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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일본의 사상/주자학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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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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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學-傳來

주자학이 일본에 처음 전래된 것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로 대략 주희가 죽은지 1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당시 일본은 해상 교통이 비교적 발달하여 무역선이 끊임없이 중국과 내왕하였으며, 승려들도 중국을 자주 왕래하였다. 주자학의 최초 전파자로 일본 승려 슌죠를 들 수 있다. 슌조는 1199년 송나라에 들어가 불학(佛學)을 배우면서 주자학도 함께 배웠다. 1211년 귀국하면서 그는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유학 서적이 256권이나 된다고 한다. 이어서 임제종(臨濟宗)의 시조인 변원원이(辨園園爾)(1235년 입송, 1241년 귀국)가 수천 권의 서적을 휴대하고 귀국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학혹문(大學或問)> ·<중용혹문(中庸或問)>·<논어정의(論語精義)>·<맹자정의(孟子精義)>·<맹자집주(孟子集註)> 등이 있었다. 그는 귀국후 <대명록(大明錄)>을 강의했고 정이와 주희의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유교와 불교의 개요도 논술하였다. 이를 이어 많은 일본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면서 불교와 유학을 연구하였고, 귀국하여 불교와 주자학을 전파하였다.

송나라의 승려들도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주자학을 전파하는데 비교적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 인물로는 도륭(道隆)(1246년 일본에 입국)과 정념(正念)(1269년 일본에 입국), 조원(祖元)(1278년 일본에 입국)과 일산(一山)(1299년 일본에 입국) 등이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불학과 주자학을 강의하였으며, 일본에 전파되는 데 공헌하였다.

이 승려들은 주로 일본의 교토(京都)와 가마쿠라 두 지방에서 전파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교토의 다섯 개 절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교토의 다섯 개 절과 가마쿠라의 다섯 개 절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 두 지방의 다섯 개 절을 일본에서는 '오산(五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최고 학부였다. 당시 유명한 승려들은 모두 이 두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에 대한 그들의 강의는 다만 불학의 전수를 위한 것이었지 주자학의 정수(精髓)는 아니었고, 단지 문학과 역사학에만 치우쳐 있었다. 당시 승려들은 유학의 문학과 역사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불학을 전수하는 한편 문학과 역사를 강의하여 당시 이른바 '오산 문학'을 흥성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당시 승려들의 주자학 전파는 일본 원유의 경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토에서 주자학의 기초를 닦아 놓은 승려 현혜는 고다이고 천황의 시강(侍講)으로 천황에게 <사서집주>를 강의하였으며, 공경귀족인 기타바타케도 현혜에게 <자치통감>을 배우고 그것을 본보기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일본 남북조 시대의 공가(公家)·귀족과 무사의 정권투쟁은 정치세력의 현저한 차이로 고다이고 천황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주자학은 이로 인하여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이것이 가마쿠라 시대의 주자학 전래 상황이다. 아시카가씨(足利氏)는 교토에 막부 정부를 세웠고, 교토는 당시 일본의 정치·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교토에 있는 오산(五山) 승려들은 막부 정권과 결탁하여 주자학과 중국 문학을 전수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에 이르러 승려들이 주자학을 독점했던 상황은 점차 사라지고, '박사공경(博士公卿)'·'사추난(薩南)'·'카이난(海南)'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자학 연구의 3대 학파가 형성되었다.

박사공경학파의 대표 인물은 게이안 겐주(淸原宣賢, 475-1550)와 이치조 가네라(一條兼良-1402-1481) 등이다. 이치조 가네라는 주자학으로 일본의 고전과 신도(神道)를 해석하려 하였다. 그들은 한당 시기의 주석본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모두 주희의 주석을 사용해 신도·유교·불교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사추난학파의 대표 인물은 게이안 겐주(桂庵玄樹, 1447-1505) 및 그의 제자들이다. 게이안은 1467년에 중국 소주와 항주에서 유학하고 1473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사추마(薩摩) 등에서 주자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주희의 <대학장구>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부단한 노력으로 사추난(薩南) 지방에서 주자학이 신속히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사추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카이난학파(海南學派)는 토사(土佐) 지방에서 형성되었다. 그의 대표 인물은 미나미무라 바이겐(南村梅軒)이다. 그는 토사 지방 귀족들에게 주자학을 강의하였고, 그가 쓴 <백개조(佰個條)>(家法)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의 사상이 관통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케나다 신겐(武田信玄)이 쓴 <신현가법(信玄家法)>에는 상당 부분 <논어>·<맹자>·<주역>·<서경>·<여씨춘추>·<효 경>·<예기의 어구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이 외에 아시카가(足利) 지방에서는 학교를 세웠는데, 이 역시 일본에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하나의 거점이 되었다.

