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단원의 길잡이
[편집]사회사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여러 모습을 살피는 분야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다양한 사회 조직의 틀 속에서 집단 생활을 해 왔다.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비롯하여 사회 구조의 형성과 변동, 그리고 각 사회 집단의 성격과 서로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온 과정을 알 수 있다.
사회사는 개인의 일상 생활과 집단 생활을 사회 풍속과 신분 제도, 가족과 친족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사회사를 공부할 때에는 사회 구조의 형성과 변동, 사회 신분과 사회 세력, 촌락과 도시, 사회 조직과 그 기능, 인구의 변화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권력자나 두드러진 활동가는 물론, 이름 없는 대다수 서민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농민과 노비 등 하층민의 처지를 비중 있게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인물을 파악할 때, 사회 구조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가족 구성과 사회 신분 등에서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알게 되면 생생한 삶 속에서 역사의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100 | 194 | 고구려, 진대법 실시 |
500 | 502 | 신라, 순장 금지 |
900 | 956 | 노비안검법 실시 |
963 | 제위보 설치 | |
986 | 의창 설치 | |
1100 | 1112 | 혜민국 설치 |
1176 | 망이⋅망소이의 봉기 | |
1198 | 만적의 봉기 | |
1400 | 1401 | 신문고 설치 |
1413 | 호패법 실시 | |
1423 | 화척을 백정으로 개칭 | |
1470 | 화장 풍습 금지 | |
1500 | 1524 | 상평창 설치 |
1558 | 공천추쇄도감 설치 | |
1577 | 해주 향약 실시 | |
1600 | 1625 | 서얼허통법 제정 |
1664 | 호남 지방 대홍수 발생 | |
1669 | 함경도에 천연두 창궐 | |
1700 | 1727 | 전라도 각지 농민 봉기 |
1778 | 노비추쇄관 혁파 | |
1800 | 1801 | 공노비 해방 |
1811 | 홍경래의 난 | |
1862 | 임술 농민 봉기 | |
1900 | 1923 | 형평사 창립(진주) |
1927 | 신간회 창립 | |
1991 | 국제 노동 기구(ILO) 가입 | |
2000 | 2001 | 여성부 신설 |
1. 고대의 사회
[편집]고대 사회는 계층 분화를 바탕으로 성립하여 정복 전쟁을 치르며 발전하였다. 고대인은 잦은 전쟁을 통하여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였고,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의 적용도 매우 엄격하였다. 고대 사회의 신분은 귀족, 평민, 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혈통에 따른 신분의 세습이 철저하였다.
혈연과 문화적 동질성을 간직하고 있던 삼국이 통일된 이후 고대 사회는 한층 발전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사회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골품제의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한 신라는 중앙 귀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골품 제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이탈로 말미암아 고대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 고대 사회에서 상무적 기풍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
- 고대 사회의 주인과 노비의 생활상을 비교해 보자.
[1] 신분제 사회의 성립
[편집]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편집]여러 부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지배층 사이에 위계 서열이 마련되었고, 그 서열은 신분 제도로 발전해 갔다. 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의 읍락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호민과 그 아래에 하호가 있었다. 하호는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이었다. 읍락의 최하층에는 노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생활하고 있는 천민층이었다.
한편, 부여와 초기 고구려에는 가, 대가로 불린 권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호민을 통하여 읍락을 지배하는 한편, 자신의 관리와 군사력을 지니고 정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차츰 귀족으로 편제되어 갔다. 그리하여 삼국 시대가 되면서 사회는 크게 귀족, 평민, 천민의 신분 구조를 갖추었다.
귀족, 평민, 천민
[편집]고조선 시대 이래로 존재하였던 신분적 차별은 삼국 시대에 와서 법적으로 더욱 강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신분 구성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평민, 천민으로 크게 구분된다.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신분의 귀천에 따라 인물 크기가 다르게 묘사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삼국에서는 왕족을 비롯한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정치 권력과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들은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들며 생활하거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대개,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거나 죄를 짓거나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빈번하였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2] 삼국 사회의 모습
[편집]고구려의 사회 모습
[편집]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거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서옥제 혼인하는 풍속을 보면,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집에서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 한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집 문 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 신부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삼국지〉 |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같이 사는 혼인 제도 |
백제의 사회 모습
[편집]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화를 수용하였다. 백제 사람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깔끔하다는 중국의 기록은 그 세련된 모습을 알려준다.
백제 사람은 상무적인 기풍이 있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한 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베었고,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실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및 장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편집]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모여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신라 초기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초기의 전통을 유지한 대표적인 제도가 화백 회의였다. 귀족은 이를 통하여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 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골품 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인의 일상 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다.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다.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골품제의 생활 규제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척을 넘지 못한다. 느릅나무를 쓰지 못하고, 우물천장을 만들지 못하며, 당기와를 덮지 못하고, 짐승 머리 모양의 지붕 장식이나 높은 처마 …… 등을 두지 못하며, 금은이나 구리 …… 등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섬돌로는 산의 돌을 쓰지 못한다.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하고, 또 보를 가설하지 않으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못하고, 마구간에는 말 2마리를 둘 수 있다. 〈삼국사기〉 |
화백 제도는 귀족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진지왕(576~579)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 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
[3] 남북국 시대의 사회
[편집]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편집]삼국은 상호간에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도 동질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언어와 풍습은 비슷하였고, 복장을 비롯하여 절하는 모습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 문화가 하나의 국가 아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배층에게 신라 관등을 주어 포용하였다. 통일 직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9서당에 편성함으로써 민족 통합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라 지배층은 삼한(삼국)이 하나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00여 년 동안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다. 특히, 삼국 통일 이후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그러나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의 정치 사회적 비중은 여전히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고, 합의를 통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전통도 여전히 유지하였다.
한편,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삼국 통일 이후 골품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골품의 구분이 하급 신분층에서부터 점차 희미해지면서, 3두품에서 1두품 사이의 구분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고 평민과 동등하게 간주되었다.
발해의 사회 구조
[편집]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렸다.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에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인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발해는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통일 신라 말의 사회 모순
[편집]신라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의 정권 다툼과 대토지 소유 확대로 백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지방의 토착 세력과 사원들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유력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지방의 자영농들은 귀족들의 농장이 확대되면서 몰락해 갔다. 더욱이 중앙 정부의 통치력 약화로 대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 농민이 더 많은 조세를 감당하게 되었다.
9세기 이후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무장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아우른 큰 세력가가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버리고 떠돌게 되었다. 걸식을 하거나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였으며,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증폭되었다.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 갔다.
통일 신라 말기의 전란 진성 여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하였지만,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 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상주)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나마 벼슬의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진을 쳐다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
심화 과정
[편집]- 고대 사회 귀족들의 합의 제도
① 고구려: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서 논의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삼국지〉
② 백제:호암사에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국가에서 재상을 뽑을 때 후보자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바위 위에 두었다. 얼마 뒤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정사암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삼국유사〉
③ 신라:큰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중의를 따른다. 이를 화백이라 부른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통과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고대 사회의 정치적 특성을 말해 보자.
