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배송지 주)/권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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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董卓)
[편집]원소(袁紹)
[편집]2-1 원소(袁紹)의 자(字)는 본초(本初)이고, 여남군(汝南郡)[1]여양현(汝陽縣) 출신이다. 고조부 원안(袁安)은 후한의 사도(司徒)가 되었다. 원안 이래로 4세에 걸쳐 삼공(三公)[2] 자리를 지냈으므로, 그 세력이 천하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
2-2 화교(華嶠)가 《한서》(漢書)에서 이르기를, 원안의 자(字)는 소공(邵公)이다. 학문을 좋아했고, 위엄과 무거움이 있었다. 명제(明帝)[3] 때, 초군(楚郡) 태수(太守)가 되어, 초왕(楚王)의 옥사(獄事)[4]를 다스렸는데, 억울한 사람을 위하여 변명해 준 바가 사백여 가(家)였다. 모두 보전(保全)되고 구제(救濟)를 받으니, 원안은 마침내 이름난 신하가 되었다. 장제(章帝)[5] 때에 사도에 이르고, 촉군(蜀郡) 태수가 될 원경(袁京)을 낳았다. 원경의 아우 원창(袁敞)은 사공(司空)이 되었다. 원경의 아들 원탕(袁湯)은 태위가 되었다. 원탕은 아들 넷이 있었다. 장남이 원평(袁平), 원평의 아우 원성(袁成)은 좌중랑장을 지냈는데, 둘 다 일찍 죽었다. 원성의 아우가 원봉(袁逢), 원봉의 아우가 원외(袁隗)인데, 모두 벼슬을 지냈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원안 이래로, 모두 널리 사랑하고 뭇사람들을 받아들여, 구별하여 고르는 바가 없었다. 빈객이 그 집 문에 들어가면, 현명한 자든 어리석은 자든 모두 편안한 바를 얻었고, 천하가 그 돌아가는 바가 되었다.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이복 형에게 술수를 써서, 출생 후에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었다. 《영웅기》(英雄記)[6]에 이르기를, 원성의 자(字)는 문개(文開)인데, 건장하고 부분을 잘 다스려, 귀한 인척, 권세가, 호걸들, 대장군 양기(梁冀) 이하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으니,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경사(京師)에 속담이 퍼지길 “일이 풀리지 아니하면, 문개에게 물어봐라” 하였다. 원소는 자태로운 외모와 위엄있는 얼굴을 가졌고, 능히 선비들에게 몸을 굽히니,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태조(太祖)[7]와는 어려서부터 교류하였다. 대장군(大將軍)[8]과의 인연으로 시어사(侍御史)[9]가 되었다. 《영웅기》에 이르기를, 원소가 태어나자 아비가 죽었는데, 이공(二公)이 그를 아꼈다. 어려서는 벼슬 ‘랑’(郎)을 맡았고, 약관의 나이에 복양(濮陽)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모친상을 당하였고,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다시 추모하여 부친의 상복을 입었다. 무릇, 무덤 가의 오두막에서 6년을 지냈다. 예를 마치자, 낙양에서 은거하였고, 경망하게 빈객들과 통하지 않았다. 나라안에 명성이 알려져, 그를 서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또한 유랑과 의협을 좋아하여 장맹탁( 張孟卓)·하백구(何伯求)·오자경(吳子卿)·허자원(許子遠)·오덕유(伍德瑜) 등과 더불어 모두 분주히 오가는 친구가 되었으며, 임금의 명령에 불응하였다.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10]이 여러 황문(黃門)들에게 이르기를, “원본초(袁本初)는 앉아서 이름값을 올리고,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키우는 사내로구나. 이 아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는가?” 라 하였다. 원소의 숙부 원외(袁隗)가 이를 듣고 원소를 황급히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장차 우리 집안을 파멸케 하려느냐!” 하였다. 원소는 이에 비로소 다시 대장군의 명령에 응했다. 신 배송지(裴松之)[11]는 상고(詳考)한다. 《위서》에 이르기를,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나중에는 백부 원성에게서 나왔다 하였다. 말한 바를 기록한 것이 이와 같으나, 원성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부인(夫人)이 소생을 추모하여 상복을 입었다는 것은 예(禮)가 문헌에 없다. 하물며, 그 후손들이 이를 행하겠는가? 두 서적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상세하지 않다. 바야흐로 중군 교위(中軍校尉)[12]로 옮기고, 사예(司隸)에 이르렀다.
2-3 영제(靈帝)[13]가 붕어하자, 태후[14]의 오라버니 대장군 하진(何進)이 원소와 함께 모든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모의했다. 《속한서》(續漢書)[15]에 이르기를, 원소가 빈객 장진(張津)[16]으로 하여금 하진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황문·상시(常侍)가 권력을 잡은 지 오래이며, 또한 영락태후(董太后)[17]는 여러 상시들과 함께 재물과 이익을 멋대로 처리하였습니다. 장군께서 천하를 정돈하고 나라를 위하여 근심거리를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진은 그럴 듯이 생각하였고, 마침내 원소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한다. 태후가 따르지 않자, 동탁[18]을 불러, 이로써 태후를 위협하고자 하였다. 상시·황문이 이를 듣고 모두 나아가 사죄하며 조치하는 바를 바랬다. 이때, 원소는 하진에게 곧, 이 결정이 가능하도록 두번 세번에 이르기까지 권유하였으나, 하진은 듣지 아니하였다. 원소에게 명을 내리기를 낙양의, 방략을 갖춘 무장 관리로 하여금 모든 환관들을 감찰하고 살피도록 시켰다. 또 원소의 아우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원술(袁術)[19]에게 영을 내려 온후한 호분(虎賁)[20] 이백 명을 선발하여 궁궐을 담당하여 들어가 무기를 지니고, 궁궐의 문호를 지키는 황문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중상시(中常侍) 단규(段珪)등은 태후의 명령을 위배하고 하진을 의논(議論)차 불러들여 마침내 그를 죽였으니, 궁중이 어지러워졌다.[21] 《구주춘추(九州春秋)》[22]에 이르기를, 처음에 원소가 하진에게 이르기를, “황문·상시가 대대로 크고 번성하여 온 세상을 복종시켰습니다. 전에 두무(竇武)가 그들을 주살(誅殺)하려하였으나, 반대로 해를 입는 바가 되었습니다.[23] 다만, 앉은 자리에서 말이 누설되었으니, 이는 오영(五營)의 병사(兵士)들이 들었기〔耳〕 때문입니다. 오영의 병사들은 수도(首都)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궁중(宮中) 사람들[24]을 복종하고 무서워하는데도, 두씨(竇氏)는 그 병력을 써서 반기를 들었는 바, 마침내 그 결과, (오영 병사들이) 배반하여 황문에게로 달려 돌아갔으므로 이로써 스스로 파멸하였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으뜸가는 국구(國舅)[25]의 존엄으로서, 이부(二府)가 모두 굳센 병사를 거리고, 그 부곡(部曲)[26]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영웅이자 명사(名士)이므로 기꺼이 죽을 힘을 다할 것이니, 사정(事情)은 (장군이) 장악한 것입니다. 하늘이 그 때를 돕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를 위해 탐욕스럽고 더로운 자들을 죽여서 없애면, 공훈(功勳)이 현저하고 이름을 후세에 전할 것이니, 雖週之申伯,족히 말하여 무엇하오리까? 지금 전전(前殿)[27]으로 크게 나아가 장군께서 조서(詔書)로서 병사에게 명령하여 지키게 하면, 가히 입궁(入宮)을 금할 수 있습니다.” 하진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가, 뒤에 다시 여우처럼 의심하였다. [28] 원소는 하진의 변심을 걱정하며, 하진에게 위협하여 말하기를, “지금 서로 얽혀 있음이 이미 이루어졌고, 형세가 이미 드러났는데 장군께서는 어찌 어서 결정하지 않으시는지요? 일이 더뎌지고 변고(變故)가 생기면, 훗날 화(禍)가 미칠 것입니다.”하였다. 하진은 좇지 않았고, 마침내 패하였다. 호분중랑장 원술은 남쪽 궁궐 가덕전(嘉德殿) 청쇄문(青瑣門)을 불사르고, 단규(段珪) 등을 몰아, 나오게 하려 하였으나, 단규 등은 나오지 않았고, 황제와 황제의 동생 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이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원소는 환관이 임명한 사예교위(司隸校尉) 허상(許相)을 참살하였고, 병사들을 매어묶고, 모든 엄인(閹人)[29]을 포박하였으니, 어리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거나 혹은 \\\\\\\\\\오역\\가림이 마땅히 있었으니, 오해로 죽은 자는 형체가 드러난 때부터는 뒤에라도 면(免)할 수 있었다. 宦者或有行善自守而猶見及。그 넘침이 이와 같았다.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단규 등을 급하게 쫓으니 단규 등이 모두 강에 다다라 죽었다. 황제는 환궁할 수 있었다.
