를 받아 오페라 외에 가곡의 녹음 등이 많다.

스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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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o Schipa(1888-1965) 벨 칸토의 신수(神髓)를 전하는 테너 가수로 질리와 함께 주목을 끄는 스키파는 이탈리아 반도의 돌출부 끝인 '바로크의 피렌체'로 불리는 레체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에서 공부를 하며 에밀리오 피코리에게 사사, 1911년엔 베르첼리에서 <춘희>의 알프레드로 데뷔하였다. 1930년대에는 최전성기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세계 각지의 가극장에 초빙되었다. 스키파의 목소리는 결코 큰 편은 아니나 전형적인 벨 칸토의 발성법과 뛰어난 기교로 유명하며 후년에는 미국에서 <쿰파르시타> 등 파퓰러를 불러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는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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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iamino Gigli(1890-1957)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대(大)테너 가수로서, 카루소에 이어 20세기 전반에 활약하였으며 레코드의 취입을 채용한 전후가 최전성기였던 만큼 뛰어난 레코드가 많다. 북이탈리아의 레카나티에서 태어나 그 곳의 스콜라 칸토룸에서 배운 뒤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당시 유명하였던 로자티에게 사사하였다. 1914년 파르마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에 로비고의 <조콘다>로 데뷔하였다. 토스카니니의 인정을 받아 라스칼라극장의 <메피스토펠레>에 등장하여 절찬을 받았다. 1920년에는 같은 역으로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데뷔. 카루소 이후로 벨 칸토의 전통을 계승하는 테너 가수로 주목받았다. 유려한 벨 칸토 창법과 지성이 풍부하고 힘찬 가창은 듣는 이를 매혹케 하였다.

비외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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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si Bj rling(1907-1960) 스웨덴의 테너 가수이며 어렸을 때 부친과 두 형제와 함께 비외를링 남성 4중창단의 조직하여 순회연주하였다. 자란 뒤로는 왕립 오페라학교에서 공부한 후 1930년에 스톡홀름에서 돈 오타비오로 데뷔, 1938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투명한 목소리와 마음이 따스해지는 가창은 제1급의 가수로 절찬받았다.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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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Peerce(1908-1985) 본명은 야콥 팔레므스라는 순수한 미국 태생의 테너 가수. 뉴욕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하였으나 무심코 부른 노래로 스카우트되어 1933-1939년 사이에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 출연, 그동안 오페라의 공부에 힘쓰고는 1939년에 신시내티에서 <리골레토>의 공작 역을 맡아 데뷔하였다. 1941년 이후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의 수석 테너로 활약하였으나 토스카니니의 추천을 받아 그가 지휘하는 NBC의 오페라 방송에서 <보엠>, <피델리오>, <춘희>, <가면무도회> 등을 불렀으며 이 방송은 동시에 레코드화되기도 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극적 박력에 가득차 긴장도가 높은 성질(聲質)인 만큼 설득력이 있다.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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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Pears(1910-1986)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배운 뒤 에레나 게르하르트에게 사사, 합창단의 멤버로 활약하였다. 1942년에는 런던의 스트랜드 극장의 <호프만 이야기>에서 독창자로 데뷔, 그 뒤 브리튼과 협력하여 <피터 그라임스>(1945)를 비롯하여 많은 초연을 가졌으며, 그의 지성이 넘쳐흐르는 가창은 가곡의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남겼다.

탈리아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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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uccio Tagliavini(1913-1995) 테너 가수이며, 전후를 대표하는 리리코 레제로 테너이다.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경묘한 가창과 정서가 풍부한 표현이 절찬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건축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1938년에 피렌체의 벨 칸토 콩쿠르에 나가 제1위를 차지한 뒤부터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39년에 피렌체에서 <보엠>의 로돌포 역을 맡아 데뷔, 그 후 메트로폴리탄가극장, 라스칼라극장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명성을 떨쳤다.

