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Ⅵ. 민족 문화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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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길잡이[편집]

문화란, 좁게는 인류가 살아오면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를 말하며, 넓게는 생활 양식 전체를 말한다. 이러한 문화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문화는 그것이 형성되었을 당시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그 속에 담고 있다. 우리는 문화를 통하여 역사를 구체적이고 생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은 고구려 사람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서원은 조선 사림의 정신 세계와 삶의 방식을 상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은 우리가 처한 자연 조건과 대내외적 여건 속에서 보편적이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이룩하여 왔다. 우리는 과거 조상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문화 유산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주요 연표
300 372 고구려, 불교 전래
고구려, 태학 설치
384 백제, 불교 전래
500 527 신라, 불교 공인
552 백제, 일본에 불교 전파
600 624 고구려, 도교 전래
647 신라, 첨성대 건립
682 신라, 국학 설치
700 751 불국사와 석굴암 중창 시작
771 성덕 대왕 신종 주조
788 독서삼품과 설치
800 888 삼대목 편찬
900 958 과거제 실시
992 국자감 설치
1100 1145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200 1234 상정고금예문 간행
1236 팔만대장경 조판(~1251)
1281 일연, 삼국유사 편찬
1300 1363 문익점, 목화씨 전래
1375 최무선, 화약 제조
1377 직지심체요절 인쇄
1400 1429 농사직설 편찬
1441 측우기 제작
1443 훈민정음 창제
1481 서거정, 동국여지승람 편찬
1485 경국대전 완성
1487 성현, 악학궤범 완성
1500 1543 백운동 서원 건립
1600 1610 허준, 동의보감 편찬
1631 정두원,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전래
1653 시헌력 채택
1700 1776 규장각 설치
1791 안정복, 동사강목 저술
1794 수원 화성 공사 시작
1800 1818 정약용, 목민심서 저술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1861 김정호, 대동여지도 완성
1900 1933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1942 조선어 학회 사건
1988 서울 올림픽 대회 개최
2000 2002 월드 컵 축구 대회 한⋅일 공동 개최

1. 고대의 문화[편집]

삼국 시대에는 중앙 집권적 귀족 사회가 형성되면서 왕족과 귀족 중심의 문화가 성행하였다.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을 통합하였고, 각 분야에서 다양한 불교 문화가 발전하였다.

통일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고, 당 및 서역의 문화를 수용하여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서 당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 문화를 이룩하였다.

과학과 기술 분야도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 기술을 향상시켜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천문학과 금속 공예도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다.

고대에 살았던 조상들의 삶의 모습과 멋은 고분과 건축, 조각, 문학 등에 많이 남아 있다.

  1.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상상해 보자.
  2. 백제의 벽돌 무늬를 신라와 고구려의 것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찾아보자.
  3. 신라의 금속 공예가 발달한 배경을 추론해 보자.
  4. 발해의 돌사자상을 통하여 발해 문화의 계통을 살펴보자.

[1] 학문과 사상, 종교[편집]

한자의 보급과 교육[편집]

우리 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나 향찰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는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 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 도덕 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은 충효 일치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학문과 유학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발해에서도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향찰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방식.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실린 향가는 모두 향찰로 쓰여졌다.

경당

고구려 평양 천도 이후 설립한 사립 교육 기관이다.

5경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를 가리킨다.

역사 편찬과 유학의 보급[편집]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지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신라의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이 많아졌다. 그 중에서 최치원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후 귀국하여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

발해도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 나왔다.

도당(渡唐) 유학생

당에 건너가 공부한 유학생. 숙위 학생이라고도 하며, 이들은 대부분 6두품 출신이었다.

빈공과

당에서 외국 유학생을 상대로 보는 과거 시험

불교의 수용[편집]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으며,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 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상을 비롯한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 문화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불교는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신앙으로 널리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상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미륵불이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읽기자료

미륵 신앙과 화랑

진지왕 때에 와서 흥륜사의 승려 진자가 법당의 미륵상 앞에서 소원을 빌며 말했다. “원컨대, 우리 부처님이 화랑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나시면 내가 항상 얼굴을 가까이 뫼시고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지극한 기원의 심정이 날로 더해 가더니, 어느 날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말했다. “웅천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으리라.” 진자가 꿈에서 깨어 놀랍고도 기뻐서 그 절을 찾아가니, 한 소년이 친절하게 맞이하며 자신도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다. …… 진자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그를 찾았다. 그러다가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갖춘 수려한 남자 아이가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진자는 그가 미륵선화라고 생각하여 가마에 태우고 들어와서 왕에게 보였다. 왕은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는 자제(子弟)들을 화목하게 했으며, 예의와 가르침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풍류가 세상에 빛났다. 〈삼국유사〉

업설(業說)

왕과 귀족의 우월한 지위는 선한 공덕을 많이 쌓은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하여, 왕의 권위와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는 일면이 있다.

불교 사상의 발달[편집]

신라의 불교 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한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7세기 후반기에 정립되었다. 삼국 불교의 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더하여 신라 불교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원효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승려가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전수해 왔다.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는 승려도 있었다. 그 중에 혜초는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문왕은 스스로를 불교적 성왕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수도였던 상경에서 발굴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은 발해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 준다.

선종과 풍수지리설[편집]

신라 말에는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 불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선종의 확산은 경전 연구와 교단 조직을 중시하는 기존의 교종 중심 체제를 뒤엎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당시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으며, 선종 승려들은 지방 호족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지방 호족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9개의 선종 사원이 9산 선문이다.

선종은 지방을 근거로 성장하여 지방 문화 역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선종 승려는 사회 변혁을 희망하던 6두품 지식인과 함께 새로운 고려 사회 건설에 사상적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 지리적 학설로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 과학 기술의 발달[편집]

천문학과 수학[편집]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 관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고분 벽화에도 별자리 그림이 남아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7세기 선덕 여왕 때에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천문 현상을 관측하여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일⋅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 이변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매우 정확한 기록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천체와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을 중시하였던 것은, 천문 현상이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높은 수준의 수학이 발달했음을 여러 가지 조형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석실이나 천장의 구조, 백제의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의 황룡사 9층탑 등에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석굴 구조나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과 다보탑 등의 건축에도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이용되었다.

혜성(彗星)

혜성에 관한 기록으로는 “고구려 민중왕 3년(46년) 겨울 11월에 혜성이 남쪽 귀퉁이에서 20일이나 보이다가 없어졌다.” 등이 있다.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편집]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목판 인쇄술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속 기술의 발달[편집]

고구려에서는 철의 생산이 중요한 국가적 산업이었으며, 철광석 생산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와 도구 등은 그 품질이 우수하며, 고분 벽화에는 철을 단련하고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기술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백제에서도 금속 기술이 발달하였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걸작품이다.

신라에서는 금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순금으로 만든 것과 금으로 도금한 것이 있는데, 제작 기법이 뛰어나며 독특한 모양이 돋보인다. 통일 신라의 성덕 대왕 신종은 아연이 함유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신비한 종 소리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고대인의 자취와 멋[편집]

고분과 고분 벽화[편집]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은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널려 있다.

고분 벽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의 생활, 문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있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점차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도움글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에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 주는 지석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3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돌무지무덤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졌다.

굴식 돌방무덤

돌로 1개 이상의 방을 만들고 그것을 통로로 연결한 무덤으로, 일반적으로 앞방과 널방으로 구분하고, 벽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돌무지덧널무덤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12지 신상(十二支神像)

12지를 상징하는, 얼굴은 동물이고 몸은 사람인 상. 12지는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다.

묘지(墓誌)

죽은 자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관과 함께 묻은 유물이다. 돌에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에 기록한 것도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백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건축과 탑[편집]

고대의 건축은 궁궐, 사원, 무덤, 가옥에 그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과 건축 터를 통하여 이 시대의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궁궐 건축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장수왕이 평양에 세운 안학궁이다. 이 궁궐 터는 사각형 한 면의 길이가 620m나 된다. 사원 건축으로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가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가옥 건축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 구조가 일부 보인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여 예배의 주대상으로 삼던 탑도 많이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주로 목탑을 건립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만 일부가 남아 있는데,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를 계승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부여에 남아 있다. 신라의 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과 분황사탑이 유명하다. 분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삼국 시대에는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돌로 쌓은 산성이 대부분이고 지형에 따라 흙으로 쌓기도 했는데, 산의 능선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통일 신라의 궁궐과 가옥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사원을 많이 축조했는데, 그 중에서 8세기 중엽에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 신라의 사원 건축을 대표한다.

불국사는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와 균형 감각으로 표현한 사원이다. 정문 돌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켰으며, 축대는 자연의 선에 인공적으로 맞추어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키고 있다. 복잡하고 단순한 좌우 누각의 비대칭은 간소하고 날씬한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어울려 세련된 균형감을 살리고 있다.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 사원인 석굴암은 네모난 전실과 둥근 주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좁은 통로로 연결하고 있는데, 주실의 천장은 둥근 돔으로 꾸몄다. 전실과 주실, 그리고 천장이 이루는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의 조형미로 석굴암은 건축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한편, 안압지는 통일 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압지의 연못, 인공섬, 구릉과 건물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꾸며졌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통일 신라에 들어와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을 완성하였다. 통일 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대표적인 것은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불국사에는 통일 신라 석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3층 석탑과 높은 예술성과 빼어난 건축술을 보여 주는 다보탑이 있다.

