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중세 교육사상/양한·6조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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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6조시대의 교육[편집]

兩漢·六朝時代-敎育

춘추전국시대의 격변과 혼란은 진·한(秦漢)에 이르러 종언(終焉)하고, 민족과 국토의 통일로 한민족(漢民族)은 오랜만에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니 이에 적응하기 위해 신(新)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비록 천하를 통일한 뒤 15년 만에 멸망했지만, 이 짧은 기간 안에 이룩한 제도의 개혁은 이후의 중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족의 통일은 제도·언어·사상의 통일로 확산되고 단일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했다.

진나라의 정치는 법가(法家)사상을 토대로 하고, 한나라 정치는 유가(儒家)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견해가 없지 않지만, 사실은 진나라나 한나라는 법가와 유가사상을 병용했다. 당시 강력한 통일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유가사상이나 법가사상은 도가사상이나 묵가사상보다 유효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유가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고, 당시 모든 제도는 유가의 이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

진시황(秦始皇)은 문화와 교육면에서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죄악을 저질렀지만, 문자의 개혁과 통일은 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漢)나라는 진의 제도를 계승·발전시켜, 교육면에서 다음과 같은 공헌을 하였다. 첫째, 진나라의 통일정책을 이어받아 사상의 통일운동을 여행(勵行)하고, 유가사상으로 모든 제도의 기틀을 삼았다. 둘째, 전국시대의 양사정책(養士政策)을 개혁하여 선사제도(選士制度)를 확립했다. 셋째, 학교를 세우고 박사(博士)제도를 만들고 경적(經籍)을 정리하여, 중국의 학교제도 및 교과과정의 기초를 닦았다. 넷째, 사학을 장려하여 귀족계급의 독점물이었던 교육에 서민계급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크게 열어 놓았다.

진·한(秦·漢)이 한족(漢族)의 극성기(極盛期)라면,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는 한족이 다시 쇠락하는 시대이다. 동한(東漢) 말엽에 위·촉·오(魏·蜀·吳) 3국이 정립하여 상쟁(相爭)하면서 시작된 한족의 내분은 결국 이민족의 침략을 야기시켰다. 그래서 중국사회는 다시 혼란 속에 빠져 격변을 치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한족은 북방 이민족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남천(南遷)한다. 한족의 남천은 미개지였던 복건(福建)·남월(南越) 등 중국 남방지역의 개화를 자극하고, 남방문화의 발달에 기여한다. 또한 북방민족이 중원(中原)에 침입해 들어와 한문화에 동화됨으로써 한문화권(漢文化圈)이 다시 확대된다.

따라서 기존사회를 지배했던 유가사상은 힘을 잃고, 새로운 상황에 호응하여 청담(淸談)사상이 발흥한다. 청담사상은 위나라 때 발달하여 남조(南朝) 때 특히 성행했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생활화를 목적으로 청담가(淸談家)들은 환경의 개조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현실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초연하려 했다. 그래서 교육방면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고, 제도의 개혁도 없었다. 따라서 위·진·남북조시대는 교육의 쇠락을 면치 못한 시기라 하겠다.

진대의 교육[편집]

진대의 교육사상의 통일[편집]

秦代-敎育思想-統一

진나라는 6국(六國)을 멸망시키고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6국의 후예 및 진국(秦國) 내부의 지식인들은 진의 정치를 비판하기 일쑤였다. 정권의 안정과 통일을 위하여 교육사상의 통일이 급선무였다. 당시 진의 정치를 반대하는 지식인은 놀고 먹으려는 부유(腐儒)·천유(賤儒)들로 인식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은 이들 지식인들이 사회와 국가에 아무런 공헌도 없이, 하루종일 먹고 놀면서 복고사상(復古思想)을 제창하고, 당시의 정치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파했다. 이러한 지식인은 진나라가 정치하는 데 가장 큰 방해세력으로 간주되어, 이사(李斯)의 주장에 의해 사상의 통일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통일의 방법은 ① 진기(秦紀)가 아닌 서적을 불사르고, 이사(吏師)·박사(博士)제도를 실행하는 것, ② 진정한 학식을 가진 유자(儒者)는 등용하여 당시 학술사상을 정리하는 일에 종사시키고, 방사(方士)·술사(術士)는 없애는 것 등이다. 이것이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의 죄악을 저질렀지만 문자의 개혁과 통일에는 공헌하였고, 아울러 교육사상을 통일하였다.

