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관악기·오르간 그 밖의 연주가
플루트
[편집]모이즈
[편집]Marcel Moyse(1889-1984) SP시대부터 레코드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원로적인 플루트 주자. 그가 키운 제자의 활동으로 그의 주법은 오늘날의 많은 플루트 명연주자들에게 계승되었다. 1906년 파리 음악원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고,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을 비롯하여 프랑스 제1선의 관현악단 플루트 주자로 있었으며, 또 독주자로서도 활약하였다. 1932년부터 모교인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옛날부터 프랑스는 뛰어난 관악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합주악기의 일원에 지나지 않던 플루트를 기악 독주의 중요한 일부로 높인 사람이 바로 모이즈이며, 근대적 주법이 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명쾌한 기교와 더불어 풍부한 감각은 고전작품뿐만 아니라 근대 프랑스 음악에 명연주를 많이 남겼다. 한편 아들 루이 모이즈도 뛰어난 플루트 주자이다.
셰크
[편집]Gustav Scheck(1901- ? ) 블로크플레테(縱笛)의 명수로 알려진 독일의 플루트 주자이다. 또 프라이부르크 국립음악학교의 교장으로서 교육 면에서도 활약하였다. 1901년 뮌헨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를 비롯하여 독일 각지의 관현악단에서 연주자로서 활동하였으며, 1934년부터 베를린 음악학교의 교직에 취임하여 교육 면에서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바로크 음악의 연구가로 알려져 있고, 또 실제 연주를 통하여 바로크 음악에 기여하는 플루트, 특히 블로크플레테의 역할이 큼을 알게 하였다.
킨케이드
[편집]William Kincaid(1903-1967) 미국 최고의 플루트의 명수로서 알려져 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 후, 명지휘자 스토코프스키에게 인정되어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에 참가한 때가 1921년이며, 1960년까지 플루트 수석 주자로 있었다. 40년간, 실제 관현악 연주에서 음악을 연마한 킨케이드는 직업적인 미국 연주가의 하나의 형(型)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수석 주자의 자리를 후진에게 물려준 뒤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가르치는 등 교육 외에 독주자로서도 활약을 하다가 1967년 세상을 떠났다. 단정하고 안정된 주법이 특징으로 바로크나 고전작품에 뛰어난 연주를 보였다.
바나우제크
[편집]Camillo Wanausek(1906- ? )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플루트 주자. 1906년 1월 빈에서 태어나 빈 국립음악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빈 교향악단과 다른 데서 활약하였으며, 1946년에는 음악원 교수에 임명되었다. 빈 형식의 우아한 연주가 특징이었고,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빈 고전파 작품에 깊은 이해를 보였다.
바르와저
[편집]Hubert Barwahser(1906- ? )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수석 플루트 주자이다. 한편으로 실내악 연주가로서도 활약이 큰 바 있다. 네덜란드의 헤르조겐라트 태생이며, 1925년부터 함부르크의 관현악단에서 연주하다가 1935년에 콘세르트헤보우의 수석 주자로 초빙되었다. 특히 목제 플루트를 애용하고, 부드러운 음빛깔에 독특한 맛을 내었다.
움머
[편집]John Wummer(1910- ? ) 실내악 분야 외에 컬럼비아대학에서 플루트를 가르치는 등 교육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미국의 플루트 주자이다. 1950년 프라도를 비롯하여 페루피니언, 푸에르토리코 등의 카살스 음악제에 참가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비발디, 바흐 등의 바로크 작품의 연주에 정평이 있다.
레델
[편집]Kurt Redel(1918- ? ) 독일음악가의 한 사람이다. 현재 그가 창립한 뮌헨의 프로 아르테 실내관현악단의 조직자, 지휘자로서 활약하는 것 외에 독주자로서 각지를 순회 연주하였다. 1918년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나 그 곳의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각지의 관현악단의 플루트 주자를 거쳐, 1946년 데트몰트의 서북 독일음악원의 교직에 올랐다. 프로 아르테 실내관현악단을 뮌헨에 조직한 것이 1953년이며,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레델만큼 바흐를 인간적인 따뜻함 속에서 재현한 음악가는 드물다.
