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초저녁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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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일환아!

신약 성서에 이런 비유가 있는 것을 너는 알지?

주인이 길을 떠났다. 떠날 때에 주인은 세 종을 불러서 돈을 얼마씩 나누어 맡겼다. 주인이 길을 떠난 뒤에 한 종은 그 돈을 꽁꽁 싸서 땅에 잘 묻어 두었다.

거기 반하여 다른 두 종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큰 이를 보았다.

몇 해 뒤에 주인이 돌아왔다. 세 종은 다 주인 앞에 나왔다.

「당신이 주신 돈을 잘 보관하여 두었다가 지금 당신께 도로 바칩니다.」

돈을 땅에 묻었던 종은, 그 돈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두 종은,

「주신 돈으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아서 지금 이렇듯 곱이나 됐읍니다. 자 받아 주십시오.」

하고 본전의 곱되는 돈을 주인 앞에 내어 놓았다.

주인은 세 종을 번갈아보았다. 먼저 장사하여 이익 본 종을 칭찬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이렇듯 작은 일에 충성되었으며,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있다. 들어와서 나와 같이 즐거움을 누리자.」

하고 많은 상까지 주었다.

이번은 본전을 가져온 종에게 향하였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외다. 나는 당신을 두려워하여, 그 돈을 그냥 잘 두었다가 가져왔읍니다.」

이렇게 말하는 말에 주인은 노기가 등등하여,

「이 악한 종아, 내가 굳은 사람인 줄 알진대, 그 돈을 변이라도 놓았다가, 내가 돌아오거든 본전과 변을 가져올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고 그 종을 어두운 밖으로 내어쫓았다. 이 비유의 뒤에 성경에는,

「대개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느니라.」

고 하였다.

이것은 무론 예수교의 복음을 많이 전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전도장려(傳道獎勵)의 뜻에서 나온 비유다.

그러나 일환아!

그 비유는 잘못하다가는 사람의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비유다.

물론 주인에게서 맡은 돈을 잘 처리를 해서 늘려 가지고 도로 주인에게 바친 종은 용한 종이다.

그러나 다른 종의 행동도, 곧 나쁘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일이다. 잘못 실수를 하여서 본전까지 잃었다가는 오히려 안한 것만 못한 일이매, 위태로운 일을 피하고, 그 돈을 든든히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바친 행동을 어찌 게으르다고 책망하여 버릴 것이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고지식하고 정직한 이 종은, 주인에게서 맡았던 돈을 손해 안 보기만 위주를 하여, 든든히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영리하고 날쌘 성질을 못타고 난 이 종은 고지식하게 그 돈을 그냥 맡아 두었다가 도로 주인에게 바친 것이다. 그러면 그 행동은 과연 책할 만한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일환아!

아버지는 너에게 말하노니, 네가 만약 이후에라도 그 종의 당한 일과 같은 일을 만나면 너는 그 돈을 늘려서 많은 돈을 만든 종을 본받지 말고 오히려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바친 고지식한 종을 받아라.

영리한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 많다. 많고 많아서 귀찮을이만치 많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정직한 사람은 초저녁의 별과 같이 그 수효가 얼마가 못된다. 이 귀중한 감성─ 나는 너에게 영리하기보다 고지식하게 되기를 명한다.


2[편집]

아버지의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안이 살던 저택은, 대궐같이 커다란 집이었다. 그 집 변소 앞에 대추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 대추나무는 너의 할아버님이 손수 성(城)에서 떠다 심고 가꾸시던 나무였다.

봄이 되면 파란 꽃이 피었다. 거기 다닥다닥 열린 대추 알은, 가을이 되면 그 나무를 통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아직 그다지 늙지 않은 나무로서, 키는 훌쩍 자라서 열 다섯 자가 되게 되었지만 가지는 가늘고 약하였다. 그래서 그 대추를 따려면 대추나무에 노끈을 매어서 잡아당겨 기역자로 굽힌 뒤에야, 높은 곳의 것은 손을 대는 것이었다.

그 나무는 너의 아버지와 너의 삼촌이 늘 따 먹어서, 아랫 동아리 우리 키가 자라는 곳에선 벌써 대추가 다 없어진 어느 때 일이었다.

그때, 한창 장난꾸러기의 여남은 살쯤 났던 아버지는, 너의 삼촌과 의논을 한 뒤에 바를 내어나가 대추나무 꼭대기에 걸어 놓고, 두 아이의 힘으로써 껑껑 나무를 굽혔다. 대추나무는 구부러져 내려왔다. 그러나 한참 구부러져 내려 오던 나무는 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야, 큰일났다!」

「아버지 봤단 욕먹는다.」

우리 형제는 대추나무가 부러진 것보다 아버지에게 꾸중들을 것이 무서워서 의논하고 의논한 뒤에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른 체하기로 하였다. 물어볼지라도 모른 체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저녁때 너의 할아버님이 돌아오셨다. 그러나 형제는 열심으로 공부만 하고 있었다.

할아버님은 변소에 가셨다. 가셨다가 곧 돌아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셨다.

「대추나무 너희가 꺾었느냐?」

「몰라요. 부러졌읍니까?」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흰 몰라?」

「예, 몰라요─ 보지두 못했는데요. 동평아, 부러졌든?」

「나 몰라.」

이렇게 우리는 딱딱 잡아떼었다.

그때 너의 할아버님의 음성이 조금 달라지셨다.

「거짓말하면 못 쓴다. 꺾은 것은 실수에 지나지 못하나 거짓말은 죄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하였다.

「흥, 우린 알지두 못하는데......」

그때 할아버님은, 한참을 머리를 가슴에 묻으시고 생각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들아, 내 옛말 한 마디 할게 들어라. 미국 대통령 와싱톤이 어렸을 때......」

그리고 할아버님이 그때 하신 옛말─ 그것은 아마 너희도 학교에서 들은 일이 있을 것이다.

