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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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편집]

입직 승지의 책무로 내실에 왕을 모시던 최항이 나왔다. 어명으로 정인지를 부르기 때문이었다. 삼공과 좌우찬성이 복주(伏誅)하고, 좌참찬 허후가 참내하지 않은 오늘에 있어서는, 우참찬 정인지가 현 정부의 최고 재상이었다.

왕은 정인지와 최항을 입회시키고, 수양을 영의정 겸 이병(吏兵) 양조판서(兩曹判書)에 좌우 병마 도통사로 친임하였다.

수상(首相) 겸, 백관 전형권(銓衡權)과 병권(兵權), 군권(軍權)의 총 권한이 수양의 한손에 들어갔다. 재상 정형권을 받은 수양은 즉석에서 좌상으로 정인지를 차출하고,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그 밖의 몇몇 중신을 결정하였다.

신임 좌의정 정인지가 어전을 물러나려 할 때에 왕은 인지에게 군인에게 내리는 교서를 짓기를 분부하였다.

어명을 받고 어전을 물러나 사랑으로 나와서 인지는 권남을 불렀다. 권남에게 이계전(李季甸), 최항과 협력하여 교서를 짓도록 하였다.

교서의 뜻은,

『간신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군 용(瑢)과 교결하여 널리 당파를 늘여놓고 사사(死士)를 몰래 기르며, 변읍의 병기(兵器)들을 날라 들이어 불궤(不軌)를 도모하므로, 그 당들은 처벌했지만 안평은 지친(至親)이라 차마 법대로 시행할 수 없어서 우외(于外)에 안치하노 라.』

하는 뜻의 것이었다. 이 교서를 지은밖에 그날 밤의 처분으로 한명회가 군기사 녹사(軍器寺 錄事)로 말직(末職)이나마 벼슬에 붙고, 또 신임 좌우의정의 제청으로,

『이번 잔당의 남은 무리가 혹은 수양대군께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겠사오니, 그 출입에 군사로 호위케 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고 아뢰어서, 왕도 진무(鎭撫) 두 명에게 각각 별시위 오십과 총통방패(銃筒防牌) 이십씩을 거느리고 수양대군을 호위케 하였다.

수양 이하 서른여섯 사람은 〈정란공신〉이라 하여 훈록하고 호를 내렸다.

이번 사건에 관하여 적지 않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김종서도 그때 채 죽지 않고 회생하였다가, 이튿날 미심결로 살펴보러 간 사람의 눈에 띄어 온전히 죽었다.

정본(鄭苯), 허후(許詡), 이현로(李賢老) 등도, 황보인이와 김종서와 교분이 두터운 죄로 혐의 받아 죽었고, 종서의 심복이던 이징옥(李澄玉) 그밖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에서 젊고 재치 있는 사람들만은 걸려든 사람이 없었다. 얼마만치의 혐의가 있는 사람까지도 젊고 재치 있는 사람은 수양이 애써 구하였다.


그러나 수양이 내심 저퍼하고 피하려 하던 일이 종내 생겨났다.

안평대군을 죽이자 하는 공론이 종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나라 벼슬아치들의 야시꼬운 심리의 산물─ 이전에 김종서가 세종대왕께,

『양녕대군을 없이 합시다.』

고 조르던 똑같은 심리의 발동이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 하면, 옛날 양녕은 아무 죄도 없는데도 김종서가 다만, 이렇게 하여야 임금께 고임을 받겠다는 제 생각만으로 그랬는데, 이번의 일은 뒤에 혐의가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지, 그 어느 자이건 이렇게 하여야 임금의 고임을 받으리라는 억단에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즉 야반에 영양위 댁에서 큰 변이 있고 영상 황보인 이하가 다 복주한 그 이튿날 벌써 양사(兩司)에서,

『안평대군은 수악(首惡)이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오니, 법대로 처단하여 줍시사.』

고 상계를 하였다.

이 상계에 왕의 놀람은 여간이 아니었다.

『숙부님, 이 일을 어쩝니까?』

옥음은 떨리기까지 하였다.

수양은 서슴지 않고 아뢰었다.

『염려 마오시고 불윤(不允) 두 자로 대답하십시오.』

왕은 수양의 의견대로 하였다. 그날은 수양이 새로 영상이 된 첫날이라, 축하의 잔치다 무엇이라 분주하여, 다시 안평의 일이 이야기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이튿날 수양이 빈청으로 나오매 정인지가 먼저 그 문제를 꺼내었다.