초기 주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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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 朱子學

일본 주자학의 역사는 400여 년이나 되었지만, 그 시기 동안 주자학은 줄곧 불교 선종의 예속 아래에 있었다. 주자학이 진정 학문으로 전개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였다. 이 시기의 대표 인물로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와 그이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이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승려였지만, 나중에 주자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가 이렇게 불교계를 떠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전리품으로 강탈한 한국의 유학 서적과 전쟁 포로인계의 제자 강항(姜沆), 조선사절단이었던 김성일(金成一)·허잠(許箴) 등과의 접촉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 아베 요시오(阿部吉雄)는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과 만나면서부터 그의 사상에 변화가 생겼으며, 이때 비로소 신유학에 대한 연구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고 하였다.

후지와라 세이카가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승려복 대신 유복(儒服)을 입고 도쿠가와를 만나 중국 역사를 강의하였다. 이것은 일본 유학이 불교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러므로 후지와라 세이카의 최대 공헌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불학의 예속에서 벗어나 주자학을 진흥시킨 데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창시자이며, 그의 철학 사상은 완전히 주희 객관적 관념론의 성리(性理) 학설을 따른 것이다. 그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석가는 이미 인종을 끊고, 의리를 소멸하였으므로 이단이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도 취할 바는 있다고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 자비를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은 훌륭하나, 승려들이 재물을 탐내는 것은 부처의 본의에 어긋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주장에 대해 "다 같이 요순을 존경하고 걸주(桀紂)를 비난하며, 다같이 공자와 맹자를 존경하고 석가와 노자를 비난하며, 천리를 공으로 하고 사욕을 사심으로 한다" 고 평가하였다. 그는 또 신도(神道)와 유교의 조화를 주장해 "일본의 신도 역시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만민을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은 깊고 신비한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유교라 하고 일본에서는 신도라 한다. 이름은 다르나 내용은 같다"고 말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야시 라잔을 꼽을 수 있다.

하야시 라잔은 1604년에 후지와라 세이카를 스승으로 모시고 일생 동안 에도 막부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막부 체제 건립 시기에 문교 정책에 제정 등에 참여하여, 주자학이 에도 시대에 관학의 지위에 오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리기(理氣) 문제에서 리기 합일을 주장한다. 이에 그는 "태극(太極)이란 리이고, 음양(陰陽)이란 기이다. 태극 중에 본래 음양이 있으며 음양 중에 역시 태극이 있다. 오상(五常)은 리이고 오행(五行)은 기이다. 그러므로 리기를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논한다. 나는 이것이 비록 주희의 원뜻에 어그러지는 것 같지만 이것을 강조한다"고 말하였다. 또 "리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데 이것은 송유(宋儒)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하야시 철학 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배불(排佛)의 측면에서 그는 그의 스승 후지와라보다 더욱 강경했다. 그는 불교를 주로 세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의 출세주의를 비난하였으며, 불교가 정치를 문란하게 했다고 질책하였고, 불교 사원 건설의 낭비를 질책하였다. 그는 에도 초기 주요 배불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는 아마 그가 조선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것은 하야시가 젋었을 때 읽은 책 가운데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와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입학도설>에는 조선의 저명한 배불론자인 정도전의 <심기리편>의 주해가 수록되어 있다. <심기리편>의 내용은 불교를 반대하고 주자학을 선양한 것이다. 둘째, 하야시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비판하여 <배야소(排耶蘇)>라는 저작을 내놓았다. 셋째, 하야시는 후지와라의 신도와 유교를 조화하는 사상을 계승하였으며, 신도와 불교의 조화를 반대하였다. 그는 "우리나라는 신국(神國)이다. 신도(神道)는 바로 왕도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우 나라의 신도는 왕도이고 왕도는 유학이니 물론 차별이 없다. 이른바 유일한 본원이란 리의 당연한 심지(心地)이니 그 뜻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일본의 신(神)·유(儒) 합일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주자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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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學-發展