2-4 동탁이 원소를 불러 황제를 폐위하고 진류왕(陳留王)을 즉위시키려고 모의하였다. 이때, 원소의 숙부 원외는 태전(太傅)이 되어 있었는데, 원소가 그를 편드는 척하며 말하기를, “이 것은 중대한 일이니, 나아가서 태전과 상의함이 마땅하옵니다. ”라 하였다. 동탁이 이르기를, “유(劉)씨의 종족이 머물러 남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원소는 응하지 않고, 칼을 옆에 찬 채 길게 인사하고 나가버렸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기를,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자 하면서 원소에게 말하기를, “황제는 기울고 있으며〔衝闇〕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萬乘〕의 주인이 아니다. 진류왕(陳留王)이 오히려 뛰어나니, 이제 그를 즉위시키고자 한다. 人有小智,大或癡,亦知復何如,為當且爾;경(卿)은 영제(靈帝)를 못 보았는가? 念此令人憤毒!」 ” 紹曰;「漢家君天下四百許年,恩澤深渥,兆民戴之來久。今帝雖幼衝,未有不善宣聞天下,公欲廢適立庶,恐眾不從公議也。」 동탁이 원소에게 이르기를 “얘기야! 천하의 일이 어찌 나를 주저하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을 누가 감히 따르지 않는가? 爾謂董卓刀為不利乎! ” 하였다. 원소가 이르기를 “천하의 굳센 자가 어찌 동공(董公)뿐이오리까?”하고는, 칼을 뽑아든채 인사하고 나갔다. 신 배송지는 臣松之以為紹於時與卓未構嫌隙,故卓與之諮謀。若但以言議不同,便罵為豎子,而有推刃之心,及紹复答,屈疆為甚,卓又安能容忍而不加害乎?且如紹此言,進非亮正,退違詭遜,而顯其競爽之旨,以觸哮闞之鋒,有志功業者,理豈然哉!此語,妄之甚矣。 원소는 이윽고 밖으로 나가서 마침내 기주(冀州)로 도망하였다. 시중(侍中) 주비(周毖)·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의랑(議郎) 하옹(何顒)등은 모두 이름난 선비들이라 동탁은 이들을 믿었으므로, 이에 원소를 위해 비호하며 동탁에게 말하기를 , “무릇, 폐립(廢立)은 중대한 일이고,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원소는 (아직)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두려워서 도망가버렸지만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今購之急,勢必為變。袁氏樹恩四世,門世故吏遍於天下,若收豪傑以聚徒眾,英雄因之而起,則山東非公之有也。不如赦之,拜一郡守,則紹喜於免罪,必無患矣。」” 동탁은 이를 그럴 듯이 여기고, 원소를 발해(勃海) 태수(太守)에 임명하고, 항향후(邟鄉侯)에 봉하였다.
2-5 원소는 마침내 발해(勃海)를 근거지로 하여 병사를 일으켜, 장차 이로써 동탁을 죽이려 하였다. 語在武紀。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부르고, ,主盟,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과 더불어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글을 바치고, 유우에게 나아갔으나, 유우는 감히 받지 않았다. 後馥軍安平,為公孫瓚所敗。공손찬은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기주(兾州)로 들어갔으니, 동탁을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속으로는 한복을 습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복은 스스로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영웅기》에 이르기를, 봉기(逢紀)[30]가 원소에게 아뢰기를, 원장군이 거사를 일으키고 남에게 물자를 얻어쓰는 형국이니 한 주를 차지하지 못하면 스스로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소가 답하길 기주병이 강성하고 우리는 궁핍하니 진을 벌여 능히 처리할 수 없고 맞설 수 없다. 하였다. 봉기[방기]가 말하였다. 공손찬과 통교(通交)한다면 남하하여 기주를 공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공손찬은 필시 이를 것이고 한복도 또한 두려워할 것이니 이해利害를 해설하고 화복禍福을 진언한다면 한복이 반드시 양위(遜讓.기주목을 넘김.)할 것이어서 이 때에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됩니다. 마침내 동탁이 서쪽으로 함곡관을 넘어 갔다. 원소가 연진에서 군을 돌리니 한복이 두려워하였다. 진류의 고간, 영천의 순심 등으로 하여금 한복에게 말하게 하였다. 공손찬이 승기를 타고 장차 남하함에 여러 군이 호응하였습니다. 원거기(袁車騎.한 거기장군 원소.)가 군을 끌고 동쪽으로 향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이루어질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은밀히 장군이 그 위험을 무릅쓰십시오. 한복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순심이 이르길 공손찬이 연, 대의 사졸을 끌고 오니 그 예봉이 당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원씨는 또한 일시지걸(一時之傑.당대의 준걸.)이어서 장군의 휘하에 있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무릇 기주는 천하의 중한 창고(資)인 바, 만약 두 영웅이 힘을 합쳐 업성 밑에서 싸우게 된다면 당신은 서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본디 원씨는 장군의 옛 벗이자 동맹이니 마땅히 장군을 위하여 계책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어떠한 계책도 기주 전체를 들어 원씨에게 양위하는 이것만 못합니다. 원씨가 기주를 얻고나면 공손찬은 더불어 다툴 수 없으니 반드시 장군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고 친교를 맺고서 현자에게 양위하였다는 명성(讓賢之名) 또한 생기게 될 것이니 태산으로 들어가 몸을 안돈하면 됩니다. 원컨대 장군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한복이 본래 광겁(恇怯.겁을 집어 삼킴.)한 자라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한복의 장사 경무長史耿武, 별가 민순別駕閔純, 치중 이력治中李歷 등이 간하여 말했다. 기주가 비록 지방이나 인구 백만이 있고 10년이나 버틸 만합니다. 원소는 지금 외로운 타향인으로서 군사는 곤궁하며 우리가 하는 대로 휘둘리는 형세이니(仰我鼻息), 말하자면 어린애 다리를 손바닥 위에 놓고서 그 젖을 물리쳐 굶어 죽게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한 주(州)를 갖다준단 말입니까? 한복이 말하였다. 나는 원가(袁家)의 옛 부인(府人.원안袁安 이하.)이고 재주 또한 원본초에 미치지 못한다. 덕의 대소를 따져 양위하는 일은 옛사람이 귀하게 여겼던 바인데 너희들이 어찌 병통으로 여기는가? 종사 조부, 정환從事趙浮、程奐이 원소를 막고자 하여 군병을 청하였으니 한복이 또한 듣지 않았다. 곧 기주목(의 관작)을 내 주었다.《구주춘추》에 이르길 한복이 도독종사 조부와 정환을 시켜 강노병 일만을 이끌고 하양에 널리 주둔하도록 했다. 조부 등은 한복이 기주를 원소에게 주려한다는 것을 알고 맹진으로부터 동쪽으로 내려갔다. 원소가 이때 조가현 청수 상류에 있었다. 조부 등이 배 수백 척과 무리 만여 명을 가지고서 훈련을 벌이고 밤에 북을 울리면서 원소의 병영을 지나가니 원소가 매우 두려워 하였다. 조부 등이 한복에게로 와서 말하였다. 원본초는 군영에 싸움을 버틸 식량도 없으며 제각기 흩어져있습니다. 비록 장양과 어부라가 새로 합쳐진다해도 쓸 만한 것은 못 될것이니 오히려 적(敵)이라 말하기도 부족합니다. 저희 종사 조부 등이 청하건대 군사를 벌여 그들을 막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10일 안에 반드시 토붕와해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다만 맘 편히 주무시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걱정을 그리 합니까? 한복이 따르지 않았다. 곧 자리를 비켜주고서 조충의 옛날 집(舍屋)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자식 한재(齎. 훈-갖추다, 음-재)를 시켜 기주의 인수를 가져다 여양에 있는 원소에게 주었다.원소가 마침내 령 기주목이 되었다.
