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청대의 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청대의 사상

[편집]

淸代-思想

1644년 명(明)이 청(淸)에게 멸망되자 명의 유로(遺老)들은 망국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송명이학(宋明理學)이 공소공론(空疏空論)에 흘러버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고염무(顧炎武)는 "이학(理學)이란 말은 송유(宋儒)가 쓰기 시작한 것으로 처음에는 '이학즉경학(理學卽經學)'이라고 하여 5경(五經)에다 근원을 두더니 뒤에 와서는 '이학즉선학(理學卽禪學)'으로 변질하여 어록에만 매달리는 이를테면 공맹유학(孔孟儒學)과는 전혀 다른 학문이다"라고 규정지었다. 안원(顔元)은 "송유를 한(漢)·진(晋)시대의 노불학(老佛學) 집대성자로 보는 것은 가하지만 그것이 요(堯)·순(舜)·주(周)·공(孔)의 정파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정주학(程朱學)을 파제(破除)하면 하는 만큼 공맹학(孔孟學)은 되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여 주자도통론(朱子道統論)의 허구성을 지적한 뒤 그가 끼친 해독은 비상보다도 독했다고 주장, "온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모두 선열과 한묵 속에 유폐시켜 경세치용을 외면한 결과 강토가 이족(異族)의 발에 짓밟히고 생민이 도탄에 빠졌다"고 책임을 물었다. 왕부지(王夫之)는 <독통감론(讀通鑑論)> <송론(宋論)> <황서악몽>에서 한족의 <문약지병(文弱之病)>을 통탄하고 양명학(陽明學)의 말류(末流)들이 끼친 광선(狂禪)의 폐(弊)를 공박했다. 한편 황종희(黃宗羲)·이공·대진(戴震)은 정주이학의 2원론이 기질인욕면(氣質人欲面)을 너무 폄억(貶抑)하여 행동 세계를 위축시켰다고 비평했다. 특히 대진은 자기를 맹자에 비겨 위도자(衛道者)로 자임, "송 이래로 유자들은 망령되게 마구 인용해다가 공맹을 해석하여 진의를 어지럽혔다"고 지적, "이에 조금 가까워지면서 진을 크게 어지럽혔다(彌近理而大亂眞). 이로 사람을 죽였다(以理殺人)"라고까지 죄역시했다. 아무튼 청초에 일어난 실학사상은 송명이학에 대한 일대 반발로서 선진(先秦) 유학으로 복귀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행동세계를 긍정하고 현실을 개조하는 <경세치용>이 주안이었다.