와싱톤이 어렸을 때, 이쁜 도끼가 하나 있었다. 그 도끼를 너무 써 보고 싶어서 자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앵두나무를 찍었다. 와싱톤의 아버지는 와싱톤에게 누가 찍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와싱톤은 정직하게 자기가 찍었노라고 대답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듯 정직했기에, 장성해서 미국 제일대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신 뒤에,

「자 이제 다시 물을 게 대답해라. 대추나무가 부러진 걸 너희는 모르느냐?」

고 또 물으셨다.

너의 아버지는 약빠르게 생겼었다. 그래서 그냥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그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우리가 꺾었노라고 하고 싶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직껏 모른다고 한 체면상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보다는 얼마간 고지식하고 정직한 너의 삼촌은 마침내 울먹울먹하며,

「우리가 꺾었어요.」

하고 자백을 하였다.


3[편집]

너의 삼촌은 곧 자백을 한 덕으로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는 더 큰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때 비록 어린이의 자존심으로 꺾었노라고 자백은 안하였지만, 말씀은 아버지의 뇌수에 깊이깊이 새겨졌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비 오는 날, 우리 집 행랑 사람이 내 우산을 빌어 쓰고 어디 나갔다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실수로 우산살을 하나 꺾었다.

무론 할아버님은 새 우산을 다시 하나 사 주시기는 하였다. 그러나 내 우산을 꺾은 그 원한은 내 어린 마음에 살지 않았다.

얼마 뒤 행랑 사람이 자기네의 우산을 하나 사들였다. 그것을 안 나는 즉시로 그 우산을 훔쳐 들여왔다.

훔쳐 들여왔다고 무론 쓰지는 못할 것이다. 꺾어 버리자니 남 모르게 버릴 곳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 사람의 눈이 뜨이지 않는 곳에 감추어 두었다. 그리고 나도 어느덧 그 일은 잊어버렸다.

일 년이 지났다. 무슨 서류를 찾노라고 방방이 구석구석을 뒤지시던 너의 할아버님은, 어떤 모퉁이에서 알지 못할 우산 하나를 얻어 내었다.

나는 할아버님의 앞에 불리었다.

「이게 웬 우산인지 모르느냐?」

나는 우산을 보고 가슴이 뜨끔하였다. 뒤를 따라서 모른다는 대답이 나오려 하였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울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울음에 섞인 소리로 지난 일을 정직히 자백할 때에, 할아버님은 한 마디의 꾸중도 안하실뿐더러, 빙긋이 웃으시며 내 정직을 칭찬하여 주셨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마음에는 할아버님이 뿌려 주신 〈정직〉의 씨가 차차 크게 자란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차차 장성하면서, 너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본 것은 무엇이던가?

일환아!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아버지의 마음은 너무 쓰리다. 어렸을 때에 할아버님의 가르치심으로 〈정직〉이라 하는 도덕을 마음속에 간직한 너의 아버지가, 차차 자라면서 이 세상에서 본 바는, 너무도 많은 영리함과 너무도 많은 부정직함과, 너무도 많은 속임수였다.

영리하고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은 흥하였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사람은 쇠하였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부정직한 사람은 흥하고 고직식한 사람은 쇠하였다.

차차 장성하면서 이 세상의 이렇듯도 모순된 것을 보고, 아버지는 오히려 할아버님의 가르치심을 속으로 원망하였다.

천성이 약고 약빠르게 생기고도, 너의 할아버님의 교훈 때문에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변하여진 아버지가, 자기의 차차 쇠하여 가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할아버님을 원망하였다. 우리 집안 어떤 웃어른은,

「너는 아직 천진이야! 다시 말하자면 덜 났단 말이다. 그래 가지고 지금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고 비웃기까지 하셨다.

이런 가운데서, 아버지는 흔히 이제라도 자기의 성질을 다시 고칠까 하는 생각이 늘 들고 하였다.

그러나 일환아!

아버지의 나이가 삼십이 넘어서부터, 아버지는 세상이란 것을 넉넉히 꿰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생각하였다.

비록 쇠하여도 좋다. 남에게 덜 났다고 비웃겨도 좋다. 아무리 남한테 웃기울지라도 아무리 쇠해 갈지라도, 마음이 고지식하고 정직할 동안은 마음에 근심이 없는 법이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한 때의 흥망을 말할 것이 아니라, 영구한 마음의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한하여 열리는 것이니라.


4[편집]

여기 아버지는 너를 위하여 한 이야기를 쓰겠다.


시대는 현대─

곳은 어떤 도회─

거기 등장하는 인물은 고주사라 하는 마흔 살 남짓한 무역상을 하는 사람의 내외와, 그의 집 서기로 있는 이현수라는 사람과 박두식이라는 두 젊은이─

고주사는 그 도회에서 상당히 크게 무역을 하는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하였지만, 그 재산으로 그의 지식, 그의 지혜가 허락하는껏, 온갖 무역에 손을 뻗치어 그 재산을 더욱 커다랗게 하였다.

사십이 지나도록 아직 자식을 못 보아서 그것 때문에 슬하는 매우 적적하였지만, 집안의 적적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장사에만 더욱 힘을 써서, 그의 이름은 그 도회 실업계에는 상당히 크게 되었다.

그에게는 두 사람의 서기가 있었다. 한 사람은 이현수라는 일본 어떤 사립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이며, 또 한 사람은 박두식이라는─ 이 사람 역시 우등은 못되나마 일본 어떤 사립대학 상과를 나온 사람이었다.

현수는 약빠르고 영리하고 민첩한 사람이었다. 두식이는 씩씩하나 소와 같이 느리고 소와 같이 둔하고 소와 같이 굳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을 채용할 때에, 고주사는 두 사람을 다 같은 시험을 보였는데, 그 시험에 응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가장 쉽겠으므로 그것을 여기 쓰려 한다.

주인은 먼저 현수를 시험해 보았다. 시험이라야 다른 것이 아니다.