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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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Tucker(1913-1975)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한 미국의 대표적 테너 가수이며 '브루클린 태생의 카루소'라는 애칭을 듣기도 하였다. 뉴욕에서 배운 뒤에 1945년 <조콘다>의 엔초의 역으로 메트로폴리탄에서 데뷔, 메트로폴리탄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오페라에서 수석 테너 가수로 주목받았다. 1958년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 초빙되어 <토스 카>의 카바라도시를 불렀으며, 그 이전인 1947년에는 칼라스가 이탈리아에 데뷔한 베로나의 알레나에서의 <조콘다>에서 엔초를 부르기도 하였다. 토스카니니의 인정을 받아, 1949년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방송에서 <아이다>의 라다메스를 불렀고 동시에 레코드화되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의 중심적 테너로서 600곡 이상을 노래했다. 그는 관중을 흥분케 하는 미성(美聲)의 소유자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델 모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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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Del Monaco(1915-1982) '황금의 트럼펫'이라는 형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힘찬 목소리를 타고나, 리릭 드라마틱 테너 가수로서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의 한 사람이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페사로 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조각을 배우는 한편 로시니 음악원에서는 성악을 배워 졸업한 뒤로는 로마 가극장의 연구생이 되었다. 1939년에 페사로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릿두를 불렀으나, 정식으로는 1914년에 밀라노의 푸치니 극장에서 <나비부인>의 핑커턴을 불렀을 때가 정식 데뷔로 간주되고 있다. 1943년에 전쟁으로 라스칼라극장이 파괴되어 코모에서 상연을 계속하고 있을 때 <보엠>의 알프레드로 등장, 그 후 세계 각지의 주요 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1963년에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입어 그의 재기가 위태로웠으나, 1967년 봄 로마 가극장에서의 <에르나니>로 완전히 재기, 무대로 복귀하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젊었을 때 펫페 토레비치오니에게 배운 것 외에는 질리 등의 레코드로 독학하였다.

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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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Lanza(1921-1959) 영화 <가극왕 카루소> 등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뉴욕에서 이탈리아계의 부친과 에스파냐계의 모친 사이에 태어나 소년시절을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다. 오페라 팬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트럭운전사로 있으면서 아이링 윌리엄스에게 배웠다. 어느 날 피아노를 커티스 음악학교로 운반했을 때 그 일을 하면서 부른 노래가 어찌나 훌륭했던지, 그것에 놀란 쿠세비츠키가 1942년 탱글우드에서의 <빈의 명랑한 아낙네들>의 펜톤의 역으로 출연시켜 호평을 받았다. 그 후 뉴올리언스의 오페라에 출연도 하고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나 영화출연을 위하여 비대해지는 것을 염려한 영화사의 희망에 따라 식사를 감량한 것 등이 원인이 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무대 위에서 쓰러졌다.

디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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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Di Stefano(1921- ) 델 모나코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의 대 테너 가수이며 젊었을 때의 리리컬하고 경묘한 목소리는 뛰어났으며 레코드에 많은 녹음이 있다. 시칠리아의 카타냐에서 태어나 유명한 바리톤, 몬테산토에게 사사하였다. 1946년 렛쇼 에밀리아에서 마스네의 <마농>의 데 그리에 역으로 데뷔하였으며 그 후 1948년에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을 불러 일약 인기를 모았다. 초기는 카바라도시, 빌헬름 마이스터, 엘비노, 프릿츠, 거기에 <진주잡이>의 나딜 등 경묘한 성질(聲質)의 역을 장기로 삼았으나 1953년경부터 중후한 역할을 부르게 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피아니시모는 절품되었다.

코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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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 Corelli(1921- ) 베르곤치와 함께 현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테너 가수이며 특히 푸치니의 작품에 뛰어난 재질을 보인다. 안코나에서 태어나 성가대 지휘자로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미성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성년까지는 제도공(製圖工)으로 일하였으나 친구의 소개로 성악을 배우게 되어 1951년, 피렌체에서 있었던 성악 콩쿠르에서 우승, 다음 해 스폴레토에서 <카르멘>의 호세 역으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로마 가극장,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초빙되는 등 빛나는 길을 걸었다. 초기는 그의 비브라토가 비난받기도 하였으나 1960년경 발성의 트레이닝을 바꿔 세계적으로 손꼽는 대 테너 가수로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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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or Konya(1923- ) 헝가리에서 태어나 독일 국적을 지닌 테너 가수이며 1951년 비에레펠드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 역으로 데뷔. 1958년 이후 <로엔그린>의 타이틀 롤로 바이로이트에 출연하였다. 1962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하였으며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정평이 있다.