진대의 이사제도[편집]

秦代-吏師制度

이사제도란 관리로써 스승을 삼는 제도로서,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없애고 백성들을 정부의 권력 아래 묶어놓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제도는 준법·존군(尊君) 관념을 높이고, 당시 정치를 옹호하며, 근면정신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사학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였다.

진대의 법령교육[편집]

秦代-法令敎育

진시황은 가장 적극적으로 법치(法治)를 주장한 이사를 재상으로 삼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이사(李斯)는 당시 사회정황과 진(秦)의 건국정신에 비추어 법령교육이 시교(施敎)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천하가 이미 안정되고, 법령은 통일되었으므로 백성은 농공(農工)에 힘써야 하고, 선비는 법령을 배워야 한다"는 이사의 말은 법령교육을 중시하였음을 표현한다.

진대의 학교교육[편집]

秦代-學校敎育

진나라의 건국시기가 매우 짧아 학교교육에 관한 사료의 결핍으로 상세한 것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백가쟁명(百家爭明)의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통일된 사회를 맞아 관학의 중흥을 꾀한 점은 주목을 끈다. 진시황은 박사관(博士官) 70여명을 두고 군현(郡縣)을 순시할 때는 언제나 이들을 동반하였다고 한다. 이들 박사는 학술을 전담한 학술전관(學術專官)으로 교육사상의 통일에 기여하였다. 그 밖에 이사제도(吏師制度)의 창립도 각 지방의 법령을 통일하고 사학을 금지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학교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양한의 교육[편집]

양한의 유가교육[편집]

兩漢-儒家敎育

한대의 교육정책은 진대의 사상통일운동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진대의 통일운동이 법가사상에 근거한 데 대하여, 한대에는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점이 다르다. 한초(漢初)는 전국 말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탓으로 학파 사이의 분쟁이 전국시대와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한무제(漢武帝)가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를 파출(罷黜)하고 유가만을 존숭하는 정책을 씀으로써 유가는 다시 제자백가 위에 군림하게 된다. 유가의 상하질서(上下秩序)관념과 적극적인 치세(治世)정신은 통일제국의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한무제의 생각에 영합할 수 있었고, 가족 본위의 농본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孝)사상이 기여할 수 있었다. 유가의 경전(經典)이 학교의 기본교재로 채택된 것도 한대에 비롯되었다. 상(尙)나라는 예악과 군사를 중시하였고, 서주(西周)는 6예(六藝)를 중시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실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능(賢能)을 요구하였지만, 양한에 이르러 유가의 경전은 학교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고, 경전의 연구는 선비들이 출세하는 데 첩경이 되었다.

양한의 학교제도[편집]

兩漢-學校制度

한대학교는 관학과 사학의 두 종류가 있었다.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관학을 태학(太學)이라 하고, 그 밖에 홍도문(鴻都門)·사성소후(四姓小侯)와 같은 특수학교도 있었다. 지방에서 관리하는 관학을 '군국향당지학(郡國鄕黨之學)'이라 하며, 이것은 군국(君國)의 학(學), 현(縣)의 교(校), 향(鄕)의 상(庠), 부락의 서(序)로 분류된다. 사학도 두 종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서관(書館)으로서 소학(小學) 과정을 가르쳤고, 다른 하나는 저명한 경사(經師)가 개설한 사학으로서 여기서는 대학(大學) 과정을 가르쳤다.

