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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샹 송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브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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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ide Bruant(1851-1925) 베르 에포크를 중심으로 활약한 위대한 샹송가수이다. 쿠르트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 하층계급의 사람들 틈에 섞이면서 그 비참한 생활을 노래로 만들었다. 카바레 '검은 고양이'와 '미르리통'을 중심으로 샹송 리얼리스트의 스타일을 확립시켜 오늘날의 샹송의 기초를 닦은 공적은 참으로 크다.

길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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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tte Guilbert(1865-1944) 베르 에포크의 무렵에 활약했던 위대한 여성가수. 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냈다. 18세로 마네킨이 되고, 23세 때 희극 여우로서 첫무대에 올랐다.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디방 자포네', '물랭루주' 등의 대스타가 되었다. 샹송의 딕션(語法)을 확립시켜, 후진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스탱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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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tinguett(1871-1956) 파리 교회의 앙갱 레 방에서 태어난 레뷰계(界)의 대스타. 어릴 적에는 꽃파는 소녀였으나 1893년에 데뷔하였다. 1906년에 '물랭루주'에서 아파쉬 댄스를 추어 인기를 끌었다. 모리스 슈발리에와의 연애 등 화려한 화제가 많았으며, 1951년까지 활약하다가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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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he Silva(1886-1941) 제1차 및 제2차세계대전의 기간에 활약한 여성 가수. 본명은 벨트파케로서, 브르타뉴의 상 블뤼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브레스트에서 보낸 그녀는, 가수가 되자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928년에 방송을 통하여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레퍼토리는 1,000곡이 넘으며 약 450곡을 레코딩하였다.

슈발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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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Chevalier(1888-1972) 레뷰계에서 활약하고 영화배우로서도 널리 알려진 샹투즈 팡테지스트. 파리의 빈민가인 메니르몽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페인트 상인이었으며, 그는 12세쯤 되면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레뷰에 출연하였다. 미스탱게트의 상대역을 맡음으로써 그녀와 맺어져서 유명해졌다. 미국으로 가서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그의 전성기를 쌓았다.

프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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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hel(1891-1951 제1차세계대전 안팎에 활약한 샹투즈 리얼리스트. 파리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장님 악사와 함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15세 때 로베르티라는 남자를 알게 되고 교육을 받아 유명해졌다. 이윽고 아파슈의 여왕 등으로 인기가 높아졌으며, 모리스 슈발리에의 애인이 되었다. 만년은 자유분방한 생활탓으로 알코올 중독이 되어 가난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다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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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ia(1892-1978) 본명은 마리즈 다미앙.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대표적인 샹투즈 리얼리스트의 한 사람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였다. 샤트레 극장에서 단역(端役)을 맡는 등의 불우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프레일과 마찬가지로 로베르티의 가르침을 받아 데뷔하였다. 이윽고 사샤 기트리에게 발견되어 점차 유명해졌다. <갈매기>, <우울한 일요일>, <남의 속도 모르고> 등의 명창(名唱)이 있다.

조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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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onne Georges( ? -1928) 벨기에에서 태어난 샹투즈 리얼리스트. 브뤼셀에서 여배우가 된 후, 제1차세계대전 중에 파리로 나왔다. 오랑피아 극장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1922년과 1924년에는 미국에서 공연을 하였다. 가슴을 앓고 알코올중독 및 신경쇠약으로 입원했으며, 바다를 마주 보는 이탈리아의 어느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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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Dubas(생몰연도 불명) 제1차 및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 활약한 샹투즈 팡테지스트. 파리의 15구(區)에서 태어나, 16세 때 여배우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1918년에 가수로서 데뷔하여 오랑피아 극장에서 부른 노래가 성공하였다. 1932년에는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로 <그리운 레스트랑>을 불러 히트를 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부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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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enne Boyer(1903- ? ) 감미로운 노랫소리로 알려진 여성가수. 본명은 에밀리엔 앙리에트 부아예로서,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태어났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부친을 잃은 뒤 여직공 또는 모델 등으로 전전하면서 빈곤에 시달렸다. 그 후 아테네 극장의 타이피스트를 하다가 발탁되어 무대에 섰다. 16세 때 가수로 전향, 1930년에 <사랑의 말씀>을 불러 디스크 대상(大賞)을 받았다.

