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3권/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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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넘어서[편집]

1[편집]

각각 조그만 보따리를 하나씩 건사한 이외에 칠성이는 밧줄을 메었고 영민은 쌀자루를 들었고 가나즈는 「항고」와 권총을 들었다.

아직 취침 전이니까 마당에 사람이 다녀도 무방했다. 그러나 캄캄한 영정에는 사람의 인기척은 있는상싶지 않다. 멀리 위병소의 불빛이 보이고 영문에 선 보초병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바라보이었다.

세 사람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고양이처럼 살살 토담 밑을 기어 마구간에서 약 五十[오십]메터 가량 떨어진 뒷문으로 걸어 갔다. 소등 나팔이 불기 전에 성벽을 무사히 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취침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세 사람의 행방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등 나팔까지는 약 四十[사십] 여 분 밖에 남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일이 있더라도 권총을 쏘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우리들 자신을 결박시키는 신호가 되니까요.」

황 칠성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속삭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권총을 사용하지 않고 탈출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지요.」

영민이었다.

「잘 알아요.」

가나즈였다.

뒷문은 물론 잠겨 있었다. 황 칠성은 엎드려서 수채구멍으로 밖을 한번 내다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빨리 내 뒤를 따라 나와요.」

칠성은 거치장스런 밧줄을 먼저 구멍으로 쓸어 넣고 개구리 새끼처럼 엎디어 뒷다리를 한참 동안 버드럭 거리다가 간신히 밖으로 빠져 나갔다. 몸집이 제일 부대한 칠성이가 먼저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가나즈와 영민은 비교적 속히 빠져 나가는 몸이 되었다.

담장 밖은 행길이다. 근방에는 중국인 주택들이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다. 행길을 넘어서면 상당히 깊은 골짜기가 가로 놓여 있었고 그 골짜기를 기어 올라가면 거기에 소위 하남성 제일이라는 회양성이 허공에 높다라니 솟아 있었다.

일동은 숨을 죽이고 사방을 살피면서 조심성스럽게 행길을 건너 골짜기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풀뿌리가 발에 감기어 자칫하면 앞으로 고꾸라질 판이다.

골짜기로 다 내려 서서 일동은 성벽 위를 쳐다 보았다. 까마득히 쳐다 보이는 북문 망루(望樓) 근처에서 보초병의 조그만 그림자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똑똑히는 세일 수 없었으나 그만한 수효의 사람의 그림자가 별빛이 희미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왔다갔다 하였다. 두 명의 일본군과 너더댓 사람의 중국인 경관과 보안대원이 보초를 서는 것이 항례로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망루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서편쪽을 향하여 골짜기를 발발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소리를 냈단 그만이요!」

「돌을 차지 말고!」

팔꿈치나 발뿌리에 채여 돌이 밑으로 굴러 떨어질 땐 정말 진땀이 났다.

숨을 꼭 죽이고 박쥐처럼 납작 땅에 엎드렸다. 그럴 때마다 간이 콩알만큼씩 줄어 들었다.

「결사적인 신중과……」

「결사적인 용감과……」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에게는 결사적인 신속성(迅速性)이 필요하였다. 어째 그러냐 하면 소등 나팔이 불기 전에 성벽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는 두꺼비 모양으로 한 발 한 발 기어서 골짜구니 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약 十五[십오]분이라는 시간을 잡아 먹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十[십]분 밖엔 남지 않았다!」

소등 나팔은 아홉 시에 불었다. 골짜구니를 오르내리는데 이처럼 막대한 시간이 허비될 줄을 그들은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모자랄지 모른다!」

영민의 초조한 목소리였다.

2[편집]

시간이 모자랄지 모른다는 한 마디가 극도의 불안을 일동에게 던져 주었다 시간의 부족은 결사적인 . 신중을 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그들을 몰아 넣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조잡해지고 거칠어져 갔다.

