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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의 발전
[편집]陽明學-發展
양명학이 일본에서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져 일본 양명학파를
형성한 시기는 17세기로, 그 창시자는 나가에 토주이다. 일본 양명학은 유학의 새로운 부흥과
더불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봉건 제도가 새롭게 개편되던 시기로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의 건립과 더불어 전국 시대 제후들의 할거가 끝남에 따라, 봉건적 통치 관계와 경제 관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낡은 장원제(莊園制)의 토지 관계는 이미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당시 일본 봉건 사회의 조직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장군과 삼백여 명의 제후들은 모두 자신의 가신(家臣)들에게 봉지 혹은 봉록을 내렸고, 가신들은 또 자기 몫을 그의 가인(家人) 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러한 봉지·봉록의 관계로 이루어진 신하가 그의 직접적인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종속적 관계가 바로 무사의 신분이다. 그리고 무사는 통치계급의 성원이 된 후, 바로 자기 아래의 농·공·상 세 가지의 사람들을 통치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의 봉건적 사회 조직이다.
즉 막번(幕藩) 제도는 무사가 농민·노동자·상인에 대하여 통치권을 갖고, 제후와 막부가 번사(藩士)와 대신들에 대하여 통치권을 가지며, 막부가 제후에 대하여 절대적 권력을 갖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은 막번 체제는 봉건적 등급 신분제의 사회적 구조에 도움이 되는 이데올로기를 세워, 사회 전반에 대한 사상적 통치의 강화를 당연히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명분론을 특별히 강조하는 유학(특히 주자학)은 막부의 지지를 받아 통치 철학인 관학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유학은 에도 막부가 창도하였으며 각 지방을 다스리는 다이묘(大名)와 제후들에게서도 받들여졌다. 그들은 막부를 본받아 각 지방에 유교주의적 학무소와 번교를 세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창도하는 등, 유학의 부흥에 힘을 기울여 마침내 당시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유학은 점차 선사와 박사, 관료 귀족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전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이에 유학을 생업으로 삼는 전문직 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서당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민간에 유학을 전수함으로써 유학은 사회 각 계층에 침투되었다. 유학의 번영은 정통적 학파인 주자학의 흥성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유학 내부의 분화를 초래하여 사회 각 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학설과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후로 일본 역사에는 전례없는 학술의 번영 시대가 찾아왔다. 중소 지주와 시민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본 양명학파는 이러한 사상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에도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비교적 발달된 교토(京都) 부근에서 발생되었다.
그러나 상품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자본주의
맹아의 출현으로 일본 사회가 갖고 있던 각종 사회적 모순은 날로 첨예해져 봉건적 막번 체제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다. 심각한 사회적 모순과 위기에 직면한 도쿠가와 막부는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언론과 사상에 대한 통제와 탄압 정책을 서둘러 시행하였으며, 1790년에는 '이학(異學) 금지령'을 선포하고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술을 금지하였다. 1797년에는 또 주자학자 이외의 학자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을 막음으로써 이학을 뿌리째 없애려 하였다. 그리하여 막부의 탄압을 받으며 주자학과 맞섰던 고학파는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학 금지령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사토 이사이(佐藤一齊)와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중흥에 힘입어 계속 발전하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신(維新)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신봉하는 철학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 양명학은 나가에 토주가 창립한 이후 토주의 제자인 후치오카 야마(淵岡山)와 쿠마자와 반잔(態澤蕃山)을 중심으로 두 학파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 후치오카 야마를 중심으로 한 일파는 짙은 내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덕교파(德敎派)'라 불리웠다. 그는 일본 양명학의 우파로 양명학의 주관적 관념론을 고수하였으며, 학술상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쿠마자와 반잔을 중심으로 한 일파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개혁을 소임으로 여겨 실천에 옮김으로서 '사공파(事功派)'라고 불리웠는데, 그는 일본 양명학의 좌파가 된다. 후기의 양명학자인 오시오 헤이하치로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은 학통상에 있어서 비록 쿠마자와 반잔과 아무런 연계도 없으나 사상적으로는 모두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양명학에서 좌파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중국 양명학 좌파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또 그들 중 일부 사람들의 탁월한 사상은 혁명적인 변증법적 사상에 접근하고 있어 일본의 근대 변증법적 사상의 수용과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본 양명학의 발전은 1790년 '이학 금지'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양명학의 대표 인물은 나가에 토주와 쿠마자와 반잔이고, 후기 양명학의 대표적 인물은 사토 이사이와 오시오 헤이하치로 및 요시다 쇼인이다.
