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중세 교육사상/송·원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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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의 교육[편집]

宋·元-敎育

송태조(宋太祖)는 5대(五代) 무신들의 발호를 교훈삼아 문치(文治)를 숭상하였다. 문치는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거란족(契丹族)의 침입, 서하(西夏)의 반란 등으로 국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뒤 요(遼)·금(金)이 일어나 송나라를 공격하여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강남(江南)으로 도피한 송나라 사람들에 의해 남송(南宋)이 건립됐으며, 몽고가 다시 일어나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元)나라를 건설했다.

송나라는 국위가 실추되고 국력이 약하여 외환(外患)으로부터 한시도 안정을 찾지 못했지만 교육과 문화는 크게 발전했다. 교육제도는 대체로 수·당(隋唐)의 그것을 인습(因襲)했지만 고시제도를 완비했다. 교육사상면에서는 이학(理學)을 중심으로 삼고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다. 또한 사학(私學)과 서원제도(書院制度)가 더욱 발달했고, 학교는 조직적인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했다. 선비들도 절조(節操)와 덕행을 중시하는 풍토를 보임으로써 당말(唐末)의 비열한 선비의 모습을 일신했다. 그러나 학파가 난립하여 상호 공격하니, 이러한 학파의 분쟁이 당쟁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애석한 일이다.

몽고는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의 주인이 되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하였다. 몽고는 중국을 장악한 후 몽고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한민족(漢民族)에게 몽고문자를 사용케 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결국 한문화에 동화되었다. 원(元)의 정치제도는 중국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또한 교육제도 역시 송나라 제도를 인습하였으나, 자기 민족에 대해서는 특수교육을 베풀고, 한족(漢族)에 대해서는 송나라의 교육제도를 답습하였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 밖에 과거(科擧)와 학교제도는 대체로 송나라 이전의 제도를 따랐다. 송의 이학(理學)은 여전히 원나라 교육사상의 중심을 이루었다. 송나라는 이학을 창조했으나, 원나라는 이것을 답습하였을 뿐 새로운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학은 원대에 상당히 발달했다.

송대의 중앙학교[편집]

宋代-中央學校

송태조는 문치를 표방하고 유학의 진흥에 힘썼다. 태종(太宗)을 거쳐 진종(眞宗) 때 국내정치는 안정되고, 이때부터 교육은 가장 중요한 국책의 하나가 되었다. 송대의 중앙교육기관 들은 창설 시기가 각각 다르고 변혁이 잦아 그 성질도 복잡하다. 당시의 중요한 교육기관은 대략 15종으로 추산된다. 즉 태학(太學)·벽옹·4문학(四門學)·광문관(廣文館)·율학(律學)·산학(算學)·서학(書學)·의학(醫學)·도학(道學)·무학(武學)·화학(畵學)·소학(小學)·내소학(內小學)·종학(宗學)·제왕궁학(諸王宮學) 등을 말한다. 태학·벽옹·4문학·광문관은 대학에 해당한다. 율학·산학·서학·의학·도학·무학·화학 등은 전문학교에 해당한다. 소학과 내소학은 소학 과정이고, 종학과 제왕궁학은 대학과 소학의 과정이 모두 있는 귀족학교이다.

도학[편집]

道學

휘종(徽宗) 때 창설된 것으로, 당나라 때의 숭현학(崇玄學)과 같은 성질의 교육기관이다. 노장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3년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것은 당시 불학과 노장학을 반대하는 유학파의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무학[편집]

武學

인종(仁宗) 때 창립되었다가 그뒤 잠시 폐교되고 신종 때 다시 부활되었다. 제가병법(諸家兵法). 역대의 전쟁사 및 충의(忠義)에 관한 사실(史實) 등을 가르쳤다.

화학[편집]

畵學

산학과 동시에 창립되었다. 불교미술·인물·산수(山水)·조수(鳥獸)·화죽(花竹)·옥목(屋木) 등을 그리는 화법을 가르쳤다. 또, <설문(說文)> <이아(爾雅)> <방언(方言)> <석명(釋名)> <사류(士流)> 등도 가르쳤고, 대경(大經)과 소경(小經)을 각각 하나씩 가르쳤다.

내소학[편집]

內小學

이종(理宗) 때 성립되었다. 황실의 종친(宗親)자제 가운데 10세 미만인 자로서, 자질이 우수한 어린이가 입학했다.

