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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금융·경영/금융경제 현황/주요 국제통화기구/IMF(국제통화기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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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설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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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立-發展

국제통화제도의 개혁에 관한 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1943년 4월 영국정부가 발표한 국제청산동맹안(Proposals for an International Clearing Union), 일명 케인스안과 동년 7월에 미국정부가 제시한 국제환안정기금초안(A Draft for an International Stabilization Fund), 일명 화이트(White:당시 미재무성 차관보)안에 실질적인 논의가 집중되었다. 화이트 안 및 케인스 안 모두가 지향하는 목표는 진보적이었으며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 두 안은 효율을 강조하는 자유무역의 우월성을 옹호하였지만 주권국가의 중요 국내경제문제인 고용과 수요확대의 필요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국제수지상의 불균형이 적절한 외환공급과 외환제한조치, 무역거래상의 차별행위, '디플레정책(긴축정책)' 혹은 국내실업을 야기시키지 않고 원활히 조정되어 일반적으로 안정된 환율체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정책을 조정하는 데에 목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다자주의와 무차별주의를 보다 강조하였으며, 국제수지적자 상황 아래서 국내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각국정부의 독자적 정책추구를 허용하는 데 우려를 표명하였다. 당시 거대한 채권국이었던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내유효수요를 조절하여야 한다는 채무국의 의무사항을 강조한 반면, 영국안은 채권국도 국제수지 흑자를 축소하여야 할 동일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안의 차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케인스안이 제시한 국제청산동맹은 회원국의 '쿼터(출자할당액:금 또는 회원국 통화로 구성'에 제약받지 않고 금과 일정배율의 등가관계를 가진(그러나 조정가능한) '방코르(bancor)'라는 국제통화를 발행할 수 있게 하고, 아울러 채무를 진 회원국에게 당좌대월(overdraft)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신용참조(credit creation)기능이 부여되어 있어 세계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화이트 안이 제의하는 국제환안정기금은 회원국의 쿼터로 기금(fund)을 조성하고 국제수지상의 위기에 직면한 회원국에 대한 자금지원규모를 당해국의 쿼터 범위 내로 한정함으로써 신용창조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또한 케인스안은 환시세의 탄력적인 운용을 강조하고 있어 변동환율제를 선호하고 있었으나, 화이트 안은 환율의 변경에 대하여 엄격한 제한규정을 설정함으로써 고정환율제도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입장차이는 브레튼우즈 체제(1945∼37)의 설립논의에 반영되었다.

1945년 12월 29일 29개국이 IMF 헌장인 협정문을 조인함으로써 설립이 확정된 IMF는 화이트안이 그 모체가 되었다. 1947년 3월 1일 최초로 업무수행을 시작한 IMF는 국제통화제도의 본질적 기능인 국제유동성(international liquidity)의 공급과 국제수지조정을 금환본위제(gold exchange system), 고정환율제(fixed exchange rate system) 및 기금인출제(fund drawings)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IMF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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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組織

IMF는 최고의결기구인 총회(Board of Governors)와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에 의거

IMF의 통상업무를 수행하는 상무이사회(Executive Board) 및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 IMF의 일반업무를 관장하는 집행부로서 총재와 1명의 부총재 그리고 이들을 보좌하는 실무기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총회는 IMF의 중요정책사항을 결정하는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각 회원국이 임명한 위원 (Governor)과 대리위원 (Alternate Gove-rnor) 각 1명씩으로 구성된다. 총회는 매년 1회 세계은행그룹과 합동으로 개최되고 있다(연차총회). 연차총회는 제7차 회의(1952년) 이후 본부소재지인 미국 워싱턴에서 2회 연속개최 후 미국 이외의 회원국에서 1회 개최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1985년에 제40차 연차총회를 개최한 바 있다.

