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국 문학/당·송시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당·송시대의 문학

[편집]

唐·宋時代-文學

당(唐=618-907), 5대(五代=907-960), 북송(北宋=960-1127), 남송(南宋=1127-1279), 그리고 북방의 왕조에서는 금(金=1015-1234)이 이 시대에 포함되며, 이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중국은 비교적 안정된 평화가 오래 계속된 탓으로 고전어(古典語)에 의한 문학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문학의 중요 장르는 전시대에 이어 시와 문(文)이었는데, 문에 있어서는 육조시대에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미문체의 문장은 차츰 빛을 잃고, '고문(古文)'이라고 칭하는 산문체(散文體)가 8세기 말경부터 문장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문학에 참가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합리주의(合理主義)에 따른 일종의 문학혁명(文學革命)이다.

고문의 유행에 따라서 산문에 의한 소설을 쓰는 풍조가 싹터 당·송의 전기(傳記)소설을 형성시켰다. 새로운 장르의 문학으로서는 '사(詞)'(詩餘 혹은 塡詞라고 함)가 당나라 말부터 갑자기 왕성해져서, 송대의 대표적 문학이 되었다.

'사'란 원래는 가락에 실어서 노래한 정서적 소곡(小曲)이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하여 성장한 문예였는데, 차츰 문학으로서의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밖에 당대에는 그림 연극과 같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문예(변문)가 나타났다. 변문은 사원의 광장에서 서민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히 그 내용은 불교 설화가 위주였다.

송대, 특히 남송에 있어서는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도시에 '구란(勾欄)'이란 것이 생겨서, 그 곳에서는 후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서 정리된 것 같은 강담(講談)도 행해졌다. 또한 금(金)의 원본(院本), 송(宋)의 잡극(雜劇) 등 원대(元代)에 와서 원곡(元曲)으로서 완성된 연극의 시초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이 문학으로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은 다음 시대에 와서이다.

당·송의 문학이 그 이전의 문학에 비해서 한층 생생한 인간 감정을 표출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문학에 참가하는 사람의 계층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당의 왕조는 관리를 채용하는 데

'과거(科擧)'라는 시험제도를 확립시켜 집안이나 문벌의 차이 없이 시험의 성적에 따라서 관리에 임용했다. 과거 가운데서 가장 중시된 것은 진사과(進士科)였는데, 이 진사과에는 시와 문이 시험과목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진사과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평소부터 시나 문을 짓는 데에 습숙(習熟)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귀족 출신이 아닌 젊은이들은 출세의 발판을 먼저 시문의 숙달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서 그들의 시문은 귀족사회의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생생한 생명의 약동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학은 관료사회에 투신하려는 이들에 의해 밑받침되었다.

당대에 있어서 관료사회에 참여하고자 뜻하는 사람들은 아직 중·소관료의 자제들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송대가 되자 일반 시민의 자제도 참여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유명한 소식(蘇軾)의 집안은 쓰촨(四川) 지방에서 피복점(皮服店)을 한 것 같은 형적이 있으며, 구양수(歌陽修)나 왕안석(王安石) 등도 시민층에서 나와 과거에 급제하여 대관(大官)이 된 사람들이다. 송대에 이르러 문학에 참여하려는 계층은 더욱 확장을 보였다. 문학에 참가하는 계층이 넓어지면 이에 따라서 문학도 그 질(質)이 달라지고, 내용 면에서 보다 인간사회에 밀착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리하여 문학은 당·송에 이르러 계층적 확대를 보였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현상은, 이 시기에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당 중엽경, 차츰 목판인쇄(木版印刷)의 연구가 진행되어 송대에는 대량의 서적이 목판인쇄에 의해서 보급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서적은 자신이 필사(筆寫)하지 않으면 직업인에게 부탁해서 옮긴 것으로서, 장시간 걸리고 부수도 한정되어 자연히 서적을 입수할 수 있는 사람은 특정 계층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목판인쇄로써 대량으로 만들어짐에 따라 돈과 여가가 있으면 자유롭게 서적을 손에 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송대 이후의 문학자에게는 자신의 시문집(詩文集)을 서적으로 공간(公刊)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소식(蘇軾)은 그의 재세(在世) 중 자신의 시집을 공간했다. 이리하여 문학자는 자기의 서적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희망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소중히 보존했다.

시(詩)에 대해서는 종전에는 청각을 주로 하는 문예였던 것이, 점차 시각적인 문예로 전화(轉化)하여 섬세하고, 생활의 사소한 일을 읊는 시가 많이 읽혀지게 되었다. 남송 말기에는, 돈과 여가를 가진 상인이 책에서 배운 고인(古人)의 시를 본받아 시작(詩作)을 하게도 되어, '강호파(江湖派)'라고 하는 모임을 만들어 작시(作詩)를 즐겼다. '강호'란 민간이란 뜻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작품의 질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문학을 받아들이는 독자층도 갑자기 넓힌 결과를 가져왔다.

당·송의 시

[편집]

唐·宋-詩

당대 약 300년은 과거(科擧)에 시가 과제(課題)된 연유로 2천2백여 명의 시인을 배출했는데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작자 수), 그 수많은 시인군(詩人群)을 시대에 따라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기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초당(618-709) 시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高宗의 황후)(623-705)의 궁정을 중심으로 활발한 시단(詩壇)이 형성되었는데, 그 시기는 아직 육조시(六朝詩)의 귀족 취미가 왕성했다. 따라서 표현 기교를 다투는 분위기 속에서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연구되었다. 7언율시의 형성에는 송지문(宋之問, 656 ?-714), 심전기(沈佺期, 656-713) 두 사람의 활약이 눈부셨다(5언율시는 齊·梁대에 이미 탄생되었다). 또한 상관의(上官儀, 608-664)는 대구(對句)에 기교를 연구하여 상관체(體)라는 시풍(詩風)을 유행시켰다. '초당사걸(初唐四傑)'도 이 시기에 활약했다. 수(隋)에서 당에 걸친 과도기에는 왕적(王績, 585?-644)과 같이 도연명의 시풍을 동경하여 은자(隱者)로서의 생활을 보낸 시인이 고립적으로 존재하나, 중앙 시단과는 무관했다. 측천왕조를 섬긴 진자앙(陳子昻, 661-702)은 후에 왕조에 대한 비판자가 되고, 고시(古詩)를 즐겨 지어서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성당(盛唐 710-765)대에는 장구령(張九齡, 678-740), 맹호연(孟浩然, 689-740), 왕유(王維), 이백(李白), 두보(杜甫), 고적(高適, ? -765), 영참(嶺參, 715-770) 등이 활약한 시기로서, 당시(唐詩)의 전성기이다. 이 시기에는 천재적 시인이 연달아 배출되고, 여러 시인들은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수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때는 마침 당왕조의 극성기였고, 그 오르막길의 정점에서 일어난 것이 안녹산(安綠山)의 난(亂)이다. 안녹산의 난을 체험함으로써 시인들은 작품에 깊은 음영(陰影)을 던지게 되었다.