가첼로니
[편집]Severino Gazzeloni(1919- ? ) 이탈리아의 플루트의 명수. 자세한 경력은 알 수 없다. 그의 절묘한 피아니시모(가장 여린 소리)의 음빛깔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무지치 등과 바로크 작품의 공연도 하였지만 근대 작품에서는 남이 따르지 못하는 특질을 발휘하였다.
랑팔
[편집]Jean-Pierre Rampal(1922- ) 플루트 외에 지휘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1922년에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파리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제네바의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여 일약 유명해진 음악가이다. 독주가로서 세계의 각지를 무대로 활약하였으나, 1956년에는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의 수석 주자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관현악 분야에서 중요한 존재로 된 외에도 앙상블 방면에서 뛰어나게 활동을 하였다. 경이적인 기교와 화려한 주법은 잘 알려져 있으나, 감각의 풍부함과 함께 세련된 스타일이 그의 연주의 큰 매력이다. 바로크 작품 외에 고전파의 작품, 특히 모차르트의 음악에 깊은 이해를 보였다.
셰퍼
[편집]Elaine Shaffer(1925- ) 명지휘자 에프렘 쿠르츠 부인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플루트 주자로서도 뛰어난 존재이다. 미국 태생이다. 커티스 음악학교를 졸업 후,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외에 미국 각지의 교향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활약하였다. 쿠르츠와 결혼 후 1953년에 독주자로서 런던에서 데뷔하여 활동하였다. 여성다운 따뜻한 맛이 있는 음빛깔이 특징이다. 고전파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나타내고 있다.
니콜레
[편집]Aurele Nicolet(1926- ) 유럽에서 뛰어나게 활약한 플루트 주자의 한 사람이다. 스위스의 로잔 태생. 취리히 음악원을 거쳐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취리히 및 기타 여러곳의 관현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있었고, 1950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플루트 주자로 초빙되었다. 또 1953년부터는 베를린 고등음악원 교수로 있었다.
베이커
[편집]Julius Baker(생몰연도 미상) 미국의 플루트 주자. 연주활동 외에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로서 교육계에서도 활약하였다. 1937년 줄리아드를 졸업한 후 CBS 교향악단, 시카고 교향악단 등의 수석 플루트 주자로 있었으나 독주자로서도 활약하고, 명쾌한 표현으로 모차르트, 비발디 등의 고전과 바로크 음악에 정평을 가지고 있다.
오보에
[편집]구센스
[편집]Leon Goosscens(1897- ? ) 명지휘자 유진 구센스의 동생. 영국 음악계의 장로적 존재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명문 구센스가(家)의 한 사람으로서, 1897년에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립음악원을 졸업한 뒤 런던 필하모니를 비롯하여 영국 관현악단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다하였다. 뛰어난 기교의 소유자로서 그의 단정한 연주 스타일은 영국음악가 공통의 타입을 나타내주었다.
빈셔만
[편집]Helmut Winschermann(1920- ) 독일 데트몰트에서 독주자 및 실내악 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 루르 지방의 뮐하임에서 태어났다. 헤센 방송교향악단의 오보에 주자로 일한 뒤, 1948년 데트몰트의 북서 독일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1964년에 실내악단 '콜레기움인쉬투르멘탈레 데트몰트'의 중요한 멤버가 되었다. 매년 울름 근교의 수도원 비프린겐에서는 독일은행 주최의 '프랑크푸르트 바흐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그 조직자로는 빈셔만이 되었고, 독일 바흐 졸리스텐이 되었다. 바흐, 헨델 등 독일 바로크음악의 연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석의 깊이를 보였다.