- 고대 국가에서 귀족들의 합의 제도가 발달하였던 배경을 조사해 보자.
- 골품제의 성립 배경
① 신라는 …… 그 관료를 세울 때 친속(親屬)을 상으로 하며, 그 족의 이름은 제1골, 제2골이라 하여 나뉜다. 형제의 딸이나 고종 자매, 이종 자매를 모두 처로 맞아들인다. 왕족을 제1골로 하여 처도 같은 족인데, 자식을 낳으면 모두 제1골로 한다. 제2골의 여자와 혼인하지 않으며 비록 혼인하더라도 언제나 첩으로 삼는다. 〈신당서〉
② 골품제는 처음에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개의 체제로 성립하였다.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족 내부에서 다시 성골이 분리되어 성골과 진골이라는 2개의 골과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 등 모두 8등급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7세기 중반에 성골이 사라졌고, 통일 이후에는 1두품에서 3두품에 이르는 신분의 구별도 차츰 사라져 일반 백성과 비슷하게 되었다.
- 신라의 골품을 열거해 보자.
- 골품 제도의 성립 시기와 목적을 알아보자.
2. 중세의 사회
[편집]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중류층은 새로이 등장한 신분층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지배 신분 안에서는 과거 제도를 통하여 계층 이동이 이루어졌으며, 정치적 변동에 따라 신분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시책을 실시하였다.
- 고려 사회가 전시대에 비하여 신분제의 폐쇄성이 줄어든 이유를 생각해 보자.
- 고려 사회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매김한 불교의 영향을 말해 보자.
[1] 고려의 신분 제도
[편집]귀족
[편집]고려의 신분 구성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귀족과 중류층, 그리고 양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귀족 세력은 왕족을 비롯하여 5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음서나 공음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다.
귀족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사회를 이끌어 갔다. 중앙 집권적 체제인 고려 사회에서 그들은 개경에 거주하였는데,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형벌로 귀향을 시키기도 하였다.
중앙 관직에 진출한 집안은 귀족 가문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관직을 바탕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등 재산을 모았고, 유력한 가문과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귀족이 사돈맺기를 가장 원하는 집안은 왕실이었다.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지름길로 여겼으므로, 여러 딸을 왕비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지방 향리의 자제도 과거를 통하여 벼슬에 나아가 신진 관료가 됨으로써 귀족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반대로, 중앙 귀족에서 낙향하여 향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층의 변화는 무신정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종래의 문벌 귀족이 약화되면서 무신이 권력을 잡았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등장한 귀족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으며,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음서로써 신분을 세습시켜 갔다. 이들은 강과 하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하고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또한 몰락한 농민을 농장으로 끌어들여 노비처럼 부리며 부를 축적하였다.
권문세족 이제부터 만약 종친으로서 같은 성에 장가드는 자는 황제의 명령을 위배한 자로서 처리할 것이니, 마땅히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취하여 부인을 삼을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왕족의 딸과 혼인함을 허락할 것이다. 만약 집안의 세력이 약하면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평강 채씨, 청주 이씨,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다 여러 대의 공신 재상의 종족이니, 가히 대대로 혼인할 것이다. 남자는 종친의 딸에게 장가 가고 딸은 종비(宗妃)가 됨 직하다. 〈고려사〉 |
중류층
[편집]고려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중류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 기구의 말단 행정직으로 존재하였는데, 중앙 관청의 말단 서리인 잡류, 궁중 실무 관리인 남반,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한 향리, 직업 군인으로 하급 장교인 군반, 지방의 역(驛)을 관리하는 역리 등이 있었다. 중류층은 후삼국의 혼란을 거쳐 고려의 지배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통치 체제의 하부 구조를 맡아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직역을 세습적으로 물려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받았다.
각 지방의 호족 출신은 향리로 편제되어 갔다. 호족 출신들은 호장, 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한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통혼 관계나 과거 응시 자격에 있어서도 하위의 향리와는 구별되었다.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부호장과 함께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가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
양민
[편집]양민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면서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도 한다. 이들에게는 조세⋅공납⋅역이 부과되었다.
양민이면서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에 거주한 주민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곳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일반 군현민이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군현을 부곡 등으로 강등하기도 하였다.
향이나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은 농업을, 소에 거주하는 사람은 수공업이나 광업품의 생산을 주된 생업으로 하였다. 이 밖에, 역과 진의 주민은 각각 육로 교통과 수로 교통에 종사하였다.
천민
[편집]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공공 기관에 속하는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에 예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공노비에는 궁중과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고 생활하는 입역 노비와 지방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농경을 하여 얻은 수입 중에서 규정된 액수를 관청에 납부하였다.
사노비는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되었다. 솔거 노비는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로서 주인의 집에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으며, 외거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사는 노비로서 주로 농업 등의 일에 종사하고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특히, 외거 노비는 주인의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소작할 수 있어서, 노력에 따라서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토지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외거 노비는 비록 신분적으로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양민 백정과 비슷하게 독립된 경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외거 노비 중에는 신분의 제약을 딛고 지위를 높인 사람이나 농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늘린 사람도 있었다.
원래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였다. 매매, 증여, 상속의 방법을 통하여 주인에게 예속되어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귀족은 재산으로 간주된 노비를 늘리기 위하여 부모 중의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게 하였다.
노비의 신분 상승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집안 노비로,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그는 권세가 있는 중요한 길목에 뇌물을 바쳐 천인에서 벗어나 산원동정의 벼슬을 얻었다. 그의 처는 소감 왕원지의 집안 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을 데리고 가서 의탁하고 있었다. 평량이 후하게 위로하여 서울로 돌아가기를 권하고는 길에서 몰래 처남과 함께 원지 부처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인이 없어졌으므로 계속해서 양민으로 행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려사〉 |
[2] 백성의 생활 모습
[편집]농민의 공동 조직
[편집]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
사회 시책과 제도
[편집]고려 시대의 농민은 조세, 잡역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부담을 졌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우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에게는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또,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고려의 사회 제도 중에는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법률과 풍속
[편집]고려는 중국의 당률을 참고하여 만든 법률을 시행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관습법을 따랐다. 지방관의 사법권이 커서 중요 사건 이외에는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역죄, 불효죄 등은 중죄로 다스렸다. 반면에, 귀양형을 받은 사람이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유형지에 도착하기 전에 7일간의 휴가를 주어 부모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70세 이상의 노부모를 두고 봉양할 가족이 없을 때에는 형벌의 집행을 보류하기도 하였다. 형벌로는 태, 장, 도, 유, 사 다섯 종류가 있었다.
