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중세 교육사상/명·청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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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의 교육[편집]

明·淸-敎育

5대(代)로부터 원말(元末)까지 약 400년간 이민족의 시달림을 받은 끝에 14세기 중엽부터 한족(漢族)의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주원장(朱元璋)은 이에 편승, 몽고족을 중원(中原)에서 몰아내고 고토(故土)를 회복하여 명나라를 세웠다. 성조(成祖) 때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대외교섭도 활발해지며 남양(南洋)을 개척하여 판도를 넓혔다. 그러나 그뒤 왜구(倭寇)의 소요, 유구(流寇)의 창궐, 환관(宦官)의 발호로 국력은 쇠약해지고 만주족에 의해 멸망되었다.

명은 한족이 세운 나라인 데 반하여, 청은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세운 것으로 절대전제정치를 실행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제민족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에 따라 각각 다른 통치수단을 썼다. 몽고족은 라마교로서, 회족(回族)은 회교로서, 한족은 유교와 과거제도로 통제했다. 강희(康熙)·건륭(乾隆)은 만청(滿淸) 정부의 전성시대이지만 도광(道光)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정치·교육 등 각 방면의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명·청의 교육제도는 송·원을 이어 과거제도에 크게 의존하였고, 당시 관학은 대부분이 유명무실하고 사학이 성행하였다. 양대(兩代)의 학술사상은 각각 다른 경향을 보였다. 명대의 철학은 송유(宋儒)를 계승하여 심학(心學)의 발전을 보았고 형이상학적 논의가 활발했다. 청초(淸初)부터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 실학을 숭상하였다. 경학(經學)과 사학의 연구는 고증(考證)에 기울고 고증학은 청대에 집대성되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교육은 청 말에 종언(終焉)하고 서유럽쪽의 신교육이 수입되었다.

명대의 교육[편집]

학교교육[편집]

學校敎育

명대의 학제는 송·원(宋元) 학제를 계승하여 교육행정은 중앙의 국자감(國子監)과 지방의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각각 관장했다. 중앙에는 국자감과 종학(宗學)의 두 학교가 있고, 지방에는 부학(府學)·주학(州學)·현학(縣學) 및 위학(衛學)이 있었다.

중앙학교[편집]

中央學校

명나라 때의 중앙학교로는 종학과 국자감이 있었다.

종학[편집]

宗學

종학은 귀족학교로서 세자(世子), 대신(大臣) 및 장군의 아들, 종실(宗室)의 자제로서 10세 이상 20세 미만의 소년이 입학했다. 학과는 4서5경·사감(史鑑)·성리서(性理書) 등이고, 문자교육과 도덕교육이 병중(竝重)되었다. 교육은 왕부(王府)의 장사(長史)·기선(紀善)·반독(伴讀)·교수(敎授) 가운데서 학행(學行)이 우수한 자가 담당했다. 5년간 학습하여 성적이 좋으면 벼슬을 했다.

국자감[편집]

國子監

국자감은 명대의 가장 중요한 중앙교육기관이었다. 명태조는 즉위 초년(洪武元年:1368)에 국자학을 세워 그간 쇠퇴했던 교육을 중흥시키려 했다. 그뒤 국자감으로 개명되고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는 북경국자감과 남경국자감이 있게 되었다. 국자감의 학생을 감생(監生)이라 하였고, 감생에는 거감(擧監)·공감(貢監)·음감의 3가지가 있었다.

거감은 과거에 급제한 거인(擧人)으로, 공감은 지방학교의 생원(生員)으로 충원했다. 음감은 고급관리 및 외척의 자제로 국자감에 입학한 사람들이다. 경제(景帝) 때는 전쟁으로 재정이 긴급할 때 곡식과 말을 바친 사람의 자제를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이를 예생(例生)이라 하였다. 한편 감생의 학생정원은 일정치 않아 많을 때는 9천9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교과목은 4서5경 이외에 설원(說苑)·율령(律令)·서수(書數) 및 활쏘기였다. 학관(學官)으로 좨주(祭酒)·사업(司業)·감승(監丞)·박사·조교·학정·학록·전부(典簿)·전적(典籍)·장찬(掌饌) 등이 있었다. 수업연한은 통상 4년이고 졸업후에는 능력에 따라 벼슬했다.

지방학교[편집]

地方學校

명나라 지방행정 구역은 내지(內地)에 속한 성(省)·부(府)·주(州)·현(縣)과 변강(邊疆)에 속한 분변(分邊)·위소(衛所) 등이 있었다. 전자의 행정구역엔 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교가 있었는데, 부학(府學)·주학(州學)·현학(縣學) 등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위학(衛學)을 설립하였으며, 전자와 후자를 통칭하여 유학(儒學)이라 한다. 전국에 1천 579개소의 유학이 있었다.