이와 같이 청초 사상의 동기가 망국의 비분 속에서 자각된 민족정기와 역사의식이었으므로 그 목적은 자연 한족의 문약과 물빈(物貧)을 구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송명이학을 수정하여 현실 행동 세계를 긍정하고 창발하는 데 맞는 이론체계를 세우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왕부지는 본체와 현상을 2개사로 보는 것을 사변 세계에선 가능하나 실재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체용이 이미 동재하고 호체호용(互體互用)의 관계에서 다른 현상으로 전개된다는 <체용일원론(體用一元論)>과 실패하는 것은 현상 세계뿐이며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과정의 연속이라 하여 <실유생동론(實有生動論)>을 세웠다. 특히 현세에서 창조 중추가 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여 그의 능생력(能生力)을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인간 중심론이 나왔다. 이렇게 하여 종전의 현상에서 본체에로 지향되던 노불정주학(老佛程朱學)의 협애한 영역을 다시 현상에서 현상으로 미래지향적인 광활한 영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 현상 세계와 그 중심이 되는 인간을 긍정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같이 장횡거(張橫渠)의 기론을 이어 유종주(宗周)는 "천지간에 차 있는 것은 기(氣)뿐이며, 이는 기(氣)의 변화를 질서지어주는 것으로서 이(理)는 기의 이(理)요, 결코 기에 선재(先在)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왕부지는 "도는 기(器)의 도요, 도의 기란 있을 수 없다"하여 실재는 실존에 선재한다는 설을 주장하고, 따라서 <심(心)·성(性)·천(天)·이(理)는 모두 기(氣)를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기가 무(無)라면 이들은 모두 무라>고 하여 이원론을 극복하였다. 현실세계와 인간이 긍정되는 데 보다 중요한 것은 선악문제다. 이에 안원은 '이기가 다같이 천도(天道)요, 성현이 다같이 천명(天命)이다. 인간의 성명과 기질에 차등은 있으나 이 역시 모두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질의 정(正)이 바로 성명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악은 다만 인(引)·폐(蔽)·습(習)·기(氣)에서 오는 외재적인 것이다' 하여 기질인욕(氣質人欲)에 대한 종전의 혹악관(惑惡觀)을 뒤엎었다. 나아가서 대진은 <현실 세계를 영위하는 인간의 지(知)·정(情)·욕(欲)을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제지하는 것은 인간을 말살하는 역리 행위라고 하였다. 인간은 정에서 동한 욕구를 타와 충돌되지 않고 조화시키면서 수행(遂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그것이 지식이며 성인의 학이다. "선(善)은 필연이며, 성(性)은 자연이다. 필연으로 돌아가 자연에 적합되도록 하는 것을 극치라고 한다. 이에 이르러 천지인물의 도는 비로소 완비를 기한다"고 보고 "인간은 천지 지성의 징(徵)이며 그것을 실천한 자가 성인이다"라고 인간 성취가 인욕의 달관에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안원은 <간황(墾荒)·균전(均田)·흥수리(興水利)> 7자로 천하를 부(富)하게 하고 <인개병(人皆兵)·관개장(官皆將)> 6자로 천하를 강하게 하여 <거인재(擧人材)·정대경(正大經)·흥례락(興禮樂)> 9자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학사상은 청조의 고압 정책에 눌려 통경(通經)면은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치용면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학>을 타도한 것 외에 아무런 공효(功效)도 없으며 그 후로는 학자들이 안일에 빠져 철학사상이 배제된 고증학을 연구하고 또 청조의 문화정책에 말려들어 철학사상에 일대 공백을 가져왔다.

<金 忠 烈>

명의 유로들

[편집]

明-遺老- 명말(明末) 양명학(陽明學)의 공론적 경향(空論的 傾向)을 비판하고, 학문이란 실제의 정치·사회에 유용한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신학풍(新學風)을 개발함과 동시에 명조에 이어 중국(中國)을 지배하려고 한 만주인(滿洲人)의 청조(淸朝)에 대하여 격렬한 반청반만(反淸反滿)의 민족의식 속에서 직접 명조 회복(明朝回復)을 위한 군사행동에 투신한 일군(一群)의 사대부(士大夫)·학자(學者)들. 그들은 청조(淸朝)의 통치가 확립된 후에도 반청(反淸)의 민족감정 속에서 명조(明朝)에의 절조와 결백을 지켜 청조에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흔히 명의 유로(遺老) 또는 유신(遺臣)이라고 호칭된다. 그들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은 ① 손기봉(孫奇逢) 등과 같이 일상생활의 행동·실천에 중점을 두는 입장, ② 서광계(徐光啓) 등과 같이 서양과학(西洋科學)의 방법론을 채택하여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세상에 유용하게 하려는 입장, ③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등과 같이 경학사학(經學史學)의 연구에 의하여 얻은 지식을 실제 사회에 유용하게 펴도록 하려는 입장 등 여러 형태였다. 특히 ③의 3인의 학자는 청초(淸初)의 3대유(三大儒)로 불린다. 그들의 경학 사학의 겸수(兼修), 객관적·실증적 방법론(實證的方法論)에 의한 학풍은 후의 청조 고증학(考證學)으로 가는 출발점이 될 요소(要素)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서 그들이 청조 고증학의 선구자라고 간주됨은 그 때문이다. ②의 입장도 그 과학적·실증적인 방법론에 의하여 고증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황종희

[편집]