중당(766-835)은 안녹산에 의해서 파괴된 왕조의 질서를 재편성하는 시기로서, 문학자의 주류도 질서의 재편성을 위한 합리주의 의식에 불탔으며, 사회비판·정치비판을 문학자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의 고문(古文) 부흥운동도 그 하나의 현상이다. 사회비판·정치비판의 시인 그룹에는 원결(元結, 719-772), 대숙륜(戴叔倫, 732-789), 장적(張籍, 768-830 ?), 왕건(王建, 768-830 ?), 백거이(白居易), 원진(779-831), 이신(李紳, ? -846) 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두보(杜甫)의 사회시(社會詩)를 발전시켰으며, 사회파 시인의 중심적 인물은 백거이였다.

사회파 시인에 대항하여 정치 부재(不在)의 시이기는 하나, 표현에 연구를 한 고음파(苦吟派)의 시인에 한유(韓愈)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있다. 그 파는 한유, 맹교(孟郊, 751-814), 가도(價島, 779-843), 노동(盧仝, 795 ?-835), 이하(李賀) 등이다. 이 그룹은 두보(杜甫)가 고심한 표현(表現) 연구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 밖에 산수·자연에 좌절된 마음을 맡긴 시인으로서 위응물(韋應物, 737-790 ?),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백거이의 만년의 시우(詩友)였던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있다.

만당(晩唐, 836-906)은 인상적·감각적·관능적 시풍이 유행했던 시대이다. 만당 시풍의 선구는 이하(李賀)를 비롯하여 이상은(李商隱)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상은과 동시대의 온정균(溫庭筠, 812-870 ?) 및 한악(844-923)은 여성의 미를 노래하여 보다 관능적인 시를 만들었다. 그 밖에 사회파 시인적 요소를 가진 피일휴(皮日休, 833 ?-883), 자연파 시인적 성격이 강한 육구몽(陸龜蒙, ?-881), 두순학(杜筍鶴, 846-904). 사(詞)의 작자이기도 했던 위장(韋莊, 836-910) 등이 유명하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당대보다도 더욱 시인의 수가 많아졌다. <송시기사(宋詩紀事)>에 의하면 3,81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 시인마다 매우 다작(多作)이었다. 시는 일반적으로 생활의 자잘한 일을 조용한 감정으로 노래하면서 그 가운데 어떠한 철학(哲學)을 품고 있는 것이 많다. '평담(平淡)'이 송시(宋詩)의 특색이다. 그것은 부푼 감정을 노래하는 것을 정형으로 하는 당시(唐詩)와는 매우 내용을 달리한다. 아마도 그 시풍의 차이는, 앞에서 말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에 의한 면도 있을 것이다. 저명한 시인으로서는 북송의 매요신(梅堯臣), 구양수(歌陽修),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1053-1101), 남송의 육유(陸游), 범성대(范成大)(1126-1193), 양만리(楊萬里, 1127-1206), 주희(朱憙, 1130-1200) 등이 있다. 또한 북송을 멸망시키고 북방에 왕조를 세운 금(金)의 시인으로서는 원호문(元好問)이 유명하다.

이러한 시인 가운데서 주(周)시대와 후대에 강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소·황이라 병칭함)이었다. 소·황은 과거의 시인 가운데 숭배하는 전형적인 시인으로서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를 받들고, 그 두 사람을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학(詩學)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나라 원호문도 이 소·황의 시학을 계승한 사람이다.

초당사걸

[편집]

初唐四傑

왕발(王勃, 649-676), 양형(楊炯, 650-? ), 노조린(盧照?, 635-684), 낙빈왕(駱賓王, 640 ?-684 ?)을 초당 4걸이라 한다.

왕발은 왕적(王績)의 조카되는 수재 시인으로 28세에 죽었다. 왕발, 양형은 율시(律詩)의 완성에 공이 많은 시인이다. 여기에 비해 노조린, 낙빈왕은 가행체(歌行體)라고 칭하는 장편의 슬픈 정취(情趣)를 담은 이야기조(調)의 시인으로서 알려졌다. 노조린은 악질(惡疾)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시달림을 받다가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낙빈왕은 측천무후에 대한 반란군에 가담하여 최후를 알 길이 없다. 낙빈왕의 가행체 시는 당시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의 실화를 소재(素材)로 하여 거기에 슬픈 정취를 곁들여서 새로운 문예를 개척했다.

왕유

[편집]

王維 (699-759)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열렬한 불교신자로서, 왕유도 이 영향으로 입신(入信)하여,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자를 마힐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서 칭찬이 높았고 음악에도 뛰어나서, 현종(玄宗)의 형제 제왕(諸王)이나 귀족의 모임에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관리채용시험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그 수재인 체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한때 관직을 사임했다. 그 후 다시 중앙관서에 기용되어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는 급사중(給事中)이란 직에 있었으나, 난군의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가서 그들이 세운 정부에 본의 아니게 관리가 되었다. 안녹산이 망하고 장안(長安)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만년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인생에서 몇 번의 좌절을 경험한 왕유는 차츰 인간이 싫어지고, 산수·자연을 노래하는 가운데 자기를 몰입(沒入)시켰다. 그의 시는 친교가 있던 맹호연(孟浩然)을 닮은 데가 많으나 맹호연의 시보다 날카롭다.