일본 주자학은 에도 시기 하야시 라잔의 공헌으로 통치 철학의 지위를 굳혔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주자학은 흥성하게 되었는데, 그 현저한 특징으로는 사승(師承) 관계와 지역에 따른 여러 학파가 출현한 것이다. 이를테면 교토학파(京都學派), 카니시학파(海西學派), 카이난학파(海南學派), 오사카학파(大版學派) 미토학파(水戶學派) 등이 있었다. 학파마다의 철학의 견해가 다 같은 것도 아니다. 어떤 학자는 그의 일생에서 자신의 견해를 여러 차례 바꾸는 실례도 있었다.

주희의 철학 세계는 리일원론에 기초로 한 객관적 관념론이지만 그의 철학사상에는 리기원론의 사상적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 이 영향을 받아 어떤 주자학자들은 유물론적 경향을 띠기도 하고, 또 몇몇 주자학자들은 관념론적 경향을 지니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주자학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유물론적 경향을 가진 대표 인물로서는 무로 큐소(室鳩巢), 카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나카이 치쿠진(中井竹山), 나카이 리켄(中井履軒), 도미나가 나가모토(富永仲基) 등이 있었다. 또 관념론적 경향을 가진 대표 인물로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야자자키 안사이(山崎闇齊), 사토 나오카타(佐藤直方), 아사미 케이사시 등이 있었다.

무로 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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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鳩巢 (1658-1734)

일본 에도 시대 중기의 주자학자이다. 53세 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추천으로 막부의 관리로 임명되어, 도쿠가와(德川) 제8대 장군인 요시무네(吉宗)의 참모가 되었다. 그의 활동 시기는 바로 도쿠가와 막부의 관학인 주자학을 반대하는 사조가 세차게 물결치는 시대였다. 그는 주희의 사상을 숭배하고 믿으면서 "인의(仁義)를 겸하고 내외(內外)가 부합되며 고금에 통하는 것은 오직 주자학 뿐이다"라고 말하여, 주자학을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주자학의 진흥을 통해 에도 막부의 봉건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주희의 '리선기후론(理先氣後論)'을 견지하면서, 리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그는 "수레의 도리는 항상 있는 것이므로, 수레가 없었던 상고 시대에 수레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금 수레를 만드는 사람들이 수레를 만들려고 할 때…… 어느 때를 불문하고 수레의 도리는 항상 있으므로 그 리에 근거하여 수레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리기합일론(理氣合一論)의 자연관을 견지하였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기 아닌 것이 없고 리는 기를 떠날 수 없으며, 기가 없으면 리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인식론에서 그는 왕수인의 '처양지설(致良知說)'을 비판하면서 "사물에 접촉하여 양지(良知)에 이른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곧 실제의 사물에 근거하여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사상에 무로 큐소는 막부를 존중하여 천황보다 더 높였으며, '왕도를 높이고 패도를 천하게 여기는' 유가의 사상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또 사회 계약론에 치우쳐 불교와 일본 신도도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가 세상 백성을 현혹시키는 것이며 천하의 큰 폐단이라고 간주하였고, 신도(神道)와 성인의 도는 상응하지 않는 모순이 있다며 일본신도를 강렬히 비판하였다.

카이바라 에키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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貝原益軒齊 (1630-1714)

원래 카이시(海西) 주자학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의 사상적 변화를 거쳤다. 14세부터 의학서를 읽기 시작했고, 불교를 좋아했으며, 후에는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의 심학(心學)에 흥미를 가졌다. 36세 이후로는 <학부통변>를 읽고 주희를 숭배하였으며, 85세 때 <대의록(大疑錄)>이라는 책을 지어 주희를 비판하고 유물론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에 기초하여 기(氣) 철학을 제창하였다.

