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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학의 개념
[편집]日本實學-槪念
일본의 유명한 학자 미나모토 료엔(源了圓)은 일본 실학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정의를 내렸다.
"실학 개념은 현실에 대한 실증성과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고, 도덕을 실천하는 학문이며, 정치적 실천을 종지로 삼는 실용적 학문이다. 따라서 실학은 경세치용 등 많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학 개념은 비록 명확한 윤곽은 있으나, 여러 함의를 가지고 잇기 때문에 그 개념은 모호했다."
그러나 실학은 결코 각종 개념의 집합체가 아니다. '실을 숭상하고 허를 배척한다'는 정신이 숨어 있다. 상술한 실학의 이해에 근거하여 미나모토 료엔은 자신의 저서 <근세시기 실학사상에 관한 연구> <일본 실학사상의 전개 및 그 특색>에서 근대 실학 이전의 일본 실학을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번째 시기는 근세 초기 후지와라 세이카에서부터 오규 소라이에 이르는 에도 전기이다. 이 시기 실학의 특징은 경세지민(經世濟民)과 연계된 내재적 진실과 도덕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과 양명학 그리고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고학에서 나타난다.
두 번째 시기는 오규 소라이에서부터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에 이르는 1820년 전후의 에도 후기이다. 이 시기 철학의 특징은 내재적인 것에서부터 외재적인 것으로 관심을 바꾼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시기의 실학이 마음 바깥의 사물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마음의 외연(外延)으로 간주하여 이해한데 반해, 두 번째 시기에서는 심경(心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외재적 물체만 마음 바깥의 사물로 이해한 것이다. 이 탈바꿈을 완성한 사람은 오규 소라이이다.
세 번째 시기는 1820년대부터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일본의 민족적 위기가 대두되던 시기였으므로 실학도 사회적 실천의 의미가 강하였다.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을 대표로 하는 유교 개혁의 실학,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대표로 하는 정치개혁 실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미나모토 료엔 '실학'에 대해 내린 정의와 그가 나눈 실학 발전의 세 시기는 일본인의 일본 '실학'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가 유학의 경세 전통과 실학 사상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유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며, 더욱이 '실을 숭상하고 허를 배척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실학적 학풍으로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상술한 일본 실학 발전의 세 시기는 차라리 실학 발전의 세 시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학 발전의 각 단계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본 실학의 생성
[편집]日本實學-生成
에도 말기에는 생산성의 발전과 봉건 사회의 모순이 날카로워짐으로써, 유학은 더 이상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 서구 자연과학이 일본에 전파됨에 따라 유학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일부 학자들은 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독립적 사고를 시험해 보려 하였다. 그들 가운데 농민 사상을 대표한 안도 소이카(安藤昌益), 시민의 이익을 대표한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야마가타 반토(山片幡桃) 등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발달한 상업 자본의 요구를 반영하였고,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봉건 제도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교의 범주를 모방하였는데, 이는 유교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에서는 계몽 단체인 '명육사(明六社)'가 출현하였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로는 기술 관료 출신인 니시 아마네·츠다 마미치(津田眞道)·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와 같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민간 사상가도 있었다. 이러한 계몽 사상가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메이지 초기 근대화 건설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사상 혁명이었다. 일본 문화는 중국과 인도에서 발원하였는데, 봉건적 전통문화에서 줄곧 통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유교와 불교였다. 이 학문은 윤리와 도덕을 중심으로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에 저념하였고, 실제에 유용한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메이지 시기 계몽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근대화 노선을 관철하고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허학'을 버리고 '실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니시 아마네는 서양철학을 일본에 이식시켰다. 그는 유교적 사유 방식에 기초한 봉건적 정치를 비판하고, 근대 세계관과 방법론을 건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일본의 근대화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유학(허학)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학의 범주로 서양철학을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철학이 전통을 반대하면서도 전통과 긴밀한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실학의 정신으로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학의 전통도 계승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봉건적 의식 형태에서 근대자본주의 의식의 형태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츠다 마미치도 실학을 제창하고 허학을 반대하였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실험적 방법을 중시한 독특한 실학관을 내세웠다. 그는 "우리는 마땅히 실제에 맞지 않는 학문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실생활에 접근하는 실학에 온 마음을 다 기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당시 고문(古文)에 대해 박식한 것을 '학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였으며, 이러한 종류의 학문을 '허학'이라 불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실학'을 배우자고 제창하였다. 그는 <서양사정(西洋事情)>이란 책에서 실학을 '궁리하기(窮理學)', 즉 물리학으로 이해하였고, <물리학지요용(物理學之要用)>이란 글에서는 "물리학은 자연의 원칙에 기초하는데, …… 구라파 근대 문명은 물리학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가 여기에서 말한 물리학은 협의의 물리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의의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제창한 실학은 사회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지식을 가리키며, 실험과 실증적 과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한 실학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 위헤 선 실증적이고 이성적인 실학이다. 이것이 한국과 중국의 실학과 다른 독특한 실학관이다.
