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일본의 사상/불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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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의 전래[편집]

佛敎思想-傳來 <일본서기>를 보면 긴메이 천황은 백제왕이 보내 온 불상을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하들은 불교에 대해 찬성하는 이도,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천황은 시험삼아 불상을 안치하고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는데, 한번은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이 있었다. 불교를 반대하는 신하들은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신(神)이 노한 까닭이라 하여 불상을 땅에 묻어 버렸다. 사실 일본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였다. 즉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쪽과 받아들이지 말자는 쪽의 권력 문제가 이 틈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비타츠(敏達) 천황이 즉위한 때에는 불교가 백제나 고구려에서 계속 유입되었다. 요메이(用明) 천황은 즉위하자 불교에 귀의하기를 결심하고 아나호베(穴穗部) 황자를 추대하여 황위를 계승하게 하려 하였다. 소가노 마코(蘇我馬子)는 이 소식을 듣고 비타츠 천황의 황후(이후의 스이코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 백제의 사원 건축가나 화공들이 승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 왔다. 소가노 마코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에 관심을 드러냈고, 출가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그는 또 사탑과 불상을 세웠고 법흥사를 건축하였다. 스이코(推古) 천황(593-628년 재위)은 바로 이 시기에 즉위하였다. 그는 쇼토쿠 황자를 태자로 봉하여 정권을 맡기고, 소가노 마코를 여전히 요직에 등용하였다. 스이코 시대에 와서는 일본으로 온 고승들이 더 많아졌다. 스이코 원년(593)에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일본에 왔고, 스이코 3년(595)에는 백제승 혜총(慧總)이 일본에 왔다. 또한 혜자는 쇼토쿠 태자에게 불교 교의를 가르쳤다. 스이코 10년(602)에는 백제 관륵(觀勒)이 역서와 천문·지리 등의 책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밖에 많은 한국의 승려들이 일본에 들어와 예술은 물론 종이나 먹의 제조법까지 전하였다. 사탑의 건설도 스이코 초기에 시작하여, 스이코 말년에는 이미 46개소의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승려도 1,300여 명에 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불교가 얼마나 흥성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록 천황의 교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쇼토쿠 태자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법화경>과 <승만경>을 여러 번 강의하였으며 도처에 사탑을 세우고 불교의 구제사업에 힘써 30년간 흥불의 지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은 곧 불교 융성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쇼토쿠 태자가 죽은 지 20년 후인 645, 일본에서는 '대화(大化)개혁'이 일어났다. 황실은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과 연계 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정치·경제·문화의 전면적 개혁 운동을 진행하였다. 대화 원년에는 불교 융성의 조서가 반포되었다. 텐무(天武) 천황은 칙령을 내려 집집마다 반드시 불단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서 집집마다 공양하는 '내불(內佛)'의 시작이었다. 이로부터는 불교는 점차 각지로 골고루 퍼져 7세기 말에 이르러 전국의 사원이 545개소에 달하였다.

남도육종[편집]