라르드로
[편집]Andre Lardrot(1932- ) 현재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으며, 독주자로서 세계적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3월, 프랑스의 네베르에서 태어났다. 1953년에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고, 1959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취리히 방송 관현악단의 수석 주자로도 있었으나, 1962년부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또한 독주가로서도 활약하였다. 프랑스 사람다운 세련된 표정과 감각의 풍부함이 그의 오보에의 특징이며, 모차르트를 비롯한 여러 고전작가의 작품 속에서 특질을 나타냈다.
클라리넷
[편집]블라흐
[편집]Leopold Wlach(1902-1957) 빈 형식의 우아한 스타일을 지닌 오스트리아의 명수이다. 빈 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1928년부터 빈 필하모니의 수석 주자 외에 빈 필하모니 관악기 합주단을 조직하기도 하여 활약하였다. 또 빈 음악대학 교수로도 있었으며, 교육 면에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57년 빈에서 별세했으며, 그의 빈 콘체르토하우스 현악 4중주단과의 공연(共演)이 명연주로 전해지고 있다.
켈
[편집]Reginald Kell(1906- ? ) 미국에서 활약하는 영국 태생의 클라리넷의 명수. 1906년 6월, 영국의 요크셔에서 태어나, 런던의 왕립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 주자를 비롯하여 영국 1류 교향악단의 주자로 있었으며, 모교의 교수를 겸하기도 하였다. 부슈 현악 4중주단 등과 공연하여 이름을 날렸으나, 1948년 미국으로 이주, 실내악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그의 우아한 스타일은 모차르트 등의 고전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굿맨
[편집]Benjamin (Benny) Goodman(1909- ? ) 재즈 주자인지 클래식 주자인지 그 구별은 무의미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의 자세이며, 양쪽 다 일류인 점에 그의 참된 값이 있다. B.G.란 애칭으로 사랑받았던 그는 가장 폭넓은 층으로부터 애호받은 음악가이다. 1909년 5월, 시카고의 러시아계(系) 유태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하였고, 처음에는 재즈 주자로서 데뷔하였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곧 뉴욕 필하모니의 수석 클라리넷 주자 시메온 베리슨 외에 에리크 시몬, 오거스틴 뒤크, 레지널드 켈 등 일류의 연주가에게서 근본부터 주법을 다시 배웠다. 한편, 재즈밴드의 리더로서도 성공하였고, 1930년대 스윙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재즈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명쾌한 음빛깔, 뛰어난 기교가 그의 큰 특색이며, 클래식 연주에서는 과장이 없는 현대적 감각이 풍부한 점이 그의 매력이다. 바르토크를 비롯해 코플랜드 같은 음악가들이 그를 위하여 작곡하였다.
드 페이어
[편집]Gervase de Peyer(1926- ? ) 멜로스 실내합주단에 참가하고 있는 영국 클라리넷의 명수이다 1926년 런던 태생이며, 런던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고 1955년부터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 주자로 있으며, 한편으로는 독주자, 실내악 연주자로 활약하였다. 명쾌하고 우미하여, 고전파 외에 낭만파 작품에서 특질을 나타내었다.
란슬로
[편집]Jacques Lancelot(1920- ) 라무르 관현악단의 수석 주자로 있는 프랑스의 클라리넷의 명수이다. 자세한 경력은 알지 못하지만 플루트의 랑팔, 오보에의 피에를로 등이 조직한 관악기 합주단에 가담하고, 실내악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모차르트 등이 고전에 그 특질을 나타냈다.