또한 불교신자로서 관념적인 '공(空)'의 세계에의 동경을 노래한 것이 있다. 한때 관직을 물러났을 때 망천(輞川=지금의 허난성)에 별장을 짓고, 그 별장의 경물(景物)을 소재(素材)로 하여 노래한 <죽리관(竹里館)>이나 <녹시(鹿柴)>(모두 5언절구)는 특히 유명하다.

왕유는 또한 화가로서도 뛰어나서, 남송화(南宋畵)의 시조(始 祖)로서 추앙된다. "왕유의 시를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고 송(宋)의 소식(蘇軾)은 평하고 있다.

이백

[편집]

李白 (701-762)

중국 성당(盛唐)시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부친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하여 활약하고 있던 무역상이었으며, 이백이 탄생하였을 때는 촉(蜀=지금의 쓰촨성)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생활환경 때문에 정규의 학문을 받지 못했으며, 25-26세경까지 촉에서 살면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仙人)과 쓰촨(四川)의 산들을 편력(遍歷)하면서 모험을 즐기며 도교(道敎)수업에 정진했다. 25-26세경 촉을 떠나 강남(江南)으로 여행, 부친의 유산을 소비하면서 몰락 귀족의 자제들과 호유(豪遊)하였다. 42세 말에, 현종(玄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관리생활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현종 측근인 고역사(高力士)와 싸움을 하고, 44세 때 관직을 물러나 낙양에서부터 산둥으로 유람했는데,

산둥에서는 젊은날의 두보와 함께 여행했다. 54세 때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서 56세의 12월, 현종의 제16자인 영왕 인(永王=璘)의 군(軍)에 참가했으나, 후에 영왕의 군이 숙종(肅宗)에 의해서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성)에 유배되었다. 유배당하여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 다행히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이백은 친구의 어려움을 자주 도와 주어 죄를 받았을 때 옛 친구의 감형탄원(歎願)으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만년은 강남 각지를 유람하고, 안후이성 당도(安徽省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조카 이양빙의 집에서 62세의 생애를 마쳤다. 부친의 유산을 남김없이 탕진해 버린 이백의 만년은, 그 가정과 이백 자신에게 비참한 상태였다. 이백이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은, 달을 좋아했던 방탕의 시인 이백의 죽음을 상징화한 속설(俗說)이다.

이백은 고시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고, 천래의 외침을 분방하고 자유롭게 뿜어냈다.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杜甫)가 1자 1구의 조탁(彫琢)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보

[편집]

杜甫 (712-770)

중국 성당시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하며, 시성(詩聖)으로 추앙된다.

허난성 공현(鞏縣)의 몰락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강남에 유람, 33세부터 34세에 걸쳐서 이백(李白)과 함께 산둥(山東)을 유람했다. 그 후 장안으로 가서 꾸준히 벼슬길을 찾았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겨우 40세 때 집현원(集賢院) 대제(待制=待機學者)의 직을 얻었다. 그 무렵 두보는 가난의 밑바닥에 있던 데다가 폐를 앓아서, 그 곤경을 시로 노래했으며, 드디어 개인적인 괴로움을 읊는 경지를 넘어서서 고통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노래하는 자세로 전환했다.

그 전기(轉機)가 되는 작품은 유명한 <병거행(兵車行)>으로서, 그의 41세 때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어 42세 때는 정치에 등한하고, 민중의 생활을 무시한 양(楊) 일족의 방탕한 생활태도를 리얼하게, 분노를 담아서 <여인행(麗人行)>에 노래했다. 43세, 장안에 기근(饑饉)이 계속되어 가족을 봉선현(奉先縣)으로 소개시켰다. 다음해 44세의 10월, 우위솔부조조참군(右衛率府胄曹參軍)이라는 하급관리의 지위를 얻어 비로소 정직(定職)에 올랐으나, 그해 11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이후 두보는 48세 말까지 안녹산의 난에 번롱(飜弄)당했다. 이 시기의 그의 시는 한층 처참해졌으며 수많은 걸작을 발표했다.

45세의 6월, 두보는 가족을 봉선에서 다시 부주 서북의 강촌(羌村)으로 소개시키고, 8월 단신 강촌을 출발해서 숙 종(肅宗) 밑으로 가려고 영무(靈武)로 향하는 도중, 적군에게 잡혀서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46세 봄, 장안에 잡혀 있던 그는 "나라는 망하더라도 산하는 그대로다"라는 말로 유명한 <춘망(春望)> <애강두(哀江頭)>를 지었다. 그해 4월, 탈출하여 숙종의 행궁(行宮)인 봉익(鳳翊)으로 가서 좌습유(左拾遺)라는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직무에 너무 충실한 두보는 도리어 숙종에게 소외당하여, 47세 때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라는 지방관리로 쫓겨났다. 다음해 견문한 사실을 토대로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이상을 '三吏'라고 칭함)와 <신혼별(新婚別)> <수노별(垂老 別)> <무가별(無家別)>(이상은 '三別'이라고 칭함) 등 두보의 사회시(社會詩)의 걸작을 썼다.

48세 7월, 정치에 절망한 두보는 드디어 관직을 사임, 가족을 대동하고 진주(秦州) 동곡(同谷)을 거쳐, 물산(物産)이 풍부한 쓰촨성의 청뚜(成都)로 낙향했다. 청뚜에 머무른 6년간은 두보의 인생에서 작으나마 행복했던 시기이다. 완화계(浣花溪) 기슭에 초당을 마련하고, 평화를 만끽하면서 예술적 향기가 넘치는 시를 많이 지었다.

54세 5월 청뚜를 떠나 강남 일대의 여행길에 올라, 55세에 기주에서 잠시 신병(身病)을 요양했으며, 그 시기에 유명한 율시(律詩)의 연작(連作) <추흥(秋興)> 8수를 지어 예술성에 더욱 뛰어남을 보였다. 57세에 기주를 떠나 쟝링(江陵)으로 가서 <등악양루(登岳陽樓)>를 노래하였다. 이후 남하하여 담주(潭州=長沙)로 가서, 다시 병을 얻어 59세에 선중(舟中)에서 죽었다. 두보가 현령이 보낸 쇠고기를 먹다가 체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속설이나, 평생을 식생활에 고생한 두보에 얽힌 이야기로서 상징적이다.