위학은 4개 위(衛) 또는 2-3개의 위가 하나의 학교구가 되어 1개의 학교를 세웠다. 전국 493개 위에 180여개 소의 위학이 있었다. 부학·주학·현학은 각각 규모가 달랐지만 상하(上下)의 구별없이 중앙의 국자감에 진학할 자격을 인정받았다. 부학은 교수 1인, 훈도(訓導) 4인이 교육을 맡고, 주학은 학정(學正) 1인, 훈도 3인, 현학은 교유(敎諭) 1인, 훈도 2인이 각각 교육을 담당했다. 영종(英宗) 정통(正統) 원년에 제조학교관(提調學校官)을 설치, 고시와 교관(敎官)을 감독하고 학생들을 훈도하는 일 등을 담당케 했다.

학생은 3급으로 나누어 1급을 늠선생, 2급을 증광생(增廣生), 3급을 부학생(府學生)이라 하였다. 신입생은 부학생이 되며, 연말시험인 세고(歲考)의 성적에 따라 증광생·늠선생으로 승급하였다. 이처럼 승급함으로써 정식 학생자격을 얻는데, 이러한 학생이 7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홍무(洪武) 초년에 교과과정이 확정되고 학생은 각각 1경(一經)씩을 전공하고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분과(分科)하여 교육했다.

지방학교로서 직업교육에 속한 것으로 경위무학(京衛武學)·위무학(衛武學)·의학(醫學) 및 음양학(陰陽學)의 4종이 있었다. 경위무학 및 위무학은 각 위(衛)의 무장(武將)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잇었고 고시(考試)는 병부(兵部)에서 주관했다. 의학은 홍무 17년에 창설되었는데 부정과(府正科)·주전과(州典科)·현훈과(縣訓科) 등의 학관(學官)이 있었다. 음양학은 원나라 제도를 전승한 것으로 역시 홍무 17년에 설립했고, 부정술(府正術)·주전술(州典術)·현훈술(縣訓術) 등의 학관이 관장했다.

과거제도[편집]

科擧制度

명대의 과거제도는 송·원(宋元)의 제도를 계승하여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3종이 있다. 향시는 각성(各省)에서, 회시는 예부(禮部)에서 전시는 궁전(宮殿)에서 시행하였다. 각 부·주·현의 학생은 제거학관(提擧學官)이 주관하는 세고(歲考)에 1급으로 합격함으로써 향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되고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 또 회시에 합격하면 천자(天子)가 임석하여 시행하는 전시에 응시한다.

고시내용은 경의(經義)·소고율령(訴誥律令)·경사시무책(經史時務策) 등 3종으로, 경의는 4서(四書) 및 역·서·시·예·춘추(易·書·詩·禮·春秋)의 5경에서 출제한다. 향시와 회시는 각각 3차의 시험을 거친다. 1차는 4서의(四書義) 3문제·경의 4문제를 작성하는 것이다. 2차는 논문 한 편을 300자 이상 작성하는 것과 율령에 관한 것 한 편, 제도에 관한 것 5조목을 쓰는 것이다. 3차는 경사시무책(經史時務策) 5문제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중 1차 시험이 가장 중시되었고, 답안 작성은 옛 사람의 문체를 모방하여 격률(格律)이 엄격하게 정해진 8고문(八股文)으로 하여야 했다.

8고문은 격식을 정하여, 설명에 편리하고 운율에 맞추어 듣기 좋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수사문(修詞文)이지만, 지나치게 규격화함으로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8고문이 명나라의 과거시험에 적용됨으로써 교육과 학술분야에 끼친 해독은 매우 컸다. 그래서 경서(經書)의 뜻을 홀시(忽視)하고 문장의 수식에만 전념하는 나쁜 학풍을 조성하였다.

교육사상[편집]

敎育思想

명나라의 학술사상은 과거제도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관학(官學)에 의해 퇴보를 보였으나 그대신 사학(私學)에 의해서 발전하였다. 명대의 사상은 송원(宋元)을 이어 의리지학(義理之學)에 기울었다.

그러나 송·원시대에 정주학파의 이학(理學)이 성행한 반면 명대에는 육왕(陸王)의 심학(心學)이 크게 떨쳤다. 육왕학파는 학문의 목적이 인간에 내재한 양지(良知)를 깨쳐 성인과 같은 인격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궁리(窮理)보다 덕성(德性)을 밝히는 일이 선결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주자학파의 위학(僞學)이 지리멸렬하다고 공격하고 치량지(致良知)를 강조했다.

