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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기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성재는 그 팔각종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칠 년! 칠 년 이 짧은 세원을 아닌데─) 하고 고개를 돌려 지금 실험하던 시험관을 본다. 그 실험 관에는 황갈색 액체가 반쯤 들어서 가만히 있다.

성재는 빨리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그 시험관을 쳐들어서 서너 번 쩔레쩔레 흔들어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의자 에 펄썩 주저앉으며 주정등(酒精燈) 뚜껑을 열고 바쁘게 성 냥을 그어서 불을 켜 놓은 뒤에, 그 실험관을 반쯤 기울여 그 불에 대고 연해 빙빙 돌린다. 한참 있더니 그 황갈색 액 체가 펄럭펄럭 끓어 오르며 관구(菅口)로 무슨 괴악한 냄새 나는 와사(瓦斯)가 피어오른다. 성재는 고개를 반만치 기울 이고 한참 비등하는 액체만 주시할 때에, 그 눈은 마치 유 리로 하여 박은 듯이 깜박도 안 한다. 그러나, 그 악취가 실 내에 가득 차게 되매, 제아무리 성재라도 가끔 손수 건을 코에 대리고 하고 소매로 눈을 씻기도 한다. 한참 이 모양 으로 시험관을 돌리더니 다시 그것을 세워 놓고 탁자 위에 놓았던 조그만한 병에서 백색 분말을 좀 떠내어서 천평에 단다.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병의 것을 더 떠서 천평에 놓기 도 하고 천평의 것을 도로 떠서 병에 넣기도 하더니, 얼마 만에 천평이 평형을 얻어 가만히 서는 것을 보고 얼른 천평 접시를 들어 그 백색 분말을 시험관에 집어 넣는다. 그 분 말이 들어가자 시험관 속에서는 푸시시 하는 소리가 나며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른다. 성재를 수증기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다시 그 시험관을 주정등에 대고 아까 모양으로 빙빙 돌린다. 그 황갈색 액체는 아까보다 조금 담(淡)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황갈색대로 부글부글 끓으고 앉았는 겿에 서 그 팔각종이 똑딱똑딱 가면서 주인의 실험하고 앉았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주인의 얼굴에는 기쁜 듯한 미소와,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 림이 몇 분간을 새에 두고 번갈아 왕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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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할 때에 안으로 통한 문이 방싯 열리더니 서양머리 쪽 찐 십 팔구 세가 되었을 듯한 처녀가 가만히 들어선다. 얼 굴은 그렇게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도 가지런한 눈썹 밑 으로 맑은 영채를 발하는 눈과 등그스름한 아랙턱이 퍽 사 랑스럽다. 머리에는 기름도 아니 바리고 좀 헙수룩하게 쭉 찐 데다가, 지금 무슨 부엌일을 하다가 오는지 부르걷은 고 운 때묻은 양목 증키나 될까, 비록 검소한 의복에 모양을 보지 아니하는 태도연 마는 무엇을 입으나 잘 어울릴 듯한 그러한 체격이다. 그 얼굴이 좀 길쭉하고, 웃는 입술이 좀 두터운 모양이 그가 김 성재와 등기인 것을 가리킨다.

가만히 문안에 들어서며 손으로 코를 막고 잠간 얼굴을 찌 푸리더니 소리 없이 서너 걸음 걸어 나와서 성재의 어깨 너 머로 시험관에 황갈색 액체의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섰다. 성잰즌 그런 줄도 모르고 연(連)해 시험관을 빙 빙 돌리다가는 잠시 쳐들어 보곤 한다. 성재의 얼굴에는 분 명히 그 시험관의 성적에 주의하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얼 마를 있다가 성순(性淳)은 허리를 펴서 팔각종을 보고 실내 의 일영(日影)을 보았다. 팔각종의 시침이 사와 오의 사이에 있고 분침은 육과 칠의 사이에 있었다. 성순은 "네 시 반보 다 오 분이 지났네"하고 혼자 생각하였다. 네 시 반은 성재 가 실험을 그치고 삼십 분 동안 산보를 하거나 성순과 이야 기를 하는 시간이니 이것은 삼 년 내로 일정불변하는 가규 라. 제 시 반이 지나면 성순을 으레히 실험실에 찾아오고, 그래도 성재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으면 성순이가 우 수(右手)의 식지(食指)로 성재의 왼쪽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 며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는 법이요, 그리하면 성재를 잠시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을 보고 시 험관을 세우고 주정등에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나 성순의 손을 잡으며 "아아,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하는 법이요, 그러 고하서는 "산보 갈란다. 내 모자 다도"하든지, 산보 갈 마음 이 없으면 "저 의자 갖다 놓고 여기 앉아라"하여 성순이와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 법이요, 그러다가 팔각종이 다섯 번 을 땡땡 치면 "자, 저녁 먹자"하고 성순의 뒤를 따라 오전 여덟 시에 떠난 안방에를 아홈 시간 만에 처음 들어가는 법 이라.

성순은 분침이 꼭 Ⅶ자상(字上)에 달(達)한 때를 보아서 예 대로 오른손의 식지로 성재의 왼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 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 십 분 지났어요."

하였다.

성재는 법대로 웃는 낯으로 성순을 보고 다음에는 팔각종 을 보고, 그리고는 시험관을 세우고 주정등 불을 끄고, 탁자 위에 놓였던 기구며, 약병을 찬찬히 약장에 집어 넣고, 그리 고는 어깨 위에 놓인 성순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아뿔사, 오늘도 그저 보냈다."

한다.

"왜 그저 보내요, 오늘 종일 일 아니 하셨어요.;"

하고 성순을 오빨르 책망하듯이 말한다.

성재는 한번 더 팔각종을 쳐다보고 군데군데 약물에 구멍 뚫어진 양목 실험복을 벗어 성순에게 주고 도로 의자에 앉 으면서,

"글쎄, 생각을 해 봐라, 왜 그러한 한탄인들 아니 나겠니.

지 시계가 칠 년 보험인데, 금년이 꼭 칠 년째되니, 저 시계 로 말하면 일생을 다 보낸 셈이로구나."

하고 픽 웃으며,

"저것 봐라, 그렇게 단단하던 시계가 이제는 다 늙어서 칠 이 다 떨어지고 말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칠 년 동안이나 이 실험실에 들어박혀서 하여 놓은 것이 무엇이냐! 저 시계 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두 손을 두 무릎 위에서 턱 놓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 다. 성순은 어이없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보더니 머리를 북 북 긁으며,

"왜, 오늘은 또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그새 며칠 동안은 시험이 썩 좋다고, 이대로 가면 성공할 날이 가까이 있을는 지도 모르겠다고 기뻐하시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 게......"

하고 성순은 울음을 참는 모양으로 일을 꼭 다문다. 실로 지나간 칠 년에 실패도 꽤 많이 하였다. 무슨 광명이 보일 듯하다가는 실패하고, 무슨 광명이 보일 듯 하다가는 실패 하고, 이렇게 하여 오기를 십수차나 하였다. 그렇게 한번 하 면 실패할 때마다 많지 아니한 재산은 봄날에 눈 슬 듯 차 차 스러졌다.

3[편집]

이번 계획을 세운 뒤에도 성공할 듯하면서 실패한 것이 벌 써 두 번이나 되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의 실망은 물론이 려니와 성순의 실망은 여간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다정한 여성으로 생겨나서 사랑하는 오직 하나인 오빠의 실망하여 가는 것을 보는 심정은 실망하는 당자보다도 더욱 간절하였 었다. 성재가 실험에 아주 실패하여 며칠 동안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에도, 불을 켜 놓은 대로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여 괴로워 하는 양을 보고는 성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고 베개를 적시는 일도 흔히 있었다. 지난번 사월에 한 번 실패하였을 적에는 성재가 이렇게 실망이 되고 상기가 되었는지 자살이라도 할까 두려워, 성순은 잠시도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빠의 침실에는 칼이나 끄나풀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기를 주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구월 부터 시작한 실험은 매우 경과가 좋았던지 그동안 성재는 대개 만족한 얼굴로 지내었다. 그래서 성순도 시름을 놓고 기쁘게 지내였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에 실험실 문을 방 싯 열 때마다 성순의 가슴은 자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오늘 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과연 성공이 되었는가, 성공은 못 되 었더라도 기분(幾分)의 광명이나 얻었는가, 그렇지도 못하더 라고 실패나 아니 되었는가. 이런 근심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성재가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양을 보고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늘도 성재의 웃는 낯을 보고 마음을 푹 놓았다가 문득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것을 보고, 또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은 것이다. 성재는 고개를 번쩍들어 가운없이 우 두커니 섰는 성순을 보고,

"의자 갖다 여기 앉아라."

성순은 시키는 대로 의자를 끌어다가 성재와 비스듬히 마 주 놓고 앉으면서,

"글쎄, 왜 오늘은 그렇게 기운이 없으셔요?"

하고 재치 묻는다.

"애, 성순아!"

"네?"

"내가 성공할 듯싶으냐."

"그럼요, 그만한 자신이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지, 자신이 있기에 날마다 종일 시험관만 들여 다보고 앉았지."

"그러면 왜 그러셔요?"

"그런데 꼭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구나. 그해 오길 칠 년이나 해도 그냥 안 되는구나, 이번 계획도 처음에는 순순히 되어 오는 듯하더니 어제 오늘에 와서는 또 위태위 태하여지나 보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성순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끼친다.

"응, 물론 성골할 테지."

하고 성재는 손으로 낯을 한번 만진 뒤에,

"그러나, 이제는 돈이 있어야 아니하니? 약품은 무엇으로 사고 주정은 무엇으로 사나."

"주정은 아직도 번 통 남았어요."

"반 통?"

"네, 지나간 사월에 부쳐온 것이 한 반통 남았어요."

"그러면 주정은 금년 일년, 명년 삼월까지는 걱정이 없겠 다. 그러면 약품만 한 이백 원어치 샀으면 명년 삼월까지는 이럭저럭 지내겠다. 그런데 돈이 좀 남았니?"

"한성 은행 저금 통장에 백 육십 원이 남았어요."

"백 육십 원?"

"네, 함사과(咸司果)한테 집 문서 잡히고 취해 온중에서 저 번에 약 부쳐 오고 책 사 오고......"

"백 육십 원이라."

하고 혼잣말로,

"그러면 걱정은 없다."

하고 얼굴에 화기가 돌며 벌떡 일어나서 약품 목록과 주문 서를 내어 연필로 무엇을 쓴다. 성순은 가만히 앉아서 성재 의 손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어서 성공을 하였으면, 만일 명년 삼월까지에도 또 실패를 하면 어찌하나.) 이러한 생각이 희망과 공포와 한데 버물려서 성순의 흉중 으로 왕랴한다. 그런나, 그 오빠가 그러첨 열성으로 자기의 초지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에 한껏 존경하는 마 음도 생기고 또한 한껏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난다. 이렇게 성재에게 동정하여 주는 점으로 보아서는 성순은 마치 성재 를 보호하여 주는 맏누이와 같다.

2[편집]

1[편집]

성순은 성재에게는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오빠의 동생 중에서 가장 그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또 가장 그 오 빠를 사랑하였다. 성재의 동생되는 성훈만 추축하여 늙은 부모와 성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 성순은 발명에 열중 하는 장형(長兄)과 부랑한 차형(次兄)을 대신하여 곧잘 부모 를 위로하며 또 성재에게도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가족 중에 성재의 이상을 잘 이해하여 만강(滿腔)의 동정을 성재에게 주는 이는 오직 성순뿐이었다. 성재가 동경서 고 등 공업 학교를 마치고 경성 다동(茶洞) 본집에 돌아왔을 때 에는 성순은 아직도 보통학교 삼년생 되는 십 이 세되는 계 집애였다. 성재가 발명의 뜻을 ㅍ품고 천신 만고로, 불완전 하나마 실험실을 꾸미고 들어앉음으로부터 아무도 이 실험 실에 들어오기를 허하지 아니하되, 오직 성순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장난하 다가 두어 번 쫓겨난 일은 있으되, 성순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성재는 만사 제지하고 웃 는 낯으로 맞아서 한번 안아 주며,

"가만히 여기 앉아서 구경해라."

하였다.

칠 년 동안 꼭 이 모양으로 하여 오다가 금년 봄엔 성순이 가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게 되매 범절은 그의 손에 다 맡기게 되어, 회계에 관한 사무, 서신 왕복에 관한 사무까지도 다 맡게 되었다. 성순은 영리한 처자요, 그 중에 도 그 오빠의 성미를 잘 안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한 일에 는 대개 다 만족한 뜻을 보이고 무슨 일이나 성순에게 부탁 하면 안심이 된다. 성순이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성훈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 적도 있었으나 대판 약포(大阪藥哺)에 보 내는 환전 백 원을 훔쳐 쓴 뒤로는 일체 성훈에게 부탁하기 를 그치고, 자기가 몸소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성 순에게 부탁하였다.

성순도 성재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한다. 다 른 사람이 보기에는 주야로 성재밖에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같이, 매사에 '동경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였다. 성 순이가 보통 학교에 다닐 적부터 방학에 돌아와서는,

"성순아, 제가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거든 동경에 보내 줄 께."

하였고, 성순도 동무더러

"나는 고등 학교 졸업하면 동경 가."

하고 자랑하였다.

"동경 가면 무슨 공부할래?"

하고 성재가 물으면,

"나도 오빠와 같이 고등 공업 학교에 가지."

하고는 여러 사람을 웃겼다. 성재도 주의상 여자 교육을 중히 여기며, 성순을 사랑하며, 또 성순의 재질을 믿는 고로 기어이 동경 유학을 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삼사 년 전부터 혹 부모를 대하여 성순의 유학게 관한 의논도 하였고, 성순 도 졸업하기 전전해부터 부모께 졸랐다. 그러나, 부모는 여 자가 글을 그리 많이 배우면 무엇하느냐 하는 것과, 성재도 모처럼 유학을 시켰더니 그다지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과, 또 성재가 졸업 귀국한 후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업에 재산의 대부분을 없이한 것을 생각하여 농담 겸,

"졸업하거든 시집이나 가지 공부는 무슨 공부─"

하고 거절하였고, 그러면 성순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싫어요, 나 시집 안 가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성재는 성순의 머리를 쓸어 주며,

"걱정말아라. 내가 유학시켜 주지."

하여 지금토록 성순에게 안심을 주어 왔다. 그러나, 연해 하여 온 실패에 금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순을 유학시킬 자력이 없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실험실에서 네 시 반 담화 시간에 형매(亨妹) 간에 이러한 담화가 교환된 일이 있었다(그 때에는 참 고통 이 되더라고 수일 후에 성재가 성순에게 회억담(回憶談)을 하였다).

"얘, 이제는 졸업을 하였으니까 동경 가고 싶은 마음이 있 겠구나?"

하는 성재의 말에 성순은 손가락을 한참 물어 뜯다가,

"가게 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말지요."

"내가 이렇게 실패만 하여서, 너를 유학시킬 자격이 없구 나."

하고 성재는 성순의 낯빛을 보았다. 거기는 분명히 실망의 비애가 드러났으며, 이것을 보는 성재의 심정은 참 아팠다.

"일 년만 참아라. 설마 금년 안에야 성공을 못하랴. 명년 사월 학기에는 기어이 동경에 보내 주마."

하였다. 그 후의 실험의 결과를 보건대 명년이란 말도 신 용은 아니 되지마는 억지로 오빠의 말을 빋고 지금 까지 온 것이다.

2[편집]

이렇게 말하면 성순은 오직 동경 유학 하기만 위하여, 그 오빠를 위하여 힘쓰는 것 같지마는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 다. 사람이란 잠시라도 사랑하는 것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니,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무슨 물건이라도 사랑하고 배긴 다. 성순은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게 된 후로는 그 오빠되는 성재를 사랑하였다. 성재에게 대한 성순의 사랑은 그에게 마땅히 올 사랑할 사람, 즉 그의 지아비된 사람이 나서기까 지는 변치 못할 것이다. 여자란 점점 성숙하여 갈수록 어머 니나 동생 되는 동성의 사랑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얻고야 만족한다. 그래서 품행 방정한 처녀 들은 지아비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오라비에게 대한 사 랑으로 생명을 삼나니, 오라비 없는 처녀가 흔히 침울한 것 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순이가 성재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중류의 애정에서 나왔다 함이 마 땅하다. 어찌 처녀만 그러하리요. 남자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순은 진정으로 자기를 생각하여 주건마는 성재의 마음에는 성순에게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찔렸다.

성순에게 대한 걱정뿐더러 부모에게 대한 걱정도 있고 동 생에게 대한 걱정도 있었다. 더구나 빈가의 장자로 태어나 서 일생을 고생으로 지내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자기 가 그 부모에게 여년(餘年)의 낙을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비록 좋은 일을 위함이라 하지 마는) 가산을 기울여 노부모 의 마음에 걱정이 아니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송구하고 가슴 쓰린 일이랴. 먹을 것을 먹지도, 쓸 것을 쓰지도 아니 하고 한푼 한푼 모아 각고 육십 년에 깨끗한 집간이나 땅마 지기나 장만하여서 장차 안락한 여생을 보내려 할 때에 성 재 자기는 유학하느라고 근 십 년 정성(定省)을 궐(闕)하고 졸업이라고 한 뒤에 칠 년이 넘도록 자기는 수만원 의 재산 을 시험관의 연기로 화하고 말아, 여간한 땅지기 집 문서까 지 빚쟁이의 손에 들었으니, 자수로 성가한 노부모의 심통 이야 그 얼마나 하냐. 그러하더라도 노부모가 자기의 사업 이나 완전히 이해하고 주었으면 얼마라도 안심이 되련마는, 노부모의 낡은 사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하여도 이해할 길이 만무하니 성재의 마음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그 부모 는 다만 성재의 착실하고 방정함을 알므로 전 재산의 사용 권을 온통 성재에게 맡겨서 일가의 흥패를 성재의 쌍견(雙 肩)에 지우고 말았건마는, 그래도 날로 줄어들어 가는 재산 을 보고는 결코 안심될 리가 없는 일이다. 월전 최후 수단 으로 가대 문권(假貸文券)을 전당할 때에 성재의 부친은 참 다 못하여 약주를 취하게 먹고 성재를 불러 부득요령하는 분풀이를 한바탕 하였으며, 그 모친은 곁에 서서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을 좔좔 흘렸다. 그러나, 자식이 하여 오던 사업 을 중도에 좌절케 하기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 사대 문권 을 잡히는 함사과(咸司果)는 세의(世誼) 집일뿐더러 수십년 전에 자기의 은혜를 진 사람이나 설혹 기약이 넘어간다 한 들 다른 채권자와 같이 강제 집행을 한다든지 할 리는 없다 하여, 얼마큼 안십도 된다 하여 가대 문권을 내러 주었다.

주기는 주었으나 그래도 분하여서 술김에 한 바탕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할 때 성재의 마음이 잠시나 편안한 이유가 있으랴. 처음 졸업하고 올 때에는 아직도 일개 서생 으로 다만 이상에만 살아났건마는 차차 낫살이 많아지고 실 사회의 경험을 하여 옴을 따라서, 단순히 이상 하나로만 살 아가지 못할 줄을 알았다. 부모에게 대한 의무, 형제에게 대 한 의무, 차차 자라가는 자녀에게 대한 의무, 이러한 ㄱ서이 차차 무겁게 양견을 누른다.

실험실 속에 어찌 실사회가 들어오랴 하련마는 지구를 버 리고 천상으로 날아 올라가기 전에야 어디를 간들 실사회의 풍파가 아니 미치랴. 유리창 한 겹을 열면 실사회요 십여 보를 나아가면 종로 거리다. 성재의 실험실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사회의 고민 번뇌가 창틈과 벽틈으로 꾸역꾸역 들어온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린다 하더라도, 주정(酒精)불이 턱 새지가 세상의 천사 만 려(千思萬慮)가 성재의 가슴을 누른다. 성재의 피난처는 실 로 시험관과 성순과 둘뿐이다.

3[편집]

실로 성재의 책임은 너무 중하다. 수다한 식구의 활계(活 計)가 이제는 전혀 성재의 손에 달렸다 할 수밖에 없다. 가 족이 일생에 먹을 것을 성재의 손으로 온 통 시험관에 넣고 말았으니 이제는 그것을 시험관에서 다시 찾을 수 밖에 없 이 되었다. 만일 성재의 계획이 성공이 되어 목적한 발명품 이 여러 나라의 전매 특허를 얻고 경성에 그 특허품을 제조 하고 큰 공장이 서는 날이면 성재의 몽상한 바와 같은 결과 를 얻을 수도 있지마는 만일 아주 실패하는 날이면 성재의 일가족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할 떄마 다 성재는 몇 번이나 심화를 내었으며, 몇 번이나 장애게 대한 공포에 눌려 시험관을 온통 깨뜨려 부수고 온다 간다 는 말 없이 달아나려는 생각을 가졌으냐. 지난 사월의 대실 패 때에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결심까지 하였다. 그때에도 성순더러 농담삼아,

"성순아, 나는 멀리로 달아날란다."

"예?"

"멀리로 달아나고 말 테야."

"왜요?"

"하려던 것이 되지는 않고, 부모에게 걱정만 끼치고...... 그 러느니보다 산간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란다."

"에그,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셔요."

"내가 만일 성공만 하면, 만인에게 이익을 줄 것이지만 실 패하는 날에는 곯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비록 세상을 위하여서 재력과 정력을 다 허비하고 죽어 버 린다 하여라도 내 계획이 성공만 못 되고 보면 세상이 그 공로를 알아 주기나 할테냐. 세상이란 자기네에게 당장 은 택(恩澤)을 주려고 전심력을 다하다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수 교했다는 말 한마디도 아니하여 주는 법이다. 고래로 성공 을 얻어서 세상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자도 많건마는, 애만 쓰고 마침내 실패하여서 세상에서는 왔다간 줄도 모르는 사 람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내가 성공에 달하는 운수를 만나기가 그리용이할 것이냐!"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성순은변론으로 그 오빠를 설복하 려 하지 아니한다. 변론으로야 성순이가 성재를 당할 뻔이 나 하랴. 영리한 성순은 이러한 경우에 쓸 무기가 무엇인 줄은 잘 안다. 그래서,

"못합니다, 아무데도 못 가십니다. 가시려거든 시험하던 것 을 성공하고 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까 지든지 오빠를 따라가서 실험실호 붙들어 올 터이야요. 저 시험관에서 오빠가 바라는 결과가 날 때까지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나는 따라가서 붙들어 올 터이야요."

'의지의 사람'이란 별명을 듣는 성재도 이 무기에 대항할 만한 의지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 차디 찬 듯한 성재의 흉 중에도 따뜻한 애정에 감동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참 신기 하다. 이리하여 성재는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다시 시험관 을 돌고 앉았다.

(성공하면 세상 일, 실패하면 내일.) 이러한 생각으로 날마다 실험실 사람이 되었다. 거지가 되 면 되고 성공이 되면 되고 아무려니 시험관과 사생 결단을 할 작정이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실패에 실패만 겸하였지마는 그래도 경험도 많이 쌓았고 지식도 많이 얻었다. 날마다 시험관을 들고 앉았으니까 실험하는 수완도 매우 숙련하게 되었다.

이만한 지식과 이만한 숙련을 가졌으면 어디를 가든지 매 삭 육칠십 원 월급ㅇㄴ 받을 것이요, 얼마간 지나서 진수완 만 알아주게 되면 돈 백 원 월급은 무려하게 받을 것이다.

작년 추기에는 경성 공업 전문 학교의 초빙함을 받았고, 금 년 사월에는 연희 전문 학교의 초빙을 받았다. 더구나 신설 되는 연희 전문 학교에서는 실로 비사 후폐(卑辭厚幣)를 가 지고 청하였건마는 실력이 부족하다 함이 교수에 뜻이 없다 는 이유로 다 사퇴하였다. 성재의 뜻은 결코 백 원이나 이 백 원의 월급에 있지 아니하다. 그가 칠 년 전에 정한 목적 으로 더불어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났다. 그러하니까, 이 일을 위하여서 세상에 살아야 하겠다'하는 것이 성재의 결심이다. 아니, 결심이라기보다 신념이요, 신앙이다.

3[편집]

1[편집]

성순은 우산을 받고 한성 은행에 갔다. 남은 돈 백육십 원 을 찾아서 대판으로 약을 청구하려 함이다. 통장을 내어서 예금계에 내어 대었더니 젊은 사무원이 그 통장을 들고 두 어 탁자 지나가서 큰 탁자에 앉은 수염난 사람한테 가서 두 어 마디 문답을 하고 돌아와서 통장을 도로 내어 주며,

"미안합니다마는, 돈을 못 내드리겠읍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와야 되겠읍니까?"

"아니올시다. 채권자가 가차압 청원을 하여서 아까 재판소 에서 지불하지 말라는 명령이 왔으니까 본인이 오시더라도 못 내드리겠읍니다."

이 말을 듣고 성순을 실망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실망보다 도 이 말을 들었을 때에 할 그 오빠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그 채권자가 누구오니까?"

"저는 모릅니다."

하는 것을 곁에 앉았던 어떤 사무원 하나이 성순을 보면 서,

"함사과(咸司果)라는 자인가 봅니다."

한다.

'함사과─' 하고 성순은 더욱 놀랐다.

아버지 말씀에 설마 함사과야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고 또 언젠가, '함사과가 포목전에 큰 실패를 하여 진퇴 유곡하였을적에, 자기가 돈 만냥을 주어 전당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는 말을 부친의 술푀단 중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그런 데 그 함사과가 불과 삼천여 원 돈에 가차압을 하였다는 말 을 듣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성순은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통장을 책보 에 싸 들고 은행 문을 나섰다. 은행에 일보러 오는 사람들 과 시가로 걸어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보고 조롱하는 듯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안에 들 어서니 부친은 담뱃대를 물고 마당에 놓인 화분에 낙엽을 소제하였다. 성순의 눈에 초췌한 듯하다. 만일 우리 가대가 가차압을 당한 줄 알면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비분할까 하 고 생각하며 성순을 가슴이 뻐근함을 깨달았다. 성순은 그 걸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어제와 같은 악취가 가득하고 성재는 정신없이 시험관만 돌리고 앉았다. 유리창 열어 놓은 것을 잊고 닫지 아니하여 양장관 한편 구석에는 가는 비가 뿌려 이슬이 맺혔다.

성순은 사뿐사뿐 걸어가서 가만히 유리창을 닫고 돌아설 적에 창 닫는 소리를 들었는지 성재가 고개를 돌려 성순을 보면서 기쁜 듯이,

"오늘은 성적이 매우 좋아. 무슨 새 광명이 생길 모양이 다."

하다가 성순의 불편한 안색을 보고 자기도 낯빛을 변하면 서,

"돈 부치고 왔니?"

"네"

성순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획 몸을 돌리어 쏟아지는 눈물을 얼른 손으로 받았다. 차마 그의 실망하는 꼴을 못 보아 함이다. 성재는 시험관을 든 채로 벌떡 일어 나면서 황망하게,

"왜, 왜, 응?"

하였다.

우리 재산이 가차압을 당했대요."

"가차압!"

"네. 그래서 한성 은행에서도 돈을 못 내어 주겠다고 거절 합디다."

"그러면 한성 은행에서 가차압했단 말이냐?"

"함사과가 가차압 청원을 했다구요."

"함사과가? 저 함 명은(咸明殷)이가? 으음."

하고 성재는 시험관을 깨어져라고 탁자 위에 세워 놓고 실 내로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한다. 성순은 복받쳐 오리는 눈물 을 억지로 참고, 오빠의 안색만 주의해 본다.

탁자 위에 주정등은 혼자 뻘건 불길을 굽실굽실 내면서 탄 다.

이 때에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나더니,

"얘, 성재야, 이리 좀 나오너라."

하는 부친의 황망한 소리가 들린다. 웬일인가 하고 성재는 실험복을 입은 대로 뛰어 나가고 성순은 가만히 유리창으로 내다보았다. 모자에 금줄 두른 배달 리가 와서 노인에게 가 내의 가차압된 이유를 전하고 간다. 일가족은 다만 서로 쳐 다볼 따름이요, 아무 말이 없었따. 토지 문권을 잡힌 채무의 기함도 멀지 아니하였으니 양식의 원천이 되는 전답까지도 불원에 강제 집행을 당하여 성재의 집은 아주 파산의 비경 에 빠질 것 같다.

2[편집]

성재는 '어디로 가셔요?'하는 성순의 말도 들은 체 만체 실 험복을 벗어 버리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아가 천변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좌편 골목으로 서너 집을 지나가서 어떤 솟을대 문 앞에 우뚝 선다.

행랑은 낡은 건축인데 다문만 새로운 것을 보니 본래 평대 문 집이던 것을 솟을대문으로 고친 것이 분명하다. 자기 문 패에는 해자(楷字)로 '함명은'이라고 쓰고 그 곁에는 그보다 좁은 작은 문패에 함 영민(咸永敏)이라고 썻다. 영민은 성재 와 함게 잠간 동경에 유학하던 사람이나, 명치 대학 법과 일년급에 삼 년이나 있다가 중도에 돌아온 후로는 성재와 아직가지 상봉한적이 없다.

대문 밖에는 인력거 세 대가 놓였고 안으로 여러 사람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재는 함사과의 생일이 이때이던 것을 기억하였다. 전일 같으면 자기의 부친되는 김참서(金參 書)는 으레히 제일로 초대를 받을 손님이언마는 금년에는 자기의 천(賤)한 채무자라 하여 초대도 아니한 모양이다. 성 재는 잠간 주저하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 높이 불렀다. 누가 들어도 그 소리에 분기(忿氣) 가 섞인 줄을 알겠다. 마당에 들어서니 사랑 대청에는 배반 (盃盤)이 낭자하고 수십 명의 중로가 취안이 몽롱하여 이리 저리 쓰러졌으며 구석구석 둘씩 셋씩 기생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아서 남남(??)히 지껄인다. 객들은 서로 듣지도 않는 소리를 크게 지껄이며 뚱뚱한 함사과는 화려한 연석에 기대 어 가장 만족한 듯이 객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지껄이는 말은 대게는 함사과에 관한 말이요, 함사과에 관 한 말이면 반드시 함사과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함사과가 젊어서 빈한한 사람으로서 이처럼 귀하게 된 것 은 함사과의 수완이 비범함이라고 칭찬하는 자도 있고, 아 니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함사과는 천복지인(天福之人)이라 부자만 될뿐더러 체력이 장(壯)하고 자녀가 많다 하여 천복 설에 찬성하는 자도 있고, 함사과는 나이 육십에 가까이 돼 도 아직도 첩 이삼인을 능히 거느릴뿐더러 간간 기생 오입 도 할 수 있으니, 과연 천복지인이라 하여 무한히 찬송하는 수척한 노인도 있고, 아니라 모두 다 그 부여조(父與祖)가 적선 적덕 (積善積德)한 인과라고 단언하는 자도 있다.

객들이 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함사과는 적선 적덕 한 부 조의 자손으로서 자수로 능히 가도를 융성케 하여 많은 자 녀를 두고 육십이 되도록 밤마다 젊은 첩을 거느릴 수 있으 니 천복지인이로다 함이 그 결론이였다.

성재는 연전 자기의 생신에도 여기 모인 이 객들이 와서 여기서 지껄이는 이 소리를 지껄이던 것을 생각하였따. 그 때 그네들은 자기를 보고 자기의 부친을 향하여 '성재는 참 기특한 사람이지, 함사과의 아들은 돈만 쓴다는데 이 사람 은 공부를 어떻게 잘 하는지 일본서도 제일등 가는 사람이 라는데, 참 김참서는 천복지인이요'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마다엥 들어와도 모두 다 못본 체하 고 올라오라는 사람조차 없다. 성재는 성큼성큼 당에 올라 함사과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과는 잠간 몸을 들며,

"응, 자네 어째 왔나?"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읍니다."

"응, 무슨 말, 후에 오게.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말들을 새 없네."

하고 일동을 향하여,

"자, 이제는 기생 소리나 들읍시다. 얘 기생들아, 이리 나 와 소리나 하여라. 이 동백(李東伯)이 아직도 아니 왔느냐?"

"응, 기생들아! 소리나 하여라."

하고 객들이 응한다. 객들은 대개 함사과의 젊었을 적 친 구이므로 아직도 빈궁한 자가 많다.

그에는 함사과와 김참서의 생일을 자기에의 큰 명절로 알 다가 지금 와서는 김참서는 윤락하고 오직 함사고가 남았을 뿐이다. 기생들은, 혹은 장구(長驅)를 들고, 혹은 가야금을 들고 한데 모여 앉는다. 장구 둥둥하는 소리, 가야금 줄 고 르는 소리가 나자 객들의 눈은 기생에게로 몰린다. 성재의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재는,

"급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응 자네 아직도 거기 섰네그려. 저편 소년들 모인데 가서 놀게."

"놀 새가 없읍니다."

"그러면 가게 그려."

3[편집]

성재는 발길을 들어 함사과의 복장(服裝)을 차 주고 싶었 다. 그러나, 꿀떡 참고 소리를 가다듬어,

"제 집을 가차압하시니 그런 법이 있읍니까."

"나는 몰라, 나는 모르네. 모든 채권은 다 변호사에게 위임 하였으니까."

"그러면 제 집을 가차압하도록 한 것이 영감은 아니십니다 그려."

"응, 채권은 다 변호사에 위임하였으니까...... 그러나 나도 자네 어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잔 세간을랑 빼어 놓으라고 그랬네."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읍니까?"

"나는 몰라, 변호사가 알지. 이변호사가 알어."

"좀 연기하도록 영감께서......"

"모른다는데 그러네, 몰라, 몰라."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끄러워하는 양으로 보인다.

여러 객들 중에는 이 회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혹 성재에 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마는 모르는 체하고 아무말도 아니 한다. 성재는 암만 말해도 쓸 데 없을 줄을 알고 좌중(座中) 에 일례(一禮)한 후에 뛰어 나왔다.

성재가 나온 뒤에도 함사과의 얼굴에는 불평한 빛이 사라 지기 아니하여, 기생들에게 소리하라는 말도 아니한다. 객들 도 모두 다 깨어져서 다른 데만 바라보고 가끔 함사과의 얼 굴을 도적하여 본다. 이 좋은 판에 성재 때문에 흥이 식을 것을 밉게 여기는 빛도 보이고 종일 잘 놀려던 것이 주인의 불평으로 중도에 그치지 아니할까 하고 근심하는 빛도 보인 다. 기생들도 웃기를 그만두고 공연히 장구며 가야금을 어 루만지며 서로 머리와 웃소매를 만지기도 한다. 그 중에 뚱 뚱한 기생 하나이,

"얘, 그게 누구냐?"

하고 곁에 앉은 키 작고 이빨이 좀 뻐드러진 기생에게 묻 는다.

"그게, 저, 김참서 아들이야. 그런데 무엇을 하느라고 그러 는지,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서 무슨 유리통을 불에다 쬐익 있어. 나도 심심하면 몰래 가서 참틈으로 디밀어 보지."

"유리통은 불에 쬐어서 무엇하누?"

"내가 아니? 꼭 손가락같이 생긴 것이더라. 그것을 이렇게 불에다대고는 우두커니 앉았겠지. 저 간호부 복장 같은 흰 복장을 입고서 내 무엇을 하는지 당초에 알 수가 없더라."

이것은 성재의 집 바로 곁에 사는 수향(水香)이라는 기생인 데, 어떻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객들도 차차 수향에 게로 고래를 돌려 성재의 말을 듣는다. 종일 유리통을 불에 다 쬐고 앉았더라는 말과, 무엇을 하는지 모르겟다는 말은 아마 좌중의 성재의 사업에 대한 비평을 대표한 것이겠다.

함사과를 천복지인이라고 칭찬하던 노인이 수향더러,

"그래, 날마다 그러구 앉았어?"

"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고 모양으로 앉았어요. 내가 요 렇게 창에 붙어 보는 것이, 혹 그의 눈에 띄든지 하더라도 슬쩍 볼 뿐이지 당초에 무슨 말이 없지. 내 이상한 사람 다 보지."

"너 어디 그 양반을 한번 놀려 먹어 보렴!"

하고 그 노인이 웃는다.

"아이구, 놀려 먹는 것이 무엇이야요. 돌부천데요. 돌부처 야요."

하고 깔깔 웃는다.

"네가 좀 수단을 부려 보았니?"

"호...... 아니야요. 그런 것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면 어떻게 돌부천지 아니?"

"보니까 그렇단 말이지요. 밤낮 우두커니 앉았기만 하니까 요, 돌부처가 아니고 무엇이야요."

하고 또 호호 하고 웃는다.

부슬부슬 떨어지던 가을비가 개고 구름으로 추워 보이는 일광이 한성 은행 벽돌벽을 스쳐서 함사과 집 사랑 대청에 들이쓰인다. 이윽고 장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나고, 기생 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며 간간히 '좋다' '좋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매우 불평하던 주인의 안색에도 화기가 돌고 그것을 따라 객들도 즐겁게 놀기를 시작한다. 기생들도 흥을 내어 좋아 소리를 연발하며 가끔 남녀성이 합한 웃음소리가 대문으로 나온다. 문 밖에는 이웃 행랑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새어 나오는 풍류를 얻어듣고 섰다. 그것이 마치 강아지나 고양 이가 주인의 밥상 밑에 앉아서 뼈다귀 던지기를 바라는 양 과 같다.

4[편집]

1[편집]

성재는 그 걸음으로 이변호사의 집에 갔다. 이씨는 이전동 경유학 시대에 같이 있던 사람이며, 그 때에는 학비에 궁하 여 흔히 성재한테 일 원, 이 원을 취하려 왔다. 성재는 혹 청구에 응하기도 하고 아니 응하기도 하였따. 성재에게 취 하여 간 돈은 갚아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학비는 군색하다 고 하면서도 의복과 거처는 학비가 풍족한 사람보다도 낫게 하고 있었다. 그는 동복과 하복이 있고 외투가 둘이나 되고 비옷까지 있었다. 그의 구두는 항상 청결하고 머리에는 늘 향수 냄새가 났다.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가올이나 인단을 지녔다. 그는 생활하여 가는 데 무슨 큰 재주가 있었다.

그가 법과 이년 적에, 꽤 값가는 세비로 양복 한 벅을 신 조(新造)하였을 때에는 입빠른 친구들은 그를 정탐이라고 한 일도 있었다. 아무려나, 성재는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그도 성재를 물론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가지 재주가 있으니, 그렇게 남의 시비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 는 사람은 대개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자집 자제들이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 자제들은 그를 선생 모양으로 애경하여, 그를 위하여서 는 무엇이나 아끼지 않았따. 아마 그의 비옷과 세비로도 그 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줄업 귀국한 후에 는 그네와의 교정은 대개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귀국하였을 땐 아직도 옛날이라 곧 어느 지방 법원의 서기가 되고, 그 후 이 년이 못 넘어서 판사가 되고 판사 된 지 일년 못 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가 될 때에도 어떻게 주선을 하였던지, 대구 본정(大邱本町) 거리에 큼직 한 사무소를 두고, 전화를 매고, 사무원을 이삼 인이나 부렸 고, 그 후에도 어떻게 수완을 부렸던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몇 백 추수나 할 재산을 얻고, 작년부터는 경성 대사동(大寺 洞)에 꽤 굉장한 가옥을 사고, 그것을 주택 겸 사무소로 쓰 며, 대문 안에는 전용 인력거까지 세워 두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비를 말하려 함은 아니지만, 그의 명예는 그 리 좋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일 년 이상 가는 친구가 없었 고 그의 친구도 결코 그를 칭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칭찬을 못 받으면서도 두려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능히 그를 대적할 생각은 내지 못하 였다. 그는 모든 것의 해결을 법률에 구한다. 누가 자기를 훼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고소한다고 하고 명예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위협하여서 마침내 저편의 사죄를 받고 야 만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가 송운(訟運)이 좋은 것이 니, 그가 맡는 사건은 대개가 승소가 된다. 그렇게 학식이 많은 것 같지도 아니하고, 변설이 능한 것 같지도 아니하고, 더욱이 일어의 발음조차 그다지 좋지도 못하여, 변론 중에 흔히 재판장을 웃기는 수도 많건마는 그래도 소송이 이기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동업자되는 여러 변호사들이 웃음거리 삼아 감탄한다.