사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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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ablon(1906-1994) 부드러운 창법으로 '프랑스의 빙 크로스비'로 불리는 남성가수. 파리 교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작곡가로서 집안에는 음악가가 많았다. 17세 때 극장의 오디션에 패스하여 예능계에 데뷔하였고, <떠나가는 그대>를 불러 1936년도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로폰을 채용한 가수로서도 알려져 있다.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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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ine Baker(1906-1975)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부친은 에스파냐 사람이며, 모친은 흑인이다. 빈곤의 밑바닥에서 자라 8세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파리로 나와, 찰스턴을 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1930년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에서 <두 사랑> 등을 노래 불러 크게 성공하였다. 1956년에는 오랑피아 극장에서 은퇴공연을 갖기도 하였으나 1959년에 다시 이 극장의 레뷰에서 롱런에 성공, 무대에 복귀했다.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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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o Rossi(1907- ? )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 이름을 크게 떨친 바 있는 샹투르 드 샤름의 제1인자. 코르시카섬의 아야초 태생으로 본명은 콘스탄티노 로시. 남프랑스의 군대에 들어가 그대로 본토에 정주(定住), 마르세유의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1934년에파리로 나와서 ABC극장이나 '카지노 드 파리'에 출연하였다. 많은 히트곡이 있으며 70세가 넘도록 현역으로 활약하였다.

모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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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io Moreno(1911- ? ) 터키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배우. 부친은 에스파냐인이고 모친은 멕시코인이었다. 2세 때부터 멕시코에서 자랐으며, 마리아치라는 향토 악단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다가 미국의 밴드 리더 막스 앨런에게 인정받고, 그 후 전속가수가 되었다. 1948년에 파리로 나와서, 1952년에 드빌의 콩쿠르에서 티노 로시상을 받았다.

트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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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Trenet(1913- ? ) 샹송에 재즈의 요소를 채택하여 혁명적인 진보를 이룩한 작사·작곡가 겸 가수. 남프랑스 나르본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때 파리로 나와 피아니스트인 조니 에스와 함께 '샤를과 조니'라는 2중창을 만들어 데뷔하였다. 후에 독립하여 1938년에는 <붕>, 1950년에는 <캐나다 여행>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라 메일>, <골목 모퉁이> 등의 걸작이 많다. 1975년 4월의 리사이틀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클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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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Claveau(1915- ? ) '샹송 드 샤름의 왕자님'으로 불리는 남성가수.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실내 장식상으로, 그도 장식가가 되었으나 마침내는 노래자랑에 우승하여 가수가 되었다. 1936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 제2차세계대전으로 한때 중단되었으나 1945년에 재출발하였다. 1950년에 이르러서는 <작은 합승마차>로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1965년 은퇴하였으나 복귀하였다가 재차 은퇴하였다.

게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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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Guetary(1915- ? ) 오페레타 분야에서의 남성가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은 그리스계(系)이다. 본명은 랑브로스 워룰른이다. 20세 때 파리로 가서 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숙부가 피아니스트 타소 야노폴로였기 때문에 그의 소개로 니농 팔랑에게 성악을 배운 뒤, 조 비용 악단의 전속가수를 거쳐 레뷰에 출연, 성공을 거두었다.

피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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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h Piaf(1915-1963) 제2차세계대전 후 최대의 여성가수로 불린다.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 뒷골목의 가수였던 모친이 구호병원으로 가다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베르빌의 길바닥에서 낳은 아이가 바로 피아프이다. 15세 때부터 골목을 누비며 노래를 불러 생활, 얼마 후에는 '자니즈'라는 카바레의 가수가 되었으나 지배인 루이 르플레의 살해 사건에 말려들어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냈다. 이윽고 레이몽 앗소, 마르그리트 모노 등의 격려를 받아 재기, <나의 병정 아저씨> 등을 불러 성공하였다. 1940년에 장 콕토의 희곡(戱曲)을 독연(獨演)하였다. 자기가 직접 작사한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을 불러 히트시켰으며, <파리의 기사(騎士)>((1951년 ACC), <파담 파담>(1952년 ADF)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이브 몽탕을 비롯하여 많은 남성가수를 사랑하는 등 그 연애경력도 화려했으나 1952년부터 4년 동안은 가수인 자크 피르스와 결혼, 1962년에는 테오 사라포와 재혼하였다.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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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tte Giraud(1916- ? ) 가정적인 체취가 풍기는 여성가수. 본명은 이베트 우롱. 파리에서 태어나 파테 마르코니 레코드회사의 타이피스트로서 근무하는 동안, 그 목소리의 매력을 인정받아 1945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다음 해에 <수국(水菊) 아가씨>를 불러 히트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애칭으로 되었다. 1952년에는 <시인의 넋>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 우리 나라에도 두 번이나 와서 공연,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한국어로 레코딩하였다.

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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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Ferre(1916- ? ) 독특한 작풍으로 널리 알려진 작사·작곡가 겸 가수.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배우는 한편, 피아노를 익혀 레오니드 사바니에프에게서 작곡법을 습득하였다. 1946년에는 파리로 진출하여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한때 클래식 분야의 작품도 다루었으나 1952년에 샹송으로 컴백하여 <사나이>, <파리 카나유> 등의 많은 히트작을 냈다. 1955년에는 자신이 만든 <싸구려 피아노의 노래>로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샹송계의 거물 중 거물로 활약하였다.