고주사가 현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방에, 하인이 무슨 봉한 종이곽(紙函)을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 곽을 받아서 고주사는 현수에게 내어맡겼다.

「속에 뭣이 들었나 좀 꺼내 보게.」

현수는 그 곽을 받았다. 그리고 앞뒤를 한 번 본 뒤에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쭉 째어서 가운데 든 것을 꺼내었다. 그때 고주사는,

「왜 봉한 것을 뜯고 찬찬히 펴 보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거기 대하여 현수는,

「곽 값보다 시간의 값이 더 많을까 해서 그랬읍니다. 곽의 봉을 뜯는 시간을 값으로 치면 곽 여러 개를 살 수가 있겠읍니다.」

고 대답하였다. 민첩하고 눈치빠른 것을 위주하는 무역상인지라, 고주사는 현수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그 뒤에 고주사는 두식이의 시험을 보았다. 그 때도 현수 때와 마찬가지로 하인이 곽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 곽을 고주사는 두식이에게 주며 역시 뜯어 보라 하였다.

두식이는 그 곡을 받았다. 그리고 찬찬히 앞뒤를 보고 조심히 흔들어 보고, 위와 아래를 손톱으로 튀겨 보고 한 뒤에, 봉한 것을 침을 발라 가면서 가만가만 뜯었었다. 그것을 보고 고주사는,

「왜 시간 걸리게 그렇게 뜯는가? 칼로 배를 가르면 그뿐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두식이는 대답하였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미리 짐작이 가면이어니와, 상하기 쉬운 물건이 들었다가는 실수하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게다가 조그만 노력과 조그만 시간만 삭이면 곽까지 곱게 보존이 안 됩니까?」

고 하였다.

파손하기 쉬운 물건도 많이 다루는 무역상인지라, 고주사는 두식이도 채용하기로 하였다.

두 사람의 성격은 이와 같았다. 현수는 민첩키 짝이 없었다. 두식이는 둔한 대신 끈끈하였다. 이 두 가지의 성격이 서로 잘 어울려서 고주사의 장사는 날로 번성하였다.


5[편집]

고주사의 경영하는 상회의 이름은 고상회였다.

현수의 날카로움과 두식이의 직함을 아울러 가진 고상회는 나날이 번성하였다. 게다가 때가 또한 때였다. 때는 바야흐로 구주 전쟁의 뒤 세상의 경기는 전무후무하게 좋은 때였다.

현수는 진실로 날카로왔다. 어디 무엇이든 글거리만 생기면 곧 달려들었다. 현수가 달려든 일에서는 반드시 적지 않은 이익이 나고 하였다. 현수의 수완이 너무도 날카로와서, 그의 이름은 어언간 이 도회의 무역상 사이에 유명하게 되었다. 고주사의 고상회냐, 현수의 고상회냐 이런 말이 있도록 현수는 사업에 민첩하였다.

온갖 사업에 이렇듯 민첩한지라, 고주사는 마음놓고 모든 일을 현수에게 맡겼다. 때때로 장부를 뒤적여 보는 뿐, 고주사는 장사의 내용에 대하여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한대야 도저히 현수를 따를 수 없을 것이요, 간섭하면 간섭하느니만치 현수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방해밖에는 생길 것이 없을 것이다.

고상회의 자본은 십만이 못 되었던 것이 현수가 들어온 뒤로는 부쩍부쩍 늘어서, 어언간 백만을 바라볼 수가 있을이만치 되었다.

현수가 이렇게 빛나는 데 반하여 두식이의 그림자는 아주 엷었다. 고상회 한편 구석에 앉아서 정부나 보는 것─ 이것이 두식이의 일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같은 서기라는 명목으로 고상회에 들어온 두 사람이었지만, 한 사람은 고상회를 대표한─ 뿐 아니라 이 도회의 무역계에서 나이는 젊지만 무서운 수단가라는 일컬음을 듣는데, 남은 한 사람은 씩씩 상회 구석에서 장부나 뒤적이고 돈이나 세고 있을 뿐이었다.

주인은 때때로 두식이에게도 의논을 하여 보았다.

「지금 ×× 한 톤에 ○○원을 한다는데 좀 사 두면 어떨까?」

그러면 두식이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글쎄올시다, 장래에 이로울 가망이 있으면 사시는 편이 좋겠지요.」

「자네 의견은 어떤가? 오를 것 같은가?」

「글쎄올시다. 이군 말을 들으면 오르리라는데요.」

그리고는 제 맡은 직책인 장부를 또 뒤적이는 것이었다.

무역상의 서기로 있으면서 오늘은 몇 만원 남겼다. 어제는 몇 천원 남겼다, 이런 말을 늘 듣는 두식이되, 돈에 대하여는 아주 마음도 안 두는 모양이었다. 때때로 무역상의 사무원끼리 모여서 서로 그 이익을 이야기하며, 자기네의 몫으로도 돈벌이를 하자는 의논을 하되, 두식이는 늘 거기서 빠지곤 하였다. 다만 그는 또한 돈을 싫어하지 않는 증거로는, 고상회에서 받는 봉급을 겨우 검소한 생활비를 제하고는 꼭꼭 저금을 하는 것이었다.

두식이는 현수의 수완을 믿었다. 그 날카로움을 늘 탄복하였다. 현수의 주장으로 고상회가 많은 돈을 남길 때마다 제가 그 일을 한 듯이 기뻐하고 하였다.

「이군 참 용하오! 어쩌면 그렇게 오를 줄 미리 알았소?」

그는 정직한 미소를 띠고 현수에게 이렇게 치하하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현수는 자랑스러운 듯이 동료를 굽어보고 하였다. 사리가 여사여사하니 오를 게 당연하지 않소? 하면서, 자기의 명석한 머리를 자랑하곤 하였다.

거기 대하여 두식이는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6[편집]

현수의 민첩함은 넉넉히 두 사람의 값을 하였다. 두식이는 오직 굳고 든든함을 위주하였다.