장례와 제사에 관한 의례는 유교적 규범을 시행하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대개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와 도교의 풍속을 따랐다.
명절로는 정월 초하루, 삼짇날, 단오, 유두, 추석 등이 있었으며, 단오 때에는 격구와 그네뛰기 및 씨름을 즐겼다.
- 태:볼기를 치는 매질 - 장:곤장형 - 도:징역형 - 유:멀리 유배 보내는 형 - 사:사형으로, 교수형과 참수형의 두 가지가 있다. |
혼인과 여성의 지위
[편집]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 (박유가) “청컨대, 여러 신하, 관료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品位)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처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며,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연등회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저놈의 늙은이이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 중에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
[3] 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편집]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편집]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운문, 초전에서는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라 부흥 운동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다.
몽골의 침입과 백성의 생활
[편집]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씨 무신 정권은 개경에서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현민에게는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산성과 섬에서의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으므로 백성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일반 백성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의 간섭과 원을 따르는 정치 세력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몽골 침입시 백성의 생활 고종 42년(1255) 3월, 여러 도의 고을이 난리를 겪어 황폐해지고 지쳐 조세, 공부, 요역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자를 모두 나오게 하였다. 그 때 산성에 들어갔던 백성은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잡아매어 놓고 가는 자가 있었다. 4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편집]무신 집권기 이후로는 하층 신분에서 신분 상승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몽골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 몽골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이와 반대로 고려 사람이 몽골에 건너간 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전란 중에 포로 또는 유이민으로 들어갔거나 몽골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한다.
원의 공녀 요구는 고려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결혼도감을 통하여 원으로 끌려간 여인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므로 공녀의 공출은 고려와 원 사이에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몽골과 마찬가지로 왜구도 고려 백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왜구는 이미 13세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으나, 14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침략해 왔다. 원의 간섭하에서 국방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고려는 초기에 효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주로 쓰시마 섬 및 규슈 서북부 지역에 근거를 둔 왜구는 부족한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하고자 자주 고려 해안에 침입하였고, 식량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약탈해 갔다.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점차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심지어 개경 부근에도 나타났다. 많을 때에는 한 해에 수십 번 침략해 왔기 때문에, 해안에서 가까운 수십 리의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에 따른 사회의 불안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몽골풍 공민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몽골의 옷차림)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이연종이) 말하기를 “임금 앞에 나아가 직접 대면해서 말씀드리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들어와서는 좌우(左右:왕의 측근)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
왜구의 피해 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바닷가까지 수백 리를 가면 흥해라는 고을이 있다. 땅이 매우 궁벽하고 험하나, 어업, 염업이 발달하고 비옥한 토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주민이 많았는데, 왜란을 만난 이후 점점 줄다가 경신년(1380) 여름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을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이 살해되고 약탈당해 거의 없어졌다. 그 중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과 거리는 빈 터가 되고 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고을에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들어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양촌집〉 |
심화 과정
[편집]- 고려 사회의 개방성
① 삼국 이전에는 과거의 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으니, 이 때부터 문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법은 대체로 당의 제도를 많이 채용한 것이다.
② 고려의 신분 제도는 조상의 신분이 그대로 자손에게 세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향리가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향, 부곡, 소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외거 노비 중에는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 위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신분 변동이 가능하였던 경우를 정리해 보자.
-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가 통일 신라와 비교하여 다른 점을 분석해 보자.
- 고려 시대의 신앙
① 내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五岳), 명산, 대천, 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사한 신하가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를 늘리거나 줄이자고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 속에 행여 행사일이 황실의 제일(祭日)과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고려사〉
② 나주 사람이 일컫기를 “금성산의 산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진도, 탐라(제주)를 정벌할 때에는 실로 내가 힘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 녹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으로 봉하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정)가신이 그 말에 미혹(迷惑)되어 (충렬)왕에게 넌지시 아뢰어 정녕공으로 봉하게 하고, 또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당에 보내 주게 하였다. 〈고려사〉
- 위의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민간 신앙을 찾아보자.
- 위의 자료를 참고하여 고려의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의식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을 추론해 보자.
3. 근세의 사회
[편집]조선은 고려 말의 여러 모순을 시정하면서 국가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고 특수 행정 구역이 사라지는 등 이전 시대와는 다른 면을 보여 주었다. 조선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로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여 양반 중심의 사회 체제를 확립해 갔다.
엄격한 신분제와 가부장적 가족 제도 중심의 사회 질서로 말미암아 서얼을 차별하였고, 여자의 재가를 금지하였다. 양반은 향촌 사회에서 향약을 시행하여 권익을 옹호하였으며, 일반 백성은 두레와 계로써 자기들의 생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 양반이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배경을 이야기해 보자.
- 향촌 사회에서 양반과 농민의 생활을 비교해 보자.
[1] 양반 관료 중심의 사회
[편집]양천 제도와 반상 제도
[편집]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양반과 중인
[편집]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양반은 각종 국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만을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 안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다. 양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라고도 불리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간혹 무반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중인은 양반에게서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으며, 향리는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상민과 천민
[편집]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상민이 과거에 응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전쟁이나 비상시에 공을 세우는 등의 경우가 아니면 상민의 신분 상승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농민은 조세, 공납, 부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세는 때에 따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과중하였다.
수공업자는 공장으로 불리며,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상인은 시전 상인과 행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상거래에 종사하였다.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때, 그 소생 자녀도 자연히 노비가 되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신공을 바쳤으며, 공노비도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칠반천역이라고도 한다. 수군, 조례(관청의 잡역 담당), 나장(형사 업무 담당), 일수(지방 고을 잡역), 봉수군(봉수 업무), 역졸(역에 근무), 조졸(조운 업무) 등 힘든 일에 종사한 일곱 가지 부류 |
[2]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편집]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
[편집]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서 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법 ○ 굶주린 사람 중에서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관아에 나와 환곡을 직접 받아 갈 수 없는 사람은 가져다 줄 것. ○ 모자라는 구휼 곡식을 보충하기 위해서 더덕, 도라지 등 산나물을 많이 캐어서 섞어 먹도록 할 것. ○ 여러 날 굶어 쓰러진 사람에게 좁쌀 미음을 마시게 하면 즉사하므로, 먼저 죽물을 식혀서 천천히 먹여 허기를 면하게 한 다음 밥을 줄 것. ○ 깊은 산골과 외떨어진 곳의 굶주린 사람을 먼저 살필 것. 〈세종실록〉 |
법률 제도
[편집]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민사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처리하였다. 초기에는 노비와 관련된 소송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남의 묘지에다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데에서 발생하는 산송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신문고 제도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품은 자는 나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소하기를 “서울과 외방의 고할 데 없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소재지의 관청에 고발하여도 소재지의 관청에서 이를 다스려 주지 않는 자는 나와서 등문고를 치도록 허락하소서. 또, 법을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등문한 일을 추궁해 밝히고 아뢰어 처결하여 억울한 것을 밝히게 하소서. 그 중에 사사로이 (남에게) 원망을 품어서 감히 무고를 행하는 자는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여 참소하고 간사하게 말하는 것을 막으소서.” 하여 그대로 따르고, 등문고를 고쳐 신문고(申聞鼓)라 하였다. 〈태종실록〉 |
명나라 때 형벌에 관한 기본 법전 |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 윤리를 어긴 죄 |
[3] 향촌 사회의 조직과 운영
[편집]향촌 사회의 모습
[편집]향촌은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말하며,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은 사족(士族)이었다. 사족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사림은 도덕과 의례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고, 가묘와 사당을 건립하며, 족보 편찬을 통해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족보는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안으로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 다른 집안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따라서, 족보는 혼인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족보의 의미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서자의 자손이 구별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 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안동 권씨 성화보〉 |
군, 현 아래 면, 이(里)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구성되었다. 면, 이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
향약과 유교 윤리의 보급
[편집]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가 처음 시행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도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주 향약 입약 범례문 무릇, 뒤에 향약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서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 |
촌락의 구성과 운영
[편집]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洞),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자연촌 단위의 몇 개의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를 통해, 그리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신흥 사족이 향촌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향촌 사회에는 주로 양반이 거주하는 반촌(班村)과 평민이 거주하는 민촌(民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향촌에서는 두서너 개의 씨족이 서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양반과 평민, 천민이 섞여 살았다.
