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중세 교육사상/수·당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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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의 교육[편집]

隋·唐-敎育

수·당(隋唐)은 진·한(秦漢)과 마찬가지로 혼란으로부터 통일로 진행하는 과도기였다. 그래서 수·당과 진·한 사이에는 정치 및 문화면에서 비슷한 유형을 보인다. 수·당은 천하를 통일한 뒤 대내적으로는 사상의 통일과 정치권력의 집중을 기도하고, 대외적으로는 무력의 확장을 기도하였다. 이 점은 진·한과 다를 것이 없다. 진·한은 무력에 의해 국력을 대외로 확산코자 하였으나 수·당은 무력 이외에 중원문화(中原文化)로써 이민족을 동화(同化)하려 했다. 그래서 한민족은 다시 무력과 문화면에서 이민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안(長安)을 찾아온 외국인은 급속히 증가되고, 많을 때는 4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교지(交趾) 등 각국의 유학생은 문화 교류에 기여했고, 한문화권(漢文化圈)은 크게 확장되었다.

교육면에서도 수·당시대에 이르러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 첫째, 과거제도의 실시이다. 그전에 실시되어 온 선사 제도가 덕행과 여론을 중시하여 인재를 선발한 반면, 과거제도는 지식을 위주로 하고 고시(考試)를 중시하였다. 고시는 객관적인 표준에 의거하여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국학(國學) 이외에 의학(醫學)·율학(律學)·산학(算學)과 같은 전문학교를 세워 직업교육을 실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발전된 사회상황에 따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였음을 말한다. 셋째, 사상의 통일을 이룩했다는 점이다. 수·당 시대는 비록 불학(佛學)의 전성기였지만, 제도면에서는 여전히 유가학설을 기틀로 삼고 있었다. 경의(經義)와 경문(經文)을 통일하여 <5경정의(五經正義)>를 표준으로 삼음으로써 사상을 통일할 수 있었다. 사상의 통일은 이후 송·명이학(宋明理學)의 발흥에 기여한다. 넷째, 불교를 중국화하였다는 점이다. 수·당 이전은 불교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단계에 있었지만, 수·당 시대에 이르러 불학은 중국문화에 동화된다.

당나라 때 인도에 유학한 승려는 49명에 이르고, 이들에 의해 번역된 불경은 2천여 권이었다. 불교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이후 이학(理學)의 발전을 돕는다.

수·당의 학교[편집]

隋唐-學校

수문제(隋文帝)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 3대(代) 만에 망했기 때문에, 그 역사는 대단히 짧지만 정치 및 교육제도의 개혁은 대단히 많았고, 당나라는 수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 그 대부분이었다. 수문제는 교육행정권을 장악하는 국자사(國子寺)를 설치하여, 태상(太常)으로부터 독립시켜 제주(祭酒)가 교육을 전담하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국자사 밑에는 국자(國子)·태학(太學)·4문(四門)·서학(書學)·산학(算學)·율학(律學)을 두었다. 국자·태학 및 4문은 경전을 연구하는 것으로서 이전의 교육내용을 답습한 것이나, 서학·산학·율학을 보충한 것은 수나라 때 비롯된 것이다.문제는 군현(郡縣)에도 박사를 설치하여 예를 배우게 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 이 제도는 그 뒤 다소 변경되었다가 양제(煬帝) 때 부활되었다.

당대의 학교제도[편집]

唐代-學校制度

중국의 학교제도는 당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비되었다. 중앙의 국자학·태학·4문학·서학·산학·율학의 6학은 국자감에 속했고, 국자감은 상서성(尙書省)의 예부(禮部)에 소속됐는데 국자감의 장관을 제주(祭酒)라 일컫는다. 6학 중 국자학·태학·4문학은 대학 과정이고, 서학·산학·율학은 전문(專門)과정이다. 이상은 정식학교이고, 이 밖에 5종의 특수학교가 있었다. 즉 숭문관(崇文館)·홍문관(弘文館)·의학(醫學)·숭현관(崇玄館)·소학(小學)을 말한다. 숭문관은 동궁(東宮) 직할로 황실(皇室)·외척(外戚) 및 경관(京官) 3품의 자손이 입학할 수 있었다. 홍문관은 문하성(門下省) 직할로 경관 5품 이상 자손으로 서예를 배우려는 자가 입학하였다. 그 교육 과정은 서법(書法)에 치중했다. 이상 두 학교는 귀족학교로서 대학 과정을 가르쳤다. 의학은 태의서(太醫署) 직할로 중서성에 속했으며, 숭현관은 통도학(通道學)이라고도 하는데 예부(禮部) 직할로 상서성(尙書省)에 소속했다. 이 두 학교는 직업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학은 비서성(秘書省) 직할로 소학 과정의 귀족학교였다.

