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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일본의 사상/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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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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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은 종교 신앙과 철학 세계관의 측면에서 비록 불교가 오랫동안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정치사상과 교육 사상의 범위 안에서는 도리어 유학이 주도적이었다. 더욱이 교육에서는 기본적으로 유학의 사상에 따랐다. 학교에는 명경과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한 예이다. 유학 교육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일본 통치계급은 학교 교육의 일을 맡는 것이 도의상 누구나 마다할 수 없는 신성한 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간무(桓武) 천황은 '조서'를 내려 대학생의 인원을 늘리고 대학료의 토지를 20정보에서 120정보로 증가하는 등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대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학술의 번영을 촉진하였다.

유학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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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傳來

유학은 일본에 한문자와 함께 전래되었다. 대략 서기 284년 백제의 사신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갔으며, 그 다음 해에 그의 추천을 받은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 이 일본에서 가서 경전을 가르쳤다. 이것이 일본에 유학이 전래된 시작이었다. 아직기는 일본에서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후부터 유학을 배우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게 되어 일본은 문자가 없던 시대를 벗어났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왕인이 한자와 유학을 오로지 황태자나 궁궐의 상위층 귀족 자제들에게만 전수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학의 보급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선 뒤 게이타이(繼體) 천황 7년(513년)에 백제 박사 은양이(殷楊爾)가, 또 긴메이(欽明) 천황 15년(554년)에 고구려 오경 박사 고안무(高安茂)와 왕유귀(王柳貴), 역학(易學) 박사 왕도량(王道良) 등이 일본에 간 후에 유학은 비로소 광범하게 전파되었다. 유학의 고전(古典)은 일본 사람들이 한문자를 배우는 교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일본에 전파될 때 그리 큰 배척을 받지 않았다. 당시 유학은 백제인 아직기와 왕인 등의 전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임시 거주한 중국인을 통해서도 직접 전하여졌다.

중국인 가운데는 사나운 파도를 뚫고 직접 일본으로 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해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먼저 한반도에 머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 중국이민은 문화 전파의 매개자가 되어 중국의 선진 생산기술과 정신문화를 일본에 전하였다. 특히 5세기 경에 일본으로 간 중국인들은 문화와 더불어 유학 경전도 가지고 갔다.

그 후 스이코(推古) 천황(562-628) 시기에 이르러 유학은 일본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해졌다. 당시 대귀족 소가노 마코(蘇我馬子)와 황족 쇼토쿠(聖德)가 연합하여, 세도를 부리던 모노노베 노모리야(物部守屋) 세력을 뒤엎고 사전에 정한 약속에 따라 소가노 씨족 가운데 황녀를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스이코 천황이다. 스이코 천황은 쇼토쿠를 태자로 봉하고 대권을 위임하였다.

따라서 스이코 천황시기는 사실상 쇼토쿠 태자의 집정 시기였다. 쇼토쿠 태자는 계급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씨족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통치를 건립하는 등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일본의 통치자에게는 당시 번영하던 중국의 수당(隨唐) 봉건국가가 자연스럽게 사회개혁과 문화 선택의 본보기가 되었다. 일본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전장(典章) 제도와 각종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절실하였다. 이 때문에 한세기 동안이나 중단되었던 중·일 국교를 즉시 회복시켰으며, 스이코 천황 15년(617년)에는 오노 이모코(小野妹子)를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오노 이모코가 두 번째로 중국에 갈 때 그는 승려(일본에서는 학문승이라 칭함)와 유학생을 데리고 갔다. 이것을 계기로 여러 차례 사신과 학문승, 학생을 수나라에 파견하여 유학 공부를 하게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고전과 중국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연구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중국에 오래 머무르면서 수당의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이해하였다. 그들은 귀국할 때 대량의 유학 서적과 중국 문물을 일본으로 가져가 유학의 전파와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과정이다. 후일 그들은 대화(大和) 혁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유학사상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선진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 스이코 천황 8년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가서 오경과 채색 종이, 먹의 제조 방법을 전수하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알게 되었다. 이 외에 일본은 당나라의 선진 생산기술과 문물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를 위하여 일본 사신들은 중국과 일본을 빈번히 왕래하였다. 조메이 천황 7년 일본은 제1차 견당사(遣唐使)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고표인(高表仁)으로 하여금 그들을 특별히 맞이하게 하였다. 당시는 당 태종 정관(貞觀) 4년으로 당나라의 흥성기였다. 일본의 사신들은 당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은 해 6월 고표인 일행이 일본의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 가서 약 반 년 남짓 체류하다가 정관 5년 정월에 귀국하였다. 그들은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에 유학사상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문물제도도 전수하였다. 또 스이코 천황 16년에 미나부치도 쇼안(南淵淸安)은 그의 학생과 당나라에 33년을 머물렀으며, 함께 유학을 갔던 다른 학문승은 32년이나 머물렀다.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상호 교류는 문화 수입으로 이어졌다.

