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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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편집]

다사다난한 계유년은 지나갔다. 갑술(甲戌)년 정월─

정월 초순도 지나고 대보름이 어느덧 다 되었다. 초순 중순도 절반이나 가서 정월 열나흗 날─

이해의 풍년을 약속하는 듯이 어제 종일 내리부은 함박눈은 뼘이 넘게 쌓였다. 그 반사광(反射光)으로 온누리는 눈이 부시게 상쾌 명랑하고 오늘은 씻은 듯이 개인 날씨에 빛나는 해는 천지를 감쌌다.

이날 수양은 조카님께 납비(納妃)를 계청하였다. 순서로는 묘당에서 의논하여 왕께 헌의 계청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은 그 순서를 밟지 않았다.

묘당에 의논하려면 이 유자(儒者)─진실한 〈유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의 모임은 묘당에서는 순순히 수양의 뜻대로 진척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넉 달만 더 지나면 탈상(脫喪)을 하는데, 무엇이 급하여 양암 중에 납비를 한단 말이냐? 일만 가지 죄악 중에 〈불효〉를 으뜸죄로 꼽는데, 양암 중의 납비라 하는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느냐? 유주(幼主)를 좋이 보좌는 못할망정 무슨 까닭으로 불효를 짓게 하려느냐?

입 놀리고 이론 캐는 데 들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이 나라 신료들이요, 그 위에 〈유자〉를 표방하는 그들이거니, 결코 의논이 순순히 진척되지 않을 것이었다. 열 사람이면 여덟 사람은 반대하는 축이 될 것이었다.

조카님으로 보자면 분명히 여인에게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계시다. 왕비 영립을 싫어하시거나 피하시지는 결코 않을 것이다. 은근히는 기뻐하실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체면이라 하는 것이 있어서,

『어서 그럽시다.』

고는 차마 못 하실 것이다. 사양, 거절 혹은 엄비가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 거절이나 사양에 대해서 그냥 조르고 간청하면 못 이기는 체하고 윤허가 내리실 것이다. 못 이기는 체하고 윤허하시도록 이편에서 질기게 졸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료 중에 납비 반대자가 많으면 왕이 〈못 이기는 체〉하실 좋은 기회를 드리기가 힘들 것이다. 왕이 〈좀 더 졸라 주면〉 하여 은근히 희망하며 표면 사양하실 때에, 신료 중에서 납비 반대자가 나타나면 반대자의 의견을 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예의에 어그러진 일에 대하여 당신도 반대하는데, 게다가 역시 반대하는 신료까지 생기면 어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과인(寡人)도 싫고 반대하는 신료도 있기는 하지만, 이편 (공으로는 수상(首相)이요, 사사 의로는 숙(叔)되는) 수양대군의 의향이 납비하는 편이니 그 의향을 좇읍시다.』

라고야 할 수 있으랴?

여기서 수양은 일 진행 순서를 거꾸로 하기로 하였다. 자기 혼자서 먼저 조카님의 윤허를 받고─ 아니 억지 써서 떼내고 그 뒤에는 어내락(御內諾)이 있다 하여 좌우의정(정인지, 한확)에게도 동의시키고, 신숙주를 내세워서는 집현전 선비 중에 좀 활달한 견식을 가지고 있는 무리─박팽년 성삼문, 이개, 최항 등등─에게 시국 태세를 설명하여서 책비가 최대 급무인 것을 이해케 하고 권남, 한명회 등으로 하여금 역시 〈소절(小節)〉보다 〈대의(大義)〉를 이해할 만한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이렇듯 묘당의 대체의 형세를 책비 찬성 측으로 돌린 뒤에, 그때 묘당의 총의를 거두고 그로써 왕께 간청─아니 간청을 하여 왕의 〈지는 체하는 윤허〉를 얻으려는─ 이런 순서를 밟기로 하였다.

이렇게 허다한 사람에게 동의를 시키기 위해서는 〈왕의 내락이 있다〉는 무기(武器)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겠다.

〈내락이 있다〉는 보도(寶刀)가 없이는, 우선 좌우의정을 비롯하여 유자를 표방하는 신료를 한 사람도 동의를 얻기가 힘들 것이었다.〈불효〉를 최대 죄악으로 여기는 그들이 어찌 임금께 불효합시사는 계청을 동의하랴.