두식이는 이 고상회에서 아주 그림자 엷은 사무원이었다. 주인 고주사도 단지 두식이는 한 둔하고 정직한 인물로 여기고 그 고지식하고 둔함을 늘 칭찬하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이 땅의 경기는 더욱 좋았다. 사람들은 차차 사치하여 가서 그 멎을 곳을 몰랐다. 백성이 사치하여 감을 따라서, 〈박래품〉 〈박래품〉하며, 온갖 것을 모두 서양의 물건만 쓰고 서양의 물건만 사들였다. 그 때문에 이 땅의 돈은 연방 서양으로 몰려 나갔다. 물건을 모두 서양 것만 쓰고 지내는 얼마 뒤에는, 이 나라의 돈은 거의 다 서양으로 밀려 나가서 정부의 내막은 아주 텅 비어 있었다. 겉으로는 그냥 사치한 생활을 계속하지만, 내용으로는 이 땅에는 돈이라는 것은 차차 줄어갔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모두 외국의 물건만 사들이는지라, 이 땅의 공업이라는 것도 차차 쇠하여 갔다.

일환아!

여기서 아버지는 너에게 〈금〉이라는 것에 대하여 잠깐 써 보겠다. 금과 돈의 관계와 이 나라의 금과 다른 나라의 금의 관계를 조금 써 보겠다. 이것은 읽기에 흥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이 뒤에 말하려는 말을 네가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서는 〈금〉이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흥미 없는 말이라도 잠시 참고로 읽기를 바란다.

어느 나라에서는 (한두 개 특별한 예외를 제하고는) 정부에서 금을 사들여서 그것으로 금전을 만들어 둔다. 그리고 금전이 있는껏 같은 수효의 지폐를 발행하여서 민간에서 그것을 쓰도록 만든다. 금전은 무겁고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니까, 첫째로는 경편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둘째로는 금전은 한 번 잃으면 그냥 땅 속에 묻히어 버려서 그 나라의 돈이 없어지지만, 지폐는 잃을지라도 원 〈틀돈〉인 금전이 그냥 있는 한에는, 거기 대한 지폐를 다시 발행할 수가 있으니까, 돈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하여 지폐를 금전의 대신으로 쓰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폐라는 것은 금전에 대한 한 〈표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지라, 저희 나라 안에서는 서로 저희 나라를 신용하는 백성이니까 지폐로도 넉넉히 통용하지만 외국에 대하여는 지폐로는 사용치 못할 것이다. 외국은 그 나라를 사용치 않는지라, 외국에 갚을 돈은 반드시 원 〈틀돈〉인 금전으로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와 나라가 서로 금으로써 거래를 할 동안은 서로 금의 값은 똑같은 것이니, 이 땅에서 십 원어치의 금은,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만한 값에 통용되는 것이다.

그런지라, 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은 즉 그 나라는 돈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이요. 금을 많이 가졌다 하는 것은 그 나라가 부자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 만약 자기 나라의 물건은 잘 쓰지 않고, 연방 외국의 물건만 사 들이면, 그 나라의 금전은 죄 외국으로 나갈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는 가난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자꾸 금이 외국으로 나가면, 그 나라에서는 〈금을 외국으로 못 가져가게〉 하는 법령을 내리는 것이다. 금을 외국으로 가져가려면 반드시 정부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법령으로서, 금을 외국에 못 나가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금 수출 금지(金輸出禁止)〉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문제는 〈가령 이 때에, 외국에 돈을 꼭 보내야 할 일이 생기면,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7[편집]

돈은 보내야겠다. 그러나 손에 금은 없다. 여기서 위체(爲替)라 하는 것의 필요가 생겨난다. 말하자면 돈 대신 증권을 쓰는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외국 위체를 가진 사람은, 언제든 필요할 때는 그것을 금과 바꾸어서 자기 나라와 같은 값으로 쓸 수가 있지만, 한 나라가 금 수출을 금지한 경우에는, 자연히 그 나라의 위체는 즉시 현금이 못될 것이다. 언제든 그 나라로 가야 할 돈과 상쇄할 수가 있을 때에야 그 위체는 제 값을 할 것이다. 따라서 금 수출을 금지한 나라의 위체는 값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 나라의 위체가 떨어지는 것은 그 나라의 돈이 다른 나라보다 싸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에는 한 냥쭝에 오십 원을 하던 금이, 그 나라의 돈의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육십 원, 칠십 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동시에 그 나라의 돈의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외국 물건은 비싸지고, 외국 물건이 비싸지므로 백성들에게 잘 쓰이지 않고, 그 덕에 그 나라의 공업은 융성하여지는 것이다.

일환아!

〈금 수출 금지〉에 대하여 이만치 개념적 지식을 너에게 주고, 아버지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이 땅의 사치한 풍속이 너무 심하여 가고, 외국 물건이 너무 수입되고, 그 때문에 금이 너무 외국으로 흘러나가므로, 그때 정부에서는 금 수출을 금지할까 말까 하는 말이 매우 성하였다. 금 수출을 금지하면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금은 막을 것이요, 자기 나라의 제조 공업은 흥할 것이지만, 자기 나라의 돈의 값이 떨어지므로 거기서 받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금 수출을 금지하기 때문에 얻는 이익과, 그 때문에 입는 손해를 잘 비교해 본 뒤에야 할 것이다.


8[편집]

한창 정치가들은 이것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연구할 때에, 어떤 날 현수는 조용히 주인 고주사를 찾았다. 그리고 이 기회에 외국 위체를 많이 사기를 주장하였다. 필시 금 수출 금지는 될 것인데, 그럴진대 외국 위체를 지금 많이 사 두기만 하면, 이후 금 수출 금지령이 내려 이 나라의 돈 값이 떨어지면, 큰 이익을 보리라는 것이 현수의 주장이었다.