촌락의 농민 조직으로 두레와 향도가 있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의 작업 공동체였다. 향도는 불교와 민간 신앙 등의 신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심화 과정
[편집]- 유교적 지배 질서의 확립 과정
① 인륜의 도는 진실로 삼강 밖에서 나오는 것이 없고, 천성의 참됨은 진실로 만대에 같은 것입니다. 마땅히 앞선 사람의 행실에 대한 기록을 모아 오늘의 모범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절개를 바치는 것은 하늘의 법칙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신하로서 이것을 하고 아들로서 이것을 하며 아내로서 이것을 하는 것은 순종하는 땅의 도리에 근원을 둔 것입니다. ……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효자, 충신, 열녀로 우뚝 높아서 기록으로 남길 만한 사람을 각각 110명씩 찾아 내었습니다. 앞에는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를 붙였습니다. 〈삼강행실도〉
② 족보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하였다. 우선, 족보 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일족 중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록한 서문(序文)이 권두(卷頭)에 있다. 다음에는 시조나 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록한 문장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시조의 분묘도(墳墓圖)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 지도 등을 나타낸 도표가 들어가며, 그 아래에 범례가 있다. 끝으로, 족보의 중심이 되는 계보표가 기재된다. 이것은 우선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 순으로 종계(宗系)를 이루며, 같은 항렬은 횡으로 배열하여 동일 세대임을 표시한다. 기재된 사람은 각 사람마다 그 이름, 호(號), 시호(諡號), 생몰(生沒) 연월일, 관직, 봉호(封號), 훈업(勳業), 덕행(德行), 충효(忠孝), 문장, 저술(著述) 등을 기록한다. 또, 자녀에 대해서는 입양관계, 적서의 구별 및 남녀의 구별 등을 명백하게 한다.
-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목적을 말해 보자.
- 위의 자료와 관련하여 족보를 만든 목적을 정리해 보자.
4. 근대 태동기의 사회
[편집]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그 동안 사회의 기반을 이루었던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농업 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농업 경영의 변화, 상공업의 발달에 힘입은 바 컸다.
향촌 사회의 부농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양반으로 성장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양반과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향촌 사회는 재향 사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수령권이 강화되는 등 향촌 질서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집권층의 자세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다. 이에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19세기에 들어서는 평등 사상을 담은 동학과 천주교가 유포되고,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 노비의 해방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사회 현상을 말해 보자.
- 사회의 변동에 따른 양반의 위상 변화를 파악해 보자.
[1] 사회 구조의 변동
[편집]신분제의 동요
[편집]조선 후기에는 양반 상호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으로 어느 한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었다.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였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로 신분 변동이 활발했다.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모면하려고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 옷차림은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인지 근래 이것이 문란해져 상민과 천민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것이 마치 조정의 관리나 선비같이 한다. 진실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시전 상인이나 군역을 지는 상민까지도 서로 양반이라 부른다. 〈일성록〉 ○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양반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나하며 자(字)를 부르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목민심서〉 |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편집]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 등 중간 계층의 역할도 커졌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정조 때에 서얼을 어느 정도 등용하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수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상소하여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은 기술직 중인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그들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 서학을 비롯한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노비의 해방
[편집]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공노비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어 그 효율성이 떨어지자, 공노비를 종래의 입역 노비에서 신공을 바치는 납공 노비로 전환시켰다.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도망 노비들은 임노동자나 머슴, 행상이 되거나,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다. 도망한 노비의 신공은 남아 있는 노비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노비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노비의 도망이 빈번해지자, 나라에서는 신공을 줄여 달래기도 하고, 이들을 찾아 내려고도 하였으나,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실시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1801).
사노비는 일반 농민이나 공노비에 비하여 더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냉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자 사노비의 도망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갑오개혁(1894)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법제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가족 제도의 변화와 혼인
[편집]조선의 가족 제도는 부계와 모계가 함께 영향을 끼치는 형태에서 부계 위주의 형태로 변화하여 갔다.
조선 중기까지도 혼인 후에 남자가 여자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아들과 딸이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의 대를 잇는 자식에게 5분의 1의 상속분을 더 준다는 것 외에는 모든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재산 상속을 같이 나누어 받는 만큼 그 의무인 제사도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책임을 분담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혼인 후에 곧바로 남자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사는 반드시 큰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큰아들이 우대를 받았다. 처음에는 딸이, 그리고 점차 큰아들 외의 아들도 제사나 재산 상속에서 그 권리를 잃어 갔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부계 위주의 족보를 적극적으로 편찬하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따라서, 이 때에는 개인이 개인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종중이라고 하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는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가족제도를 잘 유지하기 위한 윤리 덕목으로 효와 정절을 강조하였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고 효자나 열녀를 표창한 것 등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조선 시대의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남자가 첩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일부일처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인과 첩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서, 첩의 자식인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사나 재산 상속 등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혼인은 대개 집안의 가장이 결정하였는데, 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는 남자 15세, 여자 14세였다.
재가 금지 경전에 이르기를 “믿음은 부인의 덕이다. 한번 남편과 혼인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고, 한 번이라도 어기는 예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도덕이 날로 나빠진 뒤로부터 여자의 덕이 정숙하지 못하여 사족(士族)의 딸이 예의를 생각지 아니해서 혹은 부모 때문에 절개를 잃고, 혹은 자진해서 재가하니, 한갓 자기의 가풍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 누를 끼친다. 만일, 엄하게 금령을 세우지 않는다면, 음란한 행동을 막기 어렵다. 이제부터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관료가 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라. 〈성종실록〉 |
인구의 변동
[편집]조선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수시로 호구 조사를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구에 관한 기본 자료는 원칙적으로 3년마다 수정하여 작성하는 호적 대장이었다.