살바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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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Salvador(1917- ? )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구아들루프섬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3세 때 집안이 모두 파리로 이주하였다. 형과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어 활약하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에 장고 라인하르트 악단의 기타리스트가 되고, 1941년에는 레이 방추라 악단에 참가하였다. <힘을 내야지>를 노래한 레코드로 1949년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코믹한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다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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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le Darrieux(1917- ? ) 프랑스의 영화배우.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14세 때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을 배우는 동안 1931년에는 우연히 <무도회>라는 영화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영화계에 들어갔다. 이후 대스타로서 수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샹송 가수로도 활약하여 1960년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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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e Lebas(1917- ? ) 훌륭한 딕션으로 정평이 있는 여성가수. 파리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신문사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16세 때, 이미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데뷔는 1938년으로서 다음해에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단된 적도 있으나 전후에 다시 컴백하였다.

르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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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Lemarque(1917- ? ) 파리의 뒷골목 류 드 라프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12세 때 인쇄공장의 견습을 시초로, 여러 직업을 전전한 뒤 형과 듀엣을 만들어 '르마르크 형제'의 이름으로 데뷔하였다. 제2차대전 이후는 이브 몽탕에게 많은 작품을 제공하였다. 르마르크 자신도 솔로 가수로서 활약하여, 1956년에는 자기가 작곡한 <개구리>로 ACC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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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a Ketty(1917- ? ) 이탈리아 태생의 여성가수. 젊어서 파리에 가서 타이피스트로서 일을 하였다. 노래를 부르다가 레코드 회사에 스카우트돼 부른 몇몇 곡이 히트하였다. 1936년, <내 마음뿐>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레퍼토리 가운데서는 <기다립시다>가 유명하다.

파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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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chou(1918- ? ) 파리의 메니르몽탕 태생의 여성가수. 본명은 앙리에트 라공, 악보 출판상인인 라울 브루통의 상점에 다녔으며,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는 비행기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대전 후에는 몽마르트에서 과자 과게를 열었으며, 1947년에는 레스토랑을 개업, 손님을 모으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예명(藝名)인 파타슈는 파트 아 슈(크림 파페)에서 연유된 것이다. 모리스 슈발리에의 인정을 받아 1950년에는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서민적인 체취를 풍기는 가수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마르장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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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jane(1918- ? ) 오스트리아 빈에서 귀족의 집에 태어난 여성가수. 본명은 마리 자느 잔드반. 2년쯤 법률공부를 한 뒤, 빈의 음악학교에서 배웠고, 1937년에는 첫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어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독일에 대한 협력자로 낙인이 찍혀, 전후 한동안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였으나 1948년에 컴백하였다.

다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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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Dassarie(1919- ? ) 아름다운 목소리의 남성가수. 바스크인의 피를 이어받아 비아리츠에서 태어났다. 보르도의 음악원에서 배웠으며, 재학중에는 럭비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1930년대 말에 레이 반추라에게 인정받고 그의 악단 전속 가수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수많은 오페레타의 주역을 맡기도 했다.

율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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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Ulmer(1919- ? ) '샹송계의 채플린'으로 불리는 남성가수로서, 작곡·작사도 하였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태생이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에스파냐에서 영어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프랑스의 니스로 피난, 가수로서 카바레에 데뷔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는 파리로 옮겼다. 1947년에 <취해서>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작품으로는 <피갸르>가 유명하다.

아마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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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Amador(생몰연도 불명) 멕시코의 아카풀코 태생인 남성가수. 아버지는 집시이며, 어머니는 멕시코 여자였다. 5세 때부터 노래와 춤을 배웠으며, 1943년에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1951년에 프랑스로 와 파리에서 데뷔하였다. 라틴 리듬에 능숙하며 레퍼토리가 매우 광범위하다.

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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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Douai(1920- ) 기타를 치며 민요나 샹송 리테레르를 아름답게 부르는 남성가수. 본명은 가스통 탕숑. 두에에서 태어나 그 곳 이름을 그대로 따서 예명(藝名)으로 삼았다. 1947년에 파리의 카바레에 데뷔하였다. 프랑시스 클로드의 인정을 받고 방송에 출연하였다. 1954년에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드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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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enne Delyle(1920-1962)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일찍부터 부모를 잃어,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1939년에 아마추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1944년, 트럼페터의 에이메 발레리와 결혼하였다. 1947년에 <나를 안아주오>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1957년에는 <자바>로 ADF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에 백혈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의 보람도 없이 몬테카를로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마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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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 Mariano(1920- ) 프랑스와 국경을 인접한 에스파냐의 거리인 일른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이 곳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였으나, 내란으로 말미암아 1938년에 프랑스의 보르도로 이주하였다. 2년 후에는 음악학교에 들어가 오페라를 공부한 뒤, 1942년에 파리로 가서 오페레타에 데뷔하였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인기를 모았다.

