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23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23[편집]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나날이 기강이 해이하여 갔다.

대궐 안에서는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가장 세력자였다.

양씨는 본시 천한 집의 딸로 대궐에 불리어 잡역을 하다가 우연히 왕(세종)을 모시게 되어서 그 총애를 받고 왕자 세 분을 보았다.

그 뒤 동궁빈이 왕손(지금의 왕─端宗)을 탄생하고 곧 세상 떠나자 어머님을 잃은 강보의 세손을 양씨의 것으로 자랐다.

세종 승하한 뒤에는 대궐에서는 차차 양씨를 괄시하였다.

총애하던 임금이 떠나고 의지할 데 없는 양씨였지만 왕의 총애를 받던 때의 교앙이 그냥 있는 위에 그 출신이 천하여 천태가 그냥 있어서 유자(儒者)의 기상을 가진 문종께는 눈에 벗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출신이 천하다 하여 같은 궁녀끼리도 입을 비죽거리며 대하였다. 드디어 대궐에서 내보내어 여염에서 살고 있었다.

문종도 승하하자 어린 동궁이 등극하였다.

어린 임금이 국왕이라는 존귀한 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 주위가 하도 고적하였다.

넓은 대궐에는 남성(男性)이라고는 소년 왕 단 한 분뿐이었다. 여성은 적지 않게 있었지만 모두가 궁녀─하인뿐이지 어린 왕의 동무가 될만한 가문의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아직 어머님 그리울 춘추에 어머님 아버님은커녕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대궐을 지키는 어린 왕은 남 보기에도 민망하였다.

왕의 이 심경을 생각하고 동정하여 수양은 (여염에 나가 있던) 양씨를 대궐로 불러들인 것이다. 양씨의 것으로 자란 왕이니 만약 지금 세상에 정 가는 여성을 찾자 하면 그것은 양씨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왕은 양씨가 가까이 모시게 되매 얼마만큼 고적감이 덜하여졌다.

그러나 양씨는 천한 집의 출생이라 하여 같은 여관들끼리도 양씨를 얕보고 입을 비죽거리며 대하였다. 양씨도 또 제 출신이 출신이라 자기의 교양을 마음대로 부리지를 못하였다.

대궐 안에는 어른이 없었다. 제각기 한 패거리 한 패거리가 되어 핥고 뜯고 중상하고 남의 흠잡기만 위주하는 여인들의 모임이라 기강이 해이되고 문란하고 질서 없고 규칙 없고 허튼뱅이의 살림이었다.

이 대궐에서 여주(女主 세종비)가 없어지기는 벌써 칠 년 전이다.

그러나 세종 생존 중인 어디라 감히 버릇없이 굴 수가 없었다. 그 위에 그 때는 세종의 총애를 받는 양씨가 여주 행세를 하여 기강은 그냥 유지되었다. 이렇듯 기강이 유지는 되었으나 내전 심비처까지는 왕의 눈이 미치지 못하여 자연히 문란의 싹은 그 때부터 돋았다.

세종 승하하고 문종 등극하자 문종은 유자적 엄격으로 양씨까지 내보냈고 그 때부터 내전은 전혀 감독자 없는 자유 상태에 버려 두었다.

내전이 기강은 해이될 대로 해이되었다. 여관들이 정장(正裝)을 하고 있는 일이 쉽잖고 대개 편복으로 지냈고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아침잠을 자고 여관들끼리 할퀴고 뜯으면서 싸우기가 일수요 간간 환관(宦官)아닌 남성의 그림자가 보였다는 둥 수군거리는 일도 있었고, 여관들의 친정에 보따리 인 계집종의 왕래가 부산하였고─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왕은 당신의 일신까지도 거누기가 귀찮은 분이라 그런 일까지 간섭하고 감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의 대궐에 또 어린 왕이 동극을 하였는지라 여관들의 방자함은 다 이를 수 없고 어전에서 싸움질 농질을 하기조차 기탄치 않았다.

수양은 왕께 계청하여 양씨를 다시 불러들이는 동시에 양씨에게 내전 감독까지 맡겼다. 그러나 여관들은 양씨의 감독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삼갈 꿈도 꾸지 않았다.

궁중은 궁중으로 이렇듯 어지러워 가는 때에 부중(府中)은 또 부중으로 기강이 해이되고 질서가 어지러워갔다.

세종이 말년에 당신의 건강도 좋지 못하거니와 동궁(문종)이 정무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유(儒에 치우치는 것이 근심이 되어 동궁 참결서무(參決庶務─섭정)를 명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세자의 손을 잡고 지도하여

「유」에 치우치는 동궁께 왕도(王道)를 몸소 가르쳤다. 그 중도에 세종의 건강은 더 쇠하여 차차 「병」으로 변하여서 승하 전 한동안은 정부의 전부를 세자에게 일임하였다.

그 때부터 정치 방침은 세종 때와는 아주 다르게 되었다.