초조반(대궐에서는 조반을 〈초조반〉이라 하여 먼저 진언하고, 점심 좀 전에 〈아침 수라〉를 진어한다)을 방금 끝내고 상쾌한 반사광을 가득 받은 내전이 식후에 휴식을 할 때에, 수양은 조카님을 내전에 뵙고 〈국모 책립〉을 계청하였다.

수양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왕은 깜짝 놀랐다. 무론 돌아가는 천리(天理)에 벗어나지 못하여, 왕도 새해에 열넷─ 여인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호기심도 일기 비롯하였고, 그의 묘한 생김생김에 접촉할 때에 쾌감을 느끼고 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를 얻는다〉는 지식까지는 아직은 발생되지 못한 소년이었다. 더욱이 아직 양암 중이니 그런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생각지 못할 바이어늘─

『숙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여기 대하여 수양은

─궐내가 공허하여 성심 고적한 것.

─거두어 드리는 이가 없어서 불편이 많으신 것.

─대내에 감독자가 없어서 규칙이 문란한 것.

─선왕의 독자 되시는 입장에서 사직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계사(繼嗣)가 급한 점.

─관민이 모두 국모 없음을 걱정하는 점,

등등을 이유로 책비가 중하고 급한 일임을 다시 아뢰었다.

왕은 고요히 안정을 닫았다.

『참 숙부님도! 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난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해본 일도 없었어요.』

『그러시올 겁니다. 그러나 중차급(重且急) 하옵니다. 명일 정부에서 계청하겠사오니 윤허해 주옵소서.』

『명일이오?』

왕은 다시 깜짝 놀랐다. 이렇게 급할 줄은 이 역시 꿈 밖이었다.

그러나 수양은 보았다. 왕이 닫았던 안정을 다시 뜨며 반사광이 서리어 있는 영창을 바라볼 때에, 그것은 한순간이요, 또한 지극히 막연하였으나 용안을 스치고 지나간 한 점의 광채와 입가의 움직인 미소의 그림자를

『네, 명일이옵니다. 어내윤만 내리오시면 시재로라도 계청할까 하옵니다.』

『그렇게 급하오니까?』

『좋은 일은 생각난 때에 해야지, 지체할 게 있습니까?』

『그렇지만─ 넉 달만 더 있으면 대상인데, 그렇게 급히 할 게 뭐오니까?』

『전하께 경사오며 종실에 경사오며 국가에 경사오니, 대상 뒤까지로 왜 밀리까? 속히 내윤을 내립시다.』

왕은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그 접촉미(接觸味)도 상쾌하던 〈여인〉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잠재할 동안은 모르겠더니, 수양이 뚱기쳐 놓으니 꽤 강렬히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왕은 역시 거절을 하였다.

『숙부님, 넉 달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을 무슨 필요로 그다지도 다급해서 천하의 죄인이 되리까?』

이것은 수양이 오래 생각해 본 일이지만, 적당한 대답을 아직껏 얻지 못한 바였다. 넉 달만 더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왕이 분부해서라도 할 일을, 무에 급해서 〈천하의 죄인〉이라는 더러운 지목을 받으면서까지 급급히 일을 진척시키려느냐?

전하께서 너무 급속히 장성하여서, 잘못하다가는 하늘의 시키는 본능대로 행동하셔서 궁녀 유신(有身─妊)이라는 불상사가 생기면 더 큰 불효올시다─ 어찌 감히 이렇게야 복계하랴.

하물며 신께 근래 해괴한 풍설이 항간에 떠돌아 신 송구 무지하온데, 전하 납비만 하오시면 이런 패설은 자연 복멸될 것이옵니다.

신을 위하와 납비합시사─ 이런 몰염치한 계청을 하랴.

여기서 수양은 책임의 일부분을 백부되는 양녕대군께 돌렸다.