나가에 토주
[편집]中江藤樹(1608-1648)
일본 양명학의 시조이다. 그가 평소 등나무(藤樹) 아래에서 강학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토주 선생'이라 불렀다. 청년 시절에 토주는 하야시 라잔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배웠으며, 33세가 되던 해에 우연히 <왕용계어록(王龍溪語錄)>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용계의 어록에 불교의 말들이 섞여 있고 그 견해가 선학(禪學)에 가깝다고 여겨, 그것에 대해 시종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37세 되던 해 <왕양명전집>을 구해 여러 번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의 일관된 학문은 태허(太虛)를 체(體)로 삼으니, 이단(異端)과 외도(外道)가 모두 내 안에 있다. 내가 어찌 말이 같다고 꺼리겠는가"(<藤樹先生行狀>)
치지격물(致知格物)의 학문이 비록 새롭다고 하지만 해가 거듭하여도 참뜻을 밝힐 수 없구나. 하늘이 도와서 밝은 세계로 돌아와 태평함에 이르렀으니, 오늘 아침 내 마음에는 새 봄이 찾아 온 듯하구나.(<藤樹先生遺稿>)
이로부터 토주는 완전히 양명학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토주는 양명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구애됨 없이 다른 여러 학파의 장점도 받아들였다. 그는 이 토대 위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상 체계인 '토주학'을 건립하였고, 나아가서는 일본 양명학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저작으로 <옹문답(翁問答)>, <대학고(大學考)>, <논어해(論語解)>, <중용해(中庸解)>, <고본대학전서해(古本大學全書解)> 등이 있으며, 모두 <토주선생전집(藤樹先生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우주론에 있어서 나가에 토주는 완전히 왕수인의 심본체론을 계승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心)이란 전체적인 총칭이요, 태극의 다른 이름이다. 심은 리(理)와 기(氣)를 합하고 심과 성(性)을 통괄하여 비록 주재한다 하더라도, 기실 천지의 형체 밖에까지 통한다. 그것을 크다고 하면 밖이 없고, 작다고 하면 안이 없으니, 바로 조화의 하늘이요, 그것 역시 나에게 주어져 존재한다."(<翁問答>)
이 말은 '마음'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천지만물과 모든 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토주의 주관적 관념론의 이론 체계가 비록 왕수인의 철학 체계를 계승하고 있더라도, 그 내용과 사유적 구조에 있어서는 일부 다른 점도 있다. 토주 철학 체계의 최고 범주는 '명덕(明德)'이다. 명덕은 본래 태허(太虛)와 체를 함께 하는 것이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가슴 한 가운데 존재하더라도 빛은 사해(四海)를 밝게 빛추고 신명에 통하니, 천하를 평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집안을 가지런히 함에 있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천지만물은 모두 명덕(明德)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藤樹先生全集>)
"대개 명덕이라고 하는 것은 상제(上帝)가 인간 속에 자리한 것이니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것이다."(<藤樹先生全集>)
즉 명덕은 인간이 본래부터 가진 선천적인 도덕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토주는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요,
명덕이다"라고 말하여 양지와 명덕을 통일시켜 규정하였다. 양지와 명덕을 동일시하는 관점은 토주와 왕수인이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토주는 '효(孝)'를 명덕의 본질로 간주하였고, 효를 인류 사회 최고의 도덕적 법칙과 우주 만물의 시원으로 여겼다.