2-6 從事저수(沮‘沮’의 음(音)은 ‘菹’이다.授)[31]가 원소에게 아뢰기를, 원장군은 약관에 등조하여 이름이 해내에 퍼졌고 동-사후를 폐립하는 일에 당하여 충의로 분발하였으니 단기로 왕성을 나가자 동탁이 두려워하였고 황하를 건너 북으로 가서 발해의 인구를 세고서 그 군사를 일으키고 기주인을 모으니 하북을 울렸으며 명성이 천하에 중해진 바, 비록 황건과 흑산이 날뛰어도 기주 군사를 들어 청주로 동진하면 청주가 안정되고 오는 길에 또 흑산을 토파하면 장연이 멸해지니, 군중을 이끌고 북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공손씨도 패망할 터, 융적을 요격하면 흉노도 또한 정벌이 될 지니, 다시 황하를 가로질러 기청유병을 통합하고 영웅과 백만민중을 들여와 서안에서 어가를 맞이해 낙양에 종묘를 복설하야 령천하로써 수복되지 않은 곳을 토벌한다면 여기에 겨룬다한들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몇 년만 들이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원소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내 뜻이로다”하고, 그 즉시 감군(監軍)·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하였다. 《헌제기(獻帝紀)》에 이르기를, 저수(沮授)는 광평(廣平) 출신으로, 어려서 큰 뜻을 가지고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주 별가(州別駕)를 맡았고,무재로 천거되어,2개 현(縣)의 현령을 지냈으며, 또한 한복(韓馥)을 위해 별가(別駕)를 (맡았고), 기도위(騎都尉) 벼슬을 받았다. 원소가 기주를 얻자 또한 벽소되었다.《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기를 이 때 연호가 초평이었는데, 원소의 자(字)가 초평이므로 스스로 생각하길 연호와 자가 들어 맞으므로 환난을 만드시 평정하리라 하였다. 동탁은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脩)를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원소를 깨우쳤으나,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으로 하여금 그들을 죽였다. 《한말명사록》(漢末名士錄)에 이르기를, 호모반의 자(字)는 계피(季皮)이고, 태산(太山) 사람이며, 어려서는 산양(山陽)의 탁상(度尚)· 동평(東平)의 장모(張邈) 등 여덟 사람과 함께 輕財赴義,振濟人士,世謂之八廚。《謝承後漢書》曰:班,왕광(王匡)之妹夫,董卓使班奉詔到河內,解釋義兵。匡受袁紹旨。收班繫獄,欲殺之以徇軍。班與匡書云:「自古以來,未有下土諸侯舉兵向京師者。劉向傳曰'擲鼠忌器',器猶忌之,況卓今處宮闕之內,以天子為籓屏,幼主在宮,如何可討?僕與太傅馬公、太僕趙岐、少府陰脩俱受詔命。關東諸郡,雖實嫉卓,猶以銜奉王命,不敢玷辱。而足下獨囚僕於獄,欲以釁鼓,此悖暴無道之甚者也。僕與董卓有何親戚,義豈同惡?而足下張虎狼之口,吐長之毒,恚卓遷怒,何甚酷哉!死,人之所難,然恥為狂夫所害。若亡者有靈,當訴足下於皇天。夫婚姻者禍福之機,今日著矣。曩為一體,今為血仇。亡人子二人,則君之甥,身沒之後,慎勿令臨僕屍骸也。」匡得書,抱班二子而泣。班遂死於獄。班嘗見太山府君及河伯,事在搜神記,語多不載。 卓聞紹得關東、乃悉誅紹宗族太傅隗等。當是時,豪俠多附紹,皆思為之報,州郡鋒起,莫不假其名。馥懷懼,從紹索去,往依張邈。 《英雄記》曰:紹以河內硃漢為都官從事。漢先時為馥所不禮,內懷怨恨,且欲邀迎紹意,擅發城郭兵圍守馥第,拔刃登屋。馥走上樓,收得馥大兒,槌折兩腳。紹亦立收漢,殺之。馥猶憂怖,故報紹索去。 後紹遣使詣邈,有所計議,與邈耳語。馥在坐上,謂見圖構,無何起至溷自殺。 《영웅기》에 이르기를, 공손찬(公孫瓚)이 청주(青州)의 황건적(黃巾賊)을 격파하고 크게 이를 무찌르니, 還屯廣宗,改易守令,冀州長吏無不望風響應,開門受之。紹自往徵瓚,合戰於界橋南二十里。공손찬의 보병 삼만여명이 방진(方陣)을 만들고, 騎為兩翼,左右各五千餘匹,白馬義從為中堅,亦分作兩校,左射右,右射左,旌旗鎧甲,光照天地。紹令麴義以八百兵為先登,強弩千張夾承之,紹自以步兵數万結陳於後。義久在涼州,曉習羌鬥,兵皆驍銳。瓚見其兵少,便放騎欲陵蹈之。義兵皆伏楯下不動,未至數十步,乃同時俱起,揚塵大叫,直前衝突,強弩雷發,所中必倒,臨陳斬瓚所署冀州刺史嚴綱甲首千餘級。瓚軍敗績,步騎奔走,不復還營。義追至界橋;瓚殿兵還戰橋上,義復破之,遂到瓚營,拔其牙門,營中餘眾皆复散走。紹在後,未到橋十數里,下馬發鞍,見瓚已破,不為設備,惟帳下強弩數十張,大戟士百餘人自隨。瓚部迸騎二千餘匹卒至,便圍紹數重,弓矢雨下。別駕從事田豐扶紹欲卻入空垣,紹以兜鍪撲地曰:「大丈夫當前鬥死,而入牆間,豈可得活乎?」強弩乃亂發,多所殺傷。瓚騎不知是紹,亦稍引卻;會麴義來迎,乃散去。瓚每與虜戰,常乘白馬,追不虛發,數獲戎捷,虜相告云「當避白馬」。因虜所忌,簡其白馬數千匹,選騎射之士,號為白馬義從;一曰胡夷健者常乘白馬,瓚有健騎數千,多乘白馬,故以號焉,紹既破瓚,引軍南到薄落津,方與賓客諸將共會,聞魏郡兵反,與黑山賊於毒共覆鄴城,遂殺太守栗成。