동업자간에도 인심을 잃었따. 혹 사정을 보아서 연기 신처 의 의논을 받는 수도 있건마는 결코 응하지 아니하고, 개정 시간에 삼십 분만 대수방(對手方)변호사가 출석치 아니하여 도 사정없이 결석 판결을 청한다.

그러므로 동업자들은 좀 몸이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이변호산데─"

하고 빙긋 웃으며 반드시 출석한다.

좀 분명치 못한 사건이라든지 정당치 못한 하건 이라든지 한 것으로, 다른 변호사에게 거절을 당한 사건은 죄다 대사 동 이변호사 집 대문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무러한 사건이나 사양치 아니한다.

"변호사는 의사와 같아서 의사가 환자 가리지 아니함과 같 이 변호사는 사건을 가리지 아니할 것이다."

고 이전 어느 석상에서 취중에 어느 동업자의 조롱을 반반 한 일이 있다. 과연 그는 이런 주의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사라도 처녀의 낙태 청구에 응하면 범죄 가 되지."

하고 그 곁에 있던 어느 청년 변호사가 푹 찔렀으나,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다만 차후에 한번 만나자 하는 듯 이 한번 노려볼 뿐이다.

상승 변호사 이 일우(李一宇)군은 매우 함사과의 신앙하는 바 되어 함사과 집 대소 사건은 이씨에게 전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김참서 가옥 차압 사건도 이씨가 맡은 것이요, 성재는 이씨에게 사정을 하여 볼 양으로 지금 찾아온 것이 다.

2[편집]

대문을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한편 구석에는 국화가 수십 떨기 심겼으며 그 중에 다섯 여섯 떨기는 황금 색 꽃을 발하였다.

이전 행랑이던 것을 뒷간을 만들고, 뒷간 앞에는 새로운 목재로 일본식 손 씻는 물그릇 올려 놓는 돌을 만들었으나, 물그릇은 반이나 깨어져서 그 밑에 굴러있다.

깨끗이 쓸어 놓은 마당 건너편에는 툇마루 달린 남향 방이 있고, 그 곁에 사 간방이나 되는 대청이 있다. 대청에는 새 로 유리문을 하여 달고, 양식으로 탁자와 의자를 놓았으며,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든지 추성각(秋聲閣)아러둔자 하 는 고물전에 나오는 액(額)이 무수히 걸렸고, 그 중에는 위 백제운운(爲栢齊云云)이라 한 당시 명가의 액도 걸렸다. 백 제(佰薺)는 아마 그의 당호(堂號)인가 보다.

성재는 이 응접실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점령하고 사환 아 이에게 명함을 들여보냈다. 응접실 서쪽에 있는 사무원실에 는 오륙 인 시골 사람인 듯한 자가 근심스러운 듯이 물러앉 았고 벽에 걸린 전화가 연이어 운다. '네, 그래요' 하는 말 과, '영감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다'하는 말이 들린다.

성재는 '영감께서는'하는 말에 이 일우 군의 금일의 득의 (得意)와 칠팔 년 전 동경 유학 시대와를 비교 아니할 수 없 었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이 이일우군과 해강(海岡)이니 소 호(小湖)니 하고, 당대 명성이 쟁쟁한 양반네가 '위백제 인 형'이라 하고 서한을 하여 주는 이 일우 군을 같은 사람이라 고 보기는 참 어렵다.

이군뿐 아니라 성재의 동기생들은 대개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 혹은 중등 정도 학교의 교장이 되며, 혹은 은행의 지배인이니 취체역이니 하고 서슬이 푸르며, 혹은 판검사, 혹은 변호사 하고 조선에 있어서는 일류 인물로 자기 임하 고 남도 허하게 되었다. 길에 나서면 반드시 인력거를 타고, 차를 타면 반드시 백표는 실로 성재밖에 없을 것이다. 동경 서 학교에 다닐 때는 최연소자되는 자기에게 수학 문제도 묻고, 화문 영역(和文英譯)이며 작문 같은 것도 의뢰하던 그 네들은 지금 와서는 모두 다 번쩍하는 신사가 되었다.

성재는 평생 자기를 비(飛)하면 충전하려 하여 불비(不飛) 하고 명(鳴)하면 경인(驚人)하려 하여 불명(不鳴)하는 자로 자임(自任)하고 도리어 한때의 영화에 현혹하려 하는 그네를 홍곡(鴻鵠)을 모르는 연작(燕雀)으로 여겨 일종 경멸하는 뜻 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칠 년간이나 연하여 실패 또 실패를 당하고 금일 에 와서는 마침내 노부모와 어린 처자 있는 집까지 가차압 을 당하고 나니 미상불 기운이 꺽이기도 한다.

성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얘, 인력거 불러라."

하며 나오는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그것은 이일우 군의 음성이언마는 못 만난 지 육칠 년에 그 움성조차 변하 였다. '돈 있거든 한 일 원'하던 음성과 '얘, 인력거 불러라' 하는 음성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연석에 기대어 앉아서 소화 불량한 배를 슬슬 내려 쓸면서 길게 '이리 오너라'하는 음성이다. 문이 열리며 순흑색 세비로에 줄 있는 넥타이를 맨 일우가,

"아, 이거 누구요?"

하며 들어와 손을 내민다. 성재도 웃고 일어나면서 일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었을 뿐이요 꼭 쥐지는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 만이요?"

하고 일우가 의자에 앉으며 궐련갑의 뚜껑을 열며,

"자, 한 대 피우시오."

"내가 담배를 먹나요."

"아 참, 안 잡수셨지. 그렇지마는 학생 시대에는 아니 먹어 도 지금도 안 자셔요. 하하하."

하고 자기만 부도(敷島) 한 개를 골라 물고 불을 붙여 길게 한모금 빨아서 휘 내뿜는다. 성재는 전보다 뚱뚱 하여진 몸 과 과음한 듯한 일우의 눈을 보면서,

"참, 많이 축하합니다. 이처럼 성공을 하셔서."

"성공이 무슨 성공이요. 내야 버린 사람이지요."

"천만에......"

"직업이 직업이니까 그저 술 먹고, 가끔 계집도 희롱하 고...... 내 생활이 이러하외다. 그런데 김형께서는 무슨 발명 을 하신다는데 어찌 되었지요."

"발명! 발명이 무슨 발명이요."

하고 픽 웃는다.

"어디 한번 큰 발명을 하시오."

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3[편집]

사환에게 차와 과자를 명하고,

"왜 어느 학교 일이나 좀 보시지요. 몇 학교에 화학 시간이 나 가르치면 돈 십 원이나 수입이 될 터이데."

성재는 이 말이 매우 불쾌하였다. 그러나 안색엔 내지도 아니하고,

"어디서 오라는 데도 있지마는 갈 마음도 없고, 또 붙든 일 이 있으니까 그것을 버릴 수도 없고......"

"그러면 모르겠소마는 만일 어느 학교에 가실 생각이 있으 시거든 저라도 힘껏은 주선하여 드리지요."

하고 불쌍한 듯이 성재를 본다. 성재는 그 말이 더욱 불쾌 하였다. 자기는 상당한 자기의 실력을 믿을 대에 남이 자기 를 한 무능력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보다 불쾌한 것이 더 없 을 것이다.

진실로 일우는 성재를 불쌍히 여긴다. 될 수 있으면 건져 주리라 하는 정성도 있다. 그뿐더러 자기의 권력을 보이기 위하여서라도 성재에게 어느 중학교 화학 교사의 직업이나 얻어 주고 싶었다. 만일 성재가 법률 지식이 좀 있었던들 자기의 사무원으로 써 주겠노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성 재는 한번 더 불쾌감을 참고,

"고맙소이다마는 이제 다시 교사되기도 무엇하고, 그냥 지 나갈랍니다."

일우도 성재의 안색에 좀 듣기 싫어하는 빛이 있음을 보고 다시 권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속으로는 '주제 넘은 것, 이 제 어떻게 살아가나 보자'하고 비웃었다.

사환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하얀 고뿌에 가배차(枷排茶)를 넣고 집시에는 각사탕(角砂糖) 두 개씩을 놓았으며 칠한 과 자분에는 일본 과자가 담기고 과자 위에는 이쑤시개 두 개 를 꽂았다. 조선 집에 양식 탁자, 의자도 우습지마는 가배차 에 일본 과자도 우습고, 그것보다도 미투리 신은 화학자와 세비로 입은 변호사와의 대조가 더욱 우스웠다. 성재는 차 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

"그런데 좀 청할 말이 있어서 왔지요."

"네. 무슨 말이요."

하고 일우는 한 손으로 차를 저으며 한 손으로 시계를 내 어본다.

"노형이 저 함사과의 가차압 사건을 맡으셨어요?"

"응, 응, 네. 그랬지요. 그런데?"

"그런데 좀 연기하여 주실 수 없겠소?"

"응?"

"얼마 동안 좀 연기하여 주셨으면 좋겠단 말이요."

"응, 그러나 그것은 나는 모르지요. 나는 함사과의 대리니 까."

"그런들 좀 변통이 없겠어요."

"그것은 함사과한테 가서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 함사과한테를 갔더니 노형께 가서 말을 해보라고, 이 사건은 노형께 전임을 하였노라고 그럽디다그려. 그래 서......"

"그것은 어려운 걸요. 대관절 기한이 벌써 일삭이나 지났다 던데요."

"네, 한 이십여 일 지났지요."

"그러니, 채권자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그러나, 함사과는 우리 세의(世誼)......"

"허허. 지금 세의가 어디 있소."

"그러면 노형은 친구의 정이고 채권은 채권이요."

"그러니까, 내 청을 못 듣겠단 말씀이구려."

"아니 그런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대리인이니까."

하고 이쑤시개에 과자를 꿰어 주며,

"자 과자나 자시오─"

성재는 좀 분격하여,

"과자 먹을 생각도 없소. 그러니까, 내 청은 못 들으신단 말씀이구려."

하고 재차 묻는다.

"아직도 가차압이요. 강제 집행은 아니니까 어떻게 힘을 써 보시구려. 함사과뿐 아니라 다른 채권자들도 이번 가차압한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지 아니하리다. 속히 손을 쓰셔야 할 거요."

이 때에 사무원이 공손이 들어와서,

"재판소에서 전화가 왔읍니다."

"응, 나오라고?"

"네, 송변호사께서 개정 시간이 되었다고."

"응, 지금 간다고 그러오. 그리고 인력거 왔소."

"네, 벌써 와 기다립니다."

"그러면 김형, 나는 재판소에 일이 있으니까...... 가끔 놀러 오시지요."

하고 사환에게 모자를 받아 들고 휙 나간다.

5[편집]

1[편집]

성재의 실험실 문 밖에 어떤 여행 양복 입고 가방 든 청년 이 인력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린다.

"선생 계시우?"

하고는 유리창으로 엿본다.

'웬 일인가?'하면서 또 두드린다. 얼마 만에 안에서 통통통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에 청년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시월 해가 짧아서 벌써 가등에 불이 켜지고 오싹오싹하는 찬바람이 휙휙 불어 지나간다.

딸랑 하고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나더니 실험실 밖 대문으 로 통한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인다. 그 청년은 검 은 중절모를 벗어 들고 공순히 인사하고 성선도 잠간 고개 를 숙여 인사한 뒤에,

"들어오시지요."

하였다.

그 사람도 반갑지마는 이렇게 근심 많고 고적한 때에는 더 욱 반가왔다. 그 청년은 한 결음 문안에 들어서면서,

"선생, 안계셔요?"

"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셔서 아직 아니 오십니다. 어디를 갔는지......"

"오늘은 노는 날도 아닌데 용하게 출타를 하셨군."

하고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올라가 기다릴까. 괜찮습니까?"

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듯이 성순을 본다.

"네, 올라오셔요. 지금 오시는 길이야요?"

"그저께 금강산 떠나서 석왕사(釋王寺) 구경하고 지금 남대 문 와 내렸어요. 단풍이 어찌 좋은지."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성순은 곁에 놓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서 방으로 들어가 고 그 청년도 성순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한번 실내를 쭉 둘러보더니 탁자 위에 황갈색 액체의 시험관을 들어 보면 서,

"어때요, 그동안 좀 성공이 되었읍니까?"

"네, 매우 성적이 좋다고 그러던데요."

"그것, 참 기쁜 말이올시다. 저도 이번 금강산 가서 어떻게 그림도 많이 그리고 글도 많이 지었는지...... 그림은 하물로 부쳤지요. 이따가 찾아 오겠읍니다. 보시거든 잘 그렸다고 칭찬이나 해 줍시오."

하고 성재의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아차! 성순씨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하고 즈꾸로 싼 가방을 열더니 화구 상자, 원고지, 후건, 치분 같은 것을 집어 내고 맨 밑에서 백지로 싼 네모난 뭉 텅이를 하나 내어 성순에게 주면서,

"이것이 선물이야요."

하고 웃는다. 성순은 그 중량을 보는 듯이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한다.

"펴보리까?"

한다.

"보셔요. 이리 줍시오, 제가 펴지요."

하고 성순의 손에서 그 뭉텅이를 빼앗아서 탁자 위에 놓고 얽어맨 끈을 끄른다. 서너 겹 싼 것을 제치니 그 속에서는 단풍 잎사귀, 고산 식물, 동해에서 나는 조개, 회엽서(繪葉 書), 자기가 그린 폭포와 산의 스케치 같은 것이 나오고 맨 나중에는 역시 백지로 꽁꽁 싼 것이 하나이 나온다. 청년이 일일이 설명하기를 시작한다.

처음에 단풍 잎사귀를 들고,

"이것은 바로 유점사(楡岾寺) 뒤에서 딴 것이외다. 하루 아 침에 나아가 보니까 저편 절벽 위에 단풍이 어떻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방이 다 단풍이지마는 그 중에 그 절벽 위의 단풍은 특별히 좋아요. 그런데 길이 있읍니까. 천신 만고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걸 따 왔지요. 한움큼 땄다가 다 내어 버리고 꼭 이것두 잎사귀만 가져왔지요.

하고 핏밫 같은 단풍 잎사귀를 들어 성순에게 주며,

"평지에는 도저히 이러한 단풍은 없읍니다. 이것은 꼭 심산 에 가야만 구경하는 것이야요."

성순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재미있게 본다.

다음에는 고산 식물에 앉은뱅이 같은 것을 들고,

"이것은 해발 팔천 킬로 이상에서 난 것이야요. 오월에야 봄을 만났다가 팔월에 가을 만나는 불쌍한 식물이야요. 이 놈은 여름의 더움이라고는 구경을 못하지요. 찬바람 속에 났다가 찬바람 속에 죽는 가엾은 신세지요. 그러면서도 이 렇게 고운 꽃을 피웁니다그려."

하고 자색 꽃을 만지면서,

"자─ 어떻습니까. 꽤 곱지요!"

"네, 참 고와요."

하고 코에 대어 본다.

"향기는 없어요. 향기는 없어요."

하고 성순을 본다.

2[편집]

과연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 다음에 그 청년은 조그 마한 백지 뭉텅이를 들고 풀려 하더니,

"아니, 이것은 보실 필요가 없어요."

하고 양복 호주머니에다가 집어 넣는다. 성순은 호기심이 나서,

"그게 무엇입니까? 보여 주셔요......"

"아니─"

"자, 보여 주셔요."

"보여 드릴까, 웬걸 일후에 드리지요."

"내게 보낸 선물을 왜 안 주셔요─"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서로 부끄러워서 피하던 눈과 눈이 가끔 서로 마주친다.

"그러면 보여 드릴까."

"자─ 내십시오."

하고 성순은 그 청년의 양복 소매를 조금 잡아 당겼다. 그 리고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 청년은 성순이가 그 처럼 대담하게 자기의 소매를 당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것을 내어 성순에게 준다. 성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반쯤 몸을 돌리면서 분주히 종이를 편다. 그 청년은 곁눈으 로 슬슬 성순의 손을 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꽁꽁 산 것을 다 ㅍ루고 나니 나오는 것이 도토리 한 통, 그 청년은

"하하, 속으셨지요. 그것이야요, 그것."

성순은 그것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

"이게 무엇이야요?"

"이게 상수리나무라는 크고 굳은 나무의 열매야요. 도토리 라는 것이야요. 하하하."

하고 쾌활하게 웃지마는, 성순은 웬 심펑을 모르고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 본다.

"자세히 설명을 해 드려요?"

"네, 무엇이야요?"

"그것은 땅에다 심으면 명년 봄에는 노란 움이 나오지요."

"그러고는?"

"나와 가지곤 조금씩 조금씩 자라지요."

"또 그다음에는?"

"자꾸 자라지요!"

"또, 그 다음에는?"

"또 자꾸 자라지요."

"에그, 그만두십시오. 나는 정말 무슨 뜻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내어 던지련다. 그 청년은 큰 변이나 나는 것 처럼 두 팔을 번쩍 들면서,

"아니, 아니, 아니, 뜻이 있지요. 뜻이 있지요."

"글세 자꾸 자라서는 어떻게 되어요?"

"자꾸 자라서는 커다란 나무가 되지요. 내가 이번 금강산에 서 보았는데."

하고 팔을 벌리면서, 이렇게 세 아름 되는 나무가 있어요─ 이 것이 자라면 그 러한 큰 나무가 되지요."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지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도토리들이 다 땅에 들어가서 움이 나서, 자라서, 자라서 자꾸 자라서 또 그와 같은 큰 나무가 되지 요."

"또,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또 그렇지요."

"이제는 그뿐이야요?"

"네, 그뿐이지요. 그게 재밌지 않아요."

"그것 참 재미 있읍니다."

"과연, 재미 있지요? 우리가 꼭 그 재미로 사는데─ 선생이 나 제나 성순씨께서도."

"어째 그 재미로 살아요?"

"그것을 모르셔요?"

하고 이윽히 성순의 눈을 보더니,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왜 제가 그림을 그리나요?"

"그리고 싶어서."

"또?"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또?"

"에그 모르겠읍니다."

"그러니깐 아직 유치하시단 말이야요."

"물론 제야 유치합지요."

"아차! 실례했읍니다. 세상에는 성순씨보다 더 유치한 사람 도 많은데."

성순은 좀 격분해서 입술을 깨문다.

3[편집]

그것은 다 농담애올시다마는."

하고 점잖은 어조로,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미술 없는 조선 사람에게 미술 을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즉 제가 이 도토리가 되어서 움 이 나서 자라서, 자꾸자꾸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이러한 도토리를 많이 맺잔 말이야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지금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지마는 장차는 수백 명 수십 명 있게 하자는 말이지요─ 알아들으십니까. 선생도 그렇지요. 자기 혼자서 아무리 큰 발명을 한다 하면 그것이 무엇이 귀합니까. 선생 같은 화학자가 수백 인 수천 인 나 게 해야 비로소 뜻이 잇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이것은 제게다가 선물로 주심 뜻은?"

"그것까지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뜻이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아맞혀요?"

"응, 알아맞혀 보시오."

하며 벽에 걸린 팔각종을 보더니,

"벌서 다섯점이올시다. 그런데 왜 아니 오시나. 아, 어디 가신지 모르셔요?"

잠간 그 청년의 이야기에 취하였던 성순은 문득 자기가 슬 픈 경우에 있는 것을 깨달아서 안색이 변하여 지며 한숨을 쉰다. 발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손으로 머리도 만져 보고 턱도 쓸어 보고 제가 제 입술도 빨아 보고 하던 그 청년은 성순의 불쾌한 안색을 보고, 놀란 듯이,

"왜 어디가 편치 않으셔요?"

"아니요."

"그러면 제가 다해서 노염을 품으셔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네, 그렇다면 안심이지마는......"

하고 또 발로 방바닥을 울리기 시작한다. 성순은 한참주저 하다가,

"집이 가차압을 당했읍니다."

"가차압?"

"채권자가 우리 집을 가차압했어요."

"에? 집행을 했어요? 누가?"

"함사과라는 이가."

"함사과?"

"그런 사람이 있읍니다. 이전에는 우리 집 은혜도 많이 졌 다는데 돈 한 삼천 원에 차압을 하다니......"

그 청년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그래 선생은 무어라고 하셔요?"

"아까 가차압을 당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나가셨지 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 청년은 쾌활하던 빛이 없어지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다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갚아 줄 돈이 없나요?"

"한푼이나 있읍니까. 토지 문권도 말짱 은행에 들어가 고...... 아버지께서는 아까 술만 잠수시고 심화를 내면서 어 머니만 못 견디게 조르시고."

"어머니는 왜? 어떡하란 말이야요?"

"심화가 나니 그러시지요. 문권을 잡힐 때에는 늘 어머니께 서 권하셨다고......"

하고 치맛자락을 눈에 대고 돌아서며 운다.

이 때에 안마당에서 두어 마디 큰소리가 나더니,

"어이구, 참으셔요. 그러면 어찌해요."

"놓아라, 이것 놓아. 집 다 망했다."

하는 소리가 나며 실험실 문이 발칵 열리자 미친 듯한 김 참서가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뛰어 들어오더니 앞에섰는 성 순을 보고,

"이 계집애 무엇하러 여기 섰느냐."

하고 성순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 청년은 황망히 일어나서 김참서에게 인사를 한다.

김참서는 그 청년의 팔을 잡으며,

"여보게 내 집이 망했네그려. 육십이나 되도록 죽을 고생을 다하고 집간이나 잡았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그것조차 다 빼앗기고 말았네. 우리 성재라는 놈은 무엇을 하노라고 제 부모 누워 죽을 자리도 없게 하나, 응."

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청년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너무 염려 말으셔요. 무슨 도리가 생기겠지요."

"말 말어, 이 실험실인가 무엇인가를 온통 두들겨 부수고 말아야지."

하고 탁자를 향하여 달려들련다.

세 사람은 울며 만류한다.

4[편집]

"놓아라, 아니 놓을 테냐."

"글쎄, 참으셔요. 이러면 성재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성재가 슬퍼해! 제 부모의 누워 죽을 집 한간까지 팔아 먹 는 놈이, 그 불효한 놈이, 으흐!"

하고 몸부림을 한다.

"어서 놓아. 저게 다 무엇이냐. 저 번쩍번쩍하는 것이 다 무엇이어. 저것이 내 돈을 다 먹었구나. 내가 손발이 다 닳 도록 빌어 놓은 돈을 저것이 다 먹었어! 내 저 원수. 엣, 저 것을 말짱 깨물어서 먹고 말란다. 먹고 죽을란다─"

"아버지, 좀 참으셔요."

"이년, 가만 있거라. 자식도 다 귀찮다."

"여보, 이러면 정말 집이 망하고 말겠소."

하고 부인은 참서를 껴안아 앉히려 한다.

참서는 원래 건강치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심화로 늙었고 또 소주를 과음하여서 기운이 지쳤던 터이라 그만 기운 없 이 펄썩 주저앉는다. 그 청년이,

"너무 염려 말으셔요. 제희가 다 무사하게 하겠습니다. 어 서 들어가 누워 계십시오."

그러나, 이 말에는 대답이 없고 참서는, '응'하면서 앞으로 푹 쓰러진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쳐들 적에는 벌써 눈을 뒤집고 숨이 끊어졌다. 청년은 참서를 반듯이 눕히면서,

"여보, 냉수, 냉소."

하였다.

부인은.

"이게 웬 일이요─"

하고 푹 쓰러질 뿐이다. 성순은 울면서 대야에 냉수를 떠 들고 나온다.

청년은 입에 냉수를 물어 참서의 얼굴과 가슴에 뿜고, 성 순을 시켜 옆구리를 비비게 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눈물이 가리워 잡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여보시오, 성순씨, 지금 여자가 그처럼 정신이 약해서 무 엇한단 말이요. 눈물을 거두고 힘껏 하시오."

하고 명령을 한다.

청년은 입으로 뿜는 것이 부족한 듯하여 나중에는 대야에 남은 냉수를 얼굴과 가슴에 푹 쏟았다. 양장판 위에는 사방 으로 길을 지어 물이 흘러간다.

그래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 청년은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참서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중학교 생리학 시간에 어렴풋이 들어 두었던 인공 호흡법을 실행하였다. 손을 제일 늑골에 대어서 쇄골(鎖骨)까지 올려 흔들 때에 살 없는 참서의 흉부 는 마치 해골을 만지는 것 같다.

부인은 정신 없이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참서의 창백 한 얼굴을 보더니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 울음 소리를 따라 성순은 소리 없던 울 음도 차차 소리를 낸다. 그 청년도 가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열심히 인공 호흡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심장이 이미 마비하여 버린 참서의 몸은 식어가고 점점 굳어 갈 뿐 이였다.

그 청년은,

"하인 불러서 곧 가서 광교 백의사 오라고 이르시오."

성순이가 나간 뒤에야 그 청년도 비로소 실내의 어두움을 깨닫고 전등의 나사를 틀었다. 방안에 전광이 가득 차차 창 백한 김참서의 얼굴이 눈을 부릅뜨고 볼때에 그 청년은 소 름이 쪽 끼쳤다. 부인은 눈물을 거두고 하염없이 앉았다. 그 청년이 참서의 곁에 가서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할 때에 부인 은 청년의 팦을 물리치며,

"그냥 두시오. 성재나 들어오거든 한번 보기나 하게. 이제 보면 다시는 못 볼 터이니깐."

"성훈(性勳)은 어디 갔어요?"

"어디 집에 붙어 있답디까. 어디를 다니는지 밤낮 밖에만 나아가지. 그것도 아버지 애를 끝끝내 태우다가 임종도 못 보고. 맏며느리는 가난한 살림이 싫다고 친정에만 가 있고, 작은며느리는 철없는 성훈이가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그러 다가 이렇게 되니 이것이 웬 일이요. 전생에 무슨 죄악이 과분하여서 이렇게도 팔자가 기구하겠소."

하고 다시 울기를 시작한다. 청년도 다시 위로할 말이 없 었다. 일생을 고생으로만 지내다가 노경에나 좀 낙을 볼까 하였던 것이 운명은 그것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반생을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살았고, 후반생은 자녀에게 안락을 주 기 위하여 살았다. 그는 돈을 모으려 하여 성공하였ㄷ. 자녀 를 기르려 하여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녀에게 안락 을 주고 자기의 여생도 안락 속에 보내기로 성공할 줄을 확 신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되매 그는 이 귀찮은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6[편집]

1[편집]

가난한 살림이 싫다 하여 친정에 가 있던 성재의 부인도 머리를 풀고 울며 돌아오고, 성훈에게 쫓겨 갔던 그의 부인 도 그 모양으로 돌아와서 소(素)병풍을 두른다. 미망인을 중 앙에 두고 두 며느리와 한 딸이 둘러 앉아서 치맛자락을 얼 굴에 대고 우는 양을 문 밖에서 보는 성재도 새삼스럽게 슬 픈 마음이 나서 한참이나 울었다. 문 밖에 모여 선 얼마 아 니 되는 친척들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나 다 얼굴은 찌푸 렸다.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불이 켜지고, 거기는 이삼 인씩, 혹 사오 인씩 모여 앉아서 장례지낼 일을 의논하는 이도 있고, 김참서의 일생을 말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방에서는 김참 서의 별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는 웃는 소리가 안방에까지 들렸다.

부엌에도 행랑 여인들이 모여서 말 없이 혹은 솥에 물을 붇기도 하고, 혹은 불도 때고, 혹은 혹은 분주히 여러 사람 들 사이로, 컴컴한 마당을 지나서 부엌과 고간 사이로 왕래 도 한다.

성재의 실험실에는 청년 세 사람이 탁자를 새에 두고 둘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그 청년에게 김참서 임종의 상태를 듣는다. 그 청년의 눈에는 아직도 아까 놀란 빛이 덜어지지 아니하여, 김참서의 누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바로 여기외다. 여기 이렇게 눕더니만 그만 숨이 끊기겠지 요."

얼굴 좁고 평생 방긋방긋 웃어가지고 있는 전 경(全敬)이 가,

"어디가 아프단 말도 없이?"

"아프단 말을 할 새가 있어야지요. 마치 드는 칼로 생명 줄 을 싹 베는 모양으로 뚝 끊어지고 말아요.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쉽게 끊어진담─"

전 경이가 더 빙긋거리며,

"왜 쉽게 끊어졌어요? 육십여 년이나 닳아지다 닳아지다 다 닳아져 끊어졌는데."

이 말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었다.

"참, 사람의 생명이란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앉았던 변 영일(卞英一)이가 김참서 의 눙서떤 자리라는 데를 슬쩍 보며 말한다.

"지금사 깨달았소? 철학자의 깨달음이 하기만야(何其晩也) 요.

함은 전 경의 말.

"글쎄, 그 광경을 보고 나니깐 산 것 같지 않구려. 한참 인 공 호흡을 시키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일어나서는 가만 히 제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지요─ 아직도 내 심장이 뛰는 가 하고."

"응 아직도 뛰어요."

"그래서 안심이 되었소?"

"안심이 어찌 되어요? 이것이 언제까지나 뛰겠는고, 금시 에 서지나 아니할까...... 마치 시계를 땅에 떨어뜨리면 그만 서는 모양으로, 그렇게 서면 어찌하나. 그다음에는 어찌 되 는고, 다른 세상이 또 있는지 아주 스로지고 마는지...... 그 런 생각이 나요. 그리고는 몸에 땀이 쭉 흐르겠지요."

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같이 한번 몸을 흠칫해 보인다.

"글쎄. 사후에 또 생명이 있을까. 어지 철학자, 우리 범인 에게 그 해결을 주소서."

"전군은 잠시도 그 버릇을 못 떼겠소, 그렇게 사람을 조롱 하는 버릇을."

"죽어야."

하고 그 청년(그청년)이 웃는다.

"암, 그야말로 심장이 서야, 하하하."

"그러면 금시로 전군의 심장이 서기를 바라오. 인도를 위하 여."

"그것은 심하구려."

하고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런데, 김참서의 생명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 방안에 있을까?"

"안반에 들어갔겠지."

"옳지 시체를 따라서."

"한번 싫어서 벗어 내버린 몸뚱이를 무엇하러 따라 다녀?

벌써 저 멀리로 갔을 것이요. 천당에 갔거나 그렇지 아니하 면 지옥에 갔꺼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여행 중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금 행리(行李)를 수습하는 중이거나."

이 때에 안방에서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쉬─"

하고 세 사람은 말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2[편집]

전 경이가 눈이 둥글해지더니 사방을 살피며,

"지금 누가 이 방으로 들어왔소?"

두 사람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람 같은 것이 쑥 들어왔는 데......"

하고 전 경은 방안을 둘러본다.

"또 무슨 장난을 하노라고 그러오?"

하고 변이 주먹으로 전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아니 아니─ 저것 보아. 저기 잇네, 저기 있네."

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피하며 때리려는 사람을 막는 모양으로 두 손을 펴서 앞을 막으며,

"민군, 민군! 민군 뒤에, 민군 뒤에─"

민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여보 전군─ 웬 일이요?"

"저것을 보시오. 김참서가 금방 민군 뒤에 섰는데, 민군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는데."

변도 일어섰다. 그러나, 실내에는 오촉 전등고 성재의 실험 기구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까 쏟아진 물만 장판 위 에 여기저기 번쩍번쩍한다.

전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언해 헛소리를 하며 몸을 떤다.

변은 실내를 둘러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전의 어 깨를 흔들며,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글쎄 별안간에 웬 일이요?"

그러나, 전경의 눈은 마치 미친 사람의 눈 모양으로 성재 의 실험 탁자 근방을 노려보먀, 점점 몸이 더 떨린다.

다른 두 사람도 머리카락이 온통 하늘로 올라 솟는 듯하여 부지불각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눈은 전경의 파래 진 얼굴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변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줄 을 알고, 다시 전희 손을 잡으며,

"여보, 전군─ 내가 누군지 알겠소?"

"흥 흥. 네가 응. 네가, 알지 알지."

"아이고 저것이 웬 일이야!"

하고 민이 전의 어깨를 한번 더 때리며,

"여보, 내가 누군지 알겠소?"

"응. 다 알아."

"그러면 이름을 불러 보오."

"너는 항우(項羽)고 이 애는 장 비(張飛)구, 허허허허. 내가 잘 알지?"

"무엇이요? 내가 누구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고 말을 하 시오─"

하며 민이 눈을 부릅뜬다.

"너는...... 옳지 너는...... 저것 보게, 네 그러지요. 옳지 알 았읍니다. 잘 알았읍니다. 응응, 그렇구 말구. 네, 네, 네."

"여보 전군 누구더러 하는 말이요?"

"김차서더러! 저기 김참서께서 계시지 않니?"

"어디?"

"저기 저 탁자 위에."

"탁자 위에 어디?"

"저기 안 있어. 저 굴뚝 위에 말이어!"

"어디 굴뚝이 있어?"

"저기 저 유리 굴뚝 위에...... 네, 네, 그래요, 옳지요. 내일, 응 모레, 네 네 네."

"여보, 김참서가 무슨 말씀을 하시오."

하고 변(卞)이 엄격한 얼굴로 물르매,

"흥, 흥. 얘들아 저게 무슨 소리냐, 누가 우느냐. 소리를 하 느냐."

하고 귀를 기울인다. 두 사람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 침 이웃 기생집에서 장구 소리에 맞춰 여성(女聲) 육자배기 가 들린다.

"저 기생집에서 기생이 소리를 하오."

"아니, 그 소리 말고."

"그것은 안에 조객이 왔나 보오."

"누가 죽었나?"

"김참서께서 아니 돌아가셨소."

"하하하하. 김참서께서 여기 계신데, 하하하."

"어디?"

"여기."

하고 탁자를 가리키더니 다시,

"여기─"

하고 자기의 가슴을 가리킨다.

민은 다리가 벌벌 떨리며, 변더러,

"여보, 어쩌면 좋소. 전군이 미쳤구려."

"글세, 미친 모양이로구려. 워낙 쇠양하였으니까."

"흥흥, 전군이 미쳤소?"

하고 전이 깔깔 웃더니 손뼉을 탁 치고,

"옳지, 내가 좀 가 볼 일이 있는 것을 잊었구나."

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아간다. 밤의 찬 공기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다. 전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어디로 달아 난다. 두 사람은 문도 닫칠 생각 없이 우두커니─ 마주보고 섰다.

3[편집]

"민군, 여기 계셔요. 내 따라가 보고 오리다."

"그러면 나도 가 보지요."

"아니, 그러다가 김군이 나오면 어째요? 김군이 오늘 저녁 에는 퍽 흥분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겠 소. 나 혼자 얼른 가 보고 올 것이니 여기 계시오."

하고 뒤에 나아간다. 민은 하릴없이 혼자 떨어져 탁자에 기대어 앉았다.

담배를 내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그러할수록 아까 김참서가 거꾸러져 운명하던 자리가 보이고, 아직도 번쩍번쩍하는 물이 보이며 그리고는 그 자리에 김참서가 눈을 부릅뜨고 누운 양이 보 이고, 자기가 그 시체에 올라앉아 시체의 좌우 옆구리를 비 비던 양이 보인다. 민은 벌떡 일어나서 크게 기침을 한 뒤 에 방향을 돌려 거기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김참서는 여 전히 그 자리에 누워서,

"얘 민아, 내 옆구리를 주물러라─"

하는 것 같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아까 전군이 말하던 모양 으로 자기의 뒷통수를 꾹 내려누른 듯하여 민은 다시 벌떡 일어나 위엄을 갖추고 그 자리를 노려보았다.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과, 갑자기 미치는 것을 본 민은 자기도 금시에 죽는 듯하고 금시에 미치는 듯하였 따. 그래서 민은 무서운 생각을 이길 양으로 일어나 실내로 왔다갔다하며 동경 유학시에 배운 속가(俗歌)도 중얼거려 보 고, 찬미가도 읊어 보다가 그것도 효력이 없어서 마침내 안 으로 통한 전령(電鈴)을 눌렀다.

(하하, 우습다.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위의를 갖추고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앉았 을 때에 문이 열리며 쾌활한 어멈이 고개를 디밀어 보더니,

"청주서방님 혼자 계셔요?"

"그림자까지 들이 있네."

"두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한 사람은 미텨 나가고, 한 사람은 미친 사람 잡으러 나가 고......"

"전서방님이 미쳤다네."

"에그머니."

하고 문에서 물러선다.

"여보게, 안에 손님 많이 계신가?"

"몇 분 안 계셔요. 그런데 전서방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미쳤어...... 그렇거든 서방님 좀 나오시라게."

"상주님이 어디를 나와요? 전서방님이 미치셨어요?"

"그래, 미쳤다네...... 급한 일이 있다고 얼른 나오시라고 그 러게."

"무슨 급한 일이야요?"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얼른 좀."

어멈은 화를 내는 듯이 문을 와락 닫고 들어간다.

이윽고 성재가 기운 없는 얼굴로 들어온다. ㅁㄴ은 다만 성재의 얼굴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는 들어와서 탁 자 앞에 놓인 자기의 의자에 앉더니,

"다들 어디 갔소?"

"전군이 미쳤어요."

"전군이?"

"그저 갑자기 미쳐요. 나하고 변군하고 셋이 이야기를 하다 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고 몸을 떨지요. 한참이나 그렇더니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면서 어디로 달아나고 말았어요."

"그래. 변군은 전군 따라갔구려?"

"네. 내 그런 변은 처음 보았소."

"전군도 그만 미치고 말았구려."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전군의 집에 그러한 유전이 있어요. 아마 그 조부가 미쳐 서 한강에 빠져 죽었지요. 그리고 그 고모도 한분 미쳤읍니 다. 지금은 벌서 죽었지마는 우리도 그가 머리를 풀고 울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는 것요. 참 불쌍한 사람이지."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나요?"

"옛날은 꽤 넉넉하게 지냈다는데 그 조부가 미치기에 아주 망한 심이지요. 그리구 그 부친은 조사(早死)하고 어머니는 어디로 갔읍니다. 그래서 한참은 어머니 찾으러 간다고 야 단을 했지요. 하더니 그만미쳤구려."

하고 매우 애석하는 빛을 보인다. 민도 더욱 애석하게 여 겨 그가 미쳐 나가던 문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욱 이상한 것은 성재의 너무 침착한 태도였다.

4[편집]

성재는 전경이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았더니,

"전군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십 칠팔 세 적부터 그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하나도 성공한 것은 없이 고생만 하였지요."

"북간도도 갔다 왔다지요?"

"북간도뿐인가요. 북간도, 서간도, 해삼위(海蔘威)...... 아마 상해 등지에도 갔었지요. 무슨 시원한 일이나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나 무슨 시원한 일이 있겠소. 공연히 고생만 했지 요. 북간도에 가서는 일변(一邊) 학교에 교사도 되고, 일변 민단을 조직하여 굉장히 활동을 하였답니다. 물론 자기가 중심이 된 것은 아니지마는 이모, 김모의 휘하에서 아마 제 갈량(諸葛亮)이가 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서북파(西北 派)니 기호파(畿湖派)니 하는 싸움에 경영하던 일은 모두 수 포에 돌아가고, 전군은 반대파에게 붙들려서 죽도록 매를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하다가 어떤 청인의 집에서 두 달이 나 치료를 하였더랍니다. 그러구는 다른 데로 가려니 노수 (路需)가 있나요. 그래서 거기서 해삼위가지 그 추운 겨울에 걸어갔더랍니다. 그 때에 전군의 발가락 두 개나 빠졌지 요...... 오른발이던가...... 옳지, 왼발이지. 그리구는 해삼위에 들어가서 또 얼마 동안 되지도 않는 일에 애를 쓰다 또 육 혈포변(六穴砲變)통에 거기도 못 있게 되고 그리고는 아마 일정한 처소도 없이 표류를 하였나 봅디다. 자기의 ㅁ라을 들으면 장관이 많지요. 아마 직업도 아니 하여 본 것도 없 지요. 담배말이, 고기잡이...... 그러니까 웬걸, 옷이나 변변히 입고 음식인들 잘 먹었겠소. 재작년에 온 것을 보니까 몸에 는 살 한점 없이 뼈만 남았읍디다. 그러다가 얼마안 있어 ○○음모 사건의 연루자(連累者)로 붙들려서 일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나니까 사람 같지 않읍디다. 옥에서 나오니 있 을 데가 있소. 그래서 아마 총감부(總監部)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지 내가 호출이 났읍디다그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요. 그후에 일 년이나 우리 집에 있다가 마침 ○○ 소학교 에서 한문 교사를 구하기에 거기 주선을 하여서 지금까지 지내왔지요."

