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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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편집]

시월의 상쾌한 대기(大氣)를 즐기면서 연경(燕京)으로 연경으로 길을 차는 사신의 일행─

정사(正使) 수양(首陽)은 이 짧지 않은 전 도정을, 서장관(書狀官) 신숙주(申叔舟)와 침식 기거를 함께 하였다.

『신서장(書狀)!』

『신서장!』

무슨 일을 당하건 어떤 일을 만나건, 반드시 신숙주를 찾았다.

수양은 이 길에서, 신숙주의 위인에 흠빡 반하였다. 숙주의 총명함, 슬기로움, 명민함, 내지 그의 강기(强記)에만 반할 뿐 아니라, 숙주의 품고 있는 사상이며 정치적 견해에 반하였다.

숙주는 그때의 유생이며 학자들이 품고 있는 공통적 사상인, 「무조건 사대주의자」 「무조건 명나라 숭배자」가 아니었다. 정치적 현상으로 현재 명나라는 상국이요 조선은 그 한 변방이라, 제도가 그렇게 되었으니 고(誥)를 받고 사례를 하며,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저 나라에 품하고 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한낱 국교상의 의식에 지나지 못하지, 저 나라의 윤허가 없으면 이 땅의 자의로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유생들의 공통적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사상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또한 그는 진서(眞書)가 아닌 글을 연구하기 위하여 칠팔 회를 요동 땅에 출입도 한 것으로서, 무조건 사대주의자들은, 이 언문(諺文) 창제에 대하여 얼마나 반대를 하였던가?)

수양은 숙주의 이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숙주를 귀엽게 보고 숙주를 믿음직이 보고, 밤낮을 숙주와 함께 지내며, 숙주의 놀랄만한 기억력과 비판력을 고문 삼아 긴히 썼다.

압록강을 건너서면 인제는 명나라 땅. 그러나 그 토속, 향풍에는 아직 조선의 북도의 민속과 유사점이 현저히 발견되는 것을 수양도 숙주와 함께 주의 깊게 보면서 길을 갔다.

역사상의 안시성(安市城)이 어딘지, 백암성(白巖城)이 어딘지는, 지금 찾아낼 바이 없다. 그것을 구구히 여기로다 저기로다 다툴 필요도 없다.

이 끝이 없고 한이 없는 넓은 평원─옛날 고구려 무사의 말 달리고, 활 쏘던 대평원은, 단군 일천 년의 업을 일으킨 땅이었다. 그 뒤 한 때는 이 지역의 한편 구석은, 기씨(箕氏)라, 위씨(衛氏)라, 그 밖 한족(漢族)에게 침식을 당한 일은 있지만 성봉 백두를 중심삼은 대부분의 강역은 단군의 후예인 부여가 물려받아 면면히 일천 수백 년을 누려 오다가 그 뒤를 고구려가 또한 받았다.

고구려 칠백 년의 광휘 있는 역사가 소멸되자, 이 지역은 천하의 축록장이 되었다.

고구려의, 국호를 물려받은 「고려」는 겨우 본래의 고구려의 한 군현(郡縣)쯤인 남방에서 신라와 백제를 합하여 조그만 새 나라를 이룩하고 고구려 지역의 대부분인 압록강 이북은 고구려의 한 지족(支族)으로 발해(渤海)국을 이룩했다가, 발해국은 거란(契丹)에게 망하고, 거란은 또다시 고구려의 한 지족인 여진(女眞)족으로 이룩한 금(金)국에게 망하고, 금국은 몽고에게 망하고, 몽고는 명에게 망하고─이리하여 이 지역은 천하의 축록장이 된 것이었다.

그동안, 고구려의 국호를 물려받은 고려(왕건이 이룩한)의 뒤를 이어서 지금 다시 고려의 뒤를 물려받은 이씨의 조선. 계통적으로 따져 올라가자면, 「조선」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단군」으로─이렇게 올라갈 수가 있지만, 지역적으로 보자면 지금의 조선은, 옛날의 겨우 한편 구석에다가, 백제와 신라를 합하여 그 전부를 합친 것으로도, 고구려의 강역의 십분의 일도 못될 귀퉁이요, 그 대부분은 압록강 건너에 남아 있다.

만약 「조선」으로서 옛날의 고구려의 후신이라 일컫고자 할진대 요수(遼水) 이동의 지역은 전부 자기의 땅으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 고구려 망하고 이 땅이 천하의 축록장이 된 이후에도 이 땅에 군림함 자는 혹은 발해라, 혹은 금국이라, 모두가 고구려의 지족이었다. 전조(前朝)의, 우왕(禑王)이 일으키려던 북벌의 대군도 역시 이 땅을 도로 찾아보려 함이었다.