賊十餘部,眾數万人,聚會鄴中。坐上諸客有家在鄴者,皆憂怖失色,或起啼泣,紹容貌不變,自若也。賊陶升者,故內黃小吏也,有善心,獨將部眾逾西城入,閉守州門,不內他賊,以車載紹家及諸衣冠在州內者,身自扞衛,送到斥丘乃還。紹到,遂屯斥丘,以陶升為建義中郎將。乃引軍入朝歌鹿場山蒼巖谷討於毒,圍攻五日,破之,斬毒及長安所署冀州牧壺壽。遂尋山北行,薄擊諸賊(左髮丈八)〔左髭丈八〕等,皆斬之。又擊劉石、青牛角、黃龍、左校、郭大賢、李大目、於氐根等,皆屠其屯壁,奔走得脫,斬首數万級。紹復還屯鄴。초평 4년初平四年,天子使太傅馬日磾、太僕趙岐和解關東。岐別詣河北,紹出迎於百里上,拜奉帝命。岐住紹營,移書告瓚。瓚遣使具與紹書曰:「趙太僕以周召之德,銜命來徵,宣揚朝恩,示以和睦,曠若開雲見日,何喜如之?昔賈复、寇恂亦爭士卒,欲相危害,遇光武之寬,親俱陛見,同輿共出,時人以為榮。自省邊鄙,得與將軍共同此福,此誠將軍之眷,而瓚之幸也。」麴義後恃功而驕恣,紹乃殺之。
初,天子之立非紹意,及在河東,紹遣潁川郭圖使焉。圖還說紹迎天子都鄴,紹不從。 《헌제전(獻帝傳)》에 이르기를, 저수(沮授)는 원소에게 이렇게 말했다.:「將軍累葉輔弼,世濟忠義。今朝廷播越,宗廟毀壞,觀諸州郡外託義兵,內圖相滅,未有存主卹民者。且今州城粗定,宜迎大駕,安宮鄴都,挾天子而令諸侯,畜士馬以討不庭,誰能御之!」紹悅,將從之。郭圖、淳于瓊曰:「漢室陵遲,為日久矣,今欲興之,不亦難乎!且今英雄據有州郡,眾動萬計,所謂秦失其鹿,先得者王。若迎天子以自近,動輒表聞,從之則權輕,違之則拒命,非計之善者也。」授曰:「今迎朝廷,至義也,又於時宜大計也,若不早圖,必有先人者也。夫權不失機,功在速捷,將軍其圖之!」紹弗能用。案此書稱(郭圖)〔沮授〕之計,則與本傳違也。 會太祖迎天子都許,收河南地,關中皆附。紹悔,欲令太祖徙天子都鄄城以自密近,太祖拒之。天子以紹為太尉,轉為大將軍,封鄴侯,《獻帝春秋》曰:紹恥班在太祖下,怒曰;「曹操當死數矣,我輒救存之,今乃背恩,挾天子以令我乎!」太祖聞,而以大將軍讓於紹。 紹讓侯不受。頃之。擊破瓚於易京,併其眾。 《典略》曰:自此紹貢御希慢,私使主薄耿苞密白曰:「赤德衰盡,袁為黃胤,宜順天意。」紹以苞密白事示軍府將吏。議者咸以苞為妖妄宜誅,紹乃殺苞以自解。《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기를, 紹延徵北海鄭玄而不禮,趙融聞之曰:「賢人者,君子之望也。不禮賢,是失君子之望也。夫有為之君,不敢失萬民之歡心,況於君子乎?失君子之望,難乎以有為矣。」《英雄記》載太祖作董卓歌,辭云:「德行不虧缺,變故自難常。鄭康成行酒,伏地氣絕,郭景圖命盡於園桑。」如此之文,則玄無病而卒。餘書不見,故載錄之。 出長子譚為青州,沮授諫紹:「必為禍始。」紹不聽,曰:「孤欲令諸兒各據一州也。」《九州春秋》載授諫辭曰: 「世稱一兔走衢,萬人逐之,一人獲之,貪者悉止,分定故也。且年均以賢,德均則卜,古之製也。原上惟先代成敗之戒,下思逐兔分定之義。」紹曰:「孤欲令四兒各據一州,以觀其能。」授出曰:「禍其始此乎!」譚始至青州,為都督,未為刺史,後太祖拜為刺史。其土自河而西,蓋不過平原而已。遂北排田楷,東攻孔融,曜兵海隅,是時百姓無主,欣戴之矣。然信用群小,好受近言,肆志奢淫,不知稼穡之艱難。華彥、孔順皆奸佞小人也,信以為腹心;王脩等備官而已。然能接待賓客,慕名敬士。使婦弟領兵在內,至令草竊,巿井而外,虜掠田野;別使兩將募兵下縣,有賂者見免,無者見取,貧弱者多,乃至於竄伏丘野之中,放兵捕索,如獵鳥獸。邑有萬戶者,著籍不盈數百,收賦納稅,參分不入一。招命賢士,不就;不趨赴軍期,安居族黨,亦不能罪也。 又以中子熙為幽州,甥高幹為并州。眾數十萬,以審配、逢紀統軍事,田豐、荀諶、許攸為謀主,顏良、文丑為將率,簡精卒十萬,騎萬匹,將攻許。 《世語》曰:紹步卒五萬,騎八千。孫盛評曰:案魏武謂崔琰曰「昨案貴州戶籍,可得三十萬眾」。由此推之,但冀州勝兵已如此,況兼幽、並及青州乎?紹之大舉,必悉師而起,十萬近之矣。《獻帝傳》曰:紹將南師,沮授、田豐諫曰:「師出歷年,百姓疲弊,倉庾無積,賦役方殷,此國之深憂也。宜先遣使獻捷天子,務農逸民;若不得通,乃表曹氏隔我王路,然後進屯黎陽,漸營河南,益作舟船,繕治器械,分遣精騎,鈔其邊鄙,令彼不得安,我取其逸。三年之中,事可坐定也。」審配、郭圖曰:「兵書之法,十圍五攻,敵則能戰。今以明公之神武,跨河朔之強眾,以伐曹氏。譬若覆手,今不時取,後難圖也。」授曰:「蓋救亂誅暴,謂之義兵;恃眾憑強,謂之驕兵。兵義無敵,驕者先滅。曹氏迎天子安宮許都,今舉兵南向,於義則違。且廟勝之策,不在強弱。曹氏法令既行,士卒精練,非公孫瓚坐受圍者也。今棄萬安之術,而興無名之兵,竊為公懼之!」圖等曰:「武王伐紂,不曰不義,況兵加曹氏而云無名!且公師武臣(竭)力,將士憤怒,人思自騁,而不及時早定大業,慮之失也。夫天與弗取,反受其咎,此越之所以霸,吳之所以亡也。監軍之計,計在持牢,而非見時知機之變也。」紹從之。圖等因是譖授「監統內外,威震三軍,若其浸盛,何以製之?夫臣與主不同者昌,主與臣同者亡,此黃石之所忌也。且禦眾於外,不宜知內。」紹疑焉。乃分監軍為三都督,使授及郭圖、淳于瓊各典一軍,遂合而南。