세종은 「유(儒)도 학문 중의 하나이라」는 견해로써, 유를 존중하는 것과 동시에 불(佛)과 도(道)도 존중하였고, 이 세상의 학문이라 하는 것은 귀천이 없이 한결같이 존중이 여기고 북돋우고 장려하여서 만박학문 기예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유에 치우친 동궁은 동궁시대와 및 동궁시대를 지나서 국왕시대를 통하여 한결같이 유 뿐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학문 기예는 모두 천대하였다. 온갖 과학은 「기(技)」라 일컫고 「술(術)」이라 일컬어서 천대하기 짝이 없었고 그 위에 「도교」라든가 「불교」라든가 하는 유와 반대되는 학문은 억압하고 박멸시키려 하였다. 세종 때에 세종의 놀라운 안목으로 뽑아 올려서 중하게 쓰던 일기일능의 달인(達人)들도 이 왕의 때에는 다시 한번 채질에 걸려서 「유」가 아닌 자는 모두 내치거나 떨구거나 낮추거나 하여 버리고 유 뿐 높이 쓰고 긴히 썼다. 그런 결과로서 깊은 기술이 있어야 하는 군사며 축성 교량이며 회계 율심(律心) 방면까지도 모두 유생을 갖다 썼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것이 없었다. 유생 통재(儒生統載)였다.

아직 이십 소리하는 소년무사 이징옥(李澄玉─스물 넷에 죽었다)을 뽑아 올려 함길도 절도사(咸吉道節道使)로까지 중용한다든가 하는 일은 문종에게 말하라면 망령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이런 정치 방침 아래서 조직된 경부며 백관들이라 일에서 십까지가 다 유생이요, 일에서 십까지가 다 유교였다. 세종의 명으로 요동까지 여러 번 왕래하며 연구에 연구를 쌓아 만들은 언문 같은 것도 문종에게 말하라면 쓸데없는 일일뿐더러 신숙주며 성삼문과 같은 유용의 인물을 그런 잡학에 몰두케 하여 아까운 세월과 아까운 재질을 남용하였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더욱이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하며 악기(樂器)를 개인하며 각종 시계 일계(時, 日計)등을 발명하며─그 부지기수의 세종의 업적은 문종께는 재간과 시간의 낭비에 지나지 소하였다.

이렇게 되니 한 때 황금시대를 연출하려던 문화도 도로 위축되어 버리고 무슨 재간이든 간에 「유」로 돌아버려서 위로는 일품 대신부터 아래는 구품 말직에 이르기까지 제 장기가 무엇이든 간에 「유」 노릇을 하였다.

여기서 사람들의 기상도 자연 위축되고 퇴폐적 기운만 농후하여 갈 때에 문종도 승하하였다. 어린 임금이 등극을 하였다.

이 어린 임금께는 섭정하는 조숙(祖叔)도 없고 청정(聽政)하는 대비도 없었다. 대신이 섭정을 할 밖에는 없었다. 이 대신들 가운데라도 좀 분명한 사람이 있었으면 그래도 얼마만큼 보잘 데가 있겠지만 이 대신 들은 선왕의 고명을 「어린 임금을 잘 키워 달라는」것쯤으로만 알고 이 임금이 성장할 때까지 무상 평온히 지내기만 하면 된다 하여 만사를 버려 두고 어서 왕의 성장하기만 기다리며 무위의 그 날 그 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정무는 침체되었다. 경사는 해야 되었다.

하관은 상관에게 지휘를 빌지 않았다. 빌어야 무슨 신기한 지휘도 없으려니와 지휘를 빌을 만한 중대한 사건이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라 보이었다.

상관은 하관에게 지휘하려 하지 않았다. 지휘를 청하지도 않았거니와 청할만한 일이 있음 즉도 않았다. 어찌 어찌해서 지휘를 청할지라도 경한 일은 하관의 자유 재단에 맡기어 제 책임을 피하였고, 중대한 일이면 왕이 장성한 뒤까지 기다리며 밀어 두기를 위주 하였다.

수양에게는 한심키 짝이 없었다. 부왕(세종)계실 때에 그렇듯 활기 있던 방가가 근근 수년에 이다지도 변한단 말인가?

저런 무리들은 모두 묶어서 한 뭉텅이로 하여 처치해 버려야 할 것으로 보였다. 두어서 쓸데도 없으려니와 도리어 방해되고 나아가서는 남이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는 것이었다. 있어 무익할 뿐 아니라 유해하였다.

수양은 이렇듯 침체케 만들은 책임이 형왕 문종께 있다고 보았다. 문종이 좀 더 활기 있던가 그렇지 않으면 부왕 세종의 고명대로 수양 자기에게 조력이라도 청하였다면 이 꼴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으신 형님이여.

아버님이 새삼스럽게 그리웠다.

조카님의 성장이 기달리었다. 어서 성장하셔서 친재를 하시게 되면 그 때는 어찌될까, 아무리 못 된다 할지라도 형님 때 이상으로 침체될 것이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어서 성장합소서 성장합소서 기다렸다.

조카님이 영특하시든가 혹은 조카님 몸소 수양 자기에게 협력을 청하든가 하여간 현재 이상으로 침체된다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아─』

나오는 탄식.


라이선스[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