트럼펫
[편집]보와쟁
[편집]Roger Vosin(1919- ? )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활약한 클래식 분야에서는 드물게 보는 트럼펫의 명수이다. 보스턴 교향악단의 수석 주자로 있으며, 합주음악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약을 하였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1928년 트럼펫의 명수로서 알려진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35년, 아버지가 참가하고 있던 보스턴 교향악단 주자가 되었다. 빛나는 음빛깔과 풍부한 표현력이 그의 트림펫 특징이며, 특히 합주에서는 바로크 작품에서 그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호른
[편집]브레인
[편집]Dennis Brain(1921-1957)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영국의 천재적인 호른 주자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대대로 음악가로서 뛰어난 호른 주자를 배출하여 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눈부신 재능을 나타낸 이가 데니스였다.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배웠고, 데뷔는 1938년에 하였다. 제2차대전 중 군에 입대하였고, 종전 후에는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수석 주자로 초빙되었고, 또 독주자로서도 활약하였다. 1957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연주는 경이적인 기교와 함께 기품에 넘쳐 있는 스타일이 특징이며, 특히 브리튼, 힌데미트 등의 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하고 있음을 보아도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오르간
[편집]슈바이처
[편집]Albert Schweitzer(1875-1965) 신학자·철학자·의사·음악가로서 각 분야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슈바이처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힌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에 살고, 그 뒤는 인류에의 직접적 봉사로 들어가자…"고 21세가 된 슈바이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착실하게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그의 활발한 음악활동은 전적으로 30대까지의 젊은 시대의 것이었으나, 일생을 통하여 음악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슈바이처만큼 이것저것 광범위한 생활을 한 사람도 없지만, 그이만큼 일상생활 속에 예술을 살림과 동시에, 예술 속에서 생활을 한 사람도 드물다. 당시, 독일령이던 알사스의 작은 마을 카이젤스베르크에서 태어난 것은 1875년 1월 14일이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는 신학과 철학을 배웠다. 파리에서는 샤를 비도르에게서 정식으로 오르간을 배워, 이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1903년, 모교의 교수가 되었고, 1905년부터는 의학을 배워 6년 후 국가시험에 합격하였다. 아프리카로 간 것은 1914년인 39세 때였다. 그는 가봉공화국(당시는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조그만 병원을 세웠다. 그 이후 2회에 걸친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모든 곤란과 싸워, 혼자의 힘으로 병원을 경영하였고 그 곳에다 뼈를 묻었다. 칸트의 종교철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슈바이처의 사상의 근본은 인류애의 정신이며, 올바른 윤리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생명에의 외경(畏敬)'은 그의 생애를 통한 근본이념이었다. 핵병기 반대를 부르짖은 그는 세계의 평화운동의 위대한 호프(hope)가 되기도 하였다. 195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에 추대되고,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그는 바흐의 정신을 현대에 전하였다. 특히 오르간 제작자 카바이에 코루의 영향을 받아, 오르간 음악 사상(史上) 귀중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한편 유럽의 낡은 오르간의 복구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음악가로서의 업적도 결코 작지는 않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바쳐 신념을 관철한 그는 드물게 보는 위대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SP 외에 60세를 넘어서 녹음한 음반이 몇 종류 남겨져 있지만, 인류적인 애정에 불타는 그의 정신의 극히 적은 일부분을 전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뒤프레
[편집]Marcel Dupr (1886-1971) 작곡가·교육자·즉흥연주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대가이다. 루앙 태생. 전통적인 음악 가정 출신으로 12세 때 일찍이 루앙의 성(聖) 비비안 교회의 전속 주자에 임명될 만큼 조숙하였다. 파리 음악원을 졸업한 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다. 1920년부터 3년간에 걸쳐, 바흐나 프랑스 오르간 악파를 소개하는 역사적 연주회를 열어 명성을 높였다. 1926년부터는 음악원의 교수, 1954년부터 2년간은 교장으로 있었다. 그동안 유럽, 미국에서 굉장한 연주활동을 하였다. 바흐의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가는 적지 않지만, 뒤프레만큼 거장적 스케일로 이 작곡가의 정신을 전한 사람은 적다. 또 프랑스 오르간 악파의 부흥을 도모하고, 많은 유능한 제자를 배출한 공적은 잊을 수 없다.