이보다 앞서, 太祖遣劉備詣徐州拒袁術。術死,備殺刺史車冑,引軍屯沛。紹遣騎佐之。太祖遣劉岱、王忠擊之,不克。建安五年,太祖自東征備。田豐說紹襲太祖後,紹辭以子疾,不許,豐舉杖擊地曰:「夫遭難遇之機,而以嬰兒之病失其會,惜哉!」太祖至,擊破備;備奔紹。 《魏氏春秋》載紹檄州郡文曰:「蓋聞明主圖危以製變,忠臣慮難以立權。曩者強秦弱主,趙高執柄,專制朝命,威福由己,終有望夷之禍,汙辱至今。及臻呂后,祿、產專政,擅斷萬機,決事省禁,下陵上替,海內寒心。於是絳侯、硃虛興威奮怒,誅夷逆亂,尊立太宗,故能道化興隆,光明顯融,此則大臣立權之明表也。司空曹操,祖父騰,故中常侍,與左悺、徐璜並作妖孽,饕餮放橫,傷化虐民。父嵩,乞丐攜養,因贓假位,輿金輦璧,輸貨權門,竊盜鼎司,傾覆重器。操贅閹遺醜,本無令德,僄狡鋒俠,好亂樂禍。幕府昔統鷹揚,掃夷凶逆。續遇董卓侵官暴國,於是提劍揮鼓,發命東夏,方收羅英雄,棄瑕錄用,故遂與操參諮策略,謂其鷹犬之才,爪牙可任。至乃愚佻短慮,輕進易退,傷夷折衄,數喪師徒。幕府輒復分兵命銳,修完補輯,表行東郡太守、兗州刺史,被以虎文,授以偏師,獎蹙威柄,冀獲秦師一克之報。而操遂乘資跋扈,肆行酷烈,割剝元元,殘賢害善。故九江太守邊讓,英才俊逸,天下知名,以直言正色,論不阿諂,身被梟縣之戮,妻孥受灰滅之咎。自是士林憤痛,民怨彌重,一夫奮臂,舉州同聲,故躬破於徐方,地奪於呂布,徬徨東裔,蹈據無所。幕府唯強幹弱枝之義,且不登叛人之黨,故复援旌擐甲,席捲赴徵,金鼓響震,布眾破沮,拯其死亡之患,復其方伯之任,是則幕府無德於兗土之民,而有大造於操也。後會鑾駕東反,群虜亂政。時冀州方有北鄙之警,匪遑離局,故使從事中郎徐勳就發遣操,使繕修郊廟,翼衛幼主。而便放志專行,脅遷省禁,卑侮王官,敗法亂紀,坐召三台,專制朝政,爵賞由心,刑戮在口,所愛光五宗,所惡滅三族,群談者蒙顯誅,腹議者蒙隱戮,道路以目,百寮鉗口,尚書記朝會,公卿充員品而已。故太尉楊彪,歷典三司,享國極位,操因睚眥,被以非罪,榜楚並兼,五毒俱至,觸情放慝,不顧憲章。又議郎趙彥,忠諫直言,議有可納,故聖朝含聽,改容加錫,操欲迷奪時權,杜絕言路,擅收立殺,不俟報聞。又梁孝王,先帝母弟,墳陵尊顯,松柏桑梓,猶宜恭肅,而操率將校吏士親臨發掘,破棺裸屍,略取金寶,至令聖朝流涕,士民傷懷。又署發丘中郎將、摸金校尉,所過墮突,無骸不露。身處三公之官,而行桀虜之態,殄國虐民,毒流人鬼。加其細政苛慘,科防互設,繒繳充蹊,坑阱塞路,舉手掛網羅,動足蹈機陷,是以兗、豫有無聊之民,帝都有吁嗟之怨。歷觀古今書籍,所載貪殘虐烈無道之臣,於操為甚。幕府方詰外姦,未及整訓,加意含覆,冀可彌縫。而操豺狼野心,潛苞禍謀,乃欲撓折棟樑,孤弱漢室,除滅中正,專為梟雄。往歲伐鼓北征,討公孫瓚,強禦桀逆,拒圍一年。操因其未破,陰交書命,欲託助王師,以相掩襲,故引兵造河,方舟北濟。會其行人發露,瓚亦梟夷,故使鋒芒挫縮,厥圖不果。屯據敖倉,阻河為固,乃欲以螳螂之斧,禦隆車之隧。幕府奉漢威靈,折衝宇宙,長戟百萬,胡騎千群,奮中黃、育、獲之材,騁良弓勁弩之勢,并州越太行,青州涉濟、漯,大軍汎黃河以角其前,荊州下宛、葉而掎其後,雷震虎步,並集虜庭,若舉炎火以焫飛蓬,覆滄海而沃熛炭,有何不消滅者哉?當今漢道陵遲,綱弛紀絕。操以精兵七百,圍守宮闕,外稱陪衛,內以拘執,懼其篡逆之禍,因斯而作。乃忠臣肝腦塗地之秋,烈士立功之會也,可不勗哉! 」此陳琳之辭。
紹進軍黎陽,遣顏良攻劉延於白馬。沮授又諫紹:「良性促狹,雖驍勇不可獨任。」紹不聽。太祖救延,與良戰,破斬良。 《獻帝傳》曰:紹臨發,沮授會其宗族,散資財以與之曰:「夫勢在則威無不加,勢亡則不保一身,哀哉!」其弟宗曰:「曹公士馬不敵,君何懼焉!」授曰:「以曹兗州之明略,又挾天子以為資,我雖克公孫,眾實疲弊,而將驕主忲,軍之破敗,在此舉也。揚雄有言,'六國蚩蚩,為嬴弱姬',今之謂也。」紹渡河,壁延津南,使劉備、文丑挑戰。太祖擊破之,斬醜,再戰,禽紹大將。紹軍大震。 《獻帝傳》曰:紹將濟河,沮授諫曰:「勝負變化,不可不詳。今宜留屯延津,分兵官渡,若其克獲,還迎不晚,設其有難,眾弗可還。」紹弗從。授臨濟歎曰:「上盈其志,下務其功,悠悠黃河,吾其不反乎!」遂以疾辭。紹恨之,乃省其所部兵屬郭圖。 太祖還官渡。沮授又曰:「北兵數眾而果勁不及南,南谷虛少而貨財不及北;南利在於急戰,北利在於緩搏。宜徐持久,曠以日月。」紹不從。連營稍前,逼官渡,合戰,太祖軍不利,复壁。紹為高櫓,起土山,射營中,營中皆蒙楯,眾大懼。太祖乃為發石車,擊紹樓,皆破,紹眾號曰霹靂車。 《魏氏春秋》曰:以古有矢石,又傳言「旝動而鼓」,說曰「旝,發石也」,於是造發石車。 紹為地道,欲襲太祖營。太祖輒於內為長塹以拒之,又遣奇兵襲擊紹運車,大破之,盡焚其穀。太祖與紹相持日久,百姓疲乏,多叛應紹,軍食乏。會紹遣淳于瓊等將兵萬餘人北迎運車,沮授說紹:「可遣將蔣奇別為支軍於表,以斷曹公之鈔。」紹復不從。瓊宿烏巢,去紹軍四十里。太祖乃留曹洪守,自將步騎五千候夜潛往攻瓊。紹遣騎救之,敗走。破瓊等,悉斬之。太祖還,未至營,紹將高覽、張郃等率其眾降。원소의 무리는 크게 흩어지고, 紹與譚單騎退渡河。餘眾偽降,盡坑之。 《張璠漢紀》云:殺紹卒凡八萬人。 沮授不及紹渡,為人所執,詣太祖,《獻帝傳》云:授大呼曰:「授不降也,為軍所執耳!」太祖與之有舊,逆謂授曰:「分野殊異,遂用圮絕,不圖今日乃相禽也!」授對曰:「冀州失策,以取奔北。授智力俱困,宜其見禽耳。」太祖曰:「本初無謀,不用君計,今喪亂過紀,國家未定,當相與圖之。」授曰:「叔父、母、弟,縣命袁氏,若蒙公靈,速死為福。」太祖歎曰:「孤早相得,天下不足慮。」太祖厚待之。後謀還袁氏,見殺。
初,紹之南也,田豐說紹曰:「曹公善用兵,變化無方,眾雖少,未可輕也,不如以久持之。將軍據山河之固,擁四州之眾,外結英雄,內脩農戰,然後簡其精銳,分為奇兵,乘虛迭出,以擾河南,救右則擊其左,救左則擊其右,使敵疲於奔命,民不得安業;我未勞而彼已困,不及二年,可坐克也。今釋廟勝之策,而決成敗於一戰,若不如志,悔無及也。」紹不從。豐懇諫,紹怒甚,以為沮眾,械系之。紹軍既敗,或謂豐曰:「君必見重。」豐曰:「若軍有利,吾必全,今軍敗,吾其死矣。」紹還,謂左右曰:「吾不用田豐言,果為所笑。」遂殺之。 《先賢行狀》曰:豐字元皓,鉅鹿人,或云勃海人。豐天姿朅傑,權略多奇,少喪親,居喪盡哀,日月雖過,笑不至矧。博覽多識,名重州黨。初闢太尉府,舉茂才,遷待御史。閹宦擅朝,英賢被害,豐乃棄官歸家。袁紹起義,卑辭厚幣以招致豐,豐以王室多難,志存匡救,乃應紹命,以為別駕。勸紹迎天子,紹不納。紹後用豐謀,以平公孫瓚。逢紀憚豐亮直,數讒之於紹,紹遂忌豐。紹軍之敗也,土崩奔北,師徒略盡,軍皆拊膺而泣曰:「向令田豐在此,不至於是也。」紹謂逢紀曰:「冀州人聞吾軍敗,皆當念吾,惟田別駕前諫止吾,與眾不同,吾亦慚見之。」紀復曰:「豐聞將軍之退,拊手大笑,喜其言之中也。 」紹於是有害豐之意。初,太祖聞豐不從戎,喜曰:「紹必敗矣。」及紹奔遁,復曰:「向使紹用田別駕計,尚未可知也。」孫盛曰:觀田豐、沮授之謀,雖良、平何以過之?故君貴審才,臣尚量主;君用忠良,則伯王之業隆,臣奉闇後,則覆亡之禍至:存亡榮辱,常必由茲。豐知紹將敗,敗則己必死,甘冒虎口以盡忠規,烈士之於所事,慮不存己。夫諸侯之臣,義有去就,況豐與紹非純臣乎!詩云「逝將去汝,適彼樂土」,言去亂邦,就有道可也。 紹外寬雅,有局度,憂喜不形於色,而內多忌害,皆此類也。
