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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근대 교육사상/중국의 근대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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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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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近代化-敎育

중국의 근대교육은 신식학교가 설립되는 청말 동치(同治) 원년부터 비롯된다. 중국의 교육제도는 진·한(秦漢) 이후 큰 변혁이 없었지만 아편전쟁(阿片戰爭, 1839-1842) 이후 강화된 제국주의 침략으로 급변했다.

수천년 이래 중국은 그의 주변국가들보다 우월한 문화를 유지·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외래사상을 경시하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서구인들과 군사적 충돌에서 번번이 패배함으로써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서학(西學)을 배우기 위한 신식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교육은 신교육 맹아(萌芽)시기·발전시기·완성시기의 3단계로 대별된다. 맹아시기는 동치(同治) 원년부터 광서 27년(1901)까지의 약 40년간이다. 이 시기에는 산발적으로 신식학교의 건립을 보았지만 신학제(新學制)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당시 새학교는 어학 또는 군사학에 치중했고, 서양의 정치 및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신교육의 발전시기는 신학제를 채택한 광서 28년(1902)부터 민국(民國) 10년(1921)까지의 약 20년 간이다 이때부터 새학교의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1천여년간 중국 교육의 중심을 이루어온 과거제도가 폐지된다. 그러나 당시의 학제는 일본의 학제를 모방하였고 일본 유학생들이 교육의 주역을 맡은 실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교육의 완성은 1921년부터 시작된다. 미국에 유학했던 학생들이 점차 귀국하게 됨으로써 일본학제의 모순을 발견하고 미국학제에 따라 전면적인 학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6·3·3제 미국식 학제가 채택되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근대학교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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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學校-出現

외국어문학교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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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語文學校-設立

중국의 근대학교로 최초로 설립된 것은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이다. 청국 조정(朝廷)은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한 2년 뒤인 동치(同治) 원년(1862)에 경사동문관을 설립하고 번역사를 양성코자 영어교육을 실시했다. 그 뒤 불어·노어과가 설치되고, 동치 5년에는 산학관(算學館)을 증설하여 조선술(造船術)을 교육했다. 미국인 마틴(W. A. P. Martin)을 위시로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 외인교사를 초빙했다. 수업 연한은 8년이었고, 외국어에 대한 교육 이외에 한문(漢文)·사지(史地)·대수(代數)·기하·미분·적분·천문·화학·측량·국제법·금석(金石)·부국책(富國策) 등이 교수되었다.

중앙의 동문관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상해와 광둥에 외국어학교를 설립했다. 동치 2년에 상해 광방언관(廣方言館), 다음해에 광저우동문관이 설립되었다. 광저우동문관은 8기(八旗)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고, 상해광방언관은 14세 이하의 한민족(漢民族) 자제가 입학하였다. 외국어 이외에 경사(經史)·소학(小學)을 가르쳤다.

기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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技術學校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푸젠선정학당(福建船政學堂)·상해기기학당(上海機器學堂)·텐진전보학당(天津電報學堂) 등의 공과기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 기술학교는 어학·조선술·운전술 등을 교육하고, <효경(孝敬)> 등 국학도 교육하였다.

해·육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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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陸軍學校

서양의 군사학을 교육하기 위해 광서(光緖) 6년(1879) 텐진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이 설립되고, 이어 광둥수사학당·후베이무비학당(湖北武備學堂)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는 병기학(兵器學)·수학·측량·독도법(讀圖法)·각국 전사(戰史) 및 기타 전술학을 교수하고, 또 4서(四書), 역사 등 국학의 교육도 병행하였다.

