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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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편집]

수양이 군국의 대임을 한몸에 지니고 행한 첫 번 행정은 인물의 쇄신이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인물들의 연령이었다. 영의정인 수양이 삼십 소년인 것을 필두로, 좌의정 정인지가 오십 장년이요, 역시 일품관(一品官)으로 좌찬성에 신숙주 같은 소년을 뽑아 올린 것은 이조 창업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마(駙馬)라든가 혹은 외척 관계로는 소년 일품관도 있었지만, 단지 서생으로 소년 일품관은 사람들의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집현전 계통의 다른 소년들도 아직껏 주저앉아 있던 것을, 그중에서 재주 뛰어난 사람들은 계단을 밟지 않고 초배(超拜)를 시켰다.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으로 좌우 사간(司諫)을 삼고 이개(李塏)로 집의(執義)를 삼는 등, 조정은 젊고 씩씩한 무리들로 채워 놓았다.

더욱이 그 사이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 선산(善山)에 내려가 있던 하위지를 불러서 사간직에 올린 일은, 같은 집현전의 동료인 신숙주며 성삼문, 박팽년 등으로 하여금 환호성을 올리게 하였다.

세종대왕 때에 세종은 집현전 유생들로 하여금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찬수케 하고, 수양으로서 그 총재를 분부한 일이 있었다. 그 〈역대병요〉가 금년 봄에 완성이 되었다. 수양은 그 총재의 책임으로 그 사이 수년간을 역대병요 찬수에 애쓴 유생들에게 상을 내려 주기를 조카님께 청하였다. 이리하여 성삼문이며 유성원(柳誠源) 등이 모두 상자(賞資)를 받았다. 하위지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이 편수에 관여한 덕에 중훈계(中訓階)에서 중직(中直)으로 승차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위지는 이 상자를 부당한 일이라고 연하여 상소하였다. 수양대군이 중간에서 알선하여 생기는 상자는, 즉 수양대군이 조신(朝臣)들의 인심을 사려는 혐의가 있으니 부당하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위지에게

『그대는 이전 세종조 때에 찬집의 공으로 상자를 내릴 때에 이의 없이 받았거늘 지금은 왜 반대를 하느냐?』

고 물으매 위지는,

『그때는 은혜가 위에서 내린 것이니 황송히 받았습지만, 이번은 아랫사람의 주선으로 나온 것이니 못 받겠습니다.』

고 그냥 고집하고,

『만약 이를 강제하면 입조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 좀 뒤에 병을 핑계 삼아 사퇴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수양 자기를 배척한 것이나 일반이었다. 그런 하위지어늘 수양이 사람을 씀에 좌사간으로 부른 것이었다.

하위지며 다른 청년 재사들이 모두 정부의 긴한 자리에 앉으며, 동시에 무능 노물들은 차례로 벼슬을 깎거나 한직으로 돌리거나 하여, 이 방토는 전혀 청년의 방토로 화하였다.

이렇게 일변 벼슬을 주고 일변 갈고 일변 깎는 동안에, 수양이 새삼스러이 감탄한 것은 부왕 세종의 명안이었다.

부왕 재위 삼십년 간, 그 삼십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정승의 자리는 황희 단 한 사람을 꾹 멈추어 두고 갈지 않았었다.

일찍이 헌부의 소년들이 세종께 (이 나라 벼슬아치의 심정으로) 황희를 참소 또 참소한 때 깎은 일이 있었다. 그러고도 그 성화에 세종은 황희의 벼슬을 그 대임(代任)을 보류하여 두었다가, 단 하루 지나서 이튿날 황희를 다시 임명하였다. 즉 헌관의 제청대로 황희의 벼슬은 깎고, 그를 복관시킨 것이 아니고 새로 임명한 것이었다. 여기 대하여 다시 헌부에서 말썽을 부리매 세종은,

『그대들이 감춤 없이 범백사를 내왕(乃王)께 아뢰니 심히 가상하도다. 그러나 신임 대신(新任大臣)을 어찌 다시 갈랴.』

하여 윤허치 않고, 근 삼십년 간(이십칠 년이다)을 그냥 황희를 정승으로 썼다.

사실 적당한 후임이 없은 것이었다.