신라 말기에는 석탑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양양 진전사지 3층 석탑은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의 조형 미술을 대표한다. 이런 승탑과 탑비는 지방 호족의 정치적 역량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팔각원당형 승탑

전체 평면이 팔각을 이루는 승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부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이는 탑신부, 옥개석, 상륜부까지 모두 팔각으로 조성되었다.

불상 조각과 공예[편집]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나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입상, 신라의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널리 알려져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조각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들이다.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본존불 주위의 보살상을 비롯한 부조들도 매우 사실적이다. 입구 쪽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안쪽으로 들어가면 점점 정제되어, 불교의 이상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발해에서는 자기 공예도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발해의 자기는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모양,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고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조물을 많이 만들었다. 불국사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단아하면서도 균형잡힌 걸작으로 꼽힌다.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통일 신라의 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범종이다. 통일 후에는 상원사종, 성덕 대왕 신종 등 범종이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성덕 대왕 신종은 맑고 장중한 소리와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하다.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미륵보살은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글씨, 그림과 음악[편집]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한문을 널리 사용함에 따라 서예도 발전하였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은 웅건한 서체로 쓰여졌고, 신라의 김생은 질박하면서도 굳센 신라의 독자적인 서체를 열었다.

그림에서는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가 신라의 힘찬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화가로는 신라의 솔거를 꼽을 수 있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날아가던 새들이 앉으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음악과 무용은 종교 및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은 춤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 화랑들도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삼국의 음악가로는 신라의 백결 선생,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이 유명하다.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지어 가난한 아내를 위로했고,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악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 악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우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편집]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편집]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삼국 중에서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이렇게 전래된 백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세계적 자랑인 고류 사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호류 사 백제 관음상이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 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이들에 의하여 목탑이 세워졌고, 나아가 백제 가람 양식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고구려도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 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벽화 고분과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는 일본과 문화 교류는 적었지만,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전해 주어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삼국의 문화는 6세기경의 야마토 조정의 성립과 7세기경에 나라 지방에서 발전한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건너간 통일 신라 문화[편집]

삼국 문화에 뒤이어 통일 신라의 문화도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 신라 문화의 전파는 일본에서 파견해 온 사신을 통해서 이뤄졌다. 원효, 강수, 설총이 발전시킨 불교와 유교 문화는 일본 하쿠호 문화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심상에 의하여 전해진 화엄 사상은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8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긴 후부터는 외국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쿠호(白鳳) 문화

7세기 후반에 발달한 일본의 고대 문화로, 당과 통일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상, 가람 배치, 탑, 율령과 정치 제도에서 신라의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 컸다.

심화 과정[편집]

6두품 출신 도당 유학생들의 활동

① 최치원은 당의 학문을 많이 깨달아 얻은 바 많았으며, 귀국하여 이를 널리 펴 보려는 뜻을 가졌으나,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그의 뜻이 수용되지 않자, 대산군(전북 태인) 태수로 나가게 되었다. 그가 귀국했을 때에는 난세가 되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다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 풍월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삼국사기〉

② 원성왕 5년 9월, 자옥을 양근현(경기 양평)의 수령으로 삼으니, 집사 모초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독서삼품과)으로 관직에 나오지 않았으니 수령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중이 말하기를 “그가 문적 출신은 아니지만, 일찍이 당에 가서 학생이 된 일이 있으니 어찌 등용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좇았다. 〈삼국사기〉

  1. 6두품 출신의 도당 유학생이 반신라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2. ②를 읽고, 독서삼품과 출신과 도당 유학생 출신이 받은 대우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신라 말기 선종 불교의 영향

교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 불교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넘어서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 불교이다. 선종은 통일 전후에 신라에 수용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784년에 도의가 본격적으로 남종선을 배우고자 당나라에 간 이래 혜소, 혜철, 무염 등이 뒤를 이었고, 이들 선사들은 820년대 초에 처음 귀국한 도의를 뒤따라 차례로 귀국하였다. 신라 사회의 변화로 선종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으나, 도의 자신은 교종의 반발로 서울인 경주에서 교화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대신 도의보다 조금 늦게 귀국한 홍척은 흥덕왕과 같은 왕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문 9산의 대부분은 왕실이나 중앙 귀족이 아니라,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지방 세력, 곧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9산 선문의 개창조를 비롯한 선승은 호족 출신이나 중앙 귀족 출신으로서 지방에 낙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선승을 후원하여 산문을 개창하게 한 지원 세력도 지방 호족이었다. 그래서 선종 사원은 산문을 후원하는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았다. 성주산문은 보령 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서 개창되었고, 사굴산문은 강릉 지방의 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 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1. 교종 불교와 선종 불교는 어떻게 다른가?
  2. 선종이 처음 수용되었을 때에 환영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2. 중세의 문화[편집]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 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볼 수 있다.

  1. 문방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청자들을 통하여 고려 문화의 특징을 찾아보자.
  2. 은입사 기법을 조사해 보고, 그것의 발전 과정을 파악해 보자.
  3. 수월관음보살도를 자세히 살펴서 고려 불화의 치밀하고 화려한 정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자.

[1] 유학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편집]

유학의 발달[편집]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하였다. 유교는 정치와 관련한 치국의 도로서, 불교는 신앙 생활과 관련한 수신의 도로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태조 때 최언위, 최응, 최지몽 등 유학자는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을 건의하였다. 광종 때에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유학에 능숙한 사람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성종 때에는 유교 정치 사상이 확고하게 정립되고, 유학 교육 기관이 정비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승로였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의 개혁안을 올리고, 유교 사상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사회 개혁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였다. 그의 유교 사상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 귀족 사회의 발달과 함께 유교 사상도 점차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충과 김부식이었다. 문종 때 활약한 최충은 해동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고려의 유학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고, 고려의 훈고학적 유학에 철학적 경향을 새로이 불어넣기도 하였다.

인종 때 활약한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보수적이면서 현실적인 성격의 유학을 대표하였다. 이 시기의 유학은 시문을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경향이 강하였고, 유교 경전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깊어져 유교 문화는 한층 성숙해졌다. 그러나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벌 귀족 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고려의 유학은 한동안 크게 위축되었다.

훈고학(訓詁學)

한대에서 당대까지 성행하였던 유학으로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였다.

교육 기관[편집]

고려 시대에는 관리 양성과 유학 교육을 위하여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중앙에는 국립 대학으로 국자감(국학)이 설치되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같은 유학부와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학부가 있었다. 유학부에는 문무관 7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입학하고, 기술학부에는 8품 이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다. 무신 정권기에는 교육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충렬왕 때에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공자 사당인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 교육의 진흥에 나섰다.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문헌공도(文憲公徒)

문종 때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으로,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

역사서의 편찬[편집]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실록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인종 때에는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 동명왕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성장 및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대두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이제현은 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기전체(紀傳體)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역사를 본기, 세가, 지, 열전, 연표 등으로 나누어 편찬하는 형식

성리학의 전래[편집]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전래되어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종래 자구의 해석에 힘쓰던 한⋅당의 훈고학이나 사장 중심의 유학과는 달리,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신유학이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 이색은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 사상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일상 생활과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이후 고려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읽기자료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함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무는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 하고, …… 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주자)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경모하였으므로 드디어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고려사〉

○ 성균관을 다시 짓고 이색을 판개성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 이색이 다시 학칙을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經)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의를 마치면 서로 더불어 논란하여 권태를 잊게 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많이 모여 함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가운데 정주(程朱)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2] 불교 사상과 신앙[편집]

불교 정책[편집]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였다. 태조는 불교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도 함께 존중하였다. 그는 개경에 여러 사원을 세웠고,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당부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귀족도 불교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은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유교와 신앙인 불교를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인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불교를 널리 신봉하였다. 지방의 신앙 공동체였던 향도에는 불교와 함께 토속 신앙의 면모도 보이며,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융합된 모습도 보인다.

광종 때부터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합격한 자에게는 승계(僧階)를 주고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또,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둠으로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사원에는 토지를 지급하고, 승려들에게 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편집]

고려 초기에는 화엄 사상을 정비하고 보살의 실천행을 폈던 균여의 화엄종이 성행하였고, 선종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 후, 개경에 흥왕사나 현화사 같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는 큰 사원이 세워져 불교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 화엄종과 법상종이 나란히 융성하였다.

11세기에 이미 종파적 분열상을 보인 고려 불교계에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은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는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교단 통합 운동은 천태종에 많은 승려가 모이는 등 새로운 교단 분위기를 형성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던 불교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시정하는 대책이 뒤따르지 않아, 의천이 죽은 후에 교단은 다시 분열되고 귀족 중심의 불교가 지속되었다.

