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4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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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편집]

1[편집]

영민이가 마침내 서대문 형무소로 운옥을 면회하러 간 것은 사건이 검사국의 손으로부터 판사의 손으로 거의 넘어가려는 四[사]월 중순이었다.

검사국에서는 「용궁·홀」에서의 운옥의 살인 사건에 있어서 최후적으로 확인을 얻기 위하여 현장의 목격자인 동시에 피해자의 한 사람인 방 월령을 증인으로 불렀으나 때마침 방 월령은 그 어떤 사명을 띠고 싱가폴로 여행중이어서 기다리다 못하여 검사국에서는 피의자가 자기의 범죄 사실을 전부 시인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오늘 내일 판사의 손으로 넘길 수속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민은 관선 변호사의 (官選) 자격으로서 운옥을 만나러 갔다. 피의자가 변호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민은 하는 수 없이 당국에 교섭을 하여 관선 변호인으로서 서기로 되었다. 처음에는 사계의 권위자인 손 학규 변호가에게 부탁을 할까도 생각하였으나 결국 영민 자신이 서기로 하였다.

재판관들의 심증(心證)을 다소 약화시키는 결과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으나 그것을 영민은 무시해 버렸다.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운옥의 변호는 영민 자신이 해야만 하였다.

오전 열 시 ── 좁고 컴컴한 면회실이었다. 영민은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운옥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복도에 발자취 소리가 나며 쇠수갑을 차고 잿빛갈 죄수복을 입은 운옥이가 한 사람의 간수의 인도를 받아 머리를 푹 숙이고 방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숙인 운옥의 목덜미가 유달리 창백하였고 목덜미에 척 내려붙은 몇 오락의 머리카락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五十[오십]여일 동안의 영어(囹圄)의 생활이 운옥의 육체로부터 완전히 생기를 뽑아버린 것 같았다. 그 보기 흉한 죄수복이며 꺼칠해 진 핏기없는 얼굴에 흐터져내린 머리카락이며, 이전에 가졌던 운옥의 아름다움이 송두리채 제거된 유령과 같은 모습이다. 운옥이가 지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의욕으로서가 아니고 머리 꼭대기에서 발바닥 밑까지, 그 무슨 심지(.)로서 간신히 세워놓은 낡아빠진 마네킹 인형과도 같았다.

간수는 변호인을 존대하는 의미에서 운옥의 손에서 수갑을 끌러놓았다.

영민은 가슴이 벅차왔다. 운옥의 그 초라하고 처량한 모습을 차마 눈을 뜨고 정시할 수가 없었다. 영민은 후딱 눈을 감아 버렸다. 숨결이 가쁘고 손발이 저려왔다. 운옥을 대신하여 영민 자신이 형장(刑場)에 설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슴 속을 쑤시어냈다.

「변호사다! 너를 변호하여 주시려는 분이다!」

간수의 말에 영민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운옥도 숙였던 머리를 가만히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마주쳤다.

「아,……」

가느다란 외침과 함께 운옥의 몸이 흠칫하고 움직이며 한 발자국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을 . 치며 찢어질 것처럼 확대되었던 운옥의 놀람의 표정이 다음 순간, 푸욱 수그러지는 운옥의 머리와 함께 방바닥을 향하여 휙 떨어져 내려갔다. 떨어져 내려간 그 방바닥 위에 발목까지 드러난 하얀 맨발이 두 개 가즈런히 놓여있었다.

2[편집]

두 개의 맨 발이 가즈런히 놓여있는 운옥의 그 드러난 발목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벌거우리한 자리가 있다. 푸릿푸릿 멍이 진 데도 있다.

기를 쓰고 뒷탑골 야학엘 다니노라고 二[이]년 동안이나 태극령 고개를 넘어 다니던, 지나간 날의 그 희망에 찬, 그 탄력성 있던 허 운옥의 발목에 오늘날 이러한 가슴 아픈 멍을 누구가 만들어 놓았는고?

「오늘 날, 이 마당에 있어서의 운옥의 심경을 나는 잘 알것같소.」

영민은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운옥의 고달펐던 심경을 나는 잘 알고 있지요. 그처럼 고달펐던 운옥을 생각하면 나는……나는 정말……말이 모자라서 채 다 하지 못하오. 현재에 있어서 나는 운옥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소. 정말 나는……」

운옥은 그때 수그렸던 고개를 가만히 들고 그 생기를 잃은 시들은 눈으로 영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것두 안 하셔도……정말로 아무런 것도 안 하셔도 저는……저에게는 영민씨를 나무랄 이유가 조금도 없어요. 정말로 조금도, 조금도 심노를 마시고……」

운옥의 말은 가다가 자꾸 막혀버린다.

「운옥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나는 운옥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임을 또한 발견하였소. 나는 운옥을 위하여 정말로 죽을 수도 있소. 죽어서 만일 운옥에게 보답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무슨 말씀을 영민씨는……오늘의 이러한 곤경은 모두가 제 한 몸이 저지른 것이지 결코 영민씨 때문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영민씨가 그처럼 괴로워 하실 것이 조금도 없어요. 오늘의 이 곤경은 지금도 영민씨와는 관계가 없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저로서의 살아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다만 제가 바라는 길만을 찾아 헤매인 것이 원인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 생각 마시고 제발 몸조심 하셔서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목탁이 되시어……

늙으신 부모님께서는 단지 그것을 바라시고 사시는데……그런 그런 무모한 생각을랑 아예……」

운옥의 생각도 내가 「 잘 알고 또 내 생각도 운옥이가 잘 알것 같소. 다만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은, 왜 그처럼 없는 죄까지를 뒤집어 쓰려고 하는지?……죽기를 정말 원한다면 왜 하필 없는 누명을 쓰고 옥에서 죽는다는 말이요? ──」

「그러나, 저는, 저는 그것을 누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모자르고 보잘 것이 없어서 그처럼 훌륭한 죄명으로 죽을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도리어 부끄러워요. 영민씨, 제발 그런 심노는 마시고 어서, 어서 돌아가셔서……」

「아니요! 보잘 것이 없으면 보잘 것이 없는 대로 살아 나가는 것이 참답게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요. 운옥이! 자기를 아껴 주시요! 운옥이가 살아만 준다면 나는, 나는 정말로 죽어도 좋소! 운옥이가 살아만 준다면 나는, 나는……모, 모든……모든 것을……」

그 순간, 운옥은 머리를 후딱 들었다.

「무슨 말씀을……무슨 말씀을 영민씨는 하시나요?……빨리, 빨리 돌아가세요!」

「운옥이가, 운옥이가 정말로 그처럼 죽고 싶다면 옥에서……옥에서 나와서 나와 같이 죽어 주시요! 나와 같이 죽읍시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소!」

「빨리 돌아가셔요. 저는, 저는 면회를 사절하고 들어 가겠어요!」

운옥은 홱 돌아서자 얼굴을 가리며 복도로 뛰어 나갔다.

「코라, 코라! (얘, 얘!) ──」

간수는 감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운옥의 뒤를 쫓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