토주학과 양명학을 비교해 보면, 양명학 가운데는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적극적인 진취 정신이 충만되어 있다. 그러나 토주의 학문 세계는 이와는 상대적으로 현실 세계의 고민과 번뇌에서 해탈하고, 내면적 세계의 평온과 쾌락을 추구하는 데 좀더 무게가 실려 있다. 따라서 토주학은 방황과 불안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위해 안식처를 마련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전략하였다. 젊어서는 극단적인 배불론자였던 그가 후기에 와서 불교와 타협하고, 심지어 불교를 유학에 끌어들여 절충시키려고 한 것도 이러한 학문적 성향을 연관된다. 토주의 학문은 양명학과 비교해서 이론적 수준이나 사상 체계가 세련되지 않았으며, 거칠고 조잡함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는 그가 양명학자로 변신하여 자기의 사상과 이론을 펼친 시기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고, 학문적 수양과 개인적 소질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쿠마자와 반잔
[편집]態澤蕃山(1619-1691)
도쿠가와 초기 일본 양명학의 또 다른 대표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탐구와 정치적 실천에 의해 일본에서 양명학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는 23세에 나가에 토주의 문하게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토주 문하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27세 이후에는 오카야마(岡由)의 번주(蕃主)인 이케다 미츠오사(池田光政)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번정(蕃政)에 참여하였다. 그는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음란한 사원을 폐지시켰으며,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 등 정치적 업적도 쌓았다. 후에 그는 막부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탓으로 미움을 사 관직에서 쫓겨났으며, 만년에는 궁벽한 지역에 연금되어 있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 <집의화서(集義和書)>, <집의외서(集義外書)>, <대학소해(大學小解)>, <효경소해(孝敬小解)> 등이 있는데 모두 <반잔전집(蕃山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쿠마자와 반잔의 철학적 세계관은 토주의 주관적 관념론을 이어받아 '심(心)'과 '성(性)'을 '태허(太虛)'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으며, '마음'으로 만사만물을 포용하였다.
우주 자연의 생성과 그 존재적 근거를 '심(心)'의 작용이라고 결론 지은 반잔의 말은 토주의 '천지만물은 모두 내 명덕 가운데 있다'는 심본체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반잔의 심본체론에 대한 이론적 전개는 참신한 맛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이론 체계도 허술하여 왕수인이나 나가에토주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반잔은 마음의 절대성과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적 사명 의식에 입각하여 인간 존재의 긍정적 의의와 그 가치를 부각시키고 있는 데, 바로 이곳에서 반잔 철학의 참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명덕이라는 것은 인성(人性)에 대한 존귀한 이름이다. 기타 만물에게는 이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인간은 음양오행의 아름다운 기가 모여서 태어나기 때문에 리의 품부도 온전하다. 오척의 체구로서 하늘의 조화를 도와 천지가 이루어지고 만물이 육성된다. 따라서 천지간에 인간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마음이 있는 것과 같다."(<大學小解>)
이것은 천지의 마음이 인간만이 아름다운 도덕 성품과 우주 자연의 조화를 도울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만물의 영장이 되고 천지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반잔의 이와 같은 찬사는 인간의 아름다운 도덕적 본성과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창조력에 대한 자심감,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부감이 넘쳐난 것이라 하겠다.
토주의 철학이 현실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 세계의 평온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중시한 것임에 반해, 반잔은 사회 현실과 민생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반잔은 불합리한 사회 현실과 정치적 제도를 개혁하자고 호소함으로써 일본 양명학을 실천 지향주의의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학설은 사변적 논리에 대한 철학 이론의 정립보다는, 사회 현실 문제와 결부시켜 변화와 발전을 강조한 사상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의 '시처위론(時處位論)'과 '역간론(易簡論)'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도 왕수인 자신도 <전습록>에서 많이 다루었다. 왕수인은 양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변화(易)'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양자의 끊임없는 변화와 활동을 설명하였으며, 고정불변하는 법칙이나 진리에 얽매여 있는 종래의 사상과 관습을 극력 반대하였다.
