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의 봄
간도라면 듣기만 하여도 흰 눈이 산같이 쌓이고 백곰들이 떼를 지어 춤추는 황원한 광야로만 생각될 것이다. 더구나 이런 봄날에도 꽃조차 필 수 없는 그런 재미꼴 없는……
사실에 있어 시력이 못 자랄 만큼 광야는 넓다. 그리고 꽃 필 새 없이 봄은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 대신 무연히 넓은 광야니 만큼 이 봄날이 오면 황진(黃塵)이 눈뜨기 어렵게 휘날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간도의 그 봄…… 내 눈 속에 티끌만 넣어주던 그 봄을 잊을 수가 없다. 진달래꽃, 개나리꽃 속에서 봄맞이를 하는 나임에 한 원인도 되겠지마는 무엇보다도 그 봄에 안긴 인간 생존이 너무나 봄답지 못한 살풍경을 이룬 때문에 한층 더하였다.
어떤 날 나는 빨래를 할 양으로 해란강으로 향하였다. 간도의 명산인 백양나무 숲은 벌써 봄빛이 푸르렀고 강물소리는 제법 높아졌다. 그리고 강물 위로 뗏목들은 슬슬 달음질친다.
나는 빨래를 돌 위에 놓고 샘 구멍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 강물은 언제나 흐려 있는 탓으로 모래 밑에 샘 구멍을 파가지고야 빨래를 한다.
벌써 몇몇 낯익은 부인들이 돌아가며 샘 구멍을 파고 있다. 물에 적신 그들의 불그레한 팔뚝 밑으로 산에서나 들에서 얻어볼 수 없는 그런 심연한 봄빛을 볼 수가 있었다.
저켠 언덕으로 국자가를 내왕하는 호로마차가 손님을 가득히 태우고 구름같이 먼지를 피우며 지나친다. 뒤이어 철교 위에는 경편차가 쿵쿵 소리를 내며 내닫는다. 기계문명의 이기는 벌써 이곳까지 개척하기 시작한다. 일방만철(滿鐵) 경영으로 부설 중인 ?선 광궤(廣軌) 철도는 그 시(時)로 이 경 편차를 구축할 것이며 동시에 대자본의 위세는 이 지방 샅샅이 미치고야 말 것이다.
모아산(帽兒山)을 넘어오는 산산한 바람은 우리들의 옷깃을 향기롭게 스치고 돌아간다. 그리고 방망이 끝에 채어 오르는 물방울은 안개비가 되어 보슬보슬 떨어진다. 나는 잠깐 봄에 취하여 어디라 할 곳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벌 속으로 힐끔힐끔 보이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초가며 그 위를 파랗게 달음질쳐 나간 봄하늘, 그리고 두어 마리 산새 울음 소리……
갑자기 프로펠라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며 두 셋의 비행기가 지나치다 앞산 위에다 쾅! 하고 폭탄을 던진다. 나는 공포에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저켠으로 사람들이 욱욱 밀려오기에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서 그들의 말을 개어 들으니 방금 비적(匪賊)을 내다 목베는 것을 보고 오는 모양이다.
빨래하던 우리들은 손에 맥을 잃어버리고 되는대로 주섬주섬 빨래를 짜 가지고 돌아오고 말았다.
시가에서는 군경을 실은 트럭이 종횡으로 질구(疾驅)하며 그 안에는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승승(乘乘)의 군가(軍歌),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일장기로 시가를 단장하였다. 용정의 치안을 맡으신 만주국 경관 나리들은 이 모든 것을 얼빠지게 바라본다. 마치 탄알없는 총 모양으로.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벌써 학교로부터 돌아와 있었다. 하루 종일 교단 위에서 피로했을 줄은 번연히 알건만 무어라고 입을 떼려니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남편도 역시 묵묵히 바라만 볼 뿐. 즐거워야 할 이 봄…… 기뻐야 할 이 봄이건만.
그때 불안과 공포에 싸여 그 봄을 맞던 간도! 이 봄은 또 어떻게 맞았는지? 그러나 간도여, 너는 그 봄을 용감히 맞았다. 피에 물들인 그 봄! 나는 비록 너의 가슴을 떠났으나 그때 받은 그 봄의 힘은 내 가슴에 아직도 물결치고 있다. 아니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