베르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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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 Bergonzi(1924- ) 코렐리와 함께 이탈리아 테너의 쌍벽을 이루는 베르곤치는 파르마 지방 브세트에서 태어났다. 파르마의 보이트 음악원 재학중에 제2차대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전후 다시 공부를 계속하여 1948년 레체에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즉 바리톤으로 데뷔하였으나 뒤에 성질(聲質)의 변화를 알고 독학 후 1951년에 아드리아해에 면한 바리에서 <앙드레아 셰니에>의 타이틀 롤 역으로 테너로서 다시 데뷔하였다. 카라얀은 "베르디의 작품에서 베르곤치를 능가할 테너는 없다"고 극언할 정도였으며 그의 탁월한 목소리는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였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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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Gedda(1925- ) 스웨덴의 테너 가수이며 1952년 스톡홀름에서 데뷔. 1954년에 파리나 에이크스 안 프로방스에서 성공을 한 뒤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레퍼토리도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하여 그 높은 음악성과 예술성은 정평이 있다. 1957년부터 메트로폴리탄에서는 바버, 잘츠부르크에서는 리버만의 작품을 초연하였다.

비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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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 Vickers(1926- ) 캐나다 태생의 테너 가수로 토론토 음악원에서 배운 뒤에 1956년의 스트랫퍼드 음악제에서 데뷔하였다. 그 호평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왕립가극장에 초빙되어 <카르멘>의 돈 호세를 불렀으며 그 이후로는 이 가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에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초빙되었으며 다음해 빈 국립 가극장, 샌프란시스코 가극장, 그리고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출연하였다. 그 박력적인 목소리로 <오텔로>, <바르큐레>, <피델리오> 등에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라토리오 가수로도 명성이 높다. <제9교향곡>이나 오라토리오 <구세주> 등의 솔리스트로도 활약하였다.

파바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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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ano Pavarotti(1935- ) 이탈리아 모데나 출생. 모데나 사범학교 졸업. 아리고 폴라, E. 캄포 갈리아니에게 사사. 1961년 아킬레 페리 콩쿠르 1위. 1961년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공연. 로시니·벨리니·도니체티·베르디·푸치니의 오페라 부름. 카라얀에게 '카루소보다도 위대하다'고 절찬받은 세기적인 테너 가수이다. 데뷔 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노래하여 차츰 인정받았고,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1968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으며, 1971년부터는 그 곳에서 정규적으로 역을 맡았다. 폭넓은 레포토리와 최고 음역에서의 맑은 음색으로 유명하다. 오페라 이외에도 연주회·음반·텔레비전 등을 통한 폭넓은 활동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도밍고, 카레라스와 더불어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며, 1977년 내한하여 이화여대에서 독창회를 가졌으며, 1993년에도 내한공연하였다.

도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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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ido Domingo(1941- ) 에스파냐 마드리드 출생. 멕시코시티 음악원 졸업. 베르디·푸치니·바그너의 오페라 부름. 8세 때 멕시코로 건너가 피아노·지휘·성악을 공부했다. 부모가 주재하는 사르수엘 에스파냐 민요 오페라 극단에서 데뷔했고, 1961년에는 몽트뢰유에서 오페라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바리톤이었는데, 같은 해에 멕시코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를 부르고 테너로 전환했다. 1965년 마르세유, 1966년 뉴욕시티센터 오페라에 출연하던 무렵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8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코넬리의 대역으로 데뷔하여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를 부르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의 경력과 인기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세계적이다. 폭넓은 레퍼토리와 확실한 스타일의 표현력을 가진 가수로서 700회 이상 무대에 섰다. 근년에는 오페라의 지휘자로도 활약하고 있으며, 1991년과 1995년 내한공연하였다.