브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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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Brassens(1921- ) 기타를 치면서 자기가 작곡한 작품을 부르는 최고의 샹소니에로 불렸다. 남프랑스 세이트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다. 1940년에 파리로 나와 방랑생활을 보낸 뒤, 1952년에 파타슈가 경영하는 '새 파타슈'에서 노래를 불렀다. 1954년에 <우산>, <무덤파는 인부>로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그 작품에는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가 있다. 노래 외에 책을 여러 권 쓰기도 했다.

몽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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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Montand(1921-1991) 이탈리아의 몬스마노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본명은 이보 리비. 1923년 온 집안은 파시스트에게 쫓겨서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이주하였다. 18세 때 데뷔하고 1944년에 파리로 진출, 에디트 피아프의 인정을 받았다. 1950년에 <바르바라>, 1951년에 <역마차의 마부>, 1952년에 <갈레리앙>, 1954년에는 에트와르 극장의 실황녹음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영화에도 많이 출연하여 우리에게도 낯익다.

프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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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ine Francois(1922- ) 미국의 발라드 창법을 익힌 여성가수. 화장품 회사의 사장 딸로서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재클린 귀유모트. 1945년에 라디오의 노래자랑에서 우승하여 가수가 되었다. 폴 뒤랑의 인정을 받아 1948년에는 첫 녹음인 <이것이 봄>, <봄>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그해에 영화 <파리의 스캔들>의 사운드트랙에 취입한 <파리의 아가씨>가 크게 히트하여, 이것이 그녀의 애칭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인>으로 1956년도의 ADF 디스크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물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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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Mouloudji(1922- ) 파리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가. 또한 작가이며 화가·배우이기도 하다. 부친은 카리비아인이며 모친은 브르타뉴 출신. 어릴 적에는 신문팔이 등을 했으나 재크 플레베르의 인정을 받아 12세쯤부터 아역(兒役)으로서 무대에 올랐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샹송을 작사하기 시작하였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1953년에 음반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아즈나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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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Aznavour(1924- ) 아르메니아인의 아들로서 파리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본명은 샤느 아즈나브리앙.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올라, 1942년에 피에르 로슈와 만나 2중창을 구성하고 노래를 불렀다. 1950년에 솔로 가수로서 출발하였으며, 작사·작곡도 다루어 크게 성공하였다.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메케 메케>의 작사, <라 마마>의 작곡 등 많은 걸작이 있다.

장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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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i Jeanmaire(1924- ) 파리 태생의 발레리나 겸 가수. 본명은 르네 장메르이며, 9세 때부터 발레를 배워 국립 오페라극장의 발레부에 들어갔다. 1948년, 롤랑 프티의 파트너가 되어 무대활약을 하였으나 후에 그와 결혼하였다. 1951년에 <다이아몬드를 먹는 여자>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에 아랑블라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노래와 춤의 스타로서 제2의 미스탄게트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미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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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k Micheyl(1925- ) 여성가수 겸 작사가.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포레트 잔 미셸이다. 리옹의 미술학교를 나와 상업미술을 하는 한편 샹송을 쓰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1947년에 리옹의 콩쿠르에서 우승, 1949년에는 파리의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는 자기가 작곡하여 직접 노래부르는 음반으로 대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도베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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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y Dauberson(1926- ) 리옹 태생의 여성가수. 부친이 영화 배급회사를 경영할 때, 그녀로 하여금 영어로 노래를 배우도록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는 독일에 진주한 미군의 장병 위문쇼의 감독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자신도 노래를 불렀다. 이집트를 순회공연한 후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데뷔하였다. 남성적인 저음이 매력적이다.