현수의 수완을 신뢰하는 고주사도 이 의견에만은 곧 승낙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금 수출을 금지할까 말까 하는 때문에 외국 위체는 얼마간 값이 올랐는데 그것을 그 상회의 재산을 거의 기울여서 많이 샀다가 덜컥 수출 금지령이 나지 않으면 그 손해는 매우 클 것이었다. 차차 재계가 어지러워 오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벌써 꽤 큰 손해를 본 고주사는 이 가장 위험한 일에 손을 대기가 무서웠다.

고주사는 주저하였다. 현수는 몇 번을 자기의 의견이 꼭 들어맞을 것을 말해 가면서 주장했지만, 고주사에게서는 종내 승낙이 안 내렸다.

「좀더 지내 보고─」

이만치 대답하여 두었다.

날카로운 현수였다. 주인이 주저한다고 그냥 잠자코 있을 현수가 아니었다. 이삼 일 내로 결정이 날 노릇, 꿈질거리다가는 이런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칠 것이다. 얼마간 손해를 본 고상회를 다시 넉넉히 일으킬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현수는 드디어 결심하였다. 주인이 모르게 일을 결행하자, 반드시 자기의 의견이 들어맞을 것인데, 주인이 모르게 이 일을 결행하고, 이익이 난 뒤에 주인 앞에 내놓고 한 번 뽐내어 보자.

이렇게 결심하고 현수는 주인의 앞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이번은 철궤를 맡은 두식이를 찾았다.

현수는 두식이에게 의논하였다. 현수에게는 절대로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두식이는 또 한 절대로 현수 자기의 수완을 믿고 있다. 그래서 현수는 두식이를 몰래 찾고 이제 수삼일 내로 반드시 금 수출 금지령이 날 것이라는 말부터 하였다.

두식이는 그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줄 아네.」

여기서 현수는 지금 외국 위체를 많이 사 두면 큰 이익을 볼 것을 설명하였다. 두식이는 역시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줄 아네.」

고지식하고 직한 두식이가 혹은 머리를 가로 젓지나 않을까고 근심하였지만, 이렇게 말마다 머리를 끄덕이매 현수의 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고상회가 그 사이 얼마간 손해 본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손해를 보충하기에는 지금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니 꼭 놓치지 않고 해 봐야겠다는 말을 하고, 거기 이어서 지금 주인 모르게 이 일을 하여서 이익을 남긴 뒤에, 그 이익을 주인 앞에 내어 놓고 한 번 뽐내어 보면 어떠냐고 말의 골자를 이야기하였다.

그랬더니, 두식이는 한참 머리를 숙이고 생각을 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좋은 의견일세. 그 새 십여 년을 잘 써 주신 고주사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좋은 일이네. 그렇지만 우리에게 웬 외국 위체를 많이 살 만한 돈이 있나? 자네는 모르겠네마는, 내게는 십 년 동안 푼푼이 저금한 이삼천 원밖에는 돈이 없는데 그것만으로야 무얼 하겠나? 그거라도 되기만 한다면 즉시로 내놓기는 하겠지마는......」

현수는 두식이의 이토록 고지식한 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여보게, 우리 저금 몇 푼 가지고야 무얼 하겠나? 그─ 말하자면 자네는 이 고상회의 철궤를 맡지 않았나? 주인은 우리를 절대로 신임하니깐 이삼 일간만 좀 그 돈을 이용한단들 알지도 못할 일일세 그려. 그것도 우리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르지만 고상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깐, 이삼 일간만 그 궤를 우리 마음대로 열세─」

이 말에 대하여 두식이는 눈을 크게 뜨고 마땅치 않다는 듯이 현수를 보았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주인께 모르게 돈을 이용한다는 것도 (아무리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안될 일이거니와, 나는 대체 그런 일을 한다는 것부터 찬성을 못하겠네. 정부에서 대체 금지할지 안 할지도 미상한 노릇을 금지하리라 짐작하고 산다는 일을 찬성 못하겠네. 그런 일에 돈을 쓰려고 주인이 철궤 문을 열라고 해도 내가 철궤를 맡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못 열 것이야.」

이 대답에 대하여 현수는 다시 질문하여 보았다.

「그래도 아까 자네 저금을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네! 그건 이 고상회가 있는 동안은 나는 굶지는 않을 것이니까, 여기서 얻은 돈을 내버리면 내버리고, 요행 이익이 나면 지기(知己)의 은혜 갚아볼 양으로 그런 게지, 다른 사람이 하려면 난 머릴 싸매고 막겠네.」

고지식한 두식이었다. 고지식하니만치 또한 고집이 세었다. 한 번 머리를 흔들기 시작하면 이제 주인이 와서 철궤문을 열라 해도 절대로 열지 않을 두식이었다.

영리한 현수는 이제는 두식이를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두식이에게서도 실패한 현수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는 절대로 놓치기가 싫었다. 두식이에게서 물러나와서 혼자 앉아서 이리 궁리 저리 궁리 하는 동안, 이 영리하고 눈치빠른 현수의 마음에는 또 다른 계획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계획은 절대로 틀림이 없을 최후의 계획이었다.


고상회의 민원의 사무원으로서 현수의 이름은 너무 높았다. 그 신용으로 고상회의 명의로 현수는 될 수 있는껏 많은 빚을 내기로 하였다. 그 빚을 계약금으로 해서 할 수 있는껏 많은 외국 위체를 사려 하였다.

이 계획은 조금도 틀림없이 즉시 실행되었다. 주인도 모르게 동료 두식이도 모르게 많은 외국 위체를 샀다.

현수가 이렇게 한 이튿날 정부에서는 금 수출을 금지하였다. 이 땅의 돈값은 놀랍게 떨어졌다. 외국 위체는 우적우적 올랐다. 사오 일 이내에 현수는 수십만 원의 돈을 잡았다.

이 돈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주인의 앞에 올 때는, 현수의 얼굴은 자랑과 비웃음으로 빛났다.

