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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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일행은 평양에서 사흘을 지낼 뿐이지 그 밖의 지방에서는 밤만 지나서는, 다시 길을 재촉하고 하였다. 이 땅의 특수한 청명한 일기는 연일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서 상쾌한 길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정사(正使) 수양은 부사보다도 서장관 신숙주를 신임하여 길을 갈 때나 또는 객사에 묵을 때나 언제든 자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 청년 학사 신숙주의 정밀하고도 풍부한 지식은 수양에는 귀엽고 기특할뿐더러 여러 가지로 수양의 고문에 대할 수가 있었다.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서서 다른 땅에 들어서면서는 숙주가 더 필요하였다.

옛날 정도전(鄭道傳)이 태조의 분부로서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 고려사를 전연한 물건으로 만들었다. 고려라는 나라를 둘러 엎고 생긴 이씨 조선인지라, 고려사를 나쁘게만 고칠 필요를 느낀 것이었다.

그 뒤 세종 때에 당시의 예문제학(藝文提學)이던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여 또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정도전에 의하여 한 번 꺾인 고려사는 정인지에게서 재차 꺾이어 아주 다른 역사가 되어 버렸다.

그때, 신숙주는 정인지의 아래서 정인지에게 협력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정원초기(正院草記)를 상세히 열독할 수가 있었는지라 개조되지 않은 고려의 역사를 알 것이었다. 머리 총명하고 기억력 좋기로 집현전의 여러 재사 중에도 가장 빼어난 신숙주라 그 중요한 것은 그냥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옛날 고구려의 터요, 그 뒤 고려도 늘 넘겨다보던 터인 요동을 통과함에 그때의 사적을 알 필요가 있었다. 역사의 기록은 정인지 이후에는 불살라 없어지고 지금은, 단지 사람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사실이라 신숙주의 머리가 필요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서면 명나라 땅. 외국의 첫날 저녁을 진강부(鎭江府)에서 지내기로 되었다.

평양서부터 배행하던 역리며 선천 관속, 의주 용만(義州 龍灣)의 통인이며 관기(官妓) 등은 용만의 나룻머리에서 차례로 하직하였다. 그리고 사신 일행의 인마(人馬)며 방물(方物) 등은 다섯 척의 배에 분승하여 강을 건넜다.

본시 배에는 그 첫배에는 정사와 표자문(表咨文)과 수역(首譯)과 및 그 대솔(帶率)이 함께 오르고 다음 배에 부사와 서장관이며 그 대솔이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은 서장관 신숙주를 자기와 한 배에 오르게 하였다. 이곳의 물살은 여간 세차지 않았다.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사공이 첫 삿대로 배를 떼어놓은 다음 순간은 배는 벌써 언덕에서 멀리 떨어지며, 언덕에서 하직하던 무리는 왼편으로 전전하여 순간순간 차차 작아가며, 아득하여 간다. 굴강한 사공들의 조종에도 불구하고, 배는 물살이 가는 대로 달음질친다. 저편에서 뗏목(筏)이 흘러오는가 하면, 그 뗏목은 어느덧 이 배의 곁을 지나서 아래쪽으로 쏜살같이 내려가고 한다. 벌부(筏夫)들의 입은 옷이 벌써 딴 나라였다.

『벌써 이국(異國)일세 그려.』

수양은 (물소리를 누를만한) 큰소리로 숙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이. 연년이 더 이국화해 갑니다.』

『전에는 지금과 달랐는가?』

『소인이 영묘의 분부로 언문의 음운(音韻)을 상고합고저 황한림(黃翰林: 名瓚)을 심양(瀋陽: 奉天)에 찾어다니올 때만 해도, 심양까지도 아직 고려 유속(遺俗)이 적잖게 남어 있더이다.』

