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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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편집]

내일이면 사은사(謝恩使)가 출발한다는 그 전 날, 왕은 대궐 내전에서 몇 몇 종친을 청하여 곡연(曲宴)을 열었다. 수양이 왕께 계청을 하여 열게 된 것이었다. 숙부가 먼길을 떠남에 정부에서 공식으로의 송별연은 있었지만 종실들끼리 탐탁하고 흠 없는 연회를 하여 보자는 표면 이유였다.

그러나 수양이 조카님께 계청하여 수양 자기게 대한 송별연을 열게 한 것은, 이 작은 연회로써 가까운 종실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서 담소를 하여 좀 더 흠 없고 친근한 기분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아버님 세종이 생존한 동안은, 양녕, 효령, 성녕, 동의 숙행(叔行)은 무론이요, 적서(摘庶) 합하여 이십 인이나 되는 형제들이며, 서숙, 서사촌, 오촌들이 늘 대궐에 들어와서 세종께 알현하며 종실끼리의 교분도 계속되었다.

아버님 떠나고 형님(문종) 등극한 뒤에는, 큰 돌쩌귀 빠지기 때문에, 종친들도 입궐하는 돗수가 줄었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당신의 한 몸의 건사조차 귀찮은, 문종은, 종친들의 알현도 귀찮아서 반가와하지 않으니, 자연 종실들도 소원하여졌다. 양녕, 효령의 친숙이며, 형제들도 부득이 입궐해야 되는 날 밖에는 대궐을 피하였다.

어린 조카님이 등극하매, 한층 더하여졌다. 그들은 종친부나 대군청에까지 들어와서도 거기서만 시간을 보내지, 왕께 배알하는 일은 좀체 없었다. 수양 단 혼자서 늘 왕께 뵙고 하였다.

넓다란 대궐을 단 혼자서 지키는 어린 조카님─아직 어리기 때문에 젊은 궁녀들은 기뻐할 줄도 모르고, 늙은 궁녀들은 패거리 패거리가 생겨서 자기네들의 경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역시 왕에게는 귀찮고 시끄러운 존재였고, 대신 재상들은 무시무시하고 어렵기만 하고 이런 고적한 환경이 수양에게는 눈물겨웠다. 이즈음 겨우 수양 자기에게 대하여 차차 신뢰하여 오는 어린 조카님─이분을 남겨두고 한동안 멀리 떠나 있어야 할 수양은, 자기가 없는 동안 다른 종친들이라도 자주 왕께 뵈어서 왕을 위로 드리도록 그 실마리를 틀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좌석에서 안평에게 「조카님을 보호하는 책임」을 좀 지을 수가 있으면 그것까지도 좀 하여보고 싶었다.

양녕은 수양과 동반하여 가장 먼저 왔다. 효령은 몸이 불편하여 오지 못하였다. 수양, 안평, 금성, 이 삼형제와, 매부 영양위 정종─이렇게 단 여섯(왕까지)의 아주 탐탁한 잔치였다.

세종이 사랑하는 손자님(지금의 왕)을 늘 붙안고 거닐던─유서(由緖)깊은 자미당(紫薇堂)에서 잔치를 하기로 하였다.

술을 즐겨하는 양녕을 위하여서는 특별히 주효도 있었다.

비록 인원은 단 여섯에 지나지 못하지만, 세종대왕 승하한 뒤로는, 종친들이 (화목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여본 일은, 첫 번이었다. 양녕도 늙은 눈에 눈물까지 고여 가지고 기뻐하였다.

『전하. 영묘(세종) 빈천하신 이래 처음이올시다. 오무 바쁜 몸이니, 자연 소원도 해지거니와, 성인(聖人) 가신 뒤에는 큰 돌쩌귀 빠지기 때문에 자연히 헤지게 됩니다 그려.』

─이런 말을 하였다.

왕도 이 잔치는 가슴에 무드기 뻗치는 듯 기쁨을 느꼈다.

수양은 거진 매일 보지만, 조부 양녕이며, 숙 안평 금성 등은 꽤 여러 날일 뿐더러, 이 여러 웃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 위에 화기 애애한 기분으로 모인 것이 진실로 기꺼웠다.

『조부님. 숙부님. 지금도 생각나요. 한 옛날 일이지만, 영묘께서 어린 나를 안고 이 창란(窓欄)에 기대어서 머리를 쓸어 주시며 용비어천가를 들려주시던 그 기억이─』

『전하, 신도 생각납니다. (수양이 끼어 들었다) 그 시절에 한창 장난꾸러기던 신도 매일 입궐해서 영묘께 귀찮게 굴고 또 현묘(顯廟)께─』

수양은 말을 끊었다. 끊었다가 숨을 한 번 돌리고 계속하였다─

『현묘(顯廟)며 안평이며 임영(臨瀛)이며, 이 자미당 앞에서 격구(擊毬)를 놀고 있노라면 영묘께서는 그때의 강보의 전하를 안으시고 구경을 하시며, 상을 주시고……』

『참 (양녕은 눈물어린 눈으로 안평을 보면서) 안평은 격구가 서툴기도 하더니.』

『현묘께서도 서투셨지요.』

수양도 웃으며 안평을 보았다. 이런 몇 마디의 이야기가 왕래할 동안, 아직 잠잠히 있던 안평이 비로소 끼어들었다.

