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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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적인 고뇌 속에서[편집]

1[편집]

그날 밤 영민은 사건의 귀추를 알아 볼 셈으로 우울한 얼굴들을 하고 찾아온 김 준혁과 신 성호와 함께 파고다 공원 뒤 어떤 조그만 중국집 이층에서 주식을 나누고 있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읍니다!」

식사가 들어 왔으나 영민은 통 손을 대지않고 술만 자꾸 마셨다.

「오늘 날 허 운옥의 이러한 운명에 대한 온갖 책임은 내게 있지요.」

신 성호는 소주 한잔을 훌쩍 들이키며

「백군, 그렇게만 생각할 것두 아니야. 이것은 그 누구의 책임 문제가 아니고 각자가 인생에 대하는 태도 문제이니까,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우리들의 당면 문제는 어떡허면 오늘의 운옥 씨를 구출해 낼 수가 있는지, 군은 그 방면의 전문가이니 만큼 골똘히 그것 만을 생각해 주게.」

「구할 도리가 전연 없다. 나는 손 선생과 함께 손을 뻗쳐 사건의 진전을 주목하고 있지만 긴박한 이 시국에 있어서 도저히 관대한 처분을 바랄 수가 없다. 잘하면 무기, 그렇지 않으면 사형일 것이다.」

「어제 헌병대로 최 달근을 찾아가서 만나 보았지만 역시 최군의 의견도……」

술잔이 돌아가다가 멎고 좌석은 납덩어리가 흐르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오늘의 「 운옥씨의 운명에는 내게도 책임이 있읍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준혁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좀더 적극적으로 운옥씨의 침체한 정열을 붙잡지 못했던가?……

그것이 설혹 운옥씨의 기원하는 바와는 배치되는 행동일는지 몰라도 좀 더 힘차게 운옥씨로 하여금 삶에의 의욕을, 그것이 비록 속되고 평범한 길일지는 몰라도 좀더 적극적으로 삶에의 의욕을 갖도록 선도하지 못한 나의 책임감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영민은 그 순간 준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은 너무나 지나치게 선량하고 후하신 말씀입니다. 그러한 김형의 말씀을 들으면 나는, 나는 운옥이에게 너무나 지나치게 잔인 했읍니다! 나 혼자의 행복만을 추궁함으로써 운옥의 불행에는 관심이 적었읍니다. 거의 없다시피 했읍니다. 현대적 지성의 발달에 기인한 개성의 가치에의 인식만을 존중하여 왔읍니다. 나의 자유 의사에 책임이 없는 한 사람의 여인으로 말미암아 나의 귀중한 일생이 구속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운옥의 세계에서 뛰쳐 나왔지요. 아주 용감하게 뛰쳐 나왔읍니다! 그것이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모랄이었고 개성에의 인식이었지요.

봉건적인 온갖 기반과 감정을 떨쳐버리는데 성공함으로써 하나의 현대인으로서의 투명(透明)한 인격의 완성을 가져 보고자 하였읍니다.」

영민은 그러면서 찻종지에 콸콸콸 소주를 부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나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그처럼도 이상(理想)하던 개성의 발견과 현대적인 모랄의 수립만을 찾아 헤매일 수는 없을 것 같아 졌어요. 봉건적인 온갖 기반과 인간성을 떨쳐버리는데 성공해 보려던 나는 지금 그 세계 속에 그대로 들어박혀 있어도 무방하였을 것 같아요. 백 초시의 외아들을 사랑하였던 운옥이 ── 나는 백 영민이라는 개성의 발견을 단념하고 오로지 한낱 백초시의 아들이 되어 그러한 운옥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나 자신을……

그렇습니다. 뉘우치지는 않아도 도저히 관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읍니다!」

복잡하고 심각한 고뇌의 빛이 영민의 흥분된 얼굴을 덮어 싸고 있었다. 그 무겁고 흐린 납덩어리가 흐르고 있는 것 같은 고민의 표정 속에서 오직 두 개의 눈만이 무섭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렇다. 인간 백 영민은 지금 개성의 가치와 인간성의 존엄과의 몸서림치는 투쟁 속에서 저릿저릿한 상극도(相剋圖)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을 몰각한 개성의 승리와 개성을 무시한 인간성의 존엄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딩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한 사람 백 영민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과거 인류가 , 가진 긴 역사의 고민인 동시에 아이로니칼한 인류사에서 오는 미래 영원의 고민상이기도 하였다.