태학[편집]

太學

한대의 태학은 공손홍(公孫弘)과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유가의 중앙학교이다. 무제는 5경박사(五經博士)와 박사제자(博士弟子) 50인을 설치, 태학을 졸업한 학생들에게 관직을 제수할 수 있는 장정(章程)을 만들었다. 태학 창립의 원래 목적은 국가에 필요한 인재양성에 있었다. 그러나 동중서는 이 제도를 유가(儒家)의 지위 확대와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를 위해 이용했다. 이들 태학의 학생들은 일정기간의 훈련 후, 능력에 따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고, 교육기간에는 병역과 노역(勞役)을 받지 않을 특권이 부여되었다. 당시 대중들은 누구나 이들 특수계급을 선망하였다. 그래서 당시 유학의 지위는 날로 높아지고 제작백가는 저절로 쇠퇴하게 되었다. 태학은 이에 따라 급속히 발전하여 소제(昭帝) 때는 학생수가 100명, 선제(宣帝) 때는 200명, 원제(元帝) 때는 1천명, 성제(成帝) 때는 3천명으로 증가하였고, 순제(順帝)이후에는 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한무제가 태학을 창립하였을 때는 규모가 극히 작아, 교사(校舍)가 장안(長安) 성안에 있었으나 그뒤 학생수의 급증으로 장안성 밖에 거대한 태학구(太學區)를 설치했다. 광무제(光武帝)때 태학은 천도(遷都)에 따라 낙양으로 이전했고, 순제 때 교사를 증수하여 240동(棟)의 건물과 1천850실(室)을 건축했는데, 그 중에는 강의실·강당 등이 있었다 한다. 벽옹은 동한 때는 태학 학생들의 전용물이 아니었으나 순제 때부터 학생용으로 쓰였다. 그 밖에 숙사도 있고 학생을 위한 주택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규모의 광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뒤 당고(黨錮)의 난리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태학은 쇠락하게 된다.

태학생의 선발과 출로[편집]

太學生-選拔-出路

한대 박사의 임명 및 태학생의 선발은 태상경(太常卿)의 권한에 속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태상경이 18인 이상을 선발하여 '박사제자'로 충당하는 규정을 세웠으나, 그 뒤에는 지방의 관리들이 추천한 학생도 태학에서 면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경(公卿) 자제들은 정식추천을 거치지 않고 입학할 수 있어 다소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태학 학생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했다. 공경 자제, 지방정부에서 추천한 공사비(公私費) 평민학생, 부호출신, 빈한한 가정 출신도 있었고, 외국인 흉노 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이 졸업한 뒤의 진출상도 다양하여 하급관리로부터 공경·제왕(帝王)도 있었다.

태학의 교수[편집]

太學-敎授

태학의 교수를 처음에는 박사(博士)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뒤 5경박사를 다시 14가(家)로 나누고 태학의 학과 과정도 14과(科)로 나눔과 동시에 그 교수들을 '가법교수(家法敎授)'라고 하였다. 동한(東漢)이 한창 흥성할 때는 7천명의 교수를 학관(學官)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태학의 교수는 공경(公卿)이 추천하거나 천자(天子)가 초빙함으로써 임명되었다.

태학의 고시[편집]

太學-考試

한무제 때 태학의 학생들은 1년에 수차에 걸쳐 시험을 치러야 했지만, 동한 환제(桓帝) 때부터 2년에 1차씩 시험이 부과되었다. 시험 방법은 구시(口試)·책시(策試) 및 사책(射策)등 수종이 있었다. 구시는 암기의 정확성 여부를 시험하고, 책시는 장구사법(章句師法)을, 사책은 문제가 기록된 책(策)을 학생이 수의(隨意)로 뽑아 푸는 것을 말한다. 수업연한은 일정하게 규정하지 않고 시험에 통과하면 졸업할 수 있었다.

