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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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편집]

수양 부인과 양혜빈과의 왕래로 왕비가 내정되었다.

고르고 또 고른 결과로써, 수양 내외와 혜빈 양씨의 사이에 왕비로 내정이 된 이는 송현수(宋玹壽)의 따님인 금년(계유) 열네 살 난 규수였다. 외척(外戚)의 발호를 꺼리어서 이 나라 제도는 왕비나 세자빈(世子嬪)은 한미한 선비의 집안에서 택한다.

그러나 일체로 발설치 않았다. 왕의 내락조차 받지 않았다. 수양 내외와 혜빈 양씨가 마음 치고 있을 뿐이었다. 당자 송현수의 집안에도 물론 알리지 않았다.

이러한 동안에 과연 전일 신숙주에게서 들은바 항간 풍설이라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수양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군기시 녹사라는 〈품〉하의 말직에 붙여서 두세 번 초배(超拜)하여 육품직의 벼슬에 오른 한명회에게서 들어온 소식이었다.

『항간에는 이번 나으리 정난(靖難)에 관한 괘씸한 풍문이 있는 듯하옵니다.』

이렇게 여쭙는 명회에게 대하여 어떠한 풍문이 있더냐고 물으매, 명회는 여쭙기가 황송하다는 듯이 주저주저하면서 대답하였다.

『이번 정난에 대해서 나리께서 무슨 딴뜻이 계셔서 하신 일이라고……』

한명회가 주저 주저할 때에 벌써 수양은 한명회의 대답이 이것일 줄 짐작하였다. 뿐더러 한명회의 심정도 또한 이 풍설과 같은 점이 있으며, 적어도 그것을 희망하는 것도 수양이 이미 짐작하는 바였다.

수양은 여기서 신숙주의 사람됨이 한명회보다 훨씬 나은 것을 더욱 명료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항간 풍설을 꺾을 준비가 되어 있는 수양은 그리 의외로도 생각지 않았다. 첫째로는 조카님(단종)의 마음과 몸의 벗을 드리고, 둘째로는 그리하여 외로우신 조카님을 위로코자 왕비를 간택한 것이 우연히도 또한 수양 자기의 위에 씌워진 항간의 잡음까지 꺾을 방책이 된다 하면, 진실로 일거삼득의 양책이 아닌가? 저 고약한 무리들이 수양 자기를 무(誣)하노라고,

『수양은 딴 뜻을 품고 있다.』

고 아무리 소리높여 부르짖을지라도, 수양 자기가 주장하여 왕께 납비(納妃)를 계청해서 그 왕비에게서 원자(元子)가 탄생되면, 그 뒤야 수양이 여사여사하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까?

아아! 어서 왕비를 납입하여 그 왕비의 몸에서 원자가 탄생합과저!

지금 자기는 원수를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일거일동에 감시의 눈을 붓고 있다. 조카님께 계청해서 좀 큰일 중대한 일을 실시하고 싶은 때도 없지 않지만, 그런 때마다 어디서인지 들려오는 고약한 소문─ 수양은 저렇게 해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그런 뒤에 자기가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어린 조카님께 저런 위험한 일을 하시도록 강청한다─ 이런 풍문, 발목이 잡혀서 그만 움쳐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풍문도 납비를 하고 원자가 탄생되면야 어디 감히 꺼내랴.

조카님을 위로코자 안출한 일이지만, 수양 자기에게도 호신책이 되는 일─ 지금이 섣달도 중순이니 이 낡은 해만 바뀌면 조카님께 계청하자.

항간 잡음에 대한 대책으로 신숙주는 역시 국모 영립을 최상으로 잡았다. 그러나 한명회는 어떤 다른 묘책이라도 갖고 있지 않은지, 수양은 그 점을 따져보고 싶었다.

『세상이란 참 귀찮어. 항간에 그런 비언이 떠돌면 과시 귀찮은 걸, 그런 풍설을 막을 어떤 묘방은 없겠는가?』

『글쎄옵니다.』

한명회는 머리를 숙였다.

『소인 생각 같아서는 발본색원을 하는 편이 최상지책일까 하옵니다.』

『발본색원이란?』

『그런 풍설이 빚어져 나오는 데는 대개 안평대군이며 허후, 정본, 이현로 등의 여당인 듯 하온데, 그 여당을 전몰시키기 전에는 그런 풍설이 끊이지 않으오리다.』

『그럴까? 그러면 대체 누구누구가 그들의 여당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할까? 왕자요, 정승 대관이니 지인(知人)을 찾자면 만천 명이 넘을 것이고, 그 허다한 사람 중에 누가 아닌지를 어떻게 갈라내는가?』

『지인 중에서 좀 수상한 사람을 뒤를 염탐하면 알아도 질겝지만……』

여기서 한명회는 그 방식이 너무도 우활하고 막연한 점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역시 나으리 입산위승(入山爲僧) 합시거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뒷말은 짐작이 가는 바다. 뒷말을 꺼냈다가는 모가지 달아날 말이었다.

『여보게, 나더러 승이 되라는가?』

물론 승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수양이 승이 되고 한명회는 상좌가 되고자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한생원답지 못하게 무슨 좋은 꾀가 생각나지 않는단 말인가?』

『글쎄옵니다. 일이 궁실에 관련되니, 소인네 같은 하천배는 속수무책이옵니다.』

그날은 그만하고 아무 해결도 없이 명희는 돌아갔다. 그러나 이튿날 또 명회와 권남이 동반하여 수양을 찾아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나으리, 아까 정경(正卿: 권남의 字)이 일부러 소인 집을 찾아와서 걱정하는 말이, 어제 소인이 나으리께 올린 그 사연이옵니다.』

먼저 한명회가 이렇게 하는 말에 이어서 권남도 말하였다.