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학자·사상가. 저장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의 사람. 자(字)는 태충(太沖), 호(號)는 남뢰(南雷)·이주(梨州). 부친은 동림당(東林黨)원으로, 그의 소년 시절에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의 모진 탄압으로 인하여 옥사(獄死)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은 명말(明末), 극도의 정치불안 속에서 그의 사상과 행동에 일찍부터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하였다. 청년시대, 소동림(小東林)으로 불리는 문학적(文學的) 결사(結社)인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정의한(正義漢)으로서의 면목을 발휘하였다.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명조(明朝)가 멸망하고 중국(中國)이 혼란한 틈을 타 청군이 침입하자, 그는 향리의 자제들을 규합하여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반청(反淸)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청조(淸朝)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명조 부활의 희망이 없어지자 그는 향리로 돌아가서 학자 생활에 전렴하였다. 그는 강희제(康熙帝)가 전대(前代)의 명조(明朝) 유신(遺臣)을 회유우대(懷柔優待)하기 위하여 1678년(康熙17年)에 행한 박학홍유(博學鴻儒)로 추거(推擧)함을 거절했으며, 또한 동년 명사관(明史館)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은 채 절조를 지켜 이민족 왕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종주(劉宗周)를 스승으로 삼아, 양명학(陽明學)의 전통을 승계하였으나 공리공론을 배제하며 객관적 사실을 중히 여겼다. 또한 사학에도 전심하여 경학사학(經學史學)의 겸수(兼修)에 의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學風)을 개발하여 청조(淸朝)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등이 있고, 그 학파(<浙東學派> 浙江의 東에서 나온 학파의 뜻)에서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우수한 사학자(史學者)가 나왔다.

명이대방록

[편집]

明夷待訪錄

중국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사상가인 황종희가 저술한 정치론 서적. 1권임. 1663년(康熙2)에 나왔다. 명이(明夷)라는 것은 역(易)의 괘명(卦名)으로서 '밝은 것이(明) 손상된다(夷)'를 뜻하며, 현신(賢臣)이 암군(暗君) 밑에서 명지(明知)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상(事象)을 가리킨다.

<대방(待訪)>이란 명군(明君)이 나타나서 유덕(有德)한 선비에게 천하를 통치하는 대법(大法)을 묻고자 그 내방(來訪)을 기다림을 뜻한다. 황종희는 지금은 명이(明夷)에 해당하는 세상이나, 장차 명군(明君)의 출현에 의하여 유덕(有德)한 선비의 치세대법(治世大法)이 소생하리라는 기대하에 본서(本書)를 이와 같이 명칭했다. 내용은 원군(原君)·원신(原臣)·원법(原法)·치상(置相)·학교(學校)·취사(取士) (2編)·건도(建都)·방진(方鎭)·전제(田制) (3編)·병제(兵制) (3編)·재계(財計) (3編)·서리(胥吏)·엄관(奄官) (2編)의 13목 21편으로 되어 있고, 각목(各目)을 통하여 명대(明代) 전제 체제(專制體制)의 악폐가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의 이상(理想)과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구체적 정책론을 펴고 있다. 본서(本書)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광범한 지식에 근거하여 저술된 것으로서, 독선적인 군주전제를 반대하고 인민을 위한 정치를 강조한 점에서 혁명적이라고도 할 만한 성격을 갖고 있다. 후에 청말(淸末)의 개량파(改良派), 혁명파(革命派)는 이것을 프랑스의 루소에도 비교할 만한 민주주의, 혁명주의의 저서로 크게 취급하여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 불렀다.