물론 반잔이 말한 변화와 발전에 대한 견해는 양명이 말한 변화와 발전과는 거리강 있다. 다만 그가 변화와 발전이라는 양명학의 사상적 요소를 사회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으로 수용했다는 것은, 일본 양명학 발전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반잔은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변역(變易)에 있다고 생각하여, "사물이 지극한 데 이르러 반드시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일체의 사상과 이론 및 정책은 모두 시간(時)·장소(處)·상황(位)에 따라 변통돼야 한다고 보았으며, 각 나라들은 자국의 실제적 상황과 시대의 특징에 상응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시간·장소·상황에 따라 백성들과 함께 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성인이 행하는 근본 이치(聖人之大道)'이다. 이러한 사상적 견지에서 그는 정치적 개혁을 기대하고 일본의 풍토에 적합하지 않은 문물과 제도는 폐지시켜야 하며, 간소한 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요체는 번거롭고 형식에 얽매여 있는 예의범절과 제도를 폐지하고 소박하고 간단한 정치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무사와 낭인들을 농촌에 이주시켜 정착시키자는 '무사 토착제도'를 제시하였다.
사토 이사이
[편집]佐藤一齊 (1772-1859)
일생 동안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활동에 종사하였으며, 만년에는 막부가 설립한 국가 교육기관인 창평횡의 교관직을 맡았다. 선비와 서민의 신분으로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전수받은 자가 무려 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토 이사이는 양명학의 신분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는 합법적 신분을 이용하여 양명학을 보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정통 주자학파와 보수파들은 그를 겉모습은 주자학이지만 속은 '양명학(陽朱陰王)'이라고 비난하며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이사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주자학의 진영 내에서 양명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 야마다 마사다니(山田苦谷)(1805-1877), 가스카 세이안(春日潛庵)(1812-1878),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1869) 등의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시기의 저명한 사상가와 정치가들을 배출시켰다. 이것이 일본 양명학에 대한 이사이의 가장 큰 기여라 하겠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언지사록(言志四錄)'이라 하는 <언지록(言志錄)>, <언지후록(言志後錄)>, <언지만록(言志晩錄)>이 있으며, <난외서(欄外書)>, <애일루집(愛日樓輯)> 등이 있다.
사토 이사이의 학문은 양명학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다른 학파의 사상을 수용하여 학문의 폭을 넓히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다카이 타이료(高井泰亮)는 이사이 학문의 이러한 성격에 유념하면서, "이사이의 학문은 <상산전서(象山全書)>, <전습록(傳習錄)>, <곤지기(困知記)> 등에서 비롯되었으나 오히려 주희를 끌어들여 육왕(陸王)에 합치시켰는데, 그 문장의 정교함은 진실로 나라 안팎에서 으뜸으로 꼽힌다"고 지적하였다. 이 말로 미루어 볼 때, 이사이의 학설은 확실히 주희와 왕수인의 학설을 융합하여 학문의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일본 양명학자 중에서 리와기의 관계를 세밀하게 검토한 학자는 이사이이다. 그는 양명학의 일원론적 견지에 입각해서 리기합일론을 주장한다.
이사이는 우주 만물과 자연 현상을 모두 기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 세계의 사물은 형태가 각양각색일 뿐만 아니라 내부 구조도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이사이는 각 사물이 처음 이루어질 때는 각 사물이 나누어 가진 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다양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지, 완전히 다른 원질(原質)에서 다른 사물이 생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형태가 다른 것은 기의 품부가 다른 것이지, 그 근원은 기가 움직인 것으로 결국은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사이는 인간도 기를 품부받아 태어났다고 생각하며, "인간은 지기(地氣)의 정령(精靈)으로 땅에서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니, 필경 땅을 떠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인간이 땅의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기운을 받아 생겨났다는 말이다. 그는 또 "나는 기이고 사물 또한 기이다. 나와 사물이 모두 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기의 영묘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 품부받은 기가 달랐기 때문에 성인과 평범한 사람,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별이 생기게 된다고 말하였다.
