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밤/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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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無情)(李光洙)에서

계월향(桂月香). 아직도 새벽빛이 아니 보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찌찌 울던 영혼(靈魂)을 거둬 안고 독수리 나래 같은 어떤 커다란 힘 가진 짓을 바라서 안기려 헤매칩니다. 그때 대동강(大同江) 가에서 옷깃을 바람에 펄펄 날리면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던 패성중학생(浿城中學生)이 한번 다녀간 뒤로 강(江)물 위에 떠도는 노래라고는 아침저녁으로 물동이 인 색시의 띄워놓고 가는 갈잎소리와 세상(世上)을 슬퍼 한탄(恨歎)하는 창녀(娼女)의 뿌리고 가는 눈물소리만 고요히 수류(水流)를 거슬릴 따름이외다. 구태여 노래를 찾는다면 날마다 능라도(綾羅島) 기슭을 스치는 얼음장 속의 아침 햇살이 봉황(鳳凰)을 물어뜯듯 달려드는 것과 또 한 가지 청류벽(淸流壁)을 감도는 초(初)저녁 달잡이 어사(漁師)의 그물 뿌리는 자취가 남아 있는가 합니다.

“남 다 자는 속에 나만 혼자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하던 그 힘 있는 노래는 영영(永永) 구천(九天)에 스러지고 오직 몰락(沒落)하는 옛날의 도읍(都邑)을 조상(弔喪)하는 애조(哀調)만을 띤 만가(挽歌)뿐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아하! 애닯어라 지나간 옛날이여” 하고 부를 때마다 청춘(靑春)의 붉은 마음은 그저 황량(荒凉)한 폐허(廢墟)로 화(化)하여집니다. 재 속에서 푸드득하고 나래를 털고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사(死)에 직면(直面)한 백조(白鳥)의 떼와 같이 우리 앞에는 오직 난세(亂世)의 노래가 남아 있는 줄 압니다. 아, 이제는 눈물조차 아니 내립니다, 양창곡(楊昌曲)을 그리워하고 탁문군(卓文君)을 꿈꾸던 옛날의 향기(香氣)로운 눈물은 말라지었습니다, 이제는 아마 온통 온몸이 화석(化石)같이 되어, 쓰고 단 것을 다 잊어버려지겠지요. 아, 나는 차라리 돌부처 되렵니다. 추우나 더우나 가만히 눈감고 국사당(國師堂)에 앉았는 돌부처님이 되렵니다. 오늘은 그대 손이 분향(焚香)내나 맡았거니와 그 내일(來日)은 또 누구에게서,

“에그 영채야 네나 내나 왜 이런 조선에 낫겠니?!”

박영채(朴映彩). 그럼, 어디에 났으면 좋았겠소, 짜작돌밭에 피는 개나리꽃이 귀엽다면 더 귀여웁지요, 울지를 마세요. 월향 언니의 뜨거운 눈물이 이 마음을 적시면, 나도 언니같이 봄이 와도 꽃필 줄 모르는 마른 고비 될 터인데, 내야 아무래도 그늘에 피는 봉숭아꽃, 핀대도 보아줄 이조차 없는 속절없는 꽃이지만, 그래도 아무 때나 고이고이 피었다가 그리운 님을 맞을라오. 님도 안 오고 봄비도 아니 내려준다면 그대로 피지도 말고 지렵니다. 향기로운 냄새나 뒷날 여러 동무에게 보내고저,

“언니, 가지를 마세요, 네? 세상이 아무리 쓰리다 해도 그래도 아까운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두!”

이형식(李亨植). 무릎을 꿇고 설게 우는 소녀(少女)들이여, 울음을 그치세요, 그대들이나 우리네나 다 같이 길 걷는 길손들이외다, 지향(指向)도 없는 머나먼 길을 허덕이면서 걸어가는 외로운 길손들이외다. 냇가에서 비바람을 만나 외배를 붙잡고 저어가는 어려운 처지(處地)에 놓인 동무들입니다, 진흙비에 온몸이 젖구요, 돌개바람에 수족(手足)이 식어갑니다. 우리는 이 빗살과 바람을 피합시다. 소녀(少女)여, 내 품에 안기세요, 청춘(靑春)아, 색시를 붙잡아라. 파선(破船)만 안되고 목숨만 붙어 있노라면 저쪽으로 가지겠지요. 아, 새벽이 와도 우리네 맞을 새벽, 어두운 밤이 와도 우리네 허덕일 밤, 주인도 없고 이끄는 자(者)도 없는 우리네 길은 험(險)하기도, 모험(冒險)에 가까운 일이랍니다. 아하, 어여쁜 소녀(少女)들이여, 그래도 가기는 가십시다. 넘을 산(山)이 많아도 어떻게 넘을까 말고 먼저 넘어봅시다. 설마 나선 길이니 되돌아서기야 하리까.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개나리꽃도 한때는 봄이 와주는 법(法)이라고, 어서 길을 떠납시다. 새벽길을 떠납시다, 모든 벗들이여 어서 네?

신우선(申友善). 쫄깍쫄깍 울지를 말게나. 자네가 부자집 사위 되더니 우리네도 사랑나라의 자녀(子女)들이 될 터인데!

김선형(金善馨). 그래요! 삼랑진(三浪津)서 음악회(音樂會) 때엔 여러분이 뜨거운 눈물을 흘려주지 않았어요. 보채는 아기에 국 한 그릇 말아주라고요. 우리네도 이렇게 안타까워서 발버둥치느라면 아무리 냉랭(冷冷)한 ‘도덕(道德)’이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붙여주겠지요. 아무리 모색스럽고 무정(無情)한 세상(世上)이라도 가슴을 벌려 “인제 오느냐” 하고 반가히 안아주겠지요. 어서 걸읍시다. 동만 트면 어련할라구. 왼길로 가거나 오른길로 걷거나, 새벽길을 향(向)하야 갈 바에는 마찬가지니, 어서 바삐바삐 떠납시다. 짐을 꾸리세요, 예쁜 젊은이들이여, 벌써 동쪽이 우스러히 터 오르는데!

―“얘들아, 이불을 걷어라 어서 어서!
손님들이 오신단다
새벽이란 손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