종학[편집]

宗學

신종 때 창립되어, 그뒤 폐교되었다가 휘종 때 부활되었고, 남송(南宋) 고종 때 다시 설립되었다. 종실의 자제는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학과 소학 과정이 모두 있는 귀족학교이다.

제왕궁학[편집]

諸王宮學

북송 때 설립되었는데, 남송 때도 계승되어, 영종(寧宗) 때 종학에 편입되었다. 황실의 자제가 교육받는 곳으로, 대학과 소학의 과정이 모두 있는 귀족학교이다.

송대의 태학[편집]

宋代-太學

태학은 송나라 초기에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렸다. 국자감은 학교를 관할하는 최고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교육기관으로 호칭될 때는 국자학(國子學)이라 하였다. 국자학은 국가의 최고학부이다.

입학자격[편집]

入學資格

국자학의 학생은 국자생(國子生)과 태학생(太學生)을 나누어 선발했다. 국자생은 경관(京官) 7품 이상의 자손만이 입학할 수 있었고, 모집정원은 200명이었다. 태학생은 8품 이하의 하급관리 자제와 서민의 자제 중 우수한 자로 충원했다. 신종 때 왕안석(王安石)의 건의로 3사법(三舍法)을 실행하여, 학생의 정도에 따라 3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우수한 자는 상사(上舍)에, 중급은 내사(內舍)에, 저급은 외사(外舍)에 거주시켰다. 휘종 때는 각주의 주학(州學) 학생 가운데 우수한 자를 3년에 한 번씩 선발하여 태학에 입학시켰다. 남송 때는 혼보(混補) 및 대보(待補)라는 제도가 생겼다. 과거시험이 끝난 뒤 낙제생이 태학의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혼보라고 하였다. 그뒤 응시자가 너무 많아지자 폐단이 따르게 되어, 과거 구역을 단위로 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 100분의 6을 선발하고, 그 선발된 학생이 태학의 입학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대보(待補)라 한다.

학생 정원[편집]

學生定員

때에 따라 증감(增減)이 있었다. 처음에는 300명, 그뒤 700명으로 증원되고, 다시 2,400, 3,800명으로 증원되었다. 외사(外舍)의 학생이 가장 많고, 다음이 내사(內舍), 그 다음은 상사(上舍)였다. 상사의 정원은 가장 적을 때는 30명, 많을 때는 200명이나 되었다. 내사는 100-600명, 외사는 570-3,000명이었다.

교육 내용[편집]

敎育內容

태학의 교과과정은 수차의 변경이 있었다. 개국 초에는 5경(五經)을 교재로 삼고, 매계 학생은 1경씩을 학습해야 하며, 매경(每經)마다 박사 인을 두어 교육했다. 신종 때는 왕안석의 3경신의(三經新義:<詩> <書> <周禮> 新義)를 의무적으로 배우게 했다. 남송 때는 3경신의를 교과과정에서 빼고 5경을 교재로 삼아, 정주(程朱)어록과 4서(四書)를 교과과정 안에 넣었다.

시험[편집]

試驗 태학의 시험은 행(行)과 예(藝)를 주요내용으로 삼는다 행은 조행(操行)에 관한 것으로 학교의 규칙과 예의범절을 어느 정도 지키는가를 보는 것이다. 예는 학업에 관한 것으로 경(經)에 대한 이해력과 문장에 대한 조예를 보는 것이다. 시험의 종류는 사시(私試)와 공시(公試)·사시(舍試)의 셋이 있다. 사시는 월말고사이고, 공시는 학년말고사이며, 사시(舍試)는 졸업시험이다.

사시[편집]

私試 태학의 사시는 맹·중·계(孟仲季)의 3장(三場)으로 나눈다. 맹월(孟月)에는 경의(經義)를, 중월(仲月)에는 시부(詩賦)를, 계월(季月)에는 책론(策論)을 시험했다. 감중사(監中司)가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학관(學官)을 파견해서 시험을 관리했다.

공시[편집]

公試

1년에 한번 있는 공시는 외사생(外舍生) 가운데서 우수한 자를 뽑아 내사생(內舍生)으로 진급시키기 위한 것이다. 초장(初場:1차시험)에선 경의(經義)를, 차장(次場)에선 책론(策論)을 시험했다. 이 시험에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면 내사생으로 승급한다.