교관겸수(敎觀兼修)

교학과 선을 함께 수행하되, 교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선을 포용하려는 통합 이론

결사 운동과 조계종[편집]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요세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그런데 원 간섭기에 이르러 개혁 운동의 의지가 퇴색하고 귀족 세력과 연결되어 불교계는 다시 폐단을 드러내었다.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업에도 관여하여 부패가 심하였다. 이에 교단을 정비하려는 보우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대두한 신진 사대부는 이와 같은 불교계의 사회⋅경제적인 폐단을 크게 비판하였다.

읽기자료

지눌의 정혜결사문

지금의 불교계를 보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일들이 비록 부처의 법에 의지하였다고 하나, 자신을 내세우고 이익을 구하는 데 열중하며, 세속의 일에 골몰한다.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여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는 선과 교학을 나란히 수행하되, 선을 중심으로 교학을 포용하자는 이론이며, 돈오점수는 단번에 깨닫고 꾸준히 실천하자는 주장을 일컫는다. 선종은 돈오를 지향한다. 지눌은 돈오를 지향처로 삼으면서도 사람들이 오래 익혀 온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면 깨달음의 꾸준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점수를 아울러 강조하였다.

보우(普愚)

보우는 교단을 통합, 정리하는 것이 불교계의 폐단을 바로잡는 우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교단과 정치적 상황이 얽혀 이런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대장경 간행[편집]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 체계가 정비되면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모두 모아 체계화하는 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경⋅율⋅논의 삼장으로 구성된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의가 높은 유산이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의천은 고려는 물론이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10여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경(經)⋅율(律)⋅논(論)

경은 부처가 설한 근본 교리이고, 율은 교단에서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생활 규범이며, 논은 경과 율에 대한 승려나 학자의 의론과 해석을 일컫는다.

도교와 풍수지리설[편집]

고려 시대에는 유교, 불교와 함께 도교도 성행하였다. 불로장생과 현세의 구복을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도교는 여러 가지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리하여 도교 행사가 자주 베풀어졌고, 궁중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성행하였다. 예종 때 도교 사원이 처음 건립되었고, 이 곳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가 개최되었다.

도교에는 불교적인 요소와 도참 사상도 수용되어 일관된 체계를 보이지 못하였으며, 교단도 성립하지 못한 채 민간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적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팔관회는 도교와 민간 신앙 및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였다.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참 사상이 더해져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문종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새로이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이 곳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

도선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서, 전 국토의 자연 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인문 지리적 지식에다 경주 중앙 귀족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의 대두, 오랜 전란에 지쳐서 통일의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의 인식을 종합하여 체계적인 풍수 도참설을 만들었다.

[3] 과학 기술의 발달[편집]

천문학과 의학[편집]

고려 시대에는 고대 사회의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고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 기술도 수용하여 이 분야에서 많은 중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에서는 율학, 서학, 산학 등의 잡학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과거 제도에서도 기술관을 등용하기 위한 잡과가 실시되어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천문학, 의학, 인쇄술, 상감 기술, 화약 무기 제조술 등이었다.

천문학은 천문 관측과 역법 계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천문과 역법을 맡은 관청으로서 사천대(서운관)가 설치되었고, 이 곳의 관리는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식, 혜성, 태양 흑점 등에 관한 관측 기록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과학 기술 분야에서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의 기록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법 연구에서도 착실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던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의 충선왕 때에는 원의 수시력을 채용하고 그 이론과 계산법을 충분히 소화하였다.

의학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의료 업무를 맡은 태의감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의원을 뽑는 의과를 시행하여 고려 의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의 의학은 당⋅송 의학의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으로 발달함으로써 향약방이라는 고려의 독자적 처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많은 의서가 편찬되었다.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 종이 소개되어 있다.

관측 기록

고려사 천문지에 실린 일식 기록은 130여 회나 되고, 혜성 관측 기록도 87회에 이른다.

수시력(授時曆)

1년을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00년 후인 16세기 말 서양에서 개정한 그레고리우스력과 같다.

인쇄술의 발달[편집]

고려 시대의 기술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신라 때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은 한 가지의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에는 활판 인쇄술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기에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는 이미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몽골과 전쟁 중이던 강화도 피난시에는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 인쇄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1377)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전국적으로 닥나무의 재배를 장려하고, 종이 제조의 전담 관서를 설치하여 우수한 종이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고려의 제지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으며, 질기고 희면서 앞뒤가 반질반질하여 글을 쓰거나 인쇄하기에 적당한 종이가 생산되었다. 당시 고려에서 만든 종이는 중국에 수출되어 호평을 받았다.

상정고금예문

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의례서인데,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보관하던 것을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

화약 무기 제조와 조선 기술[편집]

과학 기술의 발달은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고려 말에 최무선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에는 화약 무기의 사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화약 제조 기술의 습득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 제조 기술을 비밀에 붙여서 고려에서는 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무선은 끈질기게 노력하여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였다. 이에,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화포와 같은 화약 무기의 제조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얼마 후에는 20종에 가까운 화약 무기가 만들어졌다. 최무선은 이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배를 만드는 기술도 발달하였다. 송과 해상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길이가 96척이나 되는 대형 범선이 제조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미를 개경으로 운송하는 조운 체계가 확립되면서 1000석의 곡물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조운선도 등장하였는데, 이는 주로 해안 지방의 조창에 배치되었다.

고려 말에는 배에 화포를 설치하여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다. 이 경우, 배의 구조를 화포의 사용에 알맞도록 흔들림이 적게 개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약 제조법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에게서 화약의 중요한 원료인 염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 화약 제조법을 완전히 알아냈다고 한다. 염초는 질산칼륨이다.

[4] 귀족 문화의 발달[편집]

건축과 조각[편집]

고려 시대의 건축은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개성 만월대 터를 보면 당시 궁궐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에 건물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주로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알려져 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균형잡힌 외관과 잘 짜여진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승려의 승탑은 고려 시대에도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달사지 승탑처럼 신라 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고,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등도 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또,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같이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걸작도 있다.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

다포식(多包式) 건물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져 있는 건물. 웅장한 지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에 쓰였다.

청자와 공예[편집]

고려 귀족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즐겼다. 공예는 귀족의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청자의 그윽한 색과 다양한 형태, 그리고 고상한 무늬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은입사로 무늬를 새긴 청동 향로와 버드나무와 동물 무늬를 새긴 청동 정병이 대표작이다.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다.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읽기자료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청자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 부른다. 근년에 와 만드는 솜씨가 교묘하고 빛깔도 더욱 예뻐졌다. 술그릇의 모양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어서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옥으로 만든 술잔 등도 만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따라 한 것들이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다만,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 소개해 둔다.

사자 모양을 한 도제 향로 역시 비색이다. …… 여러 그릇 중에서 이 물건이 가장 정밀하고 뛰어나다. 〈고려도경〉

청자 만드는 과정

청자는 물에는 묽어지고 불에는 굳어지는 자토로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후 청색을 내는 유약을 발라 1250도에서 1300도 사이의 온도로 구워서 만든다. 유약은 규석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으로, 이들이 높은 온도에서 녹아 유리질화되는데, 유약에 함유된 철분이 1~3%가 되면 녹청색을 띠어 청자가 된다.

상감법(象嵌法)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된 것으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

글씨, 그림과 음악[편집]

고려 문화의 귀족적 특징은 서예, 회화, 음악에서도 나타났다. 서예는 고려 전기에는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왕희지체의 대가인 탄연의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그림은 도화원에 소속된 전문 화원의 그림과 문인이나 승려의 문인화로 나뉘었다. 뛰어난 화가로는 예성강도를 그린 이령과 그의 아들 이광필이 있었으나, 그들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 후기에는 사군자 중심의 문인화가 유행하였으나, 역시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가 있어 당시의 그림에 원대 북화가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 주고 있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왕실과 권문세족의 구복적 요구에 따라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 내용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도와 지장보살도 및 관음보살도가 많았다. 일본에 전해 오고 있는 혜허가 그린 관음보살도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불교 경전을 필사하거나 인쇄할 때, 맨 앞장에 그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 사경화도 유행하였다. 이 밖에, 사찰과 고분의 벽화가 일부 남아 있는데,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의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대표적이다.

고려 시대의 음악은 크게 아악과 향악으로 구분된다. 아악은 송에서 수입된 대성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격조 높은 전통 음악을 이루고 있다.

속악이라고도 하는 향악은 우리의 고유 음악이 당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인데, 당시 유행한 민중의 속요와 어울려 수많은 곡을 낳았다. 동동, 한림별곡, 대동강 등의 곡이 유명하였다. 악기는 전래의 우리 악기에 송의 악기가 수입되어 약 40 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구양순체와 송설체

구양순체는 당나라 때 구양순의 굳세고 힘찬 글씨체이며, 송설체는 원나라 때 조맹부의 유려한 글씨체이다.

구복(求福)

복을 구하는 것

아악(雅樂)

고려 때 송나라에서 수입된 궁중 음악으로, 주로 제사에 쓰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문묘 제례악이 여기에 해당한다.