드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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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 Deguelt(1926- ) 타부르에서 태어나, 바르베즈이유에서 자란 남성가수. 1951년에 파리로 나와 소르본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인 1952년에 카바레에서 자기가 만든 샹송을 불르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프란시스 클로드의 인정을 받고, 1953년에 그의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였다. 1956년에는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보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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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Borel(1926- ) 감미로운 테너가 매력인 남성가수. 이르송에서 태어나, 1951년부터 파리의 카바레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1954년에 오페레타 <빌리티스의 노래>에 출연,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 후 코라 보케르가 경영하는 카바레 '라 토마토'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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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e Clay(1927- ) 독특한 개성을 지닌 남성가수 겸 배우. 파리에서 태어났다. 16세로 군대에 들어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고전극(古典劇)의 배우로 있었으나, 앙드레 클라보의 권유로 가수로 전향하였다. <트로와 보데>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었다. 1955년에는 <가엾은 장의 노래> 등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그 밖에 영화출연도 많이 하였다.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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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tte Greco(1927- ) 몽펠리에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도르도뉴와 보르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7세 때부터 파리에서 자랐다. 제2차세계대전 후는 상 제르망 데 프레의 지하 술집에 출입하면서 실존주의의 뮤즈로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인기에 착안한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 경영자로부터 권유받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함으로써 일약 스타가 되었다. 1951년에 도빌 콩쿠르에서 <나는 일요일이 싫어>를 불러 에디트 피아프상(賞)을 획득하였으며, 1952년에는 <로망스>로 디스크 대상, 1964년에는 피에르 마코르랑 작품을 노래한 음반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프랑스어의 뉘앙스를 살려 시적인 샹송을 들려주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유명하다.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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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laude Pascal(1927- ) 영화배우 겸 가수.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디자이너였으나 연극관계의 의상(衣裳)을 다룬 것이 계기가 되어, 미셸 오클레르의 권유로 1949년에 영화배우로서 데뷔하였다. 노래는 취미로 부를 정도였으나, 1953년에 방송으로 부르자 레코드 회사의 인정을 받아 계약을 맺었다. 1961년의 유로비전 콩쿠르에서는 <두 사람은 연 인>을 불러 그랑프리를 획득하였다.

게인스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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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 Gainbourg(1928- ) 러시아인을 양친으로 파리에서 태어난 작사·작곡가 겸 가수. 본명은 뤼샹 게인스부르.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1954년에 미옐 아르노의 인정을 받아 그녀의 반주 기타를 맡았다. 동시에 샹송도 만들기 시작하여, 1958년에 자작(自作)을 노래불러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처음 음반에서 1959년도의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작품으로는 <꿈꾸는 샹송 인형> 등의 히트가 있다.

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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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ia Lasso(1928- )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의과대학에서 외과를 배우는 한편, 노래를 좋아하여 방송국에 출입하다가 라디오 프로 사회자가 되었으며, 이어 가수로 데뷔할 기회를 잡았다. 1949년에 레코드를 처음으로 취입, 각지를 순회공연한 뒤 1954년에 파리에 도착하였으며, 다음 해에 오랑피아 극장에 진출하였다.

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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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e Renaud(1928- ) 아르망티에르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본명은 재클린 안테.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제2차세계대전중에 그 곳의 연합군 장병을 위해 노래불러 인기가수가 되었다. 전후에는 파리로 와서 작곡가 루이 가스테와 알게 되어, 그의 지도를 받고 또한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다. 1946년 이후는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1949년에는 <캐나다의 나의 오두막집>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주로 레뷰계(界)에서 활약하였다.

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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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Amont(1929- ) 보르도 태생의 샹투르 팡테지스트. 고교시절부터 연예인이 되고자 생각하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파리로 갔다. 결핵을 앓는 등 수많은 고생을 한 끝에 1954년에 드비르의 콩쿠르에 입상, 1956년에는 오랑피아 극장에 출연하였다. 1958년에 다시 이 극장 공연의 실황녹음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소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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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Sauvage(1929- ) 낭시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본명은 카트린 소니에. 10세 때부터 아누시에서 살다가 파리로 나와 1947년에 장 루이 바로우의 연극 연구소에 들어갔다. 친구들의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다 스카우트되어 카바레에 데뷔하였다. 1954년에 <사나이>로 ACC 디스크 대상을 획득, <파리 카나이유>를 히트시켰다. 1961년에도 레오 페레의 작품집 음반으로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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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Brel(1929- ) 자기가 작곡하고 노래하는 남성가수.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회사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경, 합창단을 만들어 병원 위문 등을 하였으나 1954년에 파리로 나와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1957년에 음반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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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Ferrat(1930- ) 보크레송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1954년에 데뷔하여 나이트 클럽에서 자기 작품을 노래 불렀다. 그 작품이 줄리에트 그레코의 인정을 받아 우선 샹송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졌으며, 뮤직홀의 스테이지에서 활약하였다. 1963년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알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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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 Altery(1930- ) 오페라 가수를 양친으로 하여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951년에 우연한 기회로 샹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 도비르의 콩쿠르에서 <그가 내게 키스할 때>를 불러 앙드레 클라보상을 수상하였다. 벨 에포크의 샹송을 부른 음반 디스크로 1957년도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아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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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e Arnaud(생몰연도 불명) 남프랑스의 툴롱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노래는 취미 정도였으나 시인 프랑시스클로드와 결혼, 그가 경영하는 '미로르 라르스이유'라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1952년, 도비르의 콩쿠르에서 <그대는 원했다>를 불러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보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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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a Vaucaire(생몰연도 불명) 마르세유 출신의 여성가수. 처음에는 배우였으나 1939년에 파리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우승하여 가수로 전향하였다. 1941년에 ABC 극장의 신인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에디트 피아프나 프레르의 인정을 받았다. 1955년과 1956년에도 연이어 음반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샹송 리테레르를 주요한 레퍼토리로 삼으며, 시인 미셸 보케르의 부인이다.