명유학안

[편집]

明儒學案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사상가인 황종희의 저서. 전체 62권으로서 1676년(康熙15) 이후에 완성 되었다. 명1대(明一代)에 강학(講學:禪宗的인 直觀을 중히 여기고 문답이나 강연식으로 학문을 논하는 학풍)의 제가(諸家)의 문집(文集)·어록(語錄)을 탐구하고, 그 학문의 계통을 변별(辨別)하여 본서(本書)에 수록하였다. 내용은 오여필(吳與弼)로부터 유종주(劉宗周)까지의 196인의 학자를 숭인학안(崇仁學案)·백사학안(白沙學案)·하동학안(河東學案)·삼원(三原)학안·요강(姚江)학안·절중왕문(浙中王門) 학안·강우왕문(江右王門)학안·남중왕문(南中王門)학안·북방왕문(北方王門)학안·민월왕문학안·지수(止修)학안·태주(泰州)학안·감천(甘泉)학안·제유(諸儒)학안·동림(東林)학안·즙산 학안의 16학안(學案)으로 나누어, 각 학자에 대하여 각기 학안의 처음에 그 전기를 기술하고 다음에 학설을 요약하고 최후에는 비판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형식으로서는 각 학자의 학설을 평범하게 나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이나 배열 속에 그들의 학문에 대한 황종희의 평가(評價)가 보인다. 본서 이전에 이미 동종(同種)의 저작으로서 주여등(周汝登)의 <성학종전(聖學宗傳)>(明末), 손기봉(孫奇逢)의 <이학종전(理學宗傳)>(淸初)이 있었으나 황종희는 이것들에 불비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본서를 저작한 것인데, 중국 최초의 체계적 학술서로서 정평이 있다.

고염무

[편집]

顧炎武 (1613-1682)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학자·사상가. 강소성(江蘇省) 곤산현(崑山縣)의 사람. 자(字)는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사서(史書)를 넓게 읽어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깊게 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능숙하여 청년시대에 명말의 대표적인 문학결사(文學結社) <복사(復社)>에 참가하여 문명(文名)이 칭송되었다.

명조의 멸망을 틈타서 청군(淸軍)이 화북(華北)을 지배하고 다시 화중(華中)에 진공(進功)하여 올 때 그는 명조(明朝) 회복의 뜻에 불타 반청(反淸) 저항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조의 중국 통치가 확립된 후로는 명조에의 절조(節操)와 반청(反淸) 민족의식을 지켜 청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민간인으로서의 학구 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 화중(華中) 화북(華北)의 각지를 역유(歷遊)하며 지인(知人)을 심방하고 학문을 논하는 등, 독서와 저술에 전력을 경주하였고, 청조(淸朝)의 잦은 초빙을 그는 고사(固辭)하였으며 섬서성(陝西省) 화음(華陰)의 가우에(假寓)서 죽었다. 그는 주자학자로서 출발하였으나, 그 공담적(空談的)인 경향에 반대하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의 광범한 연구를 통해 학문의 실제 사회에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신학풍을 열어 놓았다. 이른바 명(明), 유로(遺老)의 대표적 인물로서 그 학자적 태도와 학문의 위대함, 그 위에 기절(氣節)의 고매함에 있어서, 동시대의 황종희, 왕부지(王夫之)와 공통성이 많았으므로 아울러 청초(淸初)의 3대유(三大儒)라고 불렀다. 그의 저작은 경학(經學)·사학(史學)·문학(文學)을 위시하여 많은 분야에 걸쳐 있는데, <일지록(日知錄)> <천하국군이병서(天下國君利病書)> <음학오서(音學五書)> 등은 그 대표작이다. 특히 이들 속에 나타난 정밀한 고증(考證)으로 그는 청대(淸代) 고증학의 개조(開祖)로 호칭될 만하다.

일지록

[편집]