카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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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 Carreras(1946- )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출생. 바르셀로나 음악원 졸업. 1971년 파르마의 베르디 국제 성악 콩쿠르 1위. 1968년 도니체티의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제나로 공연. 베르디·푸치니·도니체티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민요 부름. 데뷔공연 및 콩쿠르에서의 우승으로 이름이 알려진 카레라스는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으로부터 초청받아 1972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파르마에서 <라 보엠>의 로돌프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역을 불렀고, 같은 해에 뉴욕 시티 오페라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75년 코벤트가든왕립오페라극장에서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1978년의 밀라노 스칼라극장 200년 기념공연에서는 <돈 카를로>의 타이틀 롤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카라얀의 지휘로 <돈 카를로>의 타이틀 롤과 <아이다>의 라다메스를 부르는 등 아름다운 목소리와 정열 그리고 성실한 창법과 선천적인 스타성으로 각지에서 절찬을 받았다. 1979년 로열 오페라단의 <토스카> 공연 때 몽세라 카라예와 함께 내한공연하였고, 1993년에도 내한공연하였다.

바리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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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스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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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Schulsnus(1888-1952) SP시대로부터 오페라와 독일가곡에 뛰어난 가창을 들려준 바리톤으로서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배워 1915년 함부르크에서 <로엔그린>의 헤럴드 역을 맡아 데뷔. 1917-1951년의 긴 세월에 걸쳐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서 불러 독일의 대표적 가수로 존경받았다.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코에서 불렀으며 1933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초빙됐는데 그 뛰어난 목소리와 가창이 안겨주는 깊은 정서는 1·2차대전 사이에 걸쳐 가장 뛰어난 가수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레코드로는 주로 만년에 녹음된 가곡들이 많으나 진정한 평가는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찾을 수 있으며 후년 그 목소리를 잃기까지 오페라의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판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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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Panzera(1896-1976) 스위스 태생의 바리톤 가수이며 1919년에 파리 음악원을 졸업한 후 오페라코미크극장에서 활약, 특히 드뷔시의 추천을 받아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 출연하였다. 그의 뛰어난 예술성과 향기 높은 음악적 가창은 프랑스 가곡에 새로운 생명을 주었으며 1923년에 포레는 가곡집 <잃어버린 지평선>을 그에게 증정하기도 하였다.

바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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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 Warren(1911-1960) <운명의 힘>을 끝까지 부르고 난 뒤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의 무대에서 극적인 최후를 마친 미국 태생의 바리톤 가수로서, 본명은 바레노프라이다. 뉴욕과 밀라노에서 배웠으며 1938년 메트로폴리탄의 오디션에 합격, 다음해 <시몬 보카네그라>의 파오르의 역으로 데뷔. 메트로폴리탄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수석 바리톤 자리를 차지했으며 특히 베르디의 작품을 특기로 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모스크바 등지를 방문하였고, 1953년에는 밀라노의 라스칼라극장에서 <리골레토>를 불러 절찬을 받았다. 바렌의 목소리는 힘찬 성질(聲質)과 극적인 박진력에 뛰어났으며 특히 비극성이 강한 곡에서는 절묘한 무대를 전개시켰다. 레코드도 수없이 많으며, 다만 그의 요절이 애석할 따름이다.

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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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hard H esch(1901- ? ) 독일어가 가장 아름답다는 하노버 태생으로 그 곳 음악원에서 한스 엠게로에게 사사. 1924년 오스나브리크에서 데뷔했고 다음해에는 브레멘에서 <카르멘>의 모라레스를 불렀다. 1927년부터는 쾰른에서, 1930년부터는 베를린 시립가극장과 국립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이 무렵부터 오페라 외에도 가곡의 분야에 흥미를 보여 때로는 리사이틀을 갖기도 하였다. 1930년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박쥐>의 파르케를 불렀고 이어 <마적(魔笛)>의 파파게노를 불러 크게 성공하였다. 다음해에는 토스카니니에게 초청되어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의 볼프람을 불렀다. 1933년에는 <겨울 나그네>를 녹음하여 널리 알려졌고, 1938년부터 뮌헨 음악원 교수로 활약, 많은 후진을 배출하였다.

