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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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의 밤[편집]

1[편집]

그 후에도 야마모도 소대장은 복도나 영정같은데서 만나면 한두 마디의 친절한 말을 반드시 주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이상 더 깊이 파고 들지는 않았다. 五[오]년 전 관부 연락선에서나 또는 동경에서의 짧은 동거생활에서처럼 적나라한 자기의 인생 철학을 영민이 앞에 내놓지는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변모(變貌) 이긴 했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정녕 그럴 수도 없는 현재에 있어서의 인생의 입장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민도 조그만 도랑 하나를 사이에 그어 놓고 선생을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한편 영민과 황 칠성의 탈주 계획은 날이 갈수록 점점 구체적으로 익어 갔다. 야스다나 데이하라나 구니모도와의 관계는 아주 담담하였으나 예의와 친분을 잃지 않는 정도의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야스다가 우리를 밀고(密告) 하지나 않을까?」

어떤 날 황 칠성이가 빨래를 하면서 영민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탁성에서의 심각한 논쟁의 광경을 회고할 때 사실 그러한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나는 적지 않게 그때의 일을 후회합니다. 그저 어물어물 넘겨버려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그랬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약점을 잡힌 셈이니까요.」

칠성은 진심으로 그 점을 걱정하였다. 가나즈는 이미 자살이라는 최후적 결의를 가진 사람이니까 못할 일이 있을 리 없었지만 적어도 탈주라는 중대 사명을 띠고 있는 영민과 칠성으로서는 확실히 경솔한 행동이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의 정열이 그것을 참을 줄을 아직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영민은 분주스레 양말 빠는 손을 놀리며

「데이하라나 구니모도는 몰라도 야스다 만은 우리를 팔아 먹을 것 같지는 않아요.」

「왜요?」

「이렇다 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야스다라는 인물의 인격은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서로 다르지만요. 그렇지 않을까?」

「글쎄요. 논쟁만이라면 모르지만, 때렸으니까요.」

「그 점이 약간 염려는 되지만……그러나 그처럼 확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를 치명적으로 해치지 않는 이상, 이 편을 일시적 감정으로 팔아 먹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여튼 아직까지는 무사하니까, 무사할 동안에 우리의 계획을 한시 바삐 실행합시다.」

칠성은 무척 불안해 하고 초조해 했다.

「우리가 기회를 만들 수 밖에 없읍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밧줄은 얼마나 꼬았소?」

「한 四十[사십]자 가량 꼬았어요.」

이 중대에는 야포대(野砲隊)가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三十[삼십]여 필의 말이 있었고 따라서 그만한 말을 수용할 수 있는 마굿간이 있었다. 거기에는 마굿간을 수리하느라고 말리어 놓은 삼(麻) 껍질이 수두룩하니 쌓이어 있었다.

「아, 저 껍질로 밧줄을 꼴 수 없을까요?」

어떤날 가나즈가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한 뉴톤처럼 생기있는 얼굴로 속삭이었을 때 영민은 탁 무릎을 치며

「그렇소! 밧줄을 꼽시다!」

하였다. 그러나 가나즈나 칠성이가 다 도회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새끼를 꼴 줄 몰랐다. 그래서 영민이가 밧줄을 꼬는 중대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밤에는 마굿간에 파수병이 교대로 서서 말의 시중을 들어 줘야 하게 되어 있다. 三十[삼십]필이나 되는 말에 돌아 가면서 물을 먹여야만 했고 혹시 잘못되어 마굿간에서 뛰쳐 나가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시하여야만 했다 영민은 그런 때를 . 이용하여 열심히 밧줄을 꼬았다. 불침번 때에도 약간의 틈을 타서 마굿간으로 달려 가곤 하였다.

성벽의 높이가 十[십]메터 가량 되니까 그것이 설흔 석 자, 그리고 성벽 위에 우뚝우뚝 솟은 사각형으로 된 돌 기둥에다 동여맬려면 적어도 五十[오십] 척은 있어야 했다.

「열 자만 더 꼬면 됩니다.」

영민은 대답하였다.