사시[편집]

舍試 사시는 내사시(內舍試)와 상사시(上舍試)의 두 가지가 있다. 내사시에 합격하면 상사(上舍)로 진급하고 상사시에 합격하면 관직이 부여된다. 내사생의 수업 연한이 2년이 되면 그의 학업성적과 평소의 행예(行藝)를 참조하며, 합격자는 상사생(上舍生)이 된다. 상사생은 2년간의 교육을 받고 졸업시험을 치른다. 조정에서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시험을 관리한다. 조행과 학업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눈다. 상등은 관직을 배수받고, 중등은 예부(禮部)에서 실시하는 성시(省試)에 합격한 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교직원[편집]

敎職員

태학은 국자제주(國子祭酒)인 장이(長貳)가 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고, 그 밑에 박사 10인을 두어 교육을 담당한다. 또 학록(學錄)·학정(學正) 각 5인을 두어 학교규칙을 지키도록 훈도하는 책임을 맡는다. 학록·학정의 업무를 보좌하기 위해 직사학록(職事學錄)을 5인 두고, 학유(學諭) 20인을 두어 박사의 교육을 도왔다. 직학(直學) 4인을 두어 학생들의 학적업무를 맡아보게 하고 학사(學舍)마다 재장(齋長)과 월유(月諭)를 하나씩 두어 학생들의 행예(行藝)를 기록하고, 학교규칙을 준수하도록 감독했다.

송대의 지방학교[편집]

宋代-地方學校

송대의 지방 행정구역은 3급제(三級制)였다. 제1급은 노(路), 제2급은 주·부(府)·군(軍)·감(監)의 4종 명칭이 있다. 주(州)는 지방마다 모두 있지만 부·군·감은 지방의 특수상황에 따라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제3급은 현(縣)이다. 지방학교는 이러한 행정구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주에 있는 것을 주학(州學), 현에 있는 것을 현학(縣學)이라 한다. 주학과 현학은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할했다. 신종(神宗)은 노학관(路學官)을, 휘종은 제로제거학관(諸路提擧學官)을 두었고 남도(南渡) 이후에는 주관학관(主管學官)을 두었다. 각급학교의 교육자를 교수라 하는데, 주학에는 2인, 현학에는 1인을 두었다. 인종(仁宗) 때, 200인 이상의 학생이 있어야 현학을 설립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각급학교는 공자(孔子) 및 10철(十哲)의 화상(畵像)과 위폐를 모시고 절일(節日)과 삭일(朔日)에 예를 행했다. 각급 학교에는 학전(學田)이 있어 학교의 경비를 여기서 충당하고, 학생들의 숙식은 학교에서 제공했다. 교육내용은 태학과 비슷했으나 그 정도가 조금 낮았다. 철종(哲宗) 때 태학의 3사법(三舍法)이 시행됨으로써 현학의 학생은 주학, 주학의 학생은 태학으로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휘종이 각 주현(州縣)에 의학(醫學)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또한 각 주학과 현학 안에 노자(老子)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사(學舍)를 두도록 하명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휘종은 또 각 주현에 소학(小學)을 설치케 하고, 입학 연령은 10세 이상으로 하였다. 이로써 보면 송대의 지방학교는 대학·소학·전문학교의 세 가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방대학의 과정은 태학보다 낮았다.

송대의 서원[편집]