우주 개념에 대한 이사이의 해석도 이와 같은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우(宇)란 대대(對待)의 역(易)(변화)이요, 주(宙)란 유행의 역이다"라고 말하며 대립물의 전화(轉化)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변증법 사상 가운데 긍정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사이의 변증법을 통들어 살펴보면 기계론적 성향에 너무 집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사물의 대립적 통일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균형과 통일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서로 모순되고 투쟁하는 측면을 홀시하거나 부정함으로써 변증법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 성격을 말살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의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주된 관심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를 망각하고 피차의 구분없이 주어진 운명에 안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변증법 사상 가운데 부정적인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이의 변증법은 당시 문화적으로 상대적 후진국이었고 더욱이 변증법적 사유가 발달하지 못한 일본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의 일본 변증법 사상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사이의 학설 가운데 다른 중요한 구성 부분은 그의 기계론적 정명론(定命論)이다. 그는 사물 법칙의 객관성과 필연성을 긍정하여 "천도의 운행은 점전적이고 인간 사회의 변화도 점진적이므로, 필연적인 추세를 거역한다고 해서 멀리 할 수도 없고 다그친다고 해서 더 전진하게 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사물에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있고 인간에게는 생사가 있으니, 이것이 곧 끊임없이 생하고 멸하는 생명의 법칙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물 법칙의 객관성과 필연성에 대한 이사이의 인식은 인과율의 절대성만 긍정하고 인간에게 고유한 의지의 자유는 부정하는 폐단을 가져왔다. 이에 그는 결국 기계론적 정명론의 굴레에 빠져들고 말았다.
오시오 헤이하치로
[편집](1793-1837)
일본 양명학의 중요한 인물로, 오시오 쥬사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거처하던 서재가 '세심동(洗心洞)'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세심동 주인'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일찍이 오랜 기간 오사카에서 하급 경관(警官)인 요리키(與力)를 맡았으며, 37세에는 그것마저 사퇴하고 강학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고본대학괄목(古本大學刮目)>, <세심동찰기(洗心洞札記)>, <유문공허취어(儒門空虛聚語)>, <증보고경회주(增補考經匯注)> 등이 있으며, 이를 통칭하여 '세심동사부서(洗心洞四部書)'라고 부른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일본 양명학자 가운데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일궈낸 사람이다. 그의 학설의 주된 내용은 '태허설(太虛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우주간의 모든 것은 '태허'이며, 크게는 천지에서 작게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하기 때문에 피차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태허가 내 마음에 존재하고 내 마음이 곧 태허라고 생각하였다.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마음을 태허에 귀결시킨 것은 마음을 적막하고 고요하며 공허한 것으로 만든 결과를 초래하므로,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은 오시오 헤이하치로 역시 인정하여 "궁극적인 진리에서 본다면 양명학에서 말하는 공은 본래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양명학과 불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 비난을 쉽게 초래할 우려가 있다. 더욱이 양명학은 일찍부터 선학(禪學)이라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었다. 그러므로 양명학과 불교 사이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양명학과 불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고 변명하였다. 그것은 그가 "적멸하여 죽어 있는 것과 고요하면서도 생맹력이 있는 것의 차이"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불교를 '사대가 모두 공이다'(四大皆空)라고 설교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과 가족을 버리고 인륜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에 빠뜨리고 출가할 것을 권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것이 현실을 도피하는 출세주의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마음에 구멍을 뚫어 본성을 도려낸 시들어 죽어 버린 공으로 '적멸의 죽은 공'이라고 몰아 부쳤다. 그러나 그는 양명학에서 말하는 공이란 인욕이 제거되어 인의만 보존된 마음의 순수한 상태, 즉 한결같이 순수하고 중절(中節)한 상태를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허가 곧 양지'라고 그는 말하였으며, 비록 공을 말하더라도 그 속에는 이미 실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태허는 형체가 없지만 영명함을 지니고 있으며, 만사 만물과 리가 모두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 생성되고 유행한다. 사람에게 품부되어서 마음이 되므로, 마음은 비록 허하지만 영묘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중절함이 있게 되고, 인이 보존됨으로써 온갖 일들은 여기에서부터 나온다."(<儒門空虛聚語>)