2[편집]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두길 남짓한 병영 토담은 역시 밧줄로 넘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 사람이 무사히 넘어 나간 후에 나무 그루나 돌뿌리 같은 데 동여매놓은 밧줄을 넘겨갈 수가 없었다. 회양성에서 밧줄을 다시금 사용하여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병영 뒷문 밑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빠져 나갈만한 가능성이 보이는 수채구멍을 발견한 것도 가 나즈였다. 조그만 이 뒷문이라는 것은 보통 때는 늘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일본군의 명령으로 근방 농부들이 말 꼴을 비어 마차에 싣고 올 때는 이 뒷문으로 드나들게 하였다. 일부러 뚫어 놓은 수채구멍인지, 물이 모여서 저절로 생긴 구멍인지는 몰라도 문지두리 밑으로 사람이 하나가 간신히 빠져 나갈 가능성이 보이는 구멍이 있는 것이다.

어느날 영민과 칠성은 복도에서 잠깐 만났다.

「문제는 탈주 시간입니다. 사람이 지나 다니는 대낮은 물론 안되고 사람의 그림자란 한 명도 있어서는 아니되는 한밤중도 재미 없지요. 순찰병이나 보초병에게 발견되면 전연 답변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녁을 먹어 치우고 취침 시간까지 약한 시간동안이 여유가 있으니까 그 틈을 이용합시다. 어두우니까 사람의 그림자가 잘 보이지 않을께 고 만약 누구를 만난다 치더라도 답변의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 시간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곧 합치되었다.

「그러면 二[이], 三[삼]일 내로 결행을 할까요?」

「합시다!」

「아무리 기회를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우리가 기회를 만들 수 밖에 없지요.」

아니 거리 를 「 , (距離) 표준해서 생각하면 오히려 기회가 좋다고 볼 수 있지요. 七十[칠십]리만 무사히 탈출하면 중국군 진지에 도달할 수가 있으니까요.」

「밧줄은 잘 건사했읍니까?」

칠성이가 물었다.

「마구 넣는 상자 속에다 감추어 두었읍니다. 식량은?...」

영민이가 물었다.

「주방 창고에서 한 사람 앞에 사흘 분씩의 쌀을 훔쳐 올 수가 있는데, 감추어 둘데가 없어요. 밧줄과 함께 마구간에 갖다 둘까요?」

「그럽시다. 항고(밥 짓는 기구)는 잊어선 안돼요.」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건……」

「권총 말이지요?」

「네, 어느 놈을 하나 쓰러뜨리고라도 한 자루만 꼭 손에 넣어야겠어요.

여기서 탈출해 나갈 때도 필요하지만 만일 중간에서 왕 정위 군이나 또는 비적같은 걸 만나는 경우에는……」

「나도 그것을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요.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까지는……」

영민의 양심이 허용하지를 않았다. 그 순간 영민의 머릿속을 불꽃처럼 스치고 지나간것은 야마모도 소대장의 허리에 찬 한 자루의 권총이었다.

「황형, 그건 내가 어떻게서든지 손에 넣어 보겠읍니다.」

「무슨 신통한 방도가 있읍니까?」

황 칠성의 긴장한 어투였다. 그러나 영민은 거기에는 대답을 피하고 그저

「하여튼 노력해 보지요.」

했다.

「그러면 내일 이 시간에 주방 창고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 쌀을 꼭 훔쳐 가지고 나오지요.」

「부탁합니나.」

「가나즈에게는 백형으로부터 잘 연락하여 주시요.」

「염려 마시요.」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이튿날 그 시간, 영민이가 주방 창고 앞으로 가보니 칠성은 빨래 꾸러미 같은 것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게 뭐요?」

「보기에는 빨래 꾸러미같지만 이게 우리의 양식입니다. 빨리 마굿간으로 갖다 두고 오시요. 나는 빨래터로 가겠읍니다.」

영민은 약 서 되 가량 되어 보이는 조그만 쌀 꾸러미를 마굿간으로 갖다 둔 후에 빨래터로 칠성을 찾아 갔다.

「권총은?」

칠성은 빨래하던 손을 잠깐 멈추고 영민의 입술을 정성 들여 쳐다본다.