두보의 시는 정치·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당당히 발언하는가 하면, 또 다른 면에서는 육조시(六朝詩)의 기교를 충분히 살리면서 독자적인 예술적 조형(造型)을 확립했다. 율시는 두보에 의해서 비로소 예술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거이

[편집]

白居易 (772-846)

중국 중당기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중류 관료의 집안에 태어나 29세에 백씨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35세에 상급시험에도 합격하여 장안 서쪽의 주질 현위에 임명되었다. 이때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갑자기 시명(詩名)을 높였다. 39세까지의 사이에 백거이 자신이 스스로 문학의 정수(精髓)라고 생각하는 사회비판·정치비판의 시 <신악부(新樂府)>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를 지었다. 이 의식(意識)은 두보를 계승한 것이다. 44세

이후 강주(江州=지금의 후베이성)·충주(忠州=지금의 쓰촨성)

등의 지방관리로 파견되었으나, 다시 중앙에 돌아와서, 71세에 형부상서(刑部尙書=정삼품)를 끝으로 관직을 사임, 75세에 죽었다. <비파행(琵琶行)>은 45세에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있을 때의 작품이다. 53세 때, 친구인 원진(元鎭=微之)이 백거이의 뜻을 짐작하여 50권의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편찬했는데, 다시 만년에 그 자신이 <백씨후집(白氏後集)> 20권, <백씨속집(白氏續集)> 5권을 편찬하였다. 오늘날에는 <백씨문집(白氏文集)>으로 72권이 남아 있다.

백거이는 알기 쉬운 시를 만드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아 한 작품이 완성되면 노파에게 읽어 주어, 알 수 있는가의 여부를 확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반에게는 <장한가>나 <비파행>의 시인으로서 유명했으나, 그 자신은 서정시인으로 대접받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의 문학 주장은 정치나 사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 즉 '풍유(諷諭)'의 정신에 있다고 주장했다. 백거이는 만년에 불교신도가 되었고, 도연명의 경지를 동경했다. 당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다작(多作)한 시인이며, 사(詞)의 초기 작가이기도 하다.

장한가(長恨歌)

[편집]

백거이(白居易)의 35세 때의 작품.백거이의 시명(詩名)을 갑자기 높인 것으로서, 현종 황제(玄宗皇帝)와 양귀비(楊貴妃)와의 연애 이야기를 7언의 장편으로 노래한 것이다. 실화에서 소재를 택한, 슬픈 정취를 담은 가행체(歌行體)의 작품으로서, 초당의 낙빈왕(駱賓王)의 가행체를 본받은 것이다. 백거이의 시와 더불어, 친구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이라는 전기소설(傳奇小說)도 저술되었다.

이하

[편집]

李賀 (791-817)

중국 중당기의 시인. 자는 장길(長吉). 허난성 복창(福昌) 사람이며, 당나라 왕실 자손이라고 한다.

한유(韓愈)에게 재주를 인정받은 관계로 인해 한유의 문제(門弟)로 취급당하고 있으나, 중당에 있으면서 만당적(晩唐的) 시풍의 선구를 이룬 천재적 시인이다. 색채감이 풍부한 예리한 감각적 시를 지었고, 또한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鬼)를 다루기 때문에 '귀재(鬼才)'로 불렸다. '귀재'란 초인적인 유귀의 재주라는 뜻이다. 봉예랑(奉禮郞)이라는 의전계(儀典係)와 같은 관리를 지냈을 뿐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두목

[편집]

杜牧 (803-852)

중국 만당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대학자 두우(杜佑)의 손자다.

26세에 진사(進士)에 급제. 젊었을 때 <아방궁부(阿房宮賦)>(23세 때 작) 등을 지어 정치에 대해서도 정의감을 불태웠으나, 명기(名妓)와의 사랑에 빠져, 지방관리를 역임하면서 기루(妓樓)에서 노는 일이 많아졌고, 감각적·감상적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만당의 시는 이하(李賀)에서 싹트고, 두목으로 시작된다. 그의 시는 때때로 리얼리즘을 떠나서 인상파적이다. <강남춘(江南春)>이 유명하다. 작풍이 두보와 비슷하며, 두보와 구별하기 위해서 소두(小杜)로 불린다.

이상은

[편집]

李商隱 (812?-858)

중국 만당의 시인.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26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우(牛)·이(李)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정쟁(政爭)에 휘말려 지방관리로 전전하면서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때로는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이다. 특히 연애시에 그의 특색이 발휘된다. 두목과 함께 만당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지을 때, 좌우에 많은 서적들을 늘어 놓고 참조로 했기 때문에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먹을 때, 물고기를 눈앞에 나란히 놓고 제사지낸 다음에 먹는다는 전설에 따라 당시 사람들로부터 '달제어(獺祭魚)'라고 불리었다.

전당시(全唐詩)

[편집]

(900권)

청(淸)의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에 의해서 당대의 모든 시를 수집한 것. 대략 2천2백 명, 4만8천 수 정도를 수록했다. 1707년에 완성했다.

당시선(唐詩選)

[편집]

(7권)

명대(明代)의 서적상이 당시의 저명한 문학자 이반룡(李攀龍, 1514-1570)의 이름을 빌어 편집한 서적이다.

456수를 수록하고 있으나, 초·성당(初盛唐)의 시를 많이 수록하여 약간 편파적이다. 격정적인 시가 많이 수집되어 있다.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편집]

(8권)

18세기 말에 청(淸)의 이석찬(李錫瓚)이 편집한 것. 중국에서는 <당시 삼백수>를 초학(初學)의 교본으로 한다.

삼체시(三體詩)

[편집]

(3권)

송(宋)의 주필(周弼)에 의해서 1250년에 편집된 것임. 7절(絶)과 5율(律), 7율만을 500수 수록했다. 중·만당의 시를 주로 골랐고, 서정적·감상적인 작품이 많으며 <당시선>의 결여된 부분을 보충했다.

매요신

[편집]

梅堯臣 (1002-1060)

중국 북송의 시인. 자는 성유(聖兪), 호는 완릉(宛陵). 구양수(歐陽修)와 함께 송시의 개척자이다.