南都六宗 겐메이(元明) 천황이 헤이조코(平城京, 지금의 나라)로 천거한 직후부터 도성을 헤이안코(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옮겨 갈 때까지의 80여 년간(710-794)을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 중에서 쇼무(聖武) 천황의 시대(729-749)는 나라 불교의 최고 전성기였다. 쇼토쿠 태자 시대부터 지배계급 가운데에는 불교를 국가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율령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더욱 강렬해졌다. 쇼무 천황은 사회 동요가 심각해지자 불교의 힘을 빌려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지방 각지에 절을 세웠다. 쇼무 천황은 칙령을 내려 경전을 베끼게 하고 절마다 땅을 하사하였다. 나라 시대에는 한국 및 중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으로 유학갔던 승려들이 돌아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삼론종·성실종·법상종·구사종·화엄종·율종을 포함한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宗)'이란 불교의 종파나 종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학파와 유사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라의 대사원에는 수많은 '종'이 사실상 함께 존재하고, 한 승려가 여러 종을 겸하여 배우거나 연구할 수도 있었다. 특히 독립된 종을 형성할 능력이 없는 성실종과 구사종은 다른 종과 겸하여 연구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종'은 '우종(寓宗)'이라 불렸다. 일본 스이코 시대에는 불교의 강학이 거의 한국의 승려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후에 견수사·견당사가 나타나고 그들과 함께 유학승들이 활약하면서 중국에서 온 고승도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육종 중에서 가장 일본에 전파된 것은 삼론종이었다. 625년에 고구려 승려 혜관이 원흥사에서 처음으로 삼론종의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혜관을 삼론종의 시조로 삼고 있다. 혜관은 일찍 입당하여 길장으로부터 삼론을 전수받았다. 혜관의 제자는 매우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한 이도 많았다. 복량(福亮)은 본래 중국 오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귀화한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혜관의 문하생이 되었고, 658년에는 <유마경>을 강론하였다. 또 혜관의 제자로 지장(智藏)이 유명하며, 지장에게는 도자(道慈)·지광(智光)·예광(禮光)이라는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일본의 삼론종은 이들로부터 흥성하게 되었다. 성실종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매우 성해하였으나, 일본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텐무 천황 때에 이르러 백제 승려 도장(道藏)이 일본에 와 일본 성실론의 시조가 된 이후부터 성실론은 활기를 띠게 된다. 삼론종이 일본에 전파된 지 30연 년이 지나 사이메이(齊明) 천황 때에(655-660) 일본승 도소(道昭)가 법상종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653년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건너가 현장에게서 법상종을 배웠다. 당나라에 있는 7년 동안 그는 선종에도 접근하였다. 도소는 죽을 때 화장해 달라고 유언하였는데, 이로부터 일본에 화장의 풍습이 뿌리내렸다. 658년에 지통(智通)과 지달(智達) 두 사람이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 건너가 현장과 규기에게서 법상종을 배웠는데 이것이 제2전(傳)이다. 703년에는 지봉(智鳳)과 지웅(智雄) 등의 신라 사람들이 입당하여 법상종 3대조인 지주(智周)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일본으로 왔다. 이것이 제3전(傳)이다. 이상 세 번의 전래 중에서 첫번째와 두 번째의 전래를 '남사전' 혹은 '원흥사전'이라 하고, 세 번째 전래는 '북사전' 혹은 '흥복사전'이라 칭한다. 그런데 남사의 도소·지달 아래에는 행기(行基)보살이 있었고, 북사의 지봉(智鳳) 승정 아래에는 의연(義淵) 승정이 있었다. 행기는 일찍이 의연에게서도 배운 적이 있는데, 나라 시기의 법상종은 의연 이후 교세가 크게 발전되었다. 의연은 지봉을 스승으로 모시고 후에는 절을 개창하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728년에 입적하였는데, 학덕은 당대 최고에 이르렀다. 의연 문하의 제자 가운데서는 겐보(玄昉)의 명망이 가장 높았다. 겐보는 717년에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지주(智周)에게서 법상 교의를 배웠는데, 18년간 당에 머무르다 734년에 귀국하여 흥복사에 머물렀다. 737년 천황은 겐보에게 자색 가사를 하사하였다. 겐보의 제자로는 선주(善珠)가 있었고 행기의 아래에는 승우(勝虞)가 있었는데 각기 남북 양사를 계승하여 전하였다. 도다이사(東大寺)는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었다. 736년에 중국 승려 도선(道璿, 702-760)이 일본으로 왔는데, 그는 율(律)을 강술한 동시에 <화엄경>도 강의하였다. 또 당시 화엄종에 정통한 신라승 심상(審祥, ?-742)이 일본의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고있었다. 때마침 이를 알게 된 일본 승려 양변(良辨)은 화엄종을 융성시킬 목적으로 심상을 청해 <화엄경>의 강술을 청하였다. 이것이 일본 화엄종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화엄종의 시조는 심상이라 할 수 있다. 율종은 일본에 가장 늦게 전파되었다. 754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감진(鑒眞, 687-763)은 일본에 율종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스슌(崇峻) 천황 시대에 이미 일본 최초의 승려들이 백제에 가서 수계를 받았다. 또 736년 일본에 온 도선도 대안사에서 이미 율종을 강론하였다. 일본에 전래된 불교 종파 가운데 나라 시기에 가장 성행한 것은 삼론종과 법상종이었다. 비록 이후에 화엄과 계율 2종이 전파되었지만, 이 두 종파는 유행한 시기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가장 성행한 유파로 볼 수 없다. 나라 시기에는 불교 제도가 점차 완비되어 승관의 설치, 승위의 수여, 승니의 품행과 의식주 등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있었다. 불교는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 인정되어 정치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또 승려는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조정은 승려에 대해 상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일본 불교의 발전[편집]