심화 과정[편집]

인쇄술의 발달과 영향

① 서양의 알파벳은 활자 인쇄술의 급속한 보급에 적합하였으나, 고려 시대에 우리 민족이 사용한 한자는 활자 인쇄술 발달의 혜택을 크게 볼 수 없었다. 알파벳은 20여 글자에 부호까지 동원해도 100자를 넘지 않고, 이를 여러 크기의 활자로 만들어도 수백 자면 넉넉하였다. 그러나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한번 활자를 주조하면 수만 자 또는 수십만 자씩 만들어야 했다.

② 우리 나라에서는 활판을 확실하게 고정시키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서양에서는 활판을 죄어 주는 장치가 사용되어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서양은 르네상스 시대에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인쇄술 때문에 지식층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지는 못하였다.

  1. 금속 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고려 시대의 지식 대중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
  2. 고려 시대에 인쇄술의 정보화와 대중화를 제약한 요인은 무엇인가?
불교가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

①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의 호위하는 힘을 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라.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에 따르게 되면, 각 종단의 절들이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할 것이니 반드시 이를 금하라. 〈고려사〉

② 승 혜거로 국사를 삼고, 탄문으로 왕사를 삼았다.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마음 속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죄악을 소멸하고자 널리 재회를 베푸니, 무뢰배들이 승려라 사칭하여 배부르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며, 혹은 떡, 쌀, 연료를 서울과 지방의 도로에서 나누어 주는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

  1. 불교 신앙이 일반인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2. 고려에서 사원이 가지는 역할은 무엇인가?

3. 근세의 문화[편집]

조선 전기에는 괄목할 만한 민족 문화의 창달이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역사서를 비롯한 각 분야의 서적이 출판되는 등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정착, 발달하여 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갈래의 학파가 나타났다. 불교는 국가에 의하여 정비되면서 위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생활에 응용되었고,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특색이 돋보이는 발전을 나타내었고, 사대부 양반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반영된 그림과 글씨 및 자기 공예가 두드러졌다.

  1. 한글 창제가 가능했던 당시 시대적 상황을 유추해 보자.
  2. 학파의 분화와 서원의 등장은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자.
  3. 분청사기의 종류와 변천을 조사하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 문화의 특징을 파악해 보자.

[1] 민족 문화의 융성[편집]

발달 배경[편집]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넓히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와 학자는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나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 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한글 창제[편집]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이두나 향찰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유 문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맞으면서도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좋은 우리의 문자가 필요하였다. 더욱이, 조선 한자음의 혼란을 줄이고 피지배층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양반 중심 사회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 문자의 창제가 요청되었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서리들이 한글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도구 중의 하나는 자기 민족의 고유 문자이다. 우리 민족은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가지게 됨으로써 일반 백성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 문화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 기관[편집]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또,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한편,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의 연령은 대개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역사서의 편찬[편집]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서의 편찬에 힘썼다.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시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기록 문화 유산이다.

태조 때, 정도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여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였다. 이후에도 고려 시대의 역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역사서로 박상의 동국사략 등이 편찬되었다.

실록 편찬

한 국왕이 죽으면 다음 국왕 때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관이 국왕 앞에서 기록한 사초, 각 관청의 문서를 모아 만든 시정기 등을 종합, 정리하여 실록을 편년체로 편찬하였다.

편년체(編年體)

연대순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

지리서의 편찬[편집]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에 힘썼다.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세계 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세조 때에는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윤리, 의례서와 법전의 편찬[편집]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세종 때에는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하여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16세기에는 사림이 소학과 주자가례의 보급과 실천에 힘쓰면서 이륜행실도와 동몽수지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륜행실도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책이며, 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윤리서였다.

한편,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썼다. 건국 초기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하였고, 조준은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세조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 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국조오례의

제사 의식인 길례, 관례와 혼례 등의 가례, 사신 접대 의례인 빈례, 군사 의식에 해당하는 군례, 상례 의식인 흉례의 오례를 정리한 책이다.

[2] 성리학의 발달[편집]

성리학의 정착[편집]

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주례(周禮)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성리학의 융성[편집]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기(氣)와 이(理)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기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우주 만물이 만들어진다

이는 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자 운동 법칙이다.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파의 형성과 예학의 발달[편집]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광해군 때, 북인은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 명분론

도덕성에 기반하여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의 이론

척화론(斥和論)

청과 화의를 맺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

예치(禮治)

개인, 사회, 국가를 예로 다스리는 것으로, 예를 가르치는 예교와 예를 배우는 예학을 통해서 실현된다.

[3] 불교와 민간 신앙[편집]

불교의 정비[편집]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불교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원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여 집권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두터이 하고자 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출가를 제한하였다. 세종 때에는 교단을 정리하면서 선종과 교종 두 종파에 모두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사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강하였으나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욕구는 완전히 억제하지 못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어 불교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보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불교가 중흥되기도 하였다.

성종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불교는 점차 왕실에서 멀어져 산간 불교로 바뀌었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의 지원 아래 일시적인 불교 회복 정책이 펼쳐진 결과, 보우(普雨)가 중용되고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휴정(서산대사)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원의 경제적 기반 축소와 우수한 인재의 출가 기피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교와 민간 신앙[편집]

도교 역시 크게 위축되어 사원이 정리되고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소격서를 설치하고,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시행되었다.

한편, 풍수지리설과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에도 작용하였다. 무격 신앙, 산신 신앙, 삼신 숭배, 촌락제 등은 백성 사이에 깊이 자리잡았다.

특히,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은 유교 이념과 융합되면서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 되었다.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다.

[4] 과학 기술의 발달[편집]

천문, 역법과 의학[편집]

조선 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 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당시의 집권층은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학 기술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와 아울러 우리 나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역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천체 관측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었다. 자격루는 노비 출신의 과학 기술자인 장영실이 제작한 것으로, 정밀 기계 장치와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뛰어난 물시계였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천문도를 만들었다. 태조 때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세종 때에도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역법이 마련되었다. 세종 때에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이는 15세기 세계 과학의 첨단 수준에 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이로써 15세기에는 조선 의약학의 자주적 체계가 마련되어 민족 의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칠정산(七政算)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7개의 운동하는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법서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편집]

조선 초기에는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고려 시대에 발명되어 사용된 금속 활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더욱 개량되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이어서 세종 때에는 역시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세종 때에는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종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다.

활자 인쇄술과 더불어 제지술이 발달하여 종이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세종 때에는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청으로서 조지서를 설치하고 다양한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서적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병서 편찬과 무기 제조[편집]

조선 초기에는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병서를 편찬하였고, 이와 함께 각종 무기의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다.

세종 때에는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고, 문종 때에는 김종서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병장도설도 편찬되어 군사 훈련의 지침서로 사용하였다.

화약 무기의 제조에는 최해산이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최무선의 아들로서, 태종 때에 관리로 특채되어 화약 무기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 만든 화포는 사정 거리가 최대 1000보에 이르렀으며, 바퀴가 달린 화차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다. 병선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라는 전투선을 제조하여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5] 건축과 예술[편집]

왕실과 양반의 건축[편집]

조선 초기에는 사원 위주의 고려 건축과는 달리, 궁궐, 관아, 성문, 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건물은 건물주의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장식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는데, 그 목적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건국 초기에 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곧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웠다. 지금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창경궁 명정전과 숭례문, 창덕궁 돈화문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고려의 건축 기법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된 조선 전기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반면에, 개성의 남대문과 평양의 보통문은 고려 시대 건축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을 지니면서 조선 시대 건축으로 발전해 나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왕실의 비호를 받은 불교와 관련된 건축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은 검박하고 단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세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 석탑의 대표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진출과 함께 서원의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은 산과 하천이 가까이 있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할 수 있는,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교육 공간인 강당을 중심으로 사당과 기숙 시설인 동재와 서재를 갖추었다. 서원 건축은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주위의 자연과 빼어난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이 있다.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편집]

조선 전기 궁중이나 관청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 대신에 백자나 분청사기를 널리 사용하였다. 분청사기와 옹기그릇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만들어져 관수용이나 민간용으로 보급되었다.

고려 말에 나타난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안정된 그릇 모양과 소박하고 천진스러운 무늬가 어우러져 정형화되지 않으면서 구김살 없는 우리의 멋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그 생산이 줄어들었다.

조선의 백자는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 선비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장롱, 문갑 같은 목공예 분야와 돗자리 공예 분야에서도 재료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기품 있는 작품이 생산되었다. 이 밖에, 쇠뿔을 쪼개어 무늬를 새긴 화각 공예, 그리고 자개 공예도 유명하다. 수와 매듭에서도 부녀자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취를 살린 뛰어난 작품이 있다.

그림과 글씨[편집]

15세기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의 그림과 관료이자 문인인 선비의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역대 화풍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발하였다. 조선의 이런 그림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안견, 강희안을 꼽을 수 있다.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문인 화가인 강희안은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표현하였다.

16세기에는 15세기의 전통을 토대로 다양한 화풍이 발달하였다. 강한 필치의 산수화를 이어 가기도 하고, 선비의 정신 세계를 사군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노비 출신으로 화원에 발탁된 이상좌는 색다른 분위기의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인 송하보월도는 바위틈에 뿌리박고 모진 비바람을 이겨 내고 있는 늙은 소나무를 통하여 강인한 정신과 굳센 기개를 표현하였다.

