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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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일환아!

「좋은 말은 귀에 쓰다.」

너는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으리라.

아버지가 너에게 향하여 하는 여러 가지의 말도 네게는 쓰리라.

「옜다, 돈 줄께 나가서 사탕이나 사 먹어라.」

「공부는 그만 두고 나가서 놀아라.」

이런 말이나 하면 네 귀에는 늘 달겠지만, 너를 위하여 하는 말은 네 귀에는 쓸 것이다.

「의를 알아라.」

「겸손하여라.」

「생각할 줄을 알아라.」

「동정심을 알아라.」

이런 모든 말은 모두 네 귀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으리라. 그러나 달갑지 않은 말이 오히려 네게는 더욱 귀한 말인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역사를 뒤적여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살피며, 전기를 뒤적여서 실패한 영웅의 말로를 보며, 사회의 기록을 뒤적여서 개인 개인이며 가정의 파멸을 볼 기회가 있으면, 너는 거기서 그 대부분이 좋은 말을 듣지 않은 데서 나온 것임을 알 터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을 하실 때, 온갖 잡념이 그를 괴롭게 하였다. 부귀가 그를 유혹하려 하였다. 영화가 그를 유혹하려 하였다. 명예가 그를 유혹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는 그런 달가운 일들을 모두 물리치셨기에 능히 뒤에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시지 않았느냐?

아첨하는 자의 단 말에 속아넘어가면, 그 뒤에 오는 것은 파멸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고 인생의 기록이 증명하는 바다.

일환아!

너는 단 말에 속아넘어가지 마라.

너는 쓴 말을 싫다 하지 말고 받아라.

사람이란 누구에게든 좋게 보이려는 것! 단 말을 하여 두면 그 사람에게 좋게 보일 것을, 그렇지 않고 쓴 말을 하는 이상에는 쓴 말을 할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 아니냐?

쓴 말을 하면 저 사람에게 당연히 밉게 보일 것을, 밉게 보이는 것을 싫다 하지 않고 쓴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밉게 보이더라도 좋다. 그 대신 행여 저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요행심으로 자기가 비록 밉게 보일지라도 쓴 말을 하는 그 사람을 너는 결코 밉게 보지 말아라. 그리고 그 듣기 싫은 말을 한 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서, 그래도 듣지 못할 말이겠거든 그때 안 들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쓴 말은 반드시 정직하고 충성된 사람의 입에서야 나오는 것이다. 아첨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꿀이 흐르는 듯한 단 말이 나오되, 그 말은 결코 네게 이익되지 못한 말이다. 네 귀에 쓰고 쓴 말이라야 네게는 이익된 말이다.

그러면 일환아!

아버지는 여기 좋은 말을 귀에 쓰다고 듣지 않기 때문에, 나라를 잃고 자기의 지위를 잃고 처자를 잃은, 한 가련한 사람의 실례를 들어서 너에게 보여 주겠다.

충성된 신하의 말을 귀에 쓰다고 듣지 않고 그 신하를 옥에 가둔 뒤에, 하고 싶은 별별 노릇을 다 하다가 마침내 나라를 잃고 그 지위를 잃고 처자를 잃고, 남은 생애를 외로이 남의 나라에서 보내다가 병나서 세상을 떠난 백제 의자왕의 이야기를 네게 들려 주겠다. 「아아, 성충의 말을 들었더면 좋았을 걸!」

의자왕의 입에서 나온 이 탄성은 의자왕뿐의 탄성이 아니라, 충성된 말을 귀에 쓰다고 안 들었던 수많은 사람의 탄성일 것이다.


2[편집]

일천 이백여 년 전의 일이다.

정관(貞觀) 십 오 년, 백제에 의자왕이 등극을 하셨다.

의자왕은 아직 태자로 계실 적에는 아주 현명한 어른이었다. 담기 있고 용맹하고, 게다가 또한 인자하고 정에 두터운─ 아주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이분이 어서 등극하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 너무도 훌륭하고 인자하기 때문에, 해동의 증자(海東曾子)라는 일컬음까지 듣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 적에 이렇듯 현명하던 이가 등극을 하신 뒤에 웬일인지 갑자기 사람이 변하여, 술을 즐겨하고 색을 탐내고 백성에게 가혹한 좋지 못한 임금이 되었다.