「자, 받으십시오. 그때 그것을 말리셨지만 눈이 보이는 이익을 놓치기가 아까와서, 제가 몰래 빚을 내어 가지고 이번 일을 했읍니다. 손해를 보면 저 개인의 손해로 모른 체하고 이가 나면 바치려고 했던 일이 요행히 적지 않은 이익이 났읍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번은 동료 두식이를 돌아보았다.

「그 때 두식군에게 몰래 철궤 문을 좀 열어 주기를 부탁했더니 딱 잡아떼었지요? 두식 군, 자 어떤가? 그때 열어 주었더면 지금 자네도 이 기쁨을 함께 맛보지 않겠나?」

이런 비웃음에 대하여 두식이는 아무 애교도 없는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용하이! 그렇지만 아무리 이익이 났다 해도 난 아직껏 그 일을 옳게 못 보네. 나는 그런 공교로운 요행수를 바라고 돈을 건다는 것은 아직도 찬성 못하네. 그런 일을 해서 돈을 남기니보다는 가만 있어서 본전대로 가지고 있는 편에 가담할 테야!」

주인은 이 두 사람의 의견에 대하여 아무 비평도 가하지 않았다. 현수의 민첩함은 더욱 탄복할 만하였다. 그리고 그 남긴 돈을 모두 주인의 앞에 내어놓은 것도 또한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식이의 굳은 고지식함에도 탄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민완의 현수가 〈꼭 이익이 날 테니 이 사업을 해 보자〉 할 때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사람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거늘 굳은 두식이는 그것을 떼었다. 뿐더러, 저 혼자서 그 일을 감행을 하여 큰 이익을 본 뒤에 두식이에게 그것을 자랑할 때에도 두식이는 꾸준히 그 일이 찬성 못할 일임을 주장하였다. 이 고지식함은 고상회의 철궤 쇠를 맡아 가지고 있기에 넉넉하였다.

현수의 민원의 덕으로 그 사이 꽤 손해를 보았던 고상회는 다시 보충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금 수출 금지를 한 것은 정부의 큰 오산이었다. 외국 물건이 비싸지면 자연히 외국 물건은 사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기 나라의 제조 공업이 왕성해지고, 그것이 왕성해지면 돈도 흔하여지리라는 정부의 예산은 모두 틀려 나갔다.

외국 물건의 값이 오르기 때문에 자기 나라 물건도 멋없이 따라 올랐다. 물가가 오른지라 사는 사람이 적었다. 사는 사람이 적은지라 물건은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가 났다. 그래서 제조업자들은 물건을 적게 제조하기에 힘썼다. 적은 물건을 만드는 데는 많은 직공은 쓸 필요가 없었다. 직공을 자꾸 내어쫓았다. 직업을 잃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경기는 더욱 나빠졌다. 경기가 나쁘기 때문에 물건은 더욱 안 팔렸다.

이리하여 정부는 제조업이 흥성해지리라고 한 노릇이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무서운 불경기에 회사와 공장은 연하여 넘어졌다.


10[편집]

이 놀라운 불경기에 고상회라고 그냥 뻣뻣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현수의 민첩함이 있고 두식이의 굳음이 있을지라도, 고상회도 마침내 이 불경기의 대세에는 안 쓸려 들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가장 불경기에 영향을 받기 쉬운 무역상이었다. 한 번 기울어지기 시작한 뒤에는 끝날 바를 몰랐다.

이전 돋아오르는 해와 같이 나날이 번성해 갈 때는 현수의 민완은 더욱 고상회로 하여금 빨리 자라게 하였지만, 쓰러지기 시작한 뒤에는 현수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전에 현수에게 전권을 맡기어 두었던 주인은 상회가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뒤에는 몸소 들어와서 상회의 일을 잡았다. 자기가 잡으면 좀 나아질 듯하여서였다. 그러나 현수의 날카로움으로도 어찌하지 못한 이 대세를 주인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기울어지는 동안 이 년이 지났다. 다 넘어지고도 겨우 겉으로만 세상을 속일 동안 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삼 년째는 마침내 넘어지고야 말았다. 한 때 번창함을 자랑하던 고상회도 드디어 파산을 한 것이었다.

파산을 하기 며칠 전에 주인은 두 사무원을 조용히 불렀다.

「자네네도 아다시피 나는 이젠 파산이야. 여러 말 해서 무얼 하리. 내가 이 지경만 안 됐으면 자네들이 나갈 때 상당한 사례라도 하려구 그랬지만, 지금 이 지경에서 어떻게 하겠나? 자 이건 적은 돈이지만 이건 주인의 마지막 전별인 줄 알고 받아 주게. 그리고 이 뒤는 다른 좋은 주인을 얻어 만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상점을 내거나 해서 잘 살게. 부디 나같이 되지 말고......」

하면서 한 사람의 앞에 천 원씩을 내어 놓았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두식이는 주인이 내어놓은 돈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그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 돈을 넣을 때는, 그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약은 현수는 한참을 주인의 앞에 놓인 돈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고맙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까지 우리 생각을 해 주시니 황송해서 드릴 말씀이 없읍니다. 그러나 저는 이 돈을 못 받겠읍니다. 이 돈이 만약 주인님께서 영업이 흥하실때 같으면 오히려 적다고 나무램까지 하겠읍니다만, 이런 지경에 계시면서 주시는 돈을,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을 어떻게 받겠읍니까? 자 도로 받아 주십시오.」

「이군, 이군이 그렇게 말하니깐 더 부끄럽네. 아무 말 말고 받아 주게. 자네네 신세로 말하면 참 부끄러운 것이지만 지금 형편이 이러니까......」

「전 못 받겠읍니다. 그 사이 입은 은혜만 해도 갚을 길이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겠읍니까? 그냥 두셔서 무엇이든 쓰십시오.」

「어서 받게! 부끄러운 돈일세.」

현수는 그냥 못 받겠노라 하였다. 고주사는 그냥 받으라 하였다. 한참 서로 이렇게 밀 적에 고지식한 두식이가 말을 끼었다.