서예는 양반이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필수 교양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서예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안평 대군과 양사언, 한호가 명필로 널리 알려졌다.

음악과 무용[편집]

조선 시대에는 음악을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국가의 각종 의례와 밀접히 관련되었기 때문에 중요시하였다.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개량하거나 만들게 하였고, 스스로 여민락 등 악곡을 짓고 소리의 장단과 높낮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하였다. 아울러 악곡과 악보를 정리하게 하고 아악을 체계화함으로써 아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성종 때에 성현은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및 소도구까지 망라하여 정리함으로써 전통 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민간에서도 당악과 향악을 속악으로 발달시켜 가사, 시조, 가곡 등 우리말로 된 노래를 연주하는 음악이나 민요에 활용하였다.

궁중과 관청의 의례에서는 음악과 함께 춤이 따랐다. 이들 춤은 행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는데, 처용무처럼 전통춤을 우아하게 변용시킨 것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 전통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산대놀이라는 탈춤과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도 유행하였다.

읽기자료

음악의 기능

악(樂)은 하늘이 내어 사람에게 보낸 것이니, 허(虛)에서 나와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맥박을 뛰게 하여 정신을 막힘없이 흐르게 한다. …… 다른 소리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 것은 임금이 위에서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바르게 이끄는 것과 거짓되게 이끄는 것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나며, 풍속이 번영하고 쇠퇴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악이야말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는 큰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악학궤범〉

심화 과정[편집]

사림 문화의 영향

① 15세기 말부터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대두한 사림은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정몽주와 길재 계통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의리와 도덕을 숭상하고, 성리학의 이기론과 심성론의 탐구에 힘썼으며, 또 예학을 발전시켰다.

②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대강 서게 되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은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정암집〉

③ 16세기의 사림은 왕도주의를 내세우면서 단군보다 기자를 더욱 중시하고 기자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는 기자가 왕도의 창시자로서 도덕 정치를 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사림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치우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 16세기 문화 내용을 15세기와 비교하여 정리해 보자.
  2. 사림 세력의 대두로 인하여 문화면에서 더 발달한 분야와 쇠퇴한 분야를 찾아보자.
  3.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이유를 사림 세력의 성향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양반 지배층의 시대 상황 인식이 문화에 끼친 영향

① 주화(主和) 두 글자가 신의 일평생에 허물이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오늘날 화친하려는 일이 그르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사고, 끝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지천집〉

②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은 우리 나라에는 부모의 나라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1. 위의 주장이 제기된 사상적 배경의 차이를 조사해 보자.
  2. 위의 자료에 나타나는 인식이 반영, 계승된 정책이나 문화 내용을 조사해 보자.

4. 근대 태동기의 문화[편집]

양 난 이후 사회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이 문화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질적 변화와 함께 문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학문에서는 양명학을 받아들였으며, 사회 변화를 반영한 실학이 나타나 개혁 추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천문학과 의학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성과가 농업과 상업 등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도 이런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예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넘쳐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백자 등 공예도 생활 공예가 중심이 되었다. 우리의 산수와 삶을 소재로 하는 문예 풍토가 진작되어 문학과 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조선 후기 건축의 변화를 조사해 보고, 그 특징을 파악해 보자.
  2. 실학이 등장할 수 있었던 조건과 그 내용을 연결하여 평가해 보자.
  3. 조선 후기의 배다리와 화성 축조를 통하여 당시의 건축술을 가늠해 보자.

[1] 성리학의 변화[편집]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편집]

인조반정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명분론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절대화하였다.

반면에,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도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철학 논쟁을 벌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 사이에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 논쟁을 벌였다.

한편,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

호락 논쟁(湖洛論爭)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충청도 노론(호론)과 같다고 보는 서울, 경기 노론(낙론)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양명학의 수용[편집]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어가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며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초에 정제두는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학파로 발전시켰다. 그는 일반민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 인정하였으며, 양반 신분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집안의 후손과 인척을 중심으로 하여 계승되었다.

강화 학파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갔으며, 실학자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2] 실학의 발달[편집]

실학의 등장[편집]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중에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 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고,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농업 중심의 개혁론[편집]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읽기자료

정약용의 여전론

이제 농사짓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실시해야 한다. 산골짜기와 시냇물의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閭)로 한다. …… 1여마다 여장(閭長)을 두며, 무릇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한다. …… 여민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에 분배한다. 이 때, 국가에 바칠 세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노동 일수에 따라 여민(閭民)에게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균전론(均田論)

유형원은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였다.

한전론(限田論)

이익은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여섯 가지 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사치와 미신, 승려, 게으름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편집]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 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읽기자료

박제가의 소비관

비유하건대,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다. 퍼내면 차고, 버려 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女紅 : 길쌈질)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工匠 : 수공업자)이 도야(陶冶 : 기술을 익힘)하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북학의〉

북학파

북학파 실학 사상의 대두는 병자호란 이후 굳어졌던 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수원의 농업론

농업에서는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 농업의 상업적 경영과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자고 하였다.

국학 연구의 확대[편집]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한편,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역사 지리서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언어에 대한 연구도 진전되어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 등이 나왔고,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18, 19세기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나왔다.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읽기자료

안정복의 삼국 인식

삼국사에서 신라를 으뜸으로 한 것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고, 뒤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편찬한 것이 모두 신라의 남은 문적(文籍)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편찬한 내용이 신라에 대하여는 약간 자세히 갖추어져 있고, 백제에 대하여는 겨우 세대만을 기록했을 뿐 없는 것이 많다. ……

고구려의 강대하고 현저함은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며, 신라가 자처한 땅의 일부는 남쪽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김씨(김부식)는 신라사에 쓰여진 고구려 땅을 근거로 했을 뿐 이다. 〈동사강목〉

동사강목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다.

택리지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 등을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가를 논한 책

100리척

100리를 1척으로 정한 지도 제작 방식

[3] 과학 기술의 발달[편집]

서양 문물의 수용[편집]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서양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을 통해서 들어왔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 지도를 전하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전하였다.

당시 명⋅청의 수도인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이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들자이었다. 이익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우리 나라에 표류해 왔다.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법과 조종법을 가르쳐 주었고,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

벨테브레이(Weltevree)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하였다. 조선 여성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고 하며, 박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편집]

조선 후기에는 국민의 생활 개선을 중요시하여 과학과 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진 학자가 많았다.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읽기자료

홍대용의 지전설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몇천만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천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고 있는 우주 공간의 세계 밖에도 또다른 별들이 있다. …… 칠정(七政: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맷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五星: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하다. 〈담헌집〉

시헌력(時憲曆)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

의학, 농학의 발달과 기술 개발[편집]

조선 후기에 의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17세기 초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뛰어난 의학서로 인정되었다.

허준과 같은 시기에 허임은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여 침구술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많은 농서가 편찬되고, 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만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 농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박세당은 색경을,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서호수는 해동농서를 저술하여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세기에 서유구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하여 임원경제지라는 농촌 생활 백과 사전을 편찬하였다.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기술의 개발에 앞장섰던 사람은 정약용이었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기술 때문이라고 보고, 기술의 발달이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다. 그는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에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4] 문화의 새 경향[편집]

서민 문화의 발달[편집]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배경으로 문화면에서 새 기운이 나타났다.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대두하였다.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던 문예 활동에 중인층과 서민층이 참여하여 큰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의 중인층 및 상공업 계층과 부농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졌고, 상민이나 광대의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교양이나 심성 수련이 목표였던 조선 전기의 문예가 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면, 조선 후기의 문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경향은 자연히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을 띠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의 보급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한글 소설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현실적인 세계가 배경이 되었다. 춤과 노래 및 사설로 서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표현한 판소리와 탈춤은 서민 문화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음악과 무용에서는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판소리와 탈놀이[편집]

조선 후기 문화의 새 기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인기 있는 분야는 판소리와 탈춤이었다. 판소리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창과 사설로 엮어 가기 때문에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고 솔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 광대가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빼거나 더할 수 있었고, 관중이 추임새로써 함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민을 포함한 넓은 계층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판소리는 이 시기 서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탈놀이와 산대놀이도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탈놀이는 향촌에서 마을굿의 일부로서 공연되어 인기를 얻었고, 산대놀이는 산대라는 무대에서 공연되던 가면극이 민중 오락으로 정착되어 도시의 상인이나 중간층의 지원으로 성행하였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하층 서민인 말뚝이와 취발이를 등장시켜 양반의 허구를 폭로하고 욕보이기까지 하였다.

가면극과 판소리는 상품 유통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성장하여 당시 사회적 모순을 예리하게 드러내면서 서민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는 데 기여하였다.