리기론에서 카이바라는 "리란 그 어떤 한 사물이 아니라 리일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인성 문제에서 그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같지 않다는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는 사물이 죽으면 성(性)도 그에 따라 없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 리가 기를 떠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 사람의 육체를 떠날 수 없다고 보았다. 지행관에서 그는 주희의 '지선행후설(知先行後說)'을 부정하고 지행의

상호 작용(知行竝進)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주자학을 배척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는 자신을 주자학자로서 자처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희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고수하지는 않았다. 그의 학풍은 비교적 자유롭고 자주적이었다.

카이바라는 학문이 넓고 재능이 많은 학자였다. 그가 지은 <대화본초(大和本草)>는 일본 약학과 식물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자연 현상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연구는 그로 하여금 결국 소박한 유물론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야마자키 안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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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崎闇齊 (1618-1682)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후에는 승려가 되어 불교 서적을 공부하였으며, 25세에는 불교와 다시 인연을 끊었다. 그는 33세에 이황의 <자성록(自省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숙독하면서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일본 정통 주자학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철학 사상은 다음과 같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주자학을 마치 종교처럼 신봉하였다. 그는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을 거의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주자학을 절대 진리로 믿었다. 따라서 그는 주자학과 상통되지 않는 사상과 학문은 일체 부정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그는 "정주(程朱)의 학문에서는 매우 많은 말을 했지만 오직 학자들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벽이(壁異)>라는 저서에서 삼강오상의 가르침과 상응할 수 없는 불교를 논박하였으며, 또 그가 지은 <대가상량집(大家商量集)>에서는 육구연과 왕수인의 심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선유들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그를 '정신 노예', '창조성이 없는 교조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인용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의 학술에 진정 자주정신이나 창의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중국 유교를 일본화한 대표 인물이며 수가신도(垂加神道)의 창시인이라 할 수 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궁리(窮理)보다 거경(居敬)을 중시하고 정좌(靜坐)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실천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는 "경(敬)이란 모든 마음의 주재자이며 만사의 근본이다"라고 말하면서, 경으로 수양을 잘 하기만 하면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그는 유교를 일본화하였다. 그는 비록 공맹 유학을 존숭하였지만 자기의 조국을 더욱 사랑하였다. 그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중국에서 공자를 대장으로, 맹자를 부대장으로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공해 오면, 공명의 도를 배우는 우리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제자들이 머뭇거리자 그는 "불행하게도 이러한 재난을 맞게 되면 우리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들고 그들과 싸워 공자와 맹자를 잡는 것이 우리나라 은혜에 대한 보답이고, 이것이 바로 공맹의 도이다"라고 말하였다.

야마자키는 유교사상을 일본 신도와 결합시켜 수가신도(垂加神道)를 창건하였다. 그는 태극·음양·오행에 관한 주희의 이론을 수가신도의 이론 기초로 삼아 '도'란 음·양 두 신이 낳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도'라고 풀어서 일본의 고대 전설을 해석하였으며, 그의 신도 체계를 확립하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라는 야마자키의 설교와 일본 천황은 만세 동안 하나의 계통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에도 막부 말기에 존황(尊皇)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추진한 결과를 낳았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양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토 나오카타(佐藤直方)·아사미 케이사이·미야케 소상이(三宅向齊)는 '기문삼걸(崎門三傑)'이라 불리웠다.

구마모토(態本) 주자학파의 창시자는 오츠카 다이야(大塚退野)(1677-1750)이다. 그는 처음에 나가에 토주(中江藤樹)의 양명학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이황의 <자성록>과 <주자설절요>를 공부하면서 이황과 주희를 숭봉하고 큐슈(九州) 구마모토(態本) 주자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학파는 구마모토 실학파(實學派)라고도 일컬어진다. 이른바 실학파란 지금 말하고 있는 실학파와는 달리, 다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적으로 한 학문이었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불리운다. 오츠카 다이야의 문하에는 야부고산(藪孤山), 요코이 쇼난(橫正小楠) 등 걸출한 제자들이 있었다. 이 학파의 특징은 이황을 통해 주자학을 연구하고 독자전인 구마모토 학파를 개척한 데 있다. 그들의 학문은 후대에 이어져 메이지 유신 시기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주자학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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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學-衰退

에도 막부의 건립 초기에은 일련의 정책으로 농업과 가내 수공업의 생산성이 발전되었고, 이것이 상품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상품 경제의 발전은 봉건 생산 방식의 경제 구조에 영향을 주어 막부 체계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봉건적 의식 형태로써 주자학도 점차 그 통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학(古學)·양명학(陽明學)·국학(國學)·서양학(西洋學) 등의 여러 학파가 선후로 출현하였다.