국가에서는 호적 대장에 기록된 각 군현의 인구 수를 근거로 해당 지역에 공물과 군역 등을 부과하였다. 공물과 군역의 담당자가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이어서 국가의 인구 통계는 주로 남성만을 기록하고 있어 실제 인구 수와는 많은 차이가 났다.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하삼도에 전 인구의 50% 정도가 살았으며, 경기도, 강원도에는 20%,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에는 30% 정도가 거주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구 수는 건국 무렵에는 550만~750만 명,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에는 1000만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말엽에는 1700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한성에는 세종 때에 이미 10만 명 이상이 거주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는 20만 명이 넘었다.
[2] 향촌 질서의 변화
[편집]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편집]경제의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에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졌다.
양반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많이 세워졌다.
향촌 사회에서 종래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거나 기존 향촌 세력과 타협하면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그러나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부농층을 당시에 요호부민(饒戶富民)으로 불렀다. 이들은 자기의 전지를 소유하고 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향촌에 있는 향청(유향소)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나 그 직책을 말한다. |
농민층의 분화
[편집]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양반이 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 부를 축적하는 데 각종 편의를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은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일부 농민이 부농층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일부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16세기 이래 부역제가 무너져 가면서 노동력 동원이 어려워진 국가나 관청에서 노임을 받고 성쌓기나 도로공사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부농층에 고용되어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다. 부농층의 대두와 임노동자의 출현은 이 시기 농민의 분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관권의 강화
[편집]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성장 욕구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와 일치하여 정부도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하여 이들 부농층 성장의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종래의 재지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가운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이에 따라,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 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다.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사회 변혁의 움직임
[편집]사회 불안의 심화
[편집]신분제의 동요는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고,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은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탐관오리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 사이에는 비기, 도참설이 널리 퍼지고,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갔다.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화적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였고, 수적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예언 사상의 대두
[편집]사회가 변화하면서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비기,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유행하였다.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없는 낭설이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정감록은 이 때에 널리 유행한 비기였다.
여기에 무격 신앙이나 미륵 신앙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을 미륵 신앙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심지어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서민을 현혹시켜 끌어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천주교의 전파
[편집]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 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천주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면서 백성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가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동학의 발생
[편집]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다시 교세가 커진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농민의 항거
[편집]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농민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처음에는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항쟁이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다.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父老)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이라고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가지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패림〉 |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
남을 비방하거나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몰래 붙이는 게시물 |
심화 과정
[편집]- 양반 중심 신분 체제의 변화
①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명분을 중히 여겼다. 양반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모두들 나무라고 비웃기를 노예처럼 무시하니, 자연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든다.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목별로 조항을 엄격히 세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 중에서 사⋅농⋅공⋅상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담헌서〉
② 울산 호적 (단위:%)
시기 | 양반 호 | 상민 호 | 노비 호 |
---|---|---|---|
1729 | 26.29 | 59.78 | 13.93 |
1765 | 40.98 | 57.01 | 2.01 |
1804 | 53.47 | 45.61 | 0.92 |
1867 | 65.48 | 33.96 | 0.56 |
- 자료 ①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자.
- ②의 신분별 인구 변동이 보여 주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보자.
- 천주교와 동학 사상
①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도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이미 돌아간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상재상서〉
②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천을 나눔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차별을 없애고 선사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최시형의 최초 설법〉
- 천주교의 제사 거부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책을 조사해 보자.
- 동학이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이유를 조사해 보자.
5. 근⋅현대의 사회
[편집]개항 이후, 사회 개혁이 진행되면서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평등 의식도 점차 성장하였다. 또,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외래 문물과 제도 등이 수용됨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독립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이 펼쳐졌다. 이러한 가운데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전통 사회는 점차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갔는데, 식민지 현실 아래에서 근대화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에 우리 나라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1980년대에 진행된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고,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숙해진 민주 시민 의식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게 하고 있다.
- 문호 개방 이후 변화된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 자료를 찾아, 개항 이전과 현재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해 보자.
- 1920년대에는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의 농민, 노동자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문학 작품을 찾아 읽고, 역할극을 해 보자.
- 우리 나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회 문제가 생겼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사회 문제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토론해 보자.
[1] 개항 이후의 사회 변화
[편집]사회 제도와 의식의 변화
[편집]개항 무렵, 일부 양반과 중인 출신 인사들은 개화 세력을 형성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해 나갔다. 이들은 실학 사상을 계승하고 서구의 사회 사상을 받아들여 평등한 근대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문벌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으며,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선언하는 등 사회의 전반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860년대에 등장한 동학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평등 사상에 기초한 동학은 민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가 타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추구하던 신분 제도의 폐지는 마침내 갑오⋅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고, 천민 신분과 공⋅사노비 제도가 폐지되었다. 또, 조혼이나 과부의 재혼 금지, 인신 매매, 고문, 연좌제 같은 악습도 없앴다. 아울러 과거제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만들었으며,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사법 제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한편, 독립 협회는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민권 의식과 평등 의식이 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많은 사람이 독립신문을 구독하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에 참여하거나 독립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애국 계몽 운동 단체나 학회, 언론 활동으로 이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 의식, 민권 의식, 평등 의식이 높아졌다. 갑오개혁으로 비록 신분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에 남녀노소, 지역,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의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이 운동은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에는 많은 평민층이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신분 의식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남녀 평등 의식의 확장과 함께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많은 여성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갑오개혁 때 추진된 사회 개혁 ⋅ 문벌에 따른 차별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고, 귀천의 구별 없이 인재를 뽑아 등용한다. ⋅ 지금까지 내려온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차별을 폐지한다. ⋅ 공⋅사노비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 연좌법을 모두 폐지하여 죄인 자신 외에는 처벌하지 않는다. ⋅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여,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에 혼인을 허락한다. ⋅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자유에 맡긴다. 〈일성록, 갑오년(1894) 6월 28일조〉 |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 변화 1890년대 후반에 독립신문은 논설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혼인 제도의 개혁, 애정과 평등한 인격에 기반을 둔 부부 중심의 가족 제도, 여성의 교육권과 사회적 활동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였다. 또, 1898년에는 서울의 북촌 부인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직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여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찬양회는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여성 통문’을 발표하였다. 찬양회는 여성 계몽을 위한 연설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여성 교육을 위해 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한 한 여성 단체는 발기문에서 “남녀의 분별은 있으나 권리는 남녀가 일반인데, 어찌 녹녹히 옛 법을 지키고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고 하여, 여성의 동등한 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개화 정책을 주장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정치 세력 |
친척이나 인척의 범죄 때문에 죄 없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는 제도 |
의식주 생활의 변화
[편집]개항 이후, 서양의 문물과 제도가 들어오면서 서양의 생활 문화도 우리의 생활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생활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의식주 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의생활에서 본격적인 변화는 양복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일부 상류층과 개화 인사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일반 남성의 복장은 예전처럼 바지와 저고리 차림의 한복이었는데, 저고리 위에 마고자와 조끼를 입는 풍습이 새로이 생겨났다.
