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중국근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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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의 사상[편집]

中國近代-思想

중국이 근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게 된 것은 물론 그들로 하여금 이미 전통적 사상에 안주(安住)할 수 없게 될 만큼 그들의 국가와 사회가 <서양의 충격>에 격심하게 동요되었기 때문이었다. 곧 열강(列强)의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의한 반식민지화라는 처지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서양 열강이 근대에 와서 이러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은 첫째 그들의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한 싸고 좋은 상품을, 아직도 수공업자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후진지역에 마구 투입하여 막대한 이윤을 얻음으로써 그들의 근대적 부르주아지가 형성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의회(議會)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내셔널리즘을 발전시켜 국민의 총력을 결집하였던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풍족한 국가재정과 과학기술의 뒷받침으로 군함, 총포 등의 강력한 무기를 가진 육해군을 조직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

이러한 무서운 지배력으로부터 중국인이 독립을 회복하려면 자신의 전통적인 체제를 수정하여 근대화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아편전쟁, 애로우 사건, 의화단(義和團) 사건등 일련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로 이미 명백하게 경험한 바였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고 전통 사상의 뿌리가 깊은 중국인의 경우 그 근대화의 과정은 또한 격렬한 진통을 면하지 못했다.

아편전쟁 후 그 제1파로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 있어서 그 지도자의 사상은 배만흥한(排滿興漢)에 의한 민족주의 배상제교(排上帝敎)에 따른 유교적 권위의 무시, 균산주의(均産主義) 등으로 보아서 근대적 의식이 이미 현저하게 나타나 있으나 아직도 서양세력에 대한 경각심의 부족과 민권사상의 결여 등이 지적된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주동이 된 이홍장(李鴻章), 증국번(曾國藩), 좌종당(左宗棠) 등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는 것도 서양의 과학기술등 물질문명의 우세를 인정하고, 그들의 무기·탄약·선박의 제조, 통신·교통·방직 등의 시설 도입으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강구하자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정치사회체제나 도덕교화(敎化) 등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양무운동이 청일(淸日)·청불(淸佛)전쟁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을 중심으로 변법운동(變法運動)이 일어났다. 그것은 양무운동자가 서양문명 중에서 과학, 기술, 기계 등 물질운명만을 분리하여 수입하려는 태도의 비판에서 나온 것이며 청일·청불전쟁에서 청국이 패배한 것은 서양처럼 상의하달(上意下達), 하정상통(下情上通) 할 수 있는 정치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서양의 물질문명뿐 아니라 우수한 정치제도까지도 배워서 중국 재래의 제도를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양무운동에 비해 근대화에의 일보 전진한 것이며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모범으로 삼으려는 서양 정치제도는 현재의 중국에서 결여되어 있지마는 원래는 황제 요순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 점, 주로 외세에 저항하여 중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유하려고 목적하기 때문에 부국강병이 우선이고 민생, 민권의 문제의식은 별로 표출(表出)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부로부터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상부로부터의 운동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운동은 서태후(西太后)등 보수파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백일(百日)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그러한 보수파의 완고(頑固)도 의화단사건의 교훈으로 결국은 변법적인 신정(新政)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20세기 초엽에 중국인의 일본 유학생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서양사상의 활발한 흡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은 일본에 망명한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신민총보(新民叢報)>와 쑨원(孫文)등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 <민보(民報)>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다. 전자에 있어 량치차오는 무술변법이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 중국의 위기는 단순한 제도적인 결함이나 군사력의 열등(劣等)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로 국민의 정신상태 즉 공덕(公德)의 결함, 지혜의 부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중국인은 아직도 사회발전의 원시적 단계인 부민(部民=Tribe)의 상태에 있으며 자치능력과 국가사상(國家思想)을 가진 국민이라고 이름지을 수가 없다. 중국인이 항상 전제정치에 노예적으로 굴복하는 노성(奴性)도 그 부민(部民) 특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민적 존재를 국민적 존재로 변화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공덕(公德)에 의하여 결합되고 독립 자존(自尊)하는 기풍을 양성토록 민중의 유신(維新), 즉 '신민(新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당면한 장애물인 청왕조 체제를 타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는 다시 그의 청조타도론(論)을 철회하였다. 새로운 정신을 가진 국민이 창조되기도 전에 성급히 청왕조 체제를 타도하면 유기적인 통일과 유력한 질서가 파괴되어 각국의 제국주의 앞에 도리어 분열되어 망국에 이를 것이므로 현존 체제를 온존(溫存)한 채 점진적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민보파(民報派)의 주장은 내부에 대채로운 이견(異見)이 있으면서도 우선 청왕조타도 즉 혁명을 주장하는 데는 일치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왕징웨이(王精衛)의 의견을 보면 민족주의는 종족적(種族的)인 관념에서 발생하고, 국민주의는 정치상 관념에서 발생하는데 전체정치(專制政治)를 타도하는 것은 국민주의의 목적이고, 이족(異族)을 구축(驅逐)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현 이민족 전제정치자인 청왕조를 타도하면 이 두 가지 주의의 목적은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혁명내용이 구분되고 청왕조를 초점으로 한 그 역사적인 결합이 시도됨으로써 이 양(兩) 주의가 새로운 국민국가 형성의 내재적(內在的) 계기로서 파악되었던 것이다. 1911년의 신해혁명은 일단 점진적인 개량주의자들의 주장이 패퇴된 듯 보였으나 혁명파의 예견이 그대로 실현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파의 예견이 그대로 실현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보편적 심리의 통일 위에 이루어진 국민국가 대신에 지방 독립과 군벌(軍閥)의 할거(割據)라는 분열상태였던 것이며, 또다시 제2, 제3의 혁명을 예고하는 험난한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국 속에서 1919년 5·4국민운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중일군사협정, 21개조 조약 등의 강요를 도화선으로 학생운동에 선도(先導)되어 일어난 것이었으나 후일에 후스(胡適), 리다자오(李大釗),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천두슈(陳獨秀) 등 다양한 사상가들과 노동자 등도 참가하고 윤리혁명(倫理革命), 문학혁명(文學革命)을 수반하는 광범위한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의 국민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민운동 내지 국민혁명운동의 지도이념으로서 제창된 기본적인 이론은 쑨원(孫文)에 의한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이다. 그것은 신해혁명이라는 제1단계와 북벌(北伐) 대혁명이라는 제2단계혁명의 지도에 있어서 역사적 임무를 다하였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른바 신민주주의혁명이라는 것에도 지도정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민족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기축(基軸)이 되었으며 그 발전이 다른 2주(민권, 민생)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또 각 혁명단계에서 대처해야 할 상황이 다름에 따라 그 사상 내용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연소(聯蘇)·용공(容共)·노농원조(勞農援助)의 3대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고 불러서 삼민주의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공산정권의 입장에 서는 것이며, 1911년 이전의 쑨원(孫文)의 민족주의적 노선을 강조한 것은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경우라 하겠다.

<鄭 在 覺>

태평천국의 혁명운동[편집]

太平天國-革命運動

아편전쟁(阿片戰爭)은 중국을 서구 자본주의의 상품시장(商品市場)으로 개방시킴으로써 중국의 민족적 위기를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충격은 중국 봉건사회 내부의 위기, 특히 화중(華中)·화남(華南) 일대에 광범하게 전개하고 있던 항조항량투쟁(抗租抗糧鬪爭:소작인의 지주에 대한의 국가에 대한 소작료 거부 투쟁과 자작농의 국가에 대한 납세 거부투쟁)과 결부하여 태평천국의 혁명운동을 발발시킴으로써 청조(淸朝)의 전제 지배체제를 근본으로부터 요동(搖動)시키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혁명운동은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의 하층 독서인(讀書人)이었던 홍수전(洪秀全)이 조직한 상제회(上帝會)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당시 화중·화남 일대에 만연되었던 비밀결사와 빈농·수공업노동자를 결집하여 수행된 급격하고도 대규모적인 반청투쟁(反淸鬪爭)이었다. 1851년초에 광서성(廣西省)의 금전촌(金田村)에서 깃발을 올린 후 겨우 2년 사이에 무한(武漢)을 비롯하여 양쯔강(揚子江) 유역을 석권하고, 드디어 남경(南京)을 점령하여 화중·화남에 펼쳐지는 청조의 일대적국(一大敵國)을 형성하였다. 태평천국의 이와 같은 급격한 확대·발전은 물론 지주(地主)와 국가권력에 대한 광범한 농민투쟁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그런 의미로 이것을 반봉건적(半封建的) 민족해방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서구 자본주의가 중국 봉건사회에 준 중대한 경제적·사상적 영향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에 반영된 그리스도교적 평등사상은 청조 지배계급을 요마(妖魔)에 비교하고, 이것을 타도함으로써 착취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서(舊約聖書)>의 금욕적 율법을 농민의 도덕적 규범으로 설정하여, 이것을 통하여 지배계급의 부패나 착취의 부당성을 지적해 나갔다. 동시에 이 그리스도교적 평등사상은 비밀결사적인 동포의식(同胞意識) 및 유교적 대동사상(大同思想)과도 밀접하게 결합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평천국의 사상은 순수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아니고, 중국 사회의 전통적 요소와 밀착하여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인 자유·평등사상을 농민적 입장에서 받아 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강력한 단결력을 탄생시킨 것이며, 거기에서 종래의 비밀결사나 농민투쟁에 볼 수 없었던 엄격한 윤리와 그에 따른 통일이 상제회를 통해서 시현(示現)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홍수전[편집]

洪秀全 (1814∼1864)