일본의 양명학파와 고학파의 사람들은 원래 대다수가 주자학자들이었으나, 연구 과정에서 의심이 생겨 주자학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른 학자도 있고, 양명학이나 공맹의 원작 속에서 유학의 참뜻을 찾는다는 고학파로 전향한 학자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학파의 선구자인 야마가 소코(1622-1685)는 자기의 사상 변화 과정을 "나는 처음에는 송학(宋學)을 강의하고 정주를 찬성했다. 40세 이후 리기와 심성설에 의심이 들어 이미 지었던 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다. 또 나는 <성교요록(聖敎要錄)> 3권을 세상에 발표해 정주를 배척하고 논박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 뜻은 대체로 주자학의 추종자를 풍자하는 데 있었다"고 적고 있다. 즉 그는 40세 이후에 주자학을 의심하여 그 본원인 공자와 맹자의 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의 대표 인물인 오규 소라이(1666-1728)도 원래 주자학자였다. 그 역시 50세를 전후하여 주자학 입장을 버리고 '고문사(古文辭)'의 연구를 통해 고학을 제창하는 길로 나아갔다. 고학파는 복고의 기치를 걸고 주자학을 반대했는데, 이는 일본 주자학의 쇠락하는 징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양명학의 대표인 나가에 토주 역시 처음에는 주자학자였다가, 왕수인을 비롯한 양명학자들의 저작을 연구하고 끝내 양명학의 대가가 되었다. 심지어 주자학자로 자처하는 카이바라 에키겐도 리기합일을 제창하면서 주희의 리선기후설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 주자학은 양명학파 등 유학 내 각 학파의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학파 및 서학 등 각 학파의 위협도 직접 주자학 이외의 이학(異學)을 금지하였으며, 1795년에는 이학에 속하는 유학자를 관리 임용에서 제외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막부의 조치로 각 학파는 점차 쇠락하였지만, 그렇다고 주자학이 이전과 같이 흥성하지는 못했다. 당시의 주자학자들은 다만 주자학 이론에 익숙한 교육자였을 뿐, 그 어떤 창의성과 생기를 보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일본 주자학이 쇠퇴기로 들어가자 이를 대신하여 흥기한 것이 양명학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사토 이사이(佐藤一齊-1772-1859)와 오시오 헤이하치로(1794-1837)이다.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막부에 임명된 유학관으로 겉으로는 주자학을 신봉하고 강의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명학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주자학이 이미 이전과 같은 주도적 지위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학의 금지 이후 주자학의 최대 논적은 '난학(蘭學)'과 '국학(國學)'이었다. 난학과 국학의 영향은 날로 퍼져 심지어 유학 내부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이른바 '국학'이라는 것은 유교, 불교 등 일체 외래 사상을 반대하고 일본 <고사기>·<일본서기>와 <만엽집(萬葉集)> 등에 기록된 일본 신화에 의거하여 '일본정신'을 제창하고 '황국의 도'를 고취하며 '황국 정신'을 내세우는 학문이다. 이 학파의 사상은 게이추(契沖, 1640-1701),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1660-1736)에 의해 창시되어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 모투리 모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에 의해 발전되고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 1776-1843)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가다노 아즈마마로의 국학 연구는 유교와 불교 등의 외래 사상을 배척하고, 고도(古道)를 부흥시키며 국학을 부흥시키는 것을 종지로 삼았다. 복고국학(復古國學)의 확립자는 가모노 마부치이다. 그는 일생 동안 <만엽집>을 연구하고 <국의고(國意考)>, <가의고(歌意考)> 등 많은 책을 지어 복고국학의 방법론과 발전 방향을 확립하였다. 그의 복고국학의 사상 방법은 고학파인 오규 쇼라이의 고학과 같은 것이지만 양자의 연구 대상은 같지 않았다. 즉 국학은 일본 고전으로 고도(古道)를 천명하지만, 오규 쇼라이는 중국의 고문사학(古文辭學), 즉 육경(六經)을 통해 성인의 도를 천명하였다. 이와 같이 가모노 마부치는 의식적으로 고대언어학의 방법을 응용하고, 객관적으로는 문헌학 방법의 범위에서 출발하고 고전 언어 문학의 내용을 보편 진리라고 단정하면서 문학상의 고도를 천명하는데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만엽집>의 연구에 관심을 돌리면서 "고대를 존중하여 당시의 봉건 제도 및 그 의식 형태인 주자학을 철처히 비판·부정하면서 압박과 착취가 없는 절대 평등의 사회관을 제창하였다. 그의 이상 사회는 이른바 '자연세(自然世)였다.' 그는 일본 고대에는 이러한 이상 사회가 있었으나, 공자나 석가 등 성인들이 이익과 사욕을 위해 '법세(法世)'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자연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에 마땅히 긍정해야 할 점은 노동 중시·평등 제창·성인 부정·비판 정신 등이다. 그러나 그의 '자연세' 사상에는 과학 문화와 상품 생산 등을 반대한 공상도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우라 바이엔 역시 에도 중기의 사상가이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각종 방식으로 주자학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자연 철학의 영역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동방 전통 철학의 합리적인 요소와 동서양의 의학·천문학 등 자연과학 지식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독창적인 '조리학(條理學)'과 '반관합일(反觀合一)'이라는 인식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은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 수입된 서양의 자연과학은 근대 일본의 과학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때 그는 서양의 자연과학 지식을 벗어나 자기의 독특한 언어로 '조리학'과 '반관합일론'을 창립했으며 과학적 세계관의 길을 개척하였다.