학당·공학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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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堂·公學-設立

갑오전쟁(甲午戰爭, 1894)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과거의 신교육으로 망국(亡國)을 구제하기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서양의 어학과 군사학 등에 치중했던 교육에 대한 재검토를 시작했다. 그래서 학제의 전면적인 개혁에 착안하고 서양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실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지동(張之洞)의 건의에 의해 광서 19년(1893)에 설치된 후베이자강학당(湖北自强學堂), 성선회(盛宣懷)의 건의에 의해 광서 21년(1895) 이후 설립된 텐진의 중서학당(中西學堂), 상해의 남양공학(南洋公學) 등은 단순한 외국어 교육기관이 아닌 근대학교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자강학당은 방언(方言)·산학(算學)·격치(格致)·상무(商務) 등 근대의 교과목을 설치하고, 중서학당은 두등(頭等:전문학교)과 2등(二等:中學校)을 설치했으며, 남양공학도 상원(上院:고등전문학교) 및 중원(中院:中學校)·외원(外院:小學校)·사범원(師範院) 등 근대적인 교육체제를 갖추었다.

흠정학당장정의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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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定學堂章程-制定

청일전쟁 이후 프랑스·독일·러시아의 3국간섭에 의해 열강의 이권요구가 강화되자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중국의 정치·문화·교육 등 전반에 걸친 근대화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주장은 광서제(光緖帝)의 신임을 받아 내정(內政)의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신정(新政)을 실행하였다. 이때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학제개혁이 단행되었다. 청국정부는 광서 28년(1902)에 신학제(新學制)인 '흠정학당장정(欽定學堂章程)'을 제정하고 근대적인 교육체제를 갖추었다. 이는 장백희(張百熙)의 건의에 근거한 것으로 경사대학당장정·대학당고선입학장정(大學堂考選入學章程)·고등학당장정·중학당장정·소학당장정·몽학당장정(蒙學堂章程)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몽학당은 뒷날의 초급소학(初級小學)에 해당하고 입학 연령은 6세이며, 수업 연한은 4년이다. 심상소학당(尋常小學堂)은 뒷날의 고급소학(高級小學)에 해당되며 10세에 입학한다. 고등소학당은 뒷날의 초급중학에 해당하며 13세에 입학한다. 중학당을 졸업한 자는 고등학당 또는 대학예과에 진학할 수 있다. 고등학당에는 정예(正藝) 양과가 있었다. 대학당에는 정치·문학·이과(理科)·농과·공과·상과·의과(醫科) 등 7개 과가 있었다. 대학원은 심오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것으로 일정한 연한은 정하지 않았다. 이 흠정학당장정은 신학제의 채택이라는 점에 의의가 크지만 성공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주정학당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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奏定學堂章程

주정학당장정은 장지동(張之洞)이 기초(起草)한 흠정학당장정을 개선하여 장백희(張百熙)·영경(榮慶) 및 장지동 연명으로 광서 29년(1904)에 공포되었다. 이 장정은 흠정학당장정의 기본정신인 중체서용(中體西用)사상을 계승하고 있지만 학제를 더욱 체계화시킨 것이다. 즉 학제를 3단7급(三段七級)으로 나누어 초등교육은 몽양원(蒙養院)·초등소학 및 고등소학의 3급, 중등교육은 중학당(中學堂) 1급과 고등교육은 고등학당·분과대학(分科大學) 및 통유원(通儒院)의 3급으로 되어 있다. 몽양원은 오늘날의 유치원에 해당한다. 소학에 입학하여 통유원을 졸업하려면 25년이 소요된다. 실업교육기관은 고등소학당에 해당하는 예도학당(藝徒學堂)·초등실업학당·실업보습학당 등이 있고, 중학당과 동급인 중등실업학당·초급사범학당이 있으며, 고등학당 및 분과대학과 동급인 고등실험학당·실업교원양성소·역학관(譯學館)·우급사범학당(優級師範學堂) 등이 있었다.

주정학당장정의 서두에 있는 학무강요(學務綱要)에 의하면 동학제의 의의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유교 도덕교육의 보존이다. 중·소학당은 독경(讀經)을 위주로 하여 성훈(聖訓)을 교육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둘째, 서양 과학교육을 중시하여 각 성에서 교육행정을 맡은 관리는 서구시찰을 반드시 해야 했다. 셋째, 실리적 실업교육을 중시하여 각 성에 실업학당을 설립했다. 넷째, 근대적 국방교육을 장려하여 모든 학생은 군사학을 이수해야 했다. 이러한 교육은 중체서용사상에 근거하여 일본의 새학제를 많이 모방한 것이다.