국자학·태학·4문학은 비록 대학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근대의 대학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그들의 소재지가 모두 지방이 아니라 수도(首都)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계급에 따라 학생을 모집했다는 사실이다. 국자학과 태학은 공경(公卿)대신의 자손만이 입학을 할 수 있었고 하급관리와 평민의 자제는 입학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설립목적이 다분히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 졸업생은 대부분 고시를 거쳐 벼슬하였다. 국자학과 태학·4문학은 교과 과정이나 기구면에서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학생입학 자격에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말한 자격은 학생의 교육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조(父祖)의 정치적 지위를 말한다. 부조의 지위가 높은 학생은 국자학에 입학하고, 그 다음은 태학, 하급관리와 평민의 자손은 4문학에 입학했다.

국자학[편집]

國子學

국자학의 학생 정원은 300명으로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입학할 수 있었다. ① 문무관(文武官) 3품 이상의 자손, ② 종 2품 이상의 증손, ③ 훈관(勳官) 2품 현공(二品縣公)의 아들, ④ 경관(京官) 4품 가운데 3품 훈봉(三品勳封)을 가진 이의 아들. 박사 5인이 교사가 되었으며, 경(輕) 한 과목을 전담하고 학생 60명을 가르쳤는데, 이들에게는 조교가 1명씩 따랐다. 직강(直講) 4명이 박사를 도와 경술(經術)의 강의를 하였다. 이밖에 또 박사 2인이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좌씨춘추(左氏春秋)·예기(禮記)의 5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는 본과(本科) 이외의 공동학과였다.

태학[편집]

太學

태학생의 정원은 500명이었다. 입학 자격은 ① 5품 이상의 자손, ② 3품관의 증손, ③ 직사관(職事官) 5품의 기친(期親), ④ 훈관 3품 이상 중 책봉받은 이의 아들로, 여기에는 박사 6인과 조교 6인을 두었다.

사문학[편집]

四文學

4문학의 학생 정원은 1천300명이었다. 그중 500명은 관리의 자제들로 충원되었다. 그 입학 자격은 다음과 같다. ① 훈관 3품 이상의 벼슬아치 가운데 봉작(封爵) 없는 이의 아들, ② 훈관 4품 가운데 봉작 있는 이의 아들, ③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 그 나머지 8백명은 평민의 우수한 자제를 위한 것이었다. 박사 6인, 조교 6인, 직강 4인이 교육했다.

율학[편집]

律學

율학은 각조(各朝)의 법률 내용과 격식 및 법례를 배우는 학교로서, 수업연한은 6년이었다. 8품 이하의 관리 및 평민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고, 학생 정원은 50명이었다. 율학박사 3인과 조교 1인이 교육했다.

서학[편집]

西學

서학은 서법을 익히고 국어와 설문(說問)·자림(字林)·3창(三蒼)·이아(爾雅) 등 어학에 관한 교육도 받을 수 있는 직업학교이다. 수업 연한은 석경 3체(石經三體) 3년 설문 2년, 자림 1년이었다. 학생 입학자격은 율학의 경우와 같고, 학생 정원은 30명이었다. 서학박사 3인과 조교 1인이 교육했다.

산학[편집]

算學

산학에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가 있었다. 갑조는 산학의 원리를 배우고 을조는 산술(算術)을 실습하는 데 치중했다. 갑조의 교과목은 9장(九章)·해도(海島)·손자(孫子)·5조(五曹)·장구건(張邱建)·하후양(夏候陽) 등의 서적이었다. 을조는 철술(綴術)·즙고(緝古) 등을 실습했다. 수업 연한은 손자·5조가 1년, 9장·해도가 3년, 장구건·하후양이 각각 1년이었으며, 철술 4년, 즙고가 3년이었다. 양조(兩組)의 공동 필수과목은 기유(紀遺)와 3등수(三等數)였다. 입학 자격은 율학과 같으며, 학생 정원은 30명이었다. 산학박사 2인과 조교 2인이 교육했다.