개화기에 대부분 여성은 전통적인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서양 여선교사의 양장을 본떠 만든 개량 한복도 등장하였다. 개량 한복은 여학생의 교복이나 신교육을 받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자리잡아 갔다. 여성의 외출과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입었고, 오랫동안 여성의 얼굴을 가리던 장옷과 쓰개치마 등이 점차 사라지고 양산이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여러 가지 음식 문화도 들어왔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저와 함께 서양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중과 일부 상류층에는 커피와 홍차, 양과자와 빵 같은 식품과 서양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전해졌다.
임오군란 이후에 들어온 청나라 상인 중에서 일부는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와 만두, 찐빵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또, 청⋅일 전쟁 이후에 들어온 일본인은 초밥, 우동, 어묵, 단팥죽, 단무지, 청주 등 일본 음식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외래 음식과의 접촉에 따른 식생활의 변화가 일반 서민의 음식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그 동안 신분에 의해 규제받던 주택 문화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옥의 규모나 건축 양식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서울과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서양인과 일본인이 살게 되면서 서양식 건물이나 일본식 주택이 나타났다. 또, 관청이나 공공 건물, 학교 건물, 상업용 건물, 종교 건물 등 근대식 건물이 잇따라 세워졌다. 1890년대에 들어와 민간에서도 서양식 건축물의 이점을 살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깃과 동정이 없다. 앞을 여미지 않고 두 자락을 맞대어, 오른쪽 자락에는 단추를 달고, 왼쪽 자락에는 고리를 달아 끼워 입었다. |
동포들의 국외 이주
[편집]19세기 후반에 조선 사회에는 가난과 수탈, 자연 재해 등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에 일부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났다.
우리 동포가 맨 처음 이주한 지역은 만주와 연해주였다. 특히, 만주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만 건너면 되고, 개척할 농경지도 많았으며, 수렵이나 벌목으로도 생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1910년 무렵,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에는 한인이 20만 명을 넘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 곳으로 이주해 온 의병과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거나,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할 목적으로 한인의 이주를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동포는 두만강을 건너가 러시아 정부가 준 토지를 경작하거나 황무지 등을 개간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 연해주 곳곳으로 한인이 이주해 왔다. 20세기 초, 연해주에는 8만 명이 넘는 한인이 모여 살았다.
연해주의 한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100여 개에 이르는 신한촌을 세웠다. 이 곳에 자치 기구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다. 을사조약 이후에 연해주 지역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주 이주는 1902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하와이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대한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은 정부의 해외 취업 알선을 받아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000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는 사탕수수 농장일뿐만 아니라, 철도 공사, 개간 사업 등 고된 일을 하면서 인종 차별까지 당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다.
원래는 청나라의 영토였으나,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얻은 영토 |
[2] 일제 강점기의 사회 변화
[편집]독립 운동 세력의 분화
[편집]1919년 3⋅1 운동이 좌절된 후, 독립 운동 진영 사이에 이견이 나타났다. 이는 독립 운동의 방법과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 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립 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운동 등으로 갈라졌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독립한 다음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 세력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나 물산 장려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하였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노동 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한 계급 운동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러시아, 일본,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청년⋅지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각종 청년회, 사상 단체, 노동 운동 단체, 농민 운동 단체가 생겨났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과 노선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청년 운동, 소년 운동 등 사회⋅경제적 대중 운동의 활성화에 영향을 주었다.
모든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 |
연도 | 부문별 운동 | ||||||
---|---|---|---|---|---|---|---|
민족주의 운동 | 사회주의 운동 | 노동 운동 | 농민 운동 | 청년 운동 | 소년 운동 | 형평 운동 | |
1921 | 0 | 18 | 90 | 3 | 446 | 14 | 0 |
1925 | 1 | 83 | 128 | 126 | 847 | 127 | 99 |
1930 | 246 | 56 | 561 | 943 | 1,509 | 461 | 165 |
신간회
[편집]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 2.)
신간회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 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정우회 선언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과정상의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하게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도 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 것이다.” 〈조선 일보, 1926. 11. 17.〉 |
절대 독립이나 독립 전쟁 대신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운동 |
1929년 6월 16일, 일제가 함경 남도 갑산군 보혜면 대평리 펑퍼물에서 저지른 화전민 학살 사건 |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편집]러⋅일 전쟁 후, 일본인은 본격적으로 한국에 건너와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이는 한편,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았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켜 이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한국인 지주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얻은 부를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소작 농민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지주가 물어야 할 지세 부담까지 떠맡았고, 마름의 횡포에 시달렸다. 더욱이 소작인은 1년을 기한으로 하는 소작 계약을 강요당하여 생존권마저 위협받았다.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된 농민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나 빈민이 되거나, 광부, 화전민 등으로 살아갔다. 여기에 자연 재해를 당한 농민들은 새 삶을 찾아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로 떠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 의식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전라 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암태도 농민은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본 경찰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워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의 소작 쟁의는 소작료 인하 등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 변화와 맞물려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존의 합법적 농민 조합 대신 비합법적, 혁명적 농민 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좌절되었다.
한편, 1910년대에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1930년대에 북부 지방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 수도 빠르게 늘어나, 1943년에는 100만 명에 달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 쟁의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이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고, 노동 쟁의에 대한 통제 또한 크게 강화되었다.
지주에게서 소작지의 관리와 감독을 위임받은 사람 |
청년 운동, 여성 운동, 형평 운동
[편집]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에서 청년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여러 청년 단체가 전국에서 조직되었다. 이들 청년 단체는 각종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으며, 야학을 열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들을 가르쳤다. 또, 물산 장려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같은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 이후 청년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여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등에 대한 지원에 더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 의식도 높아졌다. 1920년대에는 여자 청년회, 부인회 등 2백여 개의 여성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 단체들은 주로 남녀 평등, 문맹 퇴치, 구습 타파, 생활 개선 등 여성 계몽과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서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등을 통한 여성 계몽 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에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신분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중은 여전히 백정 출신을 차별하였으며, 형평 운동에 반대하는 반형평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근우회 창립 취지문 인류 사회는 많은 불합리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 해결을 우리에게 요구해 마지않는다. 여성 문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 세계는 이 요구에 응하여 분연하게 활동하고 있다. 세계 자매는 수천 년래의 악몽에서 깨어나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모든 질곡을 분쇄하기 위하여 싸워 온 지 이미 오래이다. …… 우리는 운동상 실천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가 실지로 우리 자체를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분투하려면, 우선 조선 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조선 시대의 도살업, 유기 제조업, 육류 판매업 등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층인 백정의 다른 명칭 |
형은 저울을 뜻한다. 형평 운동은 백정 자신이 사용했던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는 운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변화
[편집]일제 강점기에도 인구는 늘어 갔다. 인구 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10년대 말에 국내 거주 한국인은 1700만 명 정도였다. 1930년에는 2000만명, 1942년에는 26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경성)의 인구는 1920년에 24만 명 정도였고, 1940년에는 93만 명 정도로 4배 가량 늘었다.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같은 전통 건물을 마구 헐어 내고, 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 역사 같은 관공서와 공공 시설, 공원, 학교 등을 잇따라 건립함에 따라 서울의 모습은 점차 식민지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갔다.