주정장정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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奏定章程-改革

주정학당장정이 반포된 2년 뒤, 교육을 전담하는 학부가 설치되고 학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여성교육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지고 소학의 교육내용과 연한이 바뀌며, 사범교육과 중학교육이 개선되었다.

여성교육은 광서 33년(1907)에 반포한 여자학당장정에서 '여자소학'과 '여자사범'을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여자소학당은 초등과 고등으로 나누며 수업 연한은 각각 4년이었다. 여자사범학당은 고등소학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으며 4년간의 과정을 마치면 졸업한다.

소학장정은 광서 31년(1905)에 학부가 성립된 뒤 두 차례의 변혁을 거쳤다. 선통(宣統) 원년(1909)에 실시한 제1차 개혁에 의하면 초등소학을 3종으로 나눈다. 즉 5년제의 완전과(完全科), 4년제의 간이과(簡易科), 3년제의 간이과 등을 말한다. 교과과정도 개선하여 독경(讀經)시간이 감소되고 음악교육이 첨가되었다. 제2차 개혁에 의해 3종의 초등소학이 1종으로 병합되고 수업 연한도 4년으로 규정했다.

중학장정도 선통(宣統) 때에 개혁되어 인문계와 실업계로 분과(分科)하였다. 문과는 독경·중국문학·외국어·역사·지리의 다섯 과목을 주로 하고, 수신·수학·박물(博物)·이화(理化)·법제·이재(理財)·도화(圖畵)·제조 등을 가르쳤다. 실업계는 국어·수학·물리·화학·박물을 주로 하고, 수신·독경·중국문학·역사·지리·법제·이재·도화·수공(手工)·체조를 가르쳤다. 수업 연한은 5년이며 주과(主課)의 수업시간이 많이 배정되었다.

사범교육 역시 개혁되어 초급사범은 원래 있었던 간이과 이외에 임시소학교원양성소와 단급교원양성소가 증설되었다. 전자는 1년 내지 2년 만에 마치고, 후자는 1학기 내지 2학기 만에 마칠 수 있다.

임자학제의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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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學制-制定

민국(民國) 원년(1912) 4월에 교육부를 설치하고 7월에 임시교육회의를 개최하여 "도덕교육을 위주로 하고 실리교육과 군국민교육(軍國民敎育)을 보조로 하며 미감교육(美感敎育)으로 그 도덕을 완성한다"는 교육 종지(宗旨)가 발표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9월에 새학제가 발표되었는데 이를 임자학제라고 한다. 이 학제는 이전의 학제보다 학교체계가 간소화되고, 소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연한이 단축되었다. 새학제에 의하면 아동이 7세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24세 또는 25세에 대학을 마칠 수 있다. 이는 종래보다 3년 내지 4년의 연한 단축을 의미한다. 또한 이 학제는 교육의 민주화를 표방하여 수립된 것이기 때문에 교육의 보급면에서 종전보다 훨씬 근대적이다.

임술학제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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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學制-成立

중국교육의 민주화 운동은 일본 교육제도를 채택했던 종래의 제도를 고쳐 민주적인 미국식 교육제도를 채용함으로써 활발해진다. 청말 민초(民初)의 중국 교육계는 일본유학생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민국 6년 이후 미국 유학생이 많이 귀국하여 상당한 세력을 가지게 되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한 6·3·3제가 중국에 이식되었다. 민국 10년에 제7차 전국교육연합회가 광둥(廣東)에서 열려, 새학제의 초안을 마련했다. 민국 11년에 교육부는 학제회의(學制會議)를 개최하여 연합회의 초안을 수정하고, 다시 이해 12월에 제8차 전국교육연합회를 지난(濟南)에서 열어 최종수정을 거쳤다. 교육부는 이들 초안을 참작하여 학교 계통개혁안(學校系統改革案)을 반포하니 이것을 임술학제라고 한다. 이로써 중국의 6·3·3제 교육이 실행되었다.

