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운석 장면 부통령 영결식 유진오 전 고려대학교 총장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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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의 부통령, 제2 공화국의 국무 총리로서 국가의 최고 지위에서 겨레를 영도하시던 운석 장면 선생이 1966년 6월 4일 67세를 일기로 하여 화평히 세상을 떠나시니 선생의 인품과 공헌을 추모 존앙하던 3천만 겨레는 양떼가 목양자를 잃은 듯, 허전하고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영전에 삼가 추모의 몇 말씀 드리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우리 나라에서는 관도(官道)를 그저 개인 영달의 길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선생은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행운아이셨습니다. 구차를 모르는 가정에서 태어나 순조롭게 인생의 준비 과정을 마치시고 오래 양심적인 교육가로 계시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정계에 투신한 뒤로는 선생의 행로는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한몸에 지니신 듯 선생이 손을 대시는 일에는 언제나 빛나는 성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건국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된 국가를 열국에 승인케 하는 중책을 맡고 선생이 유엔 총회에 파견되시자 유엔은 압도적 다수로써 대한 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하였습니다.

공산 괴뢰의 6‧25 남침으로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주미 대사로서의 선생의 공로를 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유엔군이 그렇게도 신속하게 정의의 군대를 우리 나라에 파견시킨 배후에는 선생의 민활 적절한 노력이 있었음을 의심할 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951년 봄 선생이 국무 총리에 지명되시자 전시하 국회는 거의 만장 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선생의 국무 총리 임명을 인준하였던 것 아닙니까.

1956년 해공 신익희 선생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셨을 때에는 해공 선생이 선거 운동 도중에 별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야당 입후보자로서 당당하게 부통령에 당선되셨던 것입니다.

4‧19로써 독재 정권이 퇴장하자 정권은 물이 높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흐르듯 민주당의 최고 영도자로서의 선생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 비록 5‧16으로 민주당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선생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다 누리신 셈입니다.

운석 장면 선생!

그러나 선생의 일생을 이렇게 영예로 가득 찬 화려한 것으로 보는 것은 시정 속물배의 진부한 관찰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선생 자신의 권위에 가장 어긋나는 일인 것입니다.

선생은 영리를 추구하는 속세적 정치인이 아니라, 고도에서 생을 시작하여 고도에서 생을 마치신 분입니다. 세속적 영달이 선생께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영웅도 위인도 되기를 원하지 않던 분이 선생이셨다고 선생의 한 측근자는 말하였는데, 이것은 즉 선생이 지도자연(然)하여 남의 우위에 서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전능적인 사도로서 남에게 봉사하기를 염원하셨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일제하의 선생의 생활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해방 후 독립 국가의 지도적 지위에서 선생이 외관상 화려한 영도적 길을 밟아 가시던 그 시절에도 선생의 생활은 또한 희생과 봉사의 그것이었습니다. 구도자로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해 버리면 그만이겠습니다만, 사욕에 날뛰는 아래위 틈바구니에 끼어 한 가닥 양심의 순교를 하려던 선생의 심경이 오죽 고통스러웠을까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북했기에 선생은 국무 총리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야당을 조직하셨겠습니까.

유수의 신세나 다름없던 부통령으로서의 생활을 어떻게 영달로 보겠습니까.

민주당 정권의 수반으로서 재직하셨던 9개월의 생활도 영달과는 거리가 먼 격무와 고뇌의 연속이었습니다.

반도 호텔 맨 위층 방으로부터 매일같이 벌어지는 데모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선생의 두 어깨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앞날의 걱정으로 무겁게 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민주당 정권 시에 우리 사회의 혼란은 오로지 선생의 온유한 성격의 소치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연천한 이 나라 민주 정치가 연륜을 거듭하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역사적 과정이 아니었겠습니까?

힘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방도를 선생으로서 모르셨을 리 없지만 선생은 민중의 양식을 믿었기에 혼란 속에서 질서가, 원심적 분해 속에서 구심적 핵심이 반드시 저절로 형성되고 나타날 것을 믿으셨기에 그날이 오기를 참고 기다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운석 장면 선생!

그러나 선생은 이미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나는 더 말하려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정치가로서의 선생의 포부는 좁히었을망정 선생의 그 온유, 총명, 성실, 정직하고 거룩한 모습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는 말씀을 드려 두려 합니다.

솔로몬의 영화는 단명하지만, 구도자의 성실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영원히 우리들의 머리 위에 빛나고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위대하고 선량한 민주 시민 운석 장면 선생, 벅찬 과업을 눈앞에 놓고 있는 약한 우리에게 언제나 그 따뜻한 손길을 뻗혀 주소서.

영령이시여, 편안하게 고요히 쉬어지이다.


1966년 6월 12일

시민대표 전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

출처[편집]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549,550,551,55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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