"본래 어느 학교 출신인가요?"

"이전에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광무 학교(光武學校)라는 학교가 있었읍니다. 어떻게 되어서 들어갔떤지 일진회원이 되어 가지고는 그 학교에 다녔지요. 전군이야말로 참 늙은 개화꾼이지요."

"그러면 나이 많게?"

"지금 서른 하나인가 그렇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아니 하고?"

"혼인할 새가 있나요. 불사가인생업(不事家人生業)하고 지 사(志士)랍시고 돌아다니면서......"

"아, 교사된 뒤에도 혼인을 아니 해요?"

"한 달에 십 오 원 받아 가지고 혼인을 어떻게 하오? 그뿐 더러 선생은 자기의 복적한 일을 성공하기까지는 집도 아니 이루고 혼인도 아니 한다고 그러지요."

"그 목적이란 무엇이야요?"

"무엇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무슨 목적이 있노라고 그러지 요. 무엇이 목적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 목 적을 이루는 날까지 말하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면 언제나 성공할 듯하오? 하고 물으면 성공할 날은 모르지요. 아마 성공할 날이 었겠지요, 하고 대답하지요. 성공할 날은 없겠 지마는 목적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러지요."

"아따, 그게 무슨 목적이야요."

하고 민은 이상한 듯이 웃는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읍니다."

하고 선배가 후배를 내려다보는 듯하는 눈으로 민을 보면 서,

"아무려나, 전군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평생시에는 마치 아 무 생각도 없는 사람 모양으로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고 빙 긋빙긋 웃기만 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는 딴 세계를 배포(配 布)한 사람이지요. 다만 십 년 전 사람이지요. 십 년 전에는 가장 새롭던 사람이지마는 시대는 추이(推移)하고 자기는 자 기의 사상(思想)을 묵수(墨守)하니까 전군과 이 시대와는 아 무 상관이 없지요. 전군은 자기의 이상대로 세상을 개조하 려 하였으나 세상이 전군을 발길로 차던지고 저 갈 길을 간 게지요. 전군은 자기를 차던지고 혼자 달아나는 세상을 따 라가려고도 아니하고 자기의 속에만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특별한 세상을 배포하고 있지요. 이것을 실현하는 ㄱ서이 자기의 목적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목적을 달할 날이 없단 말이지 요."

5[편집]

이러한 말을 들으니 민에게는 전을 동정하는 마음이 더 간 절하여진다. 일변 전에게 관한 말도 더 듣고 일변 이러한 말로 성재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새로 궐련을 피워 물며,

"그러나 마침애 미쳤구려. 미친 것이 도리어 행복일는지 모 르지요. 상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 광중(狂中)에야 자유 로 아니 되겠어요?"

하고 웃었다.

성재도 빙그레 웃는다. 민은 성재의 웃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민은 성재의 이 기쁨을 아무쪼록 오래 유지하 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오랫동안 고생과 실망이 모이고 모여서 미치는 원 인이 되었나 보지요."

그러나 성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 우두커니 팔각목종을 쳐다보고 있더니 또 빙긋이 웃으면서,

"나도 전군과 같이 미치지 아니할는지요. 어째 미칠 것만 같소. 칠년 동안이나 실패만 하고 가산은 온통 집핼을 당하 고, 종일 돈 변통하러 다니다가 늙으신 부친께서는 불시에 돌아가시고...... 아니 부친게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손 으로 내 손으로 부친을 죽인 심이지요. 노친을 편안하시게 보양도 못하고 도리어 밤 낮 걱정만 하시게 하다가 마침내 내 손으로 죽이기까지 하였으니......"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는 또 울음 소리가 나온다.

육십이나 넘도록 해로하다가 그 지아비가 죽었다고 무엇이 그리 슬프리오마는 성재의 모친의 생각에는 김참서가 죽는 날이면 온통 살림을 할 수 없이 될 것 같다. 아무리 재산이 패하여도 참서만 생존하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마는 참서까지 죽으면 다시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병풍을 볼수록에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그러나 며느리들과 딸을 보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흑흑 느끼는 그네를 도리어 위로하였다. 이웃에서 조상 왔던 손들도 다 돌아가고 이제 는 친척 이삼 인이 대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뿐 널따란 집 조객들을 공궤(供饋)하지요. 그리하면 조객들도 오래 유 하련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것이 어떻게 서러운지 몰랐다.

삼년 전 성훈의 혼례 적에 성대하던 연락(宴樂)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금일의 적막을 생각할 때에 마치 천지가 바뀌는 듯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자기가 일생에 애써서 얻어 높은 큰집 아 랫목에 누울 수 있었다. 만일 사오 일만 지체하여 죽었던들 이 집 아랫목에도 누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해도 행복 일는지 모른다.

성재는 극히 친군한 사람 이외에는 부고도 하지 아니하고 극히 간단하게 질소(質素)하게 그 부친도 장례를 지냈다. 장 례를 지낸 지 삼일 만에 성재는 퇴거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 하고, 그 집안을 떠나서 변군(卞君)의 주선으로 얻은 계동 (桂洞)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하였고, 자기가 처 분할 수 없는 세간 중에도 여간 한 것은 다 팔아서 양식을 장만하고 실험 기구만 전부를 옮겨 갔다. 그 때에 성재는 함사과에게 이러한 편지를 하였다.

'여(余) 귀하에게 대한 채무를 변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귀 하가 퇴거를 명하기 전에 미리 퇴거하나이다. 황금밖에 의 리를 모르는 귀하의 복력(福力)이 만년 천년 하기를 바라나 이다.

실로 계동으로 반이(搬移)한 날의 광경은 참으로 비참하였 다. 늙은 성재의 모친은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성재를 보아 서 웃는 낯을 지었으나, 철없는 성재의 아내는 마치 어린아 이 모양으로 소리를 내 울며,

"나는 아무데도 안 갈 테야요. 계동은 안 갈테야요."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7[편집]

1[편집]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하고 떼를 쓰다가 초상 상주인 몸으로 마침내 어린것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달아나고 말았으며, 성재는 본체 만체 하 고 하염없이 빙그레 웃었다. 성순과 성훈의 부인만 아무 말 없이 그 모친을 따라 계동으로 갔다. 성훈은 부친이 돌아간 익일에야 어슬렁어슬렁 집에 돌아왔으나 가족 중에는 누구 하나 그를 주의하는 자도 없었따. 그러나 성훈은 저 혼자 눈이 붉게 되도록 울었으며, 장례날에도 상복을 입고 성재 의 뒤를 따라갔고, 하관할 때에는 바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나 계동으로 반이하는 날에는 성훈은 조반도 아니 먹고 어디로 나가고 말았다.

7[편집]

1[편집]

함사과의 집에는 내외에 등촉이 휘황하였고, 사랑에서는 어두운 후에 새로운 연락이 시작되엇따. 주식도 이제는 취 차포(醉且飽)하고 명창(名唱) 이 동백(李東伯)이가 장구 소리 에 맞춰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나섰다 하 면서 춘향이 타령이 한참이다. 함사과는 여전히 아가 그 안 석에 기대어 한 팔로 강점(江點)이라는 기생을 안고 앉았고, 낮에는 소송건(訴訟件)으로 미참(未參)하였던 이변호사도 술 로 붉은 얼굴에 금안경을 번쩍거리며 무릎에 기댄 기생의 등을 어루만지고 앉았다.

'아이구 이게 웬 일이야'하는 춘향 모의 엄살을 고개를 흔 들어 가며 할 때에 일동은 '좋다─' '응, 그렇지'를 연발하며 무릎을 툭툭 친다. 그러면 광대는 더욱 익살을 부려가며 춘 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데를 가장 구슬프게 내려 엮는다.

슬픔이 그 극에 달하여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을 때에 일 동은 '좋다─' '얼씨구!'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생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조그마한 손뼉을 딱딱 치며 기쁨을 못 이겨 하는 듯이 앉은 춤을 춘다.

아 때에 어떤 노인이,

"얘, 그만하고 이제는 어사 출도나 하여라."

"응, 그게 좋다. 어사출도 해라."

기생들 중에 몇 사람의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중간을 약 하고 어사 출도 막이 나온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 佳肴)는 만인고(萬人膏)라'가 지나고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 며 일단 소리를 높여, '쿵쿵쿵쿵, 삼문을 열어라.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길게 소리를 뽑을 때에 대문으로부터 어떤 사 람이 뛰어 들어오면서 '암행어사 출도야'를 연호(連呼)하고 연석에 올라선다. 어느 개천에 빠졌는지 옷에서는 흙물이 흐르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갈랐던 머리카락이 되 는 대로 이마를 가렸고, 손에는 다 떨어진 흙 묻은 미투리 짝을 들었다. 일동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 괴물을 주시하 였다.

"오냐, 이놈, 네가 운봉(雲峰)이냐?"

하고 곁에 섰는 노인의 코를 잡아 흔들며,

"네가 운봉이지! 나는 이도령이다. 암행어사다."

하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함사과는 위의를 갖추어,

"이놈, 어떤 미친 놈이냐. 이리 오너라. 이놈 끌어 내려라."

하고 분김에 벌벌 떤다.

괴물은 '히히'하고 떤다.

"오냐, 네가 남원부사(南原府使)로구나, 나는 누군고 하니 사또 자제(使道子弟) 이도령이야...... 하하하."

하고 흙 묻은 미투리로 함사과의 뺨을 때린다.

"아이쿠, 이놈 잡아내어라."

하는 소리에 일동이 달려들어 그 괴물을 붙들고, 망건 쓴 하인들이 뛰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괴물은 어떻게나 힘이 센지 손과 발과 흙 묻은 미투리로 되는 대로 둘러치더니 마 침내 여러 하인들에게 붙들려 꽁꽁 결박을 지었다. 일동의 옷과 뺨에는 온통 흙이 묻고, 기생들은 벽에 착 달라붙어서 발발 ㄸ■ㄹ기만 하다가 그 괴물이 결박된 뒤에야,

"아이고마."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일동은 흙 묻은 것을 툭툭 털면서 결박진 괴물을 노려본다.

괴물은 결박이 되어 마당으로 끌려 내려가면서,

"하하,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괘심한 놈들. 내가 암행 어사인데, 이놈들. 모조리 모가지를 자를 놈들!"

하고 한참 호령을 하다가 ㄲ?ㄹ깔 웃고 나서는 갑자기 태 도가 변하여,

"여보게 함사과, 내가 자네한테 좀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이놈 가만 있거라."

하고 하인이 손뼉으로 괴물의 뺨을 때린다.

"이놈, 내가 누군데. 나는 김참서이다. 내가 아까 죽었는데 함사과 너를 잡으러 왔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김참서인 데 자네를 두고 혼자 갈 수가 있나, 자 염라대왕한테로 같 이 가세."

함사과는 쭈볏쭈볏 하늘로 솟는 듯하였다.

"어찌해? 무엇이 어째?

"하하, 자 어서 갓 쓰고 나오게. 지금 대문 밖에 사자가 와 서 기다려."

하고 고개를 돌려 대문을 향하며,

"여보 사자들, 함사과 여기 있소. 옳지 저기 저 뚱뚱한 것 이 함사과요, 내 좋은 친구지."

하인들은 괴물을 대문 밖으로 끌고 나아갔다. 함사과의 얼 굴은 회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 괴물은 성재의 집에서 뛰어나온 전 경이었다.

2[편집]

그날 밤에 함사과는 극히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김참 서가 꼭 아까 보던 괴무■ㅗㄹ 모양으로 차리고 와서 지팡 이로 자기의 머리를 무수히 때리며,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를 모르는 놈아."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자기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 무수히 사죄하였다. 그래도 김참서는 듣지 아니하고 더욱 성을 내어 지팡이로 자기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견디지 못하여,

"사람 살리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에 한자리에서 자던 기생이,

"영감, 영감!"

하고 함사과를 흔들어 깨우며,

"웬 잠꼬대를 그리 하셔요?"

하였다.

"응"

하고 입을 쩝쩝하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치더냐?"

"그게 무엇이야요. '아이구 사람 살리로'하시면서 내 가슴을 이렇게 때리지 않았어요."

하고 함사과의 가슴을 때리고 깔깔 웃더니,

"아이구,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속에서 뛰어나온다.

"왜? 왜, 응"

하고 잡아당기려는 것을 피하여서 원숭이 모양으로 방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무서워서 어떻게 모시고 자요. 자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 고 사람의 복장을 때리니."

"다시는 안 그러지, 이리 오너라."

이 모양으로 다시 잠이 들었다가 또 한번 아까와 같은 꿈 을 꾸었다. 이번에는 김참서가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소복을 입고 가만히 자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기의 가슴을 발로 툭툭 차며, 아무 말도 없이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함사과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러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를 때 마다 기생은,

"나는 영감 모시고 자기 싫소!"

하고 이불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러할 때마다,

"다시는 아니 그리마."

하고 빌었따.

그 이튿날 김참서가 별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무서 운 생각이 났다. 전은 날마다 밤마다 함사과의 집근방을 돌 면서 흉한 말을 하고,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심참서의 장례를 지낸 이튿날 저녁, 자정이 지나서 함사과 가 근래에 새로 정한 기생 첩으로 더불어 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에 담 밖에서 그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얘, 함사과야, 내가 오는 동짓날 저녁에 와서 너를 잡아 갈 테다.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담엔 죽는단 말야. 히히 히......"

이 말을 듣고 첩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으악' 소리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 하였다.

"정말 영감 모시고 못 자겠소."

하고 첩이 낯을 찌푸린다.

"어째서?"

"무서워서!"

"그러면 어쩔 테냐?"

"나는 갈래요."

"어디로?"

"집으로."

함사과는 성을 내어 벌떡 일어나면서,

"이년,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싫어요. 밤마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무서운 소리 를 지르니 누가 영감을 모시고 자요."

함사과는 더욱 성을 내어 눈을 부릅뜨면서,

"이년, 어디 딴 서방이 생긴 게로구나!"

"서방 없을까?"

"어째? 또 말해 보아라."

"다 죽어가는 영감장이 아닌들 서방 없을까요."

하고 깔깔 웃는다.

함사과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때릴 듯이 주 먹을 둘러메며,

"이년, 냉큼 기어 나가거라. 내가 해준 옷 다 두고, 미텨, 반지, 다 두고!"

"네, 그러지요─ 에그 좋아!"

하고 문을 열려 하는 것을 함사과는 문을 막아서며,

"어디로 가니?"

"가라면서요!"

"이놈, 함사과야, 오는 동짓날 잡아 갈 테야! 하하하하."

"에그머니나! 아이구 무서워라."

하며 문에 가까이 가면서,

"비키시오. 갈랍니다. 옛소, 가락지 받으오."

3[편집]

"글쎄, 집안 다 망하겠구려. 늙은 것이 젊은 계집들을 끼고 밤낮 야단이요?"

하고 안방에서 함부인의 호령이 나온다.

"이놈의 집이 망할라나. 웬 미친 놈이 여우 모양으로 밤낮 흉조만 부려!"

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함부인은 돈 모으기에 매우 유력하던 원훈(元勳)이므로 함 사과도 좀처럼 박대를 하지 못하고 가끔 겁겁하니 부인의 책망을 받는다. 부인도 벌써 육십이 가까웠으니까 질투의 정도 없어질 만한 때인마는, 그래도 여자란 생명이 있는 날 까지는 질투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양(樣)하여 지금도 함사 과가 기생이나 첩을 끼고 자는 줄만 알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끔 이러한 호령을 한다.

그러나 함사과는 이 호령도 무섭건마는 잠시도 미색을 떠 날 수는 없었다. 젊어서 모든 쾌락을 다 억제하고 돈 모으 기만 목적을 삼다가 돈 만원이나 자기의 소유가 되고, 또 자기의 여년이 얼마 아니 되는 것을 생각하매 술과 미색은 자기가 당연히 취할 권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됭서따. 그의 일생의 이상은 돈이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였던 돈을 모으 고 나니, 이제 남은 이상은 쾌락일 것이다. 그는 생래(生來) 에 돈과 주색 외에 사회에 무슨 고상한 추구물이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금전 거래부 외에 서적이라고 들어 본 것이 없었고, 금전 거래 외에 사람과 교제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사업이라면 돈 모으는 것 이외에 없는 줄 알 고, 쾌락이라면 동물의 본능적 욕망 이외 없는 줄 안다고 반드시 책망도 못할 것이다. 실로 종교라든지, 문학이라든 지, 사교라든지, 미순이라든지─ 이러한 ㄱ서을 쾌락으로 알 게 되려먼 십수년간 문명적 교양이 필요한 ㄱ서이다.

만일 김참서와 함사과와의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잇다하면 그것은 전자는 사서 삼경(四書三經)과 ≪고문진보전후집권 (古文眞寶前後集權)≫이나 읽었고, 후자는 그만한 교양이 없 는 까닭이다. 김참서의 아들되는 성재와 함사과의 아들과는 차이는 실로 유전과, 가정의 위화(威化) 및 교양의 삼자에 돌릴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오래 하면 독자가 염증을 낼 것이니까, 그 만하고.

그로부터 함사과는 밤마다 그러한 무서운 꿈을 꾸어서 낮 에도 항상 신색이 좋지 못하고, 그뿐더러 신경이 과민하여 져서 공연한 일에 성을 잘 내어 부인과의 논쟁도 전보다 번 번하여지고, 그 아들과의 논쟁도 전보다 격렬하게 되었으며, 하인들이며 내객들도 항상 그의 비식(鼻息)을 엿보게 되엇 다. 더구나 전(全)이 와서 흉한 소리를 부르짖고 간 낮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하여 외딴 방에 기생을 불러 가지고 술만 마셨다. 광인의 섬어(?語)인 줄은 알건마는 '동짓날에는 잡 아 갈테야'하는 말이 염두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한 생각 을 할 때마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잘 때에는 반드시 기생을 곁에 눕히고야 잠이 들지 마는, 함사과가 자다가 발광한다는 소문이 기생들 간에 퍼 져서, 좀 깨끗하고 인망 있는 아이들은 오기를 즐겨하지 아 니하므로, 돈을 빚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손님을 볼 수 없 는 기생들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한 기생들도 오래야 삼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루만에,

"나는 싫어요."

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서 함사과가 부리는 서기 중에 한 사람이 함사과의 기 생 선택 사무를 전문으로 보게 되엇따. 이 사무는 실로 용 이치 아니하니, 우선 함사과를 모시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 다음에는 화채(花債) 그리 비싸지 아니한자, 다음에는 함사 과의 마음에 드는 자, 화류병이 없는 자, 그다음에 또 한 조 건은 함사과의 아들이 관계하지 아니한 자, 이 최후의 조건 이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 깨끗한 젊은 기생은 태반이나 아 들이 손을 대었으므로 함사과는 그 아들이 택하고 남은 찌 꺼기 중에서 다시 택해야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한 기생을 가지고 부자가 동시에 경쟁하는 때 도 있으니 이러한 때는 아들도 한사코 그것을 부친께 빼앗 기지 아니할 양으로 전력을 다하여 운동하므로 대개는 그 부친이 패배에 돌아가고 만다.

나는 결코 함사과 부자를 훼방하려고 이러한 말을 쓰는 것 이 나니니, 만일 그러한 ㄱ서이 목적일진대 더 유력한 재료 가 산같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고결하신 여러 독자에게 그러 한 불결한 말을 차마 쓰지 못하여 이만하고 말련다.

8[편집]

1[편집]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이라고 일컫는 것같이 이 세상에는 괴로운, 슬픈 일이 꽤 많다. 청춘에 과부가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노년에 독자를 죽이는 것도 슬픈 일이지마는, 지금 토록 부자로 있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도 꽤 슬픈 일 이다. 많은 비복에게 옷과 음식을 주지 못하여 모두 내어보 내는 것도 슬픈 일이요, 손님을 환영하던 사랑문을 닫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이요, 몇 달 전가지 제사 때나 잔치 때에 많이 모여들어 가장 친절한 체하던 친척과 오랜 친구가 차 차 발을 끊는 것도 더욱 슬픈 일이요, 그러다가 명주옷을 입던 몸에 굵은 무명옷을 입게 되고, 반찬이 많아서 상이 좁은 것을 한탄하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차차 줄어 들어 가는 것도 슬픈 일이요, 귀한 것 모르고 자라던 자녀들에게 결핍함을 깨닫게 하는 부모의 마음도 슬픈일이며, 더구나 ' 내 집 보아라'하고 자랑하고 살던 큰 집을 남의 손에 내어주 고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 가지 아니치 못하는 것은 참말 슬 픈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 것은 가족 중에도 여자요, 여자 중에도 모친이요, 모친 중에도 자수 성가한 모친일 것 이다.

성재의 모친은 과연 여장부였었다. 그 성격이 굳건하기로 는 도리어 김참서 이상이었었다. 김참서가 무슨 일에 화를 내거나 실망한 때에는 부인이 도리어 참서를 위안하였고, 여간한 일에도 눈물을 내지 아니였다. 아마 성재의 강한 의 지는 그의 모친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장부도 이 번 사건 후에는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쾌활 하던 용모에는 침울한 빛이 보이고, 얼굴에는 전보다 주름 살이 더 잡힌 듯하였다. 별로 즐기지 아니하던 담배도 시작 하고 가끔 정신없이 멀거니 앉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는 성훈에게 소박을 받으며, 성순은 아무 데나 좋은 서방을 얻어서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마는, 성재 는 이제는 실험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그의 심정이 아니 슬퍼질 수가 있으랴.

둘재 며느리도 이제는 나이 벌써 이십이니, 남편 그리운 생각도 있을 것이요, 어린아이를 안아 보고 싶은 생각도 있 을 것이다. 그러한데 약 이개 년간 성훈은 거의 한번도 그 의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고, 혹 그의 모친의 책망에 못 이 겨 그 아내의 방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뛰어나 가고 말았다. 성훈이가 뛰어나가는 기색을 보고는 반드시 모친은 둘째며느리 방에 가 보고, 가 보면 반드시 며느리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에는 집이 작아서 서로 있게 되었으므 로 더욱 자주 며느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 일 전부터 성순이를 보내어 한자리에서 자며 서로 위 로하여 주게 하였다.

일 주일 전에 성재의 재산은 온통 경매에 부함이 되어 사 십 석과 한성 은행의 저금 이백 육십 원이 성재의 재산으로 남았다.

성재는 이전 행랑방이던 단간 방을 치우고 거기다가 책자 와 실험기구를 벌여 놓고, 그 팔각목종도 달아 놓았으나, 독 서할 생각도 없고 실험할 생각도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조 반을 먹고 나서는 저녁때에 돌아왔다. 성훈도 이 집에 온 뒤로 이삼 차 들어왔으나 그 아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신도 벗지 아니하고 어디로 나가고 만다. 어디로 다니는지, 무엇 을 하는지, 어디서 밥을 얻어 먹는지, 그것을 묻는 이도 없 으매 아는 이도 없다. 그러나 의복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하릴없이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지어서 다려서 개켜서 넣었 다가 내어 주는 것을 입고 나간다.

이리하여 성재의 집에는 낮에도 모친과 며느리와 성순과 그 쾌활한 어멈이 있을 뿐이다. 그 어멈은 이 집에 잇는 지 가 벌써 집여 년인데, 한 육칠 년 전에 중병이 난 것을 김 참서가 약을 써 가며 치료하여 주었다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 때에 어멈은,

"저는 마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마님께서 돌아가시면 마님 의 묘 곁에 묻힐랍니다."

하였다. 이 밖에 작년 봄에 성순이가 어느 동무 집에서 얻 어 온 퍼피라는 얼룩 고양이가 잇다. 그 때에 성순이가 영 어를 배우다가 퍼피(강아지)라는 말을 고양이 새끼라고 잘못 기억하여서 이렇게 이름을 지엇던 것을 지금까지 그냥 부르 는 것이다.

2[편집]

반이(搬移)한 후 얼마 동안의 성재의 집은 아래와 같다─ 모친은 종일 자기의 방에 홀로 있어서 담배만 피우고 가끔 기침을 하였으며, 그 때에 가 보면 대개 눈물을 흘리고 앉 았었다. 그러나, 딸이나 며느리가 들어오면 얼른 눈물을 감 추고,

"빨래 다 하였느냐?"

하고 이러한 말을 물었따.

그런 줄을 아는 성순이와 성훈의 아내는 반드시 얼른 뛰어 나와서 눈물을 씻었다.

성순은 그 모친의 실신하여 함을 걱정하여 몇 번 위로하려 하였으나 정작 위로의 말을 하려면 성순의 눈에 눈물이 고 여 도리어 그 모친의 위로를 받았다.

"사람이란 굶어 죽는 법은 없느니라, 염려 말아라."

모친은 창가(唱歌)의 후렴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자 기가 무일물한 적빈에서 일어나 그만한 부명을 듣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매, 미상불 자기의 능력에 무슨 자신이 있는 모 양이나, 그러나 자기의 남편이 이미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 기의 연령이 이미 쇠한 것을 생각할 때에 실망함도 없지 아 니하였다. 다만 육십 평생에 분투하여 오던 그 기개가 아직 도 남아서 지금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능히 가도를 부흥할 수 있다고 자신하려 할 뿐이다.

성재가 날마다 아침에 나아가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것과, 그의 얼굴에 항상 우수가 있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훈이 가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여 그의 아내가 공규(空閨)에 서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리 장부다운 모친도 단상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에는 간다 온다 말없이 참서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한바탕 실컷 울었다.

모친 자기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성훈의 아내도 할 일 이 없었다. 큰 집을 쓰고 부유한 살림을 할 때에는 무슨 일 이 그리 많은지, 바쁘기도 바이 없더니, 집이 작아지고 생활 이 구차하게 되매 손에 잡을 일도 없고 머리에 생각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다만 과거 일을 회상하고 슬퍼하 기만 위하여 사는 것 같았다. 그네는 형제에 시량(柴糧)이 없음을 알되, 또 그것을 걱정은 하되 어떻게 하여야 자기네 를 현재의 궁핍에서 구제할는지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다.

성순은 슬퍼하는 어머니와 낙심하여 하는 오빠를 보고 더 할 수 없는 간절한 동정을 일으키지마는 다만 그뿐이었고, 성훈의 아내는 다만 청춘의 공방이 슬펐을 뿐이요, 일가의 곤궁에는 별로 감각함이 없었다. 모친은 일가의 곤궁도 알 고, 그 곤궁을 벗어나야 할 줄도 알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듯한 자심도 잇는 듯하지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책도 없고 정견도 없었다.

딸과 며느리가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대신에 모친은 그것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운명을 벗어 나려는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다만 운명의 손에 자기 를 내어 맡기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데 이르러서는 세 사람이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네는 다만 과거를 회상 할 뿐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는데─ 할 줄은 아나 '어찌하면 한번 다시 그러한 미래를 현출하여 볼까?'하 는 생각은 하여 보지 못한다. 그뿐더러 그네에게는 그러한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 대게 그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으 니까.

오직 늙고 충실한 어멈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기까지 잠시도 쉴 큼 없이 은혜받은 주인의 집을 위 하여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힘은 유력하기에는 너무 약하 였다. 찬물에 걸레를 빨고, 물독에 언제든지 물을 채워 두 고, 마루를 닦고, 때를 찾아 장독 뚜껑을 열엇다 닫쳤다 하 고 나무 값이 비싼 것을 생각하여 나무를 절용하고, 양식이 떨어져 가는 것을 근심하여 자기가 먹는 밥의 분량을 줄였 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랴.

김참서는 자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에 자기가 자기의 가정 에 주었던 기쁨과 희망과 활기와 활동을 온통 거둬 가지고 갔다. 다행히 집의 위치가 높고 남향이므로 성재의 서재로 된 전 행랑방을 제한 외에는 연일 호천기의 따뜻한 일광이 종일 비추었다. 그러나 그 일광을 향락할 만한 정신의 여유 를 가진 자는 오직 퍼피라는 고양이뿐이였다. 퍼피는 날마 다 마루에 누워 편안히 자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3[편집]

날마다 그 오빠의 동무가 되던 성순은 근일에 그 오빠가 집에 붙어 있지 아니하므로 큰 적막을 깨달았다. 그뿐더러 전과 같이 정다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무슨 말을 물 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안했다.

성재는 마치 성난 사람 모양으로 항상 ㅇ러굴을 찌푸리고 잇었다. 한번은 늦게 돌아온 성재에게 저녁 상을 내다 주며 (성재는 별로 안방에를 들어가지 아니하고 집에 오면 행랑 방에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할 때,

"아무데도 간 데 없다!"

하며 밥을 두어 숟가락 뜨고는 왈칵 밥상을 떠밀었다. 그 때에 성순은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울었다. 그 후에도 한번 성재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확실히 방안에서 왔다갔다 하면 서도 대답이 없었고, 또 한번은 '시끄럽다, 들어가거라!'하고 문고리를 건 적도 있었다. 그러할 때마다 성순은 혼자 울 뿐이다.

성재의 기분이 이러하게 되었으므로 모친도 다만 슬쩍 볼 뿐이요 성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성 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 오빠를 불쌍히 여김보다도 자기를 불쌍히 여겨야 하였었다.

이리하여 오빠가 있을 때에는 오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 다가 오빠가 나간 뒤에는 얼른 오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 오빠의 의자에 앉아 오빠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엉엉 울었 다. 성순의 생각에 오빠에게 버림이 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할 때에는 흔히 민(閔)이 찾아왔다. 그러나 성순은 과도한 자기의 설움에 민이 오는 것도 그리 큰 사건 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친절히 하여 주는 민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얼마큼 기쁘지 아니치도 않아서 가끔 자기의 슬픔을 잊고 두 세 시간이나 담화에 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여 덟 시경에 오빠가 나가고 자기가 오빠의 방을 치우고 한참 앉았다가 팔각목종의 시침이 아홉을 가리킬 때가 되면 민이 기다려지게 되고, 오후 한 시나 두 시쯤 하여 문에서 민을 전송하고 나면 서운한 듯한, 적막한 듯한 생각도 나게 된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앉았다가 다시 들창 밖으로 민의 돌아 간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민의 하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도 하여 보고, 또는 그 이야기 중에 재미있던 구절 을 혼자서 반복도 하여 보게 되었다.

그래서 민이 왔다가 가면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잇는 민의 자리에 가만히 손도 대어 보고, 살짝 올라 앉아 보기 도 하였다. 일찍이 아니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혹 꿈에 민 이 보이는 수도 있고, 그러할 때마다 반갑게 민과 악수를 하면서 평상시보다 자유롭게 민과 여러 가지 회화도 하였 다.

이러하게 되니 성순은 오빠의 냉담함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니하고, 자기 가정의 현재의 비운은 결코 자기의 비운이 아니오, 자기에게는 특별히 광명 잇는 희망의 전도가 있는 듯하였다. 그는 일기에 이러한 말을 쓰게 되었다─ '...... 오늘 M이 오셨다. 전보다는 이십 분이나 늦게 오셨 다.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낯이 어떻게나 좋은 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전(全)씨가 함사과의 고소로 옥에 들어갔다가 정신병자인 것이 관명되어 일주일 만에 방 면되었다는 말을 하시고 진정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셨다.

과연 M은 동정이 많은 어른이다. 나도 전씨의 불행을 생각 하고 눈물이 흘렀다......' '...... 오늘 아니 오셨다. 왜 아니 오시나. 나는 기다리다 못 하여 화를 내어서 <퍼피>를 때렸다. 왜 아니오시나...... 아 차, 웬 일일까?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어젯 저녁에는 M과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웬 일인가? 왜 오늘 은 아니 오셨나? 내가 왜 이렇게 M을 보고 싶어하나?' '...... 언제 만나도 반가운 M이 오늘은 더욱 반가왔다. 오늘 은 그 <도토리>의 이유를 가르쳐 주시마 하더니 후일에, 후 일에...... 하고 그냥 두고 말았다. 대체 그 <도토리>에 무슨 뜻이 있는고?......' '......M이 왜 날마다 올까? 오빠를 보러 오는 것일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일까? M이 날마다 오는 줄을 알면 오 빠께서 무어라고 아니 하실까? 무일! M이 아니 오면 나는 어쩌게! 오오, M! 내M! <M>! 좋은 글자다.' '......아이구머니 내 가슴에 왜 이다지 울렁울렁할까? 머리 가 왜 이렇게 아플까? 일기 쓰기도 싫다! M, M......'

9[편집]

1[편집]

십 이월을 잡은 어떤 눈이 몹시 오는 날, 성재는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사람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계동 골목에 는 오직 성재의 타고 온 인력거 자리뿐이었다. 광명등에 여 기저기 불이 반짝반짝 켜질 때에 성재는 기운 없이 인력거 에서 내려서 좁고 낮은 대문을 들어서며,

"성순아!"

하고 불렀다.

이 소리에 성순이와 어멈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대개 성재의 목소리가 마치 중병인의 목소리와 같으므로, 성재는 성순에게 돈지갑을 내어 주며,

"자, 여기서 인력거 비용 일 원을 주고, 그리고 내 방에 자 리 좀 펴 다오. 아이구."

하며 행랑방 문고리에 매어달린다.

"에그, 동경서방님, 이데 웬 일이셔요?"

하고 어멈은 성재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어서, 어서, 성순아! 자리, 자리─"

하고 퍽 괴로운 듯이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며 몸을 벌 벌 떤다.

모친은 안 대청에 서서 말없이 본다.

성재는 그날 밤부터 병상의 사람이 되었다. 누가 물어도 성재는 자기의 병의 원인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동안 매일 어디를 갔는지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성재의 눈은 붉 게 되고 머리는 불덩어리같이 달았다. 모친과 성순은 번갈 아 병인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차마 그 참상을 못보 겠다 하여 흔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혼자 울었고, 어멈은 가끔 문 밖에 와서,

"아씨! 좀 어떠셔요?"

하고 성순에게 성재의 경과를 물었다. 성순은 자기가 아는 단순한 지식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로 치료법을 시행하였다.

서양 수건에 물을 적셔 병인의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실내 에 매어달았던 한난계로 체온도 검사하여 보았다. 그러나 화씨와 섭씨의 관계를 잘 모르는 성순은 화씨 한난계의 도 수가 섭씨 삼십 칠 도보다 얼마나 더한지를 모르고 다만 사 십 도 이상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성재의 팔을 잡아 맥박을 보려 할 때에 팔각목종이 선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맥박과 비교해 보아 자기보다 십여 차나 더 빠른 것을 발견하였따.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성재의 병은 성순이 보기에 심히 위중 한 듯하였다.

다음 날, 백(白)의사를 청하여 왔다. 성순과 모친이 앉고 성재가 우누니 좁은 방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었으므로 백의 사가 병인을 진찰할 때에는 성순이 벽에 착 기대어 아무쪼 록 자리를 많이 아니 잡도록 하였따. 아직 날이 호리고 눈 이 날리지마는 여러 지붕의 설광에 실내는 밝아서 병인의 가슴이 자주 들먹거리는 것이며, 양 변두(邊頭)의 동백이 자 주 뛰는 것같이 보였다.

백의사는 양복 바지에 주름가는 것을 아끼는 듯이 두 손으 로 바지를 조금 치걷고 꿇어앉아서 병인의 이불을 젖히고 옷고름을 끄르고 청진기를 병인의 가슴에 대었다. 모친은 그 가슴을 보고,

"빼빼 말랐구나!"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순은 풀풀 떨리는 청진기의 고무줄 과, 좌에서 우로, 상에서 하로 왔다갔다하는 백의 손과, 때 때로 움직이는 백의 눈썹과 눈자위를 보았다. 그러나 성재 는 정신을 차리는지 마는지, 눈을 감은 대로 가만히 잇다.

방안이 고요한데 병인의 숨소리와 아까 성순이가 틀어 놓은 팔각종 소리가 들릴 뿐이다.

백은 병인의 혀를 보려 하였으나 병인이 고개를 흔들어서 보지 못하고 붉게 된 눈만 겨우 벌려 보았다. 그리고 청진 기를 빼어 가방에 넣고 검온기를 병인의 액(腋)하에 끼운 뒤 에 한 걸음 물러나 앉으면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모친은 백의 얼굴만 보다가 병명도 묻기 전에,

"언제나 낫겠소? 내 아들 어서 고쳐 주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묻혔다. 백은 웃으며,

"염려 말으십시오. 감기니까 며칠 지나면 낫겠지요."

"감기가, 무슨 감기가 갑자기 그렇지?"

"아무 염려 없읍니다."

하면서 검온기를 빼어 볼 때에 성순은 얼른 백(白)의 뒤에 돌아가서 어깨 너머로 검온기를 보았다. 수은과 사십 도 이 상인 줄은 알았다. 그리고,

"열이 높으시지요?"

하고 물었다.

"염려 없읍니다."

하고 약을 보낸다고 어멈을 데리고 백은 갔다.

2[편집]

어멈이 백에게서 가져온 두 가지 물약 중에 하나를 싫다고 하는 병인의 입에 떠 넣을 때에 성순은 문 밖에 어떤 구둣 소리를 듣고 아마 민이려니 하였다. 그리고 민이 곁에 있으 면 병인의 간호가 얼마나 힘이 있으랴 하였다. 그러나,

"이리 오너라!"

할 때의 그것은 민이 아니요, 철학자라고 별명 듣는 변(卞) 인 줄을 알고 성순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개 변도 민과 같 이 성재의 실험실에 자주 오던 사람 중의 하나이요, 또 성 재에게 이 집을 빌려 주었으며, 이 집에 온 뒤에도 여러번 성재를 찾아온 일이 있었고, 성재를 만나지 못하면 성재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였다. 성재의 모친은 큰 집에 있을 때는 사랑에 오는 청년들과 ㅁ나날 기회가 없었지마는 이 집에 와서부터는 성재의 동무되는 청년들과는 내외 없이 말을 하 였고, 또 성재가 항상 집에 있지 아니하매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반가와하였다. 그 중에도 그는 변을 좋아하였다. 변 은 점잖은 양반의 풍이 있어서 쾌활하고 천진한 민보다 월 등 높게 보였다. 더구나 이 집은 변의 주선으로 변의 부친 에게 얻은 것인 줄을 알므로 더욱 변을 대접하였다. 한 집 을 위하는 모친으로는 '점잖'을 양반의 특색으로 보는 모친 으로는 민보다 변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자가의 은인인고로 그를 좋아할 의무를 찾 지 못하였고, 더욱이 그의 몹시 꾸미는 듯한 언사와 점잖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변은 물론 성순에게 친절히 하였고 가 끔 성순을 칭찬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법은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하는 듯하였고, 겸하여 그의 말은 단어와 단어 를 문법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더운 피 있고 생명 있는, 가 슴 속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아니하였다. 민의 말은 일언 일 구에 피가 있고, 열이 있고, 생명이 있으되, 변의 말에는 그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있고 열정을 좋아하는 처녀 성순은 이 이유로 하여 변에게 염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러하던 변이 온 것이다.

성순은 방싯 문을 열고 변을 맞아들였다. 변은 성순에게 물례한 뒤에 말없이 성재의 얼굴을 보고 섰더니,

"약을 좀 잡수셨어요?"

"싫다는 것을 억지로 먹었읍니다."

변은 먹였다는 약병을 쳐들어 보더니,

"어제 저녁부터 그래요?"

"네."

"어제도 또 어디 갔던가요?"

"네."

"어디로 갔었어요?"

"모르겠어요. 다섯 점이나 지나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와서 는 곤해 누웠읍니다."

"백의사 왔다 갔다지요?"

"네."

"글쎄, 지금 내 집에 들렸어요. 그래서 김형께서 앓으시는 줄을 알았지요."

"네."

하고 이불을 당기어 병인의 어깨를 잘 가리워 준다.

그제야 변도 앉으면서,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네."

"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감기니 염려 말라고 그래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백의사가 무엇이라고 해요?"

"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물론 염려야 없겠지요."

하고 한참 잠잠하더니,

"어머니 계셔요?"

"네."

"안에 계셔요?"

"네."

또 한참 잠잠하다가,

"민군 왔어요?"

이 말에는 성순의 가슴이 자연 설렘을 깨달았다. 그래서 안색을 아니 보일 양으로 병인에게로 낯을 돌리며,

"아니요."

"가서 보내 드릴까요?"

하고 픽 웃는다.

"갑니다. 이따가 또 오지요."

"왜 좀 더 앉았다 가지요."

"갑니다."

하고 변은 나가 버렸다.