학교계통개혁안은 표준(標準)·계통표(系統表)·설명(說明)의 3항으로 되어 있다. 개혁학제의 표준은, ① 사회진화 요구에의 적응, ② 민주주의 교육정신의 발휘, ③ 개성의 발전, ④ 국민과 경제력과의 관련, ⑤ 생활교육의 중시, ⑥ 교육의 보급, ⑦ 지방에 따라 신축성을 둔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교육의 민주화를 바라는 사회의 요망에 따르고 국민경제와 지방 실정에 적절하게 교육을 보급하여 개성의 발전과 생활교육의실시 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무진학제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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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學制-成立

난징에(南京) 국민정부가 수립된 뒤 학제에 대한 수정이 시작되었다. 교육행정면에서는 프랑스의 제도를 모방하여 대학구제(大學區制)를 시행, 대학총장이 교육청의 사무를 겸무함으로써 교육행정의 학술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폐단이 발견되어 다시 수정되지만, 학교교육 부문에서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민국 17년(1928) 초 대학원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대학규정·사립학교조례·중소학잠행조례(中小學暫行條例)·화교소학조례(華僑小學條例) 등의 제규정을 만들어, 5월에 열린 제1차 전국교육회의에 회부하였다. 그래서 신교육제도에 관한 새로운 학제를 탄생시키니 이것을 무신학제라고 한다. 국민정부의 학제는 이로써 확립된 것이다.

이때 학교계통은 6·3·3제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학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교육내용면에서 많은 변화를 보였다. 즉 중등학교를 보통중학·직업학교·사범학교로 나누어 각각 독립시키고, 초급중학에 동자군(童子軍)을 두고, 고급중학 이상에서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당교육(黨敎育)을 실시하고, 교육청에서 연합고사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민국 5년 이후 격화된 군벌(軍閥)들의 군사행동에 대비하여 군사훈련을 교육에 반영하고, 국민당 정책에 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정치와 교육을 밀접히 관련시켰다.

초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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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等敎育

소학 규정(小學規程)에 의하면 소학교를 완전소학·간이소학·단기소학으로 나눈다. 완전소학은 초급과 고급으로 나누어 6년 만에 졸업한다. 간이소학은 의무교육을 시행하기 위한 편법으로 마련된 것으로, 전일제(全日制)·반일제(半日制)·분반보습제(分班補習制)의 3종이 있다. 전일제와 반일제는 4년 만에 졸업하며 분반보습제는 최소한 2천800시간을 이수해야 졸업한다. 단기소학은 나이 많은 아동을 위해 만든 것으로, 만 10세 이상 16세 미만의 아동이 입학한다. 연한은 1년이며 글자를 해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중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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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等敎育

중등교육기관은 보통중학·직업학교·사범학교 등 3종이 있다. 보통중학은 3·3제를 채택하여 6년 만에 졸업하고, 선택과목제도를 없애고 모든 과목을 필수로 하였다. 직업학교 역시 초급과 고급으로 나누고 초급직업학교는 소학 졸업자에게 입학 자격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수업 연한은 1년 내지 3년으로 지방실정에 따라 달랐다. 고급직업학교는 초급중학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고, 수업 연한은 3년이다. 사범학교는 종래 6년제의 사범학교를 없애고 2종으로 나누었다. 1종은 사범학교 또는 향촌사범학교(鄕村師範學校)로서 3년 만에 졸업한다. 다른 1종은 간이사범학교 또는 간이향촌사범학교로서, 고등소학 졸업생이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한다.

교육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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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內容

소학교에서는 공민훈련(公民訓練)·위생·체육·국어·사회·자연·산술·노작(勞作)·미술·음악 등 10과목을 교육했다. 초급중학에서는 공민·체육 및 동자군(童子軍)·국문·영어·산학(算學)·생리위생·식물·동물·물리·화학·역사·지리·농작(農作)·도화(圖畵)·음악 등 15과목을 교육했다. 고급중학에서는 공민·위생·체육·군사훈련·국문·영어·산학·생물학·화학·물리·국사·서양사·본국지리(本國地理)·외국지리·논리·도화·음악 등 17과목을 교육했다. 이 밖에 필요에 따라 몽고어·아라비아어·티베트어 또는 제2외국어를 가르쳤다.