당신이 몸소 기른 집현전 학사들의 장발을 기다리실 것이었다. 이후 그 청년 학도들이 장발해서 관록과 경험이 충분해질 때까지를 기다리노라고 황희는 꾹 영의정에 멈추어 둔 채 갈지 않았다.

황희의 뒤로 맹사성, 최윤덕, 허조 등등의 명상이 많이 생겨났지만, 영상의 자리는 이동치 않았다. 황희를 일단 영상의 자리에서 물리쳤다가는 맹사성, 최윤덕, 허조 등의 명상이 뒤를 잇는다 할지라도 그 또 뒤를 이을 인물이 없었다. 맹, 최, 허 등의 몇 사람을 지난 뒤에는 당연한 순서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상위(相位)에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사람들에게는 국정을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희망대로 될 수만 있다면, 왕(세종)은 당신 생존 중에 청년 학도들이 상위(相位)를 감당할 만한 연령과 관록과 경험이 생기기를 희망하였다. 그 청년들에게 관록이 생기면 그때 황희를 갈고, 그 후임(순서대로의)들을 걸핏걸핏 갈아치우고 당신이 몸소 기른 소년들을 상위에 올려서 국정을 맡기고 싶었다.

그런데 불행히 소년들의 장발을 보지 못하고 세종이 승하하였다.

맹사성, 허조 등은 황희가 갈리지 않기 때문에 모두 좌상까지 올라갔다가는 영상 자리를 눈앞에 놓고 세상 떠나고 하여, 최고직은 보지를 못하였다. 황희가 너무 장수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세종으로서 좀 더 수가 길었더면 황보인 등은 (연조의 당연한 순서로) 배상(拜相)까지는 할지나, 영상까지 올라가지는 절대로 못할 것이었다. 누구든 역량 있는 자를 초배(超拜) 또 초배를 시켜 황보인을 넘어 뛰어 영상 자리에 올렸을 것이었다.

불행 세종 일찍 승하하기 때문에 황보인이 영상이 되고 김종서가 좌상이 되는 등, 세종으로서는 혀를 챌 만한 일이 생겨났다.

수양이 그 노물들을 없이하고 조정을 살펴보매 뒤에 등대하고 있는 (부왕이 몸소 기른) 청년 학도들이 얼마나 장래성 있고 믿음직하였느냐?

아직도 중간 인물들이 남아 있었다. 벼슬살이의 연조로 따져서 청년 학도들보다 앞선 사람이 아직 얼마 남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청년 유위의 인물들을 초배 또 초배를 시켜 중간 인물들을 건너뛰게 하면, 장차는 이 조정은 보옥(寶玉)만으로 넉넉히 조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린 조카님의 용안─ 한때 어린이답지 않게 노성하고 우울한 기색이 넘쳐 있던─을 우러를 때마다, 수양은 만만한 야심과 희망이 가슴에 복받치어 올라, 저절로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 전하 몇 해만 더 기다려 주시옵소서. 전하의 어우(御宇)로 하여금 한당(漢唐)에 못지않은 빛나는 세상으로, 또한 전하의 적자로 하여금 요순의 일민에 못지않은 평안한 백성으로─ 그리고 전하로 하여금 여역(麗域)의 대군주가 되오시도록 신이 신명을 걸고 애쓰오리다.

아아! 이 어리신 조카님 친정(親政)하시기 전에 이 나라를 어서 완전히 만들어서, 빛나고 튼튼한 국가로 만들어 가지고 조카님께 드리자. 이 뒤 만약 부왕을 저승에서 만나는 날에는, 아버님 소자의 등을 두드려 주십사고 엉석을 부릴 만하게 어서 빨리─

지금 자기가 수하에 배치한 무리 중에 좌의정 정인지는 희세의 재사다. 그의 충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있고, 그의 위인에는 수금치 못할 점이 없지 않으나, 풍부한 학식과 기지와 수단 등은 다시 구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신숙주는 인지보다 연령은 좀 뒤떨어진다 하나, 그의 지혜, 지식은 결코 인지보다 떨어지는 바 없는 위에, 견식과 포부는 인지 따위가 도저히 뒤및지 못할 것이다. 관록과 연치를 갖출 동안 인지의 아래 두었다가 장차 인지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김에 예전 부왕이 황희에게 맡김과 일반으로 하여도 부족이 없을 인물이었다.