3[편집]

변이 왔다 간 뒤에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쌀 한섬과 나무 한 바리가 왔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 댁으로 가져가라고 그래요."

할 뿐이요 누가 보내더라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모친과 성순은 그것이 변의 소위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또 우육(牛肉)과 무우가 왔다. 이것도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다만 눈이 둥 글했을 뿐이였다. 전 같으면 그만 그것을 받고 고맙게 여길 리도 없건마는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는 이 가족에게는 하늘 에서 내려온 것같이 고마웠다.

오후에 민이 와서 저녁때가 되도록 성순과 이야기를 하다 가 가소 석반(夕飯) 후에는 여전히 성순이 혼자서 성재의 머 리맡에 앉았었다. 모친은 안에 앉은 대로,

"정신 좀 차리니? 무엇을 좀 먹었니?"

하고 물을 따름이요, 병실에 들어오지는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성재의 중병이 제일일의 낮이 지나고 밤이 다다 랐다. 성순은 의사가 명하는 대로 때를 따라 큰 병의 약과 작은 병의 약을 번갈아 먹였다. 숟가락에 약을 떠서 손에 들고,

"오빠, 약 잡수세요."

하고 병인의 입을 벌릴 때에는 병인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러나 심히 반항은 아니 하므로 분량대로 약은 먹였 다. 성순은 빨래한 손수건으로 병인의 약물 묻은 입을 씻고 는 혼자 한숨을 쉬었다. 혹 가만히 병인의 머리도 짚어 주 고, 가끔 흘러내리는 이불도 치켜 덮어 주며, 혹 창 뚫어진 구멍으로 눈에 덮인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하였다. 길 건너 반찬 가게는 여덟시가 되자마자 문을 잠그고 안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성순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실험상과, 그 위에 놓인 빈 시험관과 팔각목종과, 앓은 오ㅃ의 얼굴과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안에 뛰어 들어가 자기의 일기책 을 들고 나온다. 학교에서 일기를 장려하므로 부득이 형식 적으로 일기를 써 왔었거니와, 근래의 일개월 간의 일기에 는 생병 있는 기사가 꽤 많았다. 그 부친의 죽음과 오빠의 고민과 일가의 쇠퇴와 모친의 애통과 올케의 홍루(紅淚)와 이것이 다 그의 일기의 재료가 되었거니와 그 중에 제일 많 이 지면을 차지한 것은 민의 일과, 거기에 관하여 일어나는 자기의 정신적 변동과 고민이었다. 성순은 붓을 들어, '집 이월 오일 눈 한(寒).

종일 오빠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차도는 없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칠년 동안이나 목적을 위하여 애쓰다가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병명을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꽤 중병인 것 같다. 만일 오빠가 돌아가시 면...... 아니, 아니, 내가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게 해 드려야 하겠다.' 여기까지 써 올 때에 병인이 팔을 두르며 헛소리를 한다.

성순은 얼른 일기책을 감추고 병인의 머리에 손을 짚으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4[편집]

병인은 성순의 손을 잡으며,

"얘, 성순아, 시험관, 시험관!"

한다.

"시험관은 해서 무엇해요?"

"시험관, 시험관! 이것을 보아라! 여기 백색 침전이 생겼고 나! 되었다, 되었다."

하고 빙그세 웃는다.

그 웃는 것을 보고 성순은 눈물이 흐르고 머리끝이 쭈뼛쭈 뼛 하늘로 오르는 듯하였다.

"오빠, 어서 나아서 성공하십시오!"

하고 병인을 꼭 쥐었다.

"시험관, 시험관! 주정등(酒精燈)에 불을 켜라!"

"병이 나으신 다음에!"

"시험관, 시험관!"

성순은 가만가만히 병인의 가슴을 흔들면서,

"오바,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는 그 목소리는 떨렸다.

성재는 한번 더 소리 높이,

"시험관, 시험관!"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잠이 든다.

이 소리에 놀라서 모친이 뛰어나오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니?"

"네, 시험관을 찾아요."

"아이구, 앓으면서도 마음이 거기만 있구나!"

하고 흑흑 느낀다.

안방에서 울다 나온 모양이다. 병인도 또 한번 팔을 내어 두르며,

"시험관, 시험관!"

한다 모친은 벌떡 일어나서 탁자 위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집어다가,

"성재야, 시험관 여기 있다!"

하고 병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고 상시(常時)에 하 던 모양으로 서너 번 돌리더니 힘없이 이불 위에 떨어뜨린 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잔다.

모친은 물끄러미 성재의 낯을 보면서,

"글쎄, 이게 웬 일이냐? 왜 너까지 병이 드느냐."

하고 두 손으로 방바닥을 한번 때리고, 벌떡 일어나 안방 으로 들어간다.

성순은 혼자서 병인의 손을 주무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성재의 손바닥에 굳은 못이 박힘이었다. 성 순은 깜짝 놀라 병인의 손을 쳐들어 불빛에 자세히 검사하 였다. 두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 못이 박히고 껍질이 여기저 기 벗겨졌으며, 오래 씻지 아니한 모양으로 거멓게 때가 묻 었다. 성순은 무서운 듯이 그 손을 놓고 성재의 얼굴을 보 았다. 성재가 일개월 이상이나 매일 외출한 것이 알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성재는 오만하다 할이 만큼 자존심이 많았다. 그래 서 그는 일찍 남에게 무슨 은혜를 청구하여 본 적이 없었 다. 몇 달 전, 함사과와 이(李)변호사에게 갔던 것은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매, 죽기보다 싫은 굴욕과 고통을 무릎쓰고 한 것이다. 그의 재산이 전부 없어지매 그는 자기 의 손으로 일가를 부지하며, 겸하여 실험 비용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나가서 노동자로 변장하 고 각 방면에 노동할 것을 구하였다. 그는 인력거도 끌어 보고, 짐구루마도 끌어보고, 정거장에서 하물 올리고 내리는 노동자도 되어 보다가, 이주일 전부터 동대문 도르 개축 공 부가 되어 괭이로 언땅을 파기에 몸을 피곤케 하였다. 그리 하여 원래 육체적 노동에 경험이 없던 몸이 연일 과로에 심 신이 피로하고, 겸하여 과도한 심로에 신경이 과민하게 되 어 불면증의 침노한 바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 몸이 식어 감기가 되고, 그 후에는 더 무리한 노동에 감기가 더욱 격력하게 되이 마 침내 급성의 폐렴을 일으킨 것이다.

일터에서 가까스로 왕십리 주막까지 기어들어와 거기서 옷 을 갈아입고 인력거를 불러 타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비밀은 아는 이가 없다. 손에 박힌 굳은 못 이 영원히 그 기념이 될 것이다.

성순은 오빠의 손을 보고 그의 지나간 일개월 간의 한 일 을 여러 가지고 상상해 보매 눈물이 아니 흐를 수가 없었 다. 지금토록 성재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로 그 이유가 알아 진 것 같고, 성재의 지금의 병 원인도 알아진 것 같았다. 성 순은 다시 일기를 당기어 이렇게 썼다.

'아아, 내 불쌍한 오빠! 만일 내게 힘만 있으면,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서라도 오빠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해 드리련마 는......"

10[편집]

1[편집]

성재의 병은 조금 덜었다. 밤에는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지 마는 아침에는 눈을 뜨기도 하며, 분명치 못한 말로 이야기 를 하였다. 가족들은 얼마큼 수미(愁眉)를 열었고 날마다 오 던 백의사도 마음을 놓았다.

눈이 걷고 볕이 잘 드는 날, 하루는 변이 성재의 물병을 왔다가 성순의 나간 틈을 타서 모친더러,

"벌서 말씀을 드리자 드리자 하면서, 못 드렸읍니다. 아직 영감 상사(喪事) 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말씀 을 여쭙기도 어떠합니다마는, 따님과 저와 혼인을 하였으면 어떻겠읍니까? 성례는 해상(解喪) 후에 하더라도......"

"아직 장가를 아니 드셨던가요?"

"작년 가을에 상처를 하였읍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성재형 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면서도......"

"내야 알겠어요? 이제야 영감도 아니 계시니까 저애가 알 지요."

하고 눈 감고 누운 성재를 본다.

"네. 성재형께도 말씀을 하겠읍니다마는 어머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여쭈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 르겠읍니다마는, 그리되면 저도 아버지께 아무렇게 떼를 써 서라도 성재형의 실험을 계속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 같 고......"

하다가 아니할 말을 할 것을 후회하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모친도 돈으로 도와 주겠다는 말이 마치 자기를 낮추보는 듯하여 불쾌한 마음도 있지마는, 변은 본래부터 좋아하는 청년이요, 또 자기의 아들이 일생이 잊지 못하는 실험을 계 속케 하여 준다는 말도 노상 싫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성재가 일어나거든 말씀을 해 보구려."

"그러면 어머님 생각에는?"

"성재만 좋다구만 하면 내야......"

"그러면 어머님은 이의는 없으십니다그려."

모친은 이의라는 말의 뜻을 모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 나 그 얼굴을 보건대 거절하려는 생각도 없었듯하였다. 전 같이 부자로 지낼 때에는 이렇게 되고 보니 딸을 시집 보낼 걱정도 꽤 많았다. 가난한 집에는 주기 싫고, 그렇다고 부자 는 자기와 같이 빈약한 자의 딸을 데려갈 것 같지도 아니하 였다. 모친은 그 부모의 위광과 재산으로만 자녀의 행복된 혼인이 가능한 줄로 믿는다.

변은 상처한 후부터(정직하게 말하면 상처하기 전부터 후 처의 후보를 골랐다) 여러 처녀를 많이 후보로 세웠던 중에 성순이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므로 성재의 사 업이나 인격에는 그다지 감심하지 아니하면서도 자주 성재 의 집에 놀러 갔다. 성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성순의 얼 굴을 보러 감이었다.

그러나, 변은 자기의 심중을 말이나 안색에 발표하기를 부 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잇는 대로 말하고 자유로 자기의 감 정을 발표하는 민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점잖지 못하다 하 여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민이 자기의 강적인 줄은 알며, 또 성순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는 도저히 적수가 아닌 줄을 알므로 그는 모친이나 성재에게 육박하여 간접으로 성순을 점령하여 하였다. 이것은 관습상 도리어 정면 공격이요, 겸 하여 정정 당당한 일일 것이다. 성재 집의 파산은 그의 성 공의 세일의 기회였었고 성재의 중병은 제이의 기회였었다.

그는 이것이 천재 불우의 호기회인 줄을 알 뿐더러, 근일 민과 성순과의 친근이 막대한 위험을 예고하는 듯하여 성재 의 완쾌를 기다릴 새도 없이 그의 모친의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반대의 의향이 없음을 알매, 그는 팔분의 의향을 확신하여 희열을 금하지 못하였다.

변은 결코 악의 있는 청년이 아니었고, 차라리 선량한 청 년이었다. 동경 유학시에 현금 조선의 사상과 풍습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많이 배웠지마는 그는 이 양자간에 무슨 모순이나 부조화가 있는 줄로 생각지도 아니하고, 따 라서 구습을 깨뜨리고 신사상을 수입한다든지, 신사상을 배 척하고 구사상을 묵수(墨守)한다든지, 또는 신구를 조화한다 든지 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자기가 특별히 한 가지 이상 을 세우고 전력을 다하여 여러 가지 곤란과 싸우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할 필요도 인(認)치 아니한다. 그는 진실로 매약 과 같이 무해 무독한 사람이요 세상이 칭찬할 만한 건전한 청년이었다.

2[편집]

그가 철학을 배웠지마는 그는 극서을 기억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아 니하다.

그는 학교에서 유량한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그라 위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은 철학, 그 물건은 직하하는 이질 환자 모양으로 전부 배설하여지고 그의 혈액에는 조금도 그 기운 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아니하다.

그의 이상은 단순하다─ 성순과 혼인을 하고, 자기가 호주가 되거든 양옥으로 깨끗 한 집을 짓고, 방을 곱게 꾸미고, 거기다 피아노를 놓고, 성 순더러 치라고 하고, 자기는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그 것을 듣고, 가끔 둘이서 승경(勝景)을 찾아 여행이나 하 고...... 이것뿐이었다. 아마 자기더러 분명히 자기의 이상을 말하라 하더라도 상술한 것 이상에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를 남만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기는 무엇으로 보든지 상등 인물로 자 처한다. 그는 재산 있고 얼굴이 잘나고, 동경서 대학을 졸업 하였고, 일찍이 주색장리(酒色場裏)에 출입한 적도 없고, 또 일찍이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약점을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가 보기에 성재는 기인이었고, 민은 경박하고 쓸데 없는 일에 울곤 하며, 말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고, 갑자기 열중하 였다 갑자기 냉각하였다 하는 철없고 정신이 불완전한 무용 물이었다.

그가 성순을 취하는 이유도 따라서 극히 단순하다. 성순은 혈통이 좋고, 얼굴이 어여쁘고, 고등 여학교의 우등 졸업생 이요, 말이 적고, 온순하고...... 이것뿐이었다. 이것 이상 또 는 이것보다 더 깊은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지 아니한 다.

그에게는 세상 만사는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일에는 될 일 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을 뿐이었다. 과연 그는 행복된 사 람이다. 그는 땅속과 하늘 위에는 생각하려고도 아니 하고 다만 자기의 눈에 보이는 세계로만 만족한다. 과연 그는 모 범적 청년이었다.

그 후, 몇 날 동안에 변과 모친과의 의사는 점점 더욱 소 통되어 모친은 벌서 사위에게 대한 듯한 일종 장모의 애정 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성순은 아직도 이러한 일이 있는 줄도 모랐고, 더 구나 민은 알 길이 없었다. 성순은 지금도 오빠를 간호하다 가 오빠가 잠든 틈에 이러한 일기를 쓴다.

'요새에는 변이 날마다 온다. 와서는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 를 길게 한다. 변이 오면 나는 그 방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 가지 아니한다. 나는 왜 이다지 변을 싫어하는지. 그는 아무 리 재미있는 말을 하여도 도무지 재미있게 들리지 아니한 다. 그가 웃으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싶다. 왜 그런지. M 의 말은 무엇이나 다 재미있는데, 다 옳은 말 같은데, 변의 말은 다 거짓말 같다. 내 M! M이 이다지 보고 싶은가? 아 까 왔다 갔건마는, 간 지가 불가 세 시간이언마는 마치 한 십년 된 것 같다. 내일 올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영원히 보 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가? 마치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아니,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그리고 성공하도록 하여 드려야지. 내일은 M을 보거든 좀더 정답게 말을 하자.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스를...... 에 그, 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오빠의 병을 고쳐 드려야지.

오빠의 병은 어제보다 좀 나았다. 오늘은 흰죽도 조금 잡 수혔다. M과 말도 몇 마디 하였다. M의 말은 어떻게도 재 미가 있는지. 내가 오빠의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는 말을 할 때에 M은 울었다. M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에게는 그렇나 말도 아니하였다.

M! 내 M! 내 M! 내 M !!!' 하고 몸을 떨면서 M자 밑에다 감탄 부호를 셋이나 찍고 자기가 쓴 일기를 한번 내려 읽었다. 그리고는 병인의 머리 도 짚어주고 손도 만져 주었다. 성순의 얼굴은 상기한 듯하 였다.

11[편집]

1[편집]

성재가 병으로 누운 지 닷새 만에야 성재의 부인이 네 살 벅은 딸과 금년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왔다. 그 오라비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하인에게 우육과 과일을 들리 고 들어오는 길로 성순에게 나무람을

"그렇게 앓는데 통기도 아니 하오."

이것은 그 모친에게 한 불평이언마는 차마 직접 모친에게 는 말하지 못하고 성순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입을 실룩 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모친은 외속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손녀를 안아 쳐들면서 말없이 며느리를 슬쩍 보 았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명주 저고리를 입었으며 분까지도 바른 모양이다.

(끔찍이도 몸치레를 하고 싶어한다.) 하고 성순은 속으로 악감을 가졌다.

"아씨 오십니까?"

하고 어멈은 앞치마를 손을 씻으면서 부엌에서 뛰어나와서 어린애를 받으려고 팔을 벌렸으나, 부인은 본체도 아니 하 고 성훈의 부인의 인사하는 것도 본체 만체 하면서, 한번 더 성순을 흘겨본다.

"글쎄, 어쩌면 알리지도 아니하오?"

하고 분하여서 못 견디어 하는 양을 보인다.

"보낼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모친이 다정스럽게 변명하였다.

성순은 '그런 소리를 말고 친정에를 가지 말지'하려다가 꿀 떡 참았다. 연일 앓는 오빠를 간호하기에 안색이 초췌한 것 도 동정할 줄 모르는 그 올케가 미웠다.

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올 때에, 성재는 잠간 눈을 떠서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부인의 오라비 는 병실에 들어와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도로 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할 때에,

"여기조 좋습니다."

하고 대문에 섰다.

부인은 성재의 추췌한 안색을 대할 때에 아까 분하여서 고 였던 눈물이 슬퍼서 쏟아졌다. 모친은 병인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며느리에게 병의 결과를 대강 말한 끝에,

"이제는 다 나았다. 아무 걱정 말아라."

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눈물을 흘렀다.

자기가 일생의 영광을 의탁하던 남편이 저렇게 빈궁하게 되고, 병약하게 된 것이 슬펐다. 실로 그의 명주 옷은 몇 날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친정에 가서 석일(昔日)의 부자의 영화를 유지하지마는 친정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벌써부터 동생네와 올케들이 듣지 못하는 데서 소곤소곤 하 는 소리도 몇 번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명주옷을 차마 벗 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친정에 유(留)한다.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어린애에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또 한번,

"그런들, 그렇게 알리 주지 않아요?"

하였다.

성재가 이 말을 듣고 번쩍 고개를 돌리며,

"왜, 왔어, 무엇하러 왔어?"

부인은 깜짝 놀라서 성재의 움쑥 들어간 눈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성재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때리며,

"왜 왔어? 병이 좀 나을 만하니까 그것을 더치러 왔어?"

"내가 그렇게 보기가 싫소?"

"보기 실허, 보기 싫어! 어서 가요!"

"좋지요, 누이만 있으면 그만이지요?"

"웬 잔소리여! 가라면 가지 않고!"

"네, 가지요. 가라면 가지요."

하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그렇게 보기 싫거든 가지요. 내가 이 집 아니면 밥 굶어 죽겠소? 아이 참!"

"무엇이 어째?"

하고 성재가 벌떡 일어난다.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부부의 새에 들어서는 모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부모도 모르고 지아비도 모르는 계집이 무엇하러 내 집에 들어와!"

"성재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법도 있느냐?" 자, 드 러누워라. 바람 쐬일라."

"가지요, 가지요."

하면서도 부인은 차마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몸을 벌벌 떨 며 울기만 한다.

사랑에서 떠드는 소리에 성순이도 나왔다. 부인의 오라비 는 언제 갔는지 없다.

"성순씨! 동경 오빠께서 나는 보기 싫다고 가랍니다. 가요, 가요."

성재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세 사람 은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2[편집]

모친은 부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와 손자를 자기가 받 아 안고 무수히 불그레한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 나 손자는 울면서 할머니를 떠밀고 어미를 향하여 팔을 벌 렸다. 할머니는,

"너무 본 지가 오래서......"

하고 부인에게 도로 주면서 속으로 울었다. 네 살 먹은 손 녀가.

"할머니!"

하며 자기의 목게 매어달리는 것으로 겨우 위로를 삼았었 다.

성훈의 부인도 형님의 곁에 와 앉아서 여러 가지 말을 물 었다. 그러나, 부인은 아직도 아까 분함과 슬픔이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실내를 한번 돌아보았다. 더러운 장판, 도배가 여기저 기 떨어진 벽, 찌그러진 문, 게다가 자기의 방에 놓였던 세 간이 여기저기 유리(流離)하여 놓인 것을 볼 때에 가슴이 터 지는 듯하였다. 자기는 암만해도 이러한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닌 ㄱ서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앉은 모친과 성 훈의 부인을 볼 때에,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억지로 이 집에 몰아 넣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벽을 두 르는 듯하였다. 지금 성재에게 그러한 책망을 들을 때에 일 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반항도 하고 '가지요, 가지요' 하기 도 하였지마는, 기실 자기는 여기밖에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더러워도 이것이 내 집이다 할 때에 한껏 정다운 생각도 나 거니와 또 한껏 억제할 수 없는 울분도 났다. 딸이,

"엄마, 이제는 외가에 안 가지!"

할 때에, 그는 '응' 아니할 수 없었따. 또 딸이,

"할머니, 이제는 외가에 안 가구 할머니하고 여기 있어요."

할때, 그는 '네 말이 옳다'하고 시인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빈궁을 싫어하는 외에 성순을 미워한다. 성재 가 자기에게 냉담한 듯할 때에는 그 책임은 성순에게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고, 자기는 집에 있어서 집 일을 볼 때에 성순은 하여 주는 밥 먹고, 곱게 차리고 책보 끼고 나서는 것이 밉기도 하였다. 왜, 나이 이십이나 되도록 시집도 아니 가는고 하기도 하였다. 원래 부인에게는 자기의 자녀밖에 별로 고운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 고, 다만 성재는 자기의 남편이니까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 면서도 속으로 끔찍이 그를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성재 는 일찍이 자기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는 듯하였다. 한 자 리에 자면서도 별로 정다운 말도 아니 하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와 동침하 기를 피하여 사랑에서 혼자 자기를 좋아하였다. 어떤 때에 는 이삼 개월이나, 연달아 방에 들지를 아니하였다. 그에게 는 그것이 제일 큰 고통이요 함원이었다.

부인은 이 집의 방 수효를 계산하여 보고, 또 성재가 행랑 에 있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안방에는 한 방에 모친과 성순이가 잇고, 한 방에 성훈이 가 잇고, 그러고 보니 자기와 성재의 거처할 처소가 없다.

자기가 밤에 남편을 찾아 행랑방으로 들어가고 아침에 거기 서 나올 것을 생각할 때에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슬펐다.

부인이 돌아온 후로부터 살풍경이던 가정은 더욱 살풍경하 게 되었다. 부인은 매사에 불평이요, 불평이 좀 심하여지면 몸부림을 하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무쪼록 그의 불평 을 아니 일으킬 양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침묵을 지켰고, 그 중에도 어멈과 고양이는 잠시도 몸을 펼 새가 없었다. 걸핏 하면 어멈을 책망하고 고양이를 때리므로...... 남향으로 된 이 집의 잘 드는 볕을 홀로 향락하는 고양이의 낮잠도 여러 번 부인의 발길에 해여서 깨움이 되었다.

부인은 성순을 대신하여 성재에게 약을 먹이고 밤에도 병 실에서 잤다. 성순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앓는 오빠를 간 호하였다. 성재는, 처음에는 그 아내를 배척하였으나 차차 환영도 아니 하는 대신에 배척도 아니하게 되어 약을 먹이 면 약을 받아 먹고, 머리를 집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날로 덜해 가던 성재의 병이 하루 아침에는 갑자 기 더쳐서 열이 높아지고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

급히 불러 온 백의사는 진찰을 하고 나더니 성순을 돌아보 면서,

"부인께서 오셨나요?"

하였다.

성순은 얼른 알아차렸으나 모친에게는 아무 말도 아니 하 고 부인더러 가만히,

"오늘부터는 형님께서는 좀 쉬십시오."

할 때에 부인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12[편집]

1[편집]

그러나, 이삼 일을 지나서 성재의 병은 훨씬 덜했다. 오늘 아침에는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앉아서 자기의 손으로 고깃 국에 만 밥을 두어 보시기 먹고 부인이 깍아 주는 능금도 한 개 먹었다. 살퐁경이던 가정에는 일조의 기쁨이 흐르고, 평생 말이 없던 가족들 간에도 여러 가지 유쾌한 회화가 교 환되었다. 하루 한두 번씩 온 가족이 성재의 주위를 둘러싸 고 성재가 앓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옛말삼아 웃음 섞어 하 게 되었다. 성재도 여윈 얼굴에 웃음을 띠어 가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묻기도 하며, 대답도 하였 다. 성재의 집에는 마치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양춘(陽春)이 온 듯하였다.

그러나, 그 양춘 속에는 아직도 한 줄기 얼음이 있어서 까 딱하면 양춘 전체를 굳은 얼음으로 화(化)할 듯 하다. 성재 의 병이 완쾌하는 날에는 생활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시험 관 문제도 일어날 것이요, 성재의 부인의 불평도 일어날 것 이다. 그러나 앞에 오는 불평이야 있든지 없든지 죽어 가던 사람이 소생하여 온 기쁨이야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이러한 기쁨 속에 더한 기쁨을 첨(添)할 양으로 변과 성순 과의 약혼이 맺어졌다.

모친과 성재와 변과 삼인이 성재의 방에 모여 앉아서 약 한 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성재는 성순의 의향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모친은 성순이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추정적 보증에 병여(病餘)의 성재는 심하게 반대도 아니 하였다. 그리고 만일 성순이가 반대하거든 오 빠인 자기의 권위로 족히 수무(綏撫)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에 성재는 모친의 면전에서 성순을 불러 약혼이 되었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태도는 예기하였던 것보다는 강하였다.

"성순아!"

"네─"

할 때에는 성재는 물론이어니와 모친도 성순의 대답을 많 이 염려하였고, 지금까지 성순은 자기의 소유물─ 적어도 자기네의 마음대로 순종하는 자로만 알았던 것이 '네'라는 성순의 대답이 분명하게 실내에 울릴 적에 성순도 역시 독 립한 일 개인인 듯한 위엄을 느꼈다. 그래서 성재도 잠간 양미간을 찌푸리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다시,

"성순아!"

하고 불렀다.

"네."

하는 성순도 성재의 안ㅅ개을 주의하여 보게 되었다.

"오늘 약혹을 하였다. 먼저 네게 물어 보아야 옳을 것이지 마는, 아마 네 뜻도 어머니와 내 뜻과 다름이 없을 줄 알고, 네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작정하였다. 물론 네게도 반대는 없을 터이지?"

(이 말은 용하게 성재의 사정을 발표한 것이였다. 그는 성 순에게도 독립한 인격을 인정하여야 옳은 줄을 안다. 알뿐 더러 남을 향하여 말까지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아니 되는 이 인권이라는 새 사상은 가장 진보하였다 는 성재에게까지도 아직 실행할 힘을 줄이만큼 깊이 침투하 지를 못하였다.) 성순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성재의 얼굴만 물끄러미 보았다.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은,

"반대가 무슨 반대냐? 하나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지. 변서 방으로 말하면 양반이것다, 부자것다, 사람이 잘났겄다, 그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신세를 우리가 얼마나 졌니? 아무 리 생각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모친이 완전한 요소로 꼽는 '양반' '부자' '여태까지 진 신세'는 성순에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엿다. 그뿐더 러 자기를 보은의 한 선물로 비기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엿 다. 또 모친과 성재의 마음에 적당하니까 필연적으로 자기 의 마음에도 적당하리라는 논리도 승인할 수가 없었다. 종 로의 인경 소리를 듣고 난 성재보다는 시계의 치는 소리를 듣고 난 성순의 편이 얼마큼 더욱 신사상을 동화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경 소리의 여향(餘響)한 성순은 분명히 성재와 모친의 면전에서 자기의 사상을 발표할 용기도 없어 서 다만,

"저는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였다.

"아직이라니? 계집애가 이십 살이 가까워 가는데 아직이 다 무엇이냐? 남 같으면 벌써 자식을 둘이나 낳았겠다......"

하는 모친의 말에,

2[편집]

"글쎄, 어린애가 시집이 무슨 시집이야요. 좀더 공부할랍니 다."

"공부는 무슨 공부를 더 한단 말이냐? 고등 보통학교나 졸 업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공부를 더 하면 무엇을 하니?

사내들 같으면 몰라도...... 나, 저, 커다란 계집애들이 공부 합네 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정보기 싫더라. 우리는 보통 학 교 구경도 못 했지마는......"

"그 때와 지금과 같읍니까?"

하고 성순은 좀 흥분하였다.

"같지 않구! 지금이라도 계집애가 사내는 못되지"

"미련하던 것이 지혜롭게는 됩지요."

"응, 그래서 나는 미련하고 너는 지혜롭구나."

"옛날은─ 어머니의 시대에는 어머니도 지혜로왔지요."

"지금은 너만 지혜롭고?"

"어머니보다는 지혜롭지마는 남들보다는 미련하지요. 그러 니까 더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올시다."

"그게 어미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그게 학교에서 배운 말 버릇이냐?"

하면서도 모친은 성은 내지 아니한다.

모친은 성순의 이론의 정부(正否)를 판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순이가 자기를 항거하려 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이론으로 성순을 당하지 못할 줄을 알 때에 친권이라는 성 루(城壘)에 거(據)하여 위협을 함이다. 성순은 최후의 피난 처에 도입(導入)한 모친을 더 추구함이 무용한 줄을 알므로 잠잠하였다. 그러나, 모친은 성순의 침묵을 승(乘)하여 다시 기운을 얻어 공세를 취한다.

"그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내나 네 오라비 하 나는 대로 해라. 네게 해롭게 하랴?"

이때까지 모년의 문답을 우두커니 듣고 앉았던 성재는 성 순이가 결코 경적(輕敵)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성순은 벌써 어린애가 아니다. 간단한 명령이나, 감언이나, 위협이 그 효 (?)를 주(奏)치 못할 줄을 알았다. 이지가 눈을 뜨려는 사람 에게는 이지 이외에 그를 설복시킬 것도 없음을 안다. 그래 서,

"공부하는 것이 좋지마는 우리 가세가 허(許)하느냐? 변군 도 해상(解喪)하기까지 동경에 유학을 시켜도 좋다 하니 그 렇게 되면 작히나 좋으나."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다. 성순이가 '공부하겠어요'하고 핑 계로 한 말은 그가 약혼을 거절하는 유일한 이유로 여기고 반박하려는 논리적 유희에 불과하다. 성순은 이 말에는 대 답지 아니하고 잠자코 치마고름만 씹었다. 약 오분간 세 사 람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가만히 앉았었다. 성재는 불가 불 본 문제를 끌어내게 되었다.

"성순아!"

"네!"

"나는 네가 애 이 약혼을 싫어하는지를 안다. 너는 내가 모 르거니 하지마는 나는 벌써 다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아직도 경험이 없어서 잘못 생각한 것이니까, 어서 단념하 고 내 말대로 하여라."

하고 빙그레 웃는 성재의 얼굴을 슬쩍 보고 성순은 얼굴을 붉혔다. 모친은 웬 까닭인지를 모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 순은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강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잠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알으셔요?"

"내가 모르는 줄 아니?"

"무엇 말씀이야요?"

"네가 네 일기를 다 보았다...... 그만하면 알지."

"............"

"그러나, 그것은 되지 못할 일이다. 오늘 급히 약혼을 한 것도 그것이 한 원인이다. 하니까 이제부터는 너도 변군의 아내인 줄로 알고 민군과 가까이 교제도 말아라."

모친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무어 어째! 날마다 민이 놀러 오는 것 같더니, 어지 되었 어? 응, 이 철없는 계집애야. 글쎄, 그런 한푼 없는 사람한 테 시집을 가면 무엇을 먹고 살 양으로, 아니, 철없는 계집 애!"

성순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반감도 생겨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누가 그이에게로 시집을 간답니까?"

하였다. 성재는, (저 계집애가 얼마나한 결심이 있는가.) 하엿다.

그러나,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지금토록 상상하던 바와 같 은 '어린애'는 아니었다.

3[편집]

성재는 더욱 위엄 잇는 목소리로,

"민군과는 혼인할 수 없다.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만, 첫째 민군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

"응, 아내까지 잇는 것이 남의 딸을......"

"벌써 이혼한다고 아니 돌아본 지가 한 오륙 년 되지마는 아직도 그 아내되는 사람은 아니 간다고 그런다더라...... 그 런데 너는 그러한 사람의 첩으로 갈래?"

성순은 이 말을 들을 때 놀랐다. 민이 아내 잇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아직도 민과 혼인하리라 하여 본 적 도 없지마는, 그래도 아내 있는 사람이란 말에는 얼마큼 경 억하고 실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성재의 '못한다'하는 말이 유리하게도 들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시에 민을 밉 게 볼 수도 없고 또 오빠의 말대로 변에게 시집가기를 허락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잠잠하였다. 성재는 이 눈치를 채고 얼룬,

"그러니까 민과 가까이할 생각은 아예 생념도 말고 어서 변군과 약혼을 해서 동경 유학이나 가게 하여라. 어서 그렇 게 작정해라."

"글쎄, 이 철없는 계집애야, 어떻허자고 그러한 사내와 친 한단 말이냐. 이제는 민인지 무엇인지 한 사람은 당초에 집 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런 괘씸한 자식이 어디 있 단 말이냐?"

웬 일인지 모르지만, 성순은 그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자리 속에서 울었다.

이로부터 성순은 꿈같이 지내었다. 민은 한번도 오지 아니 하였다. 변만 격일하여 놀러 왔으나 성순은 될 수 있는 대 로 그와 상대하기를 피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약혼에 대한 반대도 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줄로만 믿고 혼인할 절차를 의논하였다. 성재는 해상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정월이 되거든 곧 혼례를 행하여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물론 변은 대찬성이다. 변은 결 코 진정으로 성순의 유학을 바라지 아니한다. 변은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변의 부부관은 이러하다.

처(妻)란 용모가 미려하고 행지(行止)가 단아하며 성질이 온순하여 부(夫)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부를 위하여서 만 의의가 있는 것이니 부에게서 떼어 놓으면 존재의 의의 를 잃어 버리는 줄 안다. 변은 아마 한번도 여성을 독립한 존재로 생각하여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실 변은 이렇게 명확한 부부관을 가진 것도 아니라, 그의 의식 중에 희미하 게 있는 생각을 글로 써 놓으면 이러하단 말이다.

그러므로 변과 민과의 부부관에는 현수(懸殊)한 차이가 있 다. 민은 어디까지든지 여성의 인경의 권위와 자유를 인정 하여, 부부를 완전하 양개체(兩個體)의 완전한 결합으로 생 각하므로, 부부 관계는 완전한 대등의 관계요, 독립국과 독 깁국 간의 관계로되, 변은 처를 부(夫)의 여러 가지 소유물 (재산, 명예, 지식, 양복, 시계 등) 중의 중요한 하나로 생각 하므로, 부부의 관계는 주정의 관계요, 종주극과 속국과의 관계라. 그러므로 변은 모친과 성재의 허락을 존중하되 민 은 도리어 그것을 안중에 우지 아니하고 오직 성순의 허락 을 중히 여긴다. 이제 만일 모친과 성재는 성순을 변에게 허락하고, 성순은 자기를 민에게 허락하였다 하면, 이에 성 순의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대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성순 은 모친과 오빠의 것이냐, 도는 성순 자신의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쟁점이 될지니, 법정의 좌우에 늘어 앉은 변호사 제씨와 방청인 제씨는 응당 각각 자기의 의견을 따라서, 흑 좌, 흑 우 할 것이다. 다만 흥미를 감쇄하는 것은 이 사건의 원피(原皮) 양방이 각각 자기 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음 이니, 성재도 성순은 확실히 장형(長兄)되고 호주되는 자기 의 소유물이라 하는 판단이 잇는 것이 아니요, 성순도 나는 오직 내 소유물이다 하는 판단이 분명치 못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 사건은 분명치 못한 쟁점을 가지고 감정가 인습과 방편과 고집과 임시 임시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이다.

13[편집]

1[편집]

서울의 겨울 달은 남산의 동단(東端)에서 올라 남산 마루를 지나, 남산의 서쪽으로 떨어진다. 백설과 청송으로 문화(墨 畵)와 같은 반문(斑紋)을 성(宬)한 남산을 떼어 놓고는 서울 의 동월을 말할 수가 없다.

이 의미로 보아 남산 수(壽)를 빌기에는 응용할 수 없이 되 었다 하더라도 남산은 역시 서울의 자랑이다. 남상과 북악 두 틈에 장구 모양으로 벌여 있는 서울은 북악에서 위압을 받고, 남산에서 자애를 받는다.

이 특징은 지금과 같은 동질에, 그 중에 월명야(月明夜)에 더욱 분명하다. 옥으로 깍아 세운 듯한 구배(勾配)가 급하고 끝이 뾰족한 북악이 심청한 겨울 하늘의 북두성(北斗星) 자 루를 찌르려 하는 모양과 그 끝이 하늘을 푹 찔러서 하늘에 새었던 찬바람을 쏟쳐다가 서울에 내려 솓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암만하여도 북악에 대하여서 일종의 외경과 공포와 위압을 받는다. 그러나 수구문 근방에서부터 원원히 복잡한 파상(波狀)을 정(呈)하며 올라가다가 국사당(國祠堂)의 뭉툭 한 꼭대기를 이루고 원원히 내려간 남산의 우미한 곡선은 우리에게 정다움을 준다.

그런지 아닌지 서울은 북악을 등에 지고 남산과 낯을 대하 여 울고 웃고 한다. 아마도 웃을 때에 남산을 대하면 같은 미소를 얻고, 울 때에 남산을 대하면 부드러운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과거 몇 천년 간에, 가깝게 잡고 오백여 년 간에 몇 천만의 생령이 남산을 보고 웃고 울고 하였는고. 그러나, 한하건대 과거의 남산은 아직도 큰 웃음과 큰 울음을 당하 여 보지 못하였다. 웃을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고, 울 일도 한두 번은 없지도 아니하였다. 서울은 그것을 감각 할 줄을 몰랐었다. 음력 십 일월 중순 달이 바로 남산 마루 에 걸려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삼십 만의 인굴라 가진 큰 서울에는 등불이 반짝거리고 전차 소리와 인마의 왕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에는 비록 늙고 쓰러져 가는, 다 썩어진 더럽고 초라한 왜옥(矮屋)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반공(半空)에 우뚝 솟은 번쩍하고 깨끗한 고 루가 있다. 수로 보아 그 더럽고 늙어 쓰려져 가는 버릴 운 명을 가진 많음이며, 새롭고 번쩍한 집도 수로 보아 적다 하더라도, 그 적음은 차차 많아 감, 마침내 온 서울을 덮고 야 말 운명을 가진 적음이다.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다. 북악의 바람이 아무리 차게 내려쏜다 하더라도 길과 지붕과 마당이 아무리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눌렸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봄철에 움돋고 잎 새 필 생명이 잇는 것과 같이, 서울에는 확실히 생명이 있 다. 아직 의식이 발동하지 아니하고, 감각과 이성의 맹아(萌 芽)가 모양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확실히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직 원시 동물 모양으로 머리도 없고, 사지도 없고, 물론 신경 계통도 없는 단세포에 불과하 다하더라고, 아직 호흡도 영양도 없는, 얼른 보기에 무생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생명이 있기는 확실히 있다.

오늘밤 달빛에 비추인 서울은 비록 사해(死骸)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장래 어느 날 밤에 이 갈은 달이 반드시 생명의 서울을 비칠 날이 있따고 누가 이것을 의심하랴. 하물며 부 정라햐? 아무도 이 생명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아, 누누(累累)한 사해! 사대문, 종로, 북악, 및 남산 어느 것이 사해가 아니랴. 백년 묵은 사해, 이백년 묵은 사해, 간 혹 일전에 죽은 사해, 온통 사해다. 지금 이 달빛에 가로로 다니는 것도 사해, 혹 실내에 앉았는 것, 누웠는 것, 떠드는 것, 어느것이 사해가 아니랴? 소리면 귀추(鬼?), 빛이면 귀 화(鬼火), 무엇이 도약(跳躍)한다면 망량(??)의 도약, 그러나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묵은 사해와 새로운 공기아 광선으로 생장할 것 이다. 묵은 사체는 사해, 그 물건으로는 무용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생명적으로 분해한 화학적 원소는 넉넉히 신생명의 영양될 수가 있다. 될 수가 있을뿐더러 그것은 영양으로 하 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공기와 광선은 무한하다. 암 만이라도 자유로 취할 수가 있다. 지구에 생물이 생식할 수 있는 한에는 공기의 부족을 탄할 수가 없을 것이요, 태양이 그열과 광(光)의 생명을 보전하는 한에서는 광선의 부족을 탓할 리가 없다. 서울의 생명은 생장하지 아니치 못할 운명 을 가졌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있다. 서울을 보고 우 는 자는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 낡은 주검 위에 새호 설 새 서울? 제군은 북악의 열풍 속에, 남산의 월광 속에 탄생 축하의 기쁜 곡조를 알아 들어야 한다.