「이군, 영감도 그만치 그러시는데 그만 받아 두게. 우리가 그 사이 이십 년 동안이나 여기서 일을 했는데 영감 생각에야 그것만 주시고 싶겠나? 할 수 없이 적은 돈이라도 주신다는 걸 안 받으면 외려 영감께서 미안하시지 않겠나? 아무 말 말고 받게.」

못 받겠노라고 믿고 있던 현수는 힐끗 두식이 그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못 받겠다는 말도 받겠다는 말도 없이 잠잠하여 버렸다.

이튿날부터 이 두 사람은 벌써 고상회의 사무원이 아니었다. 고상회는 며칠 뒤에 마침내 파산의 선고를 받았다.


11[편집]

한 때는 백만에 가까운 재산과 커다란 저택과 커다란 상회를 가지고 있던 고수사는 고상회를 잃은 뒤에는 한 가난한 노인에 지나지 못하였다.

재산과 상회와 저택을 모두 빚 주인에게 내어맡긴 고주사의 내외는 이십 여 년을 살던 정든 저택에서 쓸쓸히 쫓겨나왔다.

「어떡허려우?」

정처 없이 길에 나서서 아내는 제 늙은 그 지아비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할 수 있소? 사람이란 굶어죽지는 않는 법! 길 향하는 데로 갑시다.」

「자식도 없고─ 늙어서......」

「헐 수 없소. 운명이니......」

이리하여 이 늙은 내외는, 죽기까지에 그래도 먹고 살 집을 구하노라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한 뒤에, 시골 어떤 먼 일가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비록 자식이 없어서 그 때문에 쓸쓸은 하였다 하나, 아무 부자유가 없이 지내던 이 늙은 내외가 찾아간 시골 친척이란 역시 가난하게 지내는 집이었다.

늙은 내외는 거기서 얻어먹고 있었다. 벌써 늙은 몸이라, 농사 짓는 그 집의 일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였지만, 그것도 못하고 지어 주는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이것이 늙은 내외에게는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 집도 가난하여 겨우 굶지 않고 지내는 집, 거기 두 몸이 갑자기 의탁을 하니 그 집에서도 여간 곤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 한 동안은 그래도 반가운 듯이 대접했지만, 제 발잔등에 불이 있을 때에 사람은 남의 일을 돌볼 여유가 안 생기니 차차 쌀이 이전보다 빨리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여가매, 그 집에서도 때때로 좋지 않은 낮을 하였다.

「이 달은 한 섬이 보름도 못 가서 다 없어졌네.」

이 말은 지나가는 예사의 말이었는지, 혹은 고주사의 내외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밖에서 하는 주인 마누라의 이런 말이 들릴 때는, 늙은 그 지아비는 얼른 머리를 숙이고 하였다. 그것은 이제 자기에게로 올 아내의 눈을 보지 않으려 피하는 것이었다.

「이 담부터는 밥좀 적게 짓지.」

주인 아내의 말에 대하여 주인 그 지아비가 이렇게 대답할 때는 고주사의 늙은 내외는 한참 숨까지 죽이곤 하였다. 벌써 늙은 몸이라 먹는대야 얼마를 먹으랴마는 고주사 내외는 배를 줄여 가면서 밥을 적게 먹었다.

이젠 세상의 온갖 감정을 모두 거의 잊은 늙은이였지만, 조용한 방에 누워서 잠 안오는 눈을 서로 비비며 있을 때는 두 늙은이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원망할 이가 없는 처지였지만, 이 세상이 새삼스러이 원망스러웠다.

「여보!」

때때로 밤중에 늙은 그 지아비는 제 아내를 찾았다.

「왜 그러우?」

「우리 강으로라도 들어갑시다.」

『속 시원히 강으로라도 들어가는 편이 낫겠소.」

이러한 외롭고 아픈 여생을 보내는 동안에 엎친 데 덮친다고 그 해는 몹시 흉년이 들었다. 고주사 내외의 기류하는 집에서도 금년엔 종자도 거두지 못할이만치 흉작이 되었다.

여기서 주인의 학대는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어떤 때는 자기네끼리만 밥을 먹고 고주사의 내외에게는 슬쩍 거르는 일까지 있었다. 이 학대는 원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학대를 하지 않을 수 없을이만치 가난한 주인에게 고주사 내외는 더욱 미안하였다.


12[편집]

어떤 날 밤, 고수사 내외는 의논한 끝에 마침내. 그 집을 몰래 빠져 나왔다. 나가노라고 한들 붙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주인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내외는 말없이 그 집을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로?

그들은 다시 이전에 자기네가 살던 도회로 가려 마음먹었다. 그 곳으로 간단들 먹을 것이 있으랴만, 그래도 오래 호화로이 살던 그 곳을 가면 그때 은혜 입은 사람들도 있는지라, 그들에게 늙은 몸을 의탁하여 보려고 그리로 향한 것이었다.

고주사 내외가 다시 도회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이전 그의 집에 있던 현수와 두식이도 다 그래도 제 길을 찾은 뒤였다. 일찌기 고상회의 민완의 사무원으로 알려져 있던 현수는, 어떤 다른 커다란 회사에 지배인으로 들어가게 되어, 남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때였다. 그리고 고지식하고 직하던 두식이는, 여러 해 모아 두었던 돈과 고주사의 파산할 때에 준 돈으로 조그만 가게를 하나 차리고, 그 날 그 날의 생활에는 그다지 곤핍치 않게 지내는 때였다.

고주사 내외는 도회에 들어와서 두 사람의 거처를 알았다.

고주사는 아내를 여관에 남겨 두고 혼자서 먼저 현수를 찾았다. 그때의 두 사무원 가운데 지금 좀더 나은 살림을 하는 사람을 먼저 찾은 것이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세요?」

현수는 깜짝 놀라며 고주사를 맞았다.