숭현관[편집]

崇玄館 숭현관은 도가(道家)의 경전을 교육하는 학교로서, 수나라 때의 숭현서(崇玄署)가 발전된 것이다. 수의 숭현서는 홍로에 소속하여 전국의 승려와 도사를 관리하였다. 당초부터 도교가 숭봉(崇奉)되어 숭현서가 설치되고, 당현종(唐玄宗) 때는 노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라 추숭(追崇)하고, 양경(兩京) 및 각 주(州)에 현원황제묘를 세우고 숭현학을 설치했다. 양경의 숭현학에는 박사·조교를 각각 1인씩 두고 학생은 100명이었다. 도가 경전을 배우고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그뒤 숭현관으로 고치고 박사를 바꾸어 부르며, 대학사(大學士) 1인을 두어 재상(宰相)의 직위를 수여하고, 양경의 현원관(玄元觀)과 도원(道院)을 관리케 했다. 각 주의 숭현학을 통도학(通道學)이라 개명하고, 박사를 학사로 호칭하였다.

당대의 교육내용[편집]

唐代-敎育內容

국자학·태학·4문학과 홍문관·숭문관의 교육내용은 같다. 그러나 홍문관과 숭문관의 학생은 황실과 외척의 자제들이므로 문리(文理)에 다소 이해가 있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정도는 국자학·태학의 과정보다 낮았다. 이상 각 학교의 교육내용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하였다. 경학은 대(大)·중(中)·소(小)의 3종으로 나뉜다. 대경은 <예기> <좌전>, 중경은 <시경> <주례(周禮)> <의례(儀禮)>이며, 소경은 <역(易)> <상서> <공양전> <곡량전>이었다.

학생의 수업은 대체로 통2경(通二經), 통3경, 통5경으로 나뉜다. 통2경은 대경과 소경을 각각 1종씩 배워야 하고, 때로는 중경 2종이 첨가되었다. 통3경은 대경·중경·소경을 각각 1종씩 배운다. 통5경은 대경을 전부 이수하고 중경과 소경을 1종씩 배운다. 이 밖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의 공동 필수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효경>과 <논어>는 1년, <상서> <공양> <곡량전>은 각각 1년반씩, <역> <시> <주례> <의례>는 각각 2년씩, <예기> <좌전>은 3년간 배운다. 학생들은 경학을 배우는 여가에 예서(隸書)를 연습해야 하였다.

당대의 고시[편집]

唐代-考試

매년 중동(仲冬)에 국자감은 관할 각급학교에 고시관을 파견하여 학생들을 시험하였다. 모든 학생은 1년 동안 배운 범위 안에서 구두시험으로 10문제를 질문받아, 8문제 이상을 맞히면 상등, 6문제 이하는 하등으로 평정받는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1년 안에 상등이 못되면 공비(公費)의 지급이 중지되고, 3년 동안 계속 하등에 머물면 제적되었다.

학관(學館)의 학생들의 졸업 후 출사(出仕)하려면 국자감에서 시행하는 간시(簡試)에 응시해야 한다. 매년 간시에 응시한 학생이 때로는 1천여 명에 이르렀고, 7-8할은 도태되었다고 한다. 간시에 합격하면 국자감은 예부(禮部)에 통보하고, 예부에서 다시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벼슬할 자격을 인정받았다.

당대의 지방학교[편집]