발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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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Valdengo(1914- ? )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오텔로>, <팔스타프> 등의 명연(名演)으로 널리 알려진 토리노 태생의 바리톤 가수. 1936년에 파르마에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토 역으로 데뷔, 5년 후에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초빙되어 질리, 카니리아와 같은 당시의 명가수와 함께 <춘희>의 제르몽을 불렀다. 1946년부터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활약, 그 뛰어난 가창과 연기가 토스카니니에게 인정되어 1947년과 1949년에 <오텔로>의 야아고와 <아이다>의 아모나스로를 NBC방송을 위해 불렀으며, 1950년에는 직접 토스카니니의 지도를 맡아 <팔스타프>의 타이틀 롤을 불렀다. 이것들은 모두 음반화하여 소개되었으므로 그의 명연을 들을 수 있다.

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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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o Gobbi(1915-1984) 북이탈리아의 바사노 델그라파에서 태어나 파도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줄리오 크리미에게 성악을 배워 라스칼라극장의 연구생이 되었다. 1937년에 빈 국제콩쿠르에서 제1위를 차지, 그 해 시즌에 로마 가극장의 <카르테로네>로 데뷔하였다. 이어 다음해 여름 <로엔그린>에 출연하여 그 실력이 인정되었다. 1942년에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사랑의 묘약>의 베르코레를 부른 이후부터 전 세계의 주요 가극장에서 노래를 불러 이름을 떨쳤으며 중후한 가창과 내면적인 심오한 표현으로 절찬을 받았다. 특히 베르디의 <리골레토>, <나브코>뿐만 아니라 <시몬보카네그라>는 그의 적격으로 평가되고 있다.

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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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Taddei(1916- ? ) 현재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바리톤 가수의 한 사람이며, 제노바에서 태어나 1937년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 초빙되었다. 드라마틱한 표현에 뛰어난 반면 코믹한 연기도 멋이 있어 작품으로는 베르디나 푸치니 등을 장기로 한다. 특히 <팔스타프>에서는 경쾌하면서 소탈한 가운데 코믹품을 곁들여 제일인자로 평가받았다. 뿐만 아니라 <토스카>의 스카르피아의 역도 정평이 있다.

메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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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errill(1917- ? ) 미국의 대표적 가수이며 중후한 표현과 아름답고 폭넓은 목소리로 절찬을 받았다. 엄아인 릴리언으로부터 음악의 초보를 배우고 후에는 뉴욕에서 새뮤엘 마르골리스에게 배웠다. 1944년에 트렌톤에서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역으로 데뷔, 1945년에 메트로폴리탄의 오디션에 합격하였으며 그 해 <춘희>의 제르몽 역으로 메트로폴리탄에 등장하였다. 1950년의 시즌 업에는 <돈 카를로>의 로도리고를 불렀다. 그 후 할리우드의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토스카니니에게 인정되어 NBC의 오페라 방송과 토스카니니의 지휘 아래 <춘희>의 제르몽, <가면무도회>의 레나토를 불러 레코드화하였다.

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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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Souzey(1918- ? ) 프랑스 태생의 바리톤 가수인데, 파리대학의 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베르낙에게 사사했다. 후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44년 보컬리즈의 제1위를 차지하고 졸업. 리사이틀에서 포레를 불러 절찬을 받았다. 1946년엔 파리에서 <데이도와와 에네아스>로 오페라에도 데뷔했으며, 그는 특히 포레를 비롯한 프랑스 가곡, 그리고 독일 가곡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브루스칸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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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to Bruscantini(1919- ? ) 성격표현에 있어 현재 이탈리아에서 손꼽는 바리톤 가수이며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기까지 표현능력의 폭이 넓다. 치비타노바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루이지 리치에게 배운 뒤 1949년 밀라노의 라스칼라극장에서 치마로자의 <비밀결혼>으로 데뷔. 1951년에는 그라인드본 음악제에 초빙되어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격조 높은 표현을 구사,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폴리 악파의 희가극 등에서 경묘한 가창을 보였으며 1961년 이후로는 극적인 베르디의 작품도 레퍼토리로 삼게 되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120곡에 이르며 바흐의 오라토리오에서 현대작품에 이르는 다채로운 폭을 보였다.

