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일본의 사상/도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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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전래[편집]

道敎-傳來

일본 고문헌 중 가장 일찍 도교사상의 흔적을 남긴 것은 <일본서기>의 '상세(常世)' 사상이다. <일본서기> 권6의 기록을 보면, 이른바 '상세'란 속인들은 갈 수 없고 신선들만이 살고 있는 곳인데, 그곳을 '상락지국(常樂之國)' 이라고 한다. 그 상락지국은 만리가 넘는 파도길을 헤치고 약수(弱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이것은 도교의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밖에 <일본서기>

권7과 권14, 권24 등에서 도교사상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보아 중국의 도교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널리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도교사상의 영향은 일본의 초기 제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서기>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3년(644) 가을 7월조(條)에는 '상세신(常世神)'에 제사를 지내면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고 늙은이는 젊어진다"고 씌어 있다. 이러한 제사를 지내는 방법에는 소와 말을 잡아 토지신에게 바치거나 물귀신에게 기도를

하는 등, 중국 풍습이나 종교적 형식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제사가 조직화되고 종교집단이 형성될 조짐까지 보이자 일본의 통치자들은 이를 압제하였다.

도교의 발전[편집]

道敎-發展

나라(奈良) 시대의 도교는 점을 치고 신에게 기도 드리며 병을 고치기 위한 방기주술(方技呪術)의 형태가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것이 상위층에서만 유행하였으나, 점차 하위층에 전파되고 일본 고유의 신앙과 결합되어 많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치자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尙東征傳)>에 따르면 당시의 당나라 황제는 일본 통치자들이 당나라에서 숭상하는 '도사법(道士法)'을 받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과의 왕래에 제재를 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은 나라 시기의 도교가 미신적 색채가 짙었고, 그것을 수용한 계층이 주로 사회 하위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도교 연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695-775)와 구카이(空海)(774-835)는 도교를 아주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다. 기비노 마키비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상당 수준의 도교 밀법을 배웠으며 귀국할 때에는 중국의 도교 서적들을 많이 들여왔다. 그는 귀국 후 일본에서 가장 도교적인 색채를 띤 '음양도(陰陽道)'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나라 시기의 일본에는 전약료(典藥寮)와 음양료(陰陽寮)라는 두 관청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중국의 음양오행설을 토대로 하는 방술(方術)만을 취급하였다. 전약료는 도교적인 방술을 중심으로 안마와 주문 암송을 주로 하였고, 음양료에서는 천문과 역수(歷數) 및 기상 관찰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을 맡았다. 나라 시기에는 금지되었던 주술은 방식을 달리하여 음양료에서 계속 이어졌고,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양도로 발전하였다.

헤이안시대의 도교[편집]

平安時代-道敎

헤이안 시대는 일본 도교가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 그 원인은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헤이안 시대는 그 전대(前代)에 흡수한 외래 문화를 자국의 문화 속으로 소화시키는 단계에 들어선 시기였다. 게다가 당나라의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도교 경전을 이 시기의 도교 연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우다(宇多) 천황 시기(889-897)에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가 칙령을 받고 편찬한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에는 아주 많은 도교 경전이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도가부(道家部)에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10권, <포박자내편(抱樸子內篇)>21권, <현서통의(玄書通義)> 12권 등이 있고, 오행가부(五行家部)에 <삼갑신부경(三甲神符經)> 1권, <삼오금법(三五禁法)> 10권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그곳에 기록된 도교 경전은 아주 많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도교 수준이 상당했음을 말해 준다.

둘째, 헤이안 시대는 공가(公家) 귀족의 시대였다. 이 시기 귀족 계급은 호화롭고 안일한 생활을 누렸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착취로 모진 고통을 당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도교는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되었고, 귀족들에게는신선 세계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도교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여러 계층에서 환영받고 발전되었다.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도교[편집]

鎌倉·室町時代-道敎가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 시대는 사회의 실권이 무가(武家)에 있었던 무사시대였다. 무사들은 칼을 차고 싸움판에 나가는 사람들로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선의 경지나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고상한 흥취는 먼 나라 이야기와 같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사를 초탈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현실 세계는 허무하며 진정한 존재의 의미는 저 세상에 있다는 불교가 극성하게 되고, 도교는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일본에 전래된 도교는 완전한 체계를 갖춘 종교가 아니라 도교의 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전래된 후 그 문화 모체에서 오는 보충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도교는 자생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유교·도교의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일본 민족신앙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도(神道), 수험도(修驗道), 음양도(陰陽道, 밀교(密敎) 등인데, 이들은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각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교는 자연히 이들 일본 종교 신앙 속에 흡수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에도시대의 도교[편집]

江戶時代-道敎

에도시대는 헤이안 시대를 잇는 일본 도교의 제2차 흥성기이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첫째 중국의 도교 경전이 다시 대량으로 일본으로 들어왔고, 둘째 인쇄술이 발전함에 따라 많은 도경(道經)이 간행되었으며, 셋째 도교가 학문으로서 광범하게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에도 초기는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해당된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추진하던 중국의 인사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자각하고 삼림 속에 은둔하거나 타국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유학자의 한 사람인 주순수(朱舜水)는 이 시기에 일본에 들어와 일본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때 일본으로 간 중국의 승려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불교와 더불어 도교도 전파하였다. 명청 시기 일본에 전파된 도교는 주로 중국에서 성행한 민간 도교였다. 그 가운데 은원선사(隱元禪師)가 영응(永應) 3년(1654)에 일본으로 가져간 <선서(善書)>는 일본 민간 도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명화(明和) 7년(1770)에는 <정통도장(正統道藏)>도 일본에 전해졌다.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에도 시대에 많은 도경(道經)과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태상감응편화해(太上感應篇和解)>

등이 있는데, 이 외에도 많은 도교 경전들이 출간되거나 번역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가 도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전례없이 도교의 연구열이 강했던 이 시기에는 도교 서적들이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는데, 그 가운대 진정으로 도교를 숭상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상의 것을 총괄하면 일본은 도교를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의 민간 도교를 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교를 다시 자국의 고유신 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신앙 체계 속에 흡수하여 일본인의 심층의식과 사회 습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