19세기 중엽 계몽 사상가들은 실증철학을 무기로 유교 문화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에 기초하여 유학의 리학관(理學觀)을 개조하였는데, 이것이 실증적 의의를 내포한 '실리학(實理學)'이다. 그들은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 철학의 장점을 받아들여 귀납과 종합을 강조하였다. 또 밀(Mill)의 공리주의를 흡수하여 봉건적 금욕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천부인권론'과 '사회계약론'을 제창하면서 법제를 강조하였다. 역사관에서 그들은 프랑스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문명사관(文明史觀)을 주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지 시기 계몽철학은 서양의 근대 철학을 토대로 한 것이고, 이것은 일본 사회의 필요와 결합하여 발생하였다. 그것의 근본적 성격은 대체로 관념론이지만 유물론의 합리적 요소들도 내포되어 있었으므로, 메이지 중기 철학적 분화의 사상적·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일본 실학사상은 자본주의 계몽 운동의 초기에 출현한 일종의 사회 사조이다. 비록 그 시간은 짧았으나, 이것은 일본 근대 철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본 실학의 전개
[편집]日本實學-展開
일본 실학사상은 주로 콩트·밀의 실증주의와 공리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건립되었다. 니시 아마네와 츠다 마미치는 네덜란드에 유학하면서 실증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들은 메이지 초기에 귀국한 후 실증주의를 소개하고 전파하였다. 콩트는 모든 지식은 반드시 관찰과 사실의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지식을 주관적 경험의 범위 내에 제한시키고 경험 바깥 사물의 존재 여부는 토론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콩트의 실증주의 원칙이다. 니시 아마네도 이러한 실증주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원칙에서 출발하여 그는 유교와 불교를 모두 '무형(無形)의 리학'으로 배척하였고, 서양 실증주의를 증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명확한 '실리학(實理學)'으로 간주하였다.
일본 실학의 실증성은 한국과 중국의 실학과는 매우 다른다. '서학동점(西學東漸)'은 중국과 한국에서 다만 유학 '만능론'에 대한 회의와 자아 반성의 조건이 되었을 뿐, 한국과 중국 실학의 내용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 건설을 실현하는 데 서양의 실증주의가 오히려 가장 좋은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계몽 운동 초기에 출현한 일본의 실학은 지주계급 개량파의 경향을 반영하면서, 대중의 민주주의 경향도 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의 임무를 일단 완성한 다음 기득 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개혁파에서 보수파로 입장을 바꾸었다. 막부 말기 일본 봉건 사회는 모순이 점차 첨예화되고, 서양 열강들의 침략으로 막부 체제가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개혁파가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반봉건 투쟁을 배경으로 천황에게 권리를 되돌린다는 명분을 걸고 막부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들이 세운 것이 바로 메이지 정부이다.
메이지 정부는 사회 개혁이 착수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근대화를 개척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문명개화 정책'을 취하였으며, 막부 잔여 세력을 숙청하는 데 힘을 기울여 근대화를 위한 장애를 제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봉건적인 낡은 습관을 비판하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가 빠르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 가운데 서양 자산 계급의 사상을 겸비한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 계몽운동은 당시 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계급적 제한성으로 혁명운동이라기 보다는 개량주의 운동이었다. 아울러 계몽운동의 담당자도 절대 다수가 정부의 위탁을 받은 지식 관료이거나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일본 실학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양하는 과도기의 한 사회 사조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지속된 시간은 매우 짧다. 이 역시 일본 실학의 한 특징이다. 계몽 운동은 일본 민중을 크게 각성시켰고, 자산 계급의 근대 사상은 사람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크게 계발시켰다. 이에 사람들은 메이지 정부의 개량주의 노선에 만족하지 않고, 즉시 '민선 의원'을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육사'의 계몽 운동자들은 도리어 이 운동에 참가하지 않고 자유 민권 운동을 반대하며 나섰다.
자유 민권 운동에 직면한 메이지 정부는 언론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메이지 정부가 사상 계몽을 추진하던 것에서 압제하는 데로 돌아선 것이다. <명육잡지(明六雜誌)>는 정간되고 '명육사'도 1875년 11월에 자동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리하여 계몽 운동자들은 정부측을 지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계몽운동의 타협성과 보수성에 기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일본 실학사상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 실학은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통적 유학에 접근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서양 철학의 이질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거니와 이해할 수 도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 실학은 근대적 성격을 띠면서도 전통적 유학의 성격을 소유하였는데, 이또한 일본 실학사상의 특징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 출현한 실학 사상은 일본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사상적 무기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그것은 동서 문화가 서로 융합되는 가운데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하였으며, 더욱이 근대 철학 형성에 대하여 신구(新舊)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니시 야마네, 츠다 마미치, 후쿠자와 유기치 등 계몽 사상가들은 근대 과학기술과 서로 결합시킨 유럽 근대 철학을 실학으로 포착하였고, 전대의 유교적 관념론을 허학으로 비판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일본 중세기로부터 근대 사회로의 이양 과정을 허학에서 실학으로의 탈바꿈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봉건적 의식 형태를 반대하고 자본주의적 문명 개화를 추진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근대 철학의 발생에 단초가 되었다. 니시 야마네를 '일본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부르고, 후쿠자와 유기치를 '일본의 볼테르'로 칭한 것은 그들이 일본 근대 철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지 단적으로 말해 준다.
총괄하여 말하면 메이지 초기 출현한 계몽철학은 진보와 개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시대적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일으킨 역사 발전의 추동적 역할은 매우 컸으며, 그것은 훗날 일본 근대 철학의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