그때 백제는 놀라운 강국으로서, 그 강한 군사는 동으로 신라를 침범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누르는 전성 시대였다. 그 강한 나라에 왕으로 오르신 의자왕은 (당시에 나라는 강국이라는 안심에서도 나왔겠지만)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만날 주색에만 놀으셨다.

어떤 나라인들 임금이 주색을 탐하면 나라의 운이 기울어지지 않으랴? 비록 강한 군사는 그냥 있다 하나 나라의 운은 점점 기울어졌다.

왕의 주위에는 아첨하는 신하들의 수가 많았다.

「상감, 오늘은 사냥 가시지요.」

「그럽시다.」

「그저 사냥만 가시는 것은 심심하니 계집을 몇 사람 산 가운데 숨겨 두고 계집을 제일 많이 사냥하는 이에게 상을 주시도록 하시면 어떨는지요?」

「그것 좋은 일이오.」

「상감 만만세나 계시옵소서.」

이와 같은 아첨하는 무리 때문에, 현명하던 의자왕의 마음도 흐리게 되었다. 그리고 만날 술에서 술로, 계집에서 계집으로, 놀이에서 놀이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상감 병영의 녹봉이 밀렸읍니다.」

「상감, ××골에 민원이 많습니다.」

「상감, 신라는 연하여 군사를 기릅니다.」

이런 말들은 왕에게는 시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의리로서 할 수 없이 이런 말들을 들으시다가, 두 번 세 번 조르는 사람에게는 왕은 언제든 벽력같이 고함을 쳐서 내쫓곤 하였다. 그런 뒤에는 또한 연회를 열고 술과 계집의 날을 보내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백제의 국운은 나날이 쇠하여 갔다.

나라의 이 꼴을 보고 몇몇 신하는 속으로 근심을 안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 나라에도 그 나라를 도우려는 몇몇의 충신은 반드시 있는 법이니, 이 충신들은 나날이 쇠하여 가는 국운을 보고는 탄식하고 하였다. 몸에 탈이 났노라고 핑계를 대고 입시를 하지 않는 신하도 여럿이 있었다.

「어쩌면 상감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겠소?」

충신들은 때때로 모여서는 의논하고 하였다.

「글쎄 말이외다. 우리 말을 어디 신청을 하셔야지요.」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도 없지 않소?」

「가만 있지 않자니 어떡하겠소? 한 말씀이 두 말씀 되면 곧 외면하시고 마는 것을......」

그들은 물론 왕께 충간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대야 들으시지도 않을 것이요, 게다가 잘못하다가는 자기의 운명까지 위태로우니까, 제각기 자기네끼리만 걱정을 하지, 왕께 직접 간을 할 만한 용기를 못 내었다.

마음 있는 신하들도 모두 이러할 때에, 한 사람의 충신이 드디어 나타났다. 물이 준 뒤에야 물 속의 바위가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운이 기울어진 뒤에야 충신은 나타나는 것이다. 백제에도 지극한 충신이 있었다.


3[편집]

좌평(佐平) 벼슬에 있는 성충(成忠)은 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보고는 늘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현명하시던 왕께서 어쩌면 이렇듯 눈이 어둡게 되셨는가? 지극히도 눈 밝으시고 지극히도 통촉력이 많으시고 지극히도 인자하시고 지극히도 용감하시던 왕께서, 어쩌면 지금과 같이 변하셨나? 전의 그 이를 왕이시라면 지금의 이 이는 왕이 아니시다. 지금의 이 이가 왕이시라면 전의 그 이는 왕이 아니셨다.

쇠하고 약하여 가는 나라를 돌아볼 때에 성충의 가슴은 늘 우벼내는 듯하였다.

생각하고 생각하던 성충은 어떤 날 마지막 결심을 하고 자기의 아들을 앞에 불렀다.