2[편집]

「내가 대관절 무엇이기에 운옥을 배반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예요. 연소했었다는 것은 구실이 되지 않지요. 자기 혼자의 행복만을 추궁한 에고이스트의 전형적 표본이 바로 나 자신이었읍니다! 운옥이와 나 ── 어떠한 원인으로서든지 이 두 사람이 서로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경우에 있어서 어느 편이 더 많이 행복하게 될 수가 있으며 어느 편이 더 많이 불행하게 될 수가 있었던가?……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행복과 불행의 이러한 개연성(蓋然性)을 과연 나는 계산에 넣지 않았던가?…… 만일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운옥의 입장에 있었던들 나는 과연 그처럼 용감하게, 그처럼 무자비하게 그 환경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에고이스트! 자기의 걷는 길이 평탄하다 하여 상대자의 걷는 길이 결코 평탄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약간의 미흡한 데가 있는 것을 구실로 삼아 개성의 발견이니, 자기 확장(自己擴張)이니, 이상의 추궁이니, 연애 결혼이니 하는 따위의 허울 좋은 구호만을 가지고 운옥을 배반하고 나온 이 백 영민이야 말로 에고이즘의 권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무엇이 인격의 수양이며, 무엇이 인격의 완성이며, 성실해라, 노력해라? ── 아아, 영민이여! 네 인생의 첫출발에서 이러한 무자비를 범한 네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성실했다손 치더라도 오로지 그것은 극단의 이기주의적인 너 혼자만의 행복을 추궁할 때에 있어서의 감미로운 감정의 반주(伴奏)가 있을 경우에서 만이 아니었던가?……허 운옥을 그처럼 용감하게 박차고 나올 수 있는 너이기 때문에 너는 또한 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까지를 배반하였다! 너는 무엇이냐? 말을 해라! 네가 대관절 무엇이였더냐? 영민아, 대답을 하여라!」

「백형, 너무 흥분한 것 같소!」

준혁은 영민을 만류하였다.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운옥을……운옥을 구해야겠읍니다! 김형! 신군! 어떡허면 그 불우한 여인을 구할 수 있는지, 그 방도를 나에게 가르쳐 주시요! 속히 가르쳐 주시요!」

그러나 두 사람은 묵연, 대답이 없다.

나는 먼저 실례하겠읍니다 「 . 이러고 앉아 있을 수가 나에게는 도저히 없읍니다!」

영민은 두 사람을 그대로 남겨놓고 밖으로 총총히 나갔다.

추운 거리이며 캄캄한 거리이다. 소주 몇 잔이 영민의 고민을 더욱 자극하였다.

「어떡허면 되나? 어떡허면 운옥을 구출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영민은 허벙지벙이다. 다른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정신병자처럼 영민의 의식 세계에는 오직 철창속에 외로히 앉아있는 운옥의 처량한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그는 운옥을 구출할 수 있는 온갖 방도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합법적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그래서 그는 비합법적인 수단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영민은 자신이 없다. 그의 머리는 점점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서 망상의 실마리까지를 붙잡아 보는 것이다. 탐정소설의 주인공들처럼 감옥을 파괴하는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도 본다. 무슨 동화에 나오는 그 어떤 신기한 마술사처럼 겨드랑이에 날개를 붙이고 높다란 담장을 넘어 운옥을 구출해 내는 환상도 그려본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성이 없는 하나의 망상임을 깨닫자 영민은 돌연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전선주 하나를 눈 앞에 의식하는 순간

「아아 ──」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두 손을 벌려 전선주를 와락 쓸어안았다.

「운옥을……운옥을……」

영민은 뜨거운 입김을 확확 퍼부으면서 꽁꽁 얼어붙은 전선주에 볼을 부비며 입을 맞추었다.

미친듯이 전선주를 쓰다듬으며 한번, 두번 ── 영민은 자꾸만, 자꾸만 차디찬 나무 껍질에 입을 맞추었다.

종로 네거리 화신 앞에 선 어떤 한 개의 전선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