冀州城邑多叛,紹复擊定之。自軍敗後發病,七年,憂死。
紹愛少子尚,貌美,欲以為後而未顯。 典論曰:譚長而惠,尚少而美。紹妻劉氏愛尚,數稱其才,紹亦奇其貌,欲以為後,未顯而紹死。劉氏性酷妒,紹死,殭屍未殯,寵妾五人,劉盡殺之。以為死者有知,當復見紹於地下,乃髡頭墨面以毀其形。尚又為盡殺死者之家。 審配、逢紀與辛評、郭圖爭權,配、紀與尚比,評、圖與譚比。眾以譚長,欲立之。配等恐譚立而評等為己害,緣紹素意,乃奉尚代紹位。譚至,不得立,自號車騎將軍。由是譚、尚有隙。太祖北征譚、尚。譚軍黎陽,尚少與譚兵,而使逢紀從譚。譚求益兵,配等議不與。譚怒,殺紀。 《英雄記》曰:紀字元圖。初,紹去董卓出奔,與許攸及紀俱詣冀州,紹以紀聰達有計策,甚親信之,與共舉事。後審配任用,與紀不睦。或有讒配於紹,紹問紀,紀稱「配天性烈直,古人之節,不宜疑之」。紹曰:「君不惡之邪?」紀答曰:「先日所爭者私情,今所陳者國事。」紹善之,卒不廢配。配由是更與紀為親善。 太祖渡河攻譚,譚告急於尚。尚欲分兵益譚,恐譚遂奪其眾,乃使審配守鄴,尚自將兵助譚,與太祖相拒於黎陽。自月至(九)月,大戰城下,譚、尚敗退,入城守。太祖將圍之,乃夜遁。追至鄴,收其麥,拔陰安,引軍還許。太祖南征荊州,軍至西平。譚、尚遂舉兵相攻,譚敗奔平原。尚攻之急,譚遣辛毗詣太祖請救。太祖乃還救譚,十月至黎陽。 《魏氏春秋》載劉表遺譚書曰:「天篤降害,禍難殷流,尊公殂殞,四海悼心。賢胤承統,遐邇屬望,咸欲展佈旅力,以投盟主,雖亡之日,猶存之原也。何寤青蠅飛於幹旍,無極遊於二壘,使股肱分為二體,背膂絕為異身!昔三王五伯,下及戰國,父子相殘,蓋有之矣;然或欲以成王業,或欲以定霸功,或欲以顯宗主,或欲以固塚嗣,未有棄親即異,扤其本根,而能崇業濟功,垂祚後世者也。若齊襄复九世之讎,士丐卒荀偃之事,是故春秋美其義,君子稱其信。夫伯遊之恨於齊,未若(文公)〔太公〕之忿曹;宣子之承業,未若仁君之繼統也。且君子之違難不適讎國,豈可忘先君之怨,棄至親之好,為萬世之戒,遺同盟之恥哉!冀州不弟之泬,既已然矣;仁君當降志辱身,以匡國為務;雖見憎於夫人,未若鄭莊之於姜氏,兄弟之嫌,未若重華之於象傲也。然莊公有大隧之樂,象受有鼻之封。原棄捐前忿,遠思舊義,復為母子昆弟如初。」又遺尚書曰:「知變起辛、郭,禍結同生,追閼伯、實沈之踪,忘常棣死喪之義,親尋干戈,殭屍流血,聞之哽咽,雖存若亡。昔軒轅有涿鹿之戰,周武有商、奄之師,皆所以翦除穢害而定王業,非強弱之(事)爭,喜怒之忿也。故雖滅親不為尤,誅兄不傷義。今二君初承洪業,纂繼前軌,進有國家傾危之慮,退有先公遺恨之負,當唯義是務,唯國是康。何者?金木水火以剛柔相濟,然後克得其和,能為民用。今青州天性峭急,迷於曲直。仁君度數弘廣,綽然有餘,當以大包小,以優容劣,先除曹操以卒先公之恨,事定之後,乃議曲直之計,不亦善乎!若留神遠圖,克己復禮,當振旆長驅,共獎王室,若迷而不反,違而無改,則胡夷將有誚讓之言,況我同盟,復能戮力為君之役哉?此韓盧、東郭自困於前而遺田父之獲者也。憤踴鶴望,冀聞和同之聲。若其泰也,則袁族其與漢昇降乎!如其否也,則同盟永無望矣。」譚、尚盡不從。《漢晉春秋》載審配獻書於譚曰:「春秋之義,國君死社稷,忠臣死王命。苟有圖危宗廟,敗亂國家,王綱典律,親疏一也。是以周公垂泣而蔽管、蔡之獄,季友歔欷而行針叔之鴆。何則?義重人輕,事不得已也。昔衛靈公廢蒯聵而立輒,蒯聵為不道,入戚以篡,衛師伐之。春秋傳曰:'以石曼姑之義,為可以拒之。'是以蒯聵終獲叛逆之罪,而曼姑永享忠臣之名。父子猶然,豈況兄弟乎!昔先公廢絀將軍以續賢兄,立我將軍以為適嗣,上告祖靈,下書譜牒,先公謂將軍為兄子,將軍謂先公為叔父,海內遠近,誰不備聞?且先公即世之日,我將軍斬衰居廬,而將軍齋於堊室,出入之分,於斯益明。是時兇臣逢紀,妄畫蛇足,曲辭諂媚,交亂懿親,將軍奮赫然之怒,誅不旋時,將軍亦奉命承旨,加以淫刑。自是之後,癰疽破潰,骨肉無絲發之嫌,自疑之臣,皆保生全之福。故悉遣強胡,簡命名將,料整器械,選擇戰士,殫府庫之財,竭食土之實,其所以供奉將軍,何求而不備?君臣相率,共衛旌麾,戰為雁行,賦為幣主,雖傾倉覆庫,翦剝民物,上下欣戴,莫敢告勞。何則?推戀戀忠赤之情,盡家家肝腦之計,脣齒輔車,不相為賜。謂為將軍心合意同,混齊一體,必當並威偶勢,禦寇寧家。何圖凶險讒慝之人,造飾無端,誘導姦利,至令將軍翻然改圖,忘孝友之仁,聽豺狼之謀,誣先公廢立之言,違近者在喪之位,悖紀綱之理,不顧逆順之節,橫易冀州之主,欲當先公之繼。遂放兵鈔撥,屠城殺吏,交屍盈原,裸民滿野,或有髡剃髮膚,割截支體,冤魂痛於幽冥,創痍號於草棘。又乃圖獲鄴城,許賜秦、胡,財物婦女,豫有分界。或聞告令吏士云:'孤雖有老母,輒使身體完具而已。'聞此言者,莫不驚愕失氣,悼心揮涕,使太夫人憂哀憤懣於堂室,我州君臣士友假寐悲嘆,無所措其手足;念欲靜師拱默以聽執事之圖,則懼違春秋死命之節,貽太夫人不測之患,隕先公高世之業。且三軍憤慨,人懷私怒,我將軍辭不獲已,以及館陶之役。是時外為御難,內實乞罪,既不見赦,而(屠辱谷)〔屠各〕二三其心,臨陳叛戾。我將軍進退無功,首尾受敵,引軍奔避,不敢告辭。