日本佛敎-發展 일본은 간무(桓武) 천황이 헤이안성으로 천도한 정치적 중심이 북쪽으로 옮겨져 나라(奈良) 불교에 불리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헤이안 정부는 불교 보호 정책을 포기하는 동시에 나라의 사원들이 새 도읍으로 옯겨 오는 것도 금지하였다. 또 천황은 법률을 어기고 민중을 현혹시키는 요승들을 외지로 내쫓으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승려 제도가 엄격히 시행되었으며, 사원도 상당수가 정리된다. 즉 헤이안 초기는 불교를 정리하고 재조직하는 시기였다. 당시는 정교(政敎)가 분리되었으므로 불교는 현세의 복을 기구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마침 밀교가 점차 확장되는 시기였는데, 그 조류는 일본에도 파급되었다. 일본의 입당 구법승들은 거의 밀교를 전수받았다. 헤이안 초기의 불교는 정교의 병립과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며 재앙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밀교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합하였다. 이리하여 최징이 천태법화종과 구가이의 진언밀교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히에이산(比叡山)에서는 최징이 밀교를 전수받은 후 태밀(台密, 天台宗密敎)이 형성되었다. 동밀(東密, 東寺密敎) 계통으로 입당하여 구법한 자로는 상효(常曉)·원행(圓行)·혜운(慧運)·종예(宗睿) 등이 있었다. 이들 네 사람에 다시 전교(傳敎)·홍법(弘法)·자각(慈覺)·지증(智證)을 더하여 '입당(入唐) 팔대가(八大家)'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헤이안 시기의 대표적 종파인 천태와 진언 두 종파의 창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 천태종의 시조인 최징은 특히 간무 천황의 자각은 없었지만, 새로운 국가 불교 수립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최징과 구카이는 히에이와 고노(高野) 같은 산림 사원에서 교학을 하였는데, 최징의 남도(南都)에 대한 논쟁과 최징과 구카이의 절교 및 구카이의 심주심교판(十住心敎判)의 제정 등에서 그들의 명확한 종파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1192-1333)는 헤이안 시대에 이어 불교의 강렬한 영향을 받은 시대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는 새로운 봉건 사회가 시작된 시기였다. 무사·평민 등의 새 계급이 새로운 통치자로 변하였거나 발전·성장하였다. 이러한 계급들은 불교 가운데서 새로운 내용을 찾으려 하였다. 정토종, 선종, 일련종, 진종, 시종 등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새로운 종파였다. 그 가운데 특히 임제(臨濟) 선종은 상류 사회에 광범하게 전파되어 남북조를 지나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이르러 날로 흥성되어, 이 시기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천태종[편집]

天台宗 일본의 천태종은 한국이나 중국의 천태종과는 다르다. 일본의 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다 밀종과 선종 및 보살원계(菩薩圓戒)를 부가하여 형성된 종파이다. 나라 시대의 불교와 달리 헤이안 이후의 종파는 단순한 중국 불교가 아니라, 다원적인 일본 불교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천태종은 여전히 천태종이라 불렸다.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 최징은 12세에 국분사(國分寺)에 들어가행표(行表)를 스승으로 모시고 유식의 교의를 배웠다. 14세에 출가하여 18세에 동대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후에 그는 히에이산에 들어가 12년간 수행하면서 '근본중당(根本中堂)'을 건립하고, 감진(鑒眞)이 일본에 올 때 들여온 천태의 서적들과 <대승기신론>,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등을 학습하였으며 법화강경회(法華講經會) 등을 개최하였다. 804년에 그는 구카이와 함께 입당하였다. 805년 9월에 그는 9개월 동안의 구법(求法) 유학을 마치고 230부 460권의 천태와 밀교 경전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정식으로 일본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818년에 그는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을 써서 조정에 상주(上奏)하고, 히에이산에 대승 교단을 설립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19세 때 도다이사에서 받았던 소승 252계를 폐기한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나라 육종(六宗)과 결별한다는 의미였다. 820년 <현계론(顯戒論)>을 저술하여 천태산 원돈계(圓頓戒)의 종지를 설명하였던 그는 822년 히에이산에서 입적하였다. 후에 '전교대사(傳敎大師)' 란 시호를 받았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대사 시호를 하사한 최초의 사례이다. 일본의 천태종은 중국 지의의 천태법계를 전파하고 '일념삼천(一念三天)'과 '삼제원융(三諦圓融)' 등의 이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 기초 위에서 원교(천태), 선, 원계(대승계)와 밀교 등 4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진언종[편집]