유학의 전래는 일본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7세기에 이르로 씨족제의 잔여를 지니고 있던 일본 노예사회는 이미 여러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었다. 645년 6월 일본에서는 신흥 봉건세력의 대표였던 나카노 오에(中大兄) 황자(皇子)가 제사관 등과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고토쿠(孝德) 천황(645-654)을 옹립하고 자신은 태자의 신분으로 섭정을 실시하였으며, 연호를 대화(大化)로 정하고 수도를 나니와(難波)로 옮겼다. 이듬해 정월 고토쿠 천황은 '개혁' 조서를 반포하고 수당의 경제·정치 제도를 본따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대화 개혁'이라 한다. 대화 개혁의 목적은 봉건제를 전국적인 범위로 확립하며, 황실을 귀족 국가의 권력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하에서 유학은 사회 변혁을 위하여 정치이념을 제공하였으며 아울러 그 영향도 확대되었다.

대화 개혁 후부터 일본은 비교적 완비된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중앙에는 대학료(大學寮)를, 지방에는 국학(國學)을 설치하였다. 이 학교들은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구이자 일본 유학의 전파 체계였는데, 교재는 바로 유학 고전이었다. 대학료는 텐지(天智) 천황(662-671) 시기에 세워졌고, 백제 사람 귀실집사(鬼室集斯)가 대학료의 초대 대학두(大學頭, 대학료의 장관)에 임명되었다.

대학료와 국학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일본 유학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세기 초 일본 정부는 '대보율령(大寶律令)'과 '양로율령(養老律令)' 등을 제정하여 법률제도로서 새로운 봉건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를 확인하였다. 대화 개혁은 일본 봉건사회의 첫 시작이었다.

유학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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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影響

일본은 5세기-6세기에 이르도록 여전히 부민제를 특징으로 하는 노예제 사회였다. 게다가 황실 및 상위층 귀족이 유학을 오래도록 독점하여 유학은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5세기-6세기 이전 일본에서 유학은 그리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7세기로 접어들면서 유학은 점차 확산되었고, 이것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한창 발생하고 있던 사회 변혁과 연관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유학은 그 전에 벌써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사회의 변혁 이론 기초로 충당되어 대화 개혁을 이끌었다.