『하두 민망하고 걱정스러워, 자준(子濬: 명회의 子)이에게 의논했습더니, 자준이도 시방 걱정 중이옵니다.』

『그래, 한 사람의 꾀보다 두 사람의 꾀를 합하면 좀 나을 테니, 합의한 바 어떤가?』

두 사람은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신숙주의 일러바친 꾀─ 양암 중의 왕께 납비를 계청해서, 이로써 일방으로는 신상에 모여드는 잡언까지 피한다 하는 것은 너무도 상식 외요 상식 이상의 것이라, 좀체 쉽게 생각해 내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위인의 우열의 일단은 짐작이 갈 수가 있었다.

수양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저윽이 바라보았다.

『음, 내게 이미 방책이 섰으니……』

『어떤 방책이오니까?』

두 사람의 입에서 한꺼번에 나온 질문이었다. 수양은 미소하였다.

『누설키 좀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소인네들이야……』

『누구에게도……』

『네이!』

한명회가 고개를 숙였다. 명회는 알아챈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든─ 어떤 기밀에 속하는 일이든 비밀이 없는 자기네들에게까지도 누설을 못 하겠다는 것은, 즉 비밀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상호간에 비밀은 없었다. 그러면 그것은 비밀히 해야겠다는 일이라기보다 입 밖에 꺼내기, 입에 올리고 옮기기가 어려운 일─ 즉 휘(諱)에 붙여야 할 일─ 왕과 관련되는 일─ 이만치 내려오면 한명회의 머리는 능히 그 뒤를 추측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권남보다는 한명회가 나았다. 수양은 넉넉히 알아보았다.

『그럽지만 유신(儒臣)들이 반대를 않으리까?』

알아챈 명회의 물음이었다.

『그러기에 이모저모로 발설을 말라는 게 아닌가?』

아직도 무슨 눈치를 못 챈 권남은 눈만 두리번거렸다.

『안 사람은 기위 알았지만 모른 사람은 그냥 몰라 두게.』

권남은 몰랐으면 모른 대로 참으란 뜻이었다.

『나으리, 무슨 일이오니까? 소인도 좀…… 자준이 뭔가?』

권남은 싱겁게 웃으면서 물었다.

『몰라 두게, 몰라 두어. 알게 될 날이 있겠지.』

수양도 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직 왕께도 말씀드리지 않은 책비 문제로되, 이 종실의 어른 양녕대군께는 미리 여쭈어서 그 의견을 듣고 싶었다. 수양은 그 일로 일부러 잠간의 틈을 내어 백부를 찾았다.

『백부님, 전하께 국모 영립을 계청할까 하는데, 백부님 의향이 어떠십니까?』

다짜고짜로 이 말부터 꺼냈다.

『글쎄, 양암 중 윤허하실 것 같으냐?』

『네…… 그래도 우러릅기 민망해서 애써 계청할까 하는데요.』

『궁실의 공허도 공허려니와, 다른 일로도 나도 그 뜻을 가졌었다마는, 양암 중이시니……』

다른 일로도? 수양은 백부를 쳐다보았다. 보면서 물었다.

『다른 일이란 무에오니까?』

『네게 이즈음 좋지 못한 풍설이 돌아 너는 못 들었느냐? 그만치 말하면 짐작하리라마는, 그런 풍설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가장 첩경이 국모 영립인데 그러니 신자의 액화 피하자고 국모 영립이란 사리에 떳떳하냐? 그래서 말 못 하고 있었고……』

수양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세상을 달관한 백부는 역시 생각이 그리로 및는구나! 책사 모사라는 한명회며 권남 배는 역시 그릇이 크지 못했다.

양녕은 그냥 말을 계속하였다.

『또 간간 예궐해서 용안 우러를 때마다 가슴에 선뜩선뜩 놀라는 일이 있구나?』

?─

『무에오니까?』

『성궁 근래 갑자기 성숙하시어. 아아, 소년의 성장이란 장마 뒤 외 같더구나!』

이 달관한 노인은 수양 자기도 생각도 못한 방면을 걱정하누나!

『백부님, 아이 참……』

백부님이 섭정을 해 주시면 이 나라는 참 행복되겠습니다. 이 말이 입술에까지 다 나왔다. 양암 중이라 하여 왕비 영립을 안 했다가 이 성장하신 조카님의 청춘이 다른 곳으로 뻗으면─ 궁녀 삼천은 임금의 시앗─ 기다리는 꽃에 나비 앉지 말라는 것은 천리를 어기는 법이다. 양암 중 왕비 영립이 예의에 벗어난다 해서 꺼리다가, 양암 중의 임금이 궁녀를 가까이하여 만고의 죄인이 되게 하면 이것이 예절에 온당하랴? 춘추 풍부하여 그 생각의 및는 바 아직 자기 따위로는 따르지 못하겠다.

이 여러 가지의 문제가 다만 왕비의 영립이라는 한 가지의 일로 모두 한꺼번에 해결이 된다.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책비는 어서 해야겠다. 책비로서 〈되는 일〉 때문에보다도 책비를 게을리했다가 〈저지를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날짜가 급하다.

이미 다 간 이 해나 지나서 새해가 되면 길일(吉日)을 택해서 결행하기로 하자.

백부 양녕을 찾기 때문에 수양은 납비를 더 급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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