중국의 청대(淸代) 후기의 태평천국의 최고 지도자.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사람. 유명(幼名)은 화수(火秀)였는데 자라면서 인곤(仁坤)이라고 이름하고 후에 수전(秀全)이라고 개명하였다. 태평천국 건국 후에는 천왕(天王)이라고 불렀다. 생가(生家)는 중농(中農)이며, 선조는 타처에서 이주해온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배웠고, 18세에 마을 사숙의 교사가 되었다. 청년시대에 재삼 수재시험(秀才試驗)에 응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사이에 광저우(廣州)에서 손에 넣은 그리스도교의 입문서 <권세양언(勸世良言)>과 병상에서 본 환상에 이끌려, 자신을 상제(上帝) 즉 천부(天父) 여호와의 제2자(第二子), 천형(天兄)인 예수의 동생으로 여겨, 천부(天父)로부터 요마퇴치(妖魔退治)의 명을 받았다고 하는 신념을 안고 있었다. 그는 이 신념에 입각하여 상제회(上帝會)를 조직하였고, 또 <원도구세가> <원도각세훈> 등을 써서 그리스도교적 평등이나 구제(救濟)를 설파하면서, 유이민(流移民)과 빈한한 수공업자(手工業者) 및 농민들을 차례로 조직했고 그것을 확대해갔다. 그러나 상제회는 토착지주(土着地主) 및 지방관헌과의 대립을 초래했고 그것이 격화되자, 자위(自衛)를 위하여 드디어 1851년 1월 금전촌(金田村=廣西省 柱平縣)에서 무장봉기(武裝蜂起)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태평천국의 국호(國號)를 내걸고 홍수전을 천왕(天王)이라고 호칭하였다. 그후 홍수전은 영안(永安)에서 양수청(楊秀淸) 등을 제왕(諸王)으로 봉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연력(年曆)을 정했다. 다시 북진하여 무한(武漢)을 점령하는 한편, 남경(南京)을 공격하여 1853년 3월에 점령한 다음 이 남경을 도읍으로 삼고 천경(天京)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경을 도읍으로 삼은 뒤부터 궁중에 깊숙이 처박혀서 후궁의 일락(逸樂)과 열광적인 신앙에 빠져 정치·군사(軍事)를 돌보지 않았다. 이 사이에 제왕(諸王)들 사이의 내홍(內訌)이 커갔고, 그와 함께 태평천국의 시책은 점차로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을 기화로 증국번(曾國藩) 등에 의한 청조측(淸朝側)의 반격이 자본주의 열강의 지지하에서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64년 봄에는 천경(天京)은 완전히 포위되어 그는 함락전인 6월초에 음독자살하였다.

원도성세훈[편집]

原道醒世訓

중국 청대(淸代) 후기의 태평천국의 최고지도자였던 홍수전(洪秀全)이 저작한 상제신앙(上帝信仰)의 포교문서(布敎文書) 이 문서는 그가 우인(友人)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광시성(廣西省) 귀현(貴縣)에서 상제 신앙의 포교에 종사한 후,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의 향리로서 귀환한 그 다음해, 즉 1845년에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해에 제작된 <원도구세가> 및 이듬해 제작된 <원도각세훈>과 함께 1852년 태평천국의 <태평조서(太平詔書)>로 집성, 간행되었다. 이 문서 속에서 그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이 상제를 아버지로 하는 형제자매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한 개의 가족공동체(家族共同體)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재화(財貨)는 개인의 사유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 소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장년(長年)과 강자(强者)는 노유와 약자(弱者)를 부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을 게시하고, 그 이상은 약탈하고 서로 죽이는 세상을 변혁하여 공평정직(公平正直)한 세상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에 입각한 원시공산제적(原始共産制的)인 사고방식이며 동시에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논술된 대동(大同)의 세계를 의미하거니와, 이 사상은 후에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에서 완결되었다. 어쨌든 이 문서는 태평천국의 초기 혁명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양무운동 사상[편집]

洋務運動思想

태평천국 혁명의 진압에 성공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은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청조(淸朝) 전제지배체제 재건을 도모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 병기·기술의 도입을 강조하여 소위 양무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양무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양무론은 이홍장(李鴻章)의 막료인 빙계분(馮桂芬)·설복성(薛福成)·마건충(馬建忠) 등에 의해 제창된 것으로서 마침내 사상계에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양무론은 자본주의의 침략에 의한 중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서양의 기계 기구와 기술을 채용하여 중국의 부강을 달성하려고 하는 일종의 자강론(自强論)이다. 그것은 군비(軍備)의 충실에 역점을 두어서 내정개혁(內政改革)을 중시하는 변법론(變法論)과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서양의 기계·기구·기술의 채용은 전통적인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양자의 조정을 도모하려는 뜻에서 양무론자는 자강(自强)을 달성하기 위하여 중국의 정교(政敎)를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기계·기구와 기술을 사용하여 보강한다고 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론을 주장했다. 다시 서양의 기계·기구·기술의 원리·기원은 중국 고대의 제학설에서 억지로 끌어다 맞추는 방법으로 그 도입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부회(附會)설도 주장했다. 양무론은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의 확대에 따른 중국의 위기의식과 맞물려 그 내용을 발전시켰다. 더욱이 1884년∼1885년의 청불(淸佛)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서양의 부강의 근저에 군비(軍備) 이상의 것, 즉 정치체제에 요인이 있다고 하는 반성에 따라 양무운동은 점차로 정치개혁에 요구로 변질되어 갔다. 양무론자로서는 상기한 사람 이외에 왕도(王韜)·곽숭도(郭嵩燾) 등이 있다. 전자는 홍콩의 지식인이라는 처지에서 변법론적(變法論的) 경향을 갖는 양무론을 주장하였고, 후자는 초대 주영공사(駐英公使)의 체험에서 서양의 부강의 배후에 있는 정교(政敎)에 주목하였다.

장즈둥[편집]

張之洞 (1837∼1909)

중국 청말(淸末)의 관료정치가. 즈리성(直隷省) 난피시엔(南皮縣) 사람. 자는 효달(孝達). 호는 향도(香濤). 거인(擧人)·진사(進士)를 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학문·교육 관계의 요직들을 십수년간 근무한 후에 산서순무(山西巡撫)에 발탁되었다. 그 후 양광(兩廣:湖南·湖北), 양강(兩江:江蘇·安徽·江西) 각 총독을 역임하면서 청말 관계(官界)의 중진으로서 국정을 좌우할 정도로 세력을 쌓았다.

그의 관계 등장은 마침 양무운동의 시기에 해당되어 그 후기 광저우(廣州)·한양(漢陽)·우창(武昌)에서 군사공업을 비롯한 국영 근대기업을 속속 창설하여 최대의 양무추진자(洋務推進者)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양무운동은 그의 저서 <권학편(勸學篇)>으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전통적 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서양 기술의 채용으로서 이것은 중국의 정교(政敎)를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기계·기구·기술로 보강한다고 하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의거하는 것이다. 시대의 신동향(新動向)에 대하여 영합적이었으나, 정치가로서의 본질은 송학(宋學)의 사상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민족주의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외강경론을 주장하여 이홍장(李鴻章)과 대립하였다. 그의 저작(著作)·주의(奏議) 기타는 <장문양공전집(張文襄公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변법유신운동 사상[편집]

變法維新運動思想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청조가 패배한 것은 이홍장(李鴻章) 등 양무파(洋務派)에 의한 중국 근대화 정책이 완전히 실패한 것을 입증하였다. 동시에 그것은 일본을 비롯한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 경쟁을 격화시켰다. 이와 같은 중국의 민족적 위기에 직면하여 전통적 체제를 근대적으로 변혁(變法)함으로써 중국의 부강(自强)을 달성하려고 하는 개혁운동이 급속히 높아졌다. 이것이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이다. 그 운동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된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단스통(譚嗣同) 등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본지(本旨)로 하는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입장에서 입헌군주정치(入憲君主政治)의 실현을 표방하는 전반적이며 근본적인 개혁론(改革論), 소위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하였다. 이 변법론을 체계세운 것이 캉유웨이(康有爲)의 저서인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였다. 변법론의 맹아는 이미 양무기(洋務期)의 풍계분(馮桂芬)·왕도(王韜)·하계(何啓)·호예원(胡禮垣) 등의 주장에도 보이지만, 청일전쟁 전후가 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탕진(湯盡)·진규·정관응(鄭觀應)·진치(陳熾) 등에 의해 의회제도에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들을 거쳐서 변법론(變法論)을 대성한 것이 캉유웨이이지만, 그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론은 중국의 전통적 체제인 청조 전제통치(專制統治)의 근본적이고도 급격한 개혁을 의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조의 실권을 장악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위험 사상이라고 적시(敵視)되었다. 그래서 그의 이론에 입각한 1898년의 무술(戊戌)변법도 겨우 백여일에 실패로 끝나고 혁명론(革命論)이 대두되었다.

공양학파[편집]

公羊學派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기에 걸쳐서 청조(淸朝)의 전제 지배체제는 크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국내 각지에서는 농민투쟁이 격화하는 한편 외부로부터는 대량의 아편이 유입되어, 청조는 내외(內外)에서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와 같은 내외의 위기를 배경으로 현실문제에 뿌리를 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강조하고 나온 것이 공양학파였다. 청대 중기에 유행하던 고증학(考證學)은 그의 비정치적 성격 때문에 벌써 현실의 위기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상실하고 있었다. 19세기 전기의 공양학파는 공자진·위원(魏源)에 의하여 대표된다. 그들은 전한(前漢) 금문학(今文學)의 '미언대지(微言大旨:經典의 바닥에 간직된 근본정신)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고문경(古文經)에 의존하여 훈고주의만을 표방하는 고증학의 비정치성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정치적, 사회적 실천에 직결되는 경세치용의 학(學)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청대(淸代) 공양학은 18세기 중기경 상주학파(常州學派)의 개조라고 일컫는 장존여(莊存與)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어 그의 외손 유봉록(劉逢祿)에 의한 계승발전을 보았고, 다시 유봉록의 제자 공자진·위원(魏源)에 이르러 특히 혁신성을 강하게 한 것이다. 청말의 개혁 변법운동의 맹아(萌芽)는 이 양자의 주장에 있다고 한다. 양자의 친구인 임칙서(林則徐)·황작자(黃爵滋)는 아편 엄금론(嚴禁論)을 주장하여 영국의 침략에 대한 저항정책을 시도하였다. 그후 청말에는 공양학을 대망(戴望)·왕개운·요평(寥平) 등이 계승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경학자(經學者)로서의 경향이 강했다. 단 요평(寥平)은 캉유웨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캉유웨이(康有爲)와 그의 자제인 량치차오(梁啓超)를 중심으로 한 청말의 변법운동(變法運動)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공자진[편집]

(1792∼1841)

중국 청대 후기의 학자, 사상가, 저장성(浙江省) 인허시엔(仁和縣)의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고증학자인 단옥재(段玉裁)의 외손으로서 어렸을 때 직접 단옥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찍부터 예민한 학문재질과 구애를 받지 않는 불기분방(不羈奔放)한 성격을 발휘하였다. 38세에 진사(進士)가 된 후에 별다른 관직의 영달은 보지 못하고, 예부주사(禮部主事)의 미관(微官)에서 그쳤다. 23세부터 25세에 걸쳐서 <명양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著議)·숙의(塾議)> <평균편(平均篇)>을 저술하여 청조 전제정치의 해악을 철저하게 폭로비판하였다. 28세 때에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연구하고, 동문(同門)의 친우 위원(魏源)과 함께 정치상의 개혁을 강조하였다. 문재(文才)는 특출하게 뛰어나고 정감(情感)이 풍부하고 화려한 시문(詩文)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또 서북지리(西北地理)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만년에는 불교 특히 천태(天台)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은 전기한 것 외에 <농종(農宗)> <정역(正譯)> <기해잡시(己亥雜詩)> 등 많이 있으며, 산일(散逸)되어 없어진 부분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공자진전집>에 수집되어 있다.