양한의 군국학교[편집]

兩漢-郡國學校

한초(漢初) 지방행정제도는 군국제(郡國制)로서 봉건(封建)과 유관(流官)이 병존했다. 봉건의 지방을 국(國)이라 하고, 유관의 지역을 군(郡)이라 하였다. 국의 장관을 왕 또는 후(侯)라 하고, 군의 장관을 수(守)라고 했다. 그뒤 봉건제는 점차 소멸하고 군의 위에 주(州)를 설치, 그 장관을 자사(刺史) 또는 목(牧)이라 하였다. 그래서 군국제는 군제(郡制)로 변했다. 한대의 군국학교는 경제(景帝) 때 촉군(蜀郡)에서 비롯되어 무제 때 각 군국(郡國)이 학관(學官)을 설치토록 하조(下詔)했다. 그러나 당시 군국 학제는 정식으로 성립되지 못하고, 평제(平帝) 때 비로소 학교제도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군국에 설립된 학교를 학(學), 현(縣)에 설립된 것을 교(校)라고 하여 학과 교에 각각 경사(經師) 1인씩을 배치했다. 향(鄕)에 설립된 것을 상(庠)이라 하고, 마을에 설립된 것을 서(序)라 하여 상과 서에 각각 효경사(孝敬師) 1인씩을 배치했다.

양한의 특수학교[편집]

兩漢-特殊學校

중앙정부가 설립한 특수학교는 2종이 있었는데, 하나는 '홍도문학(鴻都門學)', 다른 하나는 '사성소후학(四姓小侯學)'이라 하였다. 홍도문학은 동한 영제(靈帝)시대에 설립되었는데, 일종의 예술학교의 성격을 띠었다. 사성소후학은 동한 명제(明帝) 때 설치되었는데, 외척(外戚)들의 자제를 위한 것이며, 5경사를 두었다. 그 뒤 이 학교의 범위가 상당히 확대되었다.

양한의 사학[편집]

兩漢-私學

한대 사학 역시 이상의 관학 못지않게 발달했다. 정도로 말하면 관학은 비교적 전문적이었지만, 사학은 몽학(夢學)에서부터 전문과정까지 있었으며, 몽학을 서관(書館)이라고도 한다. 몽학은 문자 해득(解得) 및 글씨쓰기로부터 시작하고, <사자서(四字書)> <삼자서(三字書)> 등이 기본교재로 쓰였다. 이러한 <자서(字書)>는 뒷날 소학(小學)의 교과서로 쓰인 <천자문(千字文)> <백가성(百家姓)> <잡자편용(雜字便用)> <삼자경(三字經)> 등의 선구였다. <자서> 이외에 <논어>와 <효경(孝經)>도 소학의 교재로 쓰였다 <자서>와 <논어> <효경>을 배운 뒤 학생들은 취업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배우고 싶은 학생은 반드시 경서(經書)를 익혀야 했다. 그러나 관학의 정원이 제한되어 있어 이들은 대학(大學)의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사학에 입학했다. 이러한 사학은 대단히 많았고, 이름있는 선생 밑에는 수백 명으로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학생이 모여들었다. 마융(馬融)·이응(李膺)·정현(鄭玄) 등은 이러한 사학의 이름있는 교사들이었다.

양한의 선사제도[편집]

兩漢-選士制度

선사제도란 현량(賢良)한 선비를 뽑아 임관(任官)하는 것을 말한다. 한고조(漢高祖)가 각 지방의 제후 및 군수들에게 현자(賢者)를 뽑아 중앙에 추천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양한의 선사제도가 시작되었다. 그뒤 문제(文帝)는 '짐의 부덕, 관리의 불공평, 정치의 불선(不宣), 백성의 불녕(不寧)'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는 책제(策題)를 내걸고 피선사자(被選士子)들을 시험하였다. 이러한 책시(策試)는 당·송(唐宋) 과거제도의 전신이다. 중국의 선사제도는 한대에 확립되었다.