亦謂將軍當少垂親親之仁,貺以緩追之惠,而乃尋踪躡軌,無所逃命。困獸必鬥,以乾嚴行,而將軍師旅土崩瓦解,此非人力,乃天意也。是後又望將軍改往修來,克己復禮,追還孔懷如初之愛;而縱情肆怒,趣破家門,企踵鶴立,連結外讎,散鋒於火,播增毒螫,烽煙相望,涉血千里,遺城厄民,引領悲怨,雖欲勿救,惡得已哉!故遂引軍東轅,保正疆埸,雖近郊壘,未侵境域,然望旌麾,能不永嘆?配等備先公家臣,奉廢立之命。而圖等乾國亂家,禮有常刑。故奮敝州之賦,以除將軍之疾,若乃天啟於心,早行其誅,則我將軍匍匐悲號於將軍股掌之上,配等亦袒躬布體以待斧鉞之刑。若必不悛,有以國斃,圖頭不縣,軍不旋踵。原將軍詳度事宜,錫以環玦。 」典略曰:譚得書悵然,登城而泣。既劫於郭圖,亦以兵鋒累交,遂戰不解。尚聞太祖北,釋平原還鄴。其將呂曠、呂翔叛尚歸太祖,譚复陰刻將軍印假曠、翔。太祖知譚詐,與結婚以安之,乃引軍還。尚使審配、蘇由守鄴,復攻譚平原。太祖進軍將攻鄴,到洹水,去鄴五十里,由欲為內應,謀洩,與配戰城中,敗,出奔太祖。太祖遂進攻之,為地道,配亦於內作塹以當之。配將馮禮開突門,內太祖兵三百餘人,配覺之,從城上以大石擊突中柵門,柵門閉,入者皆沒。太祖遂圍之,為塹,週四十里,初令淺,示若可越。配望而笑之,不出爭利。太祖一夜掘之,廣深二丈,決漳水以灌之,自五月至八月,城中餓死者過半。尚聞鄴急,將兵萬餘人還救之,依西山來,東至陽平亭,去鄴十七里,臨滏水,舉火以示城中,城中亦舉火相應。配出兵城北,欲與尚對決圍。太祖逆擊之,敗還,尚亦破走,依曲漳為營,太祖遂圍之。未合,尚懼,遣陰夔、陳琳乞降,不聽。尚還走濫口,進复圍之急,其將馬延等臨陳降,무리가 크게 흩어지고 尚奔中山。盡收其輜重,得尚印綬、節鉞及衣物,以示其家,城中崩沮。配兄子榮守東門,夜開門內太祖兵,與配戰城中,生禽配。配聲氣壯烈,終無撓辭,見者莫不嘆息。遂斬之。《先賢行狀》曰:配字正南,魏郡人,少忠烈慷慨,有不可犯之節。袁紹領冀州,委以腹心之任,以為治中別駕,並總幕府。初,譚之去,皆呼辛毗、郭圖家得出,而辛評家獨被收。及配兄子開城門內兵,時配在城東南角樓上,望見太祖兵入,忿辛、郭壞敗冀州,乃遣人馳詣鄴獄,指殺仲治家。是時,辛毗在軍,聞門開,馳走詣獄,欲解其兄家,兄家已死。是日生縛配,將詣帳下,辛毗等逆以馬鞭擊其頭,罵之曰:「奴,汝今日真死矣! 」配顧曰:「狗輩,正由汝曹破我冀州,恨不得殺汝也!且汝今日能殺生我邪? 」有頃,公引見,謂配:「知誰開卿城門? 」配曰:「不知也。 」曰:「自卿(文)榮耳。 」配曰:「小兒不足用乃至此! 」公复謂曰:「曩日孤之行圍,何弩之多也? 」配曰:「恨其少耳! 」公曰:「卿忠於袁氏父子,亦自不得不爾也。 」有意欲活之。配既無撓辭,而辛毗等號哭不已,乃殺之。初,冀州人張子謙先降,素與配不善,笑謂配曰:「正南,卿竟何如我? 」配厲聲曰:「汝為降虜,審配為忠臣,雖死,豈若汝生邪! 」臨行刑,叱持兵者令北向,曰:「我君在北。 」樂資《山陽公載記》及袁暐《獻帝春秋》並云太祖兵入城,審配戰於門中,既敗,逃於井中,於井獲之。臣松之以為配一代之烈士,袁氏之死臣,豈當數窮之日,方逃身於井,此之難信,誠為易了。不知資、暐之徒竟為何人,未能識別然否,而輕弄翰墨,妄生異端,以行其書。如此之類,正足以誣罔視聽,疑誤後生矣。寔史籍之罪人,達學之所不取者也。高幹以并州降,復以幹為刺史。
太祖之圍鄴也,譚略取甘陵、安平、勃海、河間,攻尚於中山。尚走故安從熙,譚悉收其眾。太祖將討之,譚乃拔平原,並南皮,自屯龍湊。12월, 太祖軍其門,譚不出,夜遁奔南皮,臨清河而屯。10년 1월, 攻拔之,斬譚及圖等。熙、尚為其將焦觸、張南所攻,奔遼西烏丸。觸自號幽州刺史,驅率諸郡太守令長,背袁向曹,陳兵數万,殺白馬盟,令曰:「違命者斬!」眾莫敢語,各以次歃。至別駕韓珩,曰:「吾受袁公父子厚恩,今其破亡,智不能救,勇不能死,於義闕矣;若乃北面於曹氏,所弗能為也。」一坐為珩失色。觸曰:「夫興大事,當立大義,事之濟否,不待一人,可卒珩志,以勵事君。」高幹叛,執上黨太守,舉兵守壺口關。遣樂進、李典擊之,未拔。11년, 太祖徵幹。幹乃留其將夏昭、鄧升守城,自詣匈奴單于求救,不得,獨與數騎亡,欲南奔荊州,上洛都尉捕斬之。 典略曰:上洛都尉王琰獲高幹,以功封侯;其妻哭於室,以為琰富貴將更娶妾媵而奪己愛故也。 12년, 太祖至遼西擊烏丸。尚、熙與烏丸逆軍戰,敗走奔遼東,公孫康誘斬之,送其首。 《典略》曰:尚為人有勇力,欲奪取康眾,與熙謀曰:「今到,康必相見,欲與兄手擊之,有遼東猶可以自廣也。」康亦心計曰:「今不取熙、尚,無以為說於國家。」乃先置其精勇於厩中,然後請熙、尚。熙、尚入,康伏兵出,皆縛之,坐於凍地。尚寒,求席,熙曰:「頭顱方行萬里,何席之為!」遂斬首。譚,字顯思。熙,字顯奕。尚,字顯甫。《吳書》曰:尚有弟名買,與尚俱走遼東。曹瞞傳云:買,尚兄子。未詳。 太祖高韓珩節,屢闢不至,卒於家。 《先賢行狀》曰:珩字子佩,代郡人,清粹有雅量。少喪父母,奉養兄姊,宗族稱孝悌焉。
원술(袁術)
[편집]유표(劉表)
[편집]원문
[편집]역주
[편집]- ↑ 여남군(汝南郡) 은 후한 13주 중 하나인 예주의 한 지명이다.
- ↑ 태위(太尉)·사공(司空)·사도(司徒)를 통틀어 삼공(三公)이라 한다.
- ↑ 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漢 顯宗 孝明皇帝 劉莊, 28년 ~ 75년)은 후한의 제2대 황제(재위 : 57년 ~ 75년)로, 다른 이름으로는 양(陽)이 있으며 자는 자려(子麗)이다. 광무제(光武帝)의 아들이다.
- ↑ 원안은 모반을 일으켰던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쫓겨난 직후 초군태수(楚郡太守)로 파견되었다. 여기서 유영의 연좌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 ↑ 한 숙종 효장황제 유달(漢 肅宗 孝章皇帝 劉炟, 재위 75년 ~ 88년)은 후한의 3대 황제로, 명제(明帝)의 아들이다.