판소리

광대가 한 편의 이야기를 노래에 해당하는 창과 이야기에 해당하는 아니리와 몸놀림인 발림으로 연출한다.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편집]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을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가 대표적이었는데, 이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에까지 확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글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서얼에 대한 차별의 철폐, 탐관오리의 응징을 통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대표적인 한글 소설로 꼽히는 춘향전은 신분 차별의 비합리성을 나타내었다. 이 밖에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못된 용왕을 골려 주는 토끼,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왕비가 된 심청, 불합리한 가족 관계에서 희생된 장화⋅홍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서민은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한편, 시조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비들의 절의와 자연관을 담고 있던 이전의 시조와는 달리,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 형식을 통하여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양반층이 중심이 된 한문학도 실학의 유행과 함께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고, 박지원은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로 혁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김삿갓, 정수동 같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시사(詩社)

중인층의 시인들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시사를 조직하여 문학 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역대 시인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편집]

조선 후기 그림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새 경향은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이었고, 서예에서는 우리의 정서를 담은 글씨의 등장이었다. 진경 산수화는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토착화를 이룩하였으며,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17세기부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고, 이런 의식은 우리의 고유 정서와 자연을 표현하려는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진경 산수화는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김홍도였다. 그는 산수화,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그림에서 18세기 후반의 생활상과 활기찬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김홍도에 버금 가는 풍속화가로는 신윤복이 있었다. 그는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밖에도 강세황 등의 화가가 개성 있는 그림으로 18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장승업은 강렬한 필법과 채색법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는 김정희 등의 문인화의 부활로 침체되었다가 한말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민중의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낸 민화도 유행하였다. 해, 달, 나무, 꽃, 동물, 물고기 등을 소재로 삼아 소원을 기원하고 생활 공간을 장식하였다. 이런 민화에는 소박한 우리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서예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가 이광사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건축의 변화[편집]

조선 후기에 불교가 신앙의 자리를 어느 정도 차지하고 정치⋅경제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건축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양반과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부농, 상공업 계층의 지원 아래 많은 사원이 세워졌고,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대규모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17세기의 건축으로는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보은 법주사 팔상전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규모가 큰 다층 건물로,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반 지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부상한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근거지에 장식성이 강한 사원이 많이 세워졌다. 논산 쌍계사, 부안 개암사, 안성 석남사 같은 사원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축물은 수원 화성이다. 정조 때의 문화적인 역량을 집약시켜 새롭게 만든 화성은 이전의 성곽과는 달리,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을 겸한 성곽 시설로,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며 평상시의 생활과 경제적 터전까지 조화시킨 종합적인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었다.

19세기의 건축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재건한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화려하고 장중한 건물로 유명하다.

백자와 생활 공예, 음악[편집]

조선 후기에는 산업 부흥에 따라 공예가 크게 발전하였다. 자기 공예에서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는데, 제기와 문방구 등 생활 용품이 많았다. 형태와 문양이 어울려 우리의 독특하고 준수한 세련미를 풍겼다. 이와 함께 서민들은 옹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목공예도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다. 장롱, 책상, 문갑, 소반, 의자, 필통 등 나무의 재질을 살리면서 기능을 갖춘 작품이 만들어졌다. 화각 공예도 독특한 우리의 멋을 풍기는 작품이 많았다.

음악에 있어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음악의 향유층이 확대됨에 따라, 성격이 다른 음악이 다양하게 나타나 발전하였다. 양반층은 종래의 가곡, 시조를 애창하였고, 서민은 민요를 즐겨 불렀다. 이와 함께 상업의 성황으로 직업적인 광대나 기생이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을 창작하여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였다.

가곡(歌曲)

관현악의 반주가 따르는 전통 성악곡. 선율로 연결되는 27곡의 노래 모음으로, 노래말은 짧은 시를 쓴다.

산조(散調)

느린 장단으로부터 빠른 장단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의 민속 음악으로, 장구 반주가 따르며, 무속 음악과 시나위에 기교가 확대되어 19세기경에 탄생하였다.

잡가(雜歌)

조선 후기에 평민이 지어 부르던 노래의 총칭

심화 과정[편집]

17, 18세기 조선과 중국의 공통적 문화 특징

① 향단이는 미음상 이고 등롱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간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정이도 간 곳 없네. 이 때 춘향이는 비몽사몽간에 서방님이 오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이요, 몸에는 홍삼이라. 상사일념에 목을 안고 만단정회하는 차라, “춘향아.” 부른들 대답이 있을쏘냐. 어사또 하는 말이, “크게 한번 불러 보소.” “모르는 말씀이오. 예서 동헌이 마주치는데,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 염문할 것이니 잠깐 지체하옵소서.” 〈춘향가〉

② 중국 명대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발달하였고, 청대에는 실증적이며 객관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학문은 조선 후기에 우리 나라에 전해져 강화 학파의 형성, 실학의 발달 등에 영향을 끼쳤다.

③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는 예수회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의 크리스트 교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와 서양 문물을 전하였다. 중국의 베이징에 다녀온 조선의 사신은 이들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여 서양의 과학 기구와 각종 서적을 조선에 들여왔다.

  1. 17, 18세기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문화 내용을 정리해 보자.
  2. 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적 변화의 의미를 발표해 보자.
조선 후기의 서민 문화

양반 : 나는 사대부의 자손인데.

선비 : 아니, 나는 팔대부의 자손인데.

양반 :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 아니, 양반이란 게 팔대부도 몰라?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뭐.

……

양반 : 첫째, 지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선비 :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도 읽었네.

양반 : 도대체 팔서육경이 뭐냐?

초랭이 : 나도 아는 육경, 그걸 몰라? 팔만대장경, 중의 바라경, 봉사 안경, 처녀 월경, 약국 길경(도라지), 머슴 새경(품삯). 〈하회 탈춤 대사〉

  1. 위의 자료와 같은 문화적 특징을 가진 또다른 예를 찾아보자.
  2. 위의 자료에서 나타나는 시대적 배경을 정리해 보자.

5. 근⋅현대의 문화[편집]

개항 이후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전기, 철도 같은 근대 기술과 서양 의술 등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다. 근대 시설은 일상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지만, 열강의 침략 목적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국권을 탈취한 후 동화와 차별의 이중 정책을 바탕으로 황국 신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특히,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 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분단 이후 냉전 체제가 지속되면서 문화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한편, 현대 사회의 윤리와 생명 과학 기술의 발달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펼쳐지고 있다.

  1. 근대 문명의 수용이 전통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자.
  2. 일제 강점기의 교육 실태를 조사하여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을 파악해 보자.
  3. 현대 대중 문화의 특징을 알아보고, 미래에 전개될 문화 양상에 대하여 토론해 보자.

[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편집]

서양 과학 기술의 수용[편집]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하여 알게 된 서양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던 흥선 대원군도 서양의 무기 제조술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개항 이후 개화파 인사들은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부도 동도서기론을 내세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근대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고자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일본과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외국 기술자도 초빙하였다. 이러한 개화 정책에 따라 박문국에서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기기창에서는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전환국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개항 이후 통신, 교통, 전기, 의료, 건축 분야에서 근대 시설이 도입되었다. 전신이 설치되면서 국제 전신망이 연결되었으며, 궁궐과 상류 사회에는 전화도 보급되었다. 문명의 불인 전등이 경복궁의 밤을 밝혔으며,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차가 다니게 되었고, 서울 시내 일부에 전기가 들어왔다. 철도는 경인선이 개통된 후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 경의선이 부설되었다. 서양 의학이 보급되면서 근대 의료 시설인 광혜원을 비롯하여 많은 병원이 들어섰고, 서양식 건축물인 명동 성당과 덕수궁 석조전 등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서양 문물의 도입은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술과 관리를 외국인에게 의존했으므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개화파가 부국강병을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인 사회 진화론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실력 양성론의 근거가 되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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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진화론

대한제국 말기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 서양의 학문과 사상 중에서도 사회 진화론은 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확대되었다.

본래 사회 진화론은 다윈이 주장한 생물학적 진화론을 인간 사회와 국제 관계에 적용한 사회 이론으로, 영국의 스펜서 등이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국제 사회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우리 나라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로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였으나,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구실을 제공하는 등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1880년대에 우리 나라가 내세웠던 서구 문명 수용 논리. 우리의 정신 세계는 유지하고 서양의 과학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주장으로,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비슷하다.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

개항 이후에 신식 문물과 각종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

근대 교육과 학문의 보급[편집]

개항 이후, 개화파와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인재를 양성하고자 근대 교육을 보급하려 하였다.

1883년에는 원산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어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으며, 정부도 같은 해에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이어, 1886년에는 육영 공원을 세워 상류층 자제에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교육 입국 조서의 정신에 따라 근대 교육 제도가 확립되면서 소학교와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등 각종 관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근대적 교육 제도에 따라 국민 소학 독본, 초등 본국 역사 등 새로운 교과서도 선보였다.

한편,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 학교를 세워 근대 학문을 교육하였으며, 20세기 초 애국 계몽 운동가들도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를 세워 근대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구국 운동이 벌어졌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이 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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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교육을 도입한 원산 학사

원산 학사에서는 산수, 과학, 기계, 농업, 양잠, 채광, 일어, 법률, 세계 역사, 지리를 필수 과목으로 교육하였다. 또,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를 전공 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쳤다. 이는 원산 학사가 전통 학문을 바탕으로 신식 학문을 접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원산 학사는 갑오개혁 때 원산 소학교가 되어 공립 학교로 전환하였다.