唐代-地方學校

당대의 지방학교는 지방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당초(唐初)에 천하를 10도(十道)로 나누고, 도 아래에 주, 주 아래에 현(縣)을 두었다. 변방에는 6도호부(六都護府)를 두고, 도호부 아래에 도독부와 주(州)를 두었다 지방학교 역시 정계(正系)와 방계(旁系)로 나눌 수 있다. 경도(京都)에 있는 경도학(京都學), 부(府)에 있는 부학(府學), 주에 있는 주학(州學), 현에 있는 현학(縣學) 등은 정계학교(正系學校)였다. 방계(旁系)학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각 부와 주에 설립한 의학(醫學)이고, 다른 하나는 숭현학(崇玄學)이었다. 의학에는 박사 1인, 조교 1인 또는 2인을 두었다. 경도의 학생 정원은 20명 부주(府州)의 학생정원은 40-20명이었다. 정계학교의 학생 정원은 경도학의 80명, 대도독부·중도독부 및 상주(上州)의 학생은 각각 60명, 하도독부·중주(中州)·경현(京縣)의 학생은 각각 50명이었다. 각급학교는 학생수의 다소에 따라 박사 1인, 조교 1인 또는 2인을 보임했다. 그리고 이들 학교에는 지방관리의 자제 및 평민자제들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내용은 경전(經典)을 위주로 하였다. 졸업생은 중앙 각 대학에 진학할 필요없이 직접 향공(鄕貢)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수한 지방학생은 4문학에 보내어 유학시켰다. 지방학교의 교육 정도는 중앙보다 낮았다.

속수례[편집]

束脩禮

학생이 스승에게 사은(謝恩)의 뜻으로 바치는 예물을 말한다. 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학생이 처음 입학할 때, 속백(束帛) 1비, 술 한 병, 수(脩) 1안(一案)으로 속수례를 행했다. 태학·4문 및 율서·산 등 각급 학교는 모두 국자학의 방법에 따랐다. 신룡(新龍) 2년에 정부는 입학의 속수례를 규정했는데 국자학·태학은 견(絹) 3필, 4문학은 견 2필, 율·서·산학은 견 1필을 내고, 이 밖에 주포(酒脯)를 곁들여 속수례를 행하게 하였다. 속수의 5분의 3은 박사, 5분의 2는 조교에게 돌아갔다. 그 대신 학생들은 정부로부터 '늠급'을 받았다. 어떤 학생들은 '늠급'을 받을 목적으로 입학하기도 하여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수·당대 학교의 휴가제도[편집]

隋唐代學校-休暇制度

학생들에겐 열흘마다 하루씩 휴가가 있었는데 이를 순가(旬暇)라고한다. 매년 5월과 9월에 두 번 방학이 있었다. 5월의 방학을 전가(田暇)라 하고 9월의 방학을 수의가(授衣暇)라 하였다. 방학기간은 보통 1개월간이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 아래서는 연장할 수 있었다.

수·당대의 과거제도[편집]

隋唐代-科擧制度

당대(唐代)에는 선비를 뽑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각지 선비에 대한 고시로서 이를 향공(鄕貢)이라 했다. 다른 하나는 중앙의 관학을 졸업한 학생에 대해 시행하는 시험으로 생도(生徒)라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황제가 하조(下詔)하여 뽑는 것으로 제거(制擧)라 하였다. 앞의 두 고시는 정기적으로 시행되었고, 제거는 당시의 수요에 따라 시행하였다. 과거(科擧)는 주로 향공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수문제(隋文帝)는 위문제(魏文帝) 때 창시되어 400여년 실시되어 온 9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천거(薦擧) 방식을 채용하였다. 즉 경관(京官) 및 지방관이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명한 것이다. 양제(煬帝)에 이르러 진사과(進士科)를 설치하고, 고시로써 임관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당시 그다지 성하지 못하였고, 과거출신의 선비들도 정치면에서 권력을 갖지 못했다. 당초(唐初)에 이르러 이 제도는 정부가 선비를 뽑아 임관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당대의 향공은 학관출신이 아닌 선비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응시자는 먼저 주현(州縣)에 신청하고, 주현의 시험을 거쳐 합격된 자는 매년 중동(仲冬)에 예부(禮部)로 가서 학관(學館)의 생도들과 같이 시험에 참가하였다. 향공에 참가하는 선비들은 자격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평민들이 출세할 수 있는 등용문이 되었다. 향공의 과목은 수재(秀才)·명경(明經)·진사(進士)·명법(明法)·명자(明子)·명산(明算)·동자(童子) 등 여러 가지였다. 당시 선비들이 가장 희망을 많이 한 것은 명경과 진사 두 과였다. 고종(高宗)·영휘(永徽) 이후 진사과는 더욱더 성했고, 사대부(士大夫) 등은 비록 그들의 지위가 지극히 높다고 해도 진사 출신이 아니면 부끄럽게 여겼다.