한편, 1930년 무렵 서울에는 10만여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은 본정(현 충무로), 명치정(현 명동), 황금정(현 을지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는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는 북촌으로 불렀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서울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백화점,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등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도시의 이중적인 모습은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많이 살던 부산,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등 개항장이던 도시 대부분이 그러했다.
조선 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면서 경성(京城)이라 고쳤고, 당시 일본 사람은 서울을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라 불렀다. |
의식주 생활의 변화
[편집]근대 문명의 유입은 의식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의생활에서는 직장인을 중심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한복을 입으면서 고무신을 신고 모자를 쓰는 방식으로 한식과 양식을 혼합하였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성은 쪽진 가르마머리를 하였으나,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 단발머리와 파마머리, 스타킹과 하이힐 등은 도시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40년대에 전시 체제가 되면서 남녀의 복장이 모두 바뀌었다. 남자는 한복이나 양복 대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전투모에 각반을 찼다. 여자는 치마 대신 일본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를 입어야 했다.
식생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10년 이후, 과자, 빵, 케이크, 카스텔라, 비프스테이크, 수프, 아이스 크림 등 서양 음식이 대중에게도 본격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 식품의 소비는 주로 도시의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일반 서민의 식생활은 형편이 사뭇 달랐을 뿐 아니라,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빴다. 산미 증식 계획 이후에 식량이 증산되었는데도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중⋅일 전쟁 후에 쌀 공출제를 실시함에 따라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서민은 잡곡밥, 조밥, 수수밥을 먹거나, 심지어는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송기떡, 콩깻묵, 밀기울, 술찌기를 먹으면서 연명하기도 하였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면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주택이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 상류층의 문화 주택, 중류층의 개량 한옥, 중⋅하류층의 영단 주택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은 사랑채가 생략되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문간에 중문이 달리고 문간방이 생기며 장식적 요소들이 가미된 도시형의 상품 주택이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문화 주택은 2층 양옥으로, 전에 없던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 등 개인의 독립된 공간이 생겨났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들어 도시민, 특히 서민의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지은 일종의 국민 연립 주택이었다.
서울 변두리에는 빈민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토막살이를 하는 사람은 1937년 서울(경성부) 총인구 70만여 명 중에서 15,000여 명에 달하였다.
1920년에 미용사 오엽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화신 백화점에 미용실을 개업해 단발머리를 보급하면서 유행했다. 단발머리에 대한 토론회가 열릴 정도로 논란이 있었는데, 신학문을 한 이들 말고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
문화 주택, 개량 한옥 같은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등장함에 따라 남녀의 주거 공간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양반가의 주택과는 달리,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는 남녀 사이의 차별이나 내외하던 관습이 그만큼 약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
맨땅 위에 자리를 깔고 짚이나 거적때기로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원시적인 움막집 |
[3] 현대 사회의 발전
[편집]인구의 변화
[편집]광복 직전의 우리 나라 인구는 2600만 명 정도였다. 1953년 휴전 이후에 출산율이 갑자기 높아져 이른바 ‘베이비 붐’이 나타났다. 1955~1960년 사이 평균 출산율은 6.3명에 달한 반면, 사망률은 점차 낮아져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55년에 남한의 인구는 2150만 명 정도였는데, 1960년에는 2500만 명을 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정부는 가족 계획 사업을 시작하여 출산율을 낮추려 노력하였다. 여기에 여성의 혼인 연령 상승, 자녀 교육비 증가, 자식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피임 확산 등으로 출산율은 점점 낮아졌다. 출산율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는 4.6명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2명으로 떨어지다가 2005년에는 1.23명으로 더욱 낮아졌다. 이러한 저출산의 영향으로 핵가족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있으며, 남녀 성차별이 점차 둔화되고 있다.
한편, 산업화의 영향으로 가족 제도의 변화와 함께 연령별 인구 구성도 달라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출산율과 사망률이 높았으나, 1990년대에는 출산율과 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안정적인 인구 구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낮은 출산율이 계속 이어지고 인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고령 사회와 출산율 감소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편집]1960년대에 들어와 경제 개발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우리 나라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196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촌 사람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나 신흥 산업 도시로 나갔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서울과 부산, 나중에는 영남의 신흥 공업 도시의 인구가 급팽창하였다. 반면에, 농업 위주의 다른 지역 인구는 크게 줄어 지역적 불균형을 낳았다. 또, 전체 인구 중에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2005년에 80%를 넘어서 매우 높은 수치를 보여 주고 있다.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 교통, 실업, 교육, 빈민, 공해 등 여러 사회 문제를 낳았다. 이에, 정부는 신도시 건설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 지하철 건설과 도로망 확충, 의무 교육 확대, 사회 복지 제도 도입, 환경부 신설 등 각종 정책을 마련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로 이주한 가족은 대부분 핵가족의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은 크게 약화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다. 여기에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물질 만능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적지 않은 사회 문제를 낳았다.
농촌 사회의 변화
[편집]1950년부터 시행된 농지 개혁으로, 땅이 없던 농민은 비록 적은 농토이긴 하지만 자기 땅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농촌은 과잉 인구와 만성적인 빚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후, 정부는 4H 운동을 확대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는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여 농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중반에 다수확 품종의 개발로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고, 농민은 원예, 축산 등 영농의 다각화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농촌과 도시와의 소득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교육과 일자리 등을 찾아 젊은층이 도시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시작된 대외 경제 개방 정책은 농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곡물에서 가공 식품 원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농산물 수입이 개방됨으로써 농촌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우리 나라도 다른 나라에 농수산물 시장 개방에 이어 쌀 시장까지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농촌 지원 대책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농촌 인력은 갈수록 고령화하였다.