코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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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Cordy(1930- ) 벨기에의 브뤼셀 태생인 여성 팡테지스트. 1948년에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그 곳의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에서 데뷔하였다. 1952년에 도비르 콩쿠르에서 모리스 슈발리에상을 수상하였다. 역시 그 해에 오페레타 <꽃피는 길>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955년에는 <오오, 베시>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였다.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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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1930- ) 파리 태생의 여성가수 겸 피아니스트. 18세 때부터 클래식의 가곡을 배운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고생을 하였다. 1950년에는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카바레를 경영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가수가 되었으며, 자작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노래 불렀다. 1960년에는 브라상스의 작품을 노래한 음반으로 ADF 디스크 대상, 1965년에는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부른 음반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그 노래는 문학적 향기가 짙고 페시미스틱한 뉘앙스가 깃들여 호평이 대단했다.

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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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ette Renard(1930- )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어렸을 때 첼로를 배웠으나 13세 때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악단 지휘자 레이몽 르글랑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그의 덕택으로 악단의 전속가수가 되었으며 18세로 ABC 극장의 레뷰에 출연하였다. 1956년에는 도비르 콩쿠르에서 <나무와 사람>을 불러 조르주 브라상스상을 수상하였다. 그 해 뮤지컬 <다정스런 이르마>의 주역에 발탁되어 대성공하였다. 1947년에 음반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베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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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y Beart(1931- )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니스에서 교육을 받은 후 16세로 파리에 나와 음악학교에 들어갔으나 엔지니어로 전향, 건설 관계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술집에서 부른 자신이 작곡한 노래가 인정을 받게 돼 기타를 손에 들고 가수로서 데뷔, 1958년에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해 영화 <강은 부른다>의 주제가를 만들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오프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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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ues Aufray(1932- ) 누이이 슐센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영화배우 파스칼 오드레의 오빠로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건축학을 배웠으나, 그 후 기타를 익혀 친구들과 밴드를 조직, 활약하였다. 1959년부터 가수로서 포크송이나 자작곡을 불러 오랑피아 극장의 실황녹음으로 1965년도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루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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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e Louvier(1933- ) 파리 태생의 여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고교를 나온 후 저널리스트가 되어 활동, 20세로 소설의 처녀작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샹송도 작사하며 1953년에 <누가 나를 해방시켜 줄까>라는 노래를 도비르 콩쿠르에 출품하여 그랑프리를 획득하였다. 또한 라디오의 인터뷰에서 이것을 불러 가수로서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랑글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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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e Langlois(1935- ) 파리 태생의 여성가수. 집이 가난하여 5세 때부터 피갸르가(街)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활을 유지하였다. 1947년에 장 노앙을 만나 그의 멤버에 참가하였다. 당시 그녀는 에디트 피아프와 꼭 닮은 목소리로 인기가 있었다. 1949년부터 1953년에 걸쳐 한동안 저조(低調)하였으나 1958년에 최초의 음반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 컴백에 성공하였다.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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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ida(1935-1987)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본명은 욜란다 질리오티. 어릴 때 집안이 모두 카이로로 이주하였다. 1954년 미스 이집트로 선발됨을 계기로 파리에 나왔다. 1956년에는 오랑피아 극장의 오디션에 패스하고, 심사원 류시앙 모리스의 인정을 받은 후에 그와 결혼하였다. <밤비노>의 대히트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콜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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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 Colombo(1937- ) 굴뚝 소제부의 아버지와 집시 여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어릴 때, 양친이 이탈리아 순례의 길에서 그녀를 수도원에 버리고 나온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처음에는 발레리나에 뜻을 두었으나 병을 얻어 가수로 전향, 1956년에 데뷔하여 1959년에 오랑피아 극장에 진출하였다.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으며,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카사비앙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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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a Casabianca(1942- )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태생인 여성가수. 부친은 프랑스인인 조선기사(造船技師)이며, 모친은 에스파냐인이다. 3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지낸 뒤 부친과 함께 지중해 항구를 전전한 끝에 1958년에 프랑스로 왔다. 1960년 여름, 프로방스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그해 레코드를 취입하여 성공하였다.

부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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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ine Boyer(1942- ) 부친은 자크 피르스, 모친은 루시엥 부아예로서,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연극교실에 다니는 한편, 노래 교육을 받아 1957년에 모친의 헝가리 순회공연에 동행하여 노래를 불렀다. 1960년에는 유로비전 콩쿠르에서 <톰 피리비>를 불러 그랑프리를 획득, 신진가수 프랑수아 류비아나와 결혼하였다.