『격구를 점잖지 못하게 누가 합니까?』

『숙부도. 왜 격구가 점잖질 못해요.』

『그게 뭐오니까. 상스럽게 달리고 뛰고 넘어지고─』

『그럼 숙부께는 뭐이 점잖습니까?』

『독서, 영시─이런 일이 군자의 할 일이옵지요.』

『유희로는?』

『유희로는─바둑, 거문고─지요.』

안평의 본시의 성질이 또, 나오려는 것을 본 수양은 화두를 돌리기 위해서 끼어 들었다.

『참, 안평의 탄금은 유명합니다. 현대의 백결(百結)─신라 때의 유명한 탄금가─이라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어디, 안평, 한 번 성청에게도 들리거니와 내 길 떠나는데 송별곡 한 곡 못 뜯어 줄까?』

안평은 잠깐 형을 보고 입을 비꼬아 웃었다. 어린애가 아니고 그런 칭찬에 넘겠느냐는 뜻인 듯이.

『참, 숙부, 한 번 들려 주서요.』

『신이 뭐이 잘하는 게 있으리까. 오히려 형님의 탄궁(弓) 소리가 더 훌륭할 게올시다.』

『이 사람. 그리 비싸게 그러지 말구. 전하께서도 소청이시구, 나도 소원이니, 한 곡조 듣세.』

『…………』

『백부님 비파가 또한 안평의 거문고에 못지 않게 항간에 소문이 높습니다. 백부님, 비파 한 곡조, 안평의 거문고와 아울러……』

『영양위의 소고(小鼓)가 또한……』

─가장 친애한 매부 영양을 자랑하고 싶은 왕은 영양의 소고를 천하였다.

『금성(錦城)의 생(笙)도 또……』

─양녕의 천이었다. 왕도 소년다이 만면에 기쁜 기색이 넘쳤다.

『나도, 저(笛)는 간신히 율이나 아는걸요.』

『이러다 보니까 신(수양) 혼자서 풍류는 아주 어둡습니다 그려.』

『숙부의 경(磬)은 고금족보라고 영묘께서 늘 말씀하시던 일이 있는데 천만에─』

─수양이 겸손에 왕이 수양의 편을 들었다.

양녕도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나타내었다.

『전하. 우리 종중 전부가 풍류지인이올시다. 오늘 수양을 먼길 떠나보내는 이 자리에서 수양의 길을 축복해서 모두 풍류를 울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십시다.』

이리하여 내관에게 명하여 온갖 악기를 자미당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세종이 박 연(朴?)을 지휘하여 제정한 악기들─


질탕하고 유쾌한 풍류의 한 장면이 지났다. 늙은이로부터 어린이까지가 모두, 소년 같은 마음으로, 이 풍류를 즐겼다.

안평은 처음에는 그다지 냅더지지 않는 기색으로 거문고를 들었지만, 일 곡, 이 곡, 지나가는 동안에 그도 드디어 흥이 난 모양으로, 이마에 핏대 줄을 세워 가지고 열 있게 뜯었다.

풍류 연주는 끝이 났다.

아까 초벌 젓가락을 대었던 상은 풍류 때에 걷어 치웠고, 다시 음식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커다란 교잣상만 한 상에 임금 이하 여섯이 둘러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교자 하나 만이었다.

『조부님. 조부님을 보시고 음식을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생후 처음인 듯싶습니다. 많이 잡수서요.』

『참 전하께 배식하는 건 처음이올시다. 저(笛)는 기음(氣音)이오라 허하시리다. 많이 진어하서요.』

사실 저를 부느라고 용안에 올랐던 도홍색 핏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숙부도 명일 떠나시면 한동안 우리 나라 음식은 못 대하실 테니 많이 잡수서요.』

『그릇을 부시오리다.』

『안평, 금성 양숙(兩叔)도, 영양(寧陽) 너도.』

수라를 이렇듯 흥성스럽게 유쾌하게 받기는 왕의 생후 처음이었다. 진실로 유쾌하였다. 도홍색의 소년다운 용안에는, 희열이 흐르고 넘쳤다.

모시는 환관들의 자기네끼리의 이야기를 엿들은 바에 의지하면 저 민간에서는 오촌 육촌(친척의)은커녕 구촌 십촌까지도, 한 집에서 살며, (적어도 조석으로 서로 만나며) 친근히 지낸다 하는데, 왕실이라는 데는 어떤 까닭으로, 형제가 벌써 소원해지고, 삼촌 사촌이 되면 벌써 남과 같이 되는가.