1990년대 이후, 농민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지에서 농민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 농가 부채 해결 등을 요구하는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세기에 미국에서 시작된 농촌 지역 운동으로,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s), 건강(health)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이다. |
노동 계층의 확대와 노동 운동
[편집]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에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970년 11월에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살라 암울한 노동 현실을 사회에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 종교계 등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생존권 쟁취 운동, 노동 조합 설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노동자의 노동 3권을 크게 제한하여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다. 급기야 1979년에 야당(신민당)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YH 무역 여성 노동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기에도 노동 운동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 공업화의 진전으로 대규모 사업장이 등장하고, 노동자의 수도 크게 늘어났지만, 노동자는 노동 조합조차 제대로 조직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노동 조합이 새로이 결성되었다. 1991년, 정부는 국제 노동 기구(ILO)에 가입하여 국제 수준의 노동 규칙을 따르고자 하였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국제 통화 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되면서 노동자의 대량 실직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조 조정에 따른 실업이나 노사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가발 생산 업체인 YH 무역이 1979년에 폐업하자, 종사자들은 정상화를 요구하며 야당인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농성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나, YH 사건은 유신 체제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
시민 운동의 성장
[편집]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로 시민 운동 단체(NGO)가 많이 늘어났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 냉전 종식에 따른 이데올로기 대립의 퇴조, 중산층의 형성, 사회의 다양화, 자연 생태와 환경의 위기 심화 등이 시민 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온 것이다.
시민 운동 단체는 사회⋅경제의 민주화와 ‘삶의 질’ 향상 등 사회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 국가 권력의 부패와 권력 남용, 불투명한 기업 운영, 정부⋅자치 단체나 기업의 환경 파괴 등을 감시하는 활동을 폄으로써 정부와 기업에 대한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의 본격적인 전개에 따라 국제, 경제, 환경, 노동, 통일 등의 문제도 국제화되었다. 이에, 관련 시민 단체들은 국제적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또, 여성, 빈민층, 외국인 노동자 등 소수자, 약자를 보호하려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정부 간의 협정이 아닌, 민간 단체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비정부 국제 조직 |
의식주 생활의 변화
[편집]광복이 되자, 사람들은 일제의 강요로 입었던 국민복과 몸뻬를 벗어 버리고 한복을 다시 입었다. 6⋅25 전쟁 후에 여성은 질기고 오래 가는 나일론으로 만든 블라우스를 입었고, 남성은 옷감이 부족하여 군복을 물들여 입기도 하였다. 1961년에 군사 정권은 ‘신생활 재건 운동’을 추진하면서 남성은 작업복 스타일의 ‘재건복’을, 여성은 ‘신생활복’을 입도록 권장하였다.
한편, 여성의 복장은 유행에 따라 변하였다. 1950년대에는 플레어스커트, 타이트스커트, 맘보바지 등이 유행하였고, 1960년대에는 치마 길이가 짧은 미니스커트와 바지 통이 넓은 판탈롱이 등장하였다. 1970년대에 양장은 미니, 맥시, 판탈롱, 핫팬츠 등 다양한 모델을 선보였다. 이런 가운데 젊은층 사이에서는 통기타와 팝송을 상징으로 하는 청년 문화의 복장으로 청바지와 장발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
1970년대에 여성복이 먼저 맞춤복 시대에서 기성복 시대로 넘어갔고, 남성복도 1980년대에 이후 기성복 시대로 넘어갔다. 1980년대 들어 캐주얼웨어가 큰 인기를 끌었고, 스포츠, 레저용 의류의 소비도 크게 늘었다. 컬러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의복의 색상이 더 화려하고 다채로워졌다.
광복 이후 인구의 빠른 증가와 6⋅25 전쟁 후 베이비 붐 등으로 식량난은 계속되었다. 이 때, 미국에서 들여온 잉여 농산물은 밀가루가 주종을 이루었고, 정부는 분식, 보리 혼식 등을 장려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주식인 쌀의 자급은 달성되었으나, 오히려 밀, 옥수수, 콩 등의 수입은 더욱 늘어났다. 1980년대 이후에는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밀가루 음식 소비가 부쩍 늘어남에 따라 쌀 생산은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 또, 서구화된 식생활 습관이 일반화되어 가공 식품과 동물성 식품의 섭취량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런데 동물성 식품의 증가는 영양의 불균형, 영양 과잉 상태를 초래하여 생활 습관병과 비만 등의 문제를 낳았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1990년대에는 이후 안전하고 건강한 식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농산물에 남아 있는 농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무공해 유기 농산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광복에 이어 6⋅25 전쟁으로 주택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휴전 이후, 파괴된 주택을 복구하고자 ‘재건 주택’이 지어졌다.
1964년 서울 마포에 아파트가 처음 조성되면서 아파트는 도시의 새로운 주거 형태로 등장하였다. 1970년대 아파트 단지가 강남과 잠실 등지에 건설되면서 도시의 주거 문화도 빠르게 변화하였다. 반면에, 서울의 높은 지대와 변두리에 ‘달동네’라는 빈민촌이 생겨났다.
1980년대 서울과 수도권 도시, 지방 대도시 곳곳에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달동네나 판자촌도 재개발되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였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려들어 주택난이 계속되자, 1990년대에 정부는 서울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지방 중소 도시까지 아파트가 공급되면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을 넘었다.
전체 곡물 자급률은 1977년의 65%에서 1986년에는 45%로 떨어졌다. |
유엔 한국 재건단(UNKRA)의 원조로 건립된 주택. 9평 정도의 흙벽돌집이다. |
심화 과정
[편집]- 의생활의 변화
① 1898년에 장옷을 폐지하고 대신 우산을 지니도록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과 여학생은 장옷을 벗고 활동하였다.
② 1930년대에는 양복과 양장을 입는 사람이 늘었으나, 전시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일제는 국민복과 몸뻬를 입도록 강요하였다.
③ 1950년대에는 구호 물자로 인해 한복에서 양복으로 빠르게 변화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양복의 착용이 보편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성복이 정착 단계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개성 있는 옷을 입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우리 나라 의생활이 시기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해당 시기의 사진 자료를 찾아서 비교해 보자.
- 위와 같은 의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사회적 요인에 대해 토론해 보자.
- 시대별 인구의 변화
연대 | 1910 | 1920 | 1930 | 1940 |
---|---|---|---|---|
일본인 | 17만여 명 | 35만여 명 | 50만여 명 | 75만여 명 |
중국인 | 1만 5천여 명 | 2만 4천여 명 | 6만 7천여 명 | |
서양인 | 1,300여명 |
연대 | 1945 | 1960 | 1970 | 1980 | 1990 | 2000 | 2005 |
---|---|---|---|---|---|---|---|
총인구 | 16,136 | 25,012 | 32,241 | 38,124 | 42,869 | 47,008 | 48,294 |
서울 인구 | 901 | 2,445 | 5,686 | 8,516 | 10,473 | 10,078 | 10,033 |
- 일제 강점기 우리 나라에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 위 도표에서 1960년대에 인구가 늘었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인구 증가 추세가 줄어든 배경을 조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