宋代-書院

서원은 송대의 중요한 학교기관이다. 그 지위는 관학과 사학의 중간을 차지한다. 서원의 경비는 대부분 학전(學田)에서 충당되고, 학전은 정부에서 제공하거나, 공공재산을 전용하거나, 아니면 개인이 헌납한 것이다. 학전 이외에 정부에서 보조한 것도 있다. 따라서 경비의 출처를 고찰하면 서원이 관학과 사학의 중간에 위치함이 분명하다.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때부터 있었다. 현종(玄宗) 때의 여정서원(麗正書院)·집현서원(集賢書院)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은 교육기관이라기보다 공무를 집행하는 곳이었다. 학교 성질을 띤 서원은 5대(五代)의 남당(南唐) 때 비롯되었다. 남당의 승원중(昇元中)은 여산(廬山) 백록동(白鹿洞)에 학관(學館)을 건립, 전묘를 설치하고 학생을 모집하여, 이선도(李善道)를 동주(洞主)로 삼음으로써 정식 서원이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는 백록동(白鹿洞)·숭양(嵩陽)·악록(嶽麓)·응천(應天) 등 4대서원이 있었다. 서원의 책임자는 대부분 당대의 대유(大儒)들로서 동주(洞主)·동정(洞正)·당장(黨長)·산장(山長)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이 밖에 부산장(副山長)·조교·강서(講書) 등의 보조원이 있었다. 서원은 장서(藏書)·공사(供祀)·강학(講學)의 3대 기능을 가진다. 서원에서의 강사 진용도 다양하다. 관리가 교사로 나올 때도 있고, 서원의 책임자가 강의하거나, 그의 고제(高弟)가 대리강의를 할 때도 있고, 대유를 초청하여 강의하기도 하였다. 강의내용도 다양하여 심성(心性)을 밝히는 것, 절실한 실천문제, 또는 질문을 던져 그의 지향(志向)을 관찰하는 것, 또 학칙을 정해 준수하는 것 등등 일정치 않았다. 독서와 침식의 시간을 정하고, 수양방법으로 절실한 것들을 확실하게 밝혀 주었다. 장남헌(張南軒)의 <변의리(辨義利)>, 주회암(朱晦菴)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육상산(陸象山)의 <선립평대본(先立平大本)> 등을 모두 궁행실천(躬行實踐)하는 문제에 대한 강의이고, 공리공담은 아니었다.

서원제도는 북송 때에 형성된 뒤, 남송시대에 이르러 매우 성행하게 됐는데, 그 특징으론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종전의 사학이 조직면에서 결핍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송대서원은 조직화되어 그 지방의 단체력을 표현한다. 또한 과거제도가 성행한 이후 선비들은 공명(功名)을 얻기 위해 학문을 수단화하게 되는데, 송대의 서원은 이러한 악습(惡習)을 시정하고자 '의리지학, 수양지도(義理之學, 修養之道)'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송대의 서원은 중국의 교육사(敎育史)에 있어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남송의 서원이 발달한 원인으론, ① 이학운동(理學運動)의 결과, ② 목판인쇄술(木板印刷術)의 발달, ③ 선학(禪學)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송유(宋儒)들은 이록지학(利祿之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당시 부패한 선비사회에서 이학을 제창하기 위해 서원의 조직이 필요했다. 따라서 서원의 발달은 이학의 발흥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또한 목판인쇄술의 발달은 도서의 급증을 초래했고, 도서의 보관장소가 곧 교육장소로 변한 것이다. 위진(魏晋) 이래로 불교신도들은 산림(山林)의 승경(勝境)에 선장(禪場)을 짓고, 불경을 강론하고 참선했는데, 이러한 선장은 서원의 기능과 유사하다. 따라서 서원이 이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송대의 사학[편집]

宋代-私學

송대의 사학은 종전에 비해 훨씬 더 발달했고, 손명복(孫明復)·호안정(胡安定)·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등은 이러한 사학의 대표자들이다. 이 중 호안정이 사학에 끼친 영향은 컸다. 그는 인종 때 사람으로, 주학(州學)·태학(太學) 등 관학에서 오랫 동안 교육했지만, 사학의 입장에서 관학의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사학의 교육방법에 의해 양성되었다.

원대의 국자학[편집]

元代-國子學

국자학의 학생 정원은 처음에 80명이었는데 뒷날 400명으로 증가하고 배당생(陪堂生;오늘날의 聽講生을 말함) 20명을 둘 수 있었다. 숙위(宿衛) 대신의자손, 위사세가(衛士世家)의 자제, 7품 이상의 조관(朝官)자손에 한하여 입학 자격이 부여되었다. 평민의 자제 가운데 우수한 자는 3품 이상의 고관 추천을 받아 배당생이 될 수 있었다. 박사·조교·정록(正錄)·사악(司樂)·전적(典籍) 등의 학관(學官)이 배치되어 교육과 교육 행정을 맡았다.

교과과정은 <효경(孝經)>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 <대학> <중용>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시> <서> <예기> <주례> <춘추> <주역>을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학생의 실력에 따라 상·중·하의 3급으로 나누고, 급마다 양재(兩齋)를 두어 모두 6재가 있었다. 시험의 종류는 승재시(升齋試)와 사시(私試)의 두 가지가 있었다. 매계(每季)의 마지막 날에 승재시가 있어 성적이 합격선에 이르고 규칙을 어기지 않은 학생은 승급했다. 2년 이상 교육받은 학생으로 과오가 없는 자는 사시(私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한인(漢人)은 상재생(上齋生)이 되어야 응시자격이 있고, 몽고 색목인(色目人)은 중재생(中齋生)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인보다 몽고 색목인을 우대한 소치이다.

