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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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편집]

이튿날 입궐하여, 수양은 이번의 사행의 수원(隨員)으로 황보인의 아들 석(錫)과 김종서의 아들 승규(承珪)를 자벽(自辟)하였다.

수양에게 뽑힌 두 사람의 아버지 인(仁)과 종서는 당황하여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고많은 청년 재사들 가운데서 자기네 두 사람의 아들을 골라낸 의외의 일에 놀란 것이었다. 석이나 승규가 다 수양에게 특별히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가장 적임자라든가 한 바로 아닌데 왜 하필 이 두 사람을 골라내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일에 딴 생각 품고 있던 두 늙은 대신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정사(正使)로 조선국왕의 친숙(叔)되는 수양대군 이유(李). 부사(副使)로는 공조판서 이사철(工曹判書李思哲). 종사관(從事官)으로는 집현교리 신숙주(集賢校理 申叔舟). 그 밖에 수행으로 황보석, 김승규 등이 결정되었다.

일행 인원이 작성된 뒤, 영의정 황보인은 가슴이 떨리고 서늘하여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먼저 자기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나올 때에 좌의정 김종서에게 눈짓하여 뒤따라 나오라는 뜻을 전하고……

인은 집으로 물러 나와서, 황황히 사랑으로 들어가면 시청지기에게 분부하여 문객 겸인들도 사랑에 들게 하고, 김종서만 오거든 들이라고 하여 두었다.

설레는 가슴으로 안절부절 코를 어루만지며 손을 비비며 기다릴 때에 (인에게는 무척이도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기다리던 종서가 인의 집으로 왔다.

『대감. 어떻게 된 일이오?』

인사도 절차도 차릴 여유가 없이, 종서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떨리는 작은 소리로 이 말부터 하였다.

『참……』

종서는 인보다는 좀 덜 당황하였다. 그러나 역시 낭패한 창백한 얼굴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잡니까?』

인이 겁에 띄어서 벌벌 떨며 하는 이 말에 대하여 종서는 그래도 좀 침착하였다.

『하지만 대감. 이 일이 뭐 꼭 수양대군이 눈치채고, 한 일이라고 만이야 어떻게 생각하리까. 거저 함부로 뽑는 게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닐까요?』

『글쎄올시다. 그렇지만 왜 하필 우리 두 집안 아들을……』

『그게 글쎄 우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면야 오죽이나 좋으리까만─ 수양대군은 좀……』

알지 못할 위압력을 수양에게 느끼는 것이었다.

『절재(節齋─종서의 호), 난 뽑아 주시오.』

『뭘 말씀입니까?』

『늙마에 와석종신도 못할까보이다. 난─치사(致仕)하고 선향에 돌아가 와석종신이나 할까보이다.』

『대감도, 그래 만약 수양대군이 눈치 챘다면 대감 치사하신다고 와석종신이 될 듯 싶소이까?』

『그러니, 공연히 그런댔자 안평대군의 살이나 되는 일을……』

『왜 안평의 일이어요? 우리 일이지. 안평이야말로 우리 살이에 노는 게 아닙니까? 하여간 대감. 일이 이렇게 된 이상은 인제 뒷걸음질 못합니다. 대감 혼자서 빠져나가라고 누가 가만 둔답니까? 죽어도 같이 죽고 영화 봐도 함께 보고─어딜 빠져요?』

작은 소리나마 마디마디 힘 주어 하는 이 말에 인은 한 순간 눈을 치떠 종서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서 튀어나오는 불길에 몸서리치며 곧 눈을 떨어뜨리었다.

진퇴유곡이었다. 수양이 득세하는 날에는 우리는 몰락을 피하기 위해서 수양을 제거합시다. 제거하려면 안평을 앞세워야 합니다. 이 말에 끌려서 단순한 마음의 주인인 인은 종서와 동반하여 안평을 찾아다닌 것이었다. 수양의 억센 압력에는 인도 늘 내심 전전긍긍하던 바였다. 그러나 특별히 수양과 원수진 일이 없으매, 굳이 배척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수양이 득세하면, 우리는 몰락이라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또한 그도 그럴 듯한 말이었다. 수양의 성격으로 보아서 자기네 같은 노물들을 내쫓을 듯한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한 포의 서생에서 출발하여 영영공공 오늘날의 지위와 부귀를 획득한 그는 또한 그만큼 부귀와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착이 강하였다. 마음은 약하고 오직 착하였지만, 부귀에 연연한 그의 심리는, 유혹에 빠지기가 쉬웠다. 잘못하다가는 부귀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할 때에, 부귀를 놓치기 싫은 본능과 함께, 잃지 않을 방도를 강구할 유혹이 생겨났다.

