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봄은 어느 곳에
벌써부터 신문(新聞)에는 봄 「春」자(字)가 푸뜩푸뜩 눈에 띠운다. 꽃송이가 통통히 불어 오른 온실(溫室)화초(花草)의 사진(寫眞)까지 박아내서 아직도 겨울 속에 칩거(蟄居)해 있는 인간(人間)들에게 인공적(人工的)으로 봄의 의식(意識)을 주사(注射)하려 한다. 노염(老炎)이 찌는 듯한 학기(學期) 초(初)의 작문(作文) 시간(時間)인데 새까만 칠판(漆板)에 백묵(白墨)으로 커다랗게 쓰인 「秋」자(字)를 바라다보니 그제야 비로소 가을이 온듯 싶더라는 말을 내 질녀(姪女)에게 들은 법한데, 오늘 아즘침에 체부가 가져 온 「어제 오늘 서울은 완연한 봄이외다」 라고 쓴 편지의 서두(書頭)를 보고서야 창(窓)밖을 유심(有心)히 내다 보았다. 먼 산(山)을 바라다보고 앞 바다를 나려다 보나 아직도 이 시굴에는 봄이 기어든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산(山) 봉우리는 백설(白雪)을 인채로 눈이 부시고 아산만(牙山灣)은 장근(將近) 두달 동안이나 얼어 붙어 발동선(發動船)의 왕래(往來)조차 끊졌다. 그러다가 요새야 조곰 풀려서 성앳장이 떠밀려 다니는 것이 보기만해도 무시무시한데 어제밤 눈바람에 시달리던 뜰앞에 꽃 나무에는 떨어지다 남은 잎새가 앙상한 가지에 목을 매어 단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돼지 울이 위에 옹숭거리고 앉은 까치 두어 마리도 털이 까아칠한 것이 아직두 추위를 털어 버리지 못한듯.
그러나 어쩐지 봄은 내 신변(身邊)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오줌 장군을 짊어진 이웃집 머슴들이 보리밭 으로 출동(出動)하고 땅 바닥의 잔설(殘雪)이 햇살이 퍼지기가 무섭게 녹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띠어서 그런지, 아무튼 앞으로는 봄이 나와 친분(親分)이 두터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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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바른 책상(冊床)머리에 정좌(靜坐)하여 수년(數年)전(前) 출판(出版)하려다가 붉은 도장(圖章) 투성이가 되어 나온 시집(詩集)을 몇 군데 뒤적이는데 「토막생각」이란 제목(題目)아래에 이런 구절(句節)이 튀어나왔다.
「오관(五官)으로 스며 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팔도(朝鮮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그렇다. 삼천리(三千里)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는지 모른다. 사시(四時)장철 심동(深冬)과 같이 춥고 침울한 구석에서 헐벗은 몸이 짓눌려만 지내는 우리 족속은, 봄을 잃은 지가 이미 오래다. 아무리 따스한 햇발이 이 땅 위에 내려 쪼이고 풀솜 같은 바람이 산천초목(山川草木)을 어루만져도, 우리는 마음의 봄과 등지고 사는 것이 엄연(儼然)한 사실(事實)이다. 우리의 감각(感覺)은 새 봄을 새틋이 느끼고 질겨 하기에는, 목석(木石)과 같이 무디어진 것이 또한 사실(事實)임에야 어찌 하랴.
「불꺼진 화로(火爐)를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 내듯이
식어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피릿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엉덩춤부터 추려는 것도 가소(可笑)로운 일이어니와 나지 않는 춘흥(春興)을, 억지로 불러 일으키려는 자(者)도, 가엾은 어릿광대다. 작별(作別)없이 지나간 청춘(靑春)은, 방정맞은 소조(小鳥)와 같이 한번 앉았던 가지(枝)로 다시 돌아올줄 모르고, 성냥불 처럼 확하고 켜졌던 정열(情熱)은 재(灰)가 되고 먼지로 화(化)하여 자취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時節)임으로써, 빛갈 없이 보낸 지난 날이 더욱 그립고 정열적(情熱的)이었던 그 시간(時間)이 야속하게도 짧았기 때문에, 싸늘한 잿무더기에다가 다시 한번 불을 피어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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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혹시나」 하고 새 봄의 맥박(脈搏)을 짚어 보려 한다. 일부러 나의 청춘(靑春)을 조상(弔喪)ㅎ지 않으려고 억지로라도 우리의 환경(環境)은 비관(悲觀)ㅎ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졸시(拙詩)에 이러한 끝 구절(句節)이 있기 때문이다.
「몇 백년(百年)이나 묵어서
구녁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 엄이 돋아 나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 줄이야
파보지 않은들 모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