이 때문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자기가 말하는 '공(空)'은 공이라 하더라도 생명력이 있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완전히 다르다고 하였다. 그가 자신의 학설을 '공허한 실학'이라고 자칭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상술한 논의는 양명학을 선학으로 매도하는 주자학파의 공격에 대한 반발로서, 양명학과 불교의 근본적 구별을 이론적으로 적절히 해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치양지설'은 그의 도덕 실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이것은 또 그의 태허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에 그는 '양지'에 관하여 "양자는 태허의 영명(靈明)함이다"라고 규정 짓고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영명하여 어리석음이 없다는 것은 지극히 선한 것이 발현된 것이다. 그것은 명덕의 본체이자 이른바 양지이다. 이로부터 보면 양지는 곧 지선(至善)이다. 양지의 본체는 하늘의 태허로서 무극(無極)의 참됨이다."(<洗心洞札記>)
이는 곧 양지가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도덕 의식으로서, 이른바 천리라는 뜻이다. 양자는 마음을 거처로 하고 마음은 태허를 본체로 삼고 있음에 따라, 심과 리는 하나가 되고 양자와 태허도 하나가 된다. 이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다시 "마음이란 바로 오장을 따로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오장을 지닌 마음으로서 단지 한치의 작은 면적일지라도 천리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심즉리(心卽理)'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지와 태허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고, 양명학의 치양지설을 자신의 독특한 표현 방식인 '심귀태허(心歸太虛)'설로 모아 내었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은 태허로 되돌아간 본연의 마음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른바 '지(知)'는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마음이 본연의 태허로 되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진실한 양지가 있게 되며 지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공자와 안회가 기뻐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보통 사람의 마음과 성인 마음이 허령(虛靈)함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기절에서 맑고 혼탁함과 밝고 어두움의 차이가 있어 그것을 함께 논할 수가 없다.(<洗心洞札記>)
이는 곧 기질 변화의 필요성을 오로지 일반 사람과 평범한 서민들에게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오물에 더렵혀진 벽은 반드시 부지런히 씻고 깨끗하게 닦아야만 정결하고 아름다운 벽으로 변하듯이 일반 사람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기질을 변화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방치해 둔다면, '각종 욕망과 감정의 세파 속에 빠지게 되어 일생을 망치게 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명예와 지위, 부귀와 영화는 비단으로 장식된 함정과 같아서 마음을 비우게 되면 그것을 알아채고 피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눈으로 보고서도 발견할 수가 없어 제발로 빠져 죽은 자가 적지 않다"고 경계하면서, 기질을 변화시켜 마음을 태허의 본연으로 회복시켜야만 바깥 사물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인욕에도 오염되지 않는다고 애써 강조하였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특히 맹자를 숭상하여 "맹자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바로 태극 때문이다. 맹자는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자이니, 하물며 보잘것 없는 부귀와 빈천으로 그를 흔들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극찬하였다. 그의 '심귀태허설(心歸太虛說)'의 전체적인 모습은 '인욕을 멸하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송명 리학가들의 금욕주의와 도덕 지상주의적 사상 유형과 그 내용을 같이한다. 이 학설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봉건적 윤리 도덕을 체득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언행이 봉건적 윤리 도덕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기질 변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도 높게 강조한 그의 '심귀태허설'의 이론적 측면은 현실 생활 속에서 사람마다 지속적인 자기 개조와 수양을 통해 도덕 심성과인격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보편적 의의도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추구한 '양지'는 맹자가 말한 "부귀를 누린다 해서 음란하지 않고 빈천하다 해서 뜻을 굽히지 않으며, 권력과 굴하지 않는" 숭고한 도덕 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숭고한 도덕 정신과 고매한 인격성을 단순히 탁상공론으로 그치지 않고 일생의 신념과 행동 철학으로 몸소 실천하였는데, 이 점은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요시다 쇼인