프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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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do Protti(1920- ) 1959년에 <오텔로>의 야아고, 1961년의 <리골레토>의 타이틀 롤인 델 모나코와 협연한 <어릿광대>, 1963년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등의 명연으로 널리 알려진 바리톤 가수.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그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948년의 이탈리아 방송협회가 주최하는 콩쿠르에 레나타카 페키와 함께 입상, 그 해 페사로에서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로 데뷔하였다. 1950년에는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역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서 델 모나코 및 테발디와 협연하였다. 그 후 카라얀의 초청을 받아서 때때로 빈 국립가극장에 출연하였다. 후에는 스위스의 취리히 가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부드럽고 풍부한 목소리와 극적 표현에는 정평이 따랐다.

바스티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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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ore Bastianini(1922-1967) 귀족적 풍모를 지닌 화려한 무대의 모습과 다채롭고 따스한 입김을 느끼게 하는 노래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바리톤 가수. 중부 이탈리아의 고도(古都) 시에나에서 태어나 케루비니 음악원에서 배운 뒤 피렌체에서 성악을 전공. 1945년 피렌체의 국제콩쿠르에 입상하여 라벤나에서 <보엠>의 코리네 역으로 데뷔하였다. 당초는 베이스 가수로 출발하였으나 4년 후 그 목소리에 변화가 생겨나 바리톤으로서의 발성과 레퍼토리를 공부한 뒤 1951년에 볼로냐에서 상연된 <춘희>의 제르몽으로서 다시 데뷔하였다. 칼라스와 수많은 협연을 하는 등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하여 절찬을 받았으나 숙환으로 북이탈리아의 시르미오네에서 44세의 생애를 마쳤다.

시에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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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are Siepi(1923- ) 밀라노에서 태어나 1941년에 피렌체의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그 해 베네치아 근방의 스키오에서 <리골레토>의 스파라프칠레 역으로 데뷔. 전시(戰時)에는 반(反)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하여 스위스에 망명하였다. 전후에는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와 밀라노, 베네치아에서도 활약하였으며 1950년 가을에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출연한 이후 주로 미국에서 활약. 모차르트를 위시하여 베르디, 무소르크스키 등의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53-1958년 사이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해마다 출연하였으며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돈 조반니>는 영화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낭랑한 목소리와 산뜻하고도 시원스러운 모습의 스테이지 매너는 절찬을 받고 있다. 마음을 감동케 하는 가창과 그 다이내믹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하겠으며 당대(當代)의 베이스 가수로는 대표적인 존재라고 하겠다.