이씨조선 태조의 증손자 되는 수양으로는 이 땅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 땅에 여진(女眞)족의 후예가 주인으로 앉았다면 여진족 역시 고구려의 한 지족이라, 그다지 남이라 할 수도 없겠지만, 명나라는 전혀 관계없는 종족이었다. 이씨조선으로서는 이 땅은 적지 않게 비위 동하는 땅이요, 또한 넘겨다 볼만한 권리도 있는 땅이었다.

기억력 좋은 신숙주를 데리고 이 땅의 위를 스치고 지나간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며, 수양은 첫 겨울의 상쾌한 대기 가운데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사신의 일행은, 그해 섣달도 절반이나 가서 연경에 득달하였다.

그러나 연경에서는 수양은 실망하였다. 주(周) 이래의 발달된 문물 제도를 시찰하려 하였지만, 그 땅에는 그다지 배울 만한 것이 없었다. 부력(富力)이 이곳만 못하고 사람의 수효가 이곳만 못할 뿐이지, 문물 제도로서는 수양의 부왕(세종)의 세운 바가 결코 이 땅보다 못하지 않다는 점을 수양은 절실히 깨달았으며, 동시에 아버님께 대한 존신의 염이 새삼스러이 더 느껴졌다. 약 삼년 전 형왕(문종) 등극 때에도 이번과 꼭 같은 사명을 띠고 이곳을 찾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다만 이 땅의 화려하고 부요한 점에 눈이 흑하여, 크고 훌륭한 나라로 다 보아 두었지만, 이번에는 이 땅의 문물제도를 연구할 심산으로 왔는지라, 주의하여 관찰하여 보매, 다만 크고 부요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 땅보다 문물제도로는 그다지 혹할 만한 데가 없었다.

다만 그 크고 부요한 점이 부러웠다. 연경으로 모여드는 국내의 물산으로 보아도 그 강역이 얼마나 넓은지, 조선 땅 안에서 자란 수양으로는 측량하기조차 어려웠다.

겨울에도 과일을 따 먹는다는 남쪽 끝에서, 여름에도 털옷을 입는다는 북쪽 끝까지, 그것이 얼마나 넓은지는 짐작도 잘 되지 않았다.

사명을 치르고 사신의 일행은 다시 본국으로 향하여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중원의 본토와 외지와의 경계인 고북구(古北口)에서 수양은 신숙주와 함께 가마에서 내려서 사면을 둘러보고 길이 탄식하였다.

천하가 한번 동하면 백골의 산과 피의 바다로 화하는 이 고북구. 이 고북구의 험(險)이 있기에 중원은 능히 오천 년의 역사를 누린 것이었다. 옛날 고구려는, 동남으로 신라와 백제라는 적이 있는 탓에 온 국력을 이리로 모으지 못하여 종내 한, 수, 당(漢隨唐)을 넘겨보기만 하면서도 고북구를 넘지 못하였다.

고북구를 무사이 넘은 거란(契丹), 금(金), 원(元)은 능히 천하를 뒤흔들었다.

고북구의 저편 쪽은 한(漢)족의 안거처(安居處)요, 그 이쪽은 천하의 축록장…… 고북구를 넘어서 중원을 잡았던, (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은 도로 고북구로 하여 쫓겨났다.

개벽 이래, 이 고북구에서 흘린 피가 얼마나 되며, 여기 쌓인 백골이 얼마나 되는가.


또 다시 밟은 요(遼)의 무변광야─

백설이 덮인 그 광야는 지금은 명나라의 날개 아래 평화로이 뻗어 있다. 그러나 이 고래의 축록장이 언제까지나 평화가 유지될까?

북에는 아직 원(元)나라의 예(裔)인 몽고가 틈새만 엿보고 있다.

동에는 야인 이만주(李滿住)의 일당은 세종이 토벌하였다. 하나, 그의 잔족들이 장백산 기슭에서 제 세력을 따로 가지고 있어서 명나라의 위력이 거기까지는 및지 못한다.

거란(契丹)의 잔족도 또한 제 실력을 따로이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언제 다시 축록전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하랴.

이 축록전에 이 지역의 정통 주인 되는 조선이 끼어들지 못할까. 이 기름진 무변 광야를 우리 손안에 넣을 수가 없을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이 광대한 지역의 주인이 되게 하지 못할까?

지금 어린 조카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스스로는 섭정의 위를 꿈꾸는 수양은 자기가 섭정하여 이 나라를 부강케 하고 어린 조카님으로 하여금 부강한 국가의 주재자가 되게 하고 싶은 야망을 다분히 품었다.


이번의 왕복 넉 달 동안의 여행에 있어 수양은 신숙주의 사람됨을 속속들이 꿰어 보고, 큰 기둥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숙주 또한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이 결코 상린(常鱗)이 아니요 놀랄만한 큰그릇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수양대군의 지휘에 따라서 잘 준행하면 이 국가가 다시 이전 세종대왕 때와 같이 흥성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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