- ↑ 《영웅기(英雄記)》 또는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는 후한 말 군벌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저자는 왕찬(王粲)이다. 일찍 소실되었기 때문에, 명(明)의 왕세정(王世貞)이 일문을 모아 집본을 편찬하였다.
- ↑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 ↑ 187년 당시의 대장군은 하진(何進, ? ~ 189년 8월 25일)이었다.
- ↑ 시어사는 어사(御史)의 일종으로, 중국 고대 관직명이다.
- ↑ 조충(趙忠, ? ~ 189년)은 십상시 중 1인이다.
- ↑ 배송지(裴松之, 372년 ~ 451년)는 동진(東晉) 말 ~ 송(宋) 초의 정치가로, 자(字)는 세기(世期)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사람이다. 이 삼국지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 ↑ 校尉는 중국에서, 벼슬의 품계에 붙이는 칭호를 이르던 말이다.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때에는 육품 이하, 청나라 때에는 팔품 이하에 붙였다.
- ↑ 한 효영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고손자이다.
- ↑ 여기서 태후라 함은 영사황후를 말한다. 영사황후 하씨(靈思皇后 何氏, ? ~ 189년)는 후한 영제의 황후로 소제의 어머니이다. 남양의 백정 하진(何真)의 딸로 남매로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 하진, 아버지가 다른 형제 하묘 등이 있다.
- ↑ 진(晉) 나라 사마표(司馬彪)의 찬(撰)으로 모두 18편이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 ↑ 장진(張津)의 자는 자운(子雲)이다.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나중에 관직이 교주목(交州牧)에 이르렀다.
- ↑ 동태후(董太后, ? ~ 189년)는 후한 영제의 어머니이다. 비록 황후였었던 적은 없지만, 효인황후(孝仁皇后) 또는 영락황후(永樂太后)로 알려지기도 한다.
- ↑ 동탁(董卓, ? ~ 192년 음력 4월 23일)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자는 중영(仲穎)이다.
- ↑ 원술(袁術, ? ~ 199년 6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중(仲)나라의 황제로, 자는 공로(公路)이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이 즈음 원술은 대장군 하진(何進)이 권력을 잡자 하진의 심복이 되어 호분중랑장으로 있었다.
- ↑ 호분 또는 호분랑은 중국 고대 군주의 금위병의 일종으로, 서한 때에 창립되었다. 그 세력을 호분군으로 부르며 일반적으로 호분중랑장이 통솔한다. 군왕의 호송과 보위를 맡는 것이 주요 임무이다.
- ↑ 십상시의 난 참조.
- ↑ 《구주춘추》(九州春秋)는 서진(西晉)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사서인데, 전하지 아니한다.
- ↑ 서기 169년, 당시 후한의 실권자 두무(竇武)는 당인(黨人)의 금고(禁錮)(167년)를 해제하여 그들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도리어 환관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고, 두무는 자살했다.
- ↑ 여기서는 곧 환관(宦官)을 뜻한다.
- ↑ 그 당시, 하진의 여동생이 황후였다.
- ↑ 후한 말에 지방의 치안을 위해 장군(將軍)이나 호족이 거느리도록 인정했던 군부대 또는 그들의 집단을 말한다.
- ↑ 대략 앞쪽에 세운 건물
- ↑ 원문은 ‘狐疑’이다. 호의부결(狐疑不決)은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단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 ↑ 환관(宦官)을 말한다.
- ↑ 봉기(逢紀, ? ~ 202년 9월)는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원도(元圖)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 ↑ 저수(沮授, ? ~ 200년)는 중국 후한 말 원소 휘하의 정치가로 기주 광평군(廣平郡)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