위원[편집]

魏源 (1794∼1856)

중국 청대 후기의 학자, 사상가. 후난성(湖南省) 사오양현(邵陽縣)의 사람. 자는 묵심(默深). 1822년에 거인(擧人)이 되고, 1844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이 기간에 연납(捐納) 매관(買官)으로 내각중서(內閣中書)의 관직에 취임한 이외는, 대체로 장쑤성(江蘇省)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여 민중의 생활에 밀착된 실제적인 정치를 행하였으나 지주(知州)로 끝났다. 청년시대에는 공자진과 함께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수학하고, 다시 강소포정사(江蘇布政使) 하장령(賀長齡)에게 초청되어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篇)>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주재(主宰)하였고, 이것들을 통하여 현실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객관적 인식이 뒷받침된 학문의 방법론을 확립했다. 아편전쟁 때 양강총독(兩江總督)인 유겸(裕謙) 밑에서 영국군과 싸웠다. 그 경험에 따라 그는 전후에 <해국도지(海國圖志)> <성무기(聖武記)>를 저작하여 중국의 민족적, 봉건적 위기를 호소하면서 혁신을 주장하였다. 금문학(今文學)의 입장에서 <시경(詩經)>·<서경(書經)>에 대한 연구를 권장하고, <서고미(書古微)>를 저작하여 공양학을 발전시켰다. 그 외에 서북지리(西北地理)·불교의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저서는 전기한 것 외에 <고미당내집(古微堂內集)> <동외집(同外集)> <동시집(同詩集)> <원사신편(元史新篇)>등 다수가 있다.

해국도지[편집]

海國圖志

중국 청대 후기의 학자인 위원(魏源)의 저서. 1842년에 50권본으로서 간행되었다가 1847년에 60권본, 1852년에 100권본으로 확충되었다. 본서(本書)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세계 정세를 논술한 지리서(地理書)로서 임칙서(林則徐)가 광둥 재임중에 편찬한 세계지리 역서(譯書)인 <사주지(四洲志)>를 근본으로 하여 내외(內外)의 지리자료를 참조하면서 내용을 증보한 것이다. 내용은 도(圖)와 지(志)로 나누어 꾸며졌는데, 아편전쟁의 경험에 의거한 해방론(海防論)과 세계의 지리, 각국의 연혁을 기술하고 있다. 위원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고, 서양의 장점을 취하여 서양에 대항하는 도(道)를 강구하기 위하여 본서를 만든 것이다. 본서는 중국인의 세계 인식에 획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캉유웨이[편집]

康有爲 (1858∼1927)

중국 청말 민국(民國)초의 학자, 정치개혁자. 광둥성(廣東省) 난하이시엔(南海縣)의 사람. 자는 광하(廣廈). 호는 장소(長素). 광둥(廣東)의 명문 출신으로 소년시대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를 하였다. 청년시대에 동향의 유명한 학자 주구강(朱九江)에게 사사하였다. 이어 육왕학(陸王學)·도교(道敎)·불교(佛敎)를 수학한 후에 1890년 설촨(四川)의 요평(寥平)의 영향을 받아, 공양학(公羊學)에 경도하여 마침내는 신학위경(新學僞經)·공자개제(孔子改制)와 같은 설을 주장하면서 혁신을 위한 실천 이론을 강조하였다. 그 동안 1888년 베이징에가서 정치개혁에 관한 상서(上書)를 행하였고, 또 홍콩과 상하이를 방문하여 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역서(譯書) 등을 통하여 서양 학문을 섭취하였다. 그는 이러한 학문을 공양학과 관련지어 이상세계의 구상과 그의 실현방법에 관한 대동설(大同說)을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혁신사상에 입각하여 1901년∼1904년간 광둥(廣東) 창싱리(長興里)의 사숙(私塾) 만목초당(萬木草堂)에서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문인(門人)들에게 학문을 강의하였고, 다시 청일전쟁(淸日戰爭) 직후인 1905년 이후에는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개혁운동은 청조의 전통적인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부국강병을 달성하려고 하는 변법자강(變法自强)의 운동이다. 그것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일본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을 전범으로 한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청조의 보수파는 그의 개혁론과 그가 설립한 강학회(强學會)를 탄압하였지만, 변법(變法)의 기운은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분할이라고 하는 민족적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급격히 고조되어 갔다. 이와 같은 정세 속에서 1898년(戊戌年) 그의 다섯 번째의 상서(上書)에 감동한 광서제(光緖帝)는 사부(師傅)인 옹동화 등과 도모하여 그를 기용하여, 드디어 동년 6월에 과거개혁(科擧改革), 근대적 학교의 설립, 산업진흥(産業振興), 관청의 정리 등을 포함하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이다. 그러나 청조의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西太后) 등 보수파는 이것을 청조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력을 동원하여 용서없는 반격을 함으로써 변법은 백여일만에 실패로 돌아가, 그는 일본에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무술정변(戊戌政變) 이후 1913년까지 그는 일본·남양(南洋)·미국·유럽에서 망명생활을 보내면서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하여 광서제(光緖帝)의 권력 회복을 도모하여 쑨원(孫文) 등의 혁명파와 대립했다.

그러나 보황회까지 포함하여 그의 개혁의 기도는 거의 실패로 끝나 마침내 혁명운동에 길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의 그는 청조의 복벽(復壁:황제의 복위)이라든가 공자교(孔子敎)를 국교(國敎)로 하는 운동을 하여 무술변법 때와는 대조적으로 보수반동의 방향을 밟았다. 저술은 많으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신학위경고[편집]

新學僞經考 (1891)

중국 청말 민국초기(民國初期)의 정치개혁론자인 캉유웨이(康有爲)의 저서(著書), 14권. <신학위경(新學僞經)>이라는 명칭은 캉유웨이(康有爲)가 본서(本書)에서, 세상에 행해지고 있는 고문(古文)의 경서(秦代 篆書 이전의 古體文字로 쓴 경서)는 모두 전한말(前漢末)의 유흠(劉歆)의 위작(僞作)으로 유흠은 왕망(王莽)의 찬탈(纂奪)을 돕기 위하여 위경(僞經)을 만들어 공자(孔子)의 참정신을 말살한 것이니, 이와 같은 위경(僞經) 즉 고문(古文)의 경서(經書)는 신(新:王莽은 한의 제위를 약탈하고 국호를 '新'이라고 하였다) 일대(一代)의 학문에 불과하다고 설파한 것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고문의 경서라든가 후한(後漢)의 경학(經學)이 유흠의 위작(僞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여 금문(今文)의 경서(經書-漢代의 공통 문자인 隸書로 쓰여졌던 經書)나 전한(前漢)의 경학(經學)에 의거하지 않는 한 공자의 도(道)를 명백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자의 도라는 것은 유교의 창교자(創敎者)인 공자의 진의가 개제(制度의 改革)에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청대학문의 정통파인 한학(漢學)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이와 같은 주장이 그 진의(眞意)는 어떻든 간에 2천년래의 경학(經學)이 의거해온 경서(經書)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공자를 유교의 창교자(創敎者)로 함으로써 그의 진의(眞意)를 개제(改制)에서 추구하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혁신을 위한 실천이론 바로 그것이었다. 그 때문에 청조의 보수파로부터 세상을 혹란시키고 백성을 기만한다고 하여 격심한 비난과 탄핵을 받아, 마침내 1894년 그 자신 이것을 소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1898년·1900년에도 금지 처분을 받았다.

공자개제고[편집]

孔子改制考 (1897)

중국의 청말 민국초기(民國初期)의 정치개혁론자(改革論者) 캉유웨이(康有爲)의 저서, 21권. 캉유웨이는 이미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에서 공자개제(改制)의 주장을 하였으나, 거기서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고문(古文)의 경서(經書)가 유흠(劉歆)의 위작(僞作)에 관계된다고 하는 점에 있었던 것이고, 그 뒤를 이어서 공자개제(孔子改制)를 주제로 한 것이 본서이다. 본서에 의하면, 공자는 자기의 가르침 즉 유교를 요, 순, 문, 무, 주공(堯舜文武周公) 등의 고대 성인의 도(道)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이름을 고대(古代)에 의탁하였을 뿐이며, 옛 성인(聖人)의 도(道)라고 하는 것은 실상은 공자 자신이 창시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공자야말로 유교의 창교자(創敎者)이며, 더욱이 장차 도래할 신왕조(新王朝)를 위하여 제도(制度)를 개정한 소왕(素王)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공자를 옛 성인(聖人)의 도(道)의 조술자(祖述者)라고 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공자만이 교주(敎主)이며 개제(改制)의 주체라고 함으로써 혁신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공자개제(孔子改制)의 주장은 <신학위경(新學僞經)>의 그것과 같이, 사천(四川)의 공양학자(公羊學者) 요평(寥平)의 말에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여 한층 심오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개혁론 즉 변법론(變法論)에 학문적 근거를 주고자 한 것이다. 본서도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와 같이 청조 보수파의 비난과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대동서[편집]

大同書 (1935)

중국 청말 민국초기(民國初期)의 정치 개혁론자인 캉유웨이(康有爲)의 유저(遺著). 갑부(甲部)로부터 계부(癸部)가지의 10부로 되어 있다. 서(書)의 형체로 종합된 것은 1901년경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전문(全文)이 출판된 것은 그의 사후인 1935년이다. 본서는 그의 이상사회(理想社會)에 관한 구상과 아울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논술한 것이다. 대동(大同)이라고 하는 명칭은 <예기(禮記)><예운편(禮運篇)> 속의 대도(大道)가 행하여지고 있는 대동(大同)의 세상이라고 하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쇠란(衰亂)·승평(升平)의 양세(兩世)를 경과하여 태평의 세상으로 변하는데, 태평의 세상이라는 것은 곧 대동의 사회이다. 이 대동의 사회에 있어서는 전세계가 다만 하나의 공정부(公政府)에 의하여 통할되어 계급·인종·남녀의 차별이 없어지고 가족제도에서 해방되어 산업은 공영(公營)으로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태평의 상태가 찾아온 뒤에 인간계뿐 아니라 전생물계(全生物界)에 자비가 미쳐 극락의 세계·선불(仙佛)의 경(境)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대동설의 주지(主旨)인데,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은 유교의 이상과 불교의 오의(奧義)라고 하겠다. 이 대동설은 <신학위경(新學僞經)>·<공자개제(孔子改制)>의 주장과 긴밀하게 결합하여 그의 개혁론 즉 변법론(變法論)을 성립시킨 것이다.