바인리히
[편집]Carl Weinrich(1901- ? ) 현재 프린스턴에 살며,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오르가니스트.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배우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지구에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942년부터 10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오르간을 가르친 것 외에 하버드 대학에서는 강사로 근무하는 등 연주·교수 양면에 걸쳐서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단정한 연주가 특징이며, 바흐 등의 바로크 작품에 깊은 공감을 보였다.
빅스
[편집]Edward George Power Biggs(1906-1977)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의 시민권을 얻어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오르간의 대가이다. 1906년 영국 에섹스주에서 태어나, 런던의 왕립음악원을 졸업 후 런던에서 데뷔하였고, 이어서 미국으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 이주한 것은 1932년이며, 보스턴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각지의 교향악단의 전속 주자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독주자로서도 활약하였다. 바흐의 작품 연주가로서 정평을 받게 되었지만, 특히 1946년의 바흐의 오르간음악 전곡(全曲)방송은 미국 음악계의 커다란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현대음악의 소개에도 열의를 보였지만 피스턴 등의 미국 작곡가의 대부분이 그를 위해서 작품을 썼다.
제르마니
[편집]Fernando Germani(1906- ? ) 이탈리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로마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인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배우고, 1927년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하여 이름을 높였다. 1934년,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에 교수로 초빙되고, 한편 모교인 산타 체칠리아 음악학교와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 아카데미 교수 등도 역임하고, 이탈리아·미국을 왕복하며 교육 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독주가로서도 각지에 출연하였으며, 특히 바흐의 오르간곡 전곡(全曲) 연속연주회는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이탈리아 사람다운 화려한 멜로디가 특징이며, 바흐 외에 프랑크의 작품 등에 정평을 받았다.
발하
[편집]Helmut Walcha(1907- ? ) 중후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가장 정통적(正統的)으로 전하는 장님 오르가니스트. 발하의 존재는 오늘날의 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독학으로 오르간을 배운 그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간 것은 13세경의 일이지만, 16세 때에는 완전히 시력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음악적인 진보와 완성은 모두 빛을 잃은 뒤, 그의 재능 위에 혼신의 노력을 쌓아올린 것이라고 하겠다. 1938년, 프랑크푸르트 음악원 교회음악과(科)의 교수가 되었고, 1946년부터 그 곳의 3왕교회(三王敎會) 오르가니스트로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성부의 하나하나를 다 외고, 그것들을 모아 합쳐서 전곡을 완전히 암기함으로써 연주를 하였다. 25세 때 그는 바흐의 오르간곡 전곡의 암기를 결심하고, 40세 때 뜻을 이루었다. 연주는 그야말로 엄밀하기가 짝이 없으며, 견고한 통일성에 의해서 진행되어 갔다. 독일 바로크 음악의 엄격함을 그이만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오르가니스트는 드물다.
하일러
[편집]Anton Heiller(1923-1979) 빈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오르간 주자. 하프시코드 주자 겸 작곡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빈 국립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1945년에는 모교의 오르간 교수로 있으면서 독주자·작곡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특히 1946년의 미국 각지의 리사이틀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따뜻함이 넘치는 연주는 그야말로 빈 형식을 타고 있지만, 독일 작품 외에 이탈리아·프랑스의 바로크 작품에도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알랭
[편집]Marie-Claire Alain(1925- ) 20세기 중반 활발한 활동을 한 프랑스의 여류 오르가니스트. 유명한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파리 음악원에서 모리스 뒤류프레, 마르셀 뒤프레에게 배웠다. 1950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와 1951년 파리 국제음악콩쿠르의 오르간 연주에서 1위에 입상하여 이름을 떨쳤다. 특히 바흐의 작품 연주에서는 뛰어난 해석을 나타냈다.