『신이 일에 관하와 그 의향을 양녕대군께 듣자왔더니, 대군의 말씀도 국모 영립을 최양책으로 삼으시고 최양책일 뿐더러 최급사라 하옵니다. 양녕대군은 우리 종실의 으뜸 어른이실 뿐더러 희세의 현인, 현인의 말씀 그러하오시니 전하 숙고하와 속결합소서.』

『글쎄. 나도 양책인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옛날 성현의 가르치심까지 어기고 급히 할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그려』

『신은 전하를 위해 올리는 말씀이오니 전하께서……』

『그것도 잘 알아요. 다만 넉 달을 밀지 못할 까닭만 모르겠습니다.』

수양은 딱하였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물리치면 거기 대해서는 우기고 조를 뱃심도 있고 그만 각오도 미리 한 바였지만, 〈넉 달을 연기하지 못할 까닭〉은 딱하였다.

까닭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여쭙지 못할 〈까닭〉이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용안에 움직이는 표정으로 보아서 조카님의 마음이 수양 자기의 상상했던 이상으로 〈아내 맞이〉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알았다. 소위 〈연기하지 못할 까닭〉 비슷한 것이라도 생기면, 조카님은 〈어윤〉의 하비(下批)가 내릴 것도 알았다. 억지로라도 그 〈까닭〉이라는 것을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하, 조생모사의 이 인간 세상에서 좋은 일이면 생각나는 그 즉시로 해야 하지 않으리까?』

이것이 그 〈까닭〉이 될까? 그런데 여기 반응이 있었다.

『그렇다고 온 유신(儒臣)들의 말썽, 또 천년 후까지 상중 납비라는 더러운 이름을 청사에 남기고……』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 만년지계를 위해서는 종권환길(從權還吉)하온 전례는 사상(史上)에 비십비백(非十非百)이옵니다. 하물며 계사지중(繼嗣之重)과 창생 열망의 지중 막대하온 일이오니 살피지 않나이까?』

그렇다고─ 그것은 이왕 이미 몇천 번이나 잘 알았다고 한 일이다─ 속히 해야 된다는 까닭은 역시 없다.

그러나 왕의 비답은 차차 더 끌렸다.

『그래도 말썽이 듣기 싫어요. 너덧 달만 더 기다리면 무사할 일을……』

『그 말썽은 신이 담당하오리다. 결코 전하께까지 및지 않도록……』

비슷비슷한 말이 오륙 차 더 거듭되었다.

마지막에 종내 왕께서는 이런 하비가 있게 되었다.

『종사가 중하니 납비를 하기는 하다만, 그래도 세상의 말썽도 귀찮거니와 상인(喪人)의 몸으로 차마 마음이 냅떠지지를 않습니다그려. 그 위에 선─ 선대왕 생각을 하자면 자식된 도리에 상중 납비─가 웬─ 웬일이오이까?』

눈물지는 모양이었다.

『전하, 전 영립도 선대왕 전하의 영을 위로드리는 일이옵니다. 어서 궁호 주인을 맞으소서. 원자 탄생키 전에는 선대왕의 영이신들 어찌 명목을 하시오리까? 선대왕은 성조 영묘(聖祖英廟─세종대왕)의 독고(獨孤)옵시고 전하 또한 선대왕의 독고─ 전하 어서 원자를 못 보시오면 태조 대왕을 비롯하와 대대의 조선(祖先)의 영께 무에라 받들어 사뢰리까? 천만 적자의 응당 또한 이를 수 없습니다.』

『아아! 세상이란……』

납비하겠노라는 명확한 비답은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만했으면 묘당이 계청하면 물론 몇 번의 거절은 있을 것이다.

『좋도록 하라.』

는 윤허가 내릴 만치 되었다.

『그간 신처(臣妻) 윤씨가 혜빈 양씨와 협력하와 민간 규수를 물색하온 결과로써, 여산인(礪山人) 송현수(宋玹壽) 댁에서 국모에 부끄럼 없는 한 규원을 찾았습니다. 가납하시옵소서.』

왕은 다시 깜짝 놀랐다. 왕비(장래의)까지 벌써 물색을 하단?

『성수 무강하옵시고 성대 만천억으로 창성하소서.』

수양은 어전을 물러나왔다.


곤전 영립에 관한 수속은 일사천리의 세로 진행되었다.