상무이사회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 5대출자국이 각각 1명씩 지명한 5명의 지명이사(Appointed Director) 등 모두 24명으로 구성되며 의장은 총재가 맡는다. 상무이사(Executive Driector)는 매 2년마다 연차총회에서 지명 또는 선출되며, 상무이사는 자신을 대리할 수 있는 대리이사(Alternate Director) 1명을 지명하여야 한다. 중국, 러시아 및 사우디아라비아 등 지명이사 임명국가는 아니나 단독그룹을 형성하여 자국인의 상무이사와 대리이사를 지명한다.

총재(Managing Director)는 상무이사회에서 선출되며 관례적으로 유럽국가 출신인사가 선임되어 왔다. 총재는 IMF의 최고 관리책임자로서 상무이사회의 지침에 따라 IMF의 업무운영 전반을 지휘·감독한다.

잠정위원회는 1972년 7월에 구성되어 국제통화문제를 다루어 왔던 20개국 위원회(Committee of Twenty)가 해체되어 1974년 10월에 새롭게 출범한 총회의 자문기관이다. 잠정위원회의 주요 업무는 국제통화제도의 관리와 감독 및 대개도국 재원이전에 관한 검토, 상무이사회에 의해 제의된 IMF 협정안 개정안 심의, 국제통화제도를 위협하는 긴급사태에 대한 대책안 강구 등이다. 선진국과 개도국들은 잠정위원회에 참석하기 전에 각각의 공동입장수립을 위하여 G-10 재무회담 및 G-24 재무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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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遷過程

IMF 체제는 금과 미국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통화제도였다. 협정내용에는 미국달러화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한다는 명문이 없었지만, 발족 당시 미국달러화만이 교환성(convertibility)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러화가 국제통화제도의 기축통화로 선택되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결과 전세계 금의 대부분이 미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방대한 금준비를 배경으로 1934년 이래 금 1온스를 35달러로 태환해 주는 원칙을 지켜왔다. 이러한 금과 달러간의 교환성보증으로 인하여 외국정부는 금과 함께 달러를 대외거래준비로 보유하게 되었다.

발족 당시 예상을 훨씬 웃도는 달러화부족으로 IMF체제는 부득이 개점휴업상태에 있었는데, 이를 대신하여 미국은 마셜 기획(Marshall plan) 등을 통하여 국제통화인 달러를 공급함으로써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리하여 전후의 통화제도는 형식적으로는 IMF가 중심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금과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금환본위제도였다.