日知錄

명말 청초의 학자인 고염무(顧炎武)의 저서이다. 32권으로 1676년(康熙15)의 작품인데 그의 사후인 1695년(강희34)에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본서는 고염무가 평생 독서하여 얻은 바를 수시로 필기한 것이므로 <일지록(日知錄)>이라고 이름하였다. 독서잡기(讀書雜記)식으로 짧은 논문을 수록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구성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이들 논문은 1-7권이 <경의(經義)>, 8-12권이 <정사(政事)>, 13권이 <세풍(世風)>, 14·15권이 <예제(禮制)>, 16·17권이 <과거(科擧)>, 18-21권이 <예문(藝文)>, 22-24권이 <명의(名義)>, 25권이 <고사진망(古事眞妄)>, 26권이 <사법(史法)>, 28권이 <주서(註書)>, 28권이 <잡사(雜事)>, 29권이 <병(兵) 및 외국의 사(事)>, 30권이 <천상술수(天象術數)>, 31권이 <지리(地理)>, 32권이 <잡고증(雜考證)>으로 부분별로 편찬되어 있고, 자연(自然)·인문(人文)의 모든 분야(分野)가 망라되어 있다. 고염무는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와 함께 청초의 3대유(三大儒)로 불리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실제의 정치사회에 필요한 학문)을 제창한 소위 명(明)의 유로(遺老) 중 대표적 인물로서 본서 또한 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서 저작된 것이다. 수록된 제 논문(諸論文)은 한가지 일마다 반드시 그 시종(始終)을 분명하게 하고 이동(異同)을 철저히 궁구한다는 정밀한 고증(考證)을 시도한 것으로 완성되기까지는 30여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본서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이것을 일관하는 정밀한 고증(考證) 속에 청조 고증학의 맹아(萌芽)가 엿보인다.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은 황여성(黃汝成)이 제가(諸家)의 말을 수집하여 만든 주석서(註釋書)이며, <일지록지여(日知錄之餘)>는 <일지록(日知錄)>에 미수록된 글이 수집되어 있다.

청조 고증학

[편집]

淸朝考證學

명대(明代) 중기 이후 극도로 융성(隆盛)한 양명학(陽明學)은 개인의 마음의 연구, 수양을 중심 문제로 하여 주관적·직관적 방법론을 존중하였다. 이 같은 양명학(陽明學)의 공론적 경향(空論的 傾向)은 명말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고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명의 유로(遺老)들이 명말로부터 청초에 걸쳐서 제창(提唱)한 경세치용의 학문은 실제(實際)의 정치·사회에 대한 학문의 역할을 중시(重視)하고, 경학(經學)·사학(史學)에 비추어 객관적·실증적으로 그들의 이상(理想)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책을 논하는 것이었다. 학문의 대상이 이와 같이 개인의 내면적 문제에서 외면적인 정치·사회의 문제로 전환하게 된 배후에는 명말의 정치적 혼미, 사회적 변동, 그리고 이민족 만주인(滿洲人)의 중국 침입과 지배라고 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적 사태가 있었다. 따라서 유로들의 경세치용 의식에는 반만반청(反滿反淸)의 강한 민족의식이 수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경세치용의 학문은 청초에 걸쳐 청초의 3대유(三大儒)로 불리는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王夫之) 등에 계승되어 그들의 경학·사학(史學)에 관한 탁월한 연구업적 속에서 결실되었다. 황종희의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 <음학5서(音學五書)>, 왕부지(王夫之)의 경학(經學)에 관한 제연구 등에 나타난 객관적·실증적 태도는 뒤의 청조 고증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학(經學)·사학(史學)의 연구가 그 본래의 형태대로 고증학으로 발전하여 간 것은 아니었다. 청조의 지배가 확립되고 중국의 정치 사회의 안정이 실현되는데 따라, 또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의 3대에 걸친 '문자(文字)의 옥(獄)'이라고 하는 필화사건이나 '금서(禁書)' 등의 사상탄압 정책에 의하여 청초의 학풍에서는 경세치용적 요소도 반만(反滿) 민족의식도 차차 표면적으로는 그 모습이 소멸되고, 오직 실증적인 측면만이 발전하여 건륭으로부터 가경(嘉慶)에 걸친 고증학 전성시대를 현출(現出)시킨 것이다. 고증학은 전기(前記)청초의 3대 유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말의 심학(心學)의 공론적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한대(漢代) 훈고학의 복귀를 목표로 한학(漢學)의 기치(旗幟)를 들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을 모토로 하였다. 그 중심은 문헌학(文獻學), 언어학 연구에 있다. 청초 고증학은 개조(開祖)라고 불리우는 고염무(顧炎武)에 이어 염약거, 호위(胡渭) 등이 그 기초를 굳혔고, 전성기에 들어서면 순수한 한학(漢學)을 개척한 쑤저우(蘇州)의 혜동(惠棟)과 그 계통의 여소객(餘蕭客), 강성(江聲),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吳派, 蘇州學派), 고염무의 학풍을 받고 다시 천문역산(天文曆算)·예제(禮制)의 학에 뛰어난 안후이(安徽)의 강영(江永)과 그 계통의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仁之) (晥派-安徽學派), <4고전서(四庫全書)>의 발기자인 북경의 주균(朱筠), 그것을 완성시킨 기균(北方의 學), 그밖에 대관료(大官僚)로서 고증학의 집대성자인 완원(阮元) (揚州의 學) 등 각지에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다채로운 학풍을 겨루었다. 청말(淸末) 민국(民國)초의 유명한 혁명가인 장빙린(章炳麟)은 청조 고증학 최후의 대가(大家)이다. 한편, 고증학의 한학적인 방법론에 대하여,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의 방포(方苞)는 송대의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당송8가문(唐宋八家文)'의 고문(古文)을 이상(理想)으로 하는 학풍을 열었다. 이 학풍은 동향 사람인 요내에 의하여 확립되고, 다시 청말의 증국번(曾國藩)과 진례(陳澧), 주차기(朱次埼) 등에 승계되었다. 이 학파를 동성파(桐城派)라고 한다. 청대 고증학의 역사적 특질은 그 비정치적인 성격에 있었기 때문에 청대중기(淸代中期)에서 말기에 이르는 청조의 정치적·사회적 곤란이 격화함에 따라 전성(全盛)을 극한 고증학도 차츰 쇠퇴하고 새로이 경세치용의 학문으로서의 공양학(公羊學)이 대두하게 되었다.