「부르셨읍니까?」

하며 들어오는 아들을 성충은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아들이 앉는 것을 보면서 오른편에 놓인 종이를 아들에게 내어주었다.

「이것 받아라.」

「그게 무엇입니까?」

성충은 거기에 대답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있다가 아들에게 물었다.

「사람은 몇 번을 죽느냐?」

이 기상천외의 질문에 아들은 멍하니 대답을 못하였다.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은 한 번 죽는다. 한 번밖에는 못 죽는다. 그 대신 한 번은 반드시 죽는다. 너는 아느냐?」

「그건 압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간다면 반드시 죽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너는 아느냐?」

「압니다.」

「죽을 때에 죽지 못하면 죽음보다도 더 창피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것도 아느냐?」

「짐작합니다.」

「그럼......」

성충은 아들에게 준 종이를 가리켰다.

「그 종이를 펴 보아라.」

그것은 성충의 유서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왕께 간을 하려고 결심한 성충은 죽기 전에 그 유서를 아들에게 전한 것이었다. 유서에는 단지 한 마디 〈충성되어라〉 하는 말이 있을 뿐이었다.

아들은 그것을 펴 보았다. 본 뒤에도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알겠느냐?」

「알겠읍니다.」

침통한 문답이었다.

「신라의 양병, 우리 나라의 쇠퇴, 이런 점으로 봐서 멀지 않아 반드시 싸움이 있으리라. 그런데 상감께서는 만날 유흥에만 마음을 두시니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아비의 마음이 이러하니 너는 아무 말도 말고 뒷 일을 맡아 다고!」

「알겠읍니다.」

「이번 입궐하면 십중 팔구는 다시 살아 나오지 못할 몸이다.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낭패하지 말아라. 뒷일은 네게 전부 부탁한다.」

「알겠읍니다.」

「너는 이젠 물러가거라.」

「예......」

대답은 하였지만 아들은 차마 물러가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예......」

「무슨 말이냐?」

「예......」

「자, 해라! 아무 말이든─」

「예......」

성충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성충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감추고 아들을 호령하였다.

「할말이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갈 게지 무얼 꿈질거리느냐?」

그리고 이 호령에 초연히 물러가는 아들의 뒷모양을 바라볼 때,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4[편집]

이튿날, 성충은 특별히 몸을 깨끗이 한 뒤에 입궐하였다. 궁중에서는 그때도 한창 연회가 무르익은 때였다.

성충은 그때 반감이 되신 왕의 앞에 가서 꿇어 엎디었다.

「잠시만 다른 사람을 좀 멀리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말을 이미 짐작하신지라,

「관계 없으니 할 말이 있거든 그냥 하오.」

하고 하인들을 물리치려 하지도 않았다.

성충은 한참을 말없이 엎디어 있었다. 그가 머리를 조금 들 때에는 그의 눈에서는 주먹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상감, 지금이 어떤 때오니까?」

「지금 말이오? 꽃 피고 새 노래하는 때가 아니오?」

「상감!」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하는 듯이 성충은 왕을 쳐다보았다.

「이전의 상감은 이렇지 않으셨읍니다. 그때의 정신을 상께서는 어디다 버리셨읍니까? 동으로는 신라, 북으로는 고구려, 멀리 뒤에서는 당나라가 우리 나라를 엿보지 않습니 까? 상감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 상감의 한 가지의 행동은 곧 백성들이 본받습니다. 상감께서 만날 주탐하시고 나라를 돌아보지 않으시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읍니까? 전에 그렇듯 자애하시고 현명하시던 상감! 상감, 정신을 차리셔요.」

그러나 주색에 이미 그 마음이 깊이 젖으신 상감은 성충의 이 간도 들으시지 않았다.

「좌평은 정신이 없소? 지금 이 태평 세상에서 신라며 고구려며 당나라를 말하는 것을 보니, 좌평은 어젯밤 그런 꿈이라도 꾸었나 보구려? 이 자리는 술좌석이지 그런 토론을 할 자리가 아니니깐, 자 술이나 한 잔 받으오.」

이렇게 말하면서, 왕은 시녀에게 명하여 성충에게 술을 따라 보냈다. 성충은 술잔을 받아 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술잔은 시녀의 얼굴로 향하여 날아갔다.