우선 좌우의정이었다. 좌의정 정인지는 유자로 자처하느니만치 수양께 노염까지 내면서 반대하였다. 국상 중 국혼이란 웬 말이냐고 펄펄 뛰면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의 내락까지 있다는 위에 무슨 의견이 한 번 꺼냈다가는 움칠 줄 모르는 수양의 성격을 아는 정인지, 자기가 솔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만을 밝힌 뒤에는 뒤로 빠지고 말았다. 우의정 한확도 내락이 있다는 데는 다시 할 말이 없었다.

유신(儒臣)들을 설복할 책임을 진 신숙주는 또한 자기의 책임을 잘 치렀다. 신숙주가,

『이 사람이면 대의(大義)와 예의의 말절을 구별하리라.』

감정하고서 유세한 사람들(성삼문, 박팽년 등)은 숙주의 말뜻을 이해하고 납비의 필요를 인정하고 숙주의 말에 동의를 하였다.

유신이 아닌 문사(文士)들을 달래러 돌아다닌 권남이며 한명회들도 제 책임을 잘 치렀다.

수양이 조카님께 납비의 내락(?)을 얻은 정월 열나흗날 낮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열엿샛날 저녁에는 벌써 골라낸 사람들은 다 동의를 얻었다.

이리하여 그 열이렛날 수양은 곤전 책립 계청건(啓請件)을 묘당에 내어놓았다.

미리 교섭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 양암 중에 왕비 책이 웬 말이냐고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더 놀란 것은 이 건(件)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은 일이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펄펄 날뛰며 목숨이라도 내어던져 반대의 차자, 상소, 상계, 직간, 온갖 수단을 다 쓸 사람들이, 다만 침묵을 지킴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의 찬성하는 의향을 보이는 데는 아연하여, 벌린 입을 닫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좀 반대하던 사람들도 이 의외의 일에 반대 용기도 잃어서 잠잠하여 버렸다.

그 저녁으로 왕께 계청을 하였다.

종친을 대표하여 양녕대군이 노구를 이끌고 나서고, 정부를 대표해서는 좌우의정이 나서고─ 이리하여 임금께 조르기 시작하였다.

왕은 윤허를 안 하였다. 그러나 수양을 안타깝게 하던 문제(넉 달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이리 급히 서두는가)는 꺼내지 않았다.

효도에 벗어나는 일이라 이 단 한 가지로 거절하였다.

이튿날 또 그 이튿날 연하여 사흘 동안을 졸랐다. 종내 왕에게서

『그리 조르면 초지(初志)를 지킬 수가 없으니 좋을 대로 합시다.』

하는 분부가 내렸다.

스무날은 승지가 송현수(장차 국구가 될)의 집에 이르러, 그대의 딸을 궁중으로 책봉한다는 내지를 전달하였다.

스무하룻날을 건너서 스무이튿날은 왕의 종조부(세종대왕의 중형이요 양녕대군의 중제) 효령대군이 호조판서 조혜(趙惠)를 데리고, 옥책보장(玉冊寶章)을 받들고 송현수의 집으로 갔다. 말하자면 청혼 서간이었다.

동시에 환길(還吉)까지 하였다.

아직 대상은 넉 달이나 남아 있지만 오월 십사일에 문종 승하) 기위 책비까지 하였으니 거상(居喪)은 무의미한 일이라, 단상(短喪)을 하여 이 곤전 책봉일부터 탈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거기 대하여 예조 참의 어효첨(魚孝瞻)은 직을 예조에 받고 있느니만치 예로써 다투어,

『종사의 대계라 하면 국모 영립은 또한 부득이한 일이지만, 단상까지 하여 선대왕의 영으로 하여금 공궤 없이 대상을 지나시게 하리오?』

라고 버티었지만, 이미 책비가 결정이 된 오늘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예의 말절의 쓸데없는 잔소리에 지나지 못하였다.

오월 스무하룻날부터는 백관(百官)이 모두 길복(吉服)으로 출사하고, 백성들도 모두 탈상을 하였다. 세종 승하 때에 복을 입기 시작하여 문종 말년에 잠깐 탈상을 하였다가 다시 문종복을 입던 이 나라 백성들은, 오래간만에 소년의 대의 탈상에 안심의 숨을 길게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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