2[편집]

그것은 모르지. 그 생명이라는 것이 하동(何洞) 하통(何統) 하호(何戶)에 있는지 또는 하가(何街) 하천(何川)에 있는지.

그러나, 다만 제군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라, 반드시 무슨 소리가 들릴 것이니. 제군이여, 그 소리가 즉 새 생명의 심 장의 고동이다. 그 소리가 비록 극히 미미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무한히 커지려는 '힘'이 사무친 것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그 소리가 지금 비록 음부(音符)의 한 개에 불과하 다 하더라도 그것이 차차 일절이 되고 이절이 되고 삼절이 되어, 마침내 일대 음보(音譜)를 성립하고야 말 것이다. 피 아노의 제일 좌편의 첫 번 건(鍵)을 울릴 때에 그것은 극히 단조한 저음에 불과하지마는 다음 건, 다음 건, 연해서 울려 가는 동안에는 점점 제음이 되어, 마침내 우편 최종 건의, 백(帛)을 열(裂)하는 듯하는 최고 음에 달하고야 만다. 그러 나, 한 건씩 한건씩 누를 때에는 아직도 단조에 불과하지마 는, 양수의 십지(十指)가 눈에 보일 새 없이, 이리 치고 저 리 치고 할 때에 오인(吾人)은 황홀한 대음악을 얻는 것이 다. 그러므로 제굼은 대 생명의 소리가 너무 미미하고 단조 한 것을 한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미 소리 들렸으면 그것은 피아노의 제일건인 줄을 알아야 한다.

성재가 시험관을 들고 앉았다가 주정등에 불을 켜 놓고 거 기다가 시험관을 쬐인다. 제군은 이것을 다만 성재의 화학 실험으로만 알아서는 못 쓴다. 만일 제군이 총명할진대 성 재의 시험관이 끓어 나는 소리 중에서 새 생명의 심장의 고 동을 들어야 하고, 주정등의 화염 중에서 새 생명의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이 민의 유치한 화필, 그것으로 그려진 금강산의 스케치 중에서 총명하신 제군은 새 생명의 부동을 보아야 한다. 제굼은 어린애들이 강보(襁褓)에 누워서 함부 로 사지를 내어두르고 함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아느뇨. 또 어린애들이 모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 고, 창과 벽을 뚫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느뇨. 또 그 들이 조그마한 손가락 끝으로 마당의 부드러운 흙에 가로 세로 여러 가지 그럼을 그리는 것을 무의미한 장난으로 아 느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네는 그러한 무의미한 듯한 장난 중에서 장차 어른이 되어 활동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함 부로 내어 두르면, 그 팔은, 혹은 의정 단상에서 천하를 호 령하는 팔도 되고, 혹은 만세(萬歲) 대경전(大經典), 대예품 (大藝品)을 작(作)하는 팔도 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신발명을 작성하는 팔도 되는 것이다. 그네가 함부로 지르 는 듯한 소리를 무의미하게 들을 줄이 있으랴. 그렇게 연습 하는 그 소리가 장차 세계의 만민을 각성케하는 예언자의 큰소리도 되고, 천군 만마(千軍萬馬)를 호령하는 대장군의 큰소리도 될 것이다.

제군은 무엇을 볼 때든지, 그것이 영(盈)하는 것인지 휴 (虧)(waxing or waning)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영하는 것일진대 현재의 소(小)와 약(弱) 을 장래의 대(大)와 강(强)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휴하는 것일진댄 현재의 대와 강이 장래 소와 약을 약속함인 줄을 알아야 한다. 명칠지 못한 사람은 휴하는 대 와 강을 보고 기뻐하고, 영하는 소와 약을 보고 도리어 슬 퍼하나니, 명철한 제군은 이러한 미련을 배워서리 되지 아 니한다. 낡은 것, 썩은 것, 죽은 것이 비록 현재에는 강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하는 강과 대요, 새 생명의 소리 와 빛이 비록 현재에는 소하고 약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서울의 여러 가지 소리 중에, 여러 가지 빛 중에, 여러 가지 움직임 중에는 반드시 영하려는 새 생명의 부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볼 때에 슬 퍼하고 실망하기 쉽지마는 희망의 눈으로 미래를 볼 때에야 비로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북악과 남산 새에 생장하려는 새 서울의 모양을 제군은 마 음대로 그려 보는 것이 좋다. 혹은 황금이 넘치는 부(富)한 서울이든지, 학술이 은성(殷盛)하고 문학 예술이 꽃을 피우 는 문화의 서울이든지, 또 혹은 그려 보는 것이 좋다. 대게 제군은 제군의 마음대로, 그런 대로 새 서울을 이룩할 수가 있으니까.

종소리가 들린다. 각 회당(會堂)에서 야소 기독(耶蘇基督) 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모여드는 남녀 신도 들의 경건한 머리 위에는 명월광이 비취었고, 발밑에서는 새로 온 눈이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 적적한 제동 골목으로 서도 새옷을 입고 성경 찬미를 든 남녀가 칠팔 인 말없이 내려온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고 모자를 꾹 눌러 쓴 학생 수인이 떼를 지어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이전 사관 학교 앞으로 내려오고, 그 뒤에는 서양 머리에 흰 두루마기 를 입은 여학생 하나이 사뿐사뿐 걸어온다.



3[편집]

"성순씨!"

하고 뒤에서 부르는 남자의 소리는 떨렸다.

성순은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민이었다. 그러나 성순은 인사도 하려고 아니 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성순씨! 저는 아까부터 대문 밖에 서서 나오시기를 기다렸 읍니다. 혹 크리스마스에나 아니 가시는가 하고...... 그러나 성순씨께서 나오시는 것을 뵈올 때에는 말을 할까말까 하고 오래 주저하엿읍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읍니다."

하고 한 걸음 가까이 온다.

성순은 고개를 들어 달빛에 비치인 민의 해쓱한 얼굴을 보 았다. 그리하는 성순의 얼굴도 역시 헤쓱하였다.

성순은,

"왜 그동안 한번도 아니 오셨어요?"

"제가 오기를 바라셨읍니까? 올까 하여 무섭지 아니하였읍 니까? 여기서 뵈옵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까?"

민의 어조는 자못 격(檄)하였다. 분노한 듯까지 하였다. 성 순은 그 말을 들을 때에 몸이 오싹하였따. 그러나, 도리어 대담하게 말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생각하셔요? 제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읍니까? 성재형께서 편 지가 왔읍니다. 성순씨와 변군과의 약혼은 확정되었다고. 그 러니까 너는 내 집에 오지 말고, 성순씨와 교제도 말아 달 라고...... 그런데도 댁에 찾아갈 수가 있겠읍니까? 좋습니다.

축하합니다. 변 부인이지요?근일에 결혼식을 하시고 동경으 로 신혼 여행을 가신다지요? 그것을 축하할 양으로 추운데 여기서 기다렸읍니다. 댁에는 갈 수가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드리리까?"

"제 뜻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흥, 누구나 그런 말을 하는 법입니다. 성순씨가 만일 남의 위력에 못 이기어서 그러한 작정을 한 것이라면 성순이는 못난이거나 어린애지요......"

"네- 못난이야요."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못난입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이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꼭 한 가지밖에 없지요. 즉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행한다- 그것뿐이지요. 성순씨는 성순씨의 성 순이지요. 어머님의 성순입니까, 오라버니의 성순입니까?"

"저는 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행할 힘이 없어요."

민은 물끄러미 성순을 모로 보았다. 과연 성순의 말은 진 리라 하겠다.

"그렇게 행할 힘은 없다 하더라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요 구는 있읍니까?"

"네."

"진정 그렇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나대로 내 이성을 따라서 행하겠다 하는 요구가 있읍니까? 될 수만 있다면 아 무의 속박도 견제도 받지 아니하고 내 인격의 권위와 자유 를 어디까지든지 발휘하였으면 하는 요구는 있읍니?.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읍니까?"

"가능하지요. 그러나, 평화의 수단으로는 아니 되지요. 오 직 전쟁이라는 방법으로야만 되지요."

"전쟁!"

"암, 전쟁이지요. 첫째 부모의 권력에 대하여, 둘재 사회 인습의 권력에 대하여 전쟁을 해야지요."

"그것이 옳겠읍니까?"

"전쟁이니까 이기면 옳고, 지면 죄지요."

"이길 수가 있겠읍니까?"

"전쟁이니까 내가 강하면 이기고 내가 약하면 지지요."

"제가 강하겠읍니까?"

"그거야 남이 압니까?"

"만일 지면 어찌 될까요?"

"항복하여 노예가 되든지, 쾌(快)하게 전사를 하든지-"

"일천만의 여성을 위하여 희생이 되든지-"

"선봉장이 되든지-"

양인은 자연히 마음이 솔깃하여짐과 알 수 없는 용기와 프 라이드를 깨달았다. 한참 침묵하다가 성순이가,

"싸워 보지요, 싸워 보지요."

"싸워 보서요?"

"네, 싸워 보지요. 저를 도와 주십시오."

양인은 굳게 악수하였다. 그리고 삼사 보의 거리를 두고 쓸쓸한 겨울밤의 서울 거리를 걸어 숭동 예배당으로 향한 다.

14[편집]

1[편집]

회당에서 돌아와서 성순은 아무쪼록 가족의 얼굴 보기를 피하고 자리에 들어갔다. 결코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의 전도는 작정이 되었다. 자기는 민과 일생을 같이할 것이다. 평생에 사모하던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걱정은 다 잊게 된 것은 잊어버려지 고 오직 가슴 속에 기쁨만 꽉 차는 듯하였다. 성순은 민이 지나간 일개월 동안에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였을 것, 괴로워하였을 것, 슬퍼하였을 것을 상상하여 안다. 왜, 내가 벌써 그에게 내 뜻을 고하여 기쁘게 하여 드리지 아니 하였는가하고 후회도 하여 본다. 그러나, 왕사(往事)는 왕사 요, 이제부터는 민에게 위안을 주고 힘을 주어 민이 늘 몽 상하던 대로 명년 동경 미술 전람회에는 큰 출품을 하게 하 리라. 그것이 입선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익년 것이 또 입선 이 되고 특선이 되고...... 이리하여 불쌍한 민으로 하여금 조 선 미술사의 제일 페이지를 차지할 대미술가가 되게 하리 라.

성순은 민이 하던 말을 잘 기억한다. 자기가 미술을 배움 은 조선인에게 복된 눈 하나를 더 주려 합니다. 사시(四時) 의 산색(山色)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눈, 석양에 물든 서천 의 구름을 보고, 모옥(茅屋) 가에 홀로 핀 매호를 보고, 오 색으로 수를 놓은 홍엽(紅葉)의 산야를 보고 기뻐하는 눈, 또는 반공(半空)에 직선 곡선 여러 가지 선으로 그려진 산의 형용과 삼림의 윤곽을 보고 기뻐하는 눈, 우리 조선(祖先)이 남겨 준 위대하고 미려한 미술품을 보고 기뻐하는 눈- 그러 한 눈을 주려 함이다. 자연은 인생에게 세 가지 세계를 주 었다. 진(眞)의 세계, 선(善)의 세계, 미(美)의 세계, 진의 세 계의 잿간은 과학으로 찾을 것, 선의 세계의 재산은 아름다 운 사화와 가정과 개인의 품성에서 찾을 것, 그리하고, 미의 세계는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예술로 찾을 것이다. 낡은 조선이 빈약하고 비추(鄙醜)한 것은, 이 마땅히 찾을 재산이 찾지 아니하였음이니, 우리가 건설할 새 조선은 찾을 수 있 는 대로 이것을 찾아서 부강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조선이 되어야 한다.

성재의 시험관도 이 의미로 뜻이 깊고 자기의 화필도 이 의미로 뜻이 깊다...... 성순은 이러한 만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

'음악을 배우는 되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혼자서 즐기려고 배우는 것, 둘째는 대음악가가 되어서 세 계적 명성을 박(搏)하려 하는 것이니, 이 두가지가 다 좋다.

그러나, 셋째가 가장 좋으니, 그것은 즉 조선인에게 미묘한 음향의 세계에 들어가 는 귀를 줄 양으로 배움이다.' 하고 그 말 끝에,

"성순이는 셋 중에 어느것을 취하셔요."

할 때에 성순은,

"세째' 하고 웃은 것도 기억한다.

그리고 또 민이 자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던 것도 기억한 다.

'금일의 사회는 남자와 여자의 공통한 소유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그 천품의 특장을 따라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 여 우리가 이상하는 바 사회를 실현하여야 된다. 여자에게 남자 동양(同樣)의 교육을 해방하고, 직업을 해방하고......

물론 인격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대세다.

더구나 남이 수백년 간에 이루어 놓은 문명을 수십년 간에 이루려 하는 금일의 조선인, 조선인은 더욱 남녀의 협동한 육력(戮力)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조선 여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대 분발을 할 필요가 있고 의무가 있다.' 고 한것과, 그 때 성순은 감격에 못이겨,

"저도 새 조선을 위하여서 무엇을,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능력이 있을까요?"

할 때에 민은 소리를 높여서,

"하여 본 뒤에야 능력의 유뮤를 알지요. 하여 본 뒤에야 성 공을 하였으면 능력이 있었던 것이요, 실패를 하였으면 능 력이 없었던 것임을 알지요. 이러한 진리를 알았다면 조선 에도 퍽 많이 사업을 이룬 사람이 났을 것이외다. 제 능력 을 보아야지 하는 말을 얼른 듣기에 매우 영리한 듯하지마 는 기실은 자기를 망케 하고 사회를 망케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소야외다. 소아는 제 능력을 모르고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쳐들어 보려 하고, 깨뜨려 보려 하지요. 그러 니?, 물론 실패도 많지요. 그렇지마는 실패도 많이 해야지 요. 많은 실패 중에, 여러 실패하는 사람 중에, 그 중에야 설마 성공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고 빙그세 웃는 것이 생각이 난다.

2[편집]

(그렇지!) 하고 성순은 한번 돌아누웠다.

(무엇이나 해 보아야지!) 하고 성순은 입을 힘껏 다물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도 일종 모험이다. 대모험이다!) 하고 성순은 월광에 희미하게 보여지는 천정을 조려보았 다.

(성재의 시험관의 실패가 죄가 아니라면 내가 설혹 실패를 한들 무슨 죄가 되랴.) 하고 성순은 조금 베개에서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변과 약혼이 성립된 것과, 모친과 성재가 어 디까지든지 자기를 정복하려 할 것과, 자기가 민을 사랑한 다는 말을 들을 때에 세상이 조롱하고 욕설할 것을 생각하 매 미상불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생후에 아직 한 번도 거역하여 본 적도 없는 모친과 성재의 말을 거역할 것 도 고통이었고, 자지가 그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모녀의 정 의, 남매의 정의, 그렇게 따뜻하고 굳건하던 정의를 상하게 될 것도 슬펐다. 생래(生來) 근 이십 년간 자기의 따뜻한 사 랑의 보금자리이던 가정에서 나기는 떠나야 된다. 평화 속 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반으로, 적대 행위로 떠 나야 된다.

자기는 지금 모친에게 대하여, 오빠에게 대하여, 가정에 대 하여, 몇 수천년 전해 오던 인습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것 이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는 모친과 오빠는 안신하고 편안히 잔다. 내가 이러한 반심을 품은 줄을 모르 는 서울은 안심하고 편안히 잔다. 가정도 이럭저럭 평화 속 에 있고, 사회도 (비록 조그마한 파문은 있다 하더라도) 이 럭저럭 평화 속에 있다. 그러나 내 반심이 드러나는 날에는 모친과 오빠와 가정과 사회는 내게 향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포격을 가할 터이요, 나도 그네들에게 대하여 선전을 포고 하고 포격을 가할 것이다.

'내가 그네의 앞에 항복을 하던지, 그네가 나의 앞에 항복 을 하는 날까지 결코 빼어 들었던 칼은 다시 칼집에 들어가 지 아니할 것이다.'(카이제르의 말) 그네는 중(衆)하다. 대 (大)하다. 그러나, 나는 과(寡)하다. 조롱과 해학(諧謔)으로써 임한다 하더라도 나는 피와 생명으로써 임하여야 할 것이 다. 그러다가 다행히 이기면 사회와 돋거의 주권을 그네의 손에서 빼앗아서 내 손에 잡을 터이요, 불행히 천궁도최(天 窮刀催)하여 지면 내 오체는 모반자의 비명(鄙名)하에 조작 (鳥鵲)의 밥이 될 것이다.

상술한 사상과 그 중에 인용한 비유와 문자는 지금까지 민 의 말에서 얻은 것이다. 민이 자기의 낡은 사회에 대하는 태도를 말할 때에 쓰던 것을 성순이가 지금 응용하는 것이 다.

성순의 결심은 굳게 되었다. 원래 의지가 강한 계통인 데 다가 꽤 자각 있는 여자의 결심이라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이다. 성순은 끝까지 이 결심으로 나아가리라 하였다. 그 리고 성순은 자기가 민에게 대한 사랑을 검사해 보려 하였 다. 지금토록 성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하 였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는 그것을 분석하려고도 아 니하였고 더구나 이름을 짓는다든가, 그 정도를 알아 보려 고도 아니 하였다. 그는 그러하기를 두려워하였고, 될 수만 있으면 잊어 버리기를 바랐었다. 그리하여 아무 풍파도 일 으키지 말고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이 평온 무사한 중에서 만 사를 처리하여 가려 하였으며 그것이 교육하고 얌전한 여자 의 마땅히 취할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시대는 다 지나갔다. 아까 회당에 가던 길에 전 사 관 학교 앞에서 민을 만나는 순간에 다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성순은 어떤 전제 왕국의 일신민에 불과하였으 나, 그때부터 성순은 이미 지존의 여오아이다. 만사를 자기 의 지혜대로 정의대로 처결하여야 할 군주다. 그러니까, 그 는 분명히 자기의 사상과 목적을 검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순의 상상의 눈앞에 민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극히 냉정 한 눈으로 민의 안면의 각 선과 각 점과 어깨와, 가슴과, 다 리와, 팔과, 손과 모든 것을 일일이 해부하여 보고, 다시 그 각 부분을 맞추어 일체를 성한 뒤에 전체를 조화며 심매트 리며 색채며 하모니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다. 키는 중키, 얼굴이 좀 ㅂ좁고, 콧마루가 날카롭고, 눈이 크고, 입술이 엷고, 이마가 넓고 희고, 귓바퀴가 투명하고, 말소리가 좀 여성답게 고음이지마는 괜찮고, 성질은 온화하여 나약한 듯 하면서도 속 깊이 굳센 힘이 흐르고 열정적이요, 천재적이 요...... 이렇게 분석하였다가 종합하였다 한 끝에, '내가 그의 무엇을 사랑하나?그의 얼굴? 재주? 온화한 성 질? 목소리? 입? 눈?' 이렇게 자문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의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아 니다.'

3[편집]

그러면 무엇? 그 모든 것을 다 모아 높은 '민'이라는 사람 을 사랑한다. 그 얼굴, 그 성질, 그 재주가 오직 민의 것인 지라 사랑한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으면 성순의 사랑을 끌 만하지 못하되 그것을 모아 놓은 민은 성순의 사 랑을 끈다. 민은 결코 성순이가 분석하여 놓은 각 부분의 총화가 아니요, 그 밖에 또는, 그 위에 무엇이 있다. 그 각 부분을 총괄하는, 총괄한다는 것보다도 그 각 부분이 의존 하는 즉 그 각 부분의 모체가 되고 원천이 되는 무엇, 그것 을 영이라고만 하여도 불흡족하다. 영과 민이 합하여 되는 무엇, 민이라는 글자도 편이상, 대표하는 그 사람, 옳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순은 여기서 민의 말을 생각하였다.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그의 일부분에 대한 사랑이니, 가령 그의 품행이 방정한 것을 사랑한다든지, 용 모의 미려, 재주, 구변, 또 세상에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지 위와 재산과 명예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이 사랑의 일종이 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사랑의 초계(初階)는 될 수가 있지 마는 극히 근거가 빈약한 사랑인고로 그 사랑의 근고되는 그의 특장이 소멸하는 날이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에서 항응 말하는 우정이죠. 둘째는 마치 죽마붕우라든 지,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우연히 그의 전체를 사랑하게 되 는 것이니, 이러한 사랑은 여간해서 변하지 아니한다. 그가 부할 때나 빈할 때나, 귀할 대나 천할 때나, 설혹 법률과 도 덕이 온통 죄인이라고 내어 버리는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마 음이 변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고급의 우정(Friendship)이 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저마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요. 셋째 는 고급의 우정에 존경과 열정을 가한 것이니 차종(此種)의 사랑은 항상 소유의 관념을 짝하는 것이라, 이것은 이성 간 에 성립되는 것이니 곧 연애라. 그러모르 진정한 연애는 피 차의 개성의 이해와, 따라서 나오는 존경과 애착의 열정과 영육이 일체가 되겠다 하는 소유의 요구로 성립되는 것이 라......' 이렇게 말한 민의 말을 생각하고 성순은 과연 그렇다 하였 다. 자기는 민을 안다. 존경한다. 애착한다.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 확실히 그렇다...... 하고 성순은 이에 처음 자기의 민 에게 대한 사랑은 연애라 하는 단안을 내렸었다. 그리고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숨결이 빨리짐을 깨달으며 혼 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박두한 문제를 어찌할까? 정원이 되면 변과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작정한 것을 어찌할까? 양 반의 친척과 지구(知舊) 간에도 벌써 이럭저럭 약혼되었다는 소문이 난 모양인데 그것을 어찌할까. 이에 성순은 한번 더 한숨을 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작정한 것은 아니요, 모친과 성재가 작정한 것이다가. 자기는 그 때에 약혼에 반대까지 하였다.

자기는 확실히, '나는 싫어요'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하여졌을까?

'나는 변과는 혼인할 수가 없읍니다. 내 지아비는 오직 민 뿐이외다. 어머니께서나 오빠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시더라 도 저는 절대적으로 좇을 수가 없읍니다'하고 이렇게 명확하 게 말한 것도 아니요, 또 그 후 삼주일 간이나 넘도록 사건 이 더욱 진행하여 가는 것을 보고도 자기는 찬성도 아니하 였거니와 분명한 반대도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마음으 론 항상 불복한 생무 효력을 생(生)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명조(明朝)에는 모친과 오빠에게 자기의 의견을 분명히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히 발표하여서 그 의견 이 서면 좋고, 아니 서면 단연히 선전을 포고하여야 할 것 이다. 모친과 오빠가 자기의 의견을 들으면 곧 성을 낼 것 이요, 책망을 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그 잘못됨을 타이를 것이요, 그리고는, 달랠 것이요, 그래도 아니 들으면 최후 수단으로 위협할 것이다. 성순은 그러할 줄을 잘 안다. 그러 나, 자기가 이렇게 할 줄을 더욱 잘 안다. 아무러한 위협을 당하더라도 자기는 초지를 굽히지 아니할 줄을!) 성순은 이 이상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난처하던 일도 큰 결심을 하고 나니 다 응히 해석됨을 보고 일종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모반이 원인이 되어 가정에 대풍파가 일어 나고, 모친과 오빠가 사회에 얼굴을 들지 못할 치욕을 느낄 것을 생각할 때에 슬펐다. 모친의 슬픈 눈물과 오빠의 비분 하는 용모가 목전에 보일 때에 성순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비록 그가 부모나 형제라 도)의 체면이나 명예의 희생이 될 것이 아니다. 나는 내다.

내 사람이다. 모친의 성순도 아니요, 성재의 성순도 아니요, 오직 성순의 성순이다.

4[편집]

내가 사랑하는 모친이나 오빠에게 슬픔과 수치를 주는 것 은 정(情)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민의 말과 같 이 우리 조상이 부모나 가정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것 과 꼭 같은, 또는 그보다 열렬한 의무의 염(念)으로 자기를 위하여서는 부모나 가정도 희생하여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 함은 자기로서 대표하는 신시대를 위함이니, 장래에 무한히 길 신시대와 무한히 번창을 자손은 부모보다도 중하다. 아 니 모든 과거를 온통 모아 놓은 것보다도 중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로 아는 도덕은 결코 신시대에 깨칠 것이 못 된 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는 부모 중심, 과거 중심이던 구시 대의 대신에 자여 중심, 장래 중심의 신시대를 세워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시대를 깨뜨려야 하고, 깨뜨리려 면 깨드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 으려면은 맨 처음 깨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첫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큰 전쟁의 첫 탄환이 되고 첫희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구시대를 이기는 날까지 모친과 오빠에게 죄를 짓자.)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성순은 기쁜지 슬픈지 모르는 중에 어느덧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벌써 아침볕이 창에 비치고, 같이 자던 성훈의 부인은 일어나 나갔으며 부엌에서 솥 부 딪치는 소리와 물 쏟는 소리가 들린다. 성순은 자리에 누운 대로 작야(昨夜)에 한 것과 생각한 것을 한번 되풀이하여 보 았다. 마치 여러 해전에 일어난 일 같고 꿈속에 일어난 일 같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닌 꿈을 알 때에 성순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따. 과려와 수면 부족으로 성순은 어찔어찔하고 머리가 띵하였다. 기운 없이 잠시 벽에 기대 었다가 자리를 개고 라이온 치마분(齒磨紛)과 잇솔 담은 컵 과 수건을 들고 방문 밖에 나섰다. 모친이 마루를 쓸다가 성순을 보며,

"무슨 잠을 그리 늦도록 자니?"

"어째 피곤해서-"

"눈이 벌겋구나. 아프지 않으냐?"

하고 성순의 얼굴을 본다.

성순은 모친의 시선을 피하는 듯이 앞으로 늘어진 머리털 을 두 귀 밑으로 젖히며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아니요, 아무데도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신 없이 먼 산을 바라본다.

모친은 한참이나 귀여운 듯이 딸의 모양을 보고 섰다가 혼 잣말 모양으로,

"참말 잠간이다. 발버둥치면서 밥투정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서 며칠 아니하면 시집 을 가게 되었으니......"

하고 남의 딸이나 대하는 모양으로 혀를 툭툭 찬다.

성순은 모친에게 등을 향하고 서서 모친의 말을 들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서 이 닦던 손을 잠간 쉬 고 멍하니 섰다가, 대야를 부엌에 가서 어멈한테 김이 무럭 무럭 나는 더운 말을 한 대야 얻어다가 마당에 놓고 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세숫물을 마당 뒤에 쌀인 눈더미에 쏟고 숭숭하게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추운데 왜 그렇게 섰니? 어서 들어가서 머리나 빗고 사랑 에 나가 보아라.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 이제는 네 오라버님 심부름도 몇 날 못 하 게 되었다. 어서 들어와 머리나 빗어라!"

하는 모친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서며 모친을 향하 였다.

"오늘부터 실험을 시작해요?"

하고 성순은 놀라는 눈으로 물었다.

"너는 아직 모르니?"

"전 몰라요."

"어제 일본서 약이 건너와서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한다 고, 어젯저녁에 네 오라범이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 단다."

"돈이 어디서 나서?"

"다 변 서방 덕이지, 이제는 네 덕이다. 하하하하......"

"변서방?"

"그럼 그이가 돈을 내어서 일본에다 약을 부친 것이 어젯 저녁에 왔단다. 석유 상자만한 큰 궤에 넣어서 넓적한 쇠로 꽁꽁 동여서......"

이 말을 듣고 성순은 부지불각에 고개를 수그리며 한숨을 쉰다. 모친은 성순이가 기뻐 뛸 줄 알았다가 도리어 한숨을 쉬는 ㄱ서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크게 뜬 눈으로 성순을 보 았다. 사랑에서,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부르는 성재의 소리가 들린다.

선숭의 눈에서는 두어 방을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모친 은 그 눈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놀람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15[편집]

1[편집]

성순은 성재의 부름을 받아 사랑에 나아갔다. 사랑문을 열 려고 할 적에 성순은 웬 까닭인지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성재는 약 궤에서 약병을 내어 병에 붙인 약명을 쓴레테르 도 보며, 탁자 위에 벌여 놓기도 하다가 성순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늘부터는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따. 너도 기뻐해아도."

하고 어린애들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을 때에 하는 모 양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도 병 후의 수척한 얼굴 에 기쁜 웃음이 띤 것을 볼 때에 성순은 웃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고 성재는 커다란 약병의 싸개종이를 벗기면서,

"시작하면 설마 오는 삼월까지야 바라던 것이 성공이 될 테지. 어째 꼭 될 것만 같다. 너도 오랫동안 나를 위해서 고 생을 꽤 많이 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말 한 마디도 아니 하였지마는 여태까지 밀려 온 것을 오늘 다 말한다."

성순은 성재에게 이렇게 정중한 언사를 들여 본 적이 없었 다. 지금토록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묵묵히 앉았는 성재의 부인만 보았다. 그러나, 성순의 눈이 교집(交集)하는 줄을 알 것이다.

성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약병을 죽 내어서 탁자 위에 벌여 놓더니 우두커니 그 앞에 서서 자기가 벌여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본다. 한참 그리고 섰다가 돌아서는 성재의 얼굴 에는 큰 만족의 빛이 보였다. 그에게는 오늘부터 자기의 오 매(寤寐)에 못 잊던 실험을 시작한다 하는 생각밖에 아무 생 각도 없었다. 더구나 귀신 아닌 성재라, 자기의 곁에 섰는, 자기의 동생되는 성순이가 작야에 어떠한 고통을 하였고, 지금 어떠한 번민을 품었는지를 알 리가 없다. 성재는 성재 자신의 일로 기뻐하고, 성순은 성순 자신의 일로 슬퍼한다.

비록 동기라 하더라도 역시 딴 개인이다. 성순에게 아직 자 기가 없을 때에는 성순은 성재의 기쁨을 기뻐하였고 성재의 슬픔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성순은 벌써 분명히 자기를 찾았다. 사랑하는 오빠 의 기쁨을 기뻐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슬픔을 슬퍼해야만 한다. 일점에서 상교하던 양 직선은 영원히 다시 성교하여 보지 못하고 무한으로 달아나고 말것이다. 성순과 성재는 이미 교점을 지난 양 직선이다. 형매(兄妹)라는 각도는 변하 지 아니하면서도 차차 양 직선의 거리가 떨어져서 마침내 상망(相望)치도 못할 무한대의 거리에 달하고야 말 것이다.

"어떠냐, 이만하면 다 되었지?"

하고 성재가 성순을 볼 때에 성순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 다. 작야의 결심을 말하려던 용기는 다 스러지고 말았다. 그 오랜 실망과 슬픔과 노역과 병고 후에 처음 얻는 오빠의 기 쁨을 차마 깨뜰릴 수가 없었다. 만일 자기가 지금 변과의 약혼을 부인한다면, 동시에 일어날 오빠의 심히 상태를 성 순은 잘 짐작한다. 성순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비록 자기를 전부 희생하여서라도, 오빠의 기쁨이 오래 가게 하고, 오빠 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자기의 의무화 같이 생각하 였다. 그래서 흉중에 솟아오르는 천사만려(千思萬慮)를 다 억제하고 한번 더 성재를 향하여 웃었다. 그리고는 활발하 게 탁자 곁으로 나아가,

"주정등에 주정 넣어 와요?"

하고 밑에 조근 주정이 남은 주정등을 흔들어 본다.

"응, 좀 넣어다 다오."

"그리고 시험관도 무셔와야지요."

하고 시험관 틀에 세워 놓은 시험관을 차례차례로 하나씩 쳐들어 본다.

"글쎄-"

"이렇게 먼지가 앉았는데...... 제가 가서 말갛에 씻어 와요 --"

하고 성순은 전에 하던 모양으로 주정등과 시험관을 들고 나아간다. 부인은 불쾌한 듯이, 아니 떨어지려는 어린애를 억지로 방바닥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그런 것도 꼭 누이가 해야 해요?"

하고 성재를 노려본다.

성재는 어이없는 듯이 픽 웃더니,

"글쎄, 왜 걱정이오?"

"누이가 시집가면 책상을 지고 따라가셔야겠지!"

성재는 안방에 들릴까 우려워 말소리를 낮추며,

"여보, 평생 그 모양일 테요, 사람 좀 되어 보기 싫우? 글 쎄, 어쩌잔 말이오, 응?"

"제가 언제 사람되어 보겠어요? 남의 행랑으로나 돌아다니 지!"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2[편집]

오랫동안 자던 팔각목종이 다시 돌아가기를 시작하고, 오 랫동안 개켜 넣었떤 꼬깃꼬깃한 실험복을 입은 성재가 아침 부터 저녁까지 주정등 불에 실험관을 쬐이기 시작하였다.

실험관에서 나오는 악취 잇는 기체를 내어 보내기 위하여 한길로 향한 들창이 자주 열리고, 마친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외의 악취에 코를 쥐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성순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성재의 실험 기구를 정돈하여 주고 할 수 잇는 대로 여러 가지로 조력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오후 네 시 반의 담화 시간은 없었다. 부인 은 실험 시간 동안 실험실에 아니 들어오지마는 시간이 끝 날 만하면 결코 성재의 방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다. 이러 한 일도 있었다.

"책을 좀 보겠으니 어린애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시오."

"왜 내가 있으면 책이 안 보여져요?"

"좋은 방에 사람이 많이 앉았으면 정신이 모여야지...... 왜 그렇게 무슨 말을 곡해를 하오?"

할 때에는 성재는 성이 났다.

"그러면 가지요.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아주 가고 말지요."

하고 부인은 울기를 시작한다.

이러면 성재는 보던 책을 덮어놓고 자기가 안으로 들어간 다.

부인은 진정으로 성재를 그리워한다. 진정으로 성재의 곁 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전에도 이러한 정은 있었지마는 빈 한한 생활이 싫은 것과, 천성으로 타고난 자만과 고집을 이 기지 못하여서 친정에 가 있었으나, 친정의 가족들이 자기 를 좀 냉대하는 것을 보고, 또 이번에 성재가 중병으로 앓 는 것을 볼 때에, 역시 자기는 성재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 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줄을 결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입 으로 행랑, 행랑 하고, 성재와 자기와의 침실을 천히 여기고 수치로 여기면서도 다시 친정에 갈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 쪼록 성재의 곁을 아니 떠나려 함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 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하여서까지도 정다운 양을 보일 줄 을 모르고, 말이나 행동이나 다정하게 온아하게 할 줄을 모 른다. 자기의 성미에 맞는 일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지 마는, 자기의 의사에 틀리는 일이면 곧 안색을 변하고 어기 (語氣)를 높이며, 조금 심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처럼 속으로는 성재를 위하면서도 성재에게는 한번 도 쾌감을 주어 보지 못하고 항상 반ㄱ담을 산다. 자기는 모처럼 성재를 위하여 정성껏 무슨 일을 하였을 때에 성재 가 불쾌한 빛을 보이면 심히 불쾌하여지고 반항심이 나고, 심지어 성재를 증오하는 마음까지 난다. 이리하여서 부인은 혼인 생활 십여 년에 하직 한번도 즐거움이라든지 가정의 재미라는 맛을 보아 보지 못하고 항상 불쾌와 반항과 증오 의 생활을 보내었다. 더구나 성순이가 용하게 성재의 비위 를 맞추어 가지고 하인들의 비위까지 맞추어 가는 것을 볼 때에 부인은 화증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친도 부인에지지 아니하는 고집통이라 가끔 고집이 충돌 하여서 불꽃을 날리는 수도 잇엇으나, 모친은 어버이의 관 도를 차리고 부인은 며느리의 체면을 보아서 대사는 아니하 고 말았다. 그러나, 모친은 며느리를 벼릇없고, 철없고, 배운 것 없는 계집이라 하여 속으로는 천히 여겻고, 며느리는 모 친을 무시하고 시골뜨기 고집스러운 할멈장이라고 속으로 밉게 여겼다. 만일 성순이라는 탄력 많고 명민(明敏)하고 부 드러운 중개자, 조화자가 없엇던들 고부(姑婦) 간에는 지금 토록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성순이가 중개자, 조화자가 되는 것이 마치 자기보다는 품격과 지위가 훨씬 높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부인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미웠다. 그 중에 있어서 가련한 성훈의 부인은 마치 벨리에(白耳義)나 스위스( 西) 모양으로 세계의 변국에는 아무 상관 없는 중립국으로 있었다. 이렇 게 성격이 합하지 아니하는 개인의 일단이 무슨 인연으로, 무슨 목적으로 한 가정이라는 범위 안에 모여 있어서 주야 로 대소의 비 희극을 연철한다. 그네는 무슨 인연으로 모였 는지, 또는 자기네의 공동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즉 자기네는 어찌하여 한데 모여 살게 되었는지, 또는 무엇 을 당할 양으로 한데 모여 사는지를 모르면서 그래도 서로 떨어지지는 못한다 하는 무의식적 단결하게 살아 가는 것이 다.

그것을 생각하려면 생각할 만한 성재도, 이작 그것을 생각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고 또 실험관에 몰두하여 그러할 여유 더 없었다. 그러나, 그 단체의 일원되는 성순은 이미 혁명 사상을 품게 되어 언제 그것이 폭발할는지 모른다. 굉연(轟 然)한 폭성을 들을 때에 그네는 응당 끽경(喫驚)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16[편집]

1[편집]

성순은 이렇게 결심하였다. 성재의 기쁨을 깨뜨리지 말고 성재의 용기를 꺽지 말자고...... 그것이 위선인지 모르지마 는, 그러나 만사에 다 정책이 있고 편의가 있다. 앓는 소아 에게 약을 먹이려고 잠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것이 죄가 되 랴. 성재가 성공하기까지 성순은 자기의 결심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다만 여러 가지 핑계로 혼인 일자를 연기하리라 하엿다. 그것은 변에게 대하여서는 큰 죄이지마는 변이 성 순에게 대한 행동, 즉 성순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 하는 경 로는 성순의 생각에 결코 정정당당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 의 정책이요, 궤계(詭計)였었다. 그러면 그러한 변에게 대하 여 일종의 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할 만한 일이나, 성순이가 이렇게 함은 적어도 자기 이외 사람 을 위하여 자기의 일생의 일부분을 희생함이니, 인도적 색 채가 농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성순은 신년(新年)부터 음악을 더 배운다 하여 연동(蓮洞) 어느 서양 목사의 집에 기류하는 청년 여자 음악가에게 피아노의 개인 교수를 받기로 생각하고 모친과 오빠의 승낙을 얻었다. 모친과 오빠는 성순이가 자기의 마 음에 아니 드는데 시집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성순의 이 최 후의 청구를 청허(聽許)함이었다.

양력 명절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고 말았다. 성재 의 집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도 만들었으나 모 친의 생각에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 아직 명절 같지도 아 니하였고, 성재는 워낙 명절이라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 하고, 성순과 성훈의 부인은 각각 제 설움에 명절의 기쁨을 맛볼 여유가 없고, 오직 성재의 부인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불치듯 명절 분지를 하였었다. 성재도 이날만은 실험을 쉬 고 찾아 오는 수삼의 친지와, 명절과 아무 상관없는 잡담을 하고는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물론 변도 오고 민도 왔다. 저녁때가 되어서는 성재와 변과 민과 세 사람만 상대하게 되었다. 전 같으면 세 사람이 대좌하면 끝 없이 이야기도 나오련마는 이제는 자연히 관계가 변하여졌 다. 성재와 변과는 친척의 관계가 되었고 민은 친구의 처녀 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우와 같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 로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다름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은 민에게 대하여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었 고, 민은 변에게 대하여 승리 아닌 승리를 믿고 기뻐하는 가엾음을 비웃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민은 성순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확신치 못하므로 말할 수 없는 불 안이 있다. 비록 성순이가 성탄절 저녁에 그러한 약속을 하 였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경험도 없는 처녀가 과연 능히 모 친과 오빠의 압박을 저항하고 정신(挺身)하여 그 결심을 관 철할 수가 있을 까 할 때에, 민은 아무리 하여도 그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지 다음 다음날 성순에 게서 자기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어떠한 압 박이 있더라도 자기는 결코 굴치 아니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편지가 오기는 왔으나, 그 역시 무경험한 처녀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설혹 성순이가 그 결 심대로 단행한다 하더라도 연약한 성순의 정신이 족히 사방 으로 밀려 들어오는 압박과 조소를 감내할 수가 있을까. 비 록 의지가 건강한 대장부로도 가정과 세상의 압박을 견디기 가 죽기보다 더한 큰 고통이어든 하물며 어제 핀 꽃봉오리 와 같은 처녀...... 이렇게 생각할 대에 민은 항상 고통이 되 었고 성순에게 그만한 고통을 주는 자기가 죄스럽기도 하였 다.