한명회는 그 생장이 유문(儒門)이 아니기 때문에 유자의 기풍은 없고 약간 천한 티가 보이나,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로, 역시 재상 가음의 자리를 더럽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집현전의 청년들의 학식, 견식, 또한 충성, 모두 재상 가음에 넉넉하였다.

이렇게 조정을 둘러보자면, 장래에는 인물이 남고 넘쳐서, 이 나라가 훨씬 더 커지고 정무가 훨씬 더 많아져서, 더 많은 사람을 앉힐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요만 나라의 요만 정무에나 쓰자면 유위의 인물들을 한직(閑職)에 두어 술로 세월을 모호히 하게나 할 것이었다.

문득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요동의 무변 광야─ 어쩔 도리가 없을까?

부왕이 무척이도 내심 마음 두시던 일, 그러나 형왕(문종)은 마음 두기는커녕 큰일 날 일이라 하여 두려워하시던 일─

언젠가 수양이 형왕을 병석에 모시면서 이런 말씀 저런 말씀 아뢰다가 야인 이만주(野人 李滿住)의 이야기가 나서,

『양암이나 벗으신 뒤에는 이만주 잔당을 전멸시키고 그 기회에 일거하여 요동까지 얻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다가 형왕께,

『천자의 발을 건드린단 웬 말이냐?』

고 엄책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몽상은 늘 그 땅의 위에 헤매었다.


밖으로는 정무에 대해서 이만치 처리하면서, 수양은 또 안으로 왕의 신변에 대하여서도 마음을 썼다.

부왕(문종) 갓 승하한 뒤보다는 용안이 훨씬 뵙기 좋았다. 엄격한 부왕의 아래서 동무 하나 없는 쓸쓸한 대궐 생활을 하노라고 괴지 못하였던 용안이 이제는 완전히 소년답게 피어서 복숭아빛이 늘 용안에 사무쳐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디인지 쓸쓸한 영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용안을 우러를 때마다 이 점이 늘 민망하였다. 그래서 수양은 왕이 갓 탄생되었을 때에 젖을 올린 혜빈 양씨를 대궐로 불러들이고, 양씨의 몸에서 탄생된 왕자(세종의)─ 즉 지금의 왕의 젖형제 겸 서숙(庶叔)도 늘 대궐 안에 출입하도록 분부하고, 또한 부마되는 영양위도 늘 들어와서 왕의 동무를 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정치적이며 목민자로서는 전연 무능하면서도 이런 일에는 잔소리를 하기 좋아하는 이전의 대신들이,

『임금은 좀 더 임금다이 점잖게 구셔야지, 그런 잡인들과 더욱이 성학(聖學)이 아닌 잡론을 하며 논다는 것은 안 될 일이외다.』

고 그들의 소위 〈간(諫)〉을 하여, 영양위며 혜빈 양씨 및 그가 탄생한 왕자들과 소년 왕과의 사귐은 극히 제한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것을 수양은 아주 해방하여 출입과 놀이를 자유롭게 하였다.

연석(筵席)도 구속을 제거하여 왕의 뜻이 생길 때에 하도록 하고 시강관도 청년 문사 중에 가장 기상이 쓸 만한 사람들을 택하였다.

이런 경연보다도 수양은 한가한 시간에 왕을 모시고 한담을 하는 것에 치중하였다. 구중 깊은 곳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시민들의 생활이며 정경이며를 왕과 이야기를 주고받아, 왕으로 하여금 자연히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면 저절로 생겨날 군왕으로서의 휼민심이 움돋기를 기다렸다. 지금 열세 살의 소년왕이 장차 친정을 하는 날, 당신이 직접 세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도록─ 이해하여 당신 스스로 좋은 정치를 베풀 지각이 움돋아 나도록 여기 주력하였다.

이 수양의 용의주도한 주의 가운데서 왕은 한가하고 안온한 듯하고도 마음과 몸이 훌쩍훌쩍 장성하였다.

또 외신들은 전과 달리 바쁘고 긴장한 가운데서도 활기 있고 여유 있는 정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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