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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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돌아보건대 당신의 업적은 그만하였으면 적지 않았다. 태조 이씨조선을 창업한 이래, 이씨조선의 자리를 튼튼히 잡기에 급급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사정은 아직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을 당신이 등극한 이래 삼십 년간에 모두 대략 꾸려 놓았다.

문치(文治)의 방면으로는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도들을 양성하는 일방, 혹은 역사를 편수하며, 삼심법(三審法)을 세우며,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며, 농서(農書)를 발간하며, 음악 제도를 세우며, 천문 지리에 관한 온갖 기구를 만들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으며, 한글을 창제하며─이러한 문치 방면의 업적과 아울러서 국방(國防) 방면으로는, 육진을 설치하며, 오랑캐를 쫓으며 등등, 문무 양반으로 이씨조선은 이 왕 이십 년간의 업적으로서 인제는 과도 건설기(過渡建設期)를 지나서 찬란한 문화국으로 진보되었다.

이만한 업적을 남기고 왕은 동궁으로 하여금 섭정케 하고 당신은 물러앉았다. 왕이 동궁께 대리를 부탁하고 제일선에서 물러앉을 때는, 다만 한 사람 신뢰할 만할 재상 황희는 벌써 구십이 가까운 노인이요, 그 밖의 재상들은 일기일능을 가졌지만 기와 능이 집대성한 큰그릇은 없었는지라, 장래 이 나라의 주인 될 동궁이 직접이 일기 일능의 재상들을 거느리고 구사해야 할 형편이므로, 당신 생존 중에 동궁으로 하여금 대리왕(代理王)의 지위에 오르게 하여 당신이 직접 손을 잡고 지도하여 동궁에게 왕도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당신의 그 능란한 솜씨로 일일이 동궁을 지휘하고 지도하여 왕노릇하는 법을 사소한 점까지 교수하였다.

그러면서도 왕에게 그냥 마음이 안 놓이는 것은 동궁의 천성이 하도 나약하므로 왕이 몸소 지도하는 일 가운데도 좀 억센 일을 매우 거북해 하며 어려워해 하는 것이었다. 좀 억세게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아버님 왕께 슬며시 떼밀어 맡기고 하였다. 이것이 왕에게는 퍽 근심스러웠다.

왕은 둘째 아드님 수양도 늘 대궐로 불러 들여서 동궁께 북면해서 섬기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게 하려 노력하였다.

수양의 성격이 본시 억센지라, 형 되는 동궁을 떼밀어 가면서 일을 꾸며 나아가는 양을 뒤에서 보며 왕은 흔히 남모르게 미소하였다. 미소하면서도 왜 순서가 바뀌지 않았느냐고 탄식하곤 하였다.

그런데 동궁은 마음이 나약하기 때문에 수양에게 늘 눌리면서, 눌리고서는 역정을 내고, 내심 매우 수양을 싫어하고 투기하고 의심하는 것이 왕의 마음에 절실히 꺼리었다. 수양은 자기 딴에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신념으로서 형 되는 동궁께 무슨 진언을 하면, 동궁은 도리어 권리를 침해당한 듯이 뾰롱해지고 하는 것이었다.

어떤 날(그것은 왕이 막내아드님 되는 영웅대군 댁을 별궁으로 하고 거기 거처하는 때였다) 왕은 좀 늦도록 집현전에서 젊은 학도들과 언문을 토론하다가 늦게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손자님을 잠깐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시종들은 길가에 멈추어 두고 당신 혼자서 자선당 쪽으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들어가려다가 멈칫 섰다. 때마침 전내에서는 동궁의 음성─무엇을 책망하는 듯 위협하는 듯한 심상치 않은 동궁의 음성이 새어 나오므로, 왕은 멈칫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 다음에는 삼가─ 삼촌은 무서운 사람이야. 알었느냐?』

그것은 동궁이 세손을 훈계하는 것으로서, 요컨대 동궁의 아드님인 세손(世孫)께 삼촌 수양대군을 삼가고 경계하라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왕은 가슴이 선뜩하였다. 온몸에 냉수를 끼얹은 듯 소름이 쭉 돋았다.

왕은 황황히 소리 안 나게 발을 돌이켰다. 도망하듯이 그곳을 피하였다.

그 밤이 새도록 왕은 잠을 못 이루고 이리저리 뒤채며 고민하였다.

『이 일을 어쩌나.』

차차 눈에 보이게 더욱 더 동생을 미워하고 의심하는 동궁의 괴벽한 심사를 어찌하나. 지금은 당신이 생존해 있거니─ 그러고 당신이 그냥 왕위에 있거니 문제가 크지 않거니와, 당신 천추 후에 세자가 즉위하기만 하면 노골적으로 수양을 괄시하고 괄시를 넘어서 박해까지라도 할 것이었다. 그 위에 동궁 자신뿐 아니라, 세손에게까지도 그 사상을 부어 넣어 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수양 없이 세자뿐으로 넉넉히 이 재상들을 조종하여 나아갈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두어서 비로소 그 기능이 발휘될 것이다. 아무리 재사라 할지라도 자리를 잘못 잡으면 무능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 적재를 적소에 뽑아 두기도 동궁으로서는 좀 어려운 일이겠거니와, 적소에 있다 할지라도 위에 있는 사람의 힘과 장려함이 있고야 비로소 제 기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동궁 혼자 뿐으로는 도저히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수양을 괄시해서 불행히 동기간에 유혈 참극이라도 생기면 이것은 이씨 사직에까지 영향될 무서운 일이다. 전일 이 왕의 백형 양녕대군이 선왕께 득죄하고 이천(利川)에 내려가 있는 동안, 왕은 흔히 동교(東郊)까지 나아가서 배소(配所)의 형을 그리고 모셔다가 잔치를 열어 형제의 의를 늘 두텁게 유지하기에 애썼다.

그 뒤 배소에서 돌아온 뒤에도 늘 금중(禁中)에 청하여 주안을 나누며 연락을 같이 하여 형제의 의를 더욱 두텁게 하여 왔다.

이런 일 등도 모두 사실에 있어서는 도궁에게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더욱 강조함이었고, 동궁께 보여서 동궁으로 하여금 형제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어늘 동궁은 어쩐 셈으로 부왕의 그런 행교(行敎)를 보면서도 깨달음이 없는가.

수양도 형님 되는 동궁이 자기를 꺼리고 싫어하는 것을 물론 알 터이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굴매, 모를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꾸준히 입궐하여 형님께 이렇다 저렇다 싫어하는 말을 하는 것은 오직 신도(臣道)를 다하려 함일 것이다. 이 수양의 심경을 생각하고 또 동궁의 싫어하는 심사를 생각할 때에 왕은 세상 보통 아버지로서의 번민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라.』

탁 폐사(廢嗣)하여 버리고 수양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기만 하면 뒷 근심이 없어질 듯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까닭 없이 적장(嫡長)을 폐한다는 것은 장래 영원히 왕위 계쟁의 원인이 될 것으로서 이것도 할 일이 못 된다.

성주라는 일컬음을 들은 이 왕도, 가정적으로는 늘 불안하고 불쾌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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