아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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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tore Adamo(1943- )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코미조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작곡가. 4세 때 온 집안이 모두 벨기에로 이주하였다. 12세쯤부터 교회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또 15세부터는 시도 쓰기 시작, 곡을 붙여 혼자 즐기고 있는 것을 학우들의 권유로 콘테스트를 받고 우승,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어 1962년에 <상 트와 마미>로 스타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 후에도 많은 히트를 내었다. 1965년에는 파리로 진출, 오랑피아 극장에서 출연하였다.

셰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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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ila(1946- ) 본명은 아니 샹셀. 파리 근교의 크레테유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8세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고 피아노와 노래를 불렀다. 학우들과 '레 기타 브러더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노래를 불렀으며, 1962년에 레코드에 데뷔. 그 때의 곡명 <세일라>를 예명으로 하였다. <꿈꾸는 하와이> 등의 히트곡이 유명하다.

마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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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eille Mathieu(1946- ) 아비뇽 태생의 여성가수. 공장에 다니면서도 노래에 뜻을 두어, 15세 때 고향에서 열린 샹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바 있다. 그 후 에디 바클레에게 발탁되어서 1965년에 신인 콘테스트에 출연, 다음해에 데뷔하여 <사랑의 신조(信條)>로 히트, 스타가 되었다. 목소리나 창법이 에디트 피아프와 흡사하여 '제2의 피아프'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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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Gall(1947- )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가수. 부친은 작사가인 로벨 갈이다. 1963년에 폴 발레리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수로서 레코드에 데뷔하였다. 1965년, 유로비전 콩쿠르에서 룩셈부르크 대표로서 등장, <꿈꾸는 샹송 인형>을 불러 우승, 순식간에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레 카트르 바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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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Quatres Barbus 1938년에 피레네 지방의 바캉스 캠프에서 서로 알게 된 4명이 조직한 보컬 그룹. 처음은 '동반(同伴)'이라고 불렀으나, 전쟁으로 일단 해산한 뒤인 1945년에 다시 재조직하여 '수염의 네 사나이'라고 불렀다. 모두가 진짜 수염을 길러 코믹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1950년과 1955년(ACC), 그리고 1955년(ADF)에도 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레 프레르 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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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reres Jacques 1944년에 노동문화협회에서 만난 네 사람이 결성한 남성 4중창단. 앙드레 및 조르주 베레크 형제, 폴 트렌느, 프랑수아 스베이랑의 합창을 피아니스트인 피에르 필리프가 반주하였다. <재산목록>으로 1951년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팬터마임을 샹송에 결부시켜 인기가 높았다.

레 콤파뇽 드 라 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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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Compagnons De La Chanson 샹송의 코러스 그룹. 1941년에 리옹에서 결성된 레지스탕스의 단체 '프랑스의 동지들'이 남프랑스의 피난민 위안을 위하여 루이 리에발을 리더로 하여 소년 합창단 '음악의 벗'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후까지 계속되어, 1945년에 파리의 보비노 극장에 출연하였다. 다음 해에는 둘로 갈라져 새로 9명의 멤버로 된 '샹송의 벗'이 생겨났다. 에디트 피아프의 인정을 받아 1946년에 <3개의 종>을 불러 크게 히트, 1948년에 <라마리>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다.

라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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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ia Lavila(1957- ) 알제리 오랑 출생. 1974년도의 <샐뤼 레 코반>지(誌)의 인기투표 여성부에 3위로 랭크된 프랑스 팝스계의 신성이었다. 주위의 권유로 음악학교에 들어가 노래를 배우고 9세 때 찰리티쇼에서 영화음악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불러 주목을 받은 후 많은 콩쿠르에서 우승, 16세 때 <사랑한다면>으로 정식 데뷔, 크게 히트했다.

쥐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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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k Juvet(1950- ) 스위스 몽트뢰 출생. 프랑스의 싱어 겸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젊은 샹송가수, 7세경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4세 때에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으나 비틀스의 영향으로 팝송을 동경하게 되었다. 1957년부터 약 3년 동안은 독일에서 모델로서 성공했다. 1971년에는 버클레 레코드와 계약, 1972년 자신이 작곡한 <장밋빛 설레임>이 크게 히트하여 스타가 되었다. 1973년 <사랑스런 소냐>도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에 오랑피아 극장에 출연했다.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부드러운 가창으로 꾸준한 인기를 지속하였다.

샴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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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Chamfort(1953- ) 프랑스 앙걍 출생.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처음에는 작곡가로서 활약, 실비 바르탕, 달리다, 클로드 프랑수아, 니코레타 등 프랑스의 톱스타에게 곡을 줌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2년 오랑피아 극장에서의 데뷔, 공연이 2주간 연속 만원이란 성황을 이루어 팝스타로서의 인기를 확립했고, 미남에다 소프트한 목소리로 프랑스 팝송계의 스타가 되었다. 주요 히트곡으로 <첫사랑이여 안 녕>, <산들바람의 세레나데> 등이 있다.