리히터
[편집]Karl Richter(1926-1981) 오르간 연주뿐만 아니라 지휘자, 하프시코드 연주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독일악단 제1선의 음악가이다. 독일 작센의 플라우엔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로 이주한 후는 유명한 권터 라민에게서 오르간을 배웠고, 1949년 이 곳의 성(聖) 토머스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1951년 뮌헨 국립음악학교 교수 외에 성 마가 교회의 오르간 주자, 뮌헨 바흐합창단, 그 관현악단의 지휘자 등으로 일했다. 또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정밀한 설계에 따라 음악을 쌓아올리는 것이 그의 오르간 주법이며, 지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이 무의미하게 차가운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시정(詩情)에 넘쳐 있는 점이 그의 음악에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다. 바흐의 작품 외에, 헨델 그 밖의 독일 바로크 음악에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쳄발로
[편집]노이마이어
[편집]Fritz Neumeyer(1900- ? ) 독일의 쳄발로 주자. 1917년, 출생지인 자르브뤼켄의 고등학교를 졸업 후 의학을 배웠으나, 도중에 음악을 지망하고 에르윈 보드키 등에게 쳄발로를 배웠다. 1933년, 베를린 음악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플루트의 구스타프 셰크 등과 함께 실내악단을 조직함으로써 합주 방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1944년부터는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의 교수로서 후진의 지도를 하는 한편,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독일 바로크 작품에 견실한 해석과 주법을 보였다.
하프시코드
[편집]란도프스카
[편집]Wanda Landowska(1879-1959) 20세기에 있어 가장 위대한 공적을 남긴 하프시코드 주자이며, 또한 피아니스트로서도 알려져 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 곳의 음악원을 졸업한 후,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이사온 앙리 루와 결혼하였다. 21세로 스콜라 칸토룸의 교수가 되고, 이 즈음부터 하프시코드음악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연주했으며, 특히 그녀의 표현에 필요한 악기를 프랑스의 유명한 악기회사인 플레이에르사(社)에 만들게 하였다.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수 및 그 밖의 요직에 취임했으나, 1925년부터 15년간에 걸쳐 파리 근교 산 르 라 폴레에서 음악살롱을 연 기간이 그녀의 경력의 중요한 시기라고 보겠다. 많은 청년과 연구가들이 이 곳을 찾아와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 1940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으나, 제2차대전을 피하여 미국에서 활동을 계속한 후, 1959년 8월에 별세하였다. 젊었을 때부터의 옛음악에의 애호, 특히 바흐에의 애착이 그녀를 하프시코드음악에 직접 인연을 맺게 했다고 보여진다. 그 완벽한 기교와 대가다운 스타일이 그녀의 연주에 독특한 품격을 주었다. 그녀는 연주도 뛰어난 바 있지만 더욱더 큰 공적은 묻혀 있는 악기 하프시코드에 생명을 부여하고, 나아가서는 20세기의 바로크 음악 부흥의 계기를 이룩한 데에 있다. 또 그녀에 의하여 많은 고전곡이 현대의 빛을 받은 사실도 놓칠 수 없다. 고전음악에 관한 연구도 커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의 영예를 받았다.
제를린
[편집]Ruggero Gerlin(1899- ? ) 베네치아 태생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하프시코드의 명수. 나폴리의 산 피에트로 음악원 및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 등의 교수로 있었다. 파리에서는 완다 란도프스카에게 배웠고, 프랑스에서 활약하였다. 이탈리아 바로크 외에, 프랑스 클라브생 악파, 특히 쿠프랭의 작품에 깊은 이해를 보였다.
커크패트릭
[편집]Ralph Kirkpatrick(1911- ? ) 현대 최고의 쳄발로 주자인 반다 란도프스카와는 색다른 방향을 보이고 있는 미국의 하프시코드의 명수.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란도프스카, 독일에서는 귄터 라민 등에게서 배웠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있지만, 1940년 예일 대학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 후로는 주로 미국에서 활약하였다.
베롱라크루아
[편집]Robert VeyronLacroix(1922- ) 파리 태생의 프랑스의 하프시코드 주자. 피아니스트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파리 음악원에서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배운 뒤, 스콜라 칸토룸에서 작곡도 연구하였다. 플루트 주자인 장 피에르 랑팔의 반주자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독주자, 실내악 주자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