민은 그 후 성순에게서 이삼 차나 편지를 받았으나 아직 한번도 대면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니 오려던 성재 의 집에를 세배라는 핑계로 온 것이다. 그러나, 온 지 오륙 시간이 되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하였다.

민과 변은 둘이 다 한가지로 성순을 보고 싶어한다. 변도 다른 데 세배 갈 데가 있건마는 다른 객들이 다가면 아마 성순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앉았다가 다른 객 이 다 가도록 민이 아니 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퍽 불쾌하 기도 하였고, 또 성순이가 진심으로 민을 사랑하는 줄을 알 매 일종 질투하는 생각도 난다. 비록 변은 이미 성순은 자 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으나 그래도 성순이가 진심 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얼마나 행복될까 하였다. 가끔 안방 에서 성순의 말소리가 날 때에 변과 민은 제가끔 그리운 생 각을 하였고, 꽤 예민한 성재는 그 눈치를 보고 혼자 속으 로 웃었다. 가끔 성재가 무슨 일로 안에 들어갈 때마다 변 과 민은 다같이 자기네도 성재와 같은 권리를 가졌으면 작 히나 좋으랴 하였다.

2[편집]

이 때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오빠, 잠간 들어오셔요."

하고 성순의 소리가 들린다.

변과 민의 마음은 일시에 그 소리 나는 편으로 쏠렸다. 그 리고 성재가 자기를 대신하여 성순을 불러 들였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부러 침착함을 표하느라고 새로 권련에 불을 붙였다. 성재는 양인의 심사를 잘 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보고 한 번 조롱하는 듯이 웃으면서,

"성순아, 이리 들어오너라. 변군도 오시고 민군도 오셨다."

변, 민 양인은 자연히 낯이 후끈거림을 깨달았다. 더구나 소심한 민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이러한 때에도 체면을 아니 잊어버리는 변은 얼른 두루마기 자락으로 무릎을 싸고 끓어앉았다. 성순이가 완전히 자기의 아내가 된 뒤에는 존경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 할 줄로 앎이었다.

이러한 무대 위에 성순이가 들어왔다. 뉘게 향하여 하는지 분명치 아니한 경례를 하고 그냥 선 성순의 얼굴도 얼마큼 붉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니 보는 채하는 성순의 눈은 어느 덧 성재도 보고 민도 보고 변도 보았다. 그리고 민을 한번 더 볼 만한 여유도 있었다. 장래의 애처를 앞에 세운 변의 마음은 미상불 만족하였다. 그러나 만일 성순의 '가장 사모 하는 ○○여' 하는 편지가 (한 장도 아니요 두세 장이나) 현 재 자기의 곁에 앉은 민의 품에 있는 줄을 안다 하면, 얼마 나 경악하고 비분하여 할까? 그러나, 변은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이미 약혹(어떠한 경로에서든지) 한 사람은 결코 남자를 사랑할 리가 없음을 아니까.

그러나, 민은 슬펐다. 자기의 앞에 선 성순이가 장차 자기 를 위하여 감내키 어려운 악전 고투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자기가 아주 물러나고, 성순으 로 하여금 순순히 변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 성순의 행복 이요, 자기의 의무가 아닐까? 즉시로 집에 돌아가서 성순에 게서 온 편지를 다 찢어 버리고 성순에게 '다시 나를 생각하 지 말고 변의 아내가 되라' 하는 편지를 할까 하기까지 하였 다.

비록 일순간이나 성순을 앞에 세워 놓은 변, 민 양인의 흉 중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물론 변의 생각은 극히 단 순하였지마는, 그리고 성재는 무책임한 제삼자로 앞에 있는 세 사람의 심리를 여러 가지고 추측하여 보고, '참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왜 내게 무슨 일이 있니?"

"동무들이 여러 사람 왔는데 밀감을 한통 사주셔요."

"동무들? 어떤 동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애들이야요. 여전에도 놀러 오던 애들 인데 다방골 집에 갔다가 여기로 이사하여 왔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그래요."

"거 고맙구나."

하고 성재가 탁자 서랍에서 돈지갑을 낼 때에 변이 슬쩍 성순을 보면서,

"참 여자가 퍽 다정해요. 그렇게 친구를 못 잊어하고......"

그러나, 성순은 아무 대답 없이 성재의 선에서 일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또 아까와 같이 뉘게하는지 모르 는 경례를 하고 나아간다.

성순이 나아가매 좌중은 마치 연극의 막이 닫힌 모양으로 적막하였다. 성순의 머리가 끼치고 나아간 향유의 향기만 고요한 실내에 떠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변이 전경(全敬)의 말을 내어서 비로 소 공통한 화제를 얻었다.

전 경은 그 후로 매일 함사고의 길을 저주하고 돌아 다녔 다.

벌써 동짓날이 지나갔건마는 아직도,

"이놈 동짓날 저녁에는 너를 잡아갈 테야."

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동지 전전날, 함사과는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무당을 불 러다가 여러 가지로 방어술을 행하였고, 동짓날 저녁에는 함사과는 무당의 명령을 따라서 목욕 재계하고 제물을 벌여 놓고 밤을 새웠다. 무당의 말에 만일 오늘밤에 잠이 들었다 가 꿈에 김참서를 만나면 다시 깨어나지를 못한다 하므로 혼자 앉아기도 미안하여 기생 선택 사무를 보는 서기로 하 여근 자기가 잠이 들지 아니하도록 파수를 보게 하였다. 이 리하여 겨우 닭이 울도록 참고 다행히 김참서의 꿈을 꾸지 아니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전 경의 예언도 그렇게 무 서워하지는 아니한다. 전경은 이제는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마치 귀신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디 서 자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며, 기억도 대부분 상실되 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식하지를 못한다.

17[편집]

1[편집]

성순은 오래간만에 여러 동창 학우를 만나서 자기와 함께 졸업한 여자들의 근상(近狀)을 알아보려 하여 밀감을 먹어 가며,

"경운(景雲)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경운이라는 여자는 반 중에서 가장 미모로 유명하였고 장 낭꾼 남자들의 익명 편지도 제일 많이 받기로 유명(類明)이 라는 여자가 바로 곁에 앉은 얼굴 길쭉한 여자의 무릎을 툭 치며,

"경운의 일이야 명운(明雲)이가 잘 알지요. 꼭 한 주일에 두 번씩은 편지가 오니까......"

명운은 부끄러운 듯이 순명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거짓말!"

"내가 거짓말이야? 성순씨, 이 애 품을 보십시오. 경운의 편지가 스무 장은 있을 테니, 만지장설에......"

"거짓말이야요. 또 그런 말 할테요?"

하고 명운은 순명의 귀를 잡아당긴다.

"아야, 아얏! 이것 놓시오, 안 그래, 안 그래."

"그러면 몰라도."

명운은 순명의 귀를 놓는다. 성순은 그것을 보고 한참 웃 다가,

"아니, 경운씨가 어디 가 있는데?"

"저는 강원도 보통 학교에 훈도를 갔는데, 무엇이 그리 슬 픈지, 슬퍼서 죽을 지경이라구려. 밤낮 죽, 그것들이 밉던 지...... 글쎄, 그게 무슨 꼴이야요. 아이 참......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그것들이, 남자들이 체면얼 아나...... 그 짐승 같은 것들이......"

하고 명운이가 자기의 말에 찬성을 얻는 것이 기쁜 듯이 웃는다.

"지금은 없지마는 토지 조사국 측량 기수(測量技手)들은 어 쨌어요. 또 ○○학교, ○○학교, 그것들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 여학생 따라다닐 생각들만 하나 보지...... 과연 경운의 말이 옳아! 그까짓 것들이 사람이람!"

하고 또 하나 뚱뚱한 여자가 말한다.

"그러면 모두들 시집은 아니 가겠네.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 니깐......"

하고 성순이가 웃는다.

"시집은 왜 가? 우리도 악마가 되게?"

하고 명운은 흥분한 어조로 말한다.

"다들 시집 아니 간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 가데."

하는 명순의 말에,

"나는 아니 갈 테야! 이제 내가 시집을 가나 보구려."

하고 명운은 결심이 굳음을 보인다.

"무어 다 그렇지, 다 그래."

하고 명운이가.

"경운이가 왜 그렇게 남자를 미워하는지 알기나 하우? 한 번은 동대문 밖에서 ○○학교 학생한테 하마터면 큰 욕을 볼 뻔했지. 또 한번은 어떤 녀석이 학교엘 왔다지?"

하고 순명이가 명운의 공격을 예방하느라고 한 판을 내어 명운을 버티면서 말한다.

"글쎄, 어떤 남자한테 그렇게 곯았는지, 편지마다 남자 원 망이지...... 남자란 모두 악마다, 야수다, 어두기 여지에 대 하여는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사기자다. 나는 일생에 결코 남자란 것을 믿지 아니한다. 명운이 너도 결코 남자를 믿지 말아라. 남자는 우리 여자의 원수요, 대적이요, 악마다......"

명운은 순명이가 자기의 사랑하는 경운의 진정으로 나오는 말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껏이 불쾌하여 낯빛을 붉히면서,

"에그, 그럼 남자가 안 그건가? 남자야 다 악마지. 그래, 순명은 남자를 천사같이 믿으오?"

지금토록 방긋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앉았던 얼굴 동그스름하고 극히 침착하여 보이는 선경이가,

"참, 그렇기는 그래. 남학생들은 길게 나서 다니면 여학생 만 보는 게야. 왜 우리도 그런 일이 아니 있소?...... 저 성순 씨하고 나하고 박물관에 갈 적에 ○○학교 학생 둘이 뒤로 따라오면서 '여보시오, 날이 춥습니다. 저희들도 그 부드러 운 비단 목도리로 좀 싸 주십시오.' 그러지 않습디까. 그리 고는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꼭 뒤로 줄줄 따라다니지 않아 요?...... 에그, 그 때에 어떻게 무서웠는지. 어떻게도 집에 투서를 하여서 큰 책망을 받았는지. 또 한번은 철석 같이 혼인을 하자고 약속한 녀석이 후에 알아보니까 아내가 시퍼 렇게 살아 있더라는구려. 그리고(소리를 낮추며) ○선생 말 이요, 그것이 경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아우?그것 만인가, 왜 남자를 아니 미워하겠어요, 글쎄."

"참 여보, 성순! 저어, 김 영인(?永仁)씨 말이요, 영인이가 왜 홍(洪) 무엇인가 한 유학생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그런데, 집에 가 보니까 본처가 있더라는구려. 그래, 밤낮 운대...... 글쎄, 저것을 어찌해!"

2[편집]

성순은 자기가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을 생각하매 그러한 말을 듣기가 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모르는 그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로 아내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 하는 것이 부도덕됨을 공격하고, 또 처 있는 남자를 사랑함 이 여자의 큰 수치인 것과, 이혼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교육받은 여자의 하지 못할 일이라 함을 역설하였다.

성순도 재학 당시에는 그네에게지지 않게 자유 연애와 이 혼을 공격하던 것을 생각하매 자기의 변천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그들의 담화는 기실 무슨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요, 다만 세상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동으로 서로 쏠리는 어린 처녀들의 말이언마는, 그것이 확실히 이 사회의 대표 적 비판이다.

수 없는 여자들이 이러한 신념 아닌 신념하에서 나고 자라 고 죽고 한다. 그것이 도리어 행복일 것이다. 인습이라는 닳 아진 궤도 위로 드르르 굴러가는 것이 무엇이 곤란하랴. 설 혹 그 궤도의 끝은 지옥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으로 빠지는 순간까지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성순은 자기 혼자 그 궤도 밖에 나서서 궤도 위로 맹목적으로 실려 가는 무수한 동성의 동포를 볼 때에, 그네들이 자기가 굴러가는 궤도가 어떤 종류의 것이며, 과거에 그 궤도로 굴러간 여자 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으며, 지금 굴러갖는 자기네의 운명이 어떠한지 반성도 아니 하고 다만 그네의 조모와 모와 자(姉) 와 붕우가 하던, 또는 하는 모양으로 울고 웃고 함을 볼 때 에 자기 혼자 그 궤도에서 뛰어나온 것이 이상하였다. 기쁘 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경운이나 순명이나 다 아무 생각도 없 이 여러 백년 묵은 닳아진 궤도로 달아나는 사람이다. 지금 비록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밀감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지 마는, 그네와 자기와는 확실히 만 세계 사람이다. 성순 자기 는 그네의 세계의 말을 알되, 그네는 성순의 말을 모른다.

이에 성순은 분기 점에 선다. 자기도 그네의 세계를 돌아가 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네를 자기의 세계에 불러 들이든 지,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취하여야 한다. 성순은 이것이 자 기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니요, 조선 여자 전체를 포괄하는 사회 문제인 줄 안다. 성순은 지금 조선이 큰 기로에선 줄 을 안다. 조선이 과거 한 생활 방식의 취하여야 할 줄은 안 다. 성순은 이러할 말을 성재에게도 늘 듣고 민에게도 늘 들었다. 들을 때마다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속으로 감복하 여 오다가 근래에 와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 자매는 형제보다 지위가 낮은 것,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글자나 보게 됨에 말할 것, 부모의 명령대로 가정의 사정과 자기네 체면과를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명령대로 시집 갈 것, 시집 가서는 부(夫)의 소유물이 될 것, 부가 죽거든 수 절할 것...... 이것이 과거한 사회의 여자의 취할 유일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리곤 근래에 양제집에서 물리 화학과 행물학 과 수학을 배우고 양제 머리를 쪽찌고 신문과 잡지와 신사 상을 전하는 서적을 읽던 여자들도 일단 교문을 나서면 그 렇지 아니한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재래의 생활 방식이라는 규구(規矩)에 아니 들어가면 아니 된다. 성순은 도저히 그것 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우선 딸이란 무엇인지, 아내란 무엇이요, 지아비란 무엇인 지, 시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오른손으로 숟가 락을 잡아야 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었고, 도 지금토록 그 대로 실행하여 왔으나 어찌해서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아 야 할 것인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어찌해서 부모의 명령을 순종해야 옳고, 아내는 지아비의 소유물, 완롱물(玩弄物)이 되어야 옳고, 어찌해서 이혼이 그 르고, 이혼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그른지도 생각해 보 아야 하겠다...... 내 두뇌로, 내 이성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 겠다. 그리고 장차 오는 조선은 어떠한 조선을 만들어야 하 고, 장차 오는 자녀들에게는 어떠한 생활을 주어야 할는지 도 내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경운이나, 명운이나, 순명이나, 선경이나 다 길을 몰라한다.

말 없이 그 궤도 위로 굴러가기는 하면서도 그것에 다소의 불만을 가진다. 더욱이 경운의 고민과, 성훈의 부인의 가련 함이 다 그 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일동을 볼 때에 일동은 말없이 몇 개 아니 남은 밀감 껍데기를 벗긴다. 성 순은 '너희들은 장차 어찌 될는고......' 하는 눈으로 일동을 보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3[편집]

동무들에게 들은 말을 종합하건대, 성순의 동창의 근황은 대개 일러하다.

몇 사람은 보통 학교의 훈도가 되어 시골에 내려가고, 그 네들은 대개 서울 있는 친구들에게 '슬프다. 괴롭다. 세상이 재미 없다. 죽고 싶다. 밤마다 울기만 한다. 나는 너밖에 사 랑하는 사람이 없고, 믿는 사람이 없다. 너도 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여 다오. 우리 둘이서 손을 마주 잡고 세상을 살아가자.....' 이러한 감상적, 염세적 편지를 자주하고, 몇 사람은 졸업 후 집에 돌아가 있는데 부모가 자기를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니까 슬프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조르시는 데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슬프다. 세상이 재미 가 없다. 그러니까 죽고만 싶다. 다만 너만 사랑한다...... 이 러한 편지.

또 몇 사람은 어떤 남자와 철석같이 맹세를 하였더니 마침 내 다른 데로 장가를 들었거나, 혹은 처가살아있거나, 혹은 뜻대로 가정을 이루었지마는 며칠이 못 되어 염증이 났거 나, 혹은 시집은 갔더니 시부모와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쫓 겨 왔거나, 혹은 동경으로 유학하러 갔거나, 혹은 사진 결혼 을 하여 가지고 호놀룰루로 갔거나......, 대개 이러한 소식이 요, 그 중의 하나는 지난 여름부터 기생이 된 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을 그네는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말같이 조롱하여 가며 웃어 가며 말한다. 그 중에 아내 잇는 민(閔) 을 사랑하여 가정과 사회에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성순을 집어 넣으면 성순의 동차의 근황 보고를 완성할 것이다.

일동은 한참이나 열심히 자기네가 아는 동창의 근황을 말 하다가 모두 침묵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자기네의 전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생각에 자기네는 결코 그러한 불행한, 또는 부도덕한 길을 걷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네도 시집갈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그네는 정신 으로 보면 아직 극히 유치하지마는 (그네뿐이 아니라 전 사 회가 다 그러하지마는) 생리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는 대로 다 성숙하였다. 그네는 지아비 그리운 줄을 알 만하고 또 혼인하는 날이면 곧 자녀를 생산할 만 하다.

그네는 밤에 자리를 들어갈 때에 길에 사람이 있었으면 하 는 생각이 나고 행복스러운 젊은 부부가 가지런히 잇는 것 을 볼 때에 부러워할 줄 안다. 그네가 무수한 남자 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지아비가 있음을 믿고 눈을 들어 어느 것 이 그 사람인가 찾는다. 사람도 자 나고 돈도 있고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여 줄지 아비를 찾 는다. 겉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없는 체하지마는 마음 속이 는 잠시도 그를 찾기를 쉬지 아니한다.

그네는 아무쪼록 시집이라는 말을 아니하려 하고, 만일 이 따금 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이, 자기는 조금도 거기에 흥미를 가지지 아니하는 듯이 말한다. 이것 이 그네의 행세다. 가장 잘 행세를 하려면 시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고 남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귀를 기울이어 듣지도 아니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네는 특별히 행세를 잘하려 하는 여자는 그러한 말이 들릴 때에는 얼굴 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 염오의 정을 표하려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나는 그러한 것을 당초에 염두에 두지도 아니 하오, 하는 뜻으로 남에게 보이려 한다. 명운이나 순명은 시 집이라는 말을 하되 남의 일같이 하는 사람이요, 선경은 당 초에 하지도 아니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네는 우 (愚)한 자이다. 여자의 일생이 혼인같이 중대한 사건이 없다 할진대(남자도 그렇지마는, 남자에게도 국사 이외에는 혼인 이 가장 둥한 일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하니까) 여자 는 항상 혼인을 생각하여야 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에 관 한 지식을 얻으며 토론을 하여야 하겠거늘, 그네는 학교에 서도 배우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배우지 못하면서, 혼자 생 각해 보려고도 아니 하고 친구나 선배에게 문의하여 보려고 도 아니한다. 그러하다가 그네는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정하에,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에게 어떠한 장래일 는지도 고려함이 없이 시집을 가서, 아내가 무엇인지 알기 도 전에 아내가 되고, 어미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어미가 되어 자기네의 선조의 실패한 생활을 꼭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마침내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람의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성순은 일동을 향해,

"그래 다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늙으실라우?"

하며 차례로 일동의 안색을 보았다. 이 대에는 명운도 '그 럼!'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한다. 성순은 말을 이어,

"시집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아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여자 란 대체 무엇일까요?"

하였다.

일동은 말없이 무슨 생각을 하였다.

4[편집]

이것은 그네에게는 실로 처음 듣는 말이다. 비록 지금까지 시집이라든지, 아내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남의 말을 듣기도 하였고, 자기네의 입으로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여자란 무엇이뇨'이렇게 완전한 명제로 된 문제를 생각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네의 모친이나, 조모나, 자매나, 아마 그네의 부친 이나, 조부나, 형제까지도, 또 아마 그네들 교육하는 남녀 선생까지요.

그네는 성순(性淳)의 간단한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네 는 지금까지 각각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통 학교를 졸업하였 고,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여 산술도 할 줄 알고 대수도 일차 일원 방정식까지는 아직 잊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일본 말도 회화를 넉넉히 하고, 담은의 쉬운 곡조나마 학교에 비 치한 풍금도 울릴 줄 알고, 그네는 서서제(瑞西製) 시계를 차서 오전 오후 몇 시 몇 분(초는 아직 사용하여 본 적이 없지마는) 이라고 불러도 보았고, 그 중에도 어떤 이는 ABCD까지도 알아서 자기네는 조모보다, 모친보다는 물론이 어니와, 같은 시대의 모든 여성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 자임하였다. 유식한 자로 자임하였다. 시집을 가려고 자기의 지아비될 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가 없음을 한탄 할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빼어나게 교육을 받고 수양이 있는 이로 자 임하였으며, 남자측에게서도 그네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삼 음을 이상으로 알이만큼 그만큼 그네는 교양 있는 자로 인 정함을 받았다. (남자 자신이 그 보다 높은 교양이 없으니 까,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만 하여도 너무 교육이 높은 것을 한할이만큼 그렇게 남자 교육이 낮으니까, 실로 금일 의 조선은 고등 보통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알아서, 남겨간 차교(此校)를 졸업하면 이미 사회의 지식 계급에 참여할 자 격을 얻는 사회니까.) 그렇게 높게 자임하였던 것이 '시집이란 무엇이뇨', '아내란 무엇이뇨', 어미란 무엇이뇨', '대체 여자란 무엇이뇨' 하는 자기네에게 가장 가깝고 긴절한 문제의 제출을 당할 때에 일언 일구가 대답도 발할 수 없는 자기네인 것을 생각 할 때에, 그네가 만을 조금이라도 총명이 있는 여자일진대 반 드시 더할 수 없는 수치와 경악을 느꼈어야 할 것이다.

명운이나, 선경이나, 그네는 자기네의 무식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옳은 ㄱ서인가, 모로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제의 성순을 쳐다본다.

성순이가 어찌해서 그리한 생각을 하였을까 하고 이상히도 여겨 본다.

무론 그네는 자기네가 그 빈약한 두뇌 속에 저장하였던 것 을 온통 떨어 놓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네의 두뇌는 마치 그네의 조그마한 보퉁이와 같다. 그네는 알록알룩한 골무며, 귀떨어진 바늘이며, 얼쑹 덜쑹한 비단 헝겊 조각이며, 학교에서 선생이 주필로, 구십 이라든지 팔십이라든지 매겨 준 습자 종이며, 사진 조각이 며, '오늘은 비가 왔다. 낮잠을 자다가 꾸중을 들었다' 하는 일기책, 사랑하는 동창에게서 받은 편지장.......

이러한 것을 귀하게 귀하게 사 둔다. 이것이 그네의 세간 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온통 떨어 놓는 다 하면 그것이 무엇 이랴. 그네는 이 보퉁이를 아침마다 저녁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 보고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가 슬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보퉁 이 속에 있는 비단 헝겊과 같은 슬픔이요, 기뻐한다 하더라도 잃어 버렸던 골 무를 얻은 기쁨이거나, 쓸데 없는 수다를 늘어놓은 친구의 편지를 받는 기쁨에 불과한 것이다.

경운의 슬픔은 아마 이것보다는 근저가 깊을 것이다.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실에 직접으로 다닥뜨려서 그 의외임에 놀랄 뿐이요, 공부할 뿐이요, 증오할 뿐이요, 즉 감정으로 숭응할 뿐이요, 이상으로 그것을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문답이 잇는 끝에 선경은,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 요. 또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어요. 또 누가 우리더러 알아 보라고 한 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지. 누가 우리를 위해서 알아 주겠어요. 우 리의 일을 우리가 해야지요."

하고 성순은 확실히 자기가 좌중의 선각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종 자부심의 쾌미를 얻었다.

순명은 가만히 생각만 하고, 명운은 금야에 얻은 지식을 곧 강원도 잇는 경운에게 편지하기로 작정하고 경운이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였다. 일동은 성순이가 자 기네보다 얼마큼 우월한 점이 잇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 리고 돌아갈 때에는 각각 전에 없던 무슨 생각을 가지고 가 게 되었다.

18[편집]

1[편집]

민(閔)은 오후의 사양이 잘 비치는 자기의 화실에서 화포 (畵布) 앞에 앉았다. 금강산 스케치를 기초로 하여 '금강 십 이제(金剛十二題)'를 그리려고 착수함이다. 지금 대한 화포 위에는 '가을의 만폭동(萬瀑洞)'이 나오려 한다. 민은 한참 물끄러미 화포를 쳐다보고,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는 붓에 회구(繪具)를 찍어 가로 세로 화포에 바른다. 왼손에는 육칠병(六七柄) 넓적한 화필이 선형으로 쥐어 있고, 오른편 무릎 밑에는 화구함에 각색 기름 물감(유 화구)이 가로 세로 누워 있다.

화포 위에 있던 민의 눈은 왼손의 붓으로 옮아 붓을 고리 고 다음에는 화구함으로 옮아 물감을 고리고 다음에는 화포 위로 옮는다. 미끄러리는 듯이 소리없이 화포 위를 달아나 고 달아난 뒤로는 그 뒤에 선이 남고 점이 남아 새로운 물 상을 이룬다. 화포의 좌단에는 기암이 올올(兀兀)한 절벽이 반쯤 이루어지고 그 우편에는 무엇이 될는지 모를 선과 점 이 착잡하게 늘어 있다.

이 때에 대문에서 '우현이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첫 번 소 리는 듣지 못하고 둘쨋번 소리에 민은 화필을 든 채로 뛰어 나갔다.

푸른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아 든 민의 얼굴에는 기쁜 웃 음이 떴다. 민은 얼른 방으로 돌아와 화필을 화구 상자에 비스듬히 누여 놓고, 석양이 비추인 창을 대하여 앉았다. 우 선 민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긴 다. 기쁘면서도 걱정을 섞지 아니치 못할 소용돌이가.

민은 물끄러미 보다가 봉투를 떼었다.

이렇게 썼다.

'일전 드린 글을 보셨을 듯, 회답 못 받는 편지를 쓰는 것 은 참 괴로운 일이올시다. 그러면서도 또 씁니다. 아니 쓰지 는 못하여서 도 씁니다. 가슴에 끓어 오르는 무한한 생각을 ○○께 말씀 아니 하면 뉘게나 하오리까. 제 기쁨을 어찌 저 혼자 기뻐하며 제 슬픔을 어찌 저 혼자 슬퍼하오리까.

제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 일이 또 생겼읍니다. 오는 십 오일에는 기필코 혼인식을 거행한다고 합ㄴ디ㅏ. 이번에는 아무리 반대를 하고 애원을 하여도 하니 들으십니다. 아마 우리(저는 처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를 씁니다. 이제는 불 가불 ○○와 저와를 이렇게 부르게 하여야 하겠는고로)의 관계를 상상하여 아는 모양이올시다. 그래서 하누 바삐 결 혼식을 하려는 모양이올시다. 연동 가는 것도 집에서는 기 뻐 아니 하시는 듯하오나 그것까지 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읍니다.

오늘 연동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읍니다. 자세한 말씀은 그때에 드리겠읍니다.

가족의 눈을 속여 편지를 쓰려니까 마음대로 아니 써집니 다. 이 편지는 연동 가는 길에 부치렵니다. 이만.

이월 십일 성순' 민(閔)은 편지를 다 보고 나서 멀거니 벽을 바가보고 한숨 을 쉬었다. 과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성순은 지금 진퇴유곡한 처지에 있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다. 이것을 구원할 자는 오직 민밖에 없다. 그러 나, 민 자신도 여러 가지로 공상은 하여 보았으나 구레적 묘안은 발견치 못하였다.

'십 오일, 이제 닷새......' 하고 민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 다, 오일 이내에 무슨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삼월까지는 연기 하여도 상관 없다던 성재가 이처럼 급하게 하는 것을 보건 대, 정녕 성순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기미를 아는 것이다. 네 시에는 다섯 시까지 곡 한 시간만 회견하기로 작정은 하였 으나 그래도 그렇게 되지 못하여 수차, 혹은 삼십 분 혹은 한 시간 늦어진 적이 있었다.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네, 가셔야지요, 어서 가십시오."

이 말을 하고 나서도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어느 덧 십 분 이십 분은 지나가고 또,

"이제는 참 가야겠읍니다."

"아차, 늦었읍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하고 둘이 다 일어나 선 뒤에도 서로 마주보는 동안에 십 분 이십 분은 어느덧 지났다. 이리하여 다섯 시반까지는 꼭 집에 들어가야 할 성순이가, 혹은 여섯시도 되고 혹은 여섯 시 반도 되었으니, 눈치 빠른 성재가 의심하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요."

"네, 이번에는 꼭 다섯 시 되거든 가십시오."

하기는 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무슨 할 말이 많아서 그러한 것도 아니언마는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 동안에 시간은 이를 시기하는 듯이 장달 음을 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알았으면 알았지!' 하고 민은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 갔다한다.

2[편집]

성순이가 오기까지 화포를 대하여 하였으나, 심서(心緖)가 산란하여 아무리 하여도 붓이 돌지 아니하므로 민이 화를 내어 화필을 집어 던지고, 화포를 한편 구석에 밀어 놓고,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았다.

오일 이내에 어찌할 방침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시원치 아 니하므로 어느덧 생각하기를 그치고 멀거니 있을 때, 지나 간 일개월 간의 자기의 생활이 파노라마 모양으로 민의 눈 앞에 떠오른다. 민은 그것을 없이하려고도 아니 하고 가만 히 보고만 있다.

맨처음 성순이가 자기 집에 찾아오던 광경이 나온다. 성순 이가 대문 밖에 와서 어ㄸ■ㅎ게 찾을 줄을 모르고 어름어 름할 때에, 행랑 어멈이 웃으면서 자기에게 고하던 일, 자기 는 화필을 든 채로 뛰어나가서 러고 낯이 붉어지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던 일, 들어와서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이나 말없이 두우커니 섰던 일.

민이 겨우,

"여기 앉으시지요."

할 때에 성순이가."

"여기도 좋습니다."

하고 방 서편 구석에 가만히 앉던 일, 성순이가 한참만에 야,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 옳지 아니합지요?"

할 때에 자기는 대답할 바를 모르던 일, 그 모양으로 얼마 있다가 겨우 정신이 침착하여 자기가 '금강 십이제(金剛十二 題)'에 착수한 것과 이것이 마음대로 되면, 동경 문부성 전 람회에 출품할 것과, 대전 영향으로 화구 값이 고등하여 곤 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때에야 성순이가 화포 곁에 와 서 자세히 그림을 보며,

"무슨 냄새가 나요."

할 때에 민이,

"그것이 기름 냄새야요. 그 냄새를 일생 맡으셔야 하겠읍니 다."

할 때에 성순이가 낯을 붉히던 일, 성순이가 조그마한 회 중시계를 내어 보며,

"이제는 가야겠읍니다."

하고 일어나 갈 때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잠간 악수하던 일.

또 그 후 한번은, 민이 해금강의 절경을 그리느라고 정신 없이 화필을 두를 때에, 언제 왔던지 성순이가 민의 등 뒤 에 선 것을 보고 민은 깜짝 놀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선 순의 두 손을 꼭 쥐 던 일, 그때에 성순이가 잠간 자기의 얼굴을 민의 가슴에 대었다가 얼른 물러서던 일, 또 성순이가,

"어디 그려 모세요. 저는 구경할께요."

하여 자기는 한참이나 기운을 내어서 그리다가,

"성순씨가 곁에 계시기만 하면 암만이라도 그러겠읍니다- 그리고 잘 그릴 것 같아요."

할 때에 성순이가 방긋 웃으면서,

"그렇겠읍니까?"

하고 자기를 보던 일,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순이가,

"저도 그림 공부를 좀 해야지요?"

"왜?"

"그래서 그리신 그림을 알아보아 드릴 만한 힘을 얻어야지 요?"

"비평도 해 주시고?"

"비평은 못하더라도 알아는 보아야죠."

"어찌해서?"

"그래야 아니 되어요?"

"무엇이?"

성순은 한참이나 있다가 가만히,

"아내가!"

하고 얼굴을 붉히더니,

"그렇지도 못하면 모두 무의미가 아니겠읍니까."

"무엇이?"

성순은 도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얼마 있다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사회의 도덕 을 깨드리고."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제게 그만한 자격이 있겠읍니까. 이해하여 드릴 것을 이해 하여 드리고, 위로하여 드릴 것을 위로하여 드리고......"

"............"

"없지요? 저로 만족하시지 못하시겠지요?"

민은 대답할 마를 몰랐다. 성순은 한번 더,

"그렇지요? 제가 그러한 능력이 없지요? 저는 그런 줄을 잘 압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밖에."

"한가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온통 드리는 것밖에......"

이렇게 말하던 일, 이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부지불각에 눈물을 떨구던 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 한참 생각하 다가, 민은 번쩍 눈을 떳다.

일찍 성순이가 헌번씩 앉았던 자리, 섰던 자리, 걸어다니던 자리애는 분명히 성순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까, 오일 이내에 절박한 일을 어떻게 조치하면 좋을까?

큰 비극의 장막이 열리려고 그 장막 끈이 움직일 듯 움직 일 듯하는 것 같다.

아무려나 모든 일을 성순을 면대하여 토론하리라 하고 시 계를 볼 때에 문이 열리며 성순의 얼굴이 보였다. 민은 일 어났다.

3[편집]

양인은 한참이나 무언의 포옹 속에 있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아서 마주 앉을 때에는 양인의 눈에 눈 물이 있었다.

민은 단도직입으로 성순에게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되었읍니??"

"편지 보셨어요?"

"네!"

"놀라셨지요?"

"놀랐었지요."

"아마, 오빠가 제가 여기오는 줄을 아는 게야요. 말은 아니 하지마는, 그러한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어저께는 저를 부 르시더니 '오는 십 오일에 예식을 하리고 작정하였다. 이번 에는 네가 아무러한 핑계를 하여도 아니 될 터이니 어서 시 키는 대로 해라......' 그러셔요. 이제는 집에서 저를 몸쓸 계 집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요."] 하고 눈물을 흘린다.

민은 무구(無垢)한 처녀가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는 양을 차 마 ㅂㄹ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순씨!"

하고 불렀다. 성순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놀래어서 고개 를 들어,

"네, 용서합시오. 모두 제 죄외다."

"............"

"제가 성순씨를 사랑하여 드릴 권리가 없어요. 제가 사랑하 는 것이 잘못이야요. 더구나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한 일이 잘못이야요. 그 때에 제가 그러한 말만 아니 하였더면 성순 씨에게 이러한 슬픔이 있을 리가 없읍니다. 모두 다 제 책 임이야요. 그러니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하는 성순의 눈은 여물었다.

"잊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지낸 일을 꿈으로 알아 주십시 오."

"그러면?"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제 일은 조금도 염려 말으시고 그렇 게 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어조는 노기를 띤 듯하였다.

"부득이하니까."

"부득이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달리 방침이 있읍니까?"

"지금토록 그렇게 생각하고 오셨읍니까?"

"지금토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그것이 잘못이야요."

"어찌해서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선 성순씨는 집을 배반하셔야지요?

어머님도 버리고 오라버님도 버리셔야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어른이 시키는 것입니까, 또 그것은 벌써 결 심한 것입니까. 애초부터 그러한 결심이 없었읍니까."

성순은 이제 울지도 아니하게 되고 정신이 주락(酒落)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결심은 하였지요. 그러나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 어요. 중요한 무엇을 등한히 한 것이 있어요. 실사회에 경홈 이 없으니까, 한갓 이상으로만 달아나고 실제를 잊어버렸어 요."

"실제란 무엇입니까?"

"네, 말씀을 들읍시오...... 우리는 실제를 등한히 하였어요.

그것이 잘못이야요. 실제를......"

"글쎄, 실제가 무엇입니까?"

"글쎄, 말씀을 들읍시오. 가령 성순씨가 집을 배반한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하고 성순을 보았다. 성순은 숨결만 큰 따름이요 말이 없 다.

민은 말을 이어,

"네, 그리고는 어찌할 텝니까?"

"유(당신)을 따라가지요."

성순은 처음 민에게 대하여 이인층의 대명사를 사용하였 다.

"어디로?"

"아무데든지!"

"네, 그것이 이상뿐이란 말씀이외다. 첫째 사람은 경제를 떠나선 살 수 없지요."

"경제?"

"네, 경제!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만일...... 이상태로...... 만일 같이 된다 하면 사회는 우리를 버리겠지요. 성순씨의 집에서는 성순씨를 버릴 테요, 내 집에서는 나를 버리겠지요. 그리고 거듸 모든 직업이 우리를 거절 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 금 몇 학교에 다니는 것도 내어 놓아야겠지요...... 저는 실로 이러한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괴롭습니다마는 사실은 사실이지요. 엄연한 사실이야 어찌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경험한 우리는 지금껏 이 사실, 무거운 사실을 잊었어요!"

양인은 침묵하였다.

4[편집]

경제! 이것은 진실로 성순에게는 의외의 문제였었다. 그러 나, 성순도 이 간단한 경제라는 말의 무거운 압박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사상의 힘을 누를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다.

민은 성순의 말 없음을 보고,

"우리는 이 큰 사실을 등한히 하였읍니다. 등한이 할 수 없 는 것을 등한히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신단 말씀이에요?"

하고 성순은 민을 보았다. 민은 고민할 때에 으레히 그러 하는 버릇대로 두 손을 두 무릎 위에 놓고 눈만으로 천정을 바로보다가,

"그러니까 변군과 혼인하십시오. 오는 십 오일에."

"제가 아직도 처녀겠읍니까, 다시 시집갈 수 있겠읍니다."

"네? 그럼 처녀가 아니구?"

하고 민은 놀라는 듯이 성순을 보는 눈을 컸다.

"제가 처녀일까요?"

"아무렴, 처녀지요."

"어떤 정도까지를 처녀라고 합니까?"

민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유심하게 성순의 눈을 보았다. 성순의 눈에서는 일종 처창(悽槍)한 빛 을 발하는 듯하다. 성순은 다시,

"네, 어떠한 정도까지가 처녀오니까?"

"한번도 남자를 접하지 아니한 여자를 처녀라고 하지 않아 요."

"남자를 접하다 하면 어떤 정도까지?"

"한자리에서 잔다는 뜻이겠지요...... 성교를 한다는 뜻이겠 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뿐이겠읍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 니해요. 저는 한번 마음을 어떤 남자에게 허하면 벌서 그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고 해요. 육으로 허하는 것은 다만 그 종속물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요. 마음으로 허한 뒤에는 이 미 육으로 허한 것이 아니야요?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올시 다. 저는 벌써 시집간 여자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데 시 집을 간다면 간음이 아니면 재가예요. 제가 이제 변씨에게 시집을 간다 하면 저는 이 고기 덩어리를 따로 떼어서 변씨 에게 드리는 것이외다. 한번(당신께) 드린 마음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읍니까."

하고 성순은 힐문하는 태도로 민을 보았다. 민은 성순의 정조관을 박박할 만한 논거를 얼른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린애 같던 성순이가 어느 틈에 이러한 조직적 의견을 얻 게 되었는가 하였다. 성순은 얼굴이 붉게 되도록 흥분하여,

"좋습니다. 만일 저를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 불편하시거든, 불만족하시거든 만족하실 길을 찾으십시오. 제가 일생에 나 아갈 길은 환합니다. 벌써 의심없이 확정이 되었읍니다. 저 는 조금도 실망도 아니하고 ...... 네, 굳세게 살지요. 저는 저대로 살지요!"

하고 흑흑 느끼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성순의 머리에 꽂힌 얼레빗 등이 희박한 석양빛에 번쩍번쩍한다. 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면서 성순의 하얀 목과 등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민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이,

"여봅시오-"

하고 불렀다. 그러나 무답.

"성순씨!"

"............"

"울음을 그리고, 말을 해야지요."

"............"

"자 고개를 듭시오."

하고 성순의 등을 흔들었다.

"말씀하세요."

"자, 바로 앉으세요."

"말씀하세요! 이러고도 듣습니다."