『흠! 어떤 것이?』

『말! 언어로 말씀할지라도 우리나라 평안도 방언과 요동 토민들의 말은 같은 자가 많았습니다. 아주 같은 것도 비일비재옵고─』

『흠.』

『풍속, 문물, 제도─시골에 가면 외국이 아니고 우리 나라 시골이나 아닌가고 실수하기도 쉽더니요.』

『그때도 그랬으면, 국초에는 더 같었겠구먼.』

『그렇구말구요. 여사(麗史)를 보자면 옛날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당한 뒤에 고구려의 구신(舊臣) 대씨(大氏)가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 백성들을 거느리고 발해국(勃海國)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때 발해국의 영토는 압록강 이북만이었는데, 압록강 이남도 역시 고구려의 옛터라, 백성들은 같은 백성이니까 피아의 교류(彼我交流)는 한 나라나 일반이었습니다 그려. 그러다가 발해는 요(遼)에게 망하자, 같은 연간에 왕씨의 고려국이 압록강 이남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없어진 나라 발해국의 유민들은, 혹은 새 나라 고려국에 와서 붙고 혹은 요국에 가서 붙었지만 본시 같은 백성들이니까, 백성끼리의 교류는 그냥 그치지 않았어요.

왕씨의 고려국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자칭하느니만치, 옛날 고구려의 땅이던 요동까지를 고려의 영토로 삼고 싶었고 요국에서는 또 자기네가 발해국을 삼키고 발해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발해의 옛터는 자기네 것이라고 버티고, 이러는 동안에 사실 왕권(王權)은 고려의 왕권도 발해 옛터에 및지 못하고 요국의 왕권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발해국의 옛터인 요동 땅이며, 여진(女眞)은 아무의 왕권도 및지 못하고 백성들끼리 지방 지방의 추장의 아래서 살아왔겠지요. 그러니까 고구려의 백성은 그냥 고구려의 유민으로 요동, 여진 땅에 남아 있고 그냥 교류는 계속 됐습죠.

그 뒤 요국도 망하고 원나라가 선 뒤에 원나라에서는 다른 정책을 썼습니다. 즉 원나라가 중원까지 들어가서 한족(漢族)의 주인이 되면서, 원나라 토종 몽고인을 요동이며 중원으로 옮기고 한족들을 많이 요동에 옮겨서 땅은 그냥 요동대로였으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요동의 본토인인 고구려족이며, 한족이며, 여진족이며 뒤섞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한 삼백년 지나는 동안 관리며 상류 계급의 언어 풍습이 따로 생기고, 백성들의 언어 풍습으로는 그 여러 가지 종속의 혼합물이 생겨났어요. 그런데 이곳 본토인이 고구려 후인이니만치 고구려풍이 가장 많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원나라가 한족에게 도로 쫓기고 명나라가 생기자, 명나라는 요동은 본시 원나라 영토라 해서, 철령에 채(寨)을 세우고 피아의 교류를 아주 엄금해 버렸습니다그려. 그때 우리 나라에서도 아조(我朝)가 용흥(龍興)했는데, 아조는 여진의 옛터에서 용흥했으므로 여진 땅(함경도)은 차마 버리지 못할 땅이올시다. 그 고려 오백 년 동안에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이라 자임하면서도 고구려의 옛터는커녕 압록강까지도 왕권이 및지 못했어요. 힘이 모자랐습지요. 그것을 영묘 삼십 년의 노력으로 동으로는 두만강 건너의 야인의 촌까지, 서로는 압록강까지는 우리 땅으로 만들어는 놓았습니다마는, 강대하던 고구려의 옛터에 비기자면 오분의 일도 못 되옵는 가련한 형세올시다. 영묘께서 놀라우신 지략으로 국토를 확장하시고 두만 압록 양대 강까지를 우리 땅으로 만들자, 명나라에서는 겁을 더 내서 국경의 방어를 더욱 엄중히 하고 피아 교류를 더 엄중히 막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 그대로 있거니와, 압록강 건너는 더 한화(漢化)해서 풍습, 언어가 최근 십 년간에도 얼마나 더 변하였는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요란한 물결 소리를 누르기 위하여 이마 관지에 핏댓줄을 세워가지고 하는 이 말을 수양은 머리를 끄덕이며 들었다. 숙주의 그 논지(論旨)에 감복했다기보다 그 기개에 감복하였다.

집현전 학사요 따라서 유제자(儒弟子)인 숙주가 명나라의 처분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승당존명(崇唐尊明) 사상으로 빚어 놓은 듯한 유생들 가운데서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과연 희귀한 일이었다.

일찍이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고자 할 때에, 온 사림(士林)에서는 얼마나 반대를 하였던가? 합사진계, 내지 항소까지 하여 그 불가함을 극론하였다.