관리로서는 불우하여, 오랫동안 지방관리를 계속하다가 49세 때 겨우 진사에 급제, 구양수의 소개로 도관원외랑(道官員外郞)이라는 중앙의 관직을 얻었다. 송(宋) 초에는 이상은과 유사한 '서곤체(西崑體)'의 화려한 시가 유명했으나, 거기에 대해 그의 시는 '평담(平淡)'을 신조로 하여 사상적 깊이를 가진 작품을 탄생시켰다.

구양수

[편집]

歐陽修 (1007-1072)

중국 북송(北宋)의 시인. 문장가·학자. 구양이 성,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정치가로서는 재상까지 지냈고,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이기도 하다. 매요신과 함께 당시 유행한 시풍에 저항하여 이후의 송시의 특색을 이루는 평정한 시를 신조로 하여 작시했다. 구양수의 문하에서 왕안석, 소식이 나와 송시의 경향을 결정적으로 굳혔다.

왕안석

[편집]

王安石 (1021-1086)

중국 북송의 시인. 문장가.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임천(臨川) 선생이라 칭한다.

신종(神宗) 때 6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고,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는 혁신적 정치를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젊어서부터 구양수에게 인정되어 그의 추거(推擧)를 받았는데, 사상적으로 보수적인 구양수와는 맞지 않았다. 시인으로서는 두보(杜甫)의 진가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하여, 이후의 송시의 세계에 두보를 존경하는 풍조를 개척했다.

소식

[편집]

蘇軾 (1037-1101)

중국 북송의 시인·사인(詞人)·문장가.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22세 때, 아우인 철(轍)과 함께 진사에 급제했다. 그때의 시험위원장은 구양수, 위원은 매요신이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의 인정을 받아 관계와 문단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소식은 왕안석의 신법을 좋아하지 않고 구법당(舊法黨)에 속했기 때문에 신법당의 미움을 사서 44세에는 어사대(御史臺)의 옥에 갇혔다가 후에 후베이(湖北)의 황주(黃州)로 유배당했다. 49세에 유죄에서 풀려나고, 신법당이 세력을 잃자 구법당의 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신법당의 시대가 되어 광둥(廣東)에서 다시 중국 최남단인 하이난(海南) 섬에 유배당했다. 유배생활 7년, 풀려나서 북으로 돌아오는 도중 죽었다.

그는 도연명과 두보를 존경하여 그의 시학(詩學)을 계승함과 아울러, 작품에 철학을 가미하여 평정 속에 이지(理智)를 내포하는 송시의 세계를 확립시켰다. 문장가로서도 뛰어나서 <적벽부(赤壁賦)>(47세 때 작품)는 유명하다. 또한 사(詞)에 있어서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호방파(豪放派)라고 칭하는 한 파를 개척했다.

황정견

[편집]

黃庭堅 (1045-1105)

중국 북송의 시인·사인.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또는 부옹. 소식(蘇軾) 문하인의 제1인자.

23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국사원(國史院)의 편수관이 된 이외 관리생활은 불우했다. 소식의 시학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시는 소식의 작품보다 더욱 내향적이었다. 또한 왕안석, 소식보다 더욱 두보를 존경했다. 소식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칭해져서 북송 시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전반은 황정견 일파의 시풍이 세상을 풍미하였는데, 황정견이 강서(江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서파'라 칭해졌다.

육유

[편집]

陸游 (1125-1209)

중국 남송 제1의 시인.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다.

오랫동안 지방관리를 역임. 65세에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된 것이 최고의 관력(官歷)이다. 북송을 넘어뜨리고 북방에 왕조를 세운 만주족의 금(金)에 대해서 평생 격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애국적인 시를 지음과 동시에, 또 다른 일면에서는 유유히 전원생활을 즐기는 은일(隱逸)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가 전해진 것만도 약 9천 200수로서 일반적으로 작품수가 많은 송의 시인 가운데서도 최다작 시인이다.

32세부터 85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의 시를 <검남시고(劍南詩稿)> 85권에 남기고 있다. 자신의 편년(編年)에 의한 편집(偏集)이다. 그는 또한 왕안석, 소식, 황정견을 본받아 두보를 자기 시학의 최대의 스승으로 숭배했다.

원호문

[편집]

元好問 (1190-1257)

중국 북방에서 약 1세기간 계속된 금(金)왕조 제1의 시인. 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遺山).

당의 시인 원결(元結)의 자손으로서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에서 출생, 금나라 최후의 천자(天子)인 애종(哀宗)을 섬겼고,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까지 지냈다. 44세 때, 금이 멸망하고 원(元)이 세워졌으나, 벼슬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문호로서의 존경을 받으면서 금의 역사 편찬을 평생의 보람으로 삼으며 자적(自適)의 생활을 보냈다.

그의 시는 소학(蘇學)을 계승하는 자각에 입각하여 도연명, 두보, 소식, 황정견의 시를 잘 익혔고, 중후하며 때로는 난해하다. 그는 안이한 언어의 나열을 싫어하고, 고인(故人)의 생명이 깃들여 있는, 전거(典據) 있는 고어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어서, 언어 조형의 긴밀한 아름다움을 발휘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송시(唐宋詩)의 장점을 모아 대성시킨 시인이라고 하겠다.

한편 금나라 일대 시인의 작품을 모아서 <중주집(中州集)>을 만들었다. 그것은 후의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시인인 전겸익(錢謙益)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당·송의 사

[편집]

唐·宋-詞

사라는 문예는 원래 속곡(俗曲)에 맞추는 가사이다. 그 중에는 당나라 궁정에 설치되었던 교방(敎坊)의 음곡(音曲)을 이용한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민간인에 의해 불려지고 있던 속곡에 맞추어서 만들어졌다.

중당의 백거이나 유우석(劉禹錫)에게 이미 사의 작품이 있다. 그리고 사의 문예를 많이 만들어 일가를 이룬 것은 만당의 온정균(溫庭筠)이다. 그는 초당의 재상 온언박(溫彦博)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방탕생활을 하다가 끝내 진사에도 급제하지 못하고 화류계의 총아로서 염려한 노래를 계속 만들었다. 그의 사는 주로 기녀(妓女)의 요염함과 원정(怨情)을 노래했다. 이후의 사의 문예는 기녀에 얽힌 여성적 문예로써 성격화되었다.