한대의 선사제도는 효문제(孝文帝)로부터 발달하여 그뒤 점차 완성되었다. 이 제도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공경군국(公卿郡國)의 선거를 거쳐 천자가 책시(策試)하는 현량방정(賢良方正), 다른 하나는 품행이 좋아 주군(州郡)에 의해 추천되는 '효렴무재(孝廉茂才)', 또 하나는 태학에서 추천한 '박사제자(博士弟子)'를 말한다. 이처럼 추천된 선비는 명덕(明德)·명경(明經)·현량(賢良)·현량문학(賢良文學)·수재(秀才)·무재이등(茂才異等)·무재특립(茂才特立)과 같은 과목과 그 밖에 사행(四行:淳厚·質樸·謙遜·節儉) 등의 시험을 거쳐 임관되었다. 이로써 보면 한대교육은 덕치(德治) 시기의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양한에는 공부벽거라는 선사제도가 있었다. 삼공(三公)은 천하의 명사를 뽑아 막부(幕府)에 두었다. 이러한 풍조는 서한(西漢)에 시작되어 동한(東漢)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였고, 이것 역시 선비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이었다.

양한의 교육사상[편집]

兩漢-敎育思想

양한의 교육사상은 유가학설을 중심으로 삼았다. 유가학설은 경전(經典)에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유(漢儒)들은 경전의 해석에 치중했다. 그 결과 경전의 해석을 둘러싸고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의 치열한 대립을 보게 된다.

이 두 학파는 학설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있어서는 비슷한 의견을 보인다. 그들은 다같이 명경(明經)을 수단으로, 수행(修行)을 목적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방법이 모두 경서(經書)에 기록되어 있다고 보고, 학자는 명경에 힘씀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경사(經師)는 한대 교육사에 있어 극히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경사들은 경적(經籍)을 고증하고 경의(經意)를 해석함에 있어 비록 크게 공헌하였지만, 그들 사상이 경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여 자기의 고유한 학설을 갖지 못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비교적 자기 학설을 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학자는 동중서(董仲舒)·회남왕(淮南王)·양웅(揚雄)·왕충(王充) 등이다.

동중서[편집]

董仲舒(B.C.179-104)

전한의 유학자. 그는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고 무제(武帝) 때 '숭유파출백가(崇儒罷黜百家)'를 주장하여, 이학(異學)을 절멸시키고 학교제도를 개혁한 장본인이다. 그의 주저인 <춘추번로(春秋繁露)>에 의하면 그는 교육면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첫째, 그는 교육의 목적이 민풍을 변혁하여 민속을 순화시키는 것(變民風化民俗)이라 보고 인의예악(仁義禮樂)의 교육으로 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그는 이학(異學)을 절멸(絶滅)하고 백가(百家)를 억출(抑黜)하여 국민의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편협성을 표현하지만 유학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셋째, 그는 천인계합설(天人契合說)을 주장했다. 그는 자연계(天)는 대우주이고 사람은 소우주라고 보고, 소우주는 대우주 안에 포괄되므로 인사(人事)와 자연계의 변이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도(人道)는 천도(天道)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넷째, 그는 천도가 인사를 주재하므로 교육은 천도를 거슬리지 않도록 시행되어야 하고 천의(天意)를 계승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남왕[편집]

淮南王(B.C. ?-122)

이름은 안(安). 한문제(漢文帝)의 조카이며, <회남자(淮南子)>의 저자이다. 동중서가 당시 유가의 대표라면 회남왕은 노장학의 대표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청정(淸靜)하고 선한 것이지만 욕(慾)과 지(知)가 이러한 본성을 깨뜨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은 인간본성의 회복이라 생각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절욕(節慾)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교육의 가장 좋은 방법은 절욕에 있으며, 절욕하려면 외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외계사물은 인간의 기욕(嗜慾)을 자극하는 것이므로 외계사물의 유혹을 깨끗이 버리면 청정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청정한 본성은 도(道)와 합일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유가와 도가의 학설을 조화시키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양웅[편집]