「그 사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오래간만일세. 부끄러우이. 그 사이 시골 친척의 집에 가 있다가 그 집도 너무 곤란한 모양이기에 행여 여기 나오면 좀 나을까 하고 다시 나왔네.」

「아이구 무척이도 늙으셨읍니다. 왜 부족하신 것이라도 계시면 저한테 편지라도 안하셨어요? 저도 남의 고용살이를 하는 몸이라 많이야 못 돕겠지만 성의야 없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현수는 저편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손에 봉투 하나를 들고 다시 나왔다.

「부끄럽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저도 고용살이하는 몸이니깐 몰리기가 여간이 아니올시다만, 몇 달에 한 번씩은 전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셈으로─ 실례올시다만 조금씩은 도와 드리겠읍니다.」

고주사는 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현수의 내미는 봉투를 받았다.

받기는 받았다. 그러나 왜 그런지 마음이 꺼림칙하였다. 현수의 너무 말이 많은 것이며 몇 번을 〈고용살이하는 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일종의 예방과 같이 생각되어 받기는 받으면서도 마음이 몹시 꺼림칙하였다.

「고마우녜,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받아 가네.」

그리고 고주사는 좀더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현수를 작별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요?」

아내가 이렇게 묻는 데 대하여 대답하지도 않고 고주사는 먼저 아까 현수에게서 받은 봉투를 뜯어 보았다.

속에서는 돈이 나왔다. 일 원짜리 지폐, 지폐, 세어 보니 열 장이었다.

고주사는 탁 치받쳐 올라오는 노염 때문에 하마터면 그 지폐를 모두 찢어버릴 뻔하였다. 고주사는 눈을 감았다. 불유쾌한 감정 때문에 그의 침은 몹시 걸어졌다.

한참 뒤에 고주사는 눈을 가만히 떴다. 그리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 게야. 현수는 신세를 알거든! 전황 때 십 원이라니, 에이 고약한!」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자기를 멀찐멀찐 바라보고 있는 아내에게, 그 돈을 휙 집어던졌다.


13[편집]

고주사는 그 뒤 사흘을 방에 꾹 박혀서 나가지 않았다. 처음의 프로그램으로는 현수에 실패를 하면 두식이를 찾으려 한 것이었지만, 과도한 불유쾌 때문에 두식이를 찾을 용기가 안 났다. 고지식하고 직한 두식이는 현수와 같이 약은 짓은 안할 듯이 보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는 것이며, 더구나 이 전에 들어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매, 이제 두식이를 찾았다가 거기서 또한 현수의 때와 같은 일을 당하면 치욕의 위에 덧치욕까지 하는 것이었다. 고주사는 덧치욕까지는 보기가 싫었다.

그러나 오륙 일이 지나서 현수에게서 받은 성도 좀 삭은 뒤에, 고주사는 드디어 두식이를 찾았다.

두식이는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웬 노인을 잠시 멍하니 서서 바라만 보다가 와락 달려왔다.

「영감, 이게 웬일이세요?」

「자네 찾아보러 왔네!」

「자, 들어가세요. 그 사이 어디 시골 가 계셨다구요. 그때 영감댁의 정리가 끝나기만 하면 저를 찾아 주실 줄 알고 방까지 정히 꾸미고 기다렸는데, 왜 제게는 안 들리시고 시골로 가셨읍니까? 시골은 가까운 일가분이라도 계십니까?」

노인과 청년은 방으로 들어갔다.

「시골 친척네 집에 그 새 있었네.」

「이번에 어떻게 오셨읍니까?」

「자네도 좀 볼 겸......」

「오신 김에 이젠 마님도 모셔 오시고 제 집에 계셔 주세요. 아직 방도 그냥 있읍니다. 원체 가난하니까 대접이라야 훌륭히야 하겠읍니까만, 제 정성껏은 할 것이고, 더구나 다른 것보다도─ 영감 마음 하나뿐인 언제든 편안히 해 드리겠읍니다. 제 집으로 마님도 모시고 와 주세요.」

노인은 두식이의 낯을 바라보았다. 거의 눈물 머금은 눈과 정성의 음성은, 이 고지식하고 직한 젊은이의 얼굴과 조화되어 노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참 대답없이 젊은이의 얼굴을 볼 동안 노인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자네는 죽도록 우리 내외를 보아 주겠나?」

「겉으로는 부족도 있겠지만 마음으로는 정성을 다 해서 섬기겠읍니다.」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나?」

「저는 한 번 먹었던 마음이 변해 본 일이 없읍니다.」

「그럼, 자 이 늙은 몸을 받아 주게.」

이리하여 고주사의 늙은 내외는 두식이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그다지 넉넉지 못한 두식이의 살림이라 물질상 호화는 보지 못하였지만, 늙은 내외는 아주 마음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가, 두식이의 친절한 간호 아래 그들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일환아!

이야기는 끝이 났다.

영리한 현수는 그 뒤에도 이 세상을 교묘히 헤엄쳐서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모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일동 일정은 신문이 매일 보도하였다. 회사의 지배인에서 취체로, 사장으로, 순서 있게 나아간 그는 지금은 여러 회사의 사장, 전무 취체, 감사역 등의 명색을 가진 실업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고지식한 두식이는 여전히 어떤 구석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리고 굶지 않게 지내고 있다.

일환아!

한 사람은 영리하기 때문에 성공하였다. 한 사람은 직하기 때문에 성공을 못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에게 묻노니, 너는 영리한 현수를 훌륭한 사람으로 믿겠느냐? 혹은 직한 두식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믿겠느냐?

비록 물질적으로 성공은 못하였다 하나 두식이의 직한 성격을 귀히 여겨야 할 줄을 너는 알아야 한다.

영리한 사람은 너무도 많다. 직한 사람은 초저녁의 별과 같이 그 수효가 몇이 못된다. 그러나 직한 성격이야말로 초저녁의 별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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