인지는,

『왕의 지친이라 하여 법을 흐리게 하는 것은 그 나라의 정사를 믿음성 없게 하는 것이라, 그것도 웬만한 죄와도 달라서, 가장 중한 죄니 모른 체하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수양이 거기 대답하였다.

『강화에 안치했으면 되지 않우?』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 죄에 그만 형이면 나도 나도 하지 않겠습니까? 안평이 아무리 지친이라 하되, 태종 대왕께오서도 방번(芳蕃), 방석(芳碩)의 두 지친을 치법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나으리, 수상이 되어 첫 번 정사를 밝혀 안 하시면, 국민이 나으리를 믿지 못하오리다.』

말로는 수양을 폄하는 듯한 말이나, 내심으로는 이렇게 해야 수양이 기뻐할 줄 알고 하는 그 심리를 잘 안다.

수양은 딱하였다. 첫째로는 자기가 아무리 못하리라고 설명하여도 저쪽은 이렇게 하는 것이 수양에게 고임받는 일이라 하여 하는 일이매, 자기의 설명을 단지 반어(反語)로만 믿을 테니 이것이 딱하였고, 둘째로는 이것이 법을 흐리게 한다는 말에 대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수양은 역시 금하였다.

『안됩니다. 안평에게 이미 죄를 준 이상에 다시 무슨 재론을 하겠소? 내 뜻도 그렇거니와 성의도 그러니까, 대감이 잘 생각하셔서 다시 그런 말을 꺼내지 마십시오. 성념을 괴롭게 하는 일은 신자의 도리가 아니외다.』

인지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지만, 그 뒤도 양사(兩司) 혹은 삼사(三司)가 그 일로 왕께 조르고 수양께 졸랐다.

왕이,

『못하리라.』

하고 수양이,

『못하리라.』

하지만, 저 사람들은,

『표면은 체면상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내심은 그렇지 않으리라.』

하고 하는 일이라, 아무리 말려도 뒤이어 다시 그 문제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더욱이 〈종(從)〉이라 할 만한 종서며 인이를 치법하고 〈수(首)〉되는 안평을 방임하는 것은 안 된다 하는 말이매 상당한 이유도 섰다.

이 문제를 가지고 꽤 여러 날을 조르고 졸리고 하였다. 그러는 어느 날, 왕은 경회루 아래서 정인지 이하의 여러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고 의논이 파할 때에 정인지는 또 이계전(李季甸)을 수양께 보내서 안평의 일을 또 재촉하였다. 여전히 법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날 수양이 왕을 편전에 모실 때에, 왕에게서도 그 걱정이 또 나왔다.

『숙부님, 연해 조르는데 참 성가셔요. 그러니 지친─ 친숙을 법한 전례가 있습니까?』

『전례는 태조 어우에 태종께오서 방번, 방석의 두 왕자를 치법하신 일이 계시지만 참 딱하옵니다.』

『이즈음은 대신들을 만나려면 끔찍해요. 또 그 소리가 아닌가 해서─』

『지당하오십니다.』

황송하고 민망하였다. 자기가 정사를 맡아보는 동안은, 어린 조카님께는 조그만 근심이라도 드리지 않으리라 했더니 이것이 웬일이냐? 더욱이 골육의 문제로 성념을 괴롭게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그날은 그만치 해서 지났지만, 이튿날 좌상이 다시 그 말을 꺼낼 때, 수양은 드디어 자기의 불쾌한 감정을 그냥 감추지 못하였다.

『대감, 내가 혀에 굳은 살이 박힐이만치 말해온 바외다. 더 내게 무슨 의견이 있겠소? 치법하자는 의견은 공론이요, 내 말은 내 사사로운 감정이니, 억지로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다시는 내 앞에는 그 말은 다시 하지 마시오. 듣기 싫소이다.』

불쾌한 낯색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좌상 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왕께 조르기를 낮에서부터 해가 기울도록 하였다. 날씨 꽤 서늘한 이때에, 전정에 백관을 거느리고 서서 조르는 것을 왕은 보다보다 못해서 종내,

『좋도록 하라.』

고 하였다. 치법이라 하는 말도 말이거니와, 이 추운 날씨에 뜰에서 떨고 있는 재상들의 모양이 왕께는 민망하여, 어린 마음에 종내 그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 예궐했다가 일이 있어서 일찍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이 일을 몰랐던 수양은 이튿날에야 알았다.