[편집]吉田松陰(1830-1859)
막부 말기 일본 양명학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 시기 그의 문하에서는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을 들어 보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키도다 카요시(木戶孝允), 쿠사카 겐츠이(久阪玄瑞) 등이 있다. 그의주요 저작으로는 <맹성록(猛省錄)>, <강맹여화(講孟余話>, <유수록(幽囚錄)> 등이 있으며, 이 모두 <요시다 쇼인전집(吉田松陰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요시다 쇼인은 사변 철학의 논리에 안주하기보다는 사회 현실 정치에 대한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학설은 적극적인 자세로 허위허식과 공리공담을 강하게 거부하였으며, 실제의 일과 실제의 효과에 대해 많이 논하고 있다.
요시다 쇼인은 위와 같은 견지에서 학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허식을 버리고 진실하게 시작해야 하며, 번잡한 것은 간략히 줄여 요체(要體)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허명(虛名)을 부러워하여 진실한 공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피력하였으며, 학자는 실천과 변화 속에서 본심을 체인(體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에게는 또 다른 학설이 있다. 고요한 곳에서 본심(本心)을 체인하는 것도 진실로 훌륭하지만, 움직이는 곳에서 본심을 체인하는 것이 더욱 훌륭하다.>(<吉田松陰全集>)
수양 문제에 관하여 왕수인은 일찍이 고요한 상태에서 깨달아야 한다는 정적인 방법과 일에 임해서 연마해야 한다는 동적인 방법,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쇼인은 위의 설에서 비록 왕수인의 두 가지 방법을 겸하여 수용하고 있지만, 그는 외부 사물과 접촉하여 본심을 체인해야 한다는 실천의 방법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그가 객관적인 외부 사물은 항상 운동과 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 역시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야 한다는 좀더 합리적인 측면에서 심성과 도덕의 수양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막부 말기 급변하는 사회 정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역사 발전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그의 정치적 입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요시다 쇼인은 이지의 '동심설(童心說)'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학설에서 육체는 멸하나 마음(정신)은 멸하지 않으며, 영혼은 존재한다는 관념론적 생사관이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체는 멸하며 소실되지만 영혼은 영생불멸한다는 쇼인의 관점은 자연 상태계의 법칙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으로 지극히 어리석은 비과학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영생불명한다'는 쇼인의 관념론적 생사관은 그래도 사토 이사이의 숙명론적 생사관에 비해 자각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 정의 의 구현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생사와 영욕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과감히 실천해 나가는 투쟁 정신이라 하겠다. 이 정신은 그가 옥중에서 쓴 '자경시(自警詩)'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이 시에 "선비가 정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몸을 보존하는 일이 어찌
중요하리요? 기회가 없어 뜻을 행할 수 없으면 목숨을 끊어 정의를 이룸은 마땅하리다. 도가 행하여짐에 어그러짐이 없으니 성인이 밝힌 도는 백세에 이르러도 여전하리다"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선비는 영예롭게 죽을지언정 비굴하게 목숨을 보전하지 않는다는 쇼인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전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투쟁정신이 일본 사회가 근대로 이행하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일궈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쇼인 자신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자신의 일관된 신앙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일본인들의 숭배와 존경을 받아왔으며, 나아가서는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높이 받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