그 후 5대(代)에서 송에 걸쳐 사(詞)는 전성을 보였다. 5대 전촉(前蜀)의 재상이 된 위장(韋莊, 836 ?-910)도 청염(淸艶)한 사를 지었다. 사의 문예를 슬픈 정취를 옮기는 문학으로 끌어올린 것은 남당의 후주(後主)의 이욱(李煜)이며, 북송의 안수(晏殊, 991-1055), 안기도(晏幾道≡안수의 아들, 생몰년 미상) 등이다. 구양수도 또한 온아한 사를 지었다.

한편, 통속가곡으로 시민 세계에 유행시킨 사람은 북송의 유영(柳永)이다. 소식은 지금까지 주로 원정(怨情)을 노래하는 여성적 문예로서 생각되고 있던 사를 인간의 일반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것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소식은 "시를 가지고 사를 만든다"고 평했으며 사의 호방파(豪放派)라고 칭해졌다. 소식에 의해서 높여진 사는 주방언(周邦彦, 1056-1121), 이청조(李淸照), 신기질(辛棄疾), 강기(1155 ?-1221 ?), 오문영(吳文英, 1200-1260) 등이 전개해 나갔다.

이욱

[편집]

李煜 (937-978)

중국 5대(代)의 사인. 남당의 제3대 천자(天子)로 즉위했으나 재위 15년에 송에 항복하여 남당의 후주(後主)라고 칭해졌다.

평소 학문을 즐기고, 서(書)에도 뛰어났다. 그의 사는 온정균식의 기녀의 염려와 원정만을 노래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슬픈 정취를 반영시키는 문학으로서 사의 위치를 높였다. 현존하는 사는 34수뿐이나, 모두가 매우 맑고 훌륭한 작품이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 봄은 가는구나, 하늘과 사람 사이로"라는 구는 유명하다. 부친인 이경(李璟=남당의 中主라고 불린다)도 사의 작자였다.

이청조

[편집]

李淸照 (1084-1151)

중국 남송의 여성 사인. 이안거사(易安居士)라고 호칭했다.

학자 집안에 태어나, 18세 때 조명성(趙明誠)에게 시집갔다. 남편 명성도 학자로서, 주지사를 지내면서 부부가 함께 <금석록(金石錄)>을 편찬했다.

그 후 금군(金軍)에 의해 집과 장서가 불태워졌고 남편과도 사별하여 강남을 정처없이 전전했다. 그녀의 사는 이욱이나 안기도의 전통을 따른 청려(淸麗)한 작품으로 재기가 넘치는 훌륭한 표현은 송사(宋詞)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다. 또한 송대의 사인에게 적절한 단평(短評)을 가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신기질

[편집]

辛棄疾 (1140-1207)

중국 남송의 사인. 자는 단부(坦夫), 또는 유안(幼安). 가헌거사(稼軒居士)라고 호칭했다.

산둥(山東)에서 출생. 금나라 치하에 있었으나 22세 때 금에 대한 저항군에 참가하였고, 다음해 송에 귀복(歸服)하여 송의 관리가 되었다. 그의 사는 소식의 호방파의 전통을 따랐고, 때때로 비장강개의 기질이 넘친다. 의론(議論)으로 사를 만든다고 일컬어졌고, 사상적 깊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화간집(花間集)

[편집]

5대 후촉(後蜀)의 조숭조(趙崇祚)가 편집한 것으로 10권이다. 온정균의 작품을 비롯하여 만당·5대의 18인의 사(十八人詞)를 모은 것으로서 사집(詞集)의 원조이다. 여기에 수집된 작품은 온정균 풍의 규원(閨怨)의 정을 노래한 것이 많고, 사의 한 전형(典型)이 되었다. 이후 이와 유사한 작풍을 화간파(花間派)라고 칭한다.

당·송의 고문

[편집]

唐·宋-古文

고문이란 육조(六朝)시대에 유행한 화려한 미문인 변려문(騈儷文)에 상대적인 것으로, 예를 들면 선진(先秦)·양한(兩漢)시대에 이루어졌던 문체와 같은 소박·진실한 문체를 말한다. 그러한 문제를 사용하여 달의(達意)의 글을 쓰려는 운동을 고문부흥운동이라고 한다.

고문부흥운동은 중당의 한유(韓愈)에 의해서 제창되어 동시대의 유종원(柳宗元)이 찬동하게 됨으로써 일시에 유행하여 일종의 문예부흥운동이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한유에 이르러 갑자기 문예부흥의 기운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한유 이전에도 고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초당의 진자앙(陳子昻, 661-702), 성당에서 중당에 걸친 소영사(蕭穎士=735년의 진사), 이화(李華, 715 ?-766), 가지(價至, 718-772). 원결(元結, 725-777), 양숙(梁肅) 등이 있었다.

한유의 형인 한회(韓會)는 이화의 문제(門弟)이며, 한유가 25세에 진사과에 합격했을 때의 시험관으로 양숙이 있었다. 이후 한유는 양숙의 문제가 되었다. 한유는 자기가 신조로 하는 문체를 '고문(古文)'이라 자칭하고, 고문에 의해서 세도(世道) 인심의 도의를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한유의 고문은 단순히 문체개혁을 뜻한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해서 세상 사람의 정신 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한(韓)·유(柳)의 고문부흥운동은 송대에도 계승되어 구양수, 소순(蘇洵), 증공(曾鞏, 1019-1083), 왕안석, 소식, 소철 등의 문장가를 배출했다. 한·유와 함께 이상 8명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칭한다. 당송팔대가의 명문을 모은 것으로는 원(元)의 황견(黃堅)이 편집한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10권)과 남송의 사방득(謝坊得, 1226-1289)이 편집한 <문장궤범(文章軌範)>(7권), 청(淸)의 심덕잠(沈德潛, 1673-1765)의 <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30권) 등이 있다.

한유

[편집]

韓愈 (768-824)

중국 중당의 문장가·시인. 자는 퇴지(退之).