직업학교에서는 농업·공업·상업·가사 등을 교육하되, 해당 직업에 관련된 과목이 30%, 보통학과가 20%, 실습이 50%를 차지했다.

사범학교의 교과목은 공민·국문·역사·지리·산술·물리·화학·생물·체육·위생·군사훈련·노작(勞作)·미술·음악·논리·교육개론·교육심리·교육측정 및 통계·소학교재 및 교수법·소학행정·실습 등이다.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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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思想

중국의 교육사상은 유가학설로 중심을 삼아 왔다. 수·당(隋唐) 이후 유가학설이 불학(佛學)의 영향을 받았으나, 대체로 경전(經典)을 위주로 했다. 그러나 청말부터 서양문명과 만남으로써 중국의 교육은 급변한다. 중국 근대교육사상은 대체로 3단계를 거쳐 변한다. 1단계에서는 중학독존(中學獨尊)사상이 점차 "중학을 체로 삼고 서학을 용으로 삼는다(中體西用)"는 사상으로 전변한다. 2단계에서 중체서용사상은 다시 전면적인 서양화의 사상으로 변하고, 3단계에서 전면서화(全面西化)사상의 다시 3민주의(三民主義) 교육사상으로 변한다. 이러한 사상의 개변은 교육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중체서용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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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體西用-敎育思想

청말 동치(同治)원년부터 민국 원년(1912)까지 중국의 교육은 이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수천년 이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익숙해 온 중국의 지식인들은 청말에 서양 민족들과 상업·군사면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고, 비로소 외국의 장점에 눈을 뜬다. 그들은 서양의 무기와 선박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외국의 장점을 배우기 위해, 푸젠선정학당(福建船政學堂)·상하이기기학당(上海機器學堂)·텐진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 등을 세운다. 그러나 당시 교육사상가들은 외국의 언어·군비(軍備)·기계실업 부문에만 주목하고, 서양의 정치제도, 교육제도 등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의 표면적인 물질문명에만 주의하고, 물질문명의 발달을 초래케 한 그 이면에 관해서는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교육은 완전히 중국의 구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의 기계·군비 등에 관한 것을 접목했을 뿐이다. 따라서 아직 중체서용의 사상이 교육에 실천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청일전쟁 이후 유신인사(維新人士)들은 단순한 군사 건설이나 물질 건설로는 망국을 구원할 수 없다고 보고, 중국이 부강하려면 서양의 기계 이외에 정치와 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중국의 '성현의지리학(聖賢義理之學)'을 입국(立國)의 기본으로 삼고, 서양의 정치 교육제도를 원용해야 한다는 '중체서용'사상이 등장했다. 광서 22년(1896)에 손가내가 처음으로 이 '중체서용'사상을 제기한 뒤,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이 이에 동조했다. 그래서 무술 유신운동(戊戌維新運動)의 교육은 이 사상이 기저를 이룬다. 광서 24년 4월에 결정된 국시(國是)에서도 "성현의리지학을 근본으로 하고 서학 가운데 시무에 적절한 것을 널리 채용하여 공소(空疏)에 흐르는 폐단을 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즈동(張之洞)·량치차오(梁啓超) 등도 이 사상을 적극 옹호하여 그 당시 크게 보편화됐다. 광서 29년의 '주정장정원주(朱定章程原朱)'에서도 "모든 학당(學堂)의 건학종지(建學宗旨)는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중국의 경사지학(經史之學)을 바탕으로 하여 학생들의 심성(心性)을 바로잡은 뒤에, 서학(西學)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학생들의 예능을 연마하며…"라고 말하여, 이때의 교육도 여전히 '중체서용'을 주지(主旨)로 삼았음을 표현한다. 광서 32년에 학부(學部)는 중체서용의 주지를 2종 5조(二種五條)로 나누었는데 제1종은 충군(忠君)·존공(尊孔)의 2조이고, 제2종은 상공(尙公)·상무(尙武)·상실(尙實)의 3조이다. 앞의 2조는 중학(中學)이고, 뒤의 3조는 서학에 속한다.

