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적권세심기
마당에 엿장수가 왔다. 가윗 소리를 들은 어린 놈이 귀가 번쩍 띠어서 사랑방으로 화닥닥 뛰어 들었다.
「아버지 엿장수 왔어」
「응」
「나 엿 사줘」
「응응」
원고(原稿) 쓰기에 몰두(沒頭)한 아비는 코대답만 하니까 어린 놈은 대들어 아비의 머리를 꺼둘르고 붓을 빼앗어 던진다.
「가만 있어 사주께」
하면서도 아비는 무슨 혼신(魂神)이 씨운 사람처럼 붓을 집어 들고 쓰던 글을 계속(繼續)하려 한다.
엿장수는 바루 창(窓)밑까지 와서 찔그렁 쩔그렁 가윗 소리를 낸다.
어린 것은 그만 떼가 나왔다.
「어서 사줘. 어서어서 왜 엿장수 오면 사준댔지」
재촉이 성화 같다가 나중에는 발버둥질을 치고 몸부림을 땅땅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붓을 먼지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은 물론(勿論) 책상설합을 열어 보고 안방으로 건너가, 머릿장, 경대(鏡臺) 설합까지 들들 뒤져도 일전(一錢) 한 푼이 나오지를 않는다.
「아아니 일전(一錢) 한 푼이 없어?」
나는 화가 더럭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십이전(十二錢)밖에 없던거 엊저녁에 석유(石油) 사지 않았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심청 사나운 엿장수는 대문간(大門間)까지 와서 엿 목판(木板)을 열어 뵈는데 어린 것은 손고락을 물고 드려다보다가 그만 비쭉비쭉 울기를 시작한다.
「내 내일 장에 가서 과자 사다주께 울지 마, 울지 말어」
달래도 타일러도 어린 것은 말을 아니 듣는다. 아비는 정말 골딱지가 나서
「예에라 요눔의 자식!」
하고 우는 놈의 귀퉁이를 쥐어 박았다. 어린 것은 그만 통곡(痛哭)이 나왔다. 아내는
「동냥도 안주고 쪽박 깨뜨려 보낸다더니 엿 한 푼어치 못 사주면서 그 애가 뭘 잘 못했기에 손찌검까지 한단 말요」 하고 자식 역성을 뿌옇게 한다. 게다가 젖 떨어진 둘쨋 놈은 영문도 모르고 귀가 따갑도록 울어싸서 집안은 그만 난가(亂家)를 이루었다.
- ◇
엿장수는 무색(無色)해서 엿 목판(木板)을 짊어지고 집 모퉁이로 돌아 갔다. 어린 것을 무릎 위에 않치고 눈물을 씻겨주며 꾀송꾀송 달래는 아비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 아무튼 솔 붙이고 살림을 하는 집안에 단 일전(一錢) 한 푼이 없어 소동(騷動)을 일으킨다는 것은 스스로도 곧이가 들리지 않거니와 생활(生活)의 책임(責任)을 진 소위(所謂) 가장(家長)으로서의 위신(威信)과 면목(面目)이 일시(一時)에 땅에 떨어진 생각을 하니 분(憤)하기 짝이 없다.
이놈의 현실(現實)에서 서투른 붓 끝을 놀려 호구(糊口)를 하려는 것도 애당초에 망녕된 생각이어니와 빈약(貧弱)한 머릿속을 박박 긁고 때로는 피를 쥐어짜듯 해서 창작(創作)을 한것이 겨우 담배 값 밖에 아니될 때 책상(冊床)이고 잉크병(瓶)이고 오지끈 아지끈 바수어 버리고 싶다. 그러면서도 청빈(淸貧)한 문사(文士)로서의 자존심(自尊心)을 가지려는 염치(廉恥)가 개를 보기도 부끄러운 때가 있다.
「반소식(飯蔬食) 음수(飲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이라고 한 이천년(二千年) 전(前)의 안연(顔淵)의 얼굴이 보고 싶다. 문학(文學)도 예술(藝術)도 다 귀찮고 발바닥만 핥고도 산다는 곰(熊)의 신세(身勢)가 부럽다. 무엇보다도 공기(空氣)만 마시고 냉수(冷水)만 먹고도 경변(硬便)을 누는 재조(才操)를 배우고 싶다.
- ◇
없거던 씻은듯 부신듯이 없거라. 문자(文字)대로 「적빈여세(赤貧如洗)」함이 오히려 뱃속이나 편(便)할는지 모른다. 더러운 재물(財物)이 덕지덕지 붙은 것보다는 책상(冊床)머리에 두손 싹싹 부비고 앉은 사람이 오히려 천공해윤(天空海潤)의 심경(心境)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울지마 우리 착한 애기 울지마, 이것 써 보내서 돈 오거들랑 과자 사주께. 미루꾸 사주께 응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