부친은 현령(縣令)이었으며, 3세 때 부친을 잃고 이후 형인 한회(韓會) 밑에서 성장했으나, 11세 때 형도 죽었다. 그 후 생활의 고달픔 속에서도 25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국자박사(國子博士=국립대학교수), 국자제주(國子祭酒=국립대학총장), 경조 윤겸 어사대부(京兆尹兼御史大夫) 등을 역임했고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추서받았으며, 시호를 문공(文公)이라고 했다.

29세 때부터 고문에의 문필가로서 이름이 알려져서 차츰 문하생을 얻었다. 한유의 글은 도덕의식이 극히 강하고, 항상 사물의 본질에 입각하여 발언하려 했다. 또한 많은 묘지명(墓誌銘)을 짓는 한편 묘지명을 문학의 위치로 높였다. 시인으로도 유명한 그는 시어(詩語) 선택에 고심했고, 시를 읊는 데도 고심했다. 맹교(孟郊), 가도, 노동, 장적, 이하 등은 한유의 문인(門人)이다.

유종원

[편집]

柳宗元 (773-819)

중국 중당의 문장가·시인. 자는 자후(子厚).

봉건(封建) 관료의 집안에 출생, 진사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이 되었다. 그 해 정월 덕종(德宗)이 죽자 순종(順宗)이 즉위하고,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 왕비 등의 정치개혁운동에 가담했다. 그 운동은 환관이나 그들을 이용하는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쇄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개혁운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8월에 순종 재위에 수반되어 개혁파는 모두 물러나고,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는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43세 때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겨져 47세로 그 곳에서 죽었다.

유종원은 봉건사회의 구조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합리주의자였다. 그의 <봉건론(封建論)>이라는 제목의 글은 유명하다. 그는

합리주의 정신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하여 우화적인 기법을 사용한 산문을 즐겨 썼다. 그의 글은 한유의 글에서 보는 것 같은 원리론에서부터 서술을 진행하는 이론적인 장점은 없으나, 세상이나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 비판정신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지방관리로 좌천된 이후 산수·자연의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했다. 시인으로서는 왕유, 맹호연, 위응물과 함께 왕·맹·위·유라고 칭해졌다.

소순

[편집]

蘇洵 (1009-1066)

중국 북송의 문장가.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다.

구양수에게 문재와 식견을 인정받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글은 직감적이며 주저없이 단언해 버리는 데에 예리함과

맛이 있다. 왕안석으로부터 전국시대의 정론가(政論家)의 글과 유사하다고 비평받았다. 구양수의 온건한 상식적인 발언과 대조적이다.

소식, 소철 두 아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유명하다. 소순과 두 아들을 합쳐서 '3소'라고 부르고 또한 순을 노소(老蘇)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송의 전기소설

[편집]

唐·宋-傳奇小說

당대(唐代)에 이르러 소설다운 소설이 발생했다. 이를 전기(傳奇)라고 일컫는데, 그것은 기(奇)를 전(傳)하고, 기이(奇異)를 엮는 것을 생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선굴(遊仙窟)>은 신선의 굴 속에서 논 이야기, <침중기(枕中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李公佐)은 꿈 속에서 별세계에 갔던 이야기이며, <유의전(柳毅傳)>은 동정(洞庭)의 용녀(龍女)와 결합되는 이야기, <임씨전(任氏傳)>(沈旣濟)은 미녀로 둔갑한 여우의 이야기, <이혼기(離婚記)>(陳玄祐)는 여체(女體)를 빠져나온 혼의 이야기, <주진행기(周秦行紀)>(牛僧孺)는 죽은 미녀와 맺어지는 이야기, <두자춘전(杜子春傳)>은 도사(道士)나 선약(仙藥)에 관한 이야기, <사소아전(謝小娥傳)>(李公佐) <이왜전(李娃傳)>은 여자의 정절의 특이성을 엮은 것 등이다.

전기는 6조의 지괴(志怪)소설이 발전된 것인데, 지괴가 단순히 괴이(怪異)를 전록(傳錄)했을 뿐인 짧은 것인 데 비해 전기는 작위적인데 문채(文彩)와 의상(意想)을 갖추며, 보다 긴 한 편을 이루고 있다. 기이(奇異)는 현실을 그리는 방법으로서 사용되고 있어서, 예를 들면 <유선굴>에서 선굴(仙窟)의 놀이를 엮은 것은, 사실 기루기관(妓樓妓館)의 즐거움을 미화시키고, 과장하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기(奇)가 사용되는 것은 당시 즐겨 기를 이야기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기를 핑계삼는 편이 생각하는 바를 자유로 표현할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문재(文才)를 겨룰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 제작의 목적은 풍유(風諭)·풍자 외에 작자의 소우(消憂)를 위한다든지, 작자 자신을 호소하기 위한다든지, 자신의 문재(文才)를 과시하기 위한 경우도 있다.

작품으로는 상기한 외에 <앵앵전> <곽소옥전(藿小玉傳)>(蔣防), <장한가전(長恨歌傳)>(陳鴻), <유씨전(柳氏傳)>(許堯佐), <유무쌍전(劉無雙傳)>(蘖調) 등이 있으며, 애정을 구가함으로써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의 시조가 된 것은 주목할 일이다. 발생은 <유선굴>이 초당일 뿐 모두 중당 이후로서, 그것은 문체해방운동이나, 이야기를 노래로 읊는 풍조와도 관련되고 있다. 송의 전기는 당을 계승하여, <녹주전(綠珠傳)>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樂史), <담의가전(譚意歌傳)>(秦醇) 등이 있으며, 화본(話本=이야기책)의 유행에 눌려서 당시대만큼은 성행하지 않았다.

전기는 그 후 화본이나 희곡에 응용되어 변형되었고, 또한 명(明)의 <전등신화>와 같은 것을 낳게 했다.

유선굴(遊仙窟)

[편집]

(700 ?)