수양은 그 소식을 듣고 먼저 왕께 뵈었다. 수양은 엎디어 한참을 입만 들먹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내었다.

『전하, 용(瑢)을 처단하시기를 윤허하오셨다니……』

『숙부님 정 못 견디겠어요. 어찌 그 추운데 낮부터 저녁까지 전정에 엎디어 계청하는데, 그 정경이 어디 차마 보겠습디까?』

어리신 마음에 그럴 듯하였다. 그러나,

『전하, 전하, 신께 정권을 맡기오신 이상 왜 신께 한 번 더 의논을 안 하셨습니까? 전하고 그냥 굳게 물리치시면, 재상들도 한동안 가지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네끼리 싫증이 나서 그만 두올 것을……』

『그래도…… 그럼 이제라도 그만두라고 합시다 그려.』

『그러나 왕명은 지중하온 것, 한 번 윤허하셨다가 다시 물시하면……』

여기서 더 아뢸 말씀이 없어서, 수양은 잠간 인사의 말씀을 몇 마디 더 여쭌 뒤에 어전을 물러 나왔다.

기분이 불쾌하기 때문에 수양은 그날도 일찍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좌찬성으로 초배된 신숙주와 그의 막역지우 박팽년을 집으로 불러 보았다.

廟堂深處動哀絲 萬事如今摠不知
柳綠東風吹細細 花明春日正遲遲
先王大業抽金櫃 聖主鴻恩倒玉巵
不樂何爲長生樂 賡歌醉飽太平時

얼마 전 수양이 김종서, 황보인들을 처치하고 영의정을 대배한 이튿날, 그 축연을 열었을 때 박팽년이 이를 경축하는 뜻으로 지어 드린 시를 심심파적으로 종이에 끄적거리고 있을 때에 숙주와 팽년이 동반하여 이르렀다.

몇 마디의 이야기가 지나간 뒤에, 수양은 드디어 본 문제를 꺼내었다.

『인수(팽년)와 범옹(숙주)도 어제 무론 동렬했겠지?』

여기 대하여 수양의 마음을 잘 아는 숙주는 머리를 깊이 숙일 뿐 잠잠하고, 팽년이 혼자 대답하였다.

『네, 나으리의 뜻도 또 짐작은 합니다마는, 정의는 정의옵고 왕법이야 어찌 굽히오리까?』

『하지만 위에 전하 계시고 그 아래 내가 수상으로 있어서, 전하께는 숙(叔)이요, 내게는 계(季) 되는 사람 하나를 마음대로 못하단……』

『그건 전하나 나으리의 뜻보다도 선왕의 제도 분부가 아니오니까? 나으리, 그런 일에 구애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인수보다 범옹이는 잘 알지만, 내 실정으로는 안평대군과 그다지 의 두텁지 못했어. 남에게 알리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형제의 의가 그다지 살뜰치 못했어. 그렇지만, 아아!』

수양은 길이 탄식하였다.

『내가 살뜰치 못했거니 혹은 세상에서는 내가 애써 구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일부러 모른 체해서 동생을 죽였다는 악명이라도 돌아오면, 그건 참으로 억울하이.』

『왕법대로 시행했는데 누가 여러 말을 하오리까? 만약 안평대군께서 나으리의 혈기만 아니시면, 나으리 스스로 상계해서 치법하실 게 아니오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무엇을 그리 마음에 두셔요? 법대로 하시면 나으리 선두에 서셔서 계청을 해야 옳을 일─ 나으리 오히려 저에 게을린 허물을 면치 못하오리다.』

수양은 더 말하지 못하였다. 팽년의 하는 말은 인지와 같이 단지 더 고임을 받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법을 바로 하겠다는 성의에서 나온 바임을 알므로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리하여 안평은 배소 강화에서 사사(賜死)가 되고, 그의 아들 우직(友直)은 진도(珍島)에 정배 보내게 되었다.

수양도 할 수 없었다. 〈법〉과 〈공론(公論)〉의 앞에는 수양도 하릴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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