「신은 술을 먹으러 온 바가 아니올시다.」

성충의 이 행동에 왕은 벌컥 성을 내었다.

「좌평!」

「상감!」

「좌평, 여기가 어디로 알고......」

성충도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오른 발을 들어서 앞에 놓인 술상을 차 던졌다.

「상감! 부왕의 옷깃을 잡고 간하던 성충이외다. 부왕의 유명에 의지하여 상감께 대해서 부왕과 같은 명령권을 가진 성충이외다. 상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왕좌의 길을 가르쳐 올린 성충이외다. 지금 성충은 부왕을 대신하여 상감께 명령합니다. 의자! 의자! 너는 나라를 잊었느냐? 우리 조상에게서 면면히 물려받은 이 사직을 잊었느냐? 지금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이 때에, 너는 주색에 잠겨서 세상을 못 보느냐? 정신 차려라! 정신을 차려라! 네가 사람의 껍질을 쓴 이상에는 좀 더 사람다와라!」

이러한 모욕 앞에 왕의 노여움은 머리털 끝까지 오르셨다. 왕은 벌떡 몸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한참을 과도한 노여움 때문에 몸만 사시나무같이 떨고 계시다가, 좌우를 돌아보시며,

「저, 저 놈을 그냥 둔단 말이냐? 누구 충성된 신하는 하나도 없단 말이냐? 저놈을 저─ 저 놈을......」

왕명에 의지하여 몇 사람의 아첨하는 무리가 성충에게 달려들어서 성충을 결박하였다. 궐에서 결박을 받은 성충은 즉시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5[편집]

성충은 옥에서 온갖 악형을 받았다. 왕의 성충에게 대한 노염은 여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아첨하는 무리라 할지라도 그래도 양심을 얼마씩은 가졌는지라 성충을 차마 악형까지 할 생각은 못하였다. 그러나 성충에게 대하여 몹시 노염을 내신 왕은, 좌우를 독촉하여 성충에게 심한 악형을 가하였다.

며칠을 악형을 받고 몸이 시신이 없이 된 성충은 그래도 끝끝내 왕의 이즈음 행동을 그르다 하였다.

악형과 굶주림 때문에, 성충은 거의 죽게까지 되었다. 거의 죽게 된 성충에게도 악형은 그냥 내렸다. 왕의 노염은 그만치 컸던 것이다. 입궐할 때부터 미리 유서를 써 두고 들어 온 성충인지라, 죽음은 벌써부터 각오한 바였다.

성충은, 자기는 도저히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왕께 한 번 더 간을 하려 하였다. 어떤 날, 성충은 옥사정에게 종이와 접시를 벌어 들였다. 그리고 다시 세숫물을 청하여 소시를 정히 하였다. 그런 뒤에 가운뎃 손가락을 입에 넣고 힘을 다하여 깨물었다.

손가락에서는 피가 쿨쿨 솟았다. 일변 흐르는 피를 접시에 받으면서 성충은 종이를 펴고 그 앞에 단정히 꿇어앉아서 마지막 글을 상감께 썼다.


「사람의 일생은 죽음으로 막음하나이다. 사람이 한 번 났다가 한 번 죽는 것이야 무슨 한이 있사오리까? 다만 죽음에 임하여서도, 났던 값은 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은 잊지 못하옵니다. 상감께서는 소신께 죽음을 주시오되, 소신은 죽기까지 상감의 만수무강과 이 나라의 만수무강을 바라올 따름이옵니다. 소신이 죽음에 임하여 마지막으로 이 글월을 상감께 올림도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이즈음의 세태를 보오매,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난리가 있겠사옵니다. 싸움에 있어서 땅의 이를 얻는 것이 그 으뜸이오매, 만약 싸움이 있을 때는, 상류에 진을 치기만 하면 백만의 적군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겠사옵니다. 신라가 우리 나라를 치는 일이 있사오면 이를 탄현(炭峴)에서 막을 것이요, 적이 바다로 오는 경우에는 기벌포(伎伐浦)에서 이를 막아서, 이 두 군데만 든든히 지키면, 백제의 땅 안에는 외인은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이 두 군데는 부디 명심하시옵소서.다만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죽음에 임하여 상감께 올리는 이 글월은 오로지 소신이 상감과 나라에 바치려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오매, 현명하신 상께서는 한 번 생각하시와, 어김없도록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백제 만만세, 상감 만만세 하옵소서. 소신은 가옵니다.」