량치차오[편집]

梁啓超 (1873∼1929)

중국 청말민국(民國)초의 계몽사상가인 동시에 정치가. 광둥성(廣東省) 신후이시엔(新會縣)의 사람. 자는 탁여(卓如). 호는 임공(任公), 또는 음빙실주인이라고도 자칭하였다. 중류 지주이며 독서인(讀書人)의 집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7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캉유웨이(康有爲)의 실천적이고 경세적(經世的)인 학풍(學風)에 이끌려 이듬해 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그후 가장 충실하고 유능한 캉유웨이 학도로서 스승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서로 표리(表裏) 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일전쟁 직후에 캉유웨이의 강학회(强學會) 설립을 도와서 상하이(上海)에서 <시무보(時務報)>를 창간하였다. 또 후난(湖南) 시무학당(時務學堂)의 총교습(總敎習)이 되었고, 단스통(譚嗣同) 등과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후난(湖南)의 변법운동(變法運動)을 추진하였다. 1898년 보국회(保國會) 결성으로 분주한 후에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였다. 정변후(政變後)에는 일본에 망명하여 <청의보(淸議報)>에 이어 <신민총보(新民總報)>를 발행하는 등 입헌군주제를 고취하면서 혁명파의 <민보(民報)>와 치열하게 논전하였다. 또 하와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가 화교(華僑)들 사이에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하여 쑨원(孫文) 등의 흥중회(興中會)와 대립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는 귀국하여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서 민주당(民主黨) 및 진보당(進步黨)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위안스카이의 제정계획(帝政計劃)에 반대하여 토원운동(討袁運動)을 일으켰다. 청말 민국초기의 정치사상에 있어서의 그의 주요한 역할은 계몽사상가 내지 저널리스트로서의 면에 있다. 상식적·타협적이어서 철저성·일관성을 결하고 있다. 저서는 대단히 많아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등이 명저(名著)로서 알려졌는데, 저술의 거의 전부가 <음빙실합집>에 수록되어 있다.

단스통[편집]

譚嗣同 (1865∼1898)

중국 청말의 사상가·정치개혁자. 후난성(湖南省) 출신. 자는 복생(復生), 호는 장비(壯飛). 부친은 호남순무(湖南巡撫)까지 승진한 지방대관(地方大官)이었다. 그도 소년시절부터 과거를 목표로 학문을 닦았지만, 여섯 번이나 향시(鄕試)에 실패하였다. 30세가 지났을 무렵 부친의 명으로 장쑤(江蘇) 후보지부(候補知府)의 관(官)을 샀으나, 관계에 반발하여 얼마 안 있다가 귀향하였다. 청년시대에 그는 호방불기(豪放不羈)의 성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무(武)를 좋아하였으며 회당(비밀결사)과도 교제하였는데, 25세경 왕선산(王船山)의 유서(遺書)를 보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고, 다시 청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통절하게 변법을 지향(指向)했다. 1896년 베이징(北京)에서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친교를 맺고 깊은 영향을 받아 캉유웨이(康有爲)의 학설을 알게 되었다.

또 상하이(上海)에서 영국의 선교사 존 프라이어를 방문하여 그리스도교에 강한 관심을 경주하였다. 1898년 초에 귀향하여, 이미 후난 시무학당(時務學堂)에 초빙되어온 량치차오라든가, <상학보(湘學報)>의 편집을 맡고 있던 친구인 탕차이창(唐才常)과 협력하여 후난의 혁신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들은 <남학회(南學會)>를 설립하여 호남혁신(湖南革新)의 거점으로 삼고, <상보(湘報)>를 발행하여 혁신사상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6월 소위 무술변법(戊戌變法)이 개시되면서, 그는 그 중심인물 중의 하나로 활약하였으나 서태후(西太后)등 보수파의 무력탄압에 의한 정변(政變)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그 주저인 <인학(仁學)> 속에서 왕부지(王夫之)의 사상, 공양학(公羊學), 불교와 그밖에 기독교·서양지식 등을 관련지어 독자적인 혁신론(變法論)을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강력한 반만의식(反滿意識)이 반영되어 있다. 그 점은 캉유웨이(康有爲)나 량치차오(梁啓超)보다 한층 더 급진적이었다. 그 밖에 <동해건명씨 삼십이전구학사종(東海騫冥氏三十以前舊學四種)> 등의 저서가 있는데, 저술의 거의 전부가 채상언(蔡尙思) 등이 편집한 <담사동전집(譚嗣同全集)>(1954년 간행)에 수록되어 있다.

인학[편집]

仁學

청말 정치개혁론자인 단스통(譚嗣同)의 주저. 상하 2권으로 1896년경에 저술한 것이나 그가 죽은 뒤 친우인 량치차오(梁啓超)에 의하여 일본에서 1899년 1월에 간행된 <청의보(淸議報)> 제2책(第二冊) 이하에 연재되었다. <인학(仁學)>이라는 서명은 인(仁)과 학(學)에 대해 논설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인(仁)이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 불교의 자비(慈悲),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동일한 것이며, 그 본체는 바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테르 ('以太'라고 쓴다)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仁)은 에테르의 용(用)인 반면에, 에테르는 인(仁)의 체(體)라 한다. 이 '에테르=인'이야말로 법계(法界)·자연계·인간계의 근본원리인 것이다. 더욱이 인(仁)의 제일의 (第一義)는 '통(通)', ― 그 이상(理想)으로서 남녀통(男女通, 남녀의 평등)·상하통(上下通, 君臣父子 등의 상하관계의 타파)·중외통(中外通, 중국과 외국과의 自由通商 즉 세계주의)·인아통(人我通, 彼我의 구별의 부정)의 4자(四者)가 거론된다 ― 에 있는데 그 목표는 평등이다. 따라서 통(通)을 방해하는 '망라(網羅)'는 '충결(衝決)'되어야만 한다. 그는 망라의 구체적인 예를 명교(名敎) 즉 전통적인 윤리도덕이라 지적한다. 때문에 여기서부터 명교의 배제·부정(否定)이라고 하는 혁신의도(革新意圖)가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학(仁學)의 주장은 공양학(公羊學)을 중핵으로 하는 유교와 화엄종(華嚴宗)을 주체로 하는 불교, 거기에다 그리스도교와 서양 근대과학의 지식을 상호결합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불교를 최우위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그 주장은 강한 반만의식(反滿意識)을 깔고 있어, 이러한 점에서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개혁론보다도 한층 급진적인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고대연구[편집]

古代硏究

1894년∼1895년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청조의 전통적 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함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달성하려고 하는 소위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이 급속히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단스통(譚嗣同) 등 공양학파(公羊學派)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변법(變法) 즉 제도개혁의 이념을 공양학의 진보주의 역사관에서 구하였다. 이 경우에 그들은 전통적인 한학(漢學)·송학(宋學)을 부인하고 그것들을 초월한 금문(今文)의 경서(經書)나 전한(前漢)의 경학(經學)에 의해 직접 공자의 참정신을 탐색하려고 하였다. 캉유웨이의 <신학위경(新學僞經)>·<공자개제(孔子改制)>의 주장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근대의 민족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변혁(變革) 이론은 이와 같이 고대연구(古代硏究)에서 시작함으로써 전통적 학풍을 부정하는 태도 속에서 발생되었다. 이 점은 그후의 5·4 운동에 있어서의 후스(胡適)라든가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反共) 쿠데타로 인해 일본에 망명한 궈모뤄(郭洙若)라든가,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의 고대연구에 있어서도 각자의 입장의 상위에도 불구하고 모두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장빙린[편집]

章炳麟 (1868∼1936)

중국 청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학자, 혁명가. 저장성(浙江省) 여항현(余抗縣)의 사람. 자는 매숙(枚叔). 호는 태염(太炎). 소년시절에 일찍이 배만의식(排滿意識)에 눈떴다고 한다. 청년시대에 유월(兪越)에게 사사하여 고증학을 수학하고, <좌씨전(左氏傳)>을 연구한 뒤에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공양학파(公羊學派)와는 학문상의 견해를 달리하여 곧 그들과 결별하였다.

무술정변(戊戌政變) 후 한때 일본에 망명하여 개혁파를 떠난 채 배만운동(排滿運動)을 결의하였다. <구서>에서 강렬한 배만사상을 표명한 데 이어 <박강유위론혁명서(駁康有爲論革命書)>와, 추용(鄒容)의 저서인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에서 청조를 매도(罵倒)하여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는 불전(佛典)을 연구했다.