미우라 바이엔은 일찍 유학을 중심으로 한 동방 문화의 영향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으로 공자를 존경하지 않았으며, 또 유학의 경전들을 '대습기(大習氣)'의 종자로 보고 사람들에게 '대습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른바 '대습기'란 자주 보고, 자주 듣고, 자주 접촉하여 더는 의심할 수 없는 심리 습관을 가리킨다. 그는 이와 같이 종래의 유학자와 다른 독창적 태도와 견해를 가진 철학자였지만, 시대가 준 제한성으로 인해 동방 전통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는 또 일찍이 부친의 의업(醫業)을 계승하였으며, 의술도 매우 뛰어났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과 <해체신서(解體新書)>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하였고, <해체신서>의 실측 방법을 특히 중시하였다. 이는 그의 자연 철학 사상의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미우라 바이엔은 풍부한 자연과학 지식에 기초하여 유물론적 자연철학관을 제기하였다. 그는 "대지란 다만 하나의 기가 있을 뿐, 이외의 다른 어떠한 사물도 없다. 사물밖에 기가 없으면 하나의 묘리(妙理)가 우주를 관통하고 있을 뿐, 오묘한 세계는 끝이 없고 그 신기한 변화는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계의 모든 현상이 기(氣)·물(物)·체(體)·성(性) 네 가지가 혼합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기철학이 비록 유물론이기는 하지만, 시종 실증과학의 요소가 결핍되어 있었고 인성과 도덕 철학에 편중되어 있었다. 중국 명청 시기에 방이지가 서양의 자연과학을 흠수하여 '화기일원(火氣一元)'의 유물론적 자연철학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중국에서는 방이지의 철학을 계승한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일본의 미우라 바이엔이 방이지의 유물주의 자연 철학의 내용을 충실히 계승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미우라 바이엔은 동방 전통 철학의 결점을 보완하는 면에서 중국의 방이지와 함께 시대를 구분 짓는 이론적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 여러 학자들도 비록 각자의 특색을 갖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이미 발전한 상업자본의 시대적 요구를 철학에 반영하였다. 또한 거의 모두가 서방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봉건제도 및 그 정신적 주자학을 비판하여 일본 주자학의 해체를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