왕양명[편집]

王陽明 (1471-1527)

명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송나라의 육상산(陸象山)을 계승하여 심학(心學)을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회의를 품고 불학(佛學)과 노장학(老莊學)에 전심한 뒤, 격물치지의 본지(本旨)가 자기의 심성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심(心)이 천지만물의 주인이라 보고 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유심론(唯心論)을 전개한다. "심이 곧 이이다(心卽理)"라는 관념은 그의 근본사상이고, 치량지(致良知)·지행합일(知行合一)설은 이 '심즉리'설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그는 심의 본체가 천리(天理)이고, 천리가 밝게 빛나는 것을 양지(良知)라고 생각하였다. <논어>의 인(仁), <대학>의 명덕(明德), <중용>의 중화(中和)는 양지의 별명으로, 이러한 양지는 성인이나 우부우부(愚夫愚婦)가 공유하며, 맑은 거울이 사물을 그 자체로 비추어 주듯이 양지가 있음으로써 시비선악(是非善惡)을 명료하게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유일한 목적은 치량지(致良知)이며 이 양지를 통하여 우주만물과 동체가 된다고 보았다.

치량지의 방법으로 그는 성의격물(誠意格物)·유근급원(由近及遠)·계신공구(戒愼恐懼) 등을 들었다. 성의격물은 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양명(陽明)은 주자가 지(知)와 행(行)을 구분하는 폐단을 지적하고 지행합일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는 행의 출발점이고 행은 지의 완성이며, 지 밖에 행이 없고 행 밖에 지가 없다(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 知外無行, 行外無知)"라고 주장하였다. 보통사람들은 옳은 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실행할 수 없는 지는 부지(不知)와 같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뜻(意)을 진실되게 하지 못하는 데서 초래되므로 뜻을 바로잡아 양지(良知)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근급원'이란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심원한 곳에까지 이른다는 뜻으로, 치량지는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하여 타인의 어버이에 이르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끝내 천지와 일체가 되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계신공구'란 인욕(人慾)을 조심하고 경계하여 천리(天理)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욕이 바야흐로 싹트려 할 때 이를 매우 조심하여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양명은 그의 철학에 토대로 두고 교육방법론을 전개하였다 즉 모든 사람이 본래 양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교육자는 어린이 때부터 이러한 양지를 드러나게 하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아동을 억압하지 말고 계발해야 하며 아동의 균형잡힌 인격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당시 교육이 편달(鞭撻)의 방법으로 아동들을 속박한다고 비평하고 감정훈련과 자발적인 품성 함양을 강조하였다.

청대의 교육[편집]

학교교육[편집]

學校敎育

청은 이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통치에 있어 민족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해결하려 했다. 그래서 교육정책과 제도는 종족에 따라 각각 달랐다. 만주족에 대한 교육방침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실제적이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며, 절약검소를 중시하고 기율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하는 것. 둘째, 문무(文武)를 겸비하도록 하는 것. 셋째, 민족의 고유한 도덕과 기능을 보전하여 만주의 언어·문자·풍속을 입국(立國)의 근본으로 삼는 것 등이다. 한족(漢族)에 대해서는 선비들을 이용하여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려 했다. 학교제도는 명대의 제도를 계승했지만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첫째, 학교교육을 사회도덕의 확립에 기여하도록 제도화하고 심성과 범위를 합일(合一)시키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둘째, 교육을 맡은 학관(學官)은 학교교육 이외에 사회교육의 책임을 지며 정치의 선전업무를 겸하는 것이다. 학교는 기학(旗學)·종학(宗學)·국자감(國子監) 등 중앙학교와 부학·주학·현학 등 지방학교가 있었다.

기학[편집]

旗學

기학은 만몽(滿蒙) 8기(八旗)의 자제 및 한군(漢軍) 8기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귀족학교이다. 그 종류는 대단히 많아 중앙에 설립된 것도 있고, 만주 몽고 등 지역에 설립된 것도 있다. 교육은 국자감에서 실시하는 것보다 엄격했으며, 교육내용 가운데 특이한 것은 활쏘기였다. 봄·가을에 5일에 한 차례씩 활쏘기를 훈련하여 만족(滿族)의 상무(常武)정신을 보존하려 했다.