「상감께 이것을 올려 주시오.」

옥사정을 통하여 마지막 글을 상감께 올릴 때, 성충의 마음은 비창한 생각으로 찼다. 만약 이 글월로서 상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려지면 성충은 죽을지라도 한이 없었다.

「상감, 마지막 글월이올시다. 그러나, 소신의 죽음으로써 바꾼 이 글월로서 상감께서 이전의 상감으로 돌아오시기만 하면 소신은 혼백이라도 기뻐서 춤을 추겠읍니다. 상감, 통촉하십시오. 소신의 가슴은 쓰라리옵니다.」

글을 상감께 올리고, 성충은 대궐 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은 뒤에 머리를 깊이 가슴에 묻었다.

저녁때 옥사정이 들어온 때는, 성충은 대궐로 향하여 손을 하고 엎드려서 식은 몸이 되어 있었다.


6[편집]

그러나 성충의 이러한 충언도 주색에 빠지신 상감의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성충의 그 글을 본 뒤에, 상감은 더욱 성을 내어 글을 즉시로 찢어버리셨다.

나라는 더욱 어지러웠다. 뿐만 아니라 상서롭지 못한 징조가 수없이 나타났다. 이제 역사상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징조를 대략 말하건대─ 〈삼국유사에서〉

현경 사년 이월에, 많은 여우(狐) 무리가 의자궁에 들어와서 돌아다녔다. 한 마리의 흰 여우는, 어떤 대신의 책상 위에 올라가서 연설까지 하였다.

사월에는 태자궁에 있는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오월에는 사자강(泗沘江)가에 길이 서른 자나 되는 커다란 고기가 흘러왔다.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구월에는 궁중의 어떤 나무에서 사람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나고, 밤에는 궁의 남쪽에서 귀곡성이 났다.

이리하여 소란한 현경 사년은 지나고, 이듬해 봄 정월은 그래도 무사하였으나 이월에 들면서 서울의 우물이란 우물은 온통 다 피빛같이 붉게 되었다. 서해안에는 죽은 고기새끼들이 많이 떠올랐는데, 그것을 먹은 사람은 다 죽었다. 사자강물도 피빛이 되었다.

사월에는, 수없는 두꺼비가 큰 나무에 모여서 울었다. 어떤 때는 아무 일도 없는데 공연히 사람들이 어지러이 도망을 다니고, 이 때문에 넘어져 죽은 사람도 수백 명이요, 재산을 잃은 사람도 수가 없었다.

유월에는 차차 더 어지러워 갔다. 서울의 큰 절 왕흥사(王興寺) 대문에, 어떤 날 큰 배 작은 배가 여러 척 물결에 밀려 왔다. 중들이 모두 놀라서 덤빌 동안 배는 어느덧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자강가에서는 사슴 같은 커다란 개가 궁을 향하여 짖고 있었는데, 그 개가 없어지며 성안의 무수한 개가 미칠 듯이 짖으며 돌아갔다. 그러다가 이것도 어느덧 없어졌다.

어떤 때는, 웬 요귀 한 마리가 궁중에 나타나서 궁이 덜덜 울리는 소리로,

「아아, 백제도 그만이로구나!」

하고는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왕께서 요귀 사라진 곳을 파게 하니, 거기서는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거북의 등에는,

「백제는 만월(滿月) 같고 신라는 신월(新月) 같다.」

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왕께서는 이 글을 이상히 보셨다.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불러서 글을 해석하라 하셨다. 그랬더니 점장이는,

「만월은 장차 기울어질 것이요, 신월은 장차 둥글게 될 것이니, 백제는 다 자라고, 신라는 이제부터 자랄 것을 뜻함이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왕은 이 해석에 크게 노하셨다. 점장이는 즉석에서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점장이를 불러서 해석시켰다.