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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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n Clere(1947- ) 프랑스 파리 교외 브르 라 레느 출생. 고등중학교에서 알게 된 모리스 바레, 소르본 대학에서 알게 된 에치엔 로다질 두 사람이 시를 쓰고 작곡은 거의 클레르 자신이 하였다. 1968년 5월 <기병(騎兵)>으로 데뷔했다. 1969년, 록 뮤지컬 <페어>의 주역을 맡아 그의 이름이 전 프랑스에 알려졌다. 1970년에는 오랑피아 극장에 등장, 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빨리 스타덤에 올랐다. 대표곡으로 <세월은 흘러간다>, <타오르는 캘리포니아>, <빙상(氷上)의 사나이>, <이바노비치>, <기병(騎兵)> 등이 있다. 강한 록 필링의 소유자이면서 전통적인 샹송을 잘 소화하였다.

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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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e Vidal(1952- ) 모로코 출생. 키 152cm, 체중 42kg의 동양인 비슷한 작은 체구의 여성가수로, 프랑스 팝송계의 스타이다. 14세 때 마르세유의 라디오 몬테카를로의 콘테스트에서 수상했고, 렌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도 수상했다. 1969년에는 바클레레코드에서 나온 데뷔곡 <천사의 낙서>가 히트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카트리느>, <작은 비둘기>, <피노키오> 등이 계속 히트하여 프랑스 팝송계 인기스타가 되었다.

무스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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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Moustaki(1934-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1952년 파리로 건너가 1957년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인 에티트 피아프를 만났다. 무스타키를 만난 에디트 피아프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뛰어난 작사, 작곡가로서 세상에 소개했으며, 무스타키는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샹송을 써서 헌정했다. 1959년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로 발표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잊을 수 없는 샹송 <미놀드>가 그의 작품이었다. 그가 발표한 앨범 중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는 유일하게 가 있으며 그 곳에 담겨 있는 는 국내 팬들이 즐겨 듣는 곡이다. 사랑과 고독의 음유 시인 조르주 무스타키, 그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소망을 한편의 시로 만들어 현대를 예리하게 고발하고 인간적인 유토피아를 창조하고자 한 외로운 존재이다.

마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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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Macias(1938- ) 알제리 콘스탄틴 출생.1962년 가수로 데뷔한 앙리코 마샤스는 싱글 <안녕 내 고향>을 불러 샹송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어 <사랑하는 마음>과 <추억의 소렌자라> 등을 세계적으로 히트시켰다. 초기에 그가 노래한 작품들은 조국 알제리에 대한 그리움, 사랑, 회환 등이 진하게 담겨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으며 특히 우리 나라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후 70년대와 80년대를 <사랑의 걸인>과 <사랑의 발라드>, 그리고 감미로운 <어린 시절의 프랑스> 등을 히트시켜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바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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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e Vartan(1944- ) 프랑스 태생인 실비 바르탕은 1961년에 가수로 출발하여 샹송의 색다른 스타일을 들려 주었다. 1962년 올랑피아 극장 무대에서 가수 자니 알리데이와 공연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솔로로 전향한 그녀는 를 히트시켜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명성을 드높였다. 부드러운 샹송의 선율에 록 비트를 가미한 스타일로 화제를 모은 그녀는 1975년, 파리의 '팔레 데' 공크레 공연에서 성공을 거둔 후 라이브 스테이지 가수로 전념하면서 자신의 곡보다는 리바이벌 작품을 주로 노래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곡인 를 위시해 이브 몽탕의 , 미셀 폴라네프의 등을 히트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곡들이 담기 앨범 <시바의 여왕>이 소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무렵 샹송계의 불후의 명곡 를 히트시켰으며 1984년부터 미국에 정착하여 라스베가스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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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a(1973- ) 프랑스 출생. 엘자는 작곡가인 아버지 조르주와 함께 1987년 <내맘 속에 변화가 생겼어요>를 히트시키면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이 곡에 앞서 1986년 그녀의 나이 13세 때 영화 <내 인생의 여인>에 출연 중 주제가인 가 1300만장이나 팔리는 히트로 차트 정상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1989년 데뷔앨범 Elsa를 공개하여 글렌 메데이로스와 함께 노래한 를 히트시켰으며 1991년 예술적인 두 번째 앨범 Rien Que Pour Ca…를 발표하여 등을 히트시켰다. 1992년 가을에 엘자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한 앨범 Douce Violence를 발표하였다. 소녀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팝·재즈·블루스를 포용한 이 앨범은 싱글 와 팝 재즈적인 를 히트시켰다. 1993년 내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