眞言宗 헤이안 초기의 '입당 팔대가' 가운데 밀교를 전수받고 정통 밀결(密訣)을 얻어 귀국한 이는 구카이뿐이다. 구카이는 다른 밀교가와 달리 밀교를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진행하고, 불교와 밀교의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불교의 궁극적 진리가 밀교에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중국 밀교와 진언종의 차이점이 있다. 구카이는 어려서부터 <논어>와 <효경> 등의 한문 서적을 배웠고, 18세에는 유학(儒學)을 깊이 연구하여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후에 불교를 신봉하고 22세(798)에 출가하여 나라의 대안사에서 삼론종을 배웠다. 31세(804)에 최징과 더불어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는 장안(長安)의 여러 불사를 방문하고 혜과(惠果)를 스승으로 모시며 진언밀교를 배웠다. 혜과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밀종의 태장계와 금강계를 전수하였으며, '편조금강(遍照金剛)'이라는 밀호를 수여하였다. 806년에 귀국한 후 그는 일본 진언종을 창립하였다. 구카이는 학식이 넓고 재능이 많은 학자로서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범문(梵文)을 알았던 사람이며 한문시에도 능숙하였다. 그는 한자의 편방(偏旁)을 참조하여 일본 자모인 '가다가나'를 만들었다. 또 일본의 최초 사립학교인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 지금의 綜智大學 전신)'을 세워 불교와 유교를 가르쳤다. 835년에 입적한 후 '홍법(弘法)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가운데 <심부심론>(10권)은 일본 최초의 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 진언종은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종교의 실천적인 면에서 진언종은 밀교의 방법을 더욱 중시한다. 진언종은 또 '국가의 안정을 수호'하며 '재앙을 없애고 복을 쌓는 것'을 경서를 읽고 불사에 종사하는 목적으로 간주하였다. 구카이의 제자는 수십 명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10대 제자가 유명하다.

정토종[편집]

淨土宗 구카이가 진언종을 세운 후 일본에서 계통적으로 '교상판석'을 진행하며 따로 독립적인 종파를 처음으로 창립한 사람은 정토종(淨土宗)의 창립자 법연(法然, 1133-1212)이다. 그는 13세에 히에이산에 올라가 천태교의를 배우고 원돈계를 수계하였다. 그는 난해한 학문의 연구와 수련없이 단지 아미타불의 교의를 믿고 염불(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사후 극락 정토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교의는 관리나 무사, 평민 등 각 계층에서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특히 수련과 학문 연구에 종사할 수 없는 무사와 평민들의 환영을 받아 하나의 새로운 종파를 형성하였다. 법연은 원신의 <왕생요집(往生要集)>과 선조의 <관무량수경소(觀無良壽經疏)>에 의거하여 부처의 본의를 깨닫고 염불에 귀의하였다. 선도파의 정토종은 '삼경일론(三經日論)' 즉 <대무량수경(大無良壽經)>·<관무량수경>·<아미타경(阿彌陀經)>과 세친(世親)의 <왕생정토론(往生淨土論)>을 근거로 교지를 건립하였다. '삼경일론'에서 밝힌 법문은 모두 정토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정토종이라고 불렀다. 기타의 경론들이 밝힌 법문은 왕생정토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출토입성(出土入聖)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성도문(聖道門)'이라고 불렀다. 이 성도문은 오로지 자력수행에 의거하여 수행하기가 어려웠지만, 정토문종은 수행이 비교적 쉬웠다. 이 때문에 정토종은 사람들에게 행하기 어려운 성도문을 버리고, 행하기 쉽고 홀연히 성불할 수 있는 정토문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법연의 주요한 저작으로는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3권)이 있고 유문집으로는 <서방지남초(西方指南抄)>(3권) 등이 있다.