종학[편집]

宗學

종학은 명대의 그것처럼 종실(宗室)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귀족학교이다. 종학은 기학과 마찬가지로 민족문화를 보전하기 위하여 설립했기 때문에 국자감의 설립목적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만주족의 문화는 점차 한문화에 동화되고, 청대 군주들도 점차 한문화를 숭배하게 되어 당초 설립 의의를 상실했다. 국자감과 달리 만주관(滿洲官)을 설치하여 만서(滿書)를 교육한 것 이외에는 국자감의 교육내용과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옹정(雍正) 7년에 설립한 각라학(覺羅學)도 종학의 일종이다.

국자감[편집]

國子監

국자감은 국학(國學) 또는 태학(太學)이라고도 하며, 명대에는 북경과 남경에 있었지만 순치(順治) 원년(1644)에 남경의 국자감을 폐지하고 북경의 국자감만을 개설했다. 감무(監務)를 총괄하는 좨주(祭酒)는 정책상 만한(滿漢) 각 1인이었고, 사업(司業)은 만·한·몽 각 1인이었다. 감승(監丞)·박사·조교·학정·학록 등이 교육을 담당했고, 전적(典籍)은 도서를, 전부(典簿)는 문서를 담당했다. 이 중 전적은 한인(漢人)이 담당했으나 그 나머지는 만인(滿人)과 한인으로 각각 구성했다. 국자감의 학생의 종류는 명대보다 훨씬 복잡하며, 크게 공생(貢生)과 감생(監生)의 2종으로 나눈다. 공생에는 세공(歲貢)·은공(恩貢)·발공(拔貢)·우공(優貢)·부공(副貢)·예공(例貢)·공공(功貢)의 7종이 있고, 감생에는 은감(恩監)·음감·우감(優監)·예감(例監)·거감(擧監)의 5종이 있는데, 음감은 다시 은음·난음의 2종으로 나누어진다.

과거제도[편집]

科擧制度

청대 과거는 상과(常科)와 특과(特科)가 있었다. 특과는 재야에 숨은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한 것과 만인(滿人)이 한문(漢文)을 만문(滿文)으로 번역하는 것을 고취하기 위한 번역과(飜譯科)가 있었다. 상과는 명제(明制)를 이어 향시·회시·전시의 3종이 있었다. 회시와 전시의 선발인원은 일정치 않았고, 향시는 성(省)의 대소(大小)에 따라 40-70명을 뽑았다. 향시의 시행 기간, 응시수속, 과명(科名)의 분류, 관직의 수여 등은 모두 명대와 같다. 다른 점은 명대에는 국자감의 감생이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인정받았으나 청대에는 향시에만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시 내용은 대체로 명대와 같으나 8고문(八股文)으로 문체를 만들어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다.

청대에는 상무(尙武)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문과 외에 무과시험이 있었다. 무과의 고시는 술과(術科)와 학과(學科)로 나누어 술과는 1-2차, 학과는 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1차시험의 술과는 기사(騎射)를, 2차는 보사(步射)를 시험했다. 학과는 <논어> <맹자>와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등의 범위 안에서 출제되었다. 그러나 무과시험은 학과보다 술과를 중시하였다.

서원[편집]

書院

청대 서원은 민간의 고등학문 연구기구로서 송·명의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순치 14년(1657), 형양(衡陽)의 석고서원(石鼓書院)이 수건(修建)됨을 위시로 각지의 서원이 연달아 세워졌다. 그리고 옹정(雍正) 11년(1733)에는 각 성(省)에 설립된 서원에 1천냥의 운영비를 지급하여 서원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서원의 장(長)을 산장(山長) 또는 원장(院長)이라 하며, 청대 서원의 원장 인선은 매우 중시되었고, 원장의 성망(聲望)은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당시 명유(名儒)·석학들은 즐겨 원장의 청을 받아들여 서원에서 강의했다. 황종희(黃宗羲)·이조락(李兆洛)·유월 같은 당시의 대유(大儒)들이 모두 서원에서 강의하였다.

서원의 학생 선발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은 편으로, 주현(州縣)에서 정선하여 각 포정사(布政司)의 시험을 거친 뒤 입학하였다. 서원의 학생은 생원(生員)·동생(童生)·초등생(超等生)·내외제생(內外諸生)·부과생(附課生) 등이 있었다. 선발되어 입학한 학생들은 학비를 면제받고 또 서원으로부터 고화비(膏火費)를 지급 받아 어렵지 않게 면학할 수 있었다.

서원의 학생들은 사고(師考)와 관과(官課)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다. 사고는 원장이 주관하고 관과는 부·현관(府·縣官)이 주관했다. 대체로 매월 2일과 16일에 시험이 실시되는데 2일에는 관과를, 16일에는 사고를 치렀다.

청대 서원의 학풍은 여러 차례 변혁이 있었으나 대체로 이학(理學)을 연구하는 것과 과거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경사사장(經史詞章)을 학습하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서양학문을 연구하는 데 치중하는 서원도 있었다. 당시 과거제도로 속박된 학풍에 비해 볼 때, 서원의 학풍은 훨씬 자유로웠으며 청대 학술에 기여하는 면에서는 관학보다 우월했다.

교육사상[편집]

敎育思想

송·원·명(宋元明)의 교육사상은 이학(理學)을 중심으로 하여 심성의 연구와 함양, 인생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치중했다. 그러나 이학의 이러한 학풍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의 폐단을 낳았다. 그래서 송명이학(宋明理學)에 대한 반동으로 한학(漢學)이 다시 등장한다. 한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증거없이 믿을 수 없다(無徵不信)"는 전제 아래, 고증(考證)과 훈고에 치중하는 학풍이다. 이 학풍은 청대 사상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송학(宋學)이 한학(漢學)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점진적이었다. 그래서 청초(淸初)의 고정림(顧亭林)·황이주(黃梨洲)와 같은 학자들은 한학과 송학의 장점을 아울러 살리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건륭(乾隆) 이후부터 송학은 퇴색하고 한학이 성행하였다. 경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실증을 위주로 하고 공리공담을 배격하였다. 가경(嘉慶, 1795-1820) 이후 서한(西漢)의 금문학(今文學)이 활발히 연구됨으로써 청대 사상은 다시 한번 변하여 공양학파(公洋學派)의 대두를 보았다.

고염무[편집]

顧炎武 (1612-1681)

명말-청초의 경학자. 이름은 강(絳), 호는 정림(亭林)인데 명이 망하자 염무(炎武)로 개명했다. 그는 명조(明朝)가 이민족에게 멸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한민족(漢民族)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민족의 부흥이란 이론문제가 아니라 실천문제에 속한다고 보고, 교육은 치용(致用)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명(宋明)의 유학자들처럼 이론만 말하는 사람은 비록 구국(救國)의 뜻이 있다 할지라도 실천에 있어서는 무력하다고 보았다.

구국을 위해서는 유용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이러한 인재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밭을 개간하고 이재(理財)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실용지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지조(志操)가 고상하여야 한다. 셋째, 의지가 굳세어야 한다. 자기 뜻을 실현하기 위해 간고한 생활을 하면서도 사방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낙심하지 않고 세속과 동화하지 않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박학어문(博學於文)과 행기유치(行己有恥)를 든다. '박학어문'이란 우주간의 모든 사물의 현상에 대해 널리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기유치'란, 고상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있어 '부끄러운 줄 아는 것(知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4유(四維)라고 보고 4유 가운데서 치(恥)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사욕(私欲)에 가리어져 있기 때문이며, 사대부(士大夫)가 부끄러움을 모르면 국가에 치욕이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황종희[편집]

黃宗羲 (1609-1694)

명말-청초의 경학자·사상가. 자는 태충(太沖), 호는 이주(梨洲). 그의 교육사상은 대체로 왕양명 사상에 근거하여 다소 수정한 것이다. 그는 왕양명처럼 교육의 목적이 '치량지(致良知)'에 있다고 보지만 치량지의 치(致)자를 행(行)으로 해석한다. 때문에 그는 교육에 있어 실행을 강조했고 정좌(靜坐)·돈오(頓悟)와 같은 수양공부를 제창하지 않았다.

그는 명학(明學)이 공소(空疏)한 경향을 보인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치용(致用)할 수 있는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비록 성리(性理)·경술(經術)·사학(史學)을 중시하지만 치용(致用)을 구극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송·명(宋明) 이학자들과 구별된다.

왕선산[편집]

王船山 (1618-1691)

명말-청초의 철학자·경사학자(經史學者). 이름은 부지(夫之), 자는 이농(而農). 그는 당시 학자들과 교유(交遊) 없이 두문불출하며 면학했고,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死後) 2백년 이후에 알려졌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소위 지선은 행위면에 국한되지 않고 지식의 면을 포괄하며, 지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성(誠)이 천지와 인간을 꿰뚫는 근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구학(求學)의 방법으로 정심(正心)과 격물궁리(格物窮理), 그리고 박문약례(博文約禮)를 강조하였다. 마음이 사물에 의해 본래의 상태를 잃지 않는 것을 정(正)이라 하며, 정심(正心)공부는 유년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