피셔디스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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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trich FischerDieskau(1925- ) 20세기 세계 최고의 바리톤으로서 활약한 베를린 태생의 가수이다. 부친은 고교 교사이며 테너, 모친은 피아니스트인 음악적 가정에서 자라, 11세 때 지휘 콩쿠르에 입상. 15세 때에는 <바흐의 칸타타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라이즈너의 노래를 들은 후로는 가수가 되기를 결심하여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헤르만 바이젠보른에게 사사하였으나 제2차대전이 일어나 참전, 이탈리아 전선에서 종전을 맞이하였다. 1947년에 베를린 리아스 방송국에서 녹음한 <겨울의 여행>이 널리 알려져 다음해 베를린 시립가극장과 계약하였으며 많은 곡 중 특히 피가로와 볼프람에 성공하였다. 1950년에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클렘페러의 지휘로 <대지의 노래>, 발터와 <독일 레퀴엠>을 불렀고, 1951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죽은 아기를 그리는 노래>를 공연. 이 녹음은 명연으로서 레코드에 남아 있다. 1955년에 바이로이트에 출연한 이후 전 세계에 걸쳐 활약하였으며, 특히 독일 가곡의 분야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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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l Mac Neil(1925- ) 미네아폴리스 태생의 미국 바리톤 가수로 하터와 동문(同門)인 프리드리히 쇼르에게 배웠다. 1955년경에 샌프란시스코 가극장 등 미국 각지에서 활약을 시작하였으며 1958년엔 영국 데커 레코드사에서 푸치니의 <서부(西部)의 소녀>를 녹음한 것이 호평을 받아 1959년 2월에 <에르나니>의 돈 카를로의 역으로 라스칼라극장에 데뷔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960년 4월에는 <아이다>의 아모나스로에 발탁되었다. 그 이후로 아름다운 바리톤과 뛰어난 테크닉이 인정되어 메트로폴리탄가극장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 각지의 주요 가극장에 초빙을 받았다. 레코드도 각 회사에 걸쳐 수없이 많고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자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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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Zanasi(1927- ) 이탈리아에서 손꼽는 미성을 자랑하는 바리톤 가수. 포보로냐 태생이며 마르치니 음악원에서 성악을 배움과 동시에 연극학교에서 연기에 대해서도 공부하였다. 1953년에 영화 <가극왕·카루소>를 위한 콘테스트에서 4천명 가운데서 우승하였다. 1958년에는 스칼라 극장에서 <나비부인>의 샤프레스로 초빙되었고 그 해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칼라스와 <춘희>의 제르몽 역을 맡아 협연하였다. 그리고 1957년에 로마 가극장에서 델 모나크와 <에르나니>를 불러 절찬을 받았으며,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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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Prey(1927- ) 베를린에서 태어나 어릴 때 모차르트 소년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베를린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바리톤 가수로 활약하였다. 1950년에 베를린에서 리트 리사이틀을 가져 데뷔하였다. 1951년에 비스바덴 가극장과 계약, 1955년부터는 빈 국립가극장으로 옮겨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1956년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었으며 1960년에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서 <탄호이저>의 보르프람을 불러 크게 성공하였다. 그의 활약은 오페라와 리트의 두 분야에 걸쳐 있으나 피셔디스카우보다 더욱 젊음에 넘쳐 있다.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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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Berry(1929- ) 빈 태생의 바리톤 가수. 1949년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데뷔하였으며, 독일 가극장에서 활약하였다. 1957년에 <카르멘>의 에스카미리오를 부르다가 카르멘 역의 루트비히와 결혼하였다. 그는 풍부한 목소리와 폭넓은 레퍼토리로 이 가극장의 중심이 되었다.

카푸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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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o Cappuccilli(1929- ) 이탈리아의 바리톤 가수. 트리에스테 출생. 로마의 산타체칠리아음악원 등에서 공부한 후 1956년 비오티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60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1964년 밀라노의 스칼라극장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각각 데뷔하고 그 후 세계의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리골레토> <시몬 보카네그라> <멕베스> <야고(오셀로)> 등 주로 베르디의 오페라에 출연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으며 도니체티, 벨리니 등의 작품도 노래하여 이름을 떨쳤다.

베이스바리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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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리아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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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odor Chaliapin(1873-1938) 러시아가 낳은 20세기 초 최대의 베이스 가수이다.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선천적인 미성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보리스 고두노프>의 타이틀 롤은 절찬을 받았다. 두 권의 자서전이 있고 모두가 그의 고투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파리에서 사망.