동시에 사회 변혁의 이론적 필요성 또한 유학의 영향을 확대하여 유학의 확산을 촉진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6세기 후반 일본의 부민 노예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 위기는 귀족들이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토지를 겸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백성을 잔혹하게 착취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귀족들은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키며 민중의 반항을 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 기구를 원했고, 씨족제 잔여를 철저히 없애 통일된 정권을 세우기 바랐다. 이와 동시에 유가(儒家)와 수당 문물제도의 전래, 수당 통일제국의 건립과 신라 통일 왕국의 실현 등이 일본의 통일 욕구를 한층 자극하였다. 나카노 오에 황자를 수반으로 하는 황실 옹호 세력은 끝내 전제통치를 뒤엎고 통일정권을 세웠으며, '대화 개혁'을 이루어내어 일본 사회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대화(大和) 개혁 이전에 일본에는 학교가 없었다. 대화 개혁 뒤 유학의 영향 아래 텐지 천황은 쇼토쿠 태자의 유지를 이어받아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대학료'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일본 학교의 기원이다. 그 뒤로 '대보율령'에 따라 수도에는 '대학료'를 세우고 지방에는 '국학'을 설치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이 대학료에서 직접 지도하였으며, 학생들도 400여 명이나 되었다. 유학의 고전은 학교의 필수 과목이 되었고, 그것을 관리 선발의 근거로 삼았다. 지방의 국학은 주로 군사(郡司)의 자체를 가르쳤으며 교과서는 권 수에 따라 대경(大經), <禮記>·<呂氏春秋>가 포함), 중경(中經, <毛詩>·<周禮>·<儀禮>가 포함), 소경(小經, <周易>·<尙書>가 포함) 세 종류로 나뉘었다. 또 정과(正科)를 필수 과목으로 정하였으며 정과 외에 읽어야 할 책도 정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문선(文選)>, <이아(爾雅>와 삼사(三史)였다. 이때 일본에서 관리가 되려면 두 가지 이상의 경(經)에 통달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명경도(明經道)' 1과(科)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는데, 이른바 '명경도'란 유학 고전의 해석과 주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곳이다. 명경도 외에서 해석된 유학 고전은 모두 정통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사회에서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의 학교에서 유학 고전을 어느 정도 중시하였는지 설명해 준다.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 12년에 유학의 사상에 따라 '17조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17조 헌법은 실제로는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약이었다. 그것은 한문으로 씌어졌는데, 그 내용을 보면제2조 '독경삼보(篤敬三寶)'와 제10조 '절념기진(節念棄嗔)'이불교사상에 속하는 것이고, 나머지 각 조항은 모두 유학사상을 좇아 제정된 것이었다. 예컨대 제1조에 있는 '이화위귀(以和爲貴)', '상화하목(上和下睦)'은 바로 <예기> <유행(儒行)>과 <논어>의 "예를 적용할 때는 조화를 중시한다"(禮智用, 和)爲貴)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외에도 17조 헌법의 각 조항과 다른 법률들도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었다.

일본 최초의 역사 문헌으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이 있는데 <고사기>는 712년 겐메이(元明) 천황 통치 시기에 오노 야스마로(安萬侶)가 편찬하였다. 그는 통치계급의 의도에 따라 고대에 유행하던 이야기를 추려 엮었는데, 그 속에는 고대 신화·영웅 전설 ·민간 설화·가요 등이 들어 있으며, 제왕(帝王)의 족보와 유사하다. 그는 여러 신화 전설을 이용하여 천황 통치를 신성화하였다. 이것이 바로 후일 일본의 신도교(神道敎)가 성립될 수 있었던 기본 토대였다. 이른바 '만세일계(萬世日系)'라 이르던 일본 천황의 계보 역시 이 사상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생활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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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活-影響

대화 개혁 전후 일본에는 일찍 유학의 사회화 추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와 신도(神道)의 배척을 받아 오래지 않아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헤이안(平安)시대(794-1185)로부터 대량의 장원(莊園)을 소유한 후지와라(藤原)가 정권을 장악하자, 귀족의 사유 토지는 급속히 증가되어 봉건 착취제도가 형성되었다. 봉건 통치계급은 자체의 착취 제도와 통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유학의 전파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유학은 종전에 비해 더욱 폭넓게 전파되었다. 유학은 일본의 사회 각 분야에 응용되었으며 천황의 '조서'에도 반영되었다. 이것은 일본 통치계급이 유학을 사회 정치사상 영역에 응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사상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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倫理思想-影響

일본의 충효사상이 비록 일본 민족의 고유 전통 관념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학의 충효사상이 여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유학의 충효사상은 일본의 충효사상에 새로운 내용을 더해 주었다. 유학을 받아들인 후 일본은 충효사상을 윤리 도덕의 핵심으로 삼았다. 아울러 천황에 대한 충성을 도덕의 최고 체현으로 간주하면서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특히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