이 체제는 달러가 강력했던 194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그 전성기를 맞았으나 1960년대 들어서면서 달러불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본래 IMF 체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성장속도나 인플레이션율이 서로 다른 나라간에 고정환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고, 국제유동성(international liquidity) 확보와 달러화의 신뢰도확보라는 상호모순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1960년과 1968년을 전후하여 일부국가들이 미국에 대하여 달러의 금태환을 요구하였고, 또 일부국가들은 런던의 금시장을 통해 달러를 금으로 전환하였으며, 민간부문에 의한 달러와 금과의 투기적 거래가 유발됨으로써 국제 통화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통화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IMF는 특별인출권을 창출하여 유동성을 공급하고 국가간 협력을 통한 금풀제와 금의 이중가격제 등을 실시하여 달러화의 국제신뢰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달러화는 국제적 신뢰도를 회복하지 못한 채, 1971년 8월 닉슨 행정부는 금태환중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닉슨 행정부의 금태환중지선언 이후 다시 고정환율제도를 회복하고자 달러화를 8.57% 평가절하하고, 과거에는 기준환율이 1% 수준에서 제한하였던 환시세의 변동폭을 2.25%로 확대하는 조치를 골자로 하는 스미스소니언 협정(Smithsonian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스미스소니언 체제가 출범한 지 6개월 만인 1972년 6월, 영국은 잇따른 파운드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스미스소니언 체제를 이탈하였다. 뒤이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이중환율제를 택하게 되었다. 또한 투기자본이 마르크화와 엔화에 집중되어 달러화의 시세는 계속 하락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1973년 10%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EC 국가들은 공동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게 되었다.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게 된 것은, 첫째 기본적으로 고정환율제도 아래서는 유동성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가격의 고정으로 금생산이 감소한 반면, 달러화의 공급증대는 미국의 국제수지적자의 확대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미달러화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의 저하도 제도변경에 한몫을 하였다. 미국의 국제수지적자가 지속됨으로써 미국의 대외준비(금)가 감소하여 달러 보유자들이 달러가치에 불안을 느끼고 금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요인으로는 고정환율제도에서는 국제수지의 조정기능이 미약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적자국은 대외신용도 저하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평가절하를 기피하였고, 흑자국은 절상에 대한 의무감이 없었다. 또 평가조정도 IMF와 협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대외불균형에 직면하여 신속한 평가조정이 곤란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달러화에 연동된 고정환율제도가 와해된 이후, 각국은 자국의 경제여건과 필요성에 따라 다양한 환율제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처하여 IMF는 1974년 6월 '변동환율운용지침'을 설정·운영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새로운 국제통화질서가 수립되어 국제통화제도는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킹스턴 체제(Kingston system)로 넘어가게 되었다. 킹스턴 체제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현존하는 통화체제를 인정한 것이며 새로운 국제통화제도를 향한 과도기적 체제라 할 수 있다. 킹스턴 체제에서는 회원국에게 각국의 경제여건에 적합한 독자적인 환율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가가 실시하고 있는 변동환율제도를 인정하였다. 또한 금의 공정가치가 폐지됨으로써 가치척도로서의 금의 역할이 사라지고 대신 SDR이 그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 SDR의 국제통화로서의 기능과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 사용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한편 킹스턴 체제에서는 회원국의 국제수지불균형문제가 국제통화체제의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보고, IMF의 국제수지조정 지원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IMF 신용을 크게 확대하고 이용조건도 완화하였다.

변동환율제도는 1973년 이후 5, 6년 동안은 순조롭게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흑자국인 일본과 서독의 통화는 강세를 보였으며, 미국의 통화는 약세를 보여 변동환율제 본래의 의도대로 비교적 잘 운용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이르러 이러한 질서에 변화가 생겼다. 1979년에서 1985년에 이르는 기간 중 흑자국인 일본과 서독의 통화는 약세를 보였고, 반대로 미국은 적자의 누증에도 불구하고 통화는 강세를 유지하여 국제통화질서가 왜곡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초 제2차 오일쇼크와 중동정세 및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으로 달러화에 대한 선호가 증가하였고, 미국이 인플레이션 억제와 국제자본시장의 보호를 위해서 금융긴축을 실시하였으며, 조세경감이 궁극적으로 세수증대를 초래할 것이라는 공급측 경제학의 믿음을 원용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에 의한 재정적자확대로 미국은 계속적인 고금리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취한 경제적 조치는 미국으로의 엄청난 자본유입을 가져왔고, 이 과정에서 달러화가 강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달러화강세는 지속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실물부문의 건실한 성장 없이는 궁극적으로 통화강세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는 세계무역의 원만한 성장을 지속하기에는 벅찬 해결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1985년 9월 서방 7개국 정상회담 이후 선진 5개국의 재부장관들이 모여서 국가간의 환율을 인위적으로 재조정하겠다고 천명한 플라자합의(Plaza Agreement)는, 국가간의 금융정책과 환율정책을 결합시킨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당시 1달러당 240엔까지 형성되었던 미·일간의 환율이 불과 1년여 사이에 160엔으로까지 떨어져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서 무려 30% 이상 평가절상되었다. 그러나 국제무역의 불균형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렇게 의도적인 환율의 조정이 있었고 그후의 지속적인 달러화의 평가절하로 1995년에 들어서는 1달러당 80엔에까지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무역수지불균형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무역적자는 적자가 확대되기 시작하던 1977년부터 절하되었어야 할 달러화가 1985년까지 강세를 보였고, 고금리로 인한 투자위축과 산업공동화로 미국의 산업경쟁력이 단기간에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앞면의 표는 최근 주요국의 환율 및 무역수지를 나타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