신변이 고적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립고 더욱이 일가친척이 그리운 왕은, 민간의 그 제도가 무척이도 그리웠다.

이렇듯 일가친척이 함께 즐기고 한 상에서 음식을 나누며 담소하는 것은 오죽 유쾌한 일인가. 왕실은 어찌하여 이렇게 지내면 안 되는가. 당신 즉위한 이래, 종친이라고는 수양숙 한 사람과, 인척으로 매부되는 영양위만이 늘 들어오는 뿐, 다른 종친들은 (특별한 일이 있기 전에는) 좀체 가까이 나오지 않으며, 수양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분경」이라 무엇이라 하여 정부에서 말썽을 부리며, 영양은 마치 못 볼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이 눈치를 보아가면서 만나야 하니 무슨 까닭인가.

『조부님. 오늘 이렇게 조부님이며 제숙과 한 상에서 담소를 하니 참 기뻐요. 종종 이렇게 대할 기회가 있으면……』

『황송이옵니다.』

오늘의 이 잔치는 이런 기분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왕께 청하여 열었던 바라, 수양은 여기서 알선하는 지휘에서야 되게 되었다.

『백부님. 참 저도 여기 대해서 늘 생각하고 했는데, 전하께오서 오죽이나 적료하시겠습니까? 백부님도 그러하섰겠지만 저희네 형제로 말씀해도 소년 때에는 양친이 계시고 형제가 수두룩해서 적적한 것도 모를뿐더러 영묘께서 만날 부르시고 배우(配?) 영입하시기까지는 이야기 벗까지도 없으시니 오죽 적적하시겠습니까. 백부님 노체에 피곤두 하시겠지만 우리 전하를 위해서 좀 틈내 주서요.』

『전하께서만 용납하시면 신은 내일부터라도 상참하리다.』

『안평 자네, 백부님은 노체에 피곤도 하시겠지만 자네는 청춘에 또 가장 한가한 신분이야. 담당정이나 무이정사를 비어 두고라도 자구 참내하면 어떤가.』

아까의 유쾌한 기분의 탓일 것이다. 안평도 비교적 순순히 그러기를 약속하였다. 금성이며 영양에게도 같은 일을 부탁하였다. 모두들 순순히 그러기를 약속하였다.

저녁도 모두 대궐에서 함께 하였다.

저녁 뒤에는 쌍륙을 내다놓고 편을 갈라 가지고 경기까지 하였다.

임금까지 섞이어서 저녁을 한 상에서 하고 쌍륙같은 경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씨 개국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었다.

조손(祖孫) 군신(君臣)이 여섯 귀인들은 세종대왕을 중축으로 한 일가로서 한 자리에 모여서 한 저녁을 유쾌하게 보냈다. 그리고 이 저녁의 유쾌함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뒤에도 이런 희합을 가끔 하자고 의논이 나서, 그렇게 하자고 의견이 합하였다.

밤늦게 왕께 하직하고 대궐 밖에 나와서 백부께도 하직하고 아우들이며 영양위와도 작별하고 초헌(招軒)에 높이 앉아서 집으로 향하는 동안 수양은 근래에 맛보지 못한 큰 희열을 느꼈다. 아까 대궐에서 유쾌히 지낸 그 기분의 여력이라기보다 또는 왕께 매우 유쾌한 기분을 드렸다는 그 생각의 기쁨보다, 안평의 태도가 매우 순순한 것이 가장 기뻤다. 안평은 처음은 한참 뾰로통해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과 기분이 넉넉히 맞도록 융화가 되었다.

안평이 항상 수양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그 위에 근자에는 김종서 등과 접근한다는 일 때문에 내심 매우 불쾌하였고 기분 나빠서 수양도 차차 안평에게 대하여 좋지 않은 생각이 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수양은 늘 스스로 자기를 꾸짖고 스스로 불쾌히 여기는 바다.

오늘 안평을 그 잔치에 오게 한 것은, 안평에게 어린 조카님 보호의 책임의 일부를 맡겨서 안평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양심을 불러일으키게─적어도 그렇게 되면 다행이라 하는 생각으로 오게 한 것이지, 안평이 그렇게까지 융화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바였다.

그러나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해보니 한 조상의 후손이라, 예기하지 않았던 융화의 싹이 보인 것이었다.

안평의 태도가 이만큼 연화되었으면, 안평에게 대하여 근심할 필요는 없어졌다. 이 위에 오늘의 약속대로 자주 대궐에 들어오면 어린 조카님께 대한 동정심도 더 일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더욱 더 호전할 것이다.

여기서라도 만약 안평의 뒤에서 부채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줏대 약한 안평은 또 다시 어디로 기울은지 알 수 없지만 부채질할 사람도 수양이 연경에서 돌아오기까지는 수수방관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형편이라,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적어도 한 동안은) 푹 마음을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가벼운 기운으로 수양은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사은사의 일행은 성대한 송별을 받으면서 연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가을 하늘 맑게 개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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