또한 저장(浙江) 계통의 혁명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결성에 관여하였다. 출옥 후 도쿄(東京)에 가서 중국 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혁명을 맹렬히 고취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정치(反動政治)에 반대하였고, 쑨원(孫文) 등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뒤에는 정계를 떠나 국학(國學)의 연구와 유지에 전렴하여 민국(民國)의 학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가로서의 그의 특색은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종족혁명주의(種族革命主義)에 있고, 쑨원 등의 서구적·근대적 혁명이론을 승인하지 않았다. 학자로서는 고증학(考證學)의 정통을 자부하였고, 특히 소학(小學) (玄學·訓說·音韻學)에 상세하며, 음운학(音韻學)의 권위로서 불교에도 통하여, 고증학(考 學)·제자학(諸子學)·불학(佛學)을 망라한 국학(國學)을 주장하였다. 그 학풍은 혁명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이다. 저서로는 전술한 것 외에 문시(文始)> <신방언(新方言)> <소학문답(小學問答)> <검론(檢論)><국고론형(國故論衡)> 등 대단히 많다. 이것들은 <장씨총서(章氏叢書)> <동속편(同續編)> <태염문록(太炎文錄)> <동속편(同續編)>에 대체로 수록되어 있다. 루쉰(魯迅), 저우쭤런(周作人), 첸쉬안퉁(錢玄同) 등이 그의 훈도(薰陶)를 받았다.

왕궈웨이[편집]

王國維 (1877∼1927)

중국 청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사학자(史學者). 저장성(浙江省) 하이링시에(海寧縣)의 사람. 자는 정안(靜安), 호는 관당(觀堂)이다. 소년시절에 그는 뤄전위(羅振玉, 1865∼1940)에게 재주를 인정받았다. 그는 뤄전위에게 사사(師事)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후지다 요하치(藤田豊人)에게도 배웠다. 처음에 서양철학(西洋哲學)을 연구한 다음 이어서 중국 극문학(劇文學)의 사적연구에 종사하여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를 저술하였다. 신해혁명 후 뤄전위(羅振玉)를 따라 일본에 망명하여 교토(京都)에 거주하였는데, 이래 청조 고증학의 전통에 근거하여 경학(經學)·사학(史學)·금석학(金石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특히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엄밀한 사료 비판과 분석 및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에서 발견된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사료의 정리와 연구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1927년 청조에 순사(殉死)하는 뜻으로 베이징(北京) 이화원( 和園)의 곤명호(昆明湖)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자작은 <관당집림(觀堂集林)>에 수록되어 있으나, 이것까지 포함한 저작전집 <왕충각공유집(王忠慤公遺集)>이 그의 사후 뤄전위(羅振玉)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구세강[편집]

(1893∼?)

중국 현대의 역사학자. 장쑤성(江蘇省) 소주(蘇州)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고서(古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20대 전반엔 북경대학을 다니며, 이른바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고양기(高揚期)를 보냈다. 또한 신문화운동의 강렬한 영향 밑에서 그는 전통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고전연구(古典硏究)에 뜻을 두고 주로 민속학적(民俗學的) 입장에서 고대사(古代史) 관계의 기술을 분석 비판하며 계통지움으로써 각각 그것의 성격·주장·성립의 배경을 분명히 하였다. <고사변(古史辯)> (7책, 제1책은 1926년 간)은 이와 같은 의고변위(疑古辯僞)의 방법론에 의한 획기적인 업적이다. 이어서 고사비판(古史批判)에 관한 선인(先人)의 저작을 집성하여 <변의 총간(辯疑叢刊)>(제1책은 1933년간)을 내었다. 이런 연구성과는 금일에 있어서도 존중되고 있다. 샤먼(廈門)·베이징(北京)·옌징진(燕京) 각 대학의 교수, 베이핑 연구원(北平硏究院) 사학계 주임을 역임하였으며 우공학회(禹貢學會)를 주재하였다. 최근까지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양사상의 소개[편집]

西洋思想-紹介

청일전쟁 후 중국의 심각한 민족적 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청조의 전통적인 제도를 개혁하려고 하는 변법운동(變法運動)이 급격하게 대두하여 서양의 학문 특히 서양 근대의 제도·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운동이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 변법파(變法派)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력히 일어났다. 그때까지 서양사상의 소개에 가장 공헌해온 것은 재화(在華)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의 전도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또 서양인의 입장에서 하는 서양소개였다. 이에 대하여 청일전쟁 후 변법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중국인 자신들에 의한 본격적인 서양사상의 소개가 옌푸(嚴復)에 의하여 개시되었고 이어 리시쩡(李石曾)·왕궈웨이(王國維)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옌푸는 진화론(進化論)을 비롯하여 영국·프랑스의 자본주의적 근대사상을, 리시쩡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상을, 왕궈웨이는 독일의 근대사상을 제각기 소개하여 청말로부터 민국 초기의 중국 사상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옌푸[편집]

嚴復 (1853∼1921)

중국 청말 민국 초기의 사상가. 푸젠성(福建省) 민후현의 사람. 자는 기도(幾道). 소년시절에 푸저우주(福州)의 마미선정창(馬尾船政廠) 부설(附設)의 해군학교에서 기술을 수습하였다. 25세 때 유학생으로서 영국에 건너가 해군의 기술과 학과를 배웠으나, 오히려 서양의 제도와 사상의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귀국 후 리훙장(李鴻章)에게 초빙되어 텐진(天津)의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의 책임을 맡았고 청일전쟁을 계기로 논단(論壇)에 등장하여 <논세변지극> <원강(原强)> <구망결론(救望決論)>등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개혁론을 주창하였다. 이어서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進化)와 윤리(倫理)>를 번역하여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의화단(義和團) 사건 수년간 <원부(原富)>(스미스의 <富國論>), <군학이언(群學肄言)>(스펜서의 <사회학연구>), <법의(法意)>(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을 계속 번역함으로써 서양 근대사상의 소개에 힘썼다. 그러나 의화단 사건 후의 정치적·사회적 격동은 진화론에 입각한 그의 개혁론을 미온적·점진적인 개량주의로 후퇴시켰다. 민국(民國) 성립 후 위안스카이와 밀접하게 결합하기도 하고, 공자숭배(孔子崇拜)를 강조하여 5·4운동에 반대하는 등 보수주의로 흘렀다.

천연론[편집]

天演論

중국 청말 민국 초기(民國初期)의 사상가 옌푸(嚴復)의 역서(譯書). 1898년 단행본으로서 출판되어 자서(自序)와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천연론이라는 것은 진화론이라는 의미이다. 본서는 영국의 토머스 헉슬리(1825∼1895)의 <진화(進化)와 윤리(倫理)> 및 그것에 부친 서언 (모두 1894년 간행의 단행본 "Evolution & Ethics and Other Essays"의 속에 수록되어 있다)을 옌푸가 고아노련(古雅老練)한 중국문(中國文)으로 번역하고 군데 군데 다른 학설이나 그 자신의 비평을 섞었고 또 중국의 실정에 대한 감개를 나타내기도 한 것이었다.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을 토대로 생존경쟁·자연도태의 두 개념을 강조하고, 다시 이것을 인간계의 진화에 비교상합(比較相合)시켜 논급하고 있다. 본서에서 소개된 <진화론>의 우승열패(優勝劣敗)·적자생존(適者生存) 등의 공식은 그것이 그대로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분할이라고 하는 약육강식의 시세(時勢)와 관련지어져 당시의 사상계에 심히 큰 영향을 주어 마침내 개혁론의 내용에도 질적(質的) 변화를 가져왔다.

신해혁명의 의의[편집]

辛亥革命-意義

1911년의 신해혁명은 청조의 군주전제(君主專制)를 전복시키고 중국에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성립시켰다. 그것은 아편전쟁으로 시작되는 중국근대사의 절정을 이룸과 동시에 그후의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혁명은 민주주의자인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혁명의 조직은 1896년의 흥중회(興中會)에서 시작되어, 1905년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로 발전해 갔다. 1900년의 의화단 사건 후에 중국에서는 과거(科擧)의 폐지, 학교제도의 채용, 해외유학의 장려 등으로 구미(歐美)의 근대사상을 몸소 체득한 혁신적 지식청년이 쏟아져 나와 중국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을 결집한 것이 중국동맹회였다. 혁명의 강령으로서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채용되었다. 쑨원 등의 혁명파는 청조를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로 개혁하려고 하는 입헌파(入憲派)와 격렬한 논전을 교환하면서 입헌공화제(入憲共和制)를 목표로 여러 번 무장봉기(武裝蜂起)를 시도하여 마침내 신해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혁명파는 농민을 해방하는 방책을 갖지 못하여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던 농민투쟁(農民鬪爭)과 결합하지 못하였다. 거기다가 제국주의의 책동마저 가세하여 혁명의 성과는 북양군벌(北洋軍閥)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탈취하게 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끝났다. 위안스카이가 제국주의에 영합을 하여 혁명세력을 탄압하고 반동정치를 행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새로운 암흑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제지함으로써 군주제의 부활을 용허하지 않은 것은, 신해혁명에서 민주공화(民主共和) 사상이 인심(人心)에 깊이 침투한 결과였다.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은 1915년의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에 이어 1919년의 5·4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후의 혁명운동은 대개 신해혁명의

<미완(未完)의 줄거리>를 이어 그것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어 갔다.

쑨원[편집]

孫文 (1866∼1925)

근대 중국의 혁명가·전투적 민주주의자. 중국의 공화제 창시자로서 국부(國父)로 칭송되고 있다. 자는 일선(逸仙), 호는 중산(中山)이다.

광둥성(廣東省) 샹산시엔(香山縣, 후에 中山縣으로 개칭)의 중농(中農)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집이 빈한하여 10세가 되어 마을 글방에 입학하였다. 그 곳의 교사는 살아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병사(兵士)였기 때문에 그에게 멸만흥한(滅滿興漢)의 사상을 심었다고 한다. 14세 때 하와이에서 재산을 모은 형에게 가서 그곳 학교에 입학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의학을 배워 마카오에서 개업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찍부터 구미사회(歐美社會)와

근대과학에 접촉하는 기회를 가졌던 그는 구미의 진보한 사회에 비교하여 중국의 구폐(舊弊)와 빈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개업의(開業醫) 시절부터 회당(會黨)과 연락하여 혁명운동에 몸을 던졌다. 1894년 구국을 위하여 청조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의하여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였다. 흥중회 선언에서 국민의 고난과 중국분할의 위기를 호소하고 특히 청조의 부패를 결렬하게 공격하였다. 이해에 최초의 거병(擧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2년간을 보내면서 보다 심도있게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배웠다.