장문성 작(作)의 연애소설. 이 소설은 작자의 유곽에서의 견문을 토대로 씌어졌다. 한 풍류재사(才士)가 선경(仙境)에 들러서 아름다운 자매의 환대를 받고 작은 아가씨와 하룻밤의 인연을 맺는 경우를 그리고 있다. 전대(前代)에 유행했던 변려문에 당대의 속언(俗諺)을 섞어 기지가 넘치는 회화와 시(詩)의 응수는 작자의 재주를 나타내고 있다. 이야기 줄거리의 구성에 중점을 둔 당대(唐代)의 전기와는 이질적인 소설이다.

이왜전(李娃傳)

[편집]

(795)

백행간(白行簡) 작의 연애소설. 작자는 백거이(白居易)의 아우이다.

당대 제일의 명기(名妓) 이왜(李娃)는 자기에 향한 사랑 때문에 과거에 낙방하고, 만가(挽歌)쟁이에서 거지로까지 전락한 사나이와 재회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바쳐 사나이를 재생시켜 고관으로 출세시킨다.

집안 체면 때문에 아들을 내쫓은 아버지까지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사랑의 힘은, 발흥하고 있는 서민(庶民)의 힘찬 숨결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당대(唐代) 인사(人士)의 이상형(理想形)의 결정(結晶)이다.

유의전(柳毅傳)

[편집]

(800)

이조위(李朝威) 작의 신이(神異)소설. 낙제서생 유의가 용왕(龍王) 동정군(洞庭君)의 딸과 만난다. 그녀는 남편에게 학대받아 양(羊)몰이로 전락된 신세로서, 이 사실을 그녀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유의에게 부탁한다. 이를 전해 들은 용왕의 아우는 격노하여 조카사위를 죽이고, 그녀를 데리고 와 유의와 결합시키려고 하나 유의에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후에 유의가 장가간 여자는 이 용녀(龍女)로서, 두 사람은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된다. 기발한 착상과 용궁의 묘사가 훌륭하여

후대에 몇 가지의 번안(飜案)이 나왔다.

침중기(枕中記)

[편집]

(800 ?)

심기제(沈旣濟) 작인 풍자소설.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는 가난한 서생이 한 도사(道士)가 준 베개로 인해 일생 동안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보나, 깨고 보니 그것이 잠깐 동안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명리(名利)를 찾는 자신의 하찮은 모습을 깨닫는다. 파란만장의 일생을 일순의 꿈에 응축시킨 소설수법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황량일취몽(黃梁一炊夢)'의 고사(故事)로서 후자에 전해지고 있다. 당대(唐代)의 실리적 풍조에 대한 작가의 풍자가 담겨져 있다.

앵앵전(鶯鶯傳)

[편집]

(800 ?)

원진(元?) 작의 연애소설. 일명 <회진기(會眞記)>라고도 한다. 작자의 젊었을 때의 견문을 토대로 씌어졌다.

과거시험 때문에 상경하는 사나이가 우연히 알게 된 미녀에게 마음이 끌려 여러 가지 곡절 끝에 결합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나이의 출세를 위해 두 사람의 사랑은 깨어진다. 왕래하는 편지나 시 가운데 훌륭하게 심리적인 묘사를 삽입하여 당대(唐代) 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서상기(西廂記)> 이후, 이 소설은 많이 번안되었다.

두자춘전(杜子春傳)

[편집]

(850 ?)

이복언(李復言)의 괴이소설. <속현괴록(續玄怪錄)>중의 한 편. 장안의 빈사(貧士)인 두자춘(杜子春)은 도사로부터 세 번이나 대금을 얻었으나 사치 때문에 탕진하고 만다. 그는 자신을 잃고 세상을 등지고 도사의 제자가 되려고 작심한다. 여러 가지 고행을 겪어 여자로 전생(轉生)한 그는 자기 자식이 살해당하게 되자, 계율(戒律)을 범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다. 줄거리의 기복이 많고 기괴한 지옥이나 선술(仙術)의 묘사가 뛰어나다.

태평광기(太平廣記)

[편집]

(500권)

칙명(勅命)에 따라 편집된 소설집. 편자는 이방(李昉) 외 12명. 모두가 송대(宋代) 초기의 일류학자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에 원고를 완성하여 3년 후에 판을 새겼는데, 후학(後學)에는 그다지 필요한 서적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어서 판본(板本)은 궁중 서고인 태청루(太淸樓)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송판(宋板)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광기>가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것은 명(明)의 담개(談愷)가 초본을 입수하여 1566년에 교각(校刻) 출판했기 때문이다.

내용은 거리의 소문, 개인의 에피소드, 진기하고도 색다른 이야기 등이 대부분으로서 신선·선녀… 잡전기(雜傳記)·잡록(雜錄) 등으로 모두 92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광기>에 수록된 내용은 한에서 송(宋) 초기에 걸친 475종에 이르며, 그 중 대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이것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소설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되어 있다.

변문과 화본

[편집]

變文-話本

변문이란 당오대(唐五代), 주로 돈황(敦煌) 주변에서 유행했던 불교 선포의 구전문학으로서 변(變)이란 전설을 도시(圖示)한 것을 말하며, 그것을 대중에게 보이면서 노래를 부르고 또한 이야기한 그림풀이 설경(說經)의 대본이다.

사원이 세속인에게 베푼 설법, 즉 속강(俗講)의 자리에서 행해진, <태자성도경변문(太子成道經變文)> <목련구모변문(目連救母變文)> 등의 불교 관계가 많고, <순자지효변문(舜子至孝變文)> <왕릉변문(王陵變文)> <장의조변문(張義潮變文)> 등의 역사물이나 시사물도 있어, 그 대중성은 후의 강창(講唱)문학의 원조로서 높이 평가된다. 서민사회의 발흥과 함께 송대의 민간문예는 사원을 떠나 와자(瓦子)라는 환락가에서 유행하였다.

북송의 변경(沫京=지금의 카이펑), 남송의 임안(臨安)에서 실시된 대부분의 설화의 대본을 화본(話本)이라고 한다. 확실히 송대의 것이라는 화본은 없으나,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說)> <청평산당화본(淸平山堂話本)> <우창가침집(雨窓歌枕集)>은 송대 화본의 면목을 전하고 있으며,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法師取經記)>와 같은 역사물·불교물도 송대 설화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강창·설화의 흐름이 후의 중국문학의 커다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