「성인이 끼쳐 주신 글자가 있는데 언문을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니까?」

「선왕의 제를 무시한다는 것은 웬일이오니까?」

굉장한 반대성 가운데서도, 세종은 이 반대성을 무시하고 언문 창제를 강행하였다.

이 분부를 신숙주와 성삼문, 최항 등에게 내렸다. 왕명보다도 사문(斯文)을 중히 여기고, 국가를 위해서는 한 손톱을 상하기를 피하나 사문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유인들이라, 성인의 글 아닌 언문 따위를 제작하는 것은 아무리 왕명일지라도 거절할 것이다. 청년 명사인 신숙주, 성삼문 등이라 (왕명이라도) 거역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분부를 영광으로 알고 받았다. 선배며 친구들의 욕설 비난을 무릅쓰고 봉행하고, 더욱이 제 가진 바의 지식 재주를 경주하여, 어명에 봉답하였다. 이만한 견식이 있겠기에 세종도 이 청년들을 골라서 분부한 것이었고, 이 청년학도들도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선배, 부형, 친구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제 재지를 다하여 사문의 외도를 감행한 것이었다. 이번 수양이 사신으로 떠남에 임하여, 하고많은 재사들 가운데서 신숙주를 골라낸 것도 또한 이만한 견식을 크게 보기 때문이었다.

한(漢)을 숭상하고 당(唐)을 존신하는 이 땅의 학자들은, 한당(漢唐)을 전지전능으로 알고 스스로 비굴하고 스스로 자하한다. 지금의 요동이 예전 고구려의 땅이라 하면 그런 참람한 말이 어디 있느냐 성을 내고, 당태종이 고구려인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잃었다 하면 그런 불경한 말이 어디 있느냐 펄펄 뛰며, 을지문덕이 수양제를 책망하였다 하면 미친 사람이라 욕하며, 고구려의 패수(浿水)를 평안도 평양에서 찾으려 하며─요컨대 조선이라 하는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에 있는 반도에 한한 것으로 알고 그 너머 광대한 요동 여진 등지가 다 고구려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그런 무리들 가운데, 신숙주라 하는 딴 종자가 있는 것이었다. 대담하게도 명나라를 비평하고 고구려의 응대를 찬송하는 것이었다.

수양은, 자기가 종사관을 뽑는데 결코 잘못 뽑지 않았다고 스스로 믿었다.

『고서의 평양 혹은 패수(浿水)가 무론 지금 평안도의 평양이며 대동강은 아닌 모양인데, 그게 어딜까?』

『글쎄올시다. 그 점을 소인도 늘 생각해 보는데, 혹은 이렇지 않을까 생각되어요. 즉, 평양이라, 패수라 하는 건, 어느 일정한 땅, 일정한 강을 일컬음이 아니고, 도회와 거기 달린 강을 평양이라 패수라 함이 아닐까요. 옛날 주(周)에서 기씨(箕氏)를 봉해서 평양에 도읍했다는 건, 요동 근처의 평양이 아닐까요. 광녕현(廣寧縣)에 기자의 묘(廟)가 있고 소상(塑像)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거기가 옛날의 평양이 아닐까요? 그 뒤 기씨는 연인(燕人) 위씨(衛氏)에게 가운데를─본국과의 가운데를 끊겨서 동으로 쫓겨갔다가 다시 부여씨(扶餘氏)에게 쫓겨서 압록강을 지나서 지금의 평양까지 밀려 왔는데, 기시가 쫓겨가는 길에 한동안 자리 잡고 하는 데마다 거기를 도읍지로 쓰고 했는데, 그 한동안씩 닻준 곳마다 거기를 평양이라 일컫고, 거기 있는 강을 패수(浿水)라 일컫고 한 게 아닐까요? 평양은 일정한 곳이 아니라 기씨가 닻주고 한데가 다 평양이 아닐까요? 그 뒤 한(漢)에서 사군을 둘 때는 기씨가 마지막 자리잡았던 평양을 그냥 답습해서 지금의 평양이 마지막 평양으로 그 칭호가 지금까지 그냥 씌어오는 것이 아닐까요? 한의 사군도 고구려에게 망하고, 고구려는 도읍지를 국내성(國內城)에서 환도성(丸都城)으로, 그 뒤 장안(長安)으로 평양으로 여러 번 옮겼는데, 마지막 고구려가 옮겼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고 그 전의 평양은, 요동 근처의 어디라고 소인은 그렇게 생각되어요.』