골짜기 위에서부터 성벽은 대공(大空)의 악마와도 같이 솟아 있었다. 그러나 밖과는 달라 흙을 차츰차츰 돋구어 올렸기 때문에 비교적 쉽사리 성벽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일동은 성벽 위에 우뚝우뚝 섰는 사각형 벽돌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망루에서의 시선을 박았다. 거기서 망루까지가 약 백 미터는 넉넉하였다.

「동초만 없으면 되는데……」

칠성이의 초조한 한 마디였다. 동초(動哨)란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리저리로 싸다니는 보초병을 말함이다.

「자아, 시간이 없다! 빨리 밧줄을 내려라!」

그러나 칠성이의 손이 곰살곰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밧줄이 서로 얽히고 꼬이어서 풀려 주지를 않는다.

「제에길할……」

이윽고 밧줄은 풀리었다. 그 한쪽 끈을 사각형 돌담에다 동여매고 밧줄을 성벽 밖으로 늘어 뜨려 놓았다. 밧줄을 타고 무사히 내려가면 「크리 ─ 크」는 헤염을 쳐서 건널 작정이다.

「자아, 빨리 내려 가시요!」

영민은 칠성이를 재촉하였다. 칠성이, 가나즈, 영민 ... 이렇게 내려가는 순서도 미리부터 정해 놓았다.

「그러면 내가 먼저……」

칠성은 재빨리 장갑을 끼고 영민의 손에서 쌀꾸러미를 달래 가지고 밧줄을 탔다.

망루 근처에서 어정거리던 보초 한 명이 이편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는 사실을 영민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빨리 빨리! 보초가 온다!」

영민은 눈앞이 아찔해 졌다. 마음 속으로는 절망을 느끼면서 가나즈를 재촉하였다.

「엣?...」

억압된 가나즈의 놀란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영민의 고막을 쳤다. 그와 동시에 가나즈의 몸뚱이가 밧줄을 탔다.

그 순간이었다.

「다레닷?(누구야)...」

벽력같은 목소리가 영민의 외인편 귀밑에서 폭발하였다.

「흑!」

하고 숨을 들이키며 영민은 납작 성벽에서 한 걸음 뒤로 음처 서면서 엎드려 버렸다.

그 순간까지 영민은 오른편 망루 쪽에서 걸어 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만을 상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벼락같은 그 목소리는 분명 외인편 쪽에서 들리질 않는가!

영민은 후딱 외인편 쪽으로 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영민은 다시 한번

「흑 ...」

하고 숨 막힐 것 같은 일 찰나를 가졌던 것이니, 장총을 겨누운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훤한 밤 하늘을 등진 채 약 三[삼]메터 가량의 거리를 두고, 옛말에 나오는 굴뚝 도깨비 모양으로 우뚝 서서 다가 오질 않는가!

「앗, 동초다!」

그렇다. 망루의 보초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다레닷?」

고함 소리는 좀더 가까이 왔다.

「세이야?(누구냐?)...」

이번에는 오른편 망루 쪽에서 걸어오던 중국인 보초가 고함을 쳤다.

일은 틀렸다. 영민은 납작 엎드린 채 한 걸음 두 걸음 뒷 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뒷 걸음질을 쳐서 영민이가 성벽 안쪽 중턱쯤 내려 왔을 때 외인 편쪽 동초 두 사람이 밧줄을 동여맨 돌기둥에 다달았던 것이다.

「앗, 쓰나가·오로사레데·이루! 닷소헤이다!(앗, 밧줄이 늘어저 있다!

탈주병이다!)」

뒤이어

「탕 ...」

「탕 ...」

하는 총성이 고요히 잠든 회양성 내를 뒤흔들었다.

3[편집]

영민은 무작정하고 골짜구니를 단숨에 뛰어 내렸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딩굴고 기었다.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영민은 소등 나팔이 불기 전에 침실로 가야만 했다.