이때 그는 자기가 이상으로 하고 있었던 부강한 근대국가들도 또한 모순이 있고 사회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쑨원은 구미의 결함을 극복하려고 하는 중국 독자의 혁명이론인 3민주의(三民主義)를 안출한 것이다. 1905년에 조직된 동맹회(同盟會)는 쑨원을 총리로 추대하여 삼민주의를 혁명강령(革命綱領)으로 삼았다. 신해혁명의 성과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약탈당하자 쑨원은 재차 혁명운동을 계획하여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함으로써 군벌(軍閥)과의 투쟁을 계속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5·4운동의 전개와 러시아 혁명의 성공, 중국공산당의 성립을 보는 가운데 제국주의의 본질과 대중조직(大衆組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에 그는 종래의 삼민주의의 내용을 크게 변경하고 충실히 함으로써 새로운 삼민주의의 이론을 형성하여 갔다. 그리하여 1923년에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1919년에 中華革命黨을 中國國民黨으로 개칭하였다)을 개조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행하였고, 연소(連蘇), 용공(容共), 노농부조(勞農扶助) 3대정책을 게시하여 국민혁명(國民革命)을 진행시켰다. 새로운 삼민주의는 이 시기에 있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강령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역사적인 국민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1925년 3월에 쑨원은 "혁명은 아직도 성공하지 못하였다"라는 유언을 남겨놓고 병사하였다. 그후 삼민주의는 국공(國共)이 분열하자 국민정부(國民政府)에 의하여 반공이론(反共理論)으로 변해갔고,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한 소위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로 계승되어 나갔다.

삼민주의[편집]

三民主義 (1924)

쑨원이 지은 것으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하에서 국민혁명을 추진할 때 혁명의 강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쑨원(孫文)이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행한 강연을 모아 놓은 것이다. 쑨원이 삼민주의를 착상한 것은 1900년 이전의 일로 알려지고 있다. 1905년에는 동맹회(同盟會) 강령으로서 공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해혁명의 실패를 경험하고, 5·4운동을 거치는 동안에 크게 변화·발전하였다. 대체로 5·4운동을 경계로 하여 구(舊) 삼민주의와 신(新) 삼민주의가 분별된다. 이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신삼민주의로 발전해간 쑨원 사상의 정점을 보이는 대표적 저작이다. 삼민주의는 반식민지(半植民地)인 중국을 어떻게 하면 부강한 근대국가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구국주의(救國主義)였다. 내용은 민족주의(民族主義)·민권주의(民權主義)·민생주의(民生主義)로 되어 있다. 우선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식민지 중국의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독립을 찾고, 피압박민족의 국제적 연대(連帶)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그것은 바로 중국 국민이 민족정신을 분기(奮起)하여 일치단결하고, 그 단결 밑에서 민권·민생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길 외에는 없다. 민권주의에 의하여 4억 국민을 황제(皇帝)로 하는 전민정치(全民政治)를 구축해야 한다. 즉 정치의 대권을 정권(政權)과 치권(治權)으로 나누어, 정부에 강력한 치권을 주는 것과 동시에 국민에게는 정부의 치권을 감독, 이것을 감독할 수 있는 정권을 주는 것이다. 민생주의에 있어서는 지권평균(地權平均)과 자본절제(資本節制)를 행한다. 본래 지권평균이라고 하는 것은 토지의 가격 인상분의 공유와 토지단일세(土地單一稅)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절제는 사인자본(私人資本)의 독점방지와 국가자본(國家資本)의 적극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밖에 그것은 사회변혁 같은 것은 의미하지 않았다. 종래의 지권평균의 테두리를 넘은 '경작하는 자에게만 전지를 준다'는 슬로건이 제기되었고, 거기다 농민의 단결과 무장(武裝)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갖는 삼민주의는 국민혁명의 통일전선(統一戰線)을 위한 강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쑨원(孫文)의 사후 국공(國共)이 분열된 뒤에는 삼민주의는 국민정부 밑에서 유교적 해석에 의하여 반공이론(反共理論)으로 형성되었다. 쑨원이 삼민주의 속에서 전개한 문제는 각각 내셔널리즘과 국민대중의 정치에의 참가 및 사회경제체제의 변혁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이것들은 중국뿐 아니라 현대세계의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후에 마오쩌둥(毛澤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를 발전시킨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을 전개하여 중국 공산화의 이론적 기초로 하였다.

5·4운동 전후의 동향[편집]

五·四運動前後-動向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중심으로 발발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유럽 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압박은 일시적으로 경감되었다. 이것은 중국 민족자본의 발전에 있어 큰 계기가 되어, 신흥 민족자본가의 대두를 초래하였다. 그들에 의한 구체제타파의 욕구가 고조된 것과 함께 많은 급진적 지식인이 생겼다. 한편 신해혁명 후의 군벌에 의한 전제적인 정치는 공화(共和)를 명목상으로만 빙자하고 있어서 인텔리겐치아의 환멸감은 대단하였다. 이에 지식인·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봉건적인 모든 속박을 타파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을 5·4운동이라고 부른다. 1915년에 천두슈(陳獨秀)에 의하여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된 잡지 <신청년(新靑年>은 근대문명의 사조를 널리 소개하면서 철저히 유교비판(儒敎批判)을 전개하여 전국의 청년지식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5·4운동의 기수의 역할을 하였다. 봉건적인 사회체제의 구도덕(舊道德)이나 미신 등에 대한 투쟁은 민주주의와 과학을 슬로건으로 추진되었다.

또 첸쉬안퉁(錢玄同)(1897∼1938)에 의한 한자의 로마자화, 후스(胡適)에 의한 구어운동(口語運動)과 문학혁명(文學革命)의 제창은 천두슈(陳獨秀) 등에 의하여 내용적으로 깊이를 더하였고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의 제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일본의 21개조(個條) 요구 등 제국주의적 침략의 강화 밑에서 단순히 개인의 독립과 자아의 각성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중국의 해방은 불가능하였다. 1917년 러시아 11월혁명(十一月革命)이 일어나자 선진적인 지식분자들(李大釗, 陳獨秀 등)들은 거기에서 자극을 받아 사회주의로 전향하였다. 1919년 5월 <신청년(新靑年)>은 마르크스 주의의 특집호를 냈고 리다자오(李大釗)의 <나의 마르크스주의관> 등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한편 대전 후의 산업발전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양적 확대와 집중은 정치적 스트라이크를 감행하게 되었고,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어 노동신성(勞動神聖)의 사상을 강화시켰다. 이리하여 5·4운동후는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지위를 갖게 되어 마침내 1921년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성립을 준비했다.

차이위안페이[편집]

蔡元培 (1868∼1940)

근대 중국의 자유주의적인 교육자·사상가. 자는 학경(鶴卿). 호는 혈민(孑民)이다. 저장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의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892년 진사(進士)에 합격,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의 관위(官位)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청말의 민족적 위기에 촉박되어 민족교육(民族敎育)을 지향하여 관계(官界)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중국교육회(中國敎育會) 및 애국학사(愛國學社)를 만들어 혁명적인 청년육성에 노력하였다. 1905년에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곧 독일에 유학하였다. 귀국하여 1912년에 중화민국의 초대 교육총장에 취임하였고, 1916년에 베이징대학 학장이 되었다. 이 때 그는 옛 학풍을 고쳐 연구·교육의 자유를 주장하여 베이징대학이 5·4운동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1923년에 이 직책을 사임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1925년 이후로는 국민 혁명에 활약하였고, 난징정부(南京政府)의 성립에 수반하여 오랜 동안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청말과 5·4운동 시기의 혁명운동과 결부된 교육활동에 있어서 큰 공적을 남겼다. 5·4운동의 시기에 '전부를 포함하라'고 하는 슬로건에 의하여 당시에 급속한 세력으로 발흥하고 있던 신사상(新思想)을 옹호하는 데 힘쓰고,또 유교적인 봉건교육을 반대하여 평민교육과 여자교육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독일 유학에서 얻은 독일 관념론에서 출발하여 유심적(唯心的) 실용주의(實用主義)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국윤리학사[편집]

中國倫理學史 (1917)

중국의 윤리학의 역사적 흐름을 기술한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주요 저작. 중국의 윤리학은 지금까지 유교라고 하는 전통적인 교학체계(敎學體系) 속에 묻혀 버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체계로서는 성립되지 못하였다. 사적(史的)으로 정연하게 체계화되지 않은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가 새로운 시론(試論)을 제기한 것이 바로 본서라 하겠다. 중국의 윤리학은 진대(秦代) 이전의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배출된 시기가 가장 왕성하였다. 이때야말로 서양윤리학사에 있어서의 그리스 시대에 비교된다. 그런데 한(漢)나라 이후 많은 사상가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학설은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서의 유학의 범위 내에 그친 나머지 그 학설적 진화는 미미한 것이었다. 다만 청대(淸代)에 들어와 황리주(黃梨洲), 대동원(戴東原), 유리초(兪理初)의 학설 속에서 겨우 송(宋) 이래의 이학(理學)의 굴레를 탈각하여 자유사상의 기본이 되는 민권(民權)이나 여권(女權)의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본서의 대의(大意)이다. 이 저서는 유교적인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학적, 실증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중국의 고대사상(古代思想)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이런 점에서 5·4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천두슈[편집]

陳獨秀 (1880∼19420)

근대 중국의 혁명가·사상가. 자는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庵). 필명은 척안(隻眼)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안후이성(安徽省) 후이닝시엔(懷寧縣)의 지주(地主)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조부(祖父)의 훈욕을 받아 과거(科擧)를 거쳐 사관(仕官)의 길을 희망하였으나, 중간에 유학(留學)을 지망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1911년의 신해혁명에 활약하여 안후이성(安徽省) 교육사장(敎育司長)이 되었으나, 제2혁명에 패배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정치를 떠나 언론(言論)에 뜻을 두어 1915년 7월에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창간하였다. 이어 베이징대학의 문과학장(文科學長)이 되어 신문화운동을 추진하였다. 5·4운동 중에 마르크스주의에 경도, 얼마 후인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을 만들고, 총서기(總書記)가 되어 중국의 레닌이라고도 호칭되었다. 바로 쑨원(孫文)의 국민당과 손을 잡아 국민혁명을 추진하였으나, 노농운동(勞農運動)의 고조된 활동이 통일전선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을 반대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를 조장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우익(右翼) 기회주의라고 하여 총서기에서 해임되었다. 이어서 트로츠키스트라하여 제명당하고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 생을 끝마쳤다. 5·4운동 시기에는 민주급진파(民主急進派)로서 군벌의 암흑통치에 반대하여,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봉건적인 윤리나 미신에 비판을 가하고,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을 설파하면서 <신청년(新靑年)> 등으로 철저한 유교비판, 문학혁명을 제창하였다. 거기에는 초보적인 유물론 철학(唯物論哲學)의 관점이 있었다. 러시아의 10월혁명과 중국의 대중운동의 전개를 경유하는 동안 그는 점점 사회주의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과격한 혁명노선에 회의적이었으므로 다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부르주아 추수주의(追隨主義)에 떨어졌다고 비난받았다.