염약거

[편집]

(1636-1704)

청초의 학자, 산이성(山西省) 태원(太原) 사람으로 자(字)는 백시(百詩), 호(號)는 잠구(潛邱). 장쑤성(江蘇省) 회안(淮安)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대에 그다지 명민(明敏)한 성질은 못 되었으나, 발분하여 경학(經學)·사학(史學)의 연구에 노력을 거듭하여 점차로 학자적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 30대 중반기, 고염무(顧炎武)가 태원(太原)을 방문하였을 당시 그의 명저(名著)인 <일지록(日知錄)>의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하여 쾌히 받아들여졌다. 그후 향시(鄕試),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康熙帝가 明의 遺臣을 외유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별 임용제)의 시험에 모두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학문적 명성은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북경에 머물러 서건학(徐乾學)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후에 그가 총재가 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편찬사업에 가담하였고, 만년에는 그 뛰어난 학식에 의하여 안친왕(安親王) 마이혼(馬爾渾)의 후대(厚待)를 받았다. 그는 주자학을 하였지만 이것에 맹종하지 않고, 청년시대부터 20여년에 걸친 <고문상서(古文尙書)>(東晋 때에 나왔다 古體의 文字로 쓰여진 것으로 25編)의 면밀한 검토를 통하여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함으로써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위작(僞作)임을 증명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논증은 그때까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으로 되어 있던 유교 경전(儒敎經典)에 대하여 객관적 실증적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서 청조(淸朝) 고증학 발전의 초석(礎石)을 이루는 것이다. 그밖에 <4서석지(四書釋地)> <잠구답기> 등의 저서가 있다.