학교 설립

1899년에는 중등 교육 기관인 한성 중학교가 세워지고, 의학교,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국학 연구[편집]

조선 후기 실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국학 연구는 대한제국 말기인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 의식을 높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 문화를 지키려 하였다.

국어 분야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공문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제도화되고, 학교 교육에서 국⋅한문체 교과서가 사용되면서 언문 일치의 문자 생활이 가능해졌다.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국⋅한문 혼용체 보급에 기여하였다. 1907년에는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와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의 활약에 힘입어 근대 계몽 사학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고자 역사 연구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나라를 구한 위인의 전기를 써서 보급하고, 외국의 건국과 흥망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사 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최남선, 박은식 등은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실학자의 저서를 비롯한 고전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년 간행. 유길준이 서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듣고 본 역사, 지리, 산업, 정치, 풍속 등을 기록한 책으로, 24편으로 이루어졌다.

언론 기관의 발달[편집]

개항 이후 근대 인쇄술로 간행된 각종 신문과 출판물은 개화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다. 한성 순보는 국내 소식과 함께 서양의 신문화를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폐간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 국⋅한문 일간지인 천도교의 만세보 등도 국권 회복 운동을 지원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일제는 반일 보도를 차단하기 위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도하였고, 1907년에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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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와 베델

베델은 1904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항일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일제가 탄압하는데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통감부는 1908년 5월에 영국 상하이 고등 법원에 베델을 제소하여 3주간의 금고 생활을 하게 하였다. 베델은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다가 1909년 5월 1일에 심장병으로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편집]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문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의 요구가 절실했던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해 새로운 근대 사상을 소개하거나 사회적 자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8년을 전후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신체시와 신소설이 등장하여 근대 의식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였다.

성경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이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번역 문학은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초래하는 폐단도 있었지만, 근대 문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예술계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음악 부문에서는 서양 음악이 소개되었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가 유행하였다.

미술 부문에서는 화가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하였고, 서양식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 회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서민층에서는 민화가 유행하였다.

연극 부문에서는 신극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 그러나 서민 사이에서는 판소리와 민속 가면극이 성행하였다. 특히, 판소리에서는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분창 형식이 유행하였고,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이다. 천주교는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개신교는 1880년대에 서양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교세를 넓혀 갔다.

동학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 때 친일 세력을 내쫓고 천도교로 개편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대종교가 창시되어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유교에서는 박은식이 유교 구신론을 제창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불교에서는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을 내세우며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2]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의 전개[편집]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편집]

일제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에 따른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숨은 뜻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식민지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하면서, 낮은 수준의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를 바꾸었다.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규정하고, 경성 제국 대학도 설립하였다. 표면상 일본인 교육과 대등하게 보이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교육 차별은 여전하였다.

1930년대 만주 침략 이후에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의 협조자로 만들려는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다. 내선 일체와 일선 동조론을 강조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고, 한국사 왜곡을 심화시켰다.

언론 분야에도 식민지 통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에 조선 일보, 동아 일보, 시사 신문의 일간지와 일부 잡지 발행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신문에 보도할 기사의 통제를 계속하다가 1940년에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마저 폐간시켰다.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특히,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종교 활동 역시 총독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 정신을 강조하는 종교 단체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종교 교단과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일제의 교육 정책

겉으로는 동화(同化)를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차별하는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여 순종적인 식민지 인간형을 만들려고 하였다.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편집]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한국사 연구의 발전[편집]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사를 수호하고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 연구 방법론이 체계화되어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이 대두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 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와 조선사 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하였고, 그 밖에 문일평, 안재홍, 남궁억 등도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조명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한국 학자들이 세운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사학도 발달하였다.

이 밖에, 손진태 등에 의한 민속학 연구도 활기를 띠었으며,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국외 유출을 막는 데 힘썼다.

읽기자료

신채호의 역사 인식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조선 상고사〉

민족 정신

박은식은 우리의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으며,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자 하였다.

민족 교육 진흥 운동[편집]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 여자 교육회와 조선 교육회가 창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24년에 발명 학회가 창설되었고, 이후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도움글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안창남은 1921년 일본에서 최초로 실시된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은 1922년 12월에 여의도 상공에서 수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국 방문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관동 대지진 이후, 자신의 비행 기술로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안창남은 중국 혁명을 통해 민족 광복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중국 혁명군 부대의 항공 교관으로서 중국인과 독립 운동가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1930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종교 활동[편집]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종교 단체들은 다양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3⋅1 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문화 운동을 표방한 민족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대종교는 일제의 심한 탄압을 피해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 군정서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기독교는 1930년대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많은 신자가 투옥되거나 학교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민중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불교는 총독부의 간섭에 맞서 조선 불교 유신회를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현대화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자립 정신 고취와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읽기자료

한용운의 조선 불교 유신론

불교의 유신은 마땅히 먼저 파괴를 해야 한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개 말로써는 할 줄 알지만,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어찌 비례의 학문에 있어서 추리해 이해함이 이리도 멀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구습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 〈조선 불교 유신론〉

문학과 예술 활동[편집]

일제 강점기의 문학과 예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 문학계에는 이광수 등의 활동으로 근대 문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예술성만 추구하고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동인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은 김소월은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시대 의식을 반영하였다. 한용운 역시 항일 운동의 민족주의 노선을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예술성과 작품성을 강조하는 순수 문학 경향도 대두하였다.

대륙 침략 이후 일제는 우리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면서 군국주의 찬양을 강요하였다. 일부 문인은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육사, 윤동주 같은 저항 시인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음악계에서는 홍난파와 현제명 등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어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국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애국가 합창을 넣은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전통 회화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서양식 유화가 새로운 미술 장르로 자리잡았다. 일제의 수탈을 비판하는 풍자화도 등장하였다.

연극계에서는 3⋅1 운동 이후 근대 연극이 도입되어 극예술 연구회를 중심으로 민족적 비극을 무대 예술화하였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연극 외에는 공연할 수 없었다.

영화계에서는 나운규가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아리랑(1926)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 때, 일부 예술인이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전개한 사실은 광복 후 예술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계급 문학

임화, 김기진, 박영희, 최서해 등은 카프(KAPF)라는 문학 단체를 결성하여 계급 문학을 확산시켰다.

[3] 현대 문화의 성장과 발전[편집]

한국학 연구의 발전[편집]

광복을 맞으면서 우리 나라의 학술계는 자유로운 연구와 교육 활동을 바탕으로 일제 식민지 잔재를 일소하고 단절된 전통 문화를 복원하여 현대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노력을 기울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역사학회, 국어 국문학회, 한국 철학회 등이 창립되어 한국학에 관련된 많은 연구 업적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글 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었던 우리말 큰 사전을 완간해 국어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60년대 이후로는 새롭게 창립된 학회와 대학, 연구 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국학 분야의 연구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한편, 식민 문화의 극복과 남북 통일이 주요 주제로 부각되면서 한국학 연구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서구 문화의 수용과 전통 문화의 계승[편집]

일제의 탄압과 왜곡 속에서 파괴되었던 우리의 전통 문화는 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서구 문화의 수용은 국제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근대적 사고 형성에 기여하였다. 반면에,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전통 문화의 소외와 물질 위주의 향락 문화를 조장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1970년대 이후에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던 서구 문화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 노력이 펼쳐졌다. 대학가에서는 탈춤과 사물놀이가 유행하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전통 문화의 대중화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전통 문화와 서구 문화를 접목해 자기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였다.

언론 활동의 발달[편집]

광복 이후 언론의 양적인 팽창은 거듭되고 있다. 신문과 잡지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도 급속하게 팽창하였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신문이나 방송도 등장하였다. 언론의 확대는 정보의 독점을 막고 여론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 권위주의적 정부들은 언론을 장악해서 통제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강제로 언론을 통폐합하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구속하거나 해직시키는 등 직접적인 언론 탄압을 강행하였다. 특히, 전두환 정부는 보도 지침을 통해 언론의 보도 내용까지 강제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면서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은 줄어들고 언론의 자유는 확대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언론의 상업주의 경향 및 편향적인 정보의 취사선택으로 인해 언론의 정화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한편, 인터넷 매체가 기존 언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여론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익명성에 의한 부정적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읽기자료

언론 자유 수호 투쟁

언론 자유 실천문 일부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 본질적으로 자유 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 10. 24.)

방송의 변화

1927년 라디오 최초 방송

1947년 대한민국 국적의 라디오 최초 방송

1954년 라디오 민간 방송 시작

1961년 전국적인 TV 방송

1965년 라디오 FM 방송 시작

1980년 컬러 TV 방송 시작

1994년 케이블 TV의 전국 방송 실시

교육의 확대[편집]

광복 이후 미국식 교육 제도의 영향으로 6⋅3⋅3 학제가 도입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교육 이념으로는 홍익인간이 채택되었으며, 민주 시민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확립하였다.