후스[편집]

胡適 (1891∼1961)

근대 중국의 학자, 교육자. 자는 적지(適之). 안후이성(安徽省) 지시현(績溪縣)에 있는 관리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관비생(官費生)으로서 미국에 유학하였다. 그는 칼럼비아 대학에서 듀이에게 사사(師事)하면서 프래그머티스트가 되었다. 1917년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義)>를 <신청년(新靑年)>에 기고하여 문학혁명의 효시가 되었고, 구어(口語=白語) 문학의 제창자가 되었다. 귀국하여 베이징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5·4운동에 가담하였다. 운동의 급진화에 따라서 사회주의를 공론(空論)이라 하여 '문제의 연구를 많이 하고, 주의를 말하는 것을 적게 하라'라고 주장하여 리다자오(李大釗)와 논쟁을 야기시켰다. 1920년대의 초에 군벌혼전(軍閥混戰) 속에서 호인정부(好人政府)의 설립과 연성자치(連省自治)를 주장하였는데 군벌할거의 현상유지 아래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일점일적(一点一適)의 개량주의이다. 그 위에 모델로 하는 전반서화(全般西化)론을 전개했다. 그에게는 법치주의(法治主義)의 근대국가가 소망이어서 난징정부(南京政府)의 성립 후는 장제스(蔣介石) 공산당 토벌, 대일타협(對日妥協) 정책을 지지하는 데 이르렀다. 후에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쫓겨갔다. 그는 철학·역사학·문학·민속학 등 넓은 학문분야에서 개척자였다. 실험주의적 유심론(唯心論)자로 시종일관하였고 동시에 구미문화(歐美文化)에 지상가치를 두고 그 전면적인 이식을 도모하려고 하는 개화론자이었다.

선진명학사[편집]

先秦名學史 (1922년)

상하이(上海)에서 간행됨. 원제(原題)는 The Development of the logical Method in ancient China(古代. 본서는 후스(胡適)의 콜럼비아 대학 졸업논문으로 철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후에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여진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史大綱)>의 원본이기도 하다. 본서는 중국 고대철학의 연혁 및 그 방법론으로서의 논리학의 발달을 명료하게 하려 한 점이 특색이다. 그러면서 당면한 중요과제로서 구미(歐美)의 근대문화와 중국 고유 문화의 동화(同化)를 도모하여 신(新)·구(舊)문화의 내면적 동화를 기한 동시에 중국 고유의 과학적 철학을 건설할 경우 두 문화의 동질적 요소를 궁구해본 것이었다. 그는 구미(歐美)에서 성립한 학문의 방법을 구사하여 중국 고대 선구자의 이론과 방법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그것이 근세 서구 세계가 달성한 것 같은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회진화(社會進化)에 관한 이법(理法), 진화론(進化論)이 근대 사상에 영향을 준 것과 같은 혁명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동시에 그러한 구미의 학문적 방법이 중국 민족의 정신과도 전연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려 하고 있다. 그것은 (1) 서론 (2) 역사적 배경 (3) 유교의 철학 및 논리 (4) 묵가(墨家)의 철학 및 논리 (5) 진화와 논리의 각 장으로 되어 있다. 정치도덕주의의 유교를 적당한 지위로 끌어내리고 고대의 비(非)유교적 학파를 부활시켰다. 그는 특히 경험을 존중하는 과학적인 묵자(墨子)의 논리학(論理學) 속에 구미의 철학과 과학을 이식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 저작은 5·4운동 시기의 풍조를 반영하였으나 점차 그의 유교비판(儒敎批判)은 후퇴해

갔다.

루쉰[편집]

魯迅 (1881∼1936)

근대 중국의 문학자.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여재(予才). 루쉰의 필명으로 알려졌다. 저장성(浙江省) 사오싱푸(紹興府)에서 출생했다. 생가는 독서인(讀書人)의 가품으로 부유하였다. 13세 때 조부가 감옥에 들어가고 부친도 병환으로 쇠약하였기 때문에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루쉰은 전당포와 약방을 번갈아 다녔고, 때로는 거지라고 욕을 먹은 일도 있으며 이 체험은 후년의 그의 사상형성에 크게 작용했다. 18세 때 관비(官費)를 받는 기술자양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인 1902년에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였다. 도쿄(東京)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이어서 센다이(仙臺)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년 정도에서 중지하고 도쿄로 돌아와서 문학을 지망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원생활에 들어갔고, 신해혁명 후에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추천으로 교육부의 직원이 되었으나 암담한 현실에 실망하였다. 1918년 <신청년(新靑年)>에 기고한 <광인일기(狂人日記)>는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어 중국문학의 원형(原型)을 이루었다. 그후 그는 계속 소설, 시, 산문을 써서 작품집 <눌함> >방황(彷徨)> 등에 수록하였다. 1926년 베이징을 탈출 남하(南下)해서 이듬해부터 상하이에 정주하여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抗日運動)에 가담했으나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아Q정전[편집]

阿Q正傳 (1921)

루쉰(魯迅)의 대표적인 중편소설. 처음에 <신보(晨報)>에 연재되었고, 후에 그의 제일 소설집인 <눌함>에 수록되었다. 중국의 현대문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했다.

내용은 아큐(阿Q)라고 하는 성도 가문(家門)도 모르는 무지한 독신의 실업자 농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해혁명 전후의 농촌사회 생태를 묘사한 것이다. 阿Q적 인간이 갖는 무지는 바로 신해혁명 당시의 중국 농촌사회가 지니고 있던 병적 국민성의 일면이기도 했다. 결국 반봉건(半封建)·반식민지(半植民地) 사회의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타입의 인간상이라고 하겠다. 루쉰(魯迅)이 이러한 인간이나 사회에 절망하면서도, 오히려 깊은 측은함과 동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절망에서 빠져 나아가려고 하는 속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국 사회의 후진성 및 노예근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은 혁명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비난받으면서 별 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루쉰의 다음 세대에 속하는 청년층, 소년층 사이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마침내 이 작품이 지닌 긍정적인 면이 차츰 인정받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 영향받은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내부의

阿Q적 무지나 독선(獨善)을 제거하는 것이 의식개조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리다자오[편집]

李大釗 (1889∼1927)

근대 중국의 혁명가·사상가. 자는 수상(守常)이다. 허베이성(河北省) 러팅시엔(樂亭縣)에서 출생했다. 1913년 텐진(天津)의 북양법정전문학교(北洋法政專門學校)를 졸업하고, 와세다(早稻出)대학에 들어가서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1915년 21개조(個條) 문제가 일어나자, 일본 유학생의 반대운동을 지도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여름에 귀국해서 베이징의 <신종보(晨鐘報)>의 편집을 맡아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2월에 베이징 대학 경제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이 되었다. 베이징 대학내에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창설함과 동시에 베이징의 각 학교의 사회주의 연구회와 공산주의 소그룹을 결집하여 5·4운동을 지도하였다. 1921년 중국 공산당결성에 즈음하여 천두슈(陳獨秀)와 함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음 해 통일전선(統一戰線) 결성을 위하여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혁명(國民革命)을 추진하였다. 국공분열(國共分裂)의 와중에서 1927년 장쭤린(張作霖)에 의하여 체포, 교살되었다. 초기의 그의 사상은 자아와 사회, 영원과 현재와의 갈등을 주제로 하면서 계몽적인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시기를 반영하여 문화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11월혁명에 자극받아 <서민의 승리>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현대 중국의 사상[편집]

現代中國-思想

중국에서는 백여년에 걸친 혼란 끝에 공산정권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되고 자유중국은 타이완으로 밀려나와 1971년에는 유엔에서 축출당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5·4운동으로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여 전통적인 유교에 대한 비판이 전개됨과 동시에 구어문학(口語文學), 고대사학(古代史學), 평민교육 기타 대중의 계몽을 지향하는 문화운동이 추진된 것이다. 신해혁명 후부터 군벌의 각파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위해 투쟁하였으나 후스(胡適) 등은 군벌통치(軍閥統治)의 점진적인 개량을 기대하였다. 청말 이래 민주주의의 달성을 지향하여 온 쑨원(孫文)은 이들 신흥세력과 결탁하여 새로이 반제(反帝) 반군벌(反軍閥)의 혁명투쟁을 전개시켰다.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국민당 우파 세력이 대두하여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를 중국 전래의 중용(中庸)·인애(仁愛)의 윤리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하여 그 혁명적 내용을 근본만 발췌하여 계급적 조화론을 주창하는 대계도주의가 생겼다. 그것은 이론을 무기로 하여 장제스(蔣介石) 등에 의한 국민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다른 편으로 중국은 농촌을 근거지로 한 노동독재의 소위 소비에트 정권을 성립시켜, 중국에 2중권력의 상태가 장기간 계속되었다. 도시에서의 활동이 곤란하게 되자 농촌에서 활동 근거지를 찾으려는 중국의 방향전환 과정에서 무장폭동(武裝暴動)을 일으키고, 농촌의 근거지를 확대해서 도시를 포위한다고 하는 이른바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이 구축되어 갔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의 발발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고 광범한 항일 민족통일전선(抗日民族統一戰線)이 성립하였으나, 국민당 정권은 충칭(重慶) 이전과 함께 더욱 보수화되고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운명(運命)>을 발표하여 반공이론(反共理論)의 체계를 세우고 공산당 박멸을 도모하였다. 이 동안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혁명시대에 있어서의 유격전(遊擊戰) 이론을 완성하고, 또 소비에트 혁명으로부터 항일통일(抗日統一)에의 대국적인 방향전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소위 <실천론(實踐論)> <모순론(矛盾論)>을 체계화했다. 이것은 이후 공산주의자 활동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또한 항일 근거지를 확대하는 가운데 마 오쩌둥은 소위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로 공산주의적인 국가상(國家像)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장제스 등의 반공적(反共的)인 삼민주의(三民主義) 해석을 논박하고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기초한 신삼민주의를 자기의 이론적 기초로 삼기도 하였다. 동시에 공산주의적인 문화이론을 세우겠다고, 소위 <문예강화(文藝講話)>의 형식으로 자유로운 문화활동을 탄압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소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성립하여 중국은 공산주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뒤떨어진 농업국가(農業國家)로서의 중국은 토지개혁(土地改革)과 농업의 합작화(合作化), 중공업(重工業)을 중심으로 하는 국영기업의 발전, 자본주의적 상공업(商工業)의 사회주의적 개조 등이 긴급한 과제였다. 아울러 소위 사상개조운동(思想改造運動)이라는 미명 아래 가혹한 지식인 탄압을 계속했다.