揚雄 (B.C.52-A.D.18)

전한 말기의 학자. 자는 자운(子雲), 촉(蜀)의 청두(成都)에서 출생함. 그의 저서로는 <태현(太玄)> <법언(法言)> 등이 있다. 그는 우주 본체가 현(玄)이라고 생각했다. 현은 비록 허정(虛靜)하지만 그 안에 소장(消長)하는 두 가지 힘이 병존(竝存)하여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므로 본체는 허정하지만 이 두 가지 힘이 끊임없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각각 현의 일부를 부여받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현 가운데 음양(陰陽)의 두 힘이 있듯이 인간본성 안에도 선악(善惡)의 두 가지 분자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본성 안에 선악이 섞여 있으므로 선한 면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악한 면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인간본성에는 충동능력이 있으며, 이것을 기(氣)라고 보고, 기는 선악의 양자가 사용하는 말(馬)이라고 주장하였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선악이 섞여 있지만, 환경의 자극을 받으면 기(氣)가 움직여 선악이 생긴다. 그러므로 수양(修養)의 방법은 그 기(氣)를 잘 길들이는 데 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사(良師)를 구하는 것이라 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있으면 자연히 감화를 받아 선(善)의 세계를 향한다고 말한다. 그는 교육면에서 양사(良師)와 감화(感化)를 중시하였다.

왕충[편집]

王充 (27-95)

후한대의 혁신적 사상가. 자는 중임(仲任), 회계(會稽)에서 태어남. 그는 <논형(論衡)> 85편을 저술하였고, 대체로 사상면에서 자연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그는 교육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논형>에 표현된 그의 교육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그는 경학(經學)을 비판 없이 학습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옛날은 오늘만 못하다(古不如今)"는 입장에서 존고(尊古)사상을 반대한다. 따라서 그는 경서(經書)에도 사실에 어긋난 기록이 적지 않다고 보고, 관찰과 사유를 통해 진위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② 그는 실지지학(實知之學)을 주장한다. 지식은 관찰로부터 유래하고 사고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근거 없이 허구(虛構)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③ 그는 예악(禮樂)으로 인간의 성정(性情)을 순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왕충은 당시의 미신을 타파하고 지식을 관찰과 경험으로부터 추구하려는 실증정신의 소유자였다.

위진남북조의 교육[편집]

청담학파의 등장[편집]

淸談學派-登場

청담이란 현도(玄道)를 담론(談論)하고 묘리(妙理)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청언(淸言) 또는 현언(玄言)이라고도 한다. 청담의 내용은 대부분 도가사상(道家思想)이므로 청담학자는 도가의 적계(嫡系)라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는 노장학(老莊學)을 순수히 학술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있고, 도가의 이론을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한 사람도 있다. 청(淸)의 조익(趙翼)의 학설에 의하면 청담은 위(魏)의 명제(明帝, 240-248) 때 발단하여 진(晋)대에 가장 성했다가, 양무제(梁武帝, 503-549) 때에 이르러 다시 유학을 숭상함으로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위진남북조에 이르러 유학이 지배력을 잃고 노장학을 내용으로 한 청담이 성행한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는 당시의 정치 부패와 혼란이고, 다음으로는 당시의 경학(經學)이 훈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유학(儒學)에 염증을 느끼고 노장학(老莊學)에 의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했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노장학을 순수히 학술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고, 소위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리는 산도(山濤)·완적(阮籍)·계강(稽康)·왕융(王戎)·향수(向秀)·유령(劉伶)·완함(阮咸) 등은 도가사상을 일상생활화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이들 죽림칠현을 광달파(曠達派)라고도 한다. 그들은 후한(後漢) 이래로 일반인들이 존중했던 유가의 예법(禮法)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노장사상을 적극 옹호하였다. 말로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가 예법을 파괴하는 행동을 실천했다. 광달(曠達)이란 곧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의 학교교육[편집]

魏-學校敎育

위(魏)·촉(蜀)·오(吳)가 병립했던 삼국시대에는 교육이 유명무실했다. 조조(曹操)가 위왕(魏王)에 오른 뒤 반궁(泮宮)을 지은 일이 있고, 조비(曹丕)가 찬위(簒位)한 뒤 태학을 세우고 오경과시(五經課試)의 법을 제정함과 동시에 춘추곡량박사(春秋穀梁博士)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태학의 제도가 다시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은 한대보다 훨씬 약화되어 있었고, 보잘것 없었다.