정토진종[편집]

淨土眞宗 12세기 이후 일본에는 사상과 신앙을 중시하고 교의와 의식이 비교적 간단한 새로운 종파가 연이어 흥기하였다. 그 가운데서 정토진종(淨土眞宗)은 일본적인 색채가 더욱 두드러진다. 정토진종은 또 '일향종(一向宗)'이라고도 부르는데, '진종'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정토진종은 정토교의 계통에 속한다.

조동종[편집]

曹洞宗 조동종의 종조(宗祖)인 도겐(道元)은 1227년 송나라에 들어가 장옹여정(長翁如淨)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계승하였다. 그는 1229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그는 '묵조선(墨照禪)'을 수양하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제창하였다. 따라서 도겐의 조동종에도 주관적 관념론의 철학사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는 "심이란 일체의 법이요, 일체법이란 다만 일심(一心)인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은 모두 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그의 사상은 임제선의 철학사상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동종의 신도는 대부분이 하위층 농민들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조동의 농민, 임제의 장군'이란 말이 전해졌다. 선종은 일본에 전파되자 조정과 막부 장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크게 흥성하였다. 선승들은 송나라를 자주 왕래하여 송대의 문화를 대량으로 받아들였으며, 일본 불교사상에서 큰 영향을 끼친 '오산문학(五山文學)'을 형성하였다.

일련종[편집]

日蓮宗 일련종은(日蓮宗)은 법화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역시 독특한 일본 종파이다. 13세기에 니치렌 日蓮(1222-1282)이 창립하였으므로 일련종이라 불렀다. 니치렌은 빈곤한 어민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스스로도 '천민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였다. 16세에 출가하여 진언종을 배우다가 21세부터 천태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세상이 이미 '말법(末法)' 시대에 이르렀는데, 오직 <법화경>과 그 원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다섯 글자만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53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기요스미산(淸澄山)에 올라 막 솟아오른 태양을 향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열 번 큰 소리로 외쳤는데 이것이 일련종의 시작이라고 한다. 니치렌은 그 후 가마쿠라에 가서 여러 종파들을 굴복시킬 목적으로 '창제성불성(唱題成佛說)'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또 당시의 통치장인 호조(北條)에게 소를 올려 정토종·선종·율종을 금할 것을 요구하고, 전염병·지진·재앙이 있는 까닭은 <법화경>을 믿지 않아 천신이 노하여 징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사교(邪敎)를 금하지 않으면 재난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환란이 닥쳐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의 화를 샀으며, 막부는 그를 유배하였다. 2년 후 사면된 그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토착 세력의 음해를 받아 제자는 죽고 자신은 크게 다쳤다. 그러나 거듭되는 재난과 좌절에도 실망하지 않고 신념을 더욱 굳게 다졌다. 1286년 몽고가 일본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막부를 찾아가 이전의 말은 거짓이 아니므로 <법화경>을 믿지 않고 사교를 금지하지 않으면 재난이 멈추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막부를 향해 만약 <법화경>의 공덕에 의거하지 않으면 국가를 보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결국 그는 또 한 번 막부의 질책과 각 사원 장로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며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되었을 때 그는 <개목초(開目抄)> 등의 중요한 책을 저술하였으며, 석방된 후 계속 전도와 저술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일련종의 교의는 '삼대 비법(三大 秘法)'으로 이루어졌다. 삼대 비법은 계戒(戒壇)·정定(本尊)·혜慧(題目)로 구분된다. 이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하고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염불을 입으로 부르면 사견(邪見)이 있는 악인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속에 있는 부처의 생명을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의 이러한 설교는 종래의 법화 신앙과 심원한 철리를 천명하는 천태종 등에 비교하면 입으로부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타화행'이라는 실천을 하는 하는 것에 큰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