다른 점장이는,

「만월은 가장 큰 달이니 가장 강성함을 이름이요, 신월은 아직 어두운 것이니 미약하다는 것을 가리킴이올시다.」

고 해석을 하였다.

왕은 이 해석에야 만족하셨다.

이상이 역사에 나타난 백제 말의 어지러운 징조였다.

이것을 그대로 다 믿을까 안 믿을까는 여기서 논의할 바가 아니다. 하옇든 한 나라가 망하려 할 때에 여러 가지의 괴상한 일이 나타나는 것은 고금의 역사가 한결같이 말하는 바다.

이러한 괴상한 징조를 보면서도 왕은 그냥 주색과 유흥만 탐하셨다.백제는 강국이거니 어느 다른 나라가 감히 침범치 못하리라는 것이 왕의 굳은 신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변통이 터져 나왔다.


7[편집]

너는 아버지가 너에게 제일 첫번 들려준 〈소년 부장의 죽음〉을 읽었지? 그 싸움이 바로 이때 일어난 싸움이로다.

강한 백제의 군사에게 늘 수모를 받고 있던 신라는, 이때 백제의 정치가 어지럽다는 것을 알고 지난 해의 원수를 갚고자 당나라에 구원병을 얻어 가지고 백제와 싸움을 돋운 것이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인솔한 십만의 대군과, 신라 대장군 김유신의 오만의 정병이 백제를 향하여 쳐들어왔다.

태평의 낮잠에서 주색만 탐하고 있던 백제의 조정에서는 이 일을 당하여 물끓듯 하였다. 신라의 군사가 웬걸 대단히 백제를 치러 오겠느냐고 단꿈만 꾸고 있던 백제에게는 과연 이 일은 청천의 벽력이었다. 궁중에서는 갑자기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술에 아직도 취한 장군들은 회의를 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먼 길을 온 뒤에 더구나 뭍에서 익지 못한 군사, 두려울 것이 없읍니다. 하물며, 신라 군사는 당나라 군사를 믿고 뽐내기는 하였지만, 당군만 달아나면 싸우지도 못하고 뛸 군사이오니, 어서 군사를 보내서 당군을 물리치도록 하면 될 줄 아옵니다.」

좌평 벼슬에 있는 의직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또한 의직과 달랐다. 신라 군사는 볼 것이 없으되, 당나라 군사는 지금 싸울 생각이 많은 군사니, 그 예봉을 피해서 당군이 저절로 기운이 줄기까지, 임시로 막기나 하는 편이 좋다 하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의견 사이에서 의자왕은 어느 편을 좇아야 할지 갈피를 못차리시었다. 그리고 얼마를 생각하신 뒤에 사람을 보내서 흥수(興首)에게 의견을 묻기로 하였다. 흥수 역시 충성된 재상으로서, 일찌기 왕께 간을 하였다가 그 죄로 멀리 정배를 가 있던 사람이었다. 나라의 사직이 위태로운 경우에 이르러, 왕의 마음에는 비로소 충신의 이름이 생각난 것이다.

홍수에게서는 즉시로 계책의 대답이 왔다. 그것은 이전 옥에서 죽은 성충의 계획과 같은 것이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두 재상─ 비록 몸은 서로 다르나 나라에 쓸 방책은 서로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훌륭한 계획을 다른 대신들은 오히려 웃었다.

「흥수는 정배 가 있는 사람, 상감께 원한은 있을지언정 나라를 생각하는 정이야 어디 있겠읍니까? 그 사람의 계책대로 하였다가는 백제는 필시 망할 것이올시다.」

이리하여 홍수의 계책도 쓰이지를 못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군은 어느덧 백마강도 건너고 탄현의 요해지도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탄현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는 백제의 서울을 진동하게 하였다. 이제는 더 유예할 수가 없어서, 급히 되는 대로 군사를 모아서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이 인솔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십만 대군과 싸우러 나아갔다.