「탕탕탕……」

성벽 위에서는 총성이 끊임 없다. 무어라고 떠들며 보초병들은 아우성 소리를 쳤다.

골짜구니를 간신히 기어 올라 왔을 때 영내에서는 소등 나팔이 불었다.

「따따따따 ... 따따따따 ...」

행길을 건너 뒷문 수채구멍을 정신없이 기어 들어 왔을 때는 벌써 그처럼 조용하던 병영 드넓은 마당에는 병사들의 시꺼먼 그림자가 이리 뛰고 저리 달리고 하였다. 그들은 일제히 정문을 향하여 뛰어나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말을 탄 기마병도 두 셋 섞여 있었다. 정문 보초가 중대장에게 전화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영민이 담 밑을 기어 마구간 앞까지 당도하였을 때였다.

「다레닷?(누구냐?)...」

하는 목소리가 캄캄한 마구간 안에서 튀어 나왔다.

「제 五[오]반 가와노 분대의 백 영민입니다.」

「난데·이마고로·우로우로·시데·이루까?(무엇때문에 지금 싸돌아 다니는 거야?) ...」

「탈주병이 있다기에 뛰쳐 나왔읍니다.」

「누가 그대에게 탈주병을 체포하라고 했나?」

「핫!」

영민은 한편 최후의 경우를 각오하면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윽고 컴컴한 마굿간에서 말 한 필을 끌고 나온 것은

「아,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센세이데와·나이! 쇼오다이쬬쟈! (선생이 아니다! 소대장이다!)...」

「핫, 쇼오다이쬬오·도노!(네, 소대장님!)...」

야마모도 소대장의 손에는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손을 들어!」

「핫!」

영민은 두 손을 들었다.

「무기는 없는가?」

「없읍니다, 선생님!」

「무기는 없는가?」

「없읍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야!」

「핫, 쇼오다이쬬오·도노(네, 소대장님!)...」

야마모도 소대장은 영민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보았다.

「이건 무슨 꾸러미냐?」

「치솔과 치약과 손수건과 비누와 그리고 샤츠……」

「기무라(황 칠성)와 가나즈는?」

「성벽을 넘었읍니다.」

「그대는 왜 돌아 왔나?」

「동초에게 발각이 되어 하는 수 없이 돌아 왔읍니다.」

「가와노 반장의 권총은 누가 가졌나?」

「가나즈가 가졌읍니다.」

「가나즈가 훔쳤나?」

「제가 훔쳤읍니다.」

「성벽은 어떻게 넘었나?」

「밧줄로 넘었읍니다.」

「밧줄은 어디서 났나?」

「마굿간 수리용으로 두었던 삼으로 꼬았읍니다.」

「누구가 꼬았나?」

「제가 꼬았읍니다.」

「그 밖에 소대장에 특히 아뢰울 말은 없는가?」

「없읍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있읍니다.」

「말해봐.」

「한번만 눈 감아 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돌아 갓!」

「핫!」

「빨리 돌아 가서, 쇼오다 이쬬오노·메이레이 데·가미가제(新風)니·데이레워·시데·이따 또 이헤! (소대장의 명령으로 가미가제에 손질을 하고 있었다고 말을 해!)...」

가미가제란 야마모도 소대장이 지금 마굿간에서 끌고 나온 말의 이름이었다.

「핫, 고옹와·와스레마셍!(네,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구즈구즈 센데 「 · ·하요오·가헤레!(우물쭈물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 ── 」

그 한 마디를 최후로 남겨 놓고 야마모도 소대장은 휙하고 애마 가미가제의 등에 오르기가 바쁘게 영문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 갔다.

헤아릴 수 없는 격렬한 감격이 영민의 전신을 무겁게 쳤다. 뭉클뭉클 쏟아지듯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영민의 앞길을 완전히 가리워 버렸다.

멀리 북문 쪽에서 총소리가 아직도 들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