양진시대의 교육[편집]

兩晋時代-敎育

진대(晋代) 학교는 한대의 그것을 답습하였고, 국자학의 설립이 있을 뿐이다. 진대의 대학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며, 국자학은 귀족의 자제를 위한 것이고 태학은 평민을 위한 것이다. 국자학에는 재주박사(祭酒博士) 1명, 조교 15명(뒷날 10명으로 줄음)이 있었고, 5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었다. 태학은 위제(魏制)를 답습한 것으로 박사원(博士員) 19명을 두었다. 무제(武帝) 때는 태학생이 7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그뒤 8왕 5호(八王五胡)의 전란(戰亂)으로 점차 쇠락하였다. 5호16국(五胡十六國)의 난리로 진(晋)나라는 동천(東遷)하고 양자강 이북은 북방민족에게 유린, 이 130년간 학교교육은 유명무실했다. 그러나 만족(蠻族) 가운데 중국문화를 흠모하여 학교를 세운 나라들이 있었다. 즉 전조(前趙)의 유요(劉曜)는 태학(太學)과 소학(小學)을 세웠고,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은 태학과 선문(宣文)·선교(宣敎)·숭유(崇儒)·숭훈(崇訓) 등 10여 소학을 세우고, 군국에 학관(學官)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전진(前秦) 부견은 학궁(學宮)을 세우고, 군국(郡國)학생들 중 1경(一經) 이상만 이해하는 사람이면 입학시켰다.

남북조의 학교[편집]

南北朝-學校

동진이 멸망한 뒤의 170년간을 남북조시대라 한다.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이 상이한 여러 민족이 혼합된 시대이므로 상이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남조는 문학을, 북조는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사상면에서 남조는 불학(佛學)과 노장학(老莊學)을 좋아하며 유학(儒學)이 부진했으나, 반면에 북조는 경학의 발달을 보았다.

이 시대의 학교제도는 위진시대를 답습하였으나 특색이 있었고, 많은 발달을 보였다.

남조의 국학과 주군학[편집]

南朝-國學-州郡學

남조 교육이 부진한 것은 위진시대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주목을 끄는 것은 송문제(宋文帝)의 4학제(四學制)이다. 송문제는 4개의 대학을 서울에 세워 불로(佛老)학설을 연구하는 것을 현학(玄學)이라 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사학(史學), 사장(詞章)을 연구하는 것을 문학이라 하였으며, 경술(經術)을 연구하는 것을 유학(儒學)이라 하였다. 이전에는 중국 태학의 주요과정이 경전(經典)이었으나, 이때 다양한 학과를 설치한 것은 진보적 발상이었다. 그뒤 명제(明帝)는 총명관(聰明觀)을 세웠다. 이것을 동관(東觀)이라고도 하는데, 현(玄)·유(儒)·문(文)·사(史)의 4과를 설치하고, 과(科)마다 학사(學士) 10인을 두었다. 제무제(齊武帝)는 총명관을 없애고 국학을 세웠고, 양무제(梁武帝)는 5관(五館)을 세우고 관마다 5경박사를 두었다. 교육 과정은 5경 이외에 6예도 포괄하였다. 입학 자격에 제한이 없었고, 재능만 있으면 빈천한 집안의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숙식이 제공되므로 학비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에게는 정기고시(定期考試)가 부과되고,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는 관직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뒤 불교가 성하면서 학교교육은 다시 약화되고, 후경(侯景)의 난리 때 중단되었다. 남조의 주군학(州郡學)에 관한 사료가 적어 그 내용이 미상이나, 양무제(梁武帝) 때 박사좨주(博士祭酒)를 주군(州郡)에 파견하여 학교를 세웠고, 송·제·양(宋齊梁)에서도 지방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중 양소릉왕(梁邵陵王)이 남서주(南徐州)에 가서 마추(馬樞)를 청하여 <유마경(維摩經)> <노자(老子)> <주역(周易)>에 관한 강의를 하게 하였고, 당시 청중이 2천여 명이었다고 하는 기록은 흥미를 끈다. 이것은 유·석·도(儒釋道)를 한자리에 모은 것으로, 그뒤 3가(三家)를 융합하여 한 학파의 선구가 된다.