『안평과 접근하자.』

이것이 수양을 제거할 방도라 할 때에, 이 단순한 늙은 선비는 그럴 듯이 들었다. 다만 안평과 접근하여 수양의 세력을 꺾는 것이라 단순히 생각하였다.

한 번 두 번 종서와 동반하여 안평을 찾는 동안에, 인은 지금의 하려는 일이 단순히 안평을 수양보다 높이자는 것이 아니고, 더 다른 목적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발목이 잡혔는지라, 부득이 호인다운 미소를 연방 얼굴에 띄워 가지고, 그들에게 추수하여 다른 뜻 없다는 점을 나타내기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늘 일말의 불안은 느끼지 않지 못하였다. 드러나기만 하면 구족이 멸망이라─이 위협감에 그는 늘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불안을 느꼈다. 후회막급하였다.

일찍이 치사해 버렸으면 무난할 것을 지위에 연연하여 치사하지 못했고, 그 위에 또 더 오래 영화를 누리려는 공연한 욕심을 냈다가, 지금은 발목 뽑으려야 뽑지 못할 굴함에 걸리게 되었다.

수양대군이 수원을 자벽함에 있어서 자기의 아들과 김종서의 아들이 뽑힌 것이 우연한 일이라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은 없겠거니와 아까 수양이 두 수원을 지정하면서 적이 눈을 구을려 자기와 및 김종서를 한 번 둘러본 눈치는 심상한 것이 아닌 것같이 보였다. 자기네 두 늙은이의 기색을 살피는 눈치로 보였다. 그 때의 수양의 눈에 자기는 몸서리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수양─

한편으로는 김종서─

단지 노후를 안락히 보내자는 욕망 때문에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처신을 가볍게 하여 지금 도리어 노후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까딱하면 일신은커녕 일족이 몰락할지도 알 수 없는 위태로운 낭떠러지에 서게 되었다.

『절재, 이 일을 어쩌면 좋겠오?』

인은 양손을 맞잡고 그 손을 안타까이 떨면서 신음하였다.

종서에게 대한 원망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장본인인 종서는 비교적 평정하였다. 간이 인보다 컸다.

『대감도, 기위 이렇게 된 이상에야 어쩌겠습니까? 할 수 없는 일 아니오이까. 이렇게 된 이상은, 더 우리 일을 채어야 할 겝니다. 안평께도 여쭙고─』

『그러니 우리 자식들이 수양대군의 손안에 들었으니.』

『그게 곤란해요. 그러니까, 세부득이 그 애들이 상국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는 속수무책 거저 가만히 기다려야겠지오.』

『아아! 이럴 줄 알었드면……』

『대감도 너무 노심치 마세요. 수양대군이 꼭 눈치챘다고 하는 배도 아니고, 거저 좀 가슴 선뜩한 일이 있을 뿐이니까 하회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겝니다……좀 있다가 안평께 좀 알현할까요?』

『어어, 싫습니다. 오늘은 싫습니다. 수양대군이 떠나시기 전에는 내 목을 베간대도 다시 안평대군께는 가지 못하겠오이다.』

『허허허. 참 소심허시군. 그러니 도모지간(倒帽之諫)을 허섰지요.』

종서는 인제는 당황한 기색이 아주 없어졌다. 그러고 인의 벌벌 떠는 모양을 도리어 조소하는 태도로 볼 수 있으리만큼 평정하게 되었다.

『대감. 생은 이제 안평댁에 가 뵙겠는데 대감은 싫으서요?』

『나는 싫소이다.』

『너무 염려 마세요. 무슨 일이 있오리까. 수양대군은 아직 우익이 없는 이라 기회를 봐서 우리가 먼저 손쓰면 수양인들 날고기지 못하는 이상 속수무책입지요. 육진을 개척한 이 절재의 위력을 보십쇼. 대감은 평안히 누워 계시다가 굴러 오는 복이나 한 덩어리 붙잡으세요. 허허허.』

인제는 평정을 회복한 종서는 이런 말까지 하였다. 그러나 인의 겁에 뜨인 얼굴에는 그래도 미소나 화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종서가 돌아갈 때도 인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 종서를 보낸 것이었다.

약한 사람은 원망이 많다. 인은, 자기가 마음 약하기 때문에 유혹에 걸렸다기보다, 자기를 유혹한 사람에게 대한 원망만 앞섰다. 김종서의 유혹만 없었더면 자기는 본시부터 그다지 수양에게 원심도 없었으니까,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을 것을─가만있는 사람을 공연히 뚱겨 쳐서 죽을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다고, 연해 혀를 차면서 분개하였다. 그러나 남에게 발표할 수도 없고 하소연이나 통사정할 수도 없는─벙어리 냉가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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