명경의 주요 고시과목은 경의(經義)였다. 응시자는 경전의 본문 및 주석에 정통하고 의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했다. 당시 정부가 규정한 것은 9종이었다. <예기> <좌전>은 대경(大經)이고, <모시(毛詩)> <주례> <의례>는 중경(中經)이며, <주역> <상서> <공양> <곡량>은 소경(小經)이었다. 이 중 2경에 정통하면 명경이라 한다. 2경은 대경 하나, 소경 하나이며, 때로는 중경 둘일 경우도 있다. 시험방법은 먼저 필기시험을 치르는데 이를 첩경(帖經)이라 한다. 합격한 뒤 다시 구두시험을 보는데, 이를 '경문대의(經問大義)'라고 하며 10문제에 걸쳐 대답해야 한다. 구두시험에 합격한 뒤 다시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는데 3제(三題)에 대답해야 한다. 때로는 <효경>·<논어>·<이아(爾雅)> 등 서적에 관한 시험이 부가되었다.

당대에 과거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 명경과(明經科)출신을 제일 많이 뽑았다. 기타 각 과보다 보통 배수인 100명을 뽑은 것이다. 그러나 명경고시는 주소(註疏)기억력을 시험하는 데 편중하여 경서(經書)의 뜻에는 소홀히 한 폐단이 있었다. 그래서 명경과는 점차 중시되지 않게 되고, 또 정부에서 문학을 제창하게 됨으로써 진사과(進士科)가 각광을 받았다.

진사(進士)란 "선비가 작록(爵祿)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수양제 때 창시되엇다. 당대의 진사는 갑·을 양과로 나뉘고, 고시사항은 처음에 시무책(時務策)을 위주로 하여 다섯 문제가 출제되고, 첩경(帖經)을 부제(副題)로 하여 소경(小經) 하나와 노자(老子)에 관해 10문제가 출제되었다. 이 밖에도 잡문(雜文) 두 수(兩首)를 시험하였다. 현종때 진사고시에 시부(詩賦)가 출제되었다. 진사에 뽑힌 선비는 다시 이부(吏部)의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면 관직을 받았다.

명경과 진사는 비록 같은 과거이기는 하지만 응시자의 사회적 배경은 크게 달랐다. 당나라 중엽 이후 명경시(明經試)에 응시한 선비는 대부분 북방의 귀족 자제였고, 진사에 응시한 선비는 대부분 남방의 평민계급이었다.

수·당의 교육사상[편집]

隋唐-敎育思想

수·당(隋唐)은 불교전성시대로서, 당시의 사상계는 완전히 불교의 지배를 받았다. 수·당 이전의 불교는 번역과 이해에 치중했지만, 수·당 시대는 중국인들이 외래의 불교사상을 소화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창조하는 시대이다. 바꾸어 말하면 수·당 이전은 번역불교시대이지만, 수·당시대는 동화불교(同化佛敎)시대이다. 불교는 당시 철저히 중국화되고, 불교철학의 내용은 더욱 심화되었다.

따라서 불학(佛學)이 당시 교육에 끼친 영향도 매우 컸다. 비록 유학이 중국 교육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유학의 내용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깊어지고 체계화되었다. 불교 각 파는 인간 본성의 자각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들은 견성(見性)·현성(顯性) 등을 교육의 주지(主旨)로 삼고, '수계율(守戒律)' '습선정(習禪定)' '일념불생(一念不生)' '직지본심(直指本心)' '돈오이성(頓悟理性)' 등을 교육방법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상은 송유(宋儒)의 '주일(主一)' '경정(敬靜)' '거욕(去慾)' '극기(克己)' 등의 교육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수·당의 유가는 경학을 제창하고 불교를 반대했지만, 그 사상 속에는 불학의 요소가 섞여 있었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경학은 남학(南學)과 북학(北學)의 대립이 있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안사고(顔師古)에게 경문(經文)의 통일을, 공영달(孔穎達)에게는 경의(經義)의 통일을 하명했다. 그래서 안사고는 남북 경본(經本)의 동이점(同異點)을 검토하여 안씨정본(顔氏定本)을 만들고, 공영달은 남북의 경의를 검토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만들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분열되어 온 남학과 북학은 통일되었다. 이러한 경학의 통일은 유학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고, 불교에 대항할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불로(佛老) 반대에 가장 힘썼던 한유(韓愈)는 <원도편(原道篇)>을 쓰고 대학(大學)의 정신을 살려내려 했으며, 그의 제자 이고는 대학 중용을 근본으로 삼고 불로를 참고하여 <복성서(復性書)>를 썼다.