기의 철학

[편집]

氣-哲學

기(氣)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송대(宋代) 이후의 이기철학(理氣哲學=道學)에 있어 주자학이 기(氣) 보다도 이(理)를 중히 여기는 <이(理)의 철학>인데 반하여, 반대로 이(理) 보다도 기(氣)를 중시하여 기에 의하여 일체의 존재를 설명하는 철학을 의미한다. 이 철학을 완성한 것은 청조(淸朝) 고증학의 대가(大家) 대진(戴震)이었다. 주자(朱子)는, 우주 만물의 성립을 이(理)와 기(氣)에 의하여 설명하였지만, 기(氣)에 의하여 만물이 발생할 경우 이미 거기에는 기(氣)에 대한 이(理)의 규제(規制)가 작용하고 있다 함과 같이, 명확히 이(理)를 기(氣)보다 훨씬 우위에 놓았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주자(朱子)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본연의 성(性)과 기질의 성(性)으로 나누어, 전자를 순수지선(純粹至善)한 것으로, 후자(後者)에 뿌리박은 정(情)이나 욕(欲)을 악(惡)의 근원(恨源)으로 삼아, 후자는 전자에 의하여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대해 대진(戴震)은 일체의 최고원리(最高原理)로서의 이(理)를 인정하지 않고 이(理)를 자연히 존재하는 것 즉 기(氣)의 완전한 상태라고 생각하여, 일체를 기(氣)에 의하여 설명하였다. 인간의 성질에 대해서도 주자(朱子)와는 반대로 '기질(氣質)의 성(性)'만을 참된 성(性)으로 생각하고, 정(情)이나 욕(欲)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여 이것을 정당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실현시키는 일이 주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진(戴震)의 저서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은 이 기(氣)의 철학에 관한 저작이다. 기(氣)의 철학은, 송의 장재(張載)가 만물의 생성을 '기(氣)'의 집산(集散)에 의하여 설명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한 데 유래하지만 일관된 계통으로 계승되면서 발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명 중기의 나흠순(羅欽順)에서 시작되고 그후 왕정상(王廷相), 왕기(王畿) 등을 거쳐, 명말(明末)의 당학징(唐鶴徵) 등에 이르러 거의 명백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理)를 기(氣)의 정당한 상태로 보는 사고방식이 일어나 정·욕을 긍정하는 태도가 취하여지게끔 된 것은 명말이 되어서의 일이다. 명말에서 청초에 걸쳐 기(氣)의 철학은 이른바 명의 유로(遺老)들에 의하여 지지되고 정욕긍정의 주장도 더욱 발전하였다. 그들 중에는 청초의 대유(大儒)라고 일컬어지는 황종희 왕부지 안원(顔元)등이 있었다. 고염무의 주장에도 이 철학에 가까운 것이 있다. 청초의 발전은 다시 청중기(淸中期)의 정정조(程廷祚)에 인계되고, 대진(戴震)에 의하여 대성되었다. 대진 이후 기(氣)의 철학의 발전은 보지 못하였으나, 고증학자(考證學者)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초순(焦循), 완원(阮元)에 이르렀다. 그 후는 거의 주목할 만한 것이 없고 청말 민국초에 혁명가 장빙린(章炳麟)에 의하여 다시 강조되었다. 기(氣)의 철학은, 이것을 주장한 전기(前記) 학자의 대부분이 역사상의 변혁기를 배경으로 출현했고, 다소간 지배권력의 압박하에 고생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적(傳統的) 체제(體制)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사상이었던 것 같다.

왕부지

[편집]

王夫之 (1619-1692)

중국 명말(明末) 청초의 사상가·학자. 호남성(湖南省) 형양현(衡陽縣)의 사람. 자(字)는 이농(而農), 호(號)는 강재(薑齋).

