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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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편집]

한명회 등이 돌아간 뒤에, 수양은 정침(正寢)에 들었다.

그러나 자리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사방침에 몸을 의지하며 비스듬이 앉아 버렸다.

술을 먹지 않았으니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 않은 똑똑한 머리에는 안평의 생각이 불끈 솟아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까불고─까부는 위에 또한 비꼬아진 성격은 아직도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부왕(세종) 생존시에도 부왕은 얼마나 안평의 위인을 걱정하셨다. 부왕이 가사를 의논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백형 양녕대군을 조용히 만나면, 늘 첫째로는 동궁(선왕 문종)의 나약함을 근심하고 계속하여 반드시 안평의 위인을 걱정하고 그 비틀어진 성격을 근심하고 하던 일은 수양은 아직 번히 기억하는 바다.

더욱이 백부 양녕은 부왕보다도 더 안평을 미워하던 분으로 그는 언젠가 아우님(세종)께 대하여,

『문학지사란 것은 겉으로는 의(義)를 가식하고 속으로는 이(利)를 도모하는 것, 안평이야 말로 이 사직에 가장 경계할 인물이올시다.』

고 극언한 일까지 있었다.

부왕이 꺼리고 불신하는지라 부왕 생존시는 안평은 뒤로 숨어 다니면서 비꼬아진 웃음과 긁어내는 언어로나 앞막이를 하고 있었으나, 부왕 승하한 뒤 형왕(문종)등 극하자, 형왕은 수양보다도 안평을 신임하니만큼, 안평은 부왕시절과 달리, 표면에 나서서 가장 형왕을 돕는 체하며, 형왕께 대하여 수양을 깎고 긁어서 형왕으로 하여금 한층 더 수양을 불신하게 하였다.

그 형왕마저 승하하고 어린 조카님이 등극하자 안평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다.

어머님도 없으신 어린 조카님이라 당연히 보좌하고 보호하고 해야 할 것이어늘 그 책임을 피하고, 무이정사며 담담정에 길게 누워서 일신상의 안락을 꿈꾸고 있다 하는 것도 마땅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혹은 너무 궁중에 접근하면 남의 의혹을 살 염려가 있으니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이 역시 세부득이한 일이다. 그런데 다만 길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니고, 대신들과 결연하여 비밀히 왕래하며 무슨 꾀를 도모한다는 것은 웬 일이냐.

먼저 도(道)로 생각하리라.

─이 국가의 임금이시다. 이 국가의 신민으로 어찌 임금과 떠나서 신자들과 결탁을 하여 그의 농락 아래서 딴 생각을 하랴.

다시 의(義)로 생각하리라.

─형님(문종)의 외아드님이요, 아버님(세종)의 장손되는 분께 어찌 딴 생각을 둘 수 있으랴.

또한 인정으로 생각하리라.

─어리신 왕의 외로운 환경에 동정인들 어찌 안 가랴.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안평의 행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만 지금의 결론이 단지 수양 자기의 억측이라든가 한명회의 보고가 허보(虛報)라든가 하여야 안평의 입장이 서게 될 터인데, 거기는 또한 과거의 안평의 행동과 근일의 행위 등을 종합하여 볼 때에 「허보」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사이의 안평의 언행 등으로 미루어 벌써 그간 추측은 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상식 이상의 일이요, 또한 동모제(同母弟)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거기 및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명회의 보고를 듣고 보니, 그런 일이 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이 일을 어찌 하나.』

안평이 나이 벌써 삼십, 그의 성격은, 인젠 굳어질 대로 굳어진 사람이어서 아무런 노력이라도 고칠 수가 도저히 없을 것이었다. 안평이 이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다만 한 사람인 부왕이, 생존시에 그만큼 늘 엄책하고 훈계하여 고쳐보려 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은 안평이라, 성격 이미 굳어진 위에 또한 내심 복종치 않은 수양 자기의 책망 훈계쯤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었다.

성격은 못 고치나마 그의 품고 있는 생각이나마 어떻게 고칠 수가 없을까.

비꼬아진 사람이라, 잘못 건드리었다가는 더 빗나갈 염려가 있다. 그렇다고 얼르고 달래서 마음 돌리기에는 너무 장발하였다.

과단성이 없는 사람이라, 앞장서서 뚱기칠 김종서만 없으면 자기가 앞장서지는 못할 사람이다. 그러나, 이(利)에는 생사를 가리지 않는 이 속세에서, 김종서가 없어진다 해도 제이 김종서가 또 생길 것이고, 제삼 김종서가 또 생길 것으로, 끝이 없고 한이 없을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이(利)를 위하여 생겨날 유혈극─

수양은 몸을 떨었다. 안평의 문제를 썩 잘 해결하지 못하면 반드시 유혈의 참극은 일어날 것이었다. 일을 저 될 대로 내버려 두면, 어린 임금은 아무 것도 모르고 대궐에 안온히 지낼 동안, 밖에서는 자기의 일신의 안전과 영화를 도모하는 음모가 빚어져서, 가장 고약한 종류의 유혈극이 연출될 것이었다.

이 유혈극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독(毒)을 제하는데 독으로 한다」는 방법을 쓰면 또 다른 종류의 유혈극이 연출이 될 것이었다.

어느 편으로라도 유혈극이요, 어느 편으로라도 혈족 상잔의 참극이었다.

이 두 가지를 다 피하고 평온리에 무사할 도리는 없는가.

선왕(문종)도 적지 않게 성격이 비틀어진 분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백부 양녕대군만은 저어하고 양녕의 진언이면 약간 뜻과 상반되는 일이라도 승복하였다. 그러나 안평은 백부에게까지도 불복할 뿐 아니라 반항하기까지도 사양치 않을 사람이었다. 양녕 또한 입장이 입장이라, 위력으로까지 안평을 누르지 못한다.

여기 만약 안평을 정면으로 꾸짖고 호령할 사람이 있다 하면 그것은 수양 자기뿐이다. 친형이라는 지위로서 안평을 호령하려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형에게 대하여 심복은커녕 반항심을 품고 있는 안평이라, 그 호령에 복종치는 물론 않을 것이요, 도리어 반대의 길로 벋기가 십상팔구요, 혹은 딱 버티고 대항할는지도 알 수 없다. ─이도 못할 노릇이었다.

이도 못하고 저도 못하고, 그렇다고 또한 방임할 수도 없고─안평의 문제는 과연 골치 쓰고 난처한 일이었다. 지금 임시적으로나 저쪽에서 손쓰지 못하도록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을 이번 사행에 수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 두 아들을 수양이 잡고 있을 동안은 아무 일도 생겨나지 못할 것으로 임시의 안심은 얻을 수가 있겠지만 그 뒤는 어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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