『옳으이.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네.』

『동사(東史)를 알려면 고구려 역사를 알어야겠는데 고구려 문헌은 당장 이적(唐將 李勣)이 한, 수, 당(漢隋唐)의 참패기(慘敗記)를 없이하기 위해서 통 불사라 버렸으니 분한 노릇이어요. 한토에 남아 있는 한인의 기록으로 겨우 만분 일의 면영이나 엿볼 뿐인데 한인의 기록에도 숨기지 못한 참패사뿐인데 한인의 기록에도 숨기지 못한 참패사뿐이니, 실상은 얼마나 창피하고 참담한 것이었을지, 참 궁금해요. 하여간 몇 나라이 고구려에게 망하고 또 망하고 해서, 칠백 년간에 수 없는 나라이 차례로 망하고 당나라 때, 당나라도 당태종의 강성으로도 역시 참패에 참패를 거듭하고 고종(高宗)에게 정려(征麗)의 유언을 하고 떠나고, 고종도 원정을 거듭하다 못해 마지막에 신라와 연합해 가지고야 겨우 멸하지 않었습니까?

그 한족의 칠백 년간의 창피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서 고구려 문적이라는 문적은 통 불사라 버렸습니다그려.』

『또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 찬술한 김부식이─』

『옳습니다. 좁고 아니꼬운 사람이올시다. 삼국사 편찬 때까지는, 구전(口傳)이라 혹은 민간 편서로 고려사의 남아 있는 것이 꽤 많았던 모양인데, 김부식이는 신라를 추켜세우기 위해서 고구려의 웅대하던 점은 다 제거해 버리고 고구려의 숭한 점만 고르고 지어내고 해서 역사를 편찬했으니 소인의 행사입지요. 더욱이 한인에게 꺼리어서 한서에 있는 일까지도 말살해 버렸습니다그려.』

『학이재(學易齋)[1]도 후인에게 칭찬 못 받으리.』

숙주는 머리를 숙였다.

『지당한 말씀이올시다. 소인도 고려사 편수에 약간 참여했읍거니와 아조(我朝) 용흥은 천명이로라, 선조(先朝)를 욕한다고 아조가 더 훌륭할 배도 아니고 선조를 높였다고 아조에 불리할 배도 아니온데 학이재 대감 굳이 고집을 해서, 선조의 사실을 곡필하고 더욱이 선사(先史)에 「조(祖)」라 「종(宗)」이라, 혹은, 조(詔), 칙(勅), 짐(朕), 폐하(陛下) 등을 참칭이라 해서 죄 왕(王)이라, 교(敎)라, 여(余), 혹은 전하(殿下) 등으로 고치는 등 마땅치 못한 데가 많습니다.』

『재승덕─ 재주가 과해.』

『…………』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배는 대안(對岸)에 이르러 무성한 갈밭 틈으로 배의 머리를 들이 밀었다.

『격강이 천리라, 만리 타향이라, 강 하나 건너서 남의 나라에 왔으니 일만 일천 리를 온 셈인가.』

돌아보니 부사의 배는 꽤 하류까지 흘러 내려가서 그 근처의 뭍에 대려고 삿대질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뛰쳐 나오는지 몇 명의 야인(野人)이 이 배를 향하여 무에라고 지껄이며 달려온다. 이 배에서 사람들을 뭍의 마른 땅까지 업어다 주고 삯전을 얻으려는 토인들이었다.

여기서 내리면 명나라 관인들에게 수검(搜檢)을 받아야 한다. 사람과 말의 적(籍)이며, 성명, 주소, 연령, 수염의 유무며 체격, 키 꼴 등을 교열하고 소지품(所持品)의 품목이며 수량 등을 조사하여, 금제품이나 남월은 취체하고, 겸하여 국경의 경계를 하는 것이다.

수양 이하는 토민의 등에 업히어 배에서 내려서 명나라 관원의 둔소의 앞을 지나서 완전히 명나라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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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