만년(晩年)에 형양(衡陽)의 석선산(石船山)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으므로 선산선생으로도 호칭되었다. 일찍부터 영재(英才)라는 칭찬이 높았고 청년시대에 향시(鄕試)에 우등(優等)으로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나아갈 기회가 없던 중에 명(明)이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향리(鄕里), 광둥(廣東), 광시(廣西)의 각지에서 반청(反淸) 저항운동을 하였으나, 명조 회복의 희망이 없는 것을 깨닫고 은퇴하였다. 이 시기에 스스로 체험한 사실(史實)을 기록한 것이 그의 저술 <영력실록(永曆實錄)>이다. 그 후 그는 반만(反滿) 민족의식과 명조에의 절조(節操)를 지켜 청조에 벼슬하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며 고고(孤高)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학문은 다른 명의 유로(遺老)들과 같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 입각한 것으로서, 경학(經學)·사학(史學)·문학(文學) 등의 제 분야에 통달하고 있었다.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입장에서 4서5경(四書五經)을 연구하여 독자적 견해를 부가하고 <주역외전(周易外傳)> 등을 저작하였다. 노장(老莊), 불교사상(佛敎思想)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노자연(老子衍)> <장자해(莊子解)> <상종낙색(相宗絡索)>의 저작은 그의 사상의 철학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독통감론(讀通鑑論)> 및 <송론(宋論)>은 우수한 사론(史論)이며, <황서(黃書)>는 강렬한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입각한 정치론이다. 그의 저서에는 화이변별(華夷辨別)의 사상을 강조한 것이 많다. 그 후 청말의 개량파 및 혁명파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시문에도 능하였다. 특히 <석당영일서론(夕堂永日緖論)>의 시론(詩論)은 높이 평가된다. 저술의 대부분은 같은 호남(湖南)의 후학인 증국번(曾國藩)이 간행한 <선산유서(船山遺書)>에 수록되어 있다.

독통감론

[편집]

讀通鑑論

명말 청초(淸初)의 학자 왕부지(王夫之)의 저서. 30권. 본서는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여 역대의 사실(史實)을 논평한 것으로, 군주의 전제에 반대하여 자유 평등을 역설(力說)하고, 정치·경제·문화의 전반에 걸쳐 탁월한 사론(史論)을 전개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명조 쇠망에 대한 침통한 개탄의 심정이 담겨 있다. 이 속편(續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송론(宋論)>으로서, 송조일대(宋朝一代)의 흥망을 논평한 것이다. 왕부지는 이른바 명의 유로의 대표적 인물로서, 경학과 사학의 연구에서 얻은 지식을 실사회(實社會)의 문제해결에 활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황종희, 고염무 등과 함께 청초의 3대유로 일컬어지며 그들의 사론에는 공통점이 많다.

안원

[편집]

顔元 (1635-1704)

중국 청초의 학자. 직례성(直隷省) 박야현(博野縣) (현재의 河北省 安國縣에 속함)의 사람. 자(字)는 역직(易直)·혼연(渾然), 호(號)는 습재(習齋). 어려서부터 역경에서 성장하고, 과거(科擧)에도 급제(及第)하지 못하고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면서 육왕학(陸王學) 외에도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않고 드디어 독자의 복고적(復古的)·실천주의적(實踐主義的)인 학문을 수립하였다. 그의 저서 <사존편(四存編)>은 공맹(孔孟)의 학문에 관하여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경세치용의 실학(實學=현실의 정치·사회에 소용되는 실제적인 학문)을 제창하고 <4서정오(四書正誤)>를 저술하였다. <습재기여(習齋記餘)>는 그의 문집이다. 그의 학문은 제자인 이공, 왕원(王源) 등에 계승되었으나, 그 철저한 실천주의로 하여 그다지 공명자(共鳴者)를 얻지 못하고 왕원(王源)에서 단절됐으나 청말에 이르러 대망(戴望)에 의하여 부활되었다.

대진

[편집]

戴震 (1724-1777)

중국, 청대 중기(中期)의 학자. 안휘성(安徽省) 휴령(休寧) 사람. 자(字)는 신수(愼修), 호(號)는 동원(東原). 소년시대 빈한한 생활 속에서 주위의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책을 빌어 고전(古典)의 지식을 넓혔다. 20세 때 강영(江永)에 사사(師事)하여 수학(數學)·음운학(音韻學)·예학(禮學)을 배우고, 얼마 후 최초의 작품인 <책산(策算)>을, 그리고 이어서 예(禮) 중에서도 가장 난해(難解)한 <고공기(考工記)>를 도해주석(圖解註釋)하여 <고공기도(考工記圖)>를 만듦으로써 후년에 명성을 높였다. