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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6일 (금) 13:18 판
壇君論 (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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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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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오), 僧徒(승도) 妄談設(망담설)
五, 僧徒 妄談設 |
5, 승도 망담설 |
外國人으로 朝鮮의 古史에 對하야 學的檢討를 試한 者는 日本의 那珂通世로써 嚆矢를 짓는다 那珂는 日本에 잇서서 東洋史의 先覺으로 精嚴한 學風을 가진 것은 一篇의 『遺書』에 넉넉히 徵할 것이오 그 朝鮮古史考와 가튼 것도 실로 周到愼密하야 시방ᄭᅡ지 朝鮮史唯一의 好津梁을 짓는 것이다。다만 氏의 文獻偏重의 病을 材料亂備의 恨과 並하야 最大關節일 壇君에서 不慮의 麁鹵를 보이고 그것이 ᄯᅳᆺ밧게 朝鮮歷史의 出發點에 對하야 正當한 見解의 發育을 阻礙하는 因이 되다십히 한 것은 氏에게 잇서서 원통한 過誤라고도 할 것이다。 그는 古史考에서 朝鮮의 古事를 史記 以下 漢籍을 依하야 揣摩한 後, 附說 비스름히 三國遺事의 文을 引用하고 評斷을 加호대 |
외국인으로 조선의 고대사에 대하여 학적 검토를 시도한 자는 일본의 나카 미치요로써 효시를 짓는다. 나카는 일본에 있어서 동양사의 선각으로 정엄한 학풍을 가진 것은 일편의 《유서》에 넉넉히 나타날 것이요, 그 〈조선고사고〉와 같은 것도 실로 주도면밀하여 시방까지 조선사 유일의 좋은 나루터와 다리가 된다. 다만 그의 문헌 편중의 병을 자료 구하기 어려운 한과 함께 최대의 관절일 단군에서 사려깊지 못하고 추한 어리석음을 보이고 그것이 뜻밖에 조선 역사의 출발점에 대하여 정당한 견해의 발육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원통한 과오라고도 할 것이다. 그는 고사고에서 조선의 옛일을 《사기》 이하 중국 문헌에 의하여 헤아리고 연마한 후, 설(說)을 붙여 삼국유사의 문장을 인용하고 평가를 가하기를 |
壇君의 名을 王儉이라고 한 것은 平壤의 舊名인 王險의 險字를 人扁으로 改한 것이다 此傳說은 佛法 東流의 後에 僧徒의 捏造로서 出한 妄談이오 朝鮮의 古傳이 아님은 一見에 明了하다 麗紀, 東川王 二十一年, 築平壤城, 移民及廟社의 下에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라 한 것은 王儉은 列仙傳中의 人物로 보고 開國의 太祖라고는 보지아니한 故로 檀君之故都라고 니르지 아니하고 仙人之宅이라고 한 것이니 斟酌잇는 書法이다 |
하고 東國通鑑이 外紀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의 妄說을 歷史上의 事實로 看做한 것이라고 難하고, 다시 後世僧徒의 妄說에 對하야 억지로 理解를 下하려 함은 甚히 無謂한 일이라고 斷하얏스니 이는 실로 壇君이 日本의 學界에서 턱업는 除斥을 맛나든 最初의 動機요 因하야 朝鮮으로 하야금 歷史的無頭鬼를 作하게 하야 마츰내 全東亞文化의 淵源ᄭᅡ지를 오래도록 䵝昧의 域에 投케 하든 始初ㅣ니 氏의 모처럼 큰 功積도 이 錯見한아를 償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밧게 업슴은 못내 遺憾스러운 일이다.[원 1] |
하고, 《동국통감》이 외기(外紀)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2]은, 승려들의 망언을 역사상의 사실로 간주한 것이라고 나무라고, 다시 후세 승려들의 망언에 대하여 억지로 이해를 하려고 함은 심히 의미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였으니, 이는 실로 단군이 일본의 학계에서 턱없는 배척을 당하던 최초의 동기요, 이러므로 조선으로 하여금 역사적 무두귀[3]가 되게 하여, 마침내 전 동아시아 문화의 연원까지를 오래도록 알매[4]의 영역으로 내던져 버린 시초이니, 그의 모처럼 큰 공적도 이 잘못된 견해 하나를 보상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밖에 없음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다. [5] |
那珂氏의 泛視輕論한 뒤를 니어서 壇君說의 無據한 것을 立證코자 한 者는 白鳥庫吉의 『朝鮮의 古傳考』ㅣ니 그는 몬저 文字以前의 口碑는 年所를 歷하는 대로 妖談怪說이 付着하야 荒誕의 團塊를 이루거나 不然하면 學者僧侶의 輩가 故意로 怪談을 지어서 古來의 傳說이라고 僞稱하고 혹은 傳來의 口碑를 자갸의 想像ᄭᅥᆺ 改纂하야 앗가운古傳이 그中에 埋沒해 버리는 例가 不少하니 그럼으로 古傳說을 硏究함에는 상심하게 事態의 黑白을 辨別하야 어ᄯᅥ한 部分이 그 古傳이오 어ᄯᅥ한 部分이 後世의 架構인것을 看破해야하지 不然하면 眞僞를 倒見하고 純駮을 誤解하야 紕繆를 千古에 傳하리라고 戒飭하고 그 適例는 朝鮮의 古傳說이오 朝鮮의 古傳說 中에서도 가장 妄誕을 極한 것이 壇君의 傳說인데 그 妄誕한 本色을 가장 환하게 窺見할 것이 三國遺事의 文이다 하고 인하야 那珂氏의 說을 引用한 뒤에 |
나카 미치요 씨의 멸시와 경박한 논리에 뒤를 이어서 단군설이 근거없음을 입증하고자 한 자는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조선의 고전고》이니 그는 먼저 문자 이전의 구비는 해가 갈수록 요담괴설이 더해져 황당한 덩어리를 이루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자・승려들이 고의로 괴담을 지어서 옛부터의 전설이라고 위조하여 지칭하고 혹은 전래의 구비를 자기의 상상껏 바꾸고 엮어 아까운 고전이 그 중에 매몰해 버리는 예가 적지 않으니 그러므로 고전설을 연구함에는 상심하게 사태의 흑백을 판별하여 어떠한 부분이 그 고전이고 어떠한 부분이 후세의 가공인 것을 간파해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진위를 거꾸로 보고 순수함과 얼룩을 오해하여 잘못과 어긋남을 먼 후세까지 전하리라고 경계하며 타이르고 그 적절한 예는 조선의 고전설이요 조선의 고전설 중에서도 가장 망탄[6]의 극단이 단군의 전설인데 그 망탄한 본색을 가장 환하게 몰래 엿볼 것이 삼국사기의 문장이라고 하고, 그러므로 나카 미치요 씨의 학설을 인용한 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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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시 張皇한 辨證을 試하얏다.[원 2] 少年氣銳만하얏지 學이나 識이 今日과는 ᄯᅡᆫ판인 성부른 當時(甲午年)의 論을 三十餘年後 시방 다시 提起함이 혹시 氏의 不屑해할 일인지는 모르겟지마는 氏의 見解는 혹 合理的으로 進展하엿슬지라도[원 3]氏의 此論이 아직도 檀君에 對한 一盲杖으로 각금씨우는터이매 그 必要한 部分을 잠시 引用하야 두자. |
원주
- ↑ 史學雜誌第五編二八三頁以下(第四號四一頁), 又『遺書』中『外交繹史』七三頁以下(第八章朝鮮樂浪帶方考)
- ↑ 史學雜誌第五編九五○頁以下, (前年末의 學習院輔仁會雜誌에 別로 檀君考의 詳論이 잇다함)
- ↑ 十許年前의 京城日報日曜附錄에 白鳥氏의 談이라하야 揭載한 檀君說은 高句麗人의 樹木精靈崇拜思想으로서 脫化하야온것이란것이잇스니 이는 傳說考當時의 見解와는 약간 遺就한 자최를 볼 것이다.
역주
- ↑ 인도의 석가모니불이 제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 正法眼藏이 西天 28祖와 중국의 6祖를 거쳐 한국의 승려에 의해 해동으로 전래되어 한국이 석가불 正法의 主處라고 자임한 전승을 불법동류설이라고 한다. (朴胤珍, 〈신라말 고려초의 '佛法東流說'〉《한국중세사연구 제21호》(2006.10) 222쪽 참조.
- ↑ 동국통감의 〈외기〉에 단군조선 條가 들어 있다.
- ↑ 목이 잘려 죽은 귀신
- ↑ 사실(事實)을 갈피 잡아 알아내기 힘듦
- ↑ 원주 1: 사학잡지 제5편 288쪽 이하(제4호 41쪽), 또한 [나카 미치요의] 《유서》 중 《외교역사》733쪽 이하(제8장 조선 낙랑 대방 고)
- ↑ 허망하고 터무니없음
- ↑ 사학잡지 제5편 950쪽 이하, (전년말의 학습원 보인회 잡지에 별도로 단군론의 상론이 있다 함.)
- ↑ 10여년전의 경성일보 일요부록에 시라토리 씨의 담화라 하여 게재한 단군론은 고구려인의 수목정령 숭배사상으로서 탈바꿈하여 온 것이라느 것이 있으니 이는 단군고 당시의 견해와는 약간 차이점을 볼 것이다.
- ↑ 장님용 지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