「권총은 쌀이나 밧줄처럼 미리미리 준비해 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읍니다. 권총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순식간에 이 병영 안은 물끓듯이 야단법석일 테니까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언제든지 탈주를 결행하는 직전에 그것을 손에 넣어야만 되지요.」

「자신이 있읍니까?」

「결행하는 그날이 오늘과같은 상태에 있는 날이라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될 가능성이 있읍니까?」

「있읍니다.」

「그럼 오늘 밤으로 탈주해 버립시다.」

「오늘 밤?」

영민은 약간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그럽시다!」

영민은 단호한 대답을 하였다.

「취침까지는 三十[삼십]분 내지 한 시간 동안의 여유가 있읍니다. 그러면 황형은 준비하여 가지고 마굿간 앞에서 기다려 주시요. 내가 가나즈를 데리고 그리로 갈터이니까요.」

「잘 알았읍니다.」

「서로서로 신중을 기합시다!」

「결사적인 신중과 결사적인 용기와……」

3[편집]

그것은 일본군이 하남작전(河南作戰)을 시작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일기는 점점 따스해 가고 무연한 화중 평야에 보리싹이 다섯 치나 목을 뺐을 무렵이었다.

영민은 처음 야마모도 선생의 권총을 노리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좀 더 손쉽게 노릴 수 있는 권총이 영민의 앞에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반장 가와노 오장의 권총이었다.

가와노 오장은 장기를 무척 좋아 해서 소등이 있기까지 고년병(高年兵)들을 상대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장기에 열중하는 버릇이 있다. 오늘 저녁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까 나올 때 보니 가와노는 권총이 달린 혁대를 끌러서 저고리와 함께 침실 벽에다 걸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다른 고년병들 중에도 권총을 찬 자가 많았으나 취침 직전이 아니면 혁대를 끌러 놓지 않았다.

영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어두컴컴한 침실로 들어 갔을 때 장기는 지금 한창 격전 중인 듯 모두들 장기판 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보니가 나즈도 고년병의 등 뒤에서 한가스럽게 노름놀이를 들여다 보고 있지 않는가. 영민은 지나가면서 가나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늘 밤 결행(決行)! 지금 곧 마굿간 앞으로 가서 칠성일 만나라!」

영민은 가만히 가나즈의 귀밑에 속삭이었을 때, 가나즈의 눈동자가 고양이의 그것처럼 일순간 무섭게 확대되었다. 가나즈는 힐끗힐끗 장기군들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바람처럼 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 빨래 꾸러미는 어딜 갔나? 빨래를 해야겠는데……」

영민은 사람들에게 들릴만한 정도의 목소리로 혼잣말로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장기에 열중한 고년병들은 누구 한 사람 영민의 행동과 말에 주의하는 이가 없다.

「됐다!」

영민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빨래 꾸러미에서 더럽힌 샤츠 한 벌을 꺼내 들고 고양이처럼 벽을 향하여 가만가만 다가 갔다. 「케이스」에서 권총을 뺄 때 뒤를 돌아 보면서 뺄까?……그렇지 않으면 일 순간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까?……그것을 일 순간 망설거렸으나 마침내 후자를 택했다.

영민은 마음의 눈을 딱 감고 「케이스」에서 권총을 끄내자마자 들고 있던 샤츠 속에 쓸어 넣고 「케이스」는 그대로 단추를 채와 놓았을 때

「앗, 시맛다!(앗, 실패했다!)...」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영민은 화닥닥 놀랐다. 권총을 안은 가슴이 기관차의 피스톤처럼 덜컹덜컹 소리가 났다. 그 누구의 커다란 손길이 독수리처럼 자기의 뒷덜미를 잡아 낚는 것 같았다.

영민은 눈 앞이 아찔해 진채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장기군들은 여전히 장기판 주위에 들어붙어 있었다. 그때야 영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고함 소리는 장기의 . 그 어떤 한 수를 잘못 둔 가와노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영민은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후우 ...」

긴 한숨 소리가 영민의 입술을 헤치고 나왔다. 단추를 채워 놓은 권총

「케이스」는 알맹이는 잃어 졌었으나 외관만은 멀쩡하다.

영민은 강렬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발걸음만은 태연하게 침실을 나섰다.

캄캄한 밤 하늘에 별 빛이 총총하다. 허벙지벙 마굿간으로 영민은 걸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