영화 <무훈전(武訓傳)> 비판, <홍루몽(紅樓夢)연구> 비판, 후펑(胡風)이나 딩링(丁玲) 비판 및 후스(胡適) 비판 등이 그것이다. 거기서는 봉건적 윤리와 프래그머틱한 연구태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옌안(延安)에서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을 계승하는 문화인 숙청작업을 단행하였다. 경제부문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달성되었다는 1957년 이후,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또한 자기들 내부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는 마오쩌둥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중국 독자의 사회주의 건설이론이 제창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이론대로 자본주의로부터 공사주의로 가는 과도기인 사회주의 사회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 아직도 부르주아지와의 사이의 계급투쟁이 지속하여, '두개의 길(道)'의 투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국가기구(國家機構)를 독점하는 간부(幹部), 전문가, 지식인이 관료주의화(官僚主義化)하여 잔존하는 부르주아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부패(腐敗)가 계속되어, 부르주아적 부활의 위험을 증대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국제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각국 공산당과의 사이에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되고, 국내에서도 이 이론을 기초로 이른바 문화혁명 혹은 홍위병 난동이 추진된 것이다.

마오쩌둥[편집]

毛澤東 (1893∼1976)

중국정권의 수립자. 후난성(湖南省) 시앙단시엔(湘潭縣) 조오산(詔山)에서 중산층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 재래적인 서당 교육으로 기초학문을 닦았다. 그가 신학문(新學問)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성도(省都)인 창사(長沙)에 유학(遊學), 제1 사범학교에 다닐 무렵부터이며 동양적 전제체제(專制體制)를 타파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꾀해야 한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공명, 재학중에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19년, 서구 열강과 일본 등이 중국의 국권을 유린하자 그 항거운동으로 벌어졌던 5·4운동을 계기로 그는 급격히 마르크스주의에 접근,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가, 12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의 하나가 되었으며, 1925년의 5·30 운동 때 중국의 공산화를 위한 농민투쟁을 호소하기도 했다. 1927년, 중산함(中山艦) 사건으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무너지자 그는 후난성에서 무장폭동을 지휘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자 잔여 1천여의 폭도를 이끌고 징장산으로 도주했다.

이곳에서 역시 패잔하여 피신 중이던 주더(朱德)의 공산군벌(共産軍閥) 3천명과 합류,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유격전으로 맞섰다. 이 당시의 유격전술은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赤軍)이 행한 유격전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4년 10월, 국부군(國府軍)과의 대전(對戰)에서 참패, 잔여 패잔병을 이끌고 옌안(延安)으로 탈출하는 이른바 대장정(大長征)을 시작한다. 이로써 그의 세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의 당 중앙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정식으로 당권(黨權)을 장악, 이때부터 그의 사상과 전략이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스스로의 유격전술을 체계화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지구전략(持久戰略)으로 발전시켜 논문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문제>(1936),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1938) 등으로 전략 전술의 사상적 체계화를 꾀했으며, <실천론>(1937), <모순론> <신민주주의론>(1940), <연합 정부론>(1945) 등의 논문으로 중국 공산당의 이념 실천을 지도해 갔다. 1948년 중국 정권수립과 함께 정부 주석에 취임했으며, 59년에 주석 자리를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물려주는 등의 촌극도 벌였으나, 66년의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류사오치의 일당을 권력권에서 추방하였다.

이후 소위 정풍운동(整風運動)으로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린뱌오(林彪)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린뱌오 역시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국외로 탈출하다 사망하였다.

그 뒤 닉슨을 북경으로 초청하는 등 대외적으로 일련의 유화된 정책을 표방하기도 했다.

일대 혼란의 소용돌이를 이룬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던 그의 논문 <인간의 올바른 사상은 어디서 오는가>(1963)에서 제시되었던 그의 경직화된 소위 인민혁명 전략사상이라는 급진적 노선은 그가 죽기 전에 이미 천안문 사건 등 수많은 내적 분규를 야기시켰던 만큼 그의 사망과 함께 일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의 급진노선의 추종을 주장하는 문혁파, 4인방 등을 후계정권인 화궈펑 체제가 일거에 제거한 것 등이 그 뚜렷한 실증이라고 하겠다.

<金 河 龍>

실천론[편집]

實踐論 (1937)

여기서 마오쩌둥은 인식이란 인간의 경험적 감각작용에 의해서 사물의 외면적 현상을 인식하는 감성적 인식과 이러한 감성적 인식을 토대로 하는 개념, 판단 등 사물의 본질, 전체, 내면적 관련을 찾아내는 이성적 인식의 두 과정을 거치는 것이며 이러한 두 단계의 인식은 모두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실천론을 통해서 일본의 침략, 강대한 국민당 세력 등 중국의 외면적 현실만을 중시하여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중국의 현실과 결부된 구체적 실천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공리(空理), 공론(空論)에만 집착하는 좌익 모험주의를 경고하였다.

모순론[편집]

矛盾論 (1937)

여기에서도 그는 모순은 언제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모순의 보편론 및 모든 모순은 각기 특수성을 가진다는 모순의 특수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순은 주요한 모순과 종속적 모순으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항일 민족통일 전선에 관한 그의 입장을 정당화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중국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모순이고 그 외에 국내 각 계층 사이의 모순은 부차적, 종속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신민주주의론[편집]

新民主主義論 (1940)

중국혁명은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단계와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의 2단계를 거쳐야 하며 그 당시 중국은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단계에 있다고 주장, 다만 중국사회에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까닭으로 중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신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서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주장이었다. 이로써 그는 국민당과의 합작을 합리화·정당화하였다.

<金 河 龍>

궈모뤄[편집]

郭沫若 (1892∼1978)

현대 중국의 문학자·정치가. 본명은 개정(開貞), 호는 정당(鼎堂), 모뤄(沫若)는 자(字)이다. 쓰촨(四川省) 쟈딩푸(嘉定府)의 중류 정도의 지주(地主)의 셋째 아들로서 출생하였다. 5세경부터 중국의 고전(四書五經)을 읽었다. 1914년 일본의 규슈대 의학부(九州 大醫學部)에 들어가 근대적인 과학연구 방법을 몸에 익혔다. 이 사이에 시작(詩作)을 시작했으며 1921년에는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하여 낭만주의 문학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국내에서 국민혁명의 기운이 고조되어 1926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개시하자 붓을 버리고 스스로 거기에 참가하였다. 1927년의 국공분열(國共分裂) 후 일본에 망명, 이로부터 10년간 중국 고대사회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새로운 출로(出路)를 탐구한 중국사회연구의 일환으로서 신비(神秘)에 가려져 있던 고대사회를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하였다. 1937년 귀국하여 항일전선(抗日戰線)에 참가하여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중에 극작(劇作)이나 평론 등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 때의 대표작 <굴원(屈原)>은 고대의 위대한 애국시인(愛國詩人)의 말을 빌어서 국민당의 부패 양상을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펑유란[편집]

馮友蘭 (1894∼1990)

현대 중국의 철학자. 호는 지생(芝生). 허난(河南省) 탕허시엔(唐河縣) 사람. 1915년 베이징 대학에 들어갔으며, 1919년 콜럼비아 대학에 유학, 베르그송, 듀이, 러셀에 경도(傾倒)하면서 중국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하였다. 귀국 후 중산대학(中山大學), 옌징대학(燕京大學), 칭화대학(淸華大學)의 교수를 역임, 중국철학사의 강좌를 담당하고 1934년 명저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방법을 적용하여 고대 이래의 중국철학사의 체계화에 성공한 최초의 저술이다. 1939년 발표한 <신이학(新理學)>에서는 송학(宋學)에 새로운 해석을 하여 독자적인 관념론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봄에 있어서 항상 중국 고전철학의 인성설(人性說), 특히 송학에서 근거를 구했다. 당시 국립대학에서는 듀이, 러셀, 베르그송, 칸트 등을 강의하는 사람이 많아 외국사상이 범람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서 그는 동서철학을 종합하면서 중국철학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린위탕[편집]

林語堂 (1895∼1976)

현대 중국의 문학자·저널리스트·언어학자. 푸젠(福建省) 룽시시엔(龍溪縣)에서 출생. 원명은 위탕(玉堂).

상하이(上海)의 센트 존스 대학 졸업 후 미국의 하버드 대학,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 유학하여 언어학(言語學)을 수학하였다. 귀국 후 베이징대학 언어학 교수 겸 베이징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당시 루쉰(魯迅) 등과 함께 군벌반대(軍閥反對)의 논진(論陣)을 펴서 대항하였고, 1926년의 3·18사건 이후는 베이징의 군벌 정부에 반대하여 샤먼(廈門) 대학으로 옮겼으나, 우한(武漢)혁명정부가 성립하자 참가, 외교부(外交部) 비서가 되었다. 우한정부 해체 후에는 상하이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1932년 그는 유머 잡지 <논어(論語)>를 창간했다. 국민당의 극우화(極右化)에 따라서 침체한 문화계에서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펼치는 기지(奇智)에 찬 풍자는 매우 환영받았다. 미국에 건너가서 구미인(歐美人)을 상대로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저작에 착수하여 <아국토아국민(我國土我國民)>(1935), <생활의 발견>(1937), <사랑과 풍자>(1940) 등을 발표하였다.

또 항일전쟁(抗日戰爭) 중에는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1937)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 있다>(1941) 등을 써서 항일(抗日)에 노력하였으며 국민당을 지지하고 반공(反共)의 입장을 점차로 선명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