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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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io Pinza(1892-1957) 로마 태생의 베이스 가수이며 어릴 때는 기술자를 지망하였으나 목소리가 고와 볼로냐 음악원에 입학하여 1914년에 크레모나에서 <노르마>의 손티노 역으로 데뷔. 1924년 보이트의 <네로네>의 세계 초연에 출연. 1926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하였으며 그 뒤로는 거의 뉴욕에서 활약하였다. 1949년에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남태평양>에 출연하는 등 폭넓은 활약을 보였다. 그 풍부한 목소리와 표현력의 다채로움은 정평이 있으며 그 레퍼토리도 모차르트에서 이탈리아, 프랑스의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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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Hotter(1909- ) 독일 태생의 베이스바리톤 가수이며 어릴 적부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후에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합창 지휘자로 일하였다. 뮌헨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배우는 가운데 성악으로 전향, 탁월한 폴란드의 테너 가수인 데레스케 문하의 마티우스 레바에게 사사, 1929년에 프라하에서 <마적(魔笛)>의 전령(傳令)으로 데뷔하였다. 그 뒤 함브르크 및 부레스라우를 거쳐서 빈과 뮌헨 국립가극장의 멤버가 되었으며 <카푸리치오>의 초연에서 올리버를 맡아 불렀다. 그 뒤 바이로이트 바그너 음악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가수가 되었으며 바그너의 작품에 잇따라 출연하였다. 1961년,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가극장에 <니벨룽겐의 반지>를 상연할 때 연주자로 초빙되었다.

코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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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Corena(1916- ) 제네바 태생으로 스위스계 이탈리아의 베이스 가수. 어릴 때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프라이부르크의 신학교에서 배웠다. 후에 제네바의 가창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한 뒤부터는 방향을 바꿔 1947년 트리에스테의 <보리수>에서 바르람을 불러 데뷔. 다음해에 라스칼라극장에 등장하였고, 그 이후로 경묘한 가창과 뛰어난 연기로 세계적으로 활약하였다.

크리스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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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Christoff(1919-1993) 불가리아의 소피아 태생인 베이스 가수이며, 로마에서 스트라치아리에게 사사. 1946년에 로마에서 <보엠>의 코리네 역을 불러 데뷔하였고, 다음 해 라 스칼라극장에 등장하였다. 그의 뛰어난 해석과 극적 박진성은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볼 수 있으며 '노래하는 배우'로 높이 평가되었다.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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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London(1921-1985) 본명은 브르스스타인으로 캐나다의 몬트리올 태생인 베이스 바리톤 가수. 로스앤젤레스에서 배우고 1942년 할리우드 볼에서 <춘희>의 의사역으로 첫무대에 올랐으나 이 무렵은 쇼에 출연했던 때였으므로 계속해서 뉴욕의 쇼 <사막의 노래>를 불렀다. 1946년에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갔으며 1949년에 브뤼셀에서 카를 베임의 오디션에 합격, 그 해 가을 빈 국립가극장과 계약을 하여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역을 맡아 본격적으로 데뷔하였다. 1951년 이후로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등장하였으며 1960년에 <보리수 고두노프>의 타이틀 롤을 모스크바의 볼쇼이 가극장에서 불러 절찬을 받았다. 그는 폭넓고 풍부한 울림과 뛰어난 연기로 주목받았다.

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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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Tozzi(1923- )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베이스 바리톤 가수로서 시카고에서 태어나 로베르티와 리미니에게 사사. 당초에는 바리톤 가수로 1949년에 뉴욕의 지그펠드 극장에서 상연된 브리툰의 <루크리시아의 능욕>의 타루쿠이니우스 역으로 데뷔, 계속하여 런던에서 뮤지컬에 출연하였다. 그 후 밀라노에서 로란디에게 배웠고, 성질(聲質)이 베이스 바리톤임을 알자 방향을 바꿔 밀라노에서 다시 데뷔. 1954년 1월 라 스칼라 극장에서 델 모나코, 테발디와 함께 <오텔로>의 로도비코 역으로 출연하였다. 다음 해에는 메트로폴리탄가극장에 출연, <조콘다>의 아르비제를 불렀다. 1958년에는 <바넷사>의 의사역이 절찬을 받은 후 미국이나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아이다>의 람피스, <마적(魔笛)>의 사라스트로 등이다.

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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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i Giaurov(1929- ) 20세기의 최대의 베이스 가수로 손꼽히는 갸로프는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공부하였다. 1956년 소피아에서 <돈 바릴리오>를 불러 데뷔. 이어 1959년에 라 스칼라극장에 등장하여 그 뛰어난 소리가 카라얀에게 인정되어 1965년에 잘츠부르크에서 <보리수>를 불러 절찬을 받아 계속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