왕통[편집]

王通(582-616)

수나라의 대유(大儒). 자는 중엄(仲淹)이고 문중자(文中子)라고도 한다. 그는 유가사상의 계승을 필생사업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근본사상은 중용(中庸)에 근거하였다. 그의 교육에 관한 학설은 그의 저작인 <중설(中說)>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가의 교육학설에 따라 덕례(德禮)교육을 주장한다. 덕례의 내용은 인의(仁義)이다. 그에 의하면 인의는 교육의 근본이고, 교육은 인의를 실천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난세를 만나 인의를 실천하기 어려우면 수신(修身)·제가(齊家)만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농공(農工)을 천시하는것을 반대하고, 그 자신이 몸소 농사지으며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분에 만족하고 직책을 충실히 완수할 것을 주장하여, 학문의 목적이 자기완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교육은 자기 본성을 바로잡는 '정기심(正其心)'에서 출발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관찰하여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교육의 교재로써 <춘추> <예(禮)> <악(樂)> <시(詩)> <서(書)> <역(易)>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점은 일반 유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한유[편집]

韓愈(767-823)

당나라의 문학자. 자는 퇴지(退之). 그는 본래 문학에 밝고, 유학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없었으나 외래사상으로부터 중화사상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유학을 제창하기 위해 불로(佛老)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적 이론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용(實用)의 입장에서 배척했다. 성인이 제정한 법도(法度)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인데, 노자(老子)의 학설에 따라 그것을 버린다면 천하는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다. 또한 성인이 제정한 군신부자의 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인데, 불가에서 말한대로 하면 군신부자의 도를 버리게 되므로 인류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이러한 한유의 불로에 대한 공격은 상식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불교사상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를 반대하고 나선 이는 매우 적었고, 뒷날 정주학(程朱學)의 대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선왕의 도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선왕의 도는 매우 타당하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버리고 달리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선왕의 도란 추상적으로 말하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서(經書)에 기록된 예악형정(禮樂刑政)·수기(修己)·치인(治人)에 관한 모든 말이다. 수기 및 치인의 도는 대학의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고 한다.

그는 교육의 목적이 선왕의 도를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서 그 근거로 인성론(人性論)을 제시했다. 그는 인성에 상·중·하(上中下)의 세 가지 품덕이 있다고 본다. 그는 상(上)에 속한 성품은 학습을 거쳐 더욱 명(明)할 수 있고, 하(下)에 속한 성품도 제재(制裁)하면 죄를 짓는 일이 적어지므로 교육 효과는 매우 크다고 주장하였다.

이고[편집]

당나라의 유학자. 자는 습지(習之)로, 한유(韓愈)의 제자. 그의 사상과 교육이론은 그의 저작인 <복성서(復性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성정(性情)을 분리시켜 성(性)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한 본체이고 정(情)은 성이 발동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성이란 상대적인 동정(動靜)을 초월한 것이므로 지정(至靜)이고, 상대적인 선악(善惡)을 초월한 것이므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성이 지선하다면 악(惡)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는 악이 정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성이 작용함으로써 정(情)이 있게 되는데, 정에는 서로 상대관계에 있는 동정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선악이 갈려진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인성론에 근거하여 복성설(復性說)을 주장하였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본성의 회복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본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불교의 돈오(頓悟)·노장(老莊)의 거지(去知)·거욕(去欲)의 수양공부와 대체로 유사하다. 그는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사려(思慮)를 버리고 지선·지정의 경지로 복귀하는 것이 복성(復性)이라고 말한다. 이고의 학설은 중용(中庸)을 근거로 하고 노장을 참고로 하여 불교의 학설로 결론을 맺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는 별로 독창적인 견해를 갖지는 않았으나 불교와 노장, 그리고 유학을 종합하려는 입장은 뒷날의 송나라 유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선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