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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근대 교육사상/동양의 근대 교육〔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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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여러 나라에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는 서양 물질문명의 영향에 자극을 받아 동양 각국이 민족적 각성을 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동양 각국의 근대교육은 이른바 각국의 근대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중국의 근대교육은 서양의 물질문명의 압력에 자극을 받아 시작되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애로호사건' 등에서 서양문명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된 중국의 식자계층은, 시시각각으로 엄습해 오는 외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기 시작하였다. 또 극히 보수적이었던 청조(淸朝) 정부조차도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862년 북경에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외국어 학교)'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근대적 학교이며, 그후 외국어 혹은 군사와 과학기술을 교육하는 학당이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고, 많은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진행된 교육의 근대화운동은 실은 급변하는 제 여건에 자극되어 급조되었던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의 중국 신교육운동은 교육에 있어서 근대화의 시도라는 의미 외에는 큰 효과를 찾을 수 없다. 1898년에 변법파(變法派)정권에 의하여 학교를 대학당·중학당·소학당의 3단계로 나누는 교육의 개혁과, '과거시험'에도 '8고문(八股文)' 대신 '시무책(時務策)'을 부과하도록 하는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무술변법(戊戌變法)은 3개월 여만에 끝났으므로 신교육제는 실시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후 1902년에 청조 정부가 공포한 '흠정학당장정(欽定學堂章程)'과 익년의 '주정(奏定)학당장정'은 일본의 근대 학제를 모방한 것으로 여기에 의무교육 규정이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체제는 근대교육체제를 구비하였으나 구사상(舊思想)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1906년부터는 중국에 있어서 교육의 근대화를 오랫동안 저해하던 과거제(科擧制)를 폐지하고, 새로 학부(學部)를 신설하여 신교육의 보급과 실현을 추진시켜 나갔다. 요컨대 청말에 있어서는 재래의 교육제도를 어떻게 해서 근대 학교제도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당면 과제였으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지지부진 상태였고, 민국(民國) 성립 이후에야 교육의 근대화·현대화가 서서히 진행되어 나갔다. 인도 근대교육의 시작은 상당히 빨랐으며,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인도를 지배하던 18세기 말엽에는 회교(回敎)대학·범어(梵語)대학 등이 이미 설립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인들의 영어교육열이 고조되었으며, 1835년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서 영국식 교육이 시행되어 지도층의 영국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도인을 위한 진정한 교육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포이의 항쟁' 등 인도인의 반발이 일어났고, 그 결과 무굴제국이 멸망(1857)하여 인도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기에는 인도 자체의 반영투쟁(反英鬪爭)과 더불어 국가주의적 사상이 나타나 인도인에 의한 인도인의 교육이 추진되었고, 해외유학도 시작되었다. 또 서양사상을 수입하여 인도의 사회나 종교를 개혁해 보려는 사상 개혁운동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운동이 인도의 근대교육사업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각지에 대학이 설립된 것은 이 영향이 컸다. 1차대전 종료 후에는 교육에 있어서도 인도화운동이 활발해지고, 교육행정의 지방분권화도 시작되었으며, 의무교육도 비로소 시작을 보았다. 일본에 교육부문의 근대화가 도입된 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안으로는 통일국가를 구축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치하기 위하여 소위 개명적인 제 정책을 수행해 갔으며(文明開化), 그 일환으로 1871년에 문부성(文部省)을 설치하고, 익년에 학제(學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학제에는 교육차별의 철폐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일본의 근대학교는 이 학제에 나타난 구상을 점차적으로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제는 너무 획일적이고 간섭주의적이라는 비난이 많아서 폐지되고, 1879년의 '교육령(敎育令)'과 익년의 '개정교육령'의 공포를 거쳐 교육의 분권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정치우위를 원하던 메이지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문화도 또한 국가의 지상목표에 봉사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인 교육으로 정책을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1890년에 공포한 '교육칙어(敎育勅語)'는 그러한 정책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것으로서, 패전까지의 일본의 교육은 이 교육칙어의 이념에 의해서 본질이 규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충국애국이념의 상징으로 황국신민(皇國臣民)사상을 고취한 결과, 일본의 근대교육에는 형식주의·권위주의·입신출세주의가 횡행하였으며, 생명·창조정신 및 합리성도 없이 형해화(形骸化)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나아가 교육기관이 군국주의의 선전기관화(宣傳機關化)하였다는 비난 역시 면할 길이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吳 金 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