또, 광복 이후 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고 중등 교육 기관도 크게 늘어났다. 현재에는 중학교까지 사실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어 교육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문맹률은 크게 감소하였다.

6⋅25 전쟁 중에도 피난지의 천막 학교 등에서 수업이 진행될 정도로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전문가와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고도 성장을 이루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 경제와 사회 발전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높은 교육열은 경제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사회적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일류 학교 진학을 위한 과열 경쟁으로 과외 열풍과 학교 교육의 파행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교육의 평등화를 위한 무시험 진학 제도가 도입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대학이 많이 세워져 고등 교육이 대중화되었다.

학급당 학생 수(단위 : 명) 〈교육 통계 연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 학교
일반계 실업계
1970 62.1 62.1 60.1 56.1
1975 56.7 64.5 59.8 57.0
1980 51.5 65.5 59.9 59.6
1985 44.7 61.7 58.0 55.5
1990 41.4 50.2 53.6 51.5
1995 36.4 48.2 48.0 47.9
2000 35.8 38.0 44.1 40.3
2003 33.9 34.8 34.1 31.0

대중 문화의 성장[편집]

미군정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대중 문화가 급속히 흘러들어와 미국식 춤과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다. 한편, 우리 나라의 대중 문화는 경제 발전 및 대중 전달 매체의 보급이 확산되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가요, 드라마, 코미디가 대중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청소년층이 본격적으로 대중 문화 소비의 주인공으로 대두하였다.

1980년대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경제적 평등의 확대를 지향하는 민중 문화 활동이 대중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영화 산업은 한국적 특성이 담긴 영화를 제작하여 국내는 물론, 세계 영화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다양하게 발전한 우리의 대중 문화는 최근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국, 동남 아시아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 가요와 영화에서 시작된 한류는 우리의 대중 문화뿐만 아니라 전통 문화도 다른 나라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 문화는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업적 이익만이 아니라,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 종교의 발달[편집]

광복 직후 문화계는 좌⋅우익의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갈등이 나타났으며, 전통 문화의 계승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문학에서는 6⋅25 전쟁 이후 서정성을 중시하는 순수 문학이, 1960년대에는 민족 문학이 대두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민족 문학이 확산되면서 문학의 장르가 다양해지고 독자층이 넓어졌다. 특히, 민족 문학 운동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진전과 발맞추어 더욱 다양하게 확대되었다.

음악, 미술을 중심으로 활동의 폭도 점차 넓어졌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는 국악 등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 및 통일 문제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이 심화되면서 민중 예술 활동이 활발해 졌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문화 예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광복 직후 종교계는 분단과 전쟁으로 불안해진 대중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종교계는 양적 팽창을 하는 과정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종파가 생겨났다. 반면, 1970년대에는 일부 종교 지도자가 박정희 정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거나 노동, 농민, 통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1990년 이후 종교계는 시민 운동 등에 다양하게 참여하면서 포교 활동은 물론 갈등과 투쟁을 지양하고 사랑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체육 활동의 성장[편집]

광복 이후 국민을 단합시키고, 우리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체육 활동이었다. 광복 이후인 1947년에는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리 나라 선수가 우승함으로써 신생 독립 국가의 위상을 국내외에 알렸다.

1960년대에 들어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체육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정부는 태릉 선수촌을 건립하는 등 엘리트 체육에 체계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이에 힘입어 몬트리올 올림픽(1976) 레슬링 종목에서 광복 이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후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1986)와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1988)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우리 나라의 발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드니 올림픽 대회(2000)에서는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2년에는 우리 나라가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 컵 축구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한국 축구는 4강 진출의 성과를 올렸고, 거리 응원이라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응원 문화도 만들어 냈다.

국민 소득이 증가하고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 정책에 대한 반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에는 국민 건강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사회 체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에 대한 지원도 활발해지고 있다.

한편, 체육 활동은 남북한을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도 담당하였다. 남과 북을 오가는 통일 축구(1990)가 열린 이후, 일본 지바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1991)에서는 단일 팀을 구성하여 우승하였다.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는 남북한이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여 한 민족임을 세계에 알렸다.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편집]

광복 이후 한동안 과학 기술 분야는 답보 상태였으나, 정부의 지속적인 과학 기술 육성책에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원자력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1966년에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과학 기술 개발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장기적인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였으며, 외국에 유학한 재능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과학 기술처가 창설되어 과학 기술 진흥을 선도하였다.

정부와 민간의 꾸준한 과학 기술 투자를 바탕으로 여러 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통신, 교통, 컴퓨터,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우주 항공 산업에서는 다목적 실용 위성 아리랑호를 비롯하여 무궁화 3호까지 잇따라 발사에 성공하여 현재 상용 서비스를 하고 있다. 군사 기술에 있어서도 외국 의존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군사 항공 분야에서 독자 기술로 초음속 전투 연습기를 만들어 낼 정도로 큰 발전을 보이고 있다.

전자 산업에서는 반도체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항상 세계 최초 발명이라고 할 정도로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과학 기술 발전에 힘입어 무역 규모가 확대되는 등 빠른 경제 성장을 하였고, 생활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있다. 우선,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 기업이 소외시켰던 기초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며, 유전 공학 분야에서는 생명에 관한 윤리적 갈등을 풀어야 한다. 과학 기술도 인간 윤리 및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문화와 예술의 이해[편집]

북한의 문화와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목적보다는 대중에게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가르치는 당의 무기로서 발전하였다. 또, 김일성 주체 사상에 바탕을 둔 문예 이론을 철저하게 지켰다.

문학에서는 주체 문예 이론이 대두한 1970년대부터 계급 혁명을 찬양하는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의 혁명 투쟁 연극을 고쳐서 소설화하였다. 또,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문학 외에, 남녀 애정을 주제로 하는 청춘 송가 같은 소설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는 민족 음악을 표방하였지만, 당과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우리 예술인의 평양 공연이 이루어지고, 남한의 노래도 알려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다른 어느 예술 장르보다 영화가 중시되고 있다. 영화가 대중을 상대로 선전하는 데에 호소력과 전파력이 가장 강하여 정치 선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으로 집단 체조, 카드 섹션, 서커스(교예) 등의 집단 문화가 발전하였다.

북한은 우리의 표준어와 구분되는 문화어를 새로 만들고, 1966년부터 말다듬기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말 대사전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분단의 장기화로 인하여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가 심화되고 있다.

조선말 대사전

1992년 간행되었으며, 33만 어휘가 수록되어 있고 새로 만들어진 문화어도 5만 개 중에서 2만 5천 개가 수록되어 있다.

심화 과정[편집]

문명과 개화

① 지금 판세를 가만히 보면, ‘개화’니 ‘문명’이니 한다고 머리를 잘들 깎았나 보네만, 속에는 전판 완고의 구습이 가득하여, 겉으로는 어찌 개명 진취의 뜻이 있는 듯 하나 실상은 잠을 깨지 못하여 실상은 길에 다니는 자들이 말짱 코를 골고 다니니, 비유컨대 고목나무 겉은 성하나 속은 좀이 먹어 들어가는 모양이라. 참, ‘겉 개화’라 할 만하여……. 〈대한매일신보, 1905.〉

② 조선 사람은 조선 문명의 종이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전화뿐이랴. 조선 내에 있는 철도, 윤선, 탄탄대로, 우편, 전신 이러한 모든 문명의 이기는 그것을 설비하는 비용과 노력은 조선인이 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는 일본인이 한다. …… 우리는 조선의 오늘날 문명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다. 조선 사람아, 우리는 이 문명의 주인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자.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차라리 이것을 깨뜨려 버리자. 〈동아 일보 1924. 4. 21.〉

  1. ①이 지적하는 개화나 문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이것을 수용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추론해 보자.
  2. ②가 지적하는 문명의 이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토론해 보자.
남북한 통일을 향하여

북한말은 맞춤법부터 남한말과 다르다. 북한에서는 노동자를 ‘로동자’로 쓴다.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도 다르다. 북에서는 거위를 ‘게사니’로, 헬리콥터를 ‘직승기’라 부른다. 그래서 탈북 어린이는 수업받는 내용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옛날 이야기도 다르다. ‘토끼와 자라’를 보면 용왕은 “날마다 술만 퍼먹으면서 홍땅홍땅(흥청망청) 놀기만 해서 병에 걸렸고, 자라는 높은 벼슬과 재물을 바래서 뭍으로 갔다.”라고 써 있다. 역사책은 더욱 다르다. 북의 어린이 책은 6⋅25 전쟁을 승리한 ‘인민 해방 전쟁’이라 적었다. 북에서 온 아이들이 역사 수업을 가장 버거워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업 듣기도 벅찬 아이들이 북한 사투리 때문에, 또는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한다고 들었다. 〈통일 교실, 통일 교육원〉

  1. 남북한의 이질화된 언어를 찾아 표를 만들어 보고, 다른 학생과 비교해 보자.
  2. 북한 학생이 남한 사회에 대해 가지게 될 생각을 추론해 보고, 그 학생에게 할 말을 편지로 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