민국 이후 정치제도의 개혁으로 교육종지(敎育宗旨)도 변경되었다. 민국 원년에 결정된 교육종지는 "도덕교육을 위주로 하고, 실리교육·군국민교육(軍國民敎育)으로 보조하며 미감(美感)교육으로 도덕을 완성한다"로 되어 있다. 미감교육은 민국 초대 교육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개인 주장이다. 이것은 비록 교육종지에 반영되었지만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교육사상은 도덕교육·군국민교육·실리교육을 중시했고,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중체서용사상이 아직도 기조를 이룬다. 도덕교육은 성현의리지학(聖賢義理之學)을 말한 것으로 중학(中學)이고, 군국민교육·실리교육은 서학(西學)이다. 민국 4년에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대총통(大總統)이 되어 발표한 교육종지에서도 이 사상은 거듭 반영되었다.

전면서화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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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面西化敎育思想

민국 8년(1919)에 일어난 5·4운동으로부터 민국 16년에 난징에 국민정부가 건국될 때까지 전면서화교육사상이 성행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아편전쟁 이후 거듭된 개혁과 혁명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제반상황이 호전되지 못함을 보고 실망하여 서양을 철저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이 부강하려면 중국의 윤리도덕에 바탕한 전통관점을 철저히 파괴하고 서양문화를 전반적으로 철저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이라 하며, 이 운동은 천두슈(陳獨秀)·후스(胡適) 등이 주도하는 신청년(新靑年)이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신청년은 문학혁명·윤리혁명·서양문화의 전면적인 수입을 주장하여, 유교도덕을 봉건시대의 유물이라 규정하고, 서양의 과학뿐 아니라 정치·윤리까지도 철저히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운동을 5·4 신문화 운동이라 부르며, 그 영향으로 교육 실천면에서 새학제의 공포와 신교육방법의 시행이 있게 되었다. 민국11년에 공포된 새학제는 신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학제를 전폭 모방하고, 학교 운영과 학생활동도 훨씬 자유분방해졌다.

삼민주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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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民主義敎育思想

전면적인 서양문화의 이식을 위한 신문화운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단을 낳는다.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은 서구와 다른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문화를 창조해 왔기 때문에 서구문화를 중국의 현실에 적용했을 때 적지 않은 모순을 파생시켰다. 서양문화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고, 서구 각국의 정치와 제도·풍속도 각각 달라 서양을 본받는다고 할 때, 서구의 어느 나라 문화를 본받아야 할지 문제였다.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데 힘을 발휘했지만, 적극적으로 신문화건설에는 공헌하지 못했다. 이때 쑨원(孫文)이 나서서 삼민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다.

삼민주의는 일종의 사회사상이며 교육사상이다. 그 특징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사회(大同社會) 건설을 이상으로 삼는다. 둘째, 신중국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민족평등·정치평등·경제평등을 제시하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중국의 실정에 맞도록 마련하였다. 셋째, 중국과 서양문화를 비교검토하여 중국의 모든 분야에 걸친 실제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제안하였다.

1928년 5월에 열린 제1차 전국교육회의는 삼민주의를 교육강령으로 할 것을 의결했다. 삼민주의 교육은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이 교육회의는 삼민주의 교육실시원칙 15조를 통과시켯다. 즉 ① 민족정신의 발양, ② 국민도덕의 함양, ③ 국민체력의 단련, ④ 과학정신을 제창하여 과학의 응용을 확대함, ⑤ 교육의 보급, ⑥ 남녀 교육기회의 균등, ⑦ 만·몽·묘·회·장·요 교육의 발전, ⑧ 화교교육의 발전, ⑨ 직업교육의 확대, ⑩ 농업교육의 발전, ⑪ 기율을 준수하는 습관의 양성, ⑫ 정치지식을 주입시켜 참정권을 행사할 능력의 함양, ⑬ 단체협력정신의 양성, ⑭ 생산지식과 기능의 향상, ⑮ 생산에 노력하는 습관의 양성 등을 말한다. 1931년 5월에 있은 국민회의에서 결의한 교육실시방안이나, 그해 9월의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 제157차 상임위원회에서 통과한 삼민주의 교육실시원칙도 모두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李 康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