하고 성순은 민의 '머리를 들으세요' 하는 말이 어머니가 귀해 하는 아기의 어리광을 듣는 듯하여 가만히 소리를 내 어 웃었다. 민도 그 웃음 소리를 듣고 웃엇다. 둘이 외교적 단판을 하는 듯하던 기분이 없어지고 양인은 동시에 충풍 같은 애정의 순미(醇味)를 깨달았다. 민은 감격에 못 이기어 일어나서 성순을 안았다. 성순도 돌아앉으며 민을 안았다.

성순의 민의 가슴에 안긴 귀는 민의 항진(亢進)한 심장의 고 동을 들었다.

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성순씨-"

"네!"

그리고 한참 침묵하였다. 그 이상의 더 말할 것도 없고 필 요도 없었다.

5[편집]

"성순씨-"

하고 또 한번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여 불러 놓 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성순도 처음에는 '네' 하고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것을 기다리지도 아니한 다. 다만 민은 '성순씨' 하고 부르면 그만이요, 성순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였다.

그러한 간단한 문답이 넉넉히 양인의 무한한 의사를 소통 한다.

민이 '성순씨!' 하고 뒷말이 아니 나오는 것은 속에 일어나 는 생각을 도저히 자기의 언어로 발표할 수 없음을 깨달음 이다. 인류가 의사를 상통하기에 쓰는 유일한 방편인 언어 는 극히 불완전하다. 일상의 평범한 사상과 감정은 십분 발 표할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일보 심령적 경역에 들어서면 우 리의 언어는 벌서 아무 능력도 없어지고 만다. 이 경우에 민은 가슴에 차는 생각을 통할 길이 없어서 다만 '성순씨!' 하고 부를 뿐이다. 민은 한번 다시,

"성순씨-"

하고 불렀다.

"네."

"확실히 성순씨가 여기 계시지요. 이것이(하고 한번 몸을 흔들며) 확실히 성순씨지요?"

"네."

"네, 성순씨지요?"

"네."

"어찌해서?"

"몰라요!"

"모르셔요?"

"몰라요!"

양인은 웃었다.

"성순씨-"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서 사랑하 세요?"

"............"

"네, 제게서 무엇을 취하십니까. 저는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게다가 용기도 없고, 아무 경륜도 없고 한데...... 암만해도 성순씨가 저를 잘 못 보셨지요. 네? 왜 저를 사랑하세요?"

"몰라요!"

"몰라?"

"몰라요!"

"그러면 왜 사랑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사랑을 하세요? 이 유도 모르고 일생을 허하셨지요?"

"제가 바가(馬痂)인가 보지요?"

"왜?"

"그 이우도 모르니까."

"............"

"정말 모르겠어요. 처음에 뵈올 때에는 좋은 어름이 다 하 는 생각은 있었겠지마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겠 어요. 아무것도 저는 요구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는 이유도 없고, 이러저 러하다가 사랑하겠다 하는 조건도 없고...... 도무지 웬 까닭 인지를 모르겟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가지요!"

민은 아무 이유도 없고 요구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에 가슴 이 찔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였다. "그래도 무슨 요구가 있겠지요. 비록 이유는 없다하더라도?"

"글쎄요...... 만일 무슨 요구가 있다 하면 그것은 어찌하면 (당신께) 기쁨을 드릴까, 용기를 드릴까 하는 것일까요?"

"뉘게? 뉘게 기쁨을 주세요?"

성순은 말없이 웃었다. 민도 웃었다.

"그러한 사랑을 변군에게 드릴 수는 없읍니까? 변군에게 드리시면 변군이 얼마나 기뻐할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더구나-"

하고 (성순은 민이 기혼한 남자라는 말을 성재에게 들었단 말을 하려다가 그치고),

"그렇게 약혼을 한 뒤에는 그렇게 할 양으로 힘도써 보았 어요. 그러나 아니 되었어요. 힘을 쓰면 쓸수록 아니 되어 요. 제 가슴에는 오직 한분밖에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한 분으로 꽉 찼어요. 암만 때려도 매일 수가 없고 잊으려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글쎄.......... 그럴까."

"그렇게 생각 아니 하세요?"

"글쎄......"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지요. 이제 만일 다른 남자를 사랑 한다 하면 간음이지요?"

"글쎄......"

"왜, 글쎄 글쎄 하기만 하세요? 그렇다 하십시오."

하고 성순은 고개를 들어 민을 본다. 민을 경정치 못한 듯 이 눈을 감고 있다.

6[편집]

"아니야요! 확실히 저는 처녀가 아니에요! 저는 벌써 a girl 이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그렇지요? 그렇다 하십시오!"

"............"

"그렇다 아니 하십니까?"

민은 성순의 얼굴만 내려다본다. 민의 눈에는 고민의 빛이 있다. 성순은 물끄러미 민의 눈을 보다가,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답하시거나 말거나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에요. a woman이에요."

"만일 내가 성순씨와 혼일할 수가 없다 하면 어떻게 하셔 요?"

"그러면 혼자 있지요."

"혼자 있어요?"

"예."

"언제까지나?"

"혼인할 수 있기까지!"

"영원히 없다 하면?"

"죽기까지!"

하고 성순은 좀 슬픈 빛을 보인다.

"죽기까지 혼자 있어요?"

"네."

"그리고 행복되겠읍니까? 그러한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 겠읍니까."

하고 한참 있다가,

"아무러한 불행도 아무러한 비참도 사랑을 버리는 불행과 비참에 비기면 그것이 무엇이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결코 순순히 행복된 혼인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여 본 적은 없어요. 저는 일생에 가정 생활의 맛을 못 볼 줄을 잘 알아 요. 저는......"

"어찌해서?"

"부인이 계시니까."

하고 성순은 고개를 숙였다.

"만일 완전히 이혼이 된다 하여도?"

"이혼은 못하십니다. 그런 생각은 말으세요!"

"왜?"

"못하세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저는 사람하여 드리지 못 해요?"

"그것은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못하세요!"

"어찌해서?"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신다면 제가 괴로워서 살지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논리야요. 그런 논리가 어디 있읍니까."

"논리! 논리가 그렇게 중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 슨 논리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이혼을 하시면 부인께서는 단정코 피눈물 을 흘리실 테지요. 혹 돌아가실는지도 모르지요. 한 사람의 피눈물로 자기의 기쁜 눈물을 사! 아이고 무서워- 못합니다, 못합니다!"

하고 성순은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이혼 아니 하는 것이 나는 물론, 그 사람에게 행복 되겠읍니까?"

"그것운 모르지요?"

"내가 일생에 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하면 민적상 나의 아내로 있다고 그가 행복되겠읍니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 어른은 이혼되지 것보다 차라리 민적 상으로 만이라도 민씨의 아내로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는 지 알겠어요? 만일 그렇다 하면, 그를 이혼하는 것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못하셔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에게 줄 것이 둘 중 에 하나인데, 즉 사랑을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그런데 나는 사랑을 못 주니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가 새로 행복된 경우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야요."

"그러면 돼 지금가지 단행하는지를 못하였읍니까?"

"첫째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둘째는 그러할 용기 가 없어서, 말하자면 세상이 무서워서, 또 셋째는 그가 말을 듣지 아니 듣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네, 무슨 까닭이야 요?"

"습관에 매여서 그렇겠지요. 자기인들 이렇게 무정하게 하 는나를 사랑할 리야 있겠어요. 다만 이혼이란 못하는 것이 다. 하물며 재혼이랑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 무엇 이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 들어야 된다. 이것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차라리 새로 행복 된 경우를 찾고 싶어하리라고. 그도 청춘이야요, 지금 이십 삼세이야요. 왜 혼자 늙기를 좋아하겠읍니까. 다만 구습의 힘에 매여서 그러지요...... 오직 그뿐이야요.

성순은 다만 고개를 도리도리하였다.

7[편집]

"그것이 습관이거나 무엇이거나 그가 원통해 하기는 마찬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혼을 못하셔요. 만일 이혼을 하 신다면 저는 다시 뵙지 않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민에게서 물려 앉는다. 민 도 제자리에 돌아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한 팔로 턱을 버티고 책상에 기대어서 연필로 붓장난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붉게 창을 비치고 저편 구석에 놓인 막폭 동 화폭(萬瀑洞畵幅)이 차차 거뭇거뭇하여진다.

"그러면 어찌하실랍니까."

하고 장난하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지고 성순을 향하여 돌 려앉았다. 성순은 화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네?"

하도 다시 물었다.

"만일 성순씨께서 그러한 의견을 가지셨다 가면 장차 어찌 하시겠는가 말씀이야요."

"무슨 일이나 일합지요!"

"어떻게?"

"제 힘이 미치는 대로, 소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지. 그 도 못하면 간호부가 되든지...... 일 없어서 못 하겠읍니까?"

하는 성순의 구조는 마치 아무 근심 없는 사람의 것 같았 다.

"일생을?"

"그것이 운명이라면 일생이라도 합지요."

"운명!"

"참 운명이라는 말씀을 싫어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운명이 없어요! 오직 우리의 힘에 달렸지요.

우리의 힘이 즉 운명이지요."

"그러면, 우시의 힘이 그렇다 하면 일생이라도."

하고 성순은 경련하는 듯이 픽 웃는다.

"그리고 저는 어찌하구요?"

"역시 일하시지요!"

"어떻게?"

"지금까지보다 더 힘 있게!"

하고 괴로워하는 민을 위로하는 듯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서로 힘껏 일하는 것이. 네, 그렇 지요?"

민의 얼굴은 더욱 불편하게 된다. 성순은 슬쩍슬쩍 그 불 편하여 가는 양을 본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네. 그러나 정신으로만 합하여서. 그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기뻐해요."

하고 또 위로하는 듯이 웃는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민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졌다.

"진정입지요!"

"성순씨는 아직 처녀십니다. 다 갈 알으시지마는 모르시는 것도 있읍니다."

"에그, 제가 무엇을 알아요?"

"옳습니다. 아직 성순씨는 처녀시니까."

성순은 자기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반대하려고도 아 니 하고 다만 속으로만, (너는 무엇이라고 하든지, 천하 사람들이 다 무엇이라고 하 든지 나는 이미 처녀가 아니요, woman이다. 민의 처다.)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민은 성순이가 아직 육적(肉的) 요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재미롭게 여겼다.

"정신으로만 서로 합하면 만족입니까?"

성순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정신으로 서로 합하는 이외에 이상에 또 합할 것이 있는 줄을 모르십니까."

"............"

"그것은 우정이야요. 정신으로만 합하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까지 합해야 됩니까?"

"그렇지요. 거기 연예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완전한 결합이 끝나는 것이지요."

"육으로 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하지요. 옛날은 육으로 합하는 것만을 전체로 알아 왔 읍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다수한 사람들은."

"그럴까요? 저는 육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 아니해요. 그러 한 생각을 하면 어째 신성하던 것이 더러워 지는 것 같아 요."

"육이란 그렇게 더러운 것일까요?"

"어째 더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성순씬 그 몸을 더럽게 생각하십니까?"

"몸이야 더러울 것이 없지마는......"

"그러면 무엇이 더러워요?"

"사랑에 육이란 관념을 섞는 것이 더러운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 미신이야요. 공연히 육을 천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신성한 것이라 하면 육체도 신성한 것이지 요. 육만을 생각하는 것이 수적(數的)이라 하면 영만을 생각 하는 것은 신적이야요."

"신적인 것이 아니 좋습니까?"

"아니, 우리는 사람이니까 인적이라야 하지요. 완전한 영육 의 합치-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지요."

8[편집]

성순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죽을 알 수가 없었다. 사랑에 육이라는 관념이 아니 섞이지 못하는 것을 도리어 염오하게 생각 되었다. 자기에 게는 진실로 조금도 육에 대한 친구가 없고 다만 정신적으 로 서로 사랑할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리라 하였 다. 물론 성순은 일생 민과 함께 거주하기를 바라지마는 그 것은 육의 요구를 채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늘 마주볼 수 있으려고 함이다. 늘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육과 떨어져 있기는 참 고통이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잘 때나 깰 때나 늘 같이 있기만 하였으면 만족이요, 아무러한 다른 요구도 없다. 성순도 육교(肉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 요, 육교의 쾌미라는 말을 아니 들음도 아니요, 자녀를 생산 하는 것이 육교의 결과라는 줄도 대강은 추측하여 안다. 그 러나 그는 육교란 어떠한 것인가? 그 쾌미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은 있으되 자기가 몸소 그것을 알아보리라 하는 요구는 그리 강하지 아니하고, 그러할뿐더러 될 수만 있으 면 그런 불결한 것은 일생에 보지 말고 지내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것은 성순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아직 오빠에게 대한 사랑의 범위 내에 있다. 그는 형 자(兄姉)의 사랑을 불만족해 하면서도, 그래서 민이라는 다 른 이성을 사랑하면서도 아직 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모(母)의 사랑은 상상도 못한다. 지금 성순이 품은 사랑은 마치 움과 같다. 아직 간(幹), 지(枝)의 분호가 없는 움과 같이 오직 그렇게 분화할 소질만 가진 것이다. 거기서 처의 사랑, 모의 사랑이 분화하여 나올 것인 줄은 성순 자 기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성순에게 육으로 합한다는 뜻 을 알기를 바랄 수 없다.

양인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였던지를 잊어버리고 묵묵히 앉았었다. 민은 자기의 앞에 앉았는 성순에게 대하여 불쌍 한 생각이 났다. 꽃 같은 청춘, 무한히 행복되어야 할 첫사 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첫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치 못할 성순의 경우를 불쌍 히 여겼다.

"성순씨-"

"네."

"지금 행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됩지요."

"어째서?"

"그러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

"불행하시지요."

"어째서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셔서."

"............"

"전도에 이보담 더한 불행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집에서도 버리고 세상에서도 버리고...... 버릴 뿐이면 좋지마는 온갖 치욕을 다 주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그러려니 오죽 괴롭겠어요?"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한 분만 아니 버리신다면 저는 행 복되지요."

"그렇겠읍니까?"

"그래요."

"과연 그러실까요?"

"아니 그렇겠읍니까?"

"글쎄......"

"아마 저 때문에 괴로우시겠지요. 저는 행복되지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그러시겠지요, 저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을 ㅂ다으시 고...... 저만 없으면 아무 비난도 아니 받으실 텐데......"

"아니오......"

"그러면 저는 어찌하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저 때문에 성공하실 것을 성공도 못하신 다면 그런 죄가 어디 있읍니까. 아니야요? 그래요, 그래요!"

하고 무릎 위에 낯을 대고 운다. 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보시오!"

"그래요, 그래요......"

"말을 들으셔야지."

"그래요, 그래요......"

하고 몸을 흔든다.

"글쎄, 내 말을 들읍시오, 자 머리를 들고......"

"............"

"이제 우리가...... 내 말을 들으십니까."

"저는 단념합지요."

"글쎄, 내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잘 힘을 써서, 들으시 지요?...... 그래서 큰 사업을 이루어요, 네.

무슨 좋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게 전해주어요.

그네가 오래오래...... 가도록 이익을 얻고 행복을 얻고 자랑 으로 알고 보배로 알 만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우리 후손에 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네,

"우리 둘 사이에 난 정신적 자녀를......"

"............"

9[편집]

"알아들으셨지요. 우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 되고 말면 무 의미하지마는, 그러한 무엇을 하나 만들어서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 거기 모듬 의미가 있지 아니합니까."

성순은 울음을 그치고 그냥 엎던 대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지마는 그렇게 될까요?"

"되지요!"

양인은 한참이나 말없이 여러 가지로 장래를 상상하여 보 았다. 그 중에는 슬픈 장래도 있고 기쁜 장래도 있고 그것 을 절충한 장래도 있었다.

성순은 시계를 내어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벌써 여섯 점이올시다."

과연 실내가 어두워졌다. 성순은 벌떡 일어나면서,

"에그, 어쩌나. 또 한 시간이나 늦었네."

민은 아무 말 없이 성순만 본다. 가지 말랄 수도 없고 가 라기도 싫다.

"가야겠지요?"

"가시지요."

"어째, 가야만 될까."

하고 성순은 웃는다.

"가셔야 되지요."

"가기는 싫은데...... 그래도 가야만 되지요."

"............"

"가야만 되어요...... 가겠읍니다."

하고 성순은 민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 에 섰다.

"가시지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또 한번 인사를 하고 두어 걸음 문을 향하여 나아가 다가 또 섰다. 민은 그냥 앉은 대로,

"가시기 싫어요?"

"네."

"웬 일일까."

"몰라요!"

하고 양인은 웃었다.

"그래도 가야지요."

하고 성순도 또 한 걸음 문을 향하여 나가다가 또 한번 돌 아선다.

"그런데 오래 이야기는 하였어도 아무것도 해결은 아니 되 었읍니다그려."

"해결되었어요."

"예?"

"다 해결되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을 전 다 작정하였어요."

"언제?"

"지금."

"여기서?"

"네."

"어떻게 하시려고."

"그것은 알으셔셔 무엇합니까...... 가겠읍니다."

하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어떻게 하기로 작정하셨어요?"

하고 민도 일어선다.

"다 작정하였어요...... 갑지다."

하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민도 따라나갔다.

그러나 성순은 뒤로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문을 나서서 컴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19[편집]

1[편집]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컴한 묘등 넓은 길로 내려간다. 종ㅁ 음침한 수풀 속으로 찬 바람이 홀홀 내어분다. 밟혀서 거뭇거뭇한 눈 위로 하얀 성순의 몸이 걸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한참 잇다가 성순의 그림자가 우뚝 서는 것은 아마 뒤를 돌아봄인 듯, 민은 저 편에 아니 보일 줄은 알면서도 한번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어두움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민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깨달았다.

방에 돌아와서 민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불도 아니 켜고 우두커니 서서 성순의 하던 말을 한번 되풀이 하여 보았다.

성순은 '세상이 다 버리더라도 오직 한 분만 아니 버리시면 행복됩니다' 하였다. 그리고 '주는 대로 받지요, 닥치는 대로 당하지요' 하였다. 민은 세삼스럽게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자 기는 지금토록 성순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그렇게 강하게 그렇게 열렬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었고, 그러한 무서운 결심...... 모든 치욕과 위험을 다 무릅쓰고 그렇게 전 심신(全心身)을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려 하는 줄은 몰랐었 다.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이(지금까지 자기는 퍽 열렬한 줄 로 생각하던) 성순의 것에 비하면 몇 층 떨어지는 것임을 깨달으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자기는 아직 성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리라 하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성순의 가슴에는 오직 자기뿐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민은 부끄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지금 까지 모르던 새로운 인생의 신비를 깨달은 듯하였다.

19[편집]

1[편집]

성순은 집에 돌아와서 변이 양복장이를 데리고 왔더란 말 과, 조선복으로 하려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양복이 좋을 듯해서 자기도 예복 일숩을 신비(新備)하고 성순의 예복도 지으려 한다는 말과, 일자가 급하므로 양복점에 두 배나 수 공을 주게 하고 나흘 이내에 완성되도록 계약하였다는 말 과, 옷감은 간색첩(看色帖)에서 성순이가 친히 고르게 한다 는 말과, 예복 이외에도 만일 양복을 지을 마음이 있거든 마음대로 주문하라는 말과, 동경 천상당(天賞堂)에 주문하였 던 혼인 지환이 금조(今朝)에 도착한 것이며, 그 지환에는 변 자기와 성순의 성의 머리자를 떼어 P?K라고 새겼다는 말 이며, 혼인식은 성순이가 늘 다니던 승동 예배당(勝洞禮拜 堂)에서 할 것과, 식은 서양 선교사 모씨에게 위탁 할 것이 며, 혼인 피로연은 벌써 명월관에 주문하였다는 말이며, 당 일에는 자동차를 보낼 터이나 성재의 집앞까지는 길이 좁아 서 올라올 수 없은즉 중간까지는 인력거로 올 것이며, 또 변의 집에서는 이미 모든 절 차가 다 완비하여서 다만 그날 이 오기만 기다린다는 말이며, 먼 시골 친척들도 벌써 십여 인 올라왔고, 작야 늦도록 청첩장 육백여 장을 띄운 말까지 하였따고 성순의 모친은 성순을 보고 기쁘게 웃음 섞어가며 전한다.

성훈 부인은 부러운 듯이 곁에 앉아서 성순을 바라보며 눈 을 끔벅끔벅한다. 그리고 나서 모친은,

"너는 잘났다. 저 뚜뚜하는 자동차도 타 보겠구나."

"어머님께서도 타신다고 그랬지요."

하고 성훈 부인은 낯을 붉힌다.

"내가 무엇을 타?"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 누이와 같이 타고 오시라고 아니 그러셔요."

"변서방은 그러더라마는 내가 자동차를 왜 탄단 말이냐, 타 면 인력거나 타지."

곁에 앉아서 공연히 기뻐하던 어멈이,

"왜 그러셔요. 마님께서 작은아씨와 같이 가셔야지. 자동차 라나 타시고......"

이러한 회화를 듣던 성순은 들었떤 숟가락을 땅에 떨어뜨 렸다. 얼른 다시 잡으려다가 그냥 방바닥에 엎여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멈은 눈이 둥그래지며 벌떡 일어나 성순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에그, 작은 아씨 웬 일이셔오? 밥에 돌이 있었어요?"

"............"

"마님 작은아씨가 왜 이러십니까?"

하고 어멈도 눈이 깜박깜박하여지며 눈물이 쏟아진다.

모친은 너무 놀란 듯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얘야, 성순아! 왜 그러니 응?"

그래도 성순은 대답이 없고 울음 소리만 더욱 높아간다.

성훈 부인은 성순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끔 벅한다. 모친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또 집안에 무슨 변이 나나 보다. 요새 꿈자리가 하두 흉하 더니만...... 글쎄 이 계집애야 울기는 왜 운단 말이냐. 늙은 어미가 속이 썩어서 죽는양을 보고야 말 테냐."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아가며,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성재야, 집안에 무슨 변이 났다."

"네? 무엇이요?"

"집안에 무슨 변이 났어. 성순이가 지금 운다."

"왜요? 왜 울어요?"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다시 마당에 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성재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 안방 문을 연다. 성훈 부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불도 켜 놓지 아니한 웃방으로 올 라간다.

성재는 울고 엎드린 성순의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성순아!"

"............"

"성순아! 얘, 성순아!"

"네."

"일어나 앉아라!"

"............"

"일어나 앉으라면 일어나 앉어!"

하고 성재의 목소리를 점점 노기를 띠어 간다.

성순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눈물 이 앞을 가리워서 도로 엎뎌진다. 성재는 하릴없는 듯이 그 냥 서서 물꾸러미 우는 성순을 이윽히 보다가 자리에 앉으 면서,

"무슨 일이냐, 무신 일이야? 응? 울기는 왜 울어? 말을 해 야 알지. 무슨 일이야?"

"웬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슨 큰 변괵 나는가 보 다, 응 응."

하고 성재가 피석(避席)하는 아랫목에 앉아서 성순을 본다.

2[편집]

성재는 성순의 대답 없음을 보고 모친을 돌아보며,

"이 얘가 왜 웁니까?"

"모른다. 내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을 해?"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울어요?"

하고 성재는 의심스러운 듯 모친을 본다.

"아까 변서방이 하던 이야기를 했다. 양복장이 왔더란 말 과, 자동차 탄다는 말을 했지. 그랬더니 밥을 먹던 얘가 숟 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먹던 애가 숟가락을 집어 내던지고 우는구나. 대체 나는 심평을 알 수가 없다."

성재는 사건의 진상을 다 알아들은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니,

"철없는...... 내가 그만큼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네게 해로운 말을 하겠니? 왜 쓸데 없이 눈물을 내어서 어 머니 걱정을 하시게 한단 말이냐. 자 울음 그치고 일어나거 라."

"그 얘가 왜 우는지 너는 아니?"

하고 모친이 성재를 향하여 묻는다.

"시집가기 싫다고 그러겠지요."

"무어! 그러면 일생 혼자 늙는다고?"

"저 가고 싶은 데 못 가니까......"

"저 가고 싶은 데? 어디? 저 민가한테? 아이참, 이 계집애 가 아직도 그것을 못 잊어서 있는 모양이어? 아이......"

성재는 모친의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성순아, 전에도 말했거니와, 민군과는 절대적 안될 일이 구, 또 변군과는 벌써 약혹한 지가 오랜 뿐더러 혼인 예식 준바끼지 다 한 것이니까, 이제는 아무러한 말을 해도 쓸데 없고, 아무러한 생각을 해도 쓸데 없다. 또 네가 무엇을 알 겠니, 아직 어린것이. 어서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라.

지금은 설혹 네게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같이 사느라면 서 로 애정도 생기고 또 그러는 동안에 자녀도 나서 가정에 재 미도 붙이게 되고......"

여기까지 와서는 성재도 말이 막혔다. 자기와 아내와는 벌 써 혼인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지 아니하였나, 그리고 자녀 까지 나지 아니하였나. 그러면서도 자기네는 아직도 애정을 맛보지 못하지 아니하나.. 이렇게 생각하매 성재는 성순을 더 강제랑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성재는 성순이가 아니 라, 자기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순의 장래의 행 불행을 고려하는 것보다, 목전의 체면을 보전하고 걱정을 제거하는 것이 급무인 것 같다. 성순이가 변과 혼인한 뒤에 행복되고 불행되기는 성순 자신의 운명이요, 지금 자기의 할 일은 아 무렇게 하여서라도 성순을 변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 다. 그래서 어서 십오일이 와서 부사히 혼인 예식만 끝나면 모든 시름을 놓는 것같이 성재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재 는 당연히,

"네가 아무리 울더라도 기왕 작정된 일은 변할 수가 없다."

하고 선고하였다.

이러할 때에 대문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이 나갔다가 들어와서,

"변서방님이 양복작이를 데리고 왔읍니다."

하고 고하며 일동을 둘러본다. 성재는.

"양복은 지어서 무엇한다고 그러는지...... 내가 여러 번 쓸 데 없다고 말을 해도 기어이 양복을 짓는다고 야단이어."

"양복을 지으면 어떠냐."

하고 모친이,

"변서방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라. 우리도 이제는 아무것 도 못해 주는데."

하고 성순의 우는 것은 잊은 듯하다.

모친은 어멈을 향하여,

"그럼 양복장이더러 이리 들어오라지."

이 때에 성순은 참다 못하여,

"어머니!"

"자 어서 양복장이더러 들어오라고 일러라."

"아니야요, 어머니!"

"글세 무슨 고집이냐. 너는 암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라!"

"어머니! 저는 시집갈 수 없읍니다. 무엇이라고 하시더라도 시집갈 수 없읍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모친은 성을 낸다.

"저는 시집 못 가요."

"왜? 어째서, 응?"

하고 성재도 성을 낸다.

"아무려나 시집은 안 갈 테니 그렇게만 아셔요."

"무엇이 어째?"

"............"

"그게 누구더러 하는 말버릇이냐, 응?"

하고 모친은 주먹으로 성순의 옆구리를 쥐어 지른다.

3[편집]

"한번 다시 그런 말을 해 봐라!"

하고 모친은 분을 참지 못해 한다. 성재도 사람에 나아가 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하는 모친께,

"가만히 계십시오."

하면서 성재는,

"어디 말을 해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시집 안 가요!"

"무슨 이유로?"

"갈 수 없으니까요!"

할 때에 성순은 당돌하게 되었다.

"갈 수 없으니까?"

하고 성재가 반문할 때에,

"네, 갈 수 없으니까 못 가요!"

"이미 작정한 일을?"

"저는 시집 안 가기로 작정했어요."

"네 임의로?"

"네!"

"네가 그렇게 임의대로 할 수 있을까."

"네."

"무엇이 어째, 응. 이 계집애야."

하고 모친은 앉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면서,

"무엇이 어째?"

"저는 시집 안가요!"

"그렇게 하는 법은 없다."

하는 성재의 말에,

"안 가요!"

"그렇게 못한다-못한다면 못 하는 줄만 알아라!"

"그래도 못 가요!"

이러하는 성순은 이미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입술만 꼭 꼭 문다. 전에 없던 한독(悍毒)한 빛이 미우(眉宇)에 드러난 다. 성재는 그 빛을 보고 문득 전율함을 깨달았다. 세 사람 의 호흡은 마치 경주하고 난 살마과 같다. 어멈과 성훈 부 인은 컴컴한 웃방에서 가만히 앉아 본다. 성재는 분나는 양 해서는 당장에 성순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마땅히 들어야 할 자기의 말을 아니 듣는 성순은 큰 요녀같이 보였다. 그 러나 성재는 위협을 쓰다가 더욱더욱 성순에게 반항심을 넣 어 주는 것보다 감언으로 달래는 걸이 나으리라 하여,

"성순아, 이제 와서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 냐. 혼인 날짜까지 다 작정해 놓고 저렇게 양복장이까지 불 러 왔는데. 하니까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봐라."

"저는 벌써......"

하다가 성순은 말이 막힌다. 성재는 '벌써'라는 말에 바늘 로 찔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물꾸러미 성순을 보았다. 성순 도 성재를 이욱히 보더니,

"저는 벌써 처녀가 아니야요."

"무어?"

하고 성재의 모친은 전기를 맞은 듯하였다. 성순은 태연하 게,

"저는 벌써 남의 아내야요. 이제 다시 시집을 가면 극서은 간음인 줄 압니다."

모친과 성재는 한참이나 아연하여 실로 막지소조(莫知所措) 하였다. 성순의 이 말은 과연 청천벽력이었다. 모친은 몸만 벌벌 떨고, 성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지금 정신 있어 하는 말이냐?"

"벌써 말씀을 두리려면서도 모처럼 새로 실험을 시작하신 오빠에게 괴로움을 드릴까 보아서......"

"아니, 대관절 처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처녀가 아니야요."

"어떤 사내에게 벌써 허했단 말이지?"

"네."

"언제부터?"

"벌써 오랬어요!"

"그게 누구냐, 네가 허했다는 사내가?"

"오빠께서 아시는 이야요."

"민군?"

"네!"

"민군에게 네가 몸을 허했어? 계집애가!"

"네!"

하는 성순은 '몸을 허한다'는 말이 육교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성재는 '흑'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더니,

"예끼, 더러운 계집애!"

하고 발길로 앉았는 성순의 옆구리를 탁 찬다. 성순은 '욱' 하며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모친은,

"아이구 이년아!"

하며 성순의 쪽찐 머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머리로 성 순을 때린다. 웃방에 앉았던 어멈과 성훈 부인도 일어났다.

일동의 다리들은 추운 사람들의 것 보양으로 벌벌 떨린다.

성재는 항번 더 성순을 발길로 차려다가 억지로 참고 문을 차고 사랑으로 나갔다. 성순은 가만히 누워서 모친이 때리 는 대로 맞았다. 어멈이 말리려는 것을 모친은,

"아이구 집안 망했구나. 계집애가 집안 망하는구나. 하느님 맙시다."

하고 성순의 어깨와 팔을 물어뜯는다. 성순은 꿈 같기도 하고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모친은 자기가 기운이 진하여 거꾸러질 떄까지 성순을 때리고 물고 꼬집고 하였다.

20[편집]

1[편집]

변은 안방에서 큰소리 나는 것을 엿들어서 사건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였따. 그러할 때에 성재가 나왔다. 성재의 얼굴 은 중병자의 거과 같이 창백하였다.

성재는 들어오는 걸로,

"양복장이는 보내 주십시오."

하엿다. 변은 이유도 묻지 아니하고는, 내일 또 말하마 하 고 양복장이를 돌려 보냈다. 말을 모르는 양복장이는 웬 셈 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져서 인사를 하고 나아간다. 번은 담 배를 피우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가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잠시 벽만 바라보고 앉았다가 변에게,

"참, 이런 미안한 일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말씀해야 좋을 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변은 무관언(無關焉)하고 가만히 앉았다. 성재는 이 윽고,

"모두 내 책임이니 용서하시오. 지금까지 지내오던 일은 다 꿈으로 알고 잊어 주시오."

하고 또 얼마를 수었다가,

"이런 창피한 일이 없지마는 사세가 부득이하니까 파혼할 수밖에 없어요."

하고 도 얼마를 쉬었다가,

"그 이유는 물어 주시기 말아 주셔요. 물론 형의 자유로 상 상하심은 자유지요."

그래도 변은 아무 대답이 없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본다. 성재는 원래 변에게 대하여서는 선 배로 자인하므로 항상 변을 지도하고 훈회(訓誨)하는 태도를 가져왔었건마는 오늘은 마치 변이 자기를 심문하는 법관같 이 보이며, 더욱이 변의 아무 말도 없음이 도리어 자기를 위압하는 듯하였다. 그뿐더러 실험 탁자를 바라볼 때에 변 의 은혜가 생각되고 그러할수록 성순이가 가증하게 보여서 당장에 때려 죽이기라도 하고 싶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가 변이 간 뒤에 성재는 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안으로 들 어왔다. 들어와 본즉 성순은 여전히 엎디어 울고, 모친도 성 순을 때리기에 기가 진하여 성훈 부인이 가져온 베개를 베 고 누워서 자는지 깨었는지 눈을 감았고, 쪼그러진 두 뺨에 는 눈물 흐른 ㅈ국이 그냥 젖어 잇으며, 어멈은 어찌할 줄 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고, 성훈 부인은 성순의 등을 만지다가 성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양등에 비추어진 방안은 폭풍이 지나간 뒤와 같이 고요하 다. 성재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 하니 서 있을 뿐. 만일 성재 부인이 친정 모친의 ㅅ애신으 로 친정에 가지 아니하였던들 좀더 가내가 소요하였을 것이 다.

성재는 떨리는 소리로,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대답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고 앉으며,

"네."

"너도 네 죄를 알지?"

"무슨 죄요?"

하고 성순은 울어서 붉은 눈으로 성재를 보았다. 성순이 이 침착한 대답에 성재는 더욱 분이 나서,

"무슨 죄요! 그러면 잘한 줄 아느냐? 약혼한 처녀가 다른 사내와 밀통하고, 너는 다만 간음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첫 째 네 지아비를 속였어. 처녀는 간음죄를 범한 것도 큰 죄 지마는 지아비 있는 계집이 간음죄를 범함 것은 더 큰 죄 다. 전일 같으면 당장 사형을 당할 큰 죄여. 그리고 둘째는 부모를 배반하였어. 너는 불효와 부정의 양대죄를 지은 계 집이다. 비록 법률은 너를 죽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사회 와 도덕이 너를 죽일 것이어- 응, 너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생에 용서를 받지 못할 큰 죄인이다. 너는 네 몸을 망케 하고 우리 가성(家性)을 더럽힌 대악인이다-"

여기까지 와서 성재는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아니 할이만 큼 격노하여, 부지불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걸음 성 순을 향하여 걸어 나왔다. 그러나 성순은 대답도 아니 하고 피하려고도 아니 하고 눈만 깜박깜박한다. 어멈이 얼른 일 어나면서 성재의 곁으로 다가서며 만일을 경계할 뿐.

이 때에, 모친이 일어나며 일정한 어조로,

"성순아, 가자. 나하고 가자."

"어딜 가요?"

함은 성재의 말,

"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 산소에 가서 너와 나와 죽 고 말자. 이년아, 글쎄 내가 무슨 면복으로 저승에 가서 아 버지를 대한단 말이냐. 자, 가자. 가서 죽자."

하고 일어나서 성순의 손을 잡아당기며,

"일어나라면 일어나. 네 어미의 말은 아니 듣기로 작정이 냐."

하며 힘껏 성순을 잡아당긴다. 성순은 저항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모친의 손에 끌려 일어선다. 모친은 눈물도 간데 없고 눈에는 독기가 보인다. 성재는 모친의 길을 막아서며,

"어머니-"

2[편집]

모친은 한 팔로 성재를 떼밀고 한 팔로 성순을 앞세 우면 서,

"비켜라. 나는 오늘 저녁에 영감 무덤 앞에 가서 죽을란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단 말이냐. 자, 비 켜!"

하고 발길로 문을 차고 성순을 등을 떼민다. 성순은 문밖 에 나섰다. 성재는 모친의 앞을 막아서면서,

"어머니, 참으십시오! 가시기는 어디를 가셔요."

"죽으러 가지!"

"참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그러면 이 꼴을 하고도 살란 말이냐. 이 낯을 들고 사람을 대하란 말이냐?"

"기왕 그렇게 된 일을 어찌합니까. 글쎄 이제 어디를 가셔 요, 이 밤에."

"죽으러 가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겠니?"

"아이고, 마님 참으십시오!"

하고 어멈이 운다.

성재는 문을 닫고 모친을 떼밀어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 다. 그러나 모친은 성재의 간지(諫止)하는 말은 듣지 아니하 고 다만 완력에 못 이기어 끌려 들어왔다.

"아니 놀 테냐."

"글쎄, 참으세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저도 죽겠읍니 다. 그러면 집안이 온통 망하지 아니합니까?"

성재의 '저도 죽겠습니다' 하는 말에 모친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웠다. 성재는,

"어멈, 가서 냉수 한 그릇 떠 오게."

하였다. 과연 모친의 입술은 열병 환자 모양으로 초조하였 다.

성재는 모친의 고집을 알므로 아직도 안심이 되지 못하여 모친의 가슴을 쓸며,

"어머님께서 만일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겠읍니다. 그러 니까, 저를 불쌍하게 알으시거든 그런 말씀은 아니 하셔야 합니다."

모친은 성재가 권하는 대로 냉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도로 누우면서,

"에그, 맙시사. 그런 변재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이를 간다.

성재는 한번 더,

"어머님 참으십시오. 성순의 일은 제가 다 잘해 놓을 것이 니 어머님께서는 염려 놓으십시오."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은 어멈에게 '잘 주의하라' 는 눈 짓 을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아간다.

성재는 캄캄하게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며 고개를 둘러 성 순을 찾았다. 그러나 없다. 성재는 '성순아' 하고 두어 번 불 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사랑문을 열어 보았다. 거기도 없다. 대문은 반쯤 열리고 한길에는 인적이 고요하다. 성재 는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성순이가 어디로 갔어요."

하였다. 이 말에 모친은 깜짝 놀라 눈을 떳으나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어멈의 뛰어 나오며,

"네? 작은아씨께서 어디 가셨어요?"

"마당에도 없고 사랑에도 없는데."

"어디 가셨을까?......"

하는 어멈을 가까이 불러 성재는 귓속말로,

"잠시도 마님 곁을 떠나지 말게.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자지 말고 있게."

하고 사랑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어디로 나아가고 만다.

성재는 창황하게 계동 골목을 나서서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묘둥 민의 집으로 갔다. 아마 민의 집에 갔을 듯 하건마는, 민의 집에 갔다 하면 더욱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순이가 행여나 민의 집에나 가 있기를 바랐다. 비록 중죄 를 범한 음녀라 하더라도 그래도 동기다. 만일 수치를 못이 겨서 여자의 편심으로 자살이나 아니 하였나 하는 것이 몹 시 걱정이 되어 인력거더러 사오 차나 '빨리 빨리' 하였다.

제동서 묘동까지가 사오십 리나 되는 듯하였다. 인력거가 동대문통 넒은 길로 달려갈 적에 성재는 지나가는 전차와 행인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무수한 사 람들은 성재의 집 비극은 염두에도 아니 두고 제가끔 제 생 각을 하면서 옆구리에 두 손을 넣고 빨리 달아난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무관하던 군중들도 일조 성재의 집 비극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그네는 옳다구나 하고 제각기 무책 임한 비평과 조매(嘲罵)를 발하며 웃고 즐길 것이다.

성재는 대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이리 오러나."

하였다. 놀래어 뛰어 나오는 민을 보고 성재는 다른 인사 랑새 없이,

"성순이 여기 아니 왔어요?"

"아니요."

하고 민도 놀라면서.

"들어오시지요."

"들어갈 새 없어요. 성순이가 지금 어디로 나갔는데, 여기 왔는가 하고......"

하며 실망한 듯이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민은 무슨 말 을 할는지 모르고 속으로 '큰 비극이 일어났고나' 하면서 성 재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3[편집]

성재는 실망하였다. 성순이가 어디로 갔을까. 만일 민한테 로 아니 왔다 하면 정말 어디 죽으러나 아니 갔을까. 경찰 서에 가서 보호 청원을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할까 하고 벽돌로 지은 종로 경찰서를 얼른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말없이 섰는 민의 근심도 결코 성재에게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참고,

"그런데 성순씨가 어디로 가셨어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물었다. 성재는,

"집에 큰 비극이 일어났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다고 그 러시고, 성순은 어디로 달아나고...... 정말 여기 아니 왔소?"