원대의 지방학교[편집]

元代-地方學校

원대의 지방행정구역은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나누었는데, 전국에 11개의 행중서성이 있었다. 행중서성의 관할 아래 노(路)·부(府)·주(州)·현(縣)이 있고, 노·부·주·현에는 각각 학교가 있어 노학, 부학, 주학, 현학이라 했다. 학교의 등급에 따라 교수·학정(學正)·교유(敎諭) 등 교관(敎官)이 있었다. 각 노(路)에는 제거학교관(提擧學校官)이 있어 지방의 학교행정을 맡았다. 각급학교의 교재는 4서 5경(四書五經)이었고, 학생들은 누구나 향시(鄕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지방학교로서 몽고자학(蒙古字學)·의학(醫學)·음양학(陰陽學)이 있었다.

몽고자학의 교재는 몽고국자학과 같고 노·부·주에는 설립했으나 현에는 설립하지 않았다. 각 노와 부의 고급관리 자제가 입학하며 민간인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다. 각지의 노에는 의학을 설치하고, 노의 제거절제(提擧節制)를 거쳐 중앙의 태의원(太醫院)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중앙에는 의학이 없고 태의원만이 있었다. 졸업 후 관청의 의료 인원에 충원되었다. 중앙에는 음양학이 없고 사천대(司天臺)만이 있었으나 각 노에는 음양학을 설치하여 천문술수(天文術數)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송대의 과거제도[편집]

宋代-科擧制度

송대의 과거제도는 세 종류로 분류된다. 즉 제거(制擧)와 학선(學選)·상공(常貢)을 말한다. 제거는 천자(天子)가 직접 선발하는 것으로 비정기적이며, 일정한 규정도 없다. 학선은 대학의 3사(三舍)에서 뽑는 것이다. 상공은 주와 현에서 선발하여 예부(禮部)의 시험을 거치는 것이다.

상공[편집]

常貢

상공에 의한 인재 선발제도는 송대에서 가장 오래 실행되었다. 송나라 초기에는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상공 안에 진사(進士)·구경(九經)·오경(五經)·개원례(開元禮)·삼사(三史)·삼례·삼전(三傳)·학구(學究)·명경(明經)·명법(明法) 등 9과가 있었다. 이 밖에 특수한 것으로 굉사과(宏詞科)·원우십과(元祐十科)·동자시(童子試)·의학과(醫學科)·무거(武擧) 등이 있었다. 굉사과는 문학에 밝은 선비를 뽑는 시험으로, 남송 때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라고 개칭했다. 원우십과는 행위가 사표(師表)될 만하고, 절조가 방정(方正)하거나, 지용이 출중하거나, 경술에 정통하거나, 학문이 연박(淵博)하다는 등 10가지의 표준에 맞는 인재를 지방관리 등이 천거토록 하여 뽑는 것으로, 일종의 선거 형식을 취했다.

송대의 과거제도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것이 상공(常貢)의 제과(諸科)이고, 그 중에서도 명경(明經)·진사(進士) 양과가 가장 널리 쓰였으며, 진시과가 명경과보다도 중시되었다. 명경은 경의(經義)의 기억 능력을 측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진사는 재능을 측정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요·금·원의 과거제도[편집]

遼金元-科擧制度

요의 과거는 처음에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해마다 1차례의 공거(貢擧)가 있었으나, 그뒤 송제(宋制)를 모방하여 3년에 한 차례씩 향(鄕)·부(府)·성(省)의 3시(試)가 있었다. 시험내용은 양종(兩種)으로, 하나는 시부(詩賦)였고, 다른 하나는 경의(經義)였으며, 법률에 관한 시험으로 뽑는 일도 있었다.

금(金)은 3년에 한 번씩 과거를 실시하고, 출제의 범위는 5경3사(五經三史)에 한하였다. 과거의 종류는 사부(詞賦)·경의(經義)·책론(策論)·율과(律科)·경동(經童) 및 여진진사(女眞進士)의 7종이었다. 여진진사과는 여진문자(女眞文字)로써 책론과 시부를 시험하고, 말타기와 활쏘기가 첨가되었다. 사부·경의·책론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고, 율과·경동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된다. 진사·거인은 향시·부시·성시를 거쳐 전정(殿廷)에 이르며, 이 4시(四試)에 합격하면 관직이 수여된다.