북조의 국학과 주군학[편집]

北朝-國學-州郡學

북조는 남조보다 안정된 정치상황이었기 때문에 북조교육은 남조보다 발달했다. 위나라는 도무(道武) 초년에 태학을 세우고, 5경 박사와 생원(生員) 1천여명을 두었다. 태무제(太武帝)는 태학을 세우고 주군(州郡)의 수령들로 하여금 학생을 파견토록 하였다. 그뒤 효문제(孝文帝)는 4문박사(四門博士) 40인을 두고 국자(國子)·태학·4문(四門)·소학을 세우니 학교가 매우 왕성하였다. 그러나 북위(北魏)가 동서로 분열하여 서로 다툼으로써 학교교육이 점차 쇠퇴하였다. 북조의 주군학은 위(魏)보다 발달했다. 헌문제(獻文帝)때 주군학교제도를 만들고 군의 크기에 따라 박사·조교·학생수를 결정했다. 또 군마다 향학(鄕學)을 설치하고 향학에 정교(正敎)와 조교를 두었다. 대군(大郡)에는 박사 2인, 조교 4인, 학생 100명을 두고, 차군(次郡)에는 박사 2인, 조교 2인, 학생 80명을 두며, 중군(中郡)에는 박사 1인, 조교 2인, 학생 60명을 두었으며, 하군(下郡)에는 박사 1인, 조교 1인, 학생 40명을 두었다. 그러나 입학에 있어 좋은 가문 출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입학시킴으로써 계급적 성격이 짙었다.

위진남북조의 선사제도[편집]

魏晋南北朝-選士制度

위진시대의 선사제도는 한제(漢制)를 답습하여 선거(選擧)와 학교로부터의 인재 등용을 병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으로 학교교육은 부진하고 선거에 의한 방식도 크게 문란했다. 위문제(魏文帝) 때에는 9품중정(九品中正)의 제도를 만들어 주·군·현(州·郡·縣)에 대·소중정(大·小中正)을 설치하고, 그가 관할하는 사람들을 9등급으로 나누어 언행과 인격을 평정하여 진급 또는 강등의 자료로 삼았다. 이 제도는 위나라 때 창시된 이후 진(晋) 및 남북조에 걸쳐 성행하고, 그후 수(隋)나라에 이르러 과거제도의 등장으로 폐지되었다 9품중정제는 지방인들의 여론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등용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나 그위 유폐(流弊)가 생겼다. 즉 세도가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하고 소장(訴狀)을 올리며, 심지어 유언(流言)까지 퍼뜨려 출세의 길을 텄다. 반면 빈한한 집안 자제들은 더욱더 길이 막히고 말았으니,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에는 세족(世族)이 없다(上品無寒門下品無世族)"(文獻通考)는 현상이 빚어지고 말았다. 양한(兩漢)시대에는 평민이 선거에 뽑히는 일이 많았으나 위진(魏晋) 이래로 평민이 뽑히는 일은 극히 적었다. 이러한 9품중정제(九品中正制)의 폐단은 뒷날 과거제도의 탄생을 요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