황산의 싸움─ 두 소년 부장의 용감한 행동을 보여준 황산의 싸움은 이리하여 시작되었다.

백제의 군사는 역시 강하였다. 오 천의 적은 군사로 이십만에 가까운 나당의 동맹군을 잘 막기는 막았다. 싸우기를 네 번, 그 네 번을 다 이기기는 하였다. 명장 계백의 지휘와 강한 군사의 용맹으로 막기는 잘 막았다.

그러나, 수효로 보아서 하나가 오십을 당하여야 될 것이어늘 사람의 힘은 하나가 오십은 당하지 못함을 어찌하랴. 마침내는 백제의 군사는 전패하고, 명장 계백은 이 싸움에서 그만 전사하여 버렸다.


8[편집]

땅의 이와 하늘의 이와 사람의 이를 아울러 가진 신라와 당의 동맹군은 황산에서 백제 군사를 짓밟은 뒤에, 그 뒤를 따라서 일로 백제의 왕도를 향하여 몰려 왔다.

그때의 신라의 군사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되었는가는, 아래 기록하는 한 가지의 일로도 넉넉히 알 것이다.

황산의 싸움이 끝난 때, 한 마리의 괴상한 새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그것이 하도 이상해서, 정방은 점장이를 불러서 점을 치게 하였다. 그러매 점장이는,

「이것은 원수(元帥)의 몸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길 징조이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신라 대장군 김유신은 벌컥 성을 내었다.

「무슨 철 없는 소리─ 한 마리의 괴조(怪鳥) 때문에, 천리(天理)가 어그러진다는 것은 당찮은 소리다. 지금 응천, 순인(應天, 順人) 오랜 원수를 갚으려는데 한 마리의 새로서 천리가 구부러진다는 것은 무슨 되지 않은 소리냐?」

하고 칼을 뽑아 들고 그 새를 겨누었다. 즉 훨훨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새가 유신 장군의 위에서 핑핑 돌다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기운이 하늘 끝까지 닿은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군은 해일과 같이 백제 서울로 몰려들었다.

신라와 당의 대군이 왕도로 몰려들어 오는 것을 볼 때에, 아직 주색에만 빠져 계시던 의자왕은 처음으로 깊은 꿈에서 깨시었다.

이제는 하는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깊은 꿈에 잠겨서 일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에는 이제는 단지 몸을 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성이 완전히 적군에게 싸이기 전에 왕은 태자를 데리고, 몸 빨리 이 왕도를 벗어나서 북비(北鄙)로 피하셨다.

「아아, 전에 성충의 말을 들었더면 오늘 이 모양을 안당할 걸!」

왕이 발하신 아 탄성! 이것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충언(忠言)을 듣지 않고, 그 때문에 파멸에 이르렀을 때에 발한 탄성이다.

「아아! 성충의 말을 안 들었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죽음을 무릅쓰고 왕께 간하던 성충, 그리고 그 뒤에는 몸을 일으켜서 왕께 호령을 하던 성충, 맨 마지막에 피로써 글을 써서 왕께 올린 성충─ 이런 여러 가지의 성충의 모양이 왕의 마음에 어릿거렸다.

왕은 일찌기 몸을 피하셨다. 그러나 궁에 남았던 많은 궁녀들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피하려야 이젠 피할 길도 잃고, 모두들 하릴없이 서로 손을 이끌고 부여 성북으로 나갔다. 거기는 강 위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 자리를 잃었다. 성 안에서 원수의 손에 욕보느니보다는, 오히려 여기서 스스로 떨어져 죽는 편이 낫겠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리로 나온 것이다. 거기서 모두 둘러앉아서 다시 한 번 나라의 운명을 통곡한 뒤에, 궁녀들은 모두 서로 손목을 힘있게 잡고, 아래 흐르는 푸르른 물로 뛰쳐들었다.

왕과 태자가 몸을 피하시고, 아직 적군은 성 안에 들어오기 전, 이 혼잡한 가운데서 왕의 둘째 아드님 되는 태(泰)는 스스로 백제에 군림하였다. 그리고 무리들을 모아 가지고 성을 지키어 보려 하였다. 그때에 그의 아들 문사(文思)는, 아버지의 이 행동을 마땅치 않다 생각하여,

「상감과 태자가 안 계신 이 성 안에서 스스로 등극하셨다가 이 뒤에 상감이 돌아오시면 어찌하겠읍니까?」

하고 책하며, 다른 무리들을 데리고 역시 이 성을 피해서 달아났다.


9[편집]

그러는 동안에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는 마침내 이 성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문 누각 위에는 적군의 깃발이 높이 휘날리었다. 뿐만 아니었다. 백제 서울을 함락시킨 뒤에, 나당의 연합군은 의자왕의 거처를 찾았다.

아무리 일찌기 피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벌써 사면이 신라와 당나라 군사의 세력 아래 들어간지라 의자왕은 깊이 숨지를 못하였다. 드디어 적군의 손에 포로가 되었다. 왕과 태자와 왕족이며 문무대신들을 모두 잡은 적군은 그 일행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의자왕도 잡힌 몸이 되어 당나라 서울로 갔다.

거기서 외롭고 쓸쓸한 여생을 보내시다가 이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한 때는 한 나라에 군림하던 왕으로 남의 나라에 잡힌 몸이 되어 쓸쓸히 세상을 떠나실 때에, 이 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아아, 성충의 말을 들었더면 오늘 이 지경은 안 당할 걸!』

백제 서울이 함락할 때에, 그 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그 뒤 멎을 때 없이 늘 나왔을 것이며, 세상 떠나실 때에는 가장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을 것이다.

백제는 이리하여 망하였다.

온조왕(溫祚王)에서 시작되어 삼십 일 대 왕, 육백 칠십 팔 년 간의 길고 강하던 사직은 의자왕 이십 년에 마침내 그 마지막 막을 닫힌 것이다.

머나먼 딴 나라에 묻혔는지라, 그의 무덤조차 찾는 사람이 없을 가엾은 최후였다. 기나긴 백제의 사직, 아무리 나라는 망하였다 하나, 그의 시신이라도 고국에 묻히었더면 조상할 구신(具臣)이라도 있겠거늘, 쓸쓸한 여생을 보낸 이 백제 최후의 왕에게는 무덤 찾아 줄 구신조차 없었다.

일환아!

의자왕의 최후는 얼마나 쓸쓸한 최후냐? 또한 백제의 멸망은 얼마나 가엾은 멸망이냐?

지금 낙화암이라 일컫는 그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궁녀들의 순사는 얼마나 눈물겨운 죽음이냐?

나라이든 개인이든 흥망과 성쇠는 미리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렇듯 강하던 백제가 수십 년간에 망하였다 하는 것도 혹은 순환되는 천리에 의지하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역사를 볼 때에, 우리의 눈에 가장 뚜렷이 비치는 것은 의자왕이 성충의 말만 일찌기 들었더면, 백제는 그때에 그렇게도 쉽사리 망하지는 않았겠다는 것이다.

「아아, 성충의 말만 일찌기 들었더라면 오늘 이 지경은 안 당할 걸!」

의자왕의 이 부르짖음은 얼마나 비통한 부르짖음이냐?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간 할 때에 의자왕은 왜 안 들었느냐? 그때 듣지 않고 왜 후에 후회를 하였느냐?

일환아!

옳은 말은 귀에 역하다.

그때 성충으로서, 왕께 아리따운 계집이나 바치고 향그러운 술이나 드렸더면, 그리고 계집 사냥이나 바치고 권하였더라면, 왕은 성충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 때 성충의 말이 쓰다고 듣지 않으셨던 왕은 후에 그 안 들은 것을 후회하셨다. 후회하셨대야 도저히 일이 바로 되지 못할 때에 임하여 비로소 후회를 하신 것이다.

귀에 쓴 말이라고 거스르지 말아라.

귀에 쓴 말을 부러 네게 하는 이상에야 반드시 할 필요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냐? 너는 결코 귀에 쓴 말이라고 거스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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