원(元)대의 과거제도는 당송(唐宋)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무거(武擧)는 없애고, 무관은 세습제로 하였다. 원대의 과거는 특과(特科)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3년에 한 번씩 시행했다. 과거는 향시·회시(會試)·정시(廷試)의 3급(三級)이 있었다.

각급 고시의 내용은 종족(種族)에 따라 달랐다. 향시와 회시는 3장(三場)으로 나누어, 몽고·색목인(色目人)은 제1장에서 경문 5조(經問五條)를 시험하는데 전부 4서(四書)에서 출제되었다. 제2장은 시무책(時務策)으로 500자 이상을 써야 한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南宋의 遺民을 말함)은 제1장시는 4서 및 5경에서 출제되었다. 제2장시는 고부(古賦)·조고(詔誥)·장표(章表)에서 출제되고, 제3장시는 경사(經事)·시무(時務) 안에서 출제되었다. 몽고인 우대정책이 과거시험에도 반영된 것이다. 정시(廷時)는 1장뿐이었다. 몽고·색목인은 시무책(時務策) 한 편을, 한인 남인은 시책(時策) 한 편을 시험한다. 4서·3경 안에서 출제되었다.

송대의 교육사상[편집]

宋代-敎育思想

한(漢) 이후 유학·불학·노장학은 각각 성쇠(盛衰)를 반복해 오다가 당나라에 이르러 3교 통일의 기운이 높아졌고, 한유(韓愈)가 불로(佛老)를 배척하고 유학의 중흥을 제창함으로써 유학의 지위는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초기에 유학자들이 분기하여 유학을 정리하고, 불학과 노장학의 이론을 대폭 받아들여 새로운 유가사상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유가를 신유가(新儒家)라고 부르는데, 종래의 경학이 훈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경전의 자의(字義)를 정확히 해석하려는 데만 골몰한 한학(漢學)과 구별하는 의미로 송학(宋學)이라고도 한다. 송학은 주역(周易)이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의 원리를 천명한 것으로 보고, 주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논의를 전개하였다. 또한 그들은 인생문제 해명에 있어 <대학> <중용> <논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 평가하고, 4서(四書)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였다. 지난날의 한학(漢學)이 훈고학에 머문 데 대해 불만을 느끼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폭넓고 깊게 탐구하려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송학의 정신이 의리를 존중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들은 우주와 인간을 일관하는 근본원리로서 이기(理氣)의 개념을 강조하므로 송학을 이학(理學)이라고도 한다. 송·원시대는 이러한 이학 사상이 성황을 이루었다.

주돈이[편집]

(1017-1073)

송대 정주학(程朱學)의 선구자. 호는 돈이, 자는 무숙(茂叔). 그의 주요 저작은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 등이다. 그는 정이천(程伊川)·정명도(程明道)의 스승이기도 하며, 송학의 주류인 정주학의 개척자이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성현과 같은 인격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보는 점에서 유학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그는 사고(思考)와 무욕(無欲), 그리고 양사(良師)의 지도를 받는 것 등을 강조했다.

정호[편집]

程顥 (1032-1085)

송나라의 유학자. 호는 명도(明道), 자는 백순(伯淳). 이천(伊川)이 바로 그의 동생이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인(仁)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보며, 이 인(仁)의 이치를 터득한 뒤에는 성경(誠敬)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교육의 방법으로 주경(主敬)·내외양망(內外兩忘)·자득(自得) 등의 세 가지를 든다. 그는 경(敬)이 구학(求學)의 근본방법이라 주장하는데, 이 경은 주렴계의 사(思)의 뜻과 비슷하다. 경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힘,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세계 등에 대해 갖는 경건한 마음을 말한다. 그는 학자들이 외부 사물에 대해 반응할 때, 또는 홀로 있을 때를 막론하고, 이러한 경의 마음을 잃지 않음으로써 인(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외양망'이란 자기의 존재와 외부사물의 존재를 모두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인(仁)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득'은 맹자의 물조장(勿助長)의 뜻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학자가 이 경의 심성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함양(涵養)해야 하며, 이러한 수양을 쌓는 데 급속한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이[편집]

(1033-1107)

송대의 주자학자. 호는 이천(伊川), 자는 정숙(正叔). 그는 이기론(理氣論)을 체계화하여 주자학을 개척하였고, 교육의 목적이 성인이 되는 데 있다는 주장은 일반 유자(儒者)들의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교육 방법론에서 그는 좀더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데 있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똑같이 중시한다. 거경은 심성을 함양하는 것이고, 궁리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거경은 대학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을, 궁리는 격물(格物)·치지(致知)를 발전시킨 것이다.

주희[편집]

朱熹 (1130-1200)

송나라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고정(考亭)·자양(紫陽)·우계(尤溪) 등. 그는 성리학을 집대성하였으며, 그의 사상 안에 공자의 인(仁), <중용(中庸)>의 성(誠), 맹자의 인의(仁義),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천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및 거경궁리설(居敬窮理說) 등이 용해되어 있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교육사상은 그의 이기설(理氣說)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성품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나누고, 교육을 통해 기질지성은 변화될 수 있고, 본연지성이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인(聖人)이 될 수 있고, 교육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주자의 교육방법론은 구학(求學)의 방법과 교학(敎學)의 방법을 포괄한다. 그는 구학의 방법으로 입지(立志)와 정진(精進)·역행(力行)의 세 가지를 들었다. 교학(敎學)의 방법으로 정몽(正蒙)·흥취(興趣)를 북돋우는 것, 예컨대 학문에 대한 존엄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음악과 체육으로 균형발전을 지향하는 것, 학생의

재질에 알맞게 시교(施敎) 하는 것 등을 강조한다. 정몽이란 유아 시절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아동교육을 가장 중시하는 그의 교육관을 표현한다. 또한 그는 학생의 흥취를 북돋기 위해서는 가무(歌舞)를 학습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영(歌詠)으로는 성정(性情)을 함양하고, 성음(聲音)으로는 이목(耳目)을 함양하며, 무도(舞蹈)로는 혈맥을 함양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인간의 본성을 확충(擴充)해야 한다는 맹자의 교육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육구연[편집]

陸九淵(1138-1191)

송대의 유학자. 호는 상산(象山), 자는 자정(子靜). 주자와 함께 송대 유학의 쌍벽(雙璧)을 이룬다. 주자가 이학(理學)의 집대성자인 데 반하여 상산은 심학(心學)의 개척자이다. 그뒤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이 성산의 심학을 계승하여 더욱 심화(深化)시킴으로서 육왕심학(陸王心學)이란 명칭으로 불리어진다.

상산은 교육의 목적이 우주의 본체인 이(理)를 밝히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해서 이를 밝힌다. 함은, 곧 인간 본심을 깨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본심을 깨치는 것이 곧 우주의 본체를 밝히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입지(立志)·소립(所立)·사고(思考)·주정(主靜) 등을 든다. 소립이란 외부사물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정이란 정좌(靜坐)공부를 말한다. 이러한 그의 교육방법은 정이천의 거경(居敬)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거경 못지않게 궁리(窮理)를 강조하는 주자학파와 구별된다.

원조의 교육사상[편집]

元朝-敎育思想

몽고민족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중국의 북방지역을 장악하고 원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자신의 고유한 사상이 없어 송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태종(元太宗)이 송나라를 정벌할 때, 남방의 이학자(理學者) 조복(趙復)이 연경(燕京)에 이르러 학생들을 교육함으로써 유학이 전파되고, 그뒤 허노재(許魯齋)·유정수(劉靜修) 등이 등장하여 북방문화의 부흥을 보았다. 원조의 유학은 허노재·유정수 등의 주자학파, 진정명(陳靜明)·조보봉(趙寶峯) 등의 육상산학파, 오초려(吳草慮)·정사산(鄭師山) 등의 주·육조화파(朱·陸調和派)로 대별된다. 따라서 교육사상에 있어서도 주자학파는 도문학(道問學)을 중시하고, 육상산학파는 존덕성(尊德性)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허형[편집]

許衡(1208-1280)

원나라의 유학자. 호는 노재(魯齋), 자는 중평(仲平). 그는 조복(趙復)의 제자로, 유학자들 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생산교육의 주창자이다. 그는 이론적으로 생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몸소 밭갈이하면서 이를 실천했다. 그러나 구학(求學)의 면에서 사고(思考)와 지경(持敬)을 강조한 것은 정주학파(程朱學派)의 거경(居敬)·궁리(窮理)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민족(漢民族)이 이민족에 유린되는 상황 아래에서 구학하는 유학자의 비애를 절감하면서 궁행실천(躬行實踐)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