민은 좀 성을 내며,

"아니 왔어요."

하였다.

성재는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인사도 없이 인력거를 타고 어두운 묘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민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가만히 성재의 집에 일어났던 풍파 를 상상하고 성순이가 혼자서 어디로 도망하는 양을 상상하 였다. 성순이가 헐덕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양도 보 이고, 또 어디서 자살을 하여서 경관과 군중 사이에 피묻은 성순의 죽음이 누워 잇는 양도 보이며, 사복 순자가 자기의 방에 난입하여 자기를 힐문하는 양도 보이고, 자기가 무수 한 군중 속에 섞여서 무정한 타매(唾罵)를 받는 양도 보인 다. 그리고는 자기와 성순이가 한정 없이 멀리로 달아나 양 과, 어떤 산중이나 섬(島) 중에서 둔세(遁世)의 적막한 생활 을 보내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순의 생명은 지금 풍전에 등화니, 성순이가 비록 아무리 의지가 견고하다 하더라도 일시의 비관과 수치 에 어떠한 일을 저지를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이 경우에 있 어서 진실로 책임을 가지고 그를 구원할 자는 민 자기밖에 없다. 민은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어나가서 성순의 뒤를 따 르리라. 그러나 성순이가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알 수 없으 니 어찌하랴. 혹 자기에게로 올는지 모르며, 만일 왔다가 자 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때야말로 성순을 갈 바를 모를 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민은 도로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 가 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문에 누가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다.

십 분이나 기다렸다. 벌써 아홉 시 사십 분! 열 시 민은 검은 소프트모를 꾹 눌러 쓰로 목도리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코까지를 싸두르고 대문 밖에로 나서서,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전차 선로를 향하여 나갔다. 전차도 이 제는 드물게 다니고 전주에 달린 등불만 반짝반짝하며 그리 세지 아니한 북풍에 전선이 붕붕 소리를 낼 뿐이다. 민은 동(東) 탈까 서(西) 탈까 잠간 주저하다가 종로를 향하고 보 도로 올라갔다. 민의 머리는 혼란하여 무수한 생각이 있는 듯하면서도 그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 골목의 컴컴한 그 늘에는 성순이가 혼자 방향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소리는 못 질러도 두어 번 큰 기침을 하 기도 하였다.

이 모양으로 민은 얼마를 가다가 자기가 지금 어디를 목적 삼고 가는가 하고 우뚝 섰다. 어떤 자동차 하나이 질풍같이 몰아오는 것을 볼 때에도 민은 얼른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옳다, 우선 성순의 집으로 가 볼 것이다' 하고 너 무 지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교동 골목으로 올라간다. 장국 밥 집 처마끝으로 고깃국 냄새 섞인 김이 나오며 웃고 떠드 는 일단의 사람과 중국 요리점의 이층도 민은 들여다보았 다.

민은 성재의 집 사랑 창 밖에 이르러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고 대문 밖에 가서 귀를 기울였으나 인적이 없다.

민은 석상 모양으로 한참이나 그렇게 섰다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불렀다. 그 때에야 사람의 소리가 나고, 문 열리는 소 리가 나더니 어멈이 가만히 대문을 연다. 민은 소리를 낮추 어,

"계신가?"

하였다.

"안 계셔요. 아까 나갔다가 들어오셨다가는 또 나가셨어요 -"

민은 실망하였다.

"성순씨는 아직 아니 들어오셨나?"

"아니요."

"마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지금 누워서 울기만 하셔요."

민은 그날 일어난 풍파에 관한 말을 물르려다가 그것도 부 질없는 일이다 하여 발을 돌려 오던 길로 다시 걸어 내려온 다. 무슨 생각이 나는지 가다가는 서로 가다가는 서로 하면 서-

21[편집]

1[편집]

성순은 그 길로 사랑에 들어갔다가 탁자 위에 놓인 유산병 을 들고 뛰어나왔다. 성순은 아무 정신이 없고 유산을 마시 고 죽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해결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 였다. 이몸 하나이 있게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니, 이 몸 만 소멸하여 버리면 모든 문제도 따라서 소 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장래의 모든 희망과 인생에 대 한 모든 의무를 관념도 이 큰 결심 앞에는 아무 권위도 없 었다. 성순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는 중앙 학교 문을 들 어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운동장을 지나, 신축된 교사 모퉁이를 돌아 성문과 같이 된 돌문을 나섰다. 거기를 나서 면 우울한 송림, 여기저기 희끗희끗한 눈뭉텅이도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놀라 서며 마무와 나무 사이ㄹ 뛰어 내려갔다.

얼마를 가다가 성순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우뚝 섰 다. 성순의 가슴은 마치 참새의 가슴 모양으로 자주 들먹거 렸다.

송림은 암흑 속에 잠겼다. 나무 끝이 바람을 맞아 우수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소리와 같았고, 송지 냄새가 황토 냄새를 합하여 성순의 코를 찔렀다. 이 속에 오기만 하여도 벌써 죽음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는 이미 성순을 책망하는 자도 없고 조롱하는 자도 없 고, 죽는다고 하여도 붙드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었따고 슬 퍼할 자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람인 성순이라고 더 사랑 할 리 없다. 저 소나무들이나, 바위나, 풀이나 다름없이, 성 순도 자연의 가슴에 난털 한 개에 ㅂ루과하다. 성순의 목숨 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연에게는 저 소나무의 가지 하나가 꺽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성순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이 약병을 들어서 눈앞에 대었 다. 그것은 성재가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는 시험 관에 쏟던 약병이다. 성순은 이윽히 그것을 보다가 쩔레쩔 레 흔들어 보았다. 그 속에서는 확실히 액체의 유동하는 소 리가 들렸다. 성순은 그 소리를 들을 때에 무의식적으로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 나는 약체가 한번 목으로 넘어 가면, 아니 입어서부터 성순의 살을 태우기 시작하여 몇 십 분 내에 성순의 생명의 뿌리까지 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내 몸이 다 타서 없어져-) 하고 성순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공육이 온통 다 타 버리고 만다 하여라도 무엇이나 타지지 않고 남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성순의 생각에는 자기의 사랑이었 다. 그렇게 미묘한 것이, 그렇게 신가한 것이 타 버리고 말 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육체가 소멸되로 만 뒤에, 그 사랑만이 뛰어나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성순은 한번 더 약병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액체 의 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번 좌우를 둘러보았따. 모 두 침묵하고 냉랭한 속에 자기의 조그마한 생명이 홀로 미 미한 소리를 내러 따뜻한 기운을 띠었으며, 만물이 자기를 협박하며 자기네와 같이 침묵하게 냉랭하게 되기를 요구하 는 것 같았다. 큰 바람이 지나가는지, 마른 송엽 떨어지는 소리가 큰 배 모양으로 흔들혼들 움직인다. 성순도 그 소나 무를 따라 움직인다.

성순의 눈에서는 부지불각에 눈물이 흐른다. 아주 방해도 아니 받는 눈물은 제 마음대로, 혹은 저고리 자락에 혹은 치맛자락에 떨어졌다.

성순의 눈앞에는 모친과 성재와 민과 변과 불쌍한 성훈 부 인과 어멈의 얼굴이 환등에 비추인 모양으로 쑥 떠오른다.

그네의 얼굴은 모두 다 피곤한 듯하다. 실망한 듯하다. 웃지 도 아니하거니와 울지도 아니하고, 마치 정신 없는 사람들 과 같이, 졸리는 사람들과 같이 멍멍하다. 그들은 자기에게 대하여 특별한 주의도 아니 하는 모양으로 무심히 스르르 지나가고 만다.

그 뒤에는 돌아간 부친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른 모든 얼굴보다 더욱 분명하게, 비창하게 보인다. 마치 비운을 못 이기어서 피선 눈을 부릅뜬 것 같다. 그 얼굴이 성순의 면전에 왔다갔다할 때에 성순은 한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따라가요.' 할 때에는 벌써 그 얼굴은 없어졌다.

다음의 민의 얼굴이 한번 다시 떠오른다. 슬픈 듯한 얼굴 이다. 멀었나 가까웠다. 적었다 컸다 한다. 그러나 말도 없 고 웃지도 아니하고 졸리는 듯이, 모든 것에 다 염증이 나 는 듯이 눈을 반쯤 감았다. 성순은 허공에 팔을 내밀어 안 으려 하였다.

2[편집]

성순에게는 이제 모친보다도 성재보다도 민이 가장 가깝 다. 자기가 죽더라도 모친은 슬퍼할 뿐이요 성재는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뿐이지마는, 불쌍한 생각과 아까운 생각 도 있겠지마는, 자기의 반신이 죽은 듯이 슬퍼하고 낙망할 자는 민이다. 진실로 성순은 이미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떠 나서 오직 민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우주를 볼 때에도 민을 통하여, 사생을 볼 대 에도 민을 통하여 본다. '웬 셈인지 이제는 당신과 저와의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한 성순의 서한 중 일절은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면 성순은 자기를 죽임은 믿을, 죽더라 도 민의 일부분을 죽임인 줄을 알 것이다. 자기가 죽은 뒤 에 민이 얼마나 슬퍼하고 낙담할 것을 알 것이다.

성순의 눈앞에 근심하는 듯한 민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 성 순은 손에 약병을 감추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리고 혼잣말 로, (용서하십시오. 당신을 의롭게 찬 세상에 두고 나만 편안한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죄인 줄 아옵니다. 그러나 모친 의 슬퍼하심과 오빠의 책망하심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 거웁니다. 앞날에 우리의 전도에 다닥뜨릴 비난과 공격은 제가 견디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십시오.

저는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먼저 달아납니다.

이것이 물론 슬픈 일이올시다.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나라 와 꽃같은 청춘을 버리고, 다른 모든 것 보다는 사랑을 버 리고 가는 것이.

아아 사랑! 그 사랑을 어ㄸ?ㅎ게 버리고 가리까. 사랑이란 그렇게 버려지기 쉬운 것이오리까? 내 육신의 생명이 끊어 지면 곧 내 가슴에 불길이 타던 사랑도 식어 가는 육체와 같이 식어 버리고 쓰러지는 조직과 같이 쓰러질 것이오니 까. 그럴 수가 있겠읍니까.

만일 그렇다 하면 이 생명이 스러지는 것보다 이 사랑이 스러짐이 아픕니다.

내 육체가 죽으면 온전한 사랑만이 뛰어나서 당신의 품속 에 들어갈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무 저항도 아무 방해도 받 지 아니하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하면 차라리 이 육체를 죽 이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니겠읍니까.

...... 아아! 그러나 사후의 일을 누가 아나, 누가 아나. 만일 이 몸과 같이 사랑도 스러진다면 그것이 무서운 사실이 아 닙니까...... 하느님! 어떤 것이 참입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왜 그렇게 말씀도 아니하시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십니까?

왜 나를 안아 주시도 아니 하시고 키스도 아니하십니까. 왜 그렇게 수십 보의 거리를 두고 나를 싸고 빙빙 돌기만 하십 니까?

그저 죽어라! 하십시오. 제가 이 약을 먹는 것을 무서워함 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찬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가겠읍니까.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 쁘겠읍니까. 저는 제 슬픔이 무서워서 죽으려 함을 당신께 대하여 미안해 하옵니다. 아아,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면, 가령, 당신이 병이 중활때에 내 생명을 드려서 당신 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ㅈ구는 것이라 하면 얼마나 기쁘겠 읍니까.

그러나, 제가 산다고 해도 당신께 비방과 고통을 드릴 뿐 이겠지요. 세상은 당신을 핍박할 수 있는 대로 핍박하겠지 요? 당신이 평온할 수 있는 인생을 도리어 저를 위하여 불 행한 일생이 되겠지요. 제가 사랑하여 드리는 데서 받으시 는 기쁨이 족히 그 불행과 상쇄하고 남음이 있겠읍니까. 어 떻게 어떻게. 제 사랑이 무엇이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저 같은 것의 사랑 이 무슨 힘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기로. 아아, 위대한 당 신에게 조그마한 제 사랑이 무엇이겠읍니까. 제가 제 몸과 마음을 다 마친들 그것이 무엇이겠읍니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살아 있음이 제게도 불행이요, 당신 께도 불행이외다.

아아, 당신은 왜 저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십니까. 죽어 라! 해 주십시오. 죽어라!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죽어도 불행은 아니지요. 저는 행복하지요. 저는 살아 보았고 사랑해 보았읍니다. 이제 더 산다 하더라도 다 만 그것을 연장해 갈 뿐이겠지요. 네, 저는 사회에 대하여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직책이 있읍니다. 그것을 피하는 것은 죄겠지요. 그나, 어찌합니까.

아아, 여러분! 저라는 생명이 이 세상에 아니 왔던 줄로 단 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죄가 있거든 책망 해 주시되 불쌍하 거든 동정해 주십시오.)

3[편집]

(저는 갑니다. 제가 간 뒤에도 어머님께서는 내내 하고 빙 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을 벌릴 수가 없고, 가 슴 속과 뼛속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 정한 자무양하시고 오빠께서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실험에 성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집안이 속히 제가 죽은 슬픔을 입 고 행복되게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문명하고 번창하여 주십시오. 정의와, 자유와, 행복과,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오! 당신께서는 아직도 거기 계십니까. 부디 행복되게 건 강하게 오래 사시며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가슴에 품은 이상을 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 아, 여러분, 안녕히 계십 시오.) 성순은 눈을 떠서 암흑의 사방을 둘러보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고 확실히 결심한 듯이 유산병 을 들어서 한번 다시 흔들고 보고 코르크 병 마개를 뽑자마 자 입에다 대고 서너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약병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입 안과 목에 격력한 아 픔을 깨닫고 가슴 속과 백 속도 차차 찢어지는 듯이 아픔을 깨달았다. 성순은 누울 자리를 찾을 양으로 다리를 옮겨 놓 으려 하였으나 그만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성순은 겨우 몸 을 돌려 나무 뿌리를 베개로 삼고 치마로 몸을 잘 가리우고 반듯이 하늘을 향하여 누웠다.

늙은 소나무 사이로 심청한 밤 하늘이 보이고 거기는 반짝 하는 별이 말없이 자기를 내려다본다.

(내가 지금 저 별 있는 데로 가나?)하고 빙긋 웃는 성순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 져서ㅕ 별이 안 보이게 된다.

성순은 눈을 감았다. 입은 벌릴 수가 없고, 가슴 속과 뼛속 은 불이 붙는 듯이 아프다. 성순은 그대로 가슴을 꽉 참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여서, 죽은 뒤에라도 자기의 방정한 자세를 변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불쌍한 최후의 노력!

성순의 눈에는 또 민이 떠오른다. 성순은 두 팔을 벌려서 안는 모양을 하였다. 그러나, 안기는 것을 자기의 가슴뿐이 었다.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따뜻한 가슴 속에 제가 영원히 살에 하여 주십시오. 제 몸을 당신의 품에 들기를 방해하거니와, 제 영이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 니오니까. 가끔 당신의 몸에 드는 것이야 자유가 아니오니 까. 가끔 당신을 일하시던 손을 쉬고 마음으로 '성순아!' 하 고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 눈앞에 제 모양을 한번 그 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산보삼아 제 무덤을 돌아보아 주십 시오. 세상에는 죄인의 무덤이나 당신께는 불쌍한- 불쌍한 아내의 무덤이 아닙니까.

아니야요. 제 무덤은 당신의 가슴 속이야요. 이 뜨거운 사 랑을 품고 차디찬 땅의 가슴에 어떻게 들어가 있읍니까. 네, 당신의 가슴이 제 무덤이야요, 무덤이 아니라 제 집이야요.

차차 고통이 더하여 갑니다. 아아 제 위와 식도는 이미 재 가 되었겠지요. 제 피는 지금 비등합니다. 제 전신이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픕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사랑으로 타서 죽습니다. 저는 제 몸이 불길이 되어 올라가기를 바랍 니다.) 성재는 열 한 시가 지나서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모친의 머리맡에 말없이 앉았다가 문득 대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러 나갔던 어멈은 어떤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성내는 자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소년을 향 하여,

"왜 왔니?"

하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속히 좀 나오세요."

하는 말에 성재는 다 알아차린 듯이 따라나왔다. 모친도 고개를 들며,

"무신 일이냐?"

하고 놀랐으나,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성재의 뒤를 따 라서 뛰어나갔다.

성재는 소년이 인도하는 대로 송림을 향하여 간다.

성재가 송림 속에 등불이 있음을 볼 때에는 만사를 다 깨 달았다.

성재는 성순을 안아 일어키며 눈물을 섞어,

"성순아, 성순아!"

하고 불렀다.

성순은 가만히 눈을 떠서 성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려 하 는 기색을 보였으나, 혀와 구개(口蓋)가 부란(腐爛)하여 발 음이 분명치 못함을 자각하고 잠잠하였다.

성재는 성순을 안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왔다.

성순이가 안방 아랫목에 누울 때에는 모친을 위시하여 일동 이 일제히 통곡하였다.

성순은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해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성재는 소년이 들어다가 놓고 간 유산병을 보이면서,

"이것을 마셨어요. 한 보시기나 마셨어요. 이젠 한 시간도 못 지낼 것이외다."

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자주 들먹거리는 성순의 가슴을 내 려 쓸면서 운다. 모친은 성순의 허리에 낯을 비비며 흑흑 느낄 뿐이요, 아무 말도 없다가 겨우 고래를 들어,

"얘, 성순아!"

하고 길게 부른다.

4[편집]

"얘, 성순아! 이게 웬 일이냐?"

할 때에 성순은 눈물 흐르는 눈을 떠서 모친을 보며 분명 치 아니한 어조로,

"어머니, 불효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하고는 더 말을 못한다.

"글쎄, 약을 왜 먹었단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구나...... 얘 성재야, 무슨 약 없겠니? 얼른 먹이려므나."

"쓸데 없어요. 벌써 늦었어요."

"성순아! 정신을 차려라."

"오빠, 용서하셔요!"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니련마는 그랬고나."

성순은 성재를 보던 눈으로 모친을 보며,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하고 절을 하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인다.

"오냐, 어서 나아서 일어나기만 해 다오. 다 네 마음대로 하여 줄 것이다."

성순은 손을 들어서 모친께 드리면서,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어머니 저는 아직 어머님 딸입지요?"

"그렇지 내 딸이지."

"저는 아직 처녀야요. 마음은 허하였지마는 몸은 허하지 아 니하였어요. 저는 아직......"

모친과 성재는 놀랐다. 꼭 민과 관계 있는 줄만 알았었다.

성순은 고민을 못 참는 듯이 이를 두어 번 갈더니 붉게 상 기한 눈을 반쯤 뜨면서,

"어머니, 오빠!"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운다.

성재는 손수 성순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무슨 말이나 해라, 네 원대로 해 주마."

"어머니! 오빠-"

"오냐, 말을 해라, 아이구,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하고 모친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어머니! 울지 말으셔요!"

"하느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시고 내 딸을 살려줍소 서...... 아이구, 이게 웬 일이냐."

성재가 모친의 무릎을 흔들면서,

"어머니! 잠간 참읍시오! 이 애 목숨이 이제 한 시간이 못 남았으니 제 원을 들읍시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 줍시다."

하고 성순을 향하여,

"자, 말을 해라."

할 때에 성순은 입에서 걸쭉한 핏덩이를 두어 번 토한다.

성재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모친과 어멈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내어 울고, 성훈 부인도 치맛자락으로 낯을 가 기고 운다. 얼마 동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성순이 가 다시,

"어머니!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언어와 호흡이 차차 곤란해 가면서,

"저 사람에게는 아무 허물이 없어요. 죄가 있으면 제 죄야 요. 부디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말끝이 눈물에 스러진다.

"원망 아니한다."

하고 모친과 성재가 일제히 말하였다.

"원망 아니 하셔요?"

하고 눈물이 흐르는 성순의 얼굴에는 만족과ㅏ 감사의 웃 음이 뜬다. 극서을 볼 때에 보는 자는 더욱 슬펐다.

"무엇이나 네 말대로 하마."

하고 성재는 말없이 문을 차고 뛰어 나간다. 모친은,

"그 밖에 무엇이나 할 말이 없느냐...... 아이구 내 딸아, 왜 약을 먹었단 말이냐!"

"어머니!"

"무슨 말이나 해라!"

"제가 죽기에 어머니 사랑을 또 받게 되었지요. 제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께서는 죽일 년이라고 미워하셨겠지요. 이렇 게 어머니 사랑 속에서 죽는 것이 오래 살아 있는 것보다 늦지 아니합니까."

"성순아,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느님 맙시사. 저를 대신 죽이시고 내 딸을 살려 줍소사."

하면서 손가락으로 냉수를 떠서 성순의 입에다 흘려 넣는 다.

"어머니!"

하고 성순은,

"어머니! 저 사람을 원망하지 말으셔요? 네? 미워하지 말으 셔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와 같이 용서해 주셔요!"

"오냐, 알아들었다. 그렇게 해주지. 어서 나아서 일어나거 라. 설마 죽으랴."

"어머니, 제 목숨은 이제 몇 십분 안 남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하고 흑갈색 핏덩어리를 토한다. 이번에는 성훈 부인이 성 순을 안고 어멈이 손으로 피를 받았다. 어멈은

"아씨, 이게 웬 일이셔요. 자, 물, 물 잡수시오."

"물 먹으면 더 괴로워......"

하고 성순은 눈을 감고 숨이 막힌다.

삼인(三人)은 가슴을 쓸고 인중(人中)을 쓸고 몸을 흔들어 겨우 다시 숨결을 들렸다.

5[편집]

성재가 들어온다. 그 뒤에 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민이다. 민의 얼굴은 푸르게 되었다. 민은 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성순이가 아니 왔더라는 말을 듣고 도로 성재의 집을 향하여 오다가 중간에서 성재를 만나서,

"마침 잘 만났소. 급한 일이 있으니 속히 내 집으로 갑시 다."

하는 성재의 말에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줄을 몰랐었다. 성순이가 이불을 가슴까지나 덮고 정신없이 누운 것과 모친이 성순의 곁에 울며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에 붉 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쓰러진 것과 어멈이 눈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에 민은 전신의 피가 일시에 동결함을 깨달았다.

실내의 공기는 연(鉛)과 같이 무거워서 그 속에 있는 사람 들의 가슴으로 천근의 무게로 내려 누르는 듯하고 천정에는 벌써 ㅈ구음의 그늘이 서리어 있는 듯하였다. 방한복판에 달린 양등(洋燈) 불의 춤을 추는 불길도 무서운 조짐으로 사 람을 협박하는 것 같아서 민은 소름이 쭉 끼침을 깨달았다.

성재는 성순의 곁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으로 성순의 턱을 흔들면서,

"성순아, 민군이 오셨다."

하는 그 소리를 떨렸다.

성순은 전기를 맞은 듯이 몸을 떨며 눈을 방싯 뜬다. 그리 고 그 기운 없는 눈으로 민을 찾는다. 민은 곧 뛰어 들어가 성순을 껴안고 싶었으나 성재의 말을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섰다. 성재는 성순에게 아직도 정신이 있는 것을 다행히 여 기면서 일어나 민에게 자기의 앉았던 자리를 사양하고 자기 는 민의 등 뒤에 선다. 민의 앉으며 성순의 눈을 보았다. 말 없이 이윽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일시에 눈물이 솟아올 랐다.

민은 성재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무슨 약을 먹었어요?"

하고 물었다.

아까 길에서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였고, 하고 성재도 성순의 눈을 보고 운다.

"유산!"

하고 민이 다시 성순의 얼굴을 보며,

"왜 유산을 잡수셨읍니까, 왜 그런 생각을 내셨읍니까?"

그러나, 성순은 말이 없고 전신에 한번 경련이 일어나며 눈을 감는다. 성재는 그것을 보고 민의 앞으로 뛰어나오면 서,

"민군! 성순을 안아 줍시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가 안 남았어요!"

하고 '성순아'를 연호(連呼)한다.

모친도 새로 울기를 시작하고는 성순의 가슴에 매어 달린 다.

민은 팔을 성순의 목으로 돌려 가만히 그를 일으켜 자기의 가슴에 안았다. 성재는 성순의 수족을 만져 보고 이미 거기 는 맥이 끊어졌음을 고하였다.

웃방에서 혼자 울던 성훈의 부인도 뛰어 내려와 성순의 다 리를 만진다. 각 사람은 구태어 가려는 성순의 영혼을 잠시 라도 오래 머물게 할 양으로 울음 소리로 외쳐 부른다.

성순의 가슴에 마주 잡힌 민의 두 손은 벌벌 떨린다. 성순 의 머리는 민의 왼편 어깨에 기대어지고 민의 헤쓱한 뺨은 성순의 찬땀이 흐르는 이마에 올려 놓았다.

성재는 죽은 빛이 된 성순의 손을 쳐들어 보면서.

"성순아,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하고 손에서 팔까지 올려 주물렀으나 대답이 없으매 또,

"성순아, 잠간만......"

할 때에 성순은 눈을 떴다.

"민군이 오신 줄 아느냐?"

성순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민군이 어디 계씬지 아니?"

성순은 가만히 눈을 들어 민을 보다가 민의 눈물이 자기의 이마에 떨어질 때에 다시 눈을 감는다.

성재는,

"성순아, 용서하여라. 너는...... 너는......"

하다가 곁에 울며 쓰러진 모친의 등을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이 애 생전에 어머니 입으로 제뜻대로 하 여 준다 해 주십시오."

모친은 겨우 고개를 들어,

"성순아, 네 뜻대로 하여 주마. 네 뜻대로 하여 줄 것이니 살아만 다오."

하고 도로 쓰러진다.

성재는 성순의 손과 민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민군! 용서하시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불러 주시오."

하고 성순을 흔들며.

"성순아, 정신을 차리느냐? 잠간만 정신을 차려라! 성순아!"

성순은 또 한번 눈을 뜨며,

"네."

하고 분명치 못한 음성으로,

"자, 민군, 이제! 이제! 아내라고 불러 줍시오."

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성순을 보며,

"성순씨! 저는 영원히 성순씨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 릅니다."

성순의 눈에서는 새 눈물이 흐른다.

6[편집]

온 방안의 사랑과 동정은 성순에게로 보였다. 이제야 누가 성순을 미워하랴. 같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죽자고 하 던 모친까지도 아무리 하여서라도 성순의 생병을 일분이라 도 늘이고자 한다.

아아, 죽음이라는 큰 사실이 여러 사람의 불화를 풀고 따 뜻한 사랑의 융합 속에 그들을 뭉쳤다. 미움과 질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성순의 일생을 따뜻한 사랑속에서 죽게 되었 다. 성순도 아마 만족하였겠지. 모친과 성재와의 사랑을 회 복하고 민의 품에 안겨서 '너는 내 아내'라는 말을 듣고 괴 로운 세상을 떠나려 하는 성순의 가슴에는 아마 기쁨도 있 었겠지. 그러나, 양양한 장래를 가진 꽃봉오리가 실컷 피어 보지도 못하고 때 아닌 광풍에 날려 버리는 것을 무심하게 보내는 사람도 눈물이 지려던 하물며 떨어지는 자기에게야 왜 통곡한 생각이 없으랴.

그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저만 혼자 어 딘지 알지 못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도 맛하는, 정답던 모 양을 다시 차려서 사랑하는 눈에 다시 보일 수도 없고, 그 리운 언어를 다시 발하여 사랑하는 귀에 다시 들릴 수도 없 는 그러한 나라고 떠나가는 정이 얼마나 하랴.

옛말이 옳다 하면 지금 성순의 곁에는 염라국의 사자가 지 켜서서, 어서 행장을 수습하여 길 떠나기를 대촉할 것이다.

그가 아니 가려고 해도 아니 가지 못하고 분포를 지체하려 고 하여도 지체할 수도 없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의 몸을 안고 그의 손발을 꼭 쥐 고 아니 놓으라 하되 어느덧 그의 영은 소리도 없이 무궁한 먼 나라로 달아나고 싸늘하게 식은 껍데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깨끗하고 사랑스럽던 영을 담았던 몸뚱이도 그로부 터는 아니 씩을 수가 없고, 땅에 아니 묻을 수가 없고, 그렇 게 미묘하고 미려하던 신체의 조직이 컴컴한 보기 싫은 빛 이 되어 구린내를 아니 발할 수가 없고, 마침내 풀 뿌리를 배 불리는 흙이 아니 될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자가 아 무리 그의 무덤을 꽃과 대리석으로 꾸민다 한들 그에게 무 슨 유익이 있으며, 아무리 그를 애석하는 혈루로 그의 무덤 을 적신다 한들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래도 미련한 사람들은 무덤에 놓아 주기를 위하여 향기로운 꽃가지를 생 전에 아끼고, 관 위에 뿌려 주기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생 전에 아낀다.

성순의 사지는 차차 식어 올라온다. 성순의 호흡이 차차 단촉하여 간다. 그러하면서도 성순의 의식은 아직도 명료하 다. 그는 그의 사지가 식어 올라오는 줄을 알고 그의 지금 명료하던, 의식하던 의식이 차차 몽롱하여질 것을 안다. 그 는 자기의 손이 민의 손을 잡은 줄을 알고 자기의 얼마 아 니 남은 체온이 여러 겹의 장애를 관철하여 민의 슬퍼하는 체온과 서로 화하는 줄을 안다. 그러하는 동시에 그는 얼마 아니해서 자기의 이식이 몽롱하여지면 자기의 손이 민의 손 속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요, 자기의 아직 뛰는 가슴이 민 의 가슴에 안긴 줄도 모를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성순은 몇 분인지 몇 초인지를 알 수 없는 자기의 생병의 따뜻함이 있는 동안에 느낄 수 있는 대로 인생의 맛을 느끼려 한다.

너희는 민의 손을 잡은 성순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느 냐. 그것은 남은 힘을 다하여 한번 더 힘껏 쥐어 보려 함이 다. 너희는 기운없이 내려 감긴 성순의 눈꺼풀이 움직움직 하는 것을 보느냐. 그것은 눈의 동자가 물건을 비칠 수 있 는 동안에 한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 함이다.

사람들아 울지만 말고 무엇이나 기쁜 말을, 위로도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여 주어라. 그의 귀가 아직 성음을 분별할 능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정다운 말소리를 실컷 듣 게 하여라.

성순의 몸에는 또 경련이 일어난다. 일제히 놀람으로 둥그 래지던 눈들에는 새로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방안은 고 요하다. 그네는 소리를 내어서 울기를 그쳤다. 소리를 내어 울기에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네는 몸으로 울기를 그만두고 마음으로 영으로 울기 시작하였다. 몇 십층 더 아 픈 울음을 몇 십층 더 뜨거운 눈물을 시작하였다.

단촉(短促)하지마는 부드럽게 들리는 성순의 숨소리는 일동 의 아픔을 깊은 애수에 침정(沈靜)하게 하였다. 가만히 만일 귀를 기울이면 벽의 흙과 서까래의 나무의 분자 분자가 운 동하는 소리조차 들릴 것같이 그렇게 일동의 마음은 침정하 였다. 그 숨결은 마치 장마 뒤의 서풍과 같이 일동의 마음 하늘에 덮였던 건은 구름, 잿빛 구름을 말끔 몰아내었다. 그 리하고 이 방 속에 이 집이 지어진 이후로 아마 한번도 있 어 본 적례가 없는 참사람의 일단이 되게 하였다.

7[편집]

성순은 전의 어느 것보다도 더 심한 경련을 한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한번 흔들고 민의 손을 힘껏 쥔다. 일동의 전신에 얼음 같은 전율이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그러쥔다. 그리고 부지불각에 일제히.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였다.

성순은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헛소리 모양으로 '죽음! 죽음!' 하였다. 일동은 아까보다 더 한 전율과 공푸를 깨달았다. 민은 한 손으로 성순의 턱을 받쳐서 그의 고개를 들며,

"성순씨! 성순씨!"

하고 두 번 불렀다.

"네."

하는 대답은 입술 안에 방황하는 듯.

"정신차립시오!"

하고 한번 몸을 흔들 때 성순은 잠이 들었다가 깨는 듯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어 한번 모친부터 성 훈 부인, 어멈, 성재, 민을 둘러보더니,

"저는 가요."

하고 방그레 웃는다.

"얘, 성순아! 정신차려라."

하는 모친의 말도 들은 듯 만 듯,

"어머니, 저는 먼저 가요. 아버지 계신 데로......"

"가기는 어디를 가!"

"하느님께로!"

성재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냐, 기쁘게 가거라. 하느님께로 가거라...... 짧은 일생을 우리가 들러붙어서 떄리고 차고 못 견디게 굴었고나...... 기 쁘게 자유로운 나라로 가거라!"

"가다니, 어디로 가? 나를 두고 어디를 가?"

하고 모친이 성순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성순의 호흡 은 점점 더 단축하여지고 두 번에 한 번씩 혹은 세 번에 한 번씩 끊어지기도 한다.

성순은 자기의 이식이 차차 희미하여짐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다. 죽기는 너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강렬한 생의 집착을 깨달았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 무 이른 듯하였다. 벌써 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아까운 듯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ㅂ러ㅣ고 어딘지 모르는 데로 가는 것이 슬프기도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순은 최후 의 힘을 다하여 민의 손을 꽉 쥐며 억지로 눈을 떴다. 한 손은 민이 한 손은 모친이, 한 다리를 성훈 부인이, 또 한 다리를 어멈이, 머리와 가슴을 민이 꼭 잡았다. 아무리 힘센 죽음의 신이 오더라도 아니 놓치려는 듯이 꼭 잡았다. 성순 도 발을 뻗칠 대로 뻗치고 악을 쓸 대로 써 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번쩍 보인 뒤에 는 그 얼굴들을 궤뚫을 수 없는 어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고, 광명한 새 세계가 눈앞에 번떡할 때에 정다운 소리들이 차차 멀어감을 깨달았다. 성순은 어느덧 그의 영은 세상의 고민과, 비방과, 나중에는 독한 유산으로 타 버린 낡은 집을 떠나 무궁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두둥실 떴다. 아마도 그 가 구름을 지나고 별들을 지날 때에 반드시 정든 지구를 다 시금 돌아보고 '저는 가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고, 다만 조는 듯한 해쓱한 육체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쯤 뜬 그의 눈은 지금도 등불을 반사하여 진주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의 상이 꼭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을 듯하였다.

민은 얼마큼 피곤과 고민의 빛을 띤 성순(이제도 성순이라 고 할는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전후를 불구하고 자 기의 뺨을 성순의 뺨에 비비며 그 창백한 입술에 자기의 입 을 꼭 대었다. 거기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성재는 벌떡 일어서면서,

"어머니,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하고 어멈에게 눈짓을 하였다. 모친은 두어 번 반항하고, 성순의 시체(이제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에 매어달리려 하 다가는 마침내 어멈의 어깨에 달려 사랑으로 나아갔다.

"자, 이제 내려 누입시다."

하는 성재의 말에 민은.

"아니요, 잠간만. 아직 체온이 남아 있어요. 아주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나마 이렇게 안고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성순의 눈은 여전히 반쯤 뜬 대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의 싸늘한 손을 아직도 민의 손을 감아쥠 대 로 있다. 그러나 그의 코로서는 다시 숨이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가슴이 영원히 잠잠하였다. 차차 더욱 창백하여 가는 입술 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빨간 피가 흘러 내린다.

밤은 어느새 깊었던지 이 서울 장안에 어느 집 닭이 소리 를 높여 운다.

8[편집]

성순의 얼굴은 덮지도 아니한 대로 가만히 베게 위에 놓였 다. 곁에 앉았는 민과 성재의 눈으로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 른다. 성순의 생전의 일과 죽을 때의 모양을 생각하고는 울 고 울다가는 조는 듯한 성재의 걸굴을 보고, 보고는 또 울 었다. 어멈과 모친은 사랑에 나아가고 없고 웃방에서 외로 운 성훈 부인의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가까 워 실내에는 음냉한 기운이 돌고, 양등의 기름도 거의 다 졸아서 불이 거물거물하건마는 아무도 그것을 깨닫는 이가 없다.

성재는 일어나서 이불로 시체를 덮고 병풍을 두르러 하였 다. 그러나 민은,

"잠깐 참읍시다. 아직 그 얼굴을 가리우지 말으셔요."

하였따.

아직 그를 시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의 얼굴을 죽 은 자의 얼굴이라고 보고 싶지 아니하다. 그 코에서 숨이 달아나고, 두 뺨에서 붉은 빛이 달아나고, 몸에서 부드러움 과 따뜻함이 달아났다. 그렇게 따뜻한 기름 모양으로 미끄 럽게 흘러 다니던 피는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었다고 보 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그 얼굴은 이제 덮이면 영원이 덮이면 영원히 덮이는 것이 다. 평생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던 그 눈은 비록 감았다 하더라도 깨끗한 눈물에 여러번 젖었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지 아니하냐. 설혹 그것이 이미 시체라 하자. 생병이 빠져 나간 빈 집이라 하자. 그래도 근 이십 년간 사랑하는 사람 이 들어 살던 집이라 하면 얼마나 정다우랴.

아아, 어떻게 차마 그 얼굴을 가리우고 그 몸을 관에 넣고 그 관을 차디찬 흙 속에 묻으랴. 옛날 애급 사람들보고 모 양으로 시체에 약을 발라 영원히 썩지 않는 '미이라'는 만들 지 못한다 하더라도......

민은 마치 자기를 잃어 버린 사람 모양으로 망연히 성순의 얼굴만 보고 앉았다. 자기의 장부(臟腑) 속에서 몇 가지 중 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것같이 갑자기 공허함을 깨달았다. 천 평(天枰)의 한 곳에 달렸던 추가 갑자기 없어진 때에 그것이 평형을 잃어 되는 대로 상하하는 모양으로, 민의 영은 안정 을 읽고 구만 리 장공에 떴다 잠겼다 하며 현훈(眩暈)이 생 긴 듯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꽃 피고 새울고 일광이 조휘 (照輝)하던 세계가 갑자기 잿빛 같은 광선으로 덮이고 불타 고 번번한 지구 위에는 자기만 혼자 올연(兀然)히 서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하였다.

모든 희망은 양인의 것이었고, 모든 계획은 양인의 것이었 으며, 모든 기쁨, 모든 가치는 다 양인의 것이었었다. 그러 던 것이 이제 한편이 없어지니 그것들도 그를 따라서 없어 지고 말았다. 그는 무슨 일에나 무슨 경영에나 '우리 둘'을 주격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영원히 없다. '우리 '는 깨어져서 '내'가 되고 말았다. 다만 양인의 살과 살이 유 합(癒合)하였다가 떨어진 자리가 일생을 두고 쓰라릴 뿐일 것이다.

성순을 매장하고 돌아와서 민이 지은 제물을 쓰고 이 슬픈 이야기를 그치자-

성아, 너는 갔고나, 마치
농(籠)에 갇혔던 새가 놓여
'자유 자유' 하면서 외쳐
구름 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듯이, 너는 갔다.
서리 내리기 전날, 피는
국화아 같이, 아리따운
꽃이 피듯 말 듯 졌다.
쓸쓸한 하늘 길을 홀로
가는 네 신세가 쓸쓸한
세상의 사막에 고적한
짝 잃고 헤매는 몸으로
가는 내 정경! 아아 성아!
어이 갔느냐 아니 가던
못하겠더냐. 가랴거던
함께 가던 못 하겠더냐.
내가 만일 네 뒤를 따라
하늘 위에나 땅속에서
정녕 네 나라를 찾아서
찾기만 한다면 아아
당장 가겠다마는, 저리
수없는 별들 중에 뉘라
너 있는 별을 가르치랴.
빛 없는 땅에서 외로이,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남에서 북, 등에서 서로
십 이 성좌의 별을 모두
세며 부르고 세며 불러!
성아 듣거든 한 마디나
'여기다!' 하여 다오. 만일
영의 날의 있었떤 매일
꿈의 수레를 타고 오라!
성아! 모든 희망과 기쁨
내게 있는 온갖 말아
네 관에 넣고 오직 하나
가슴에 남은 것, 이 슬픔!
아아! 귀한 슬픔! 오직
이것이 나의 재산이다!
세상의 끝까지 품에다
품을 기념이 이것! 오직!
사람이 죽을까. 죽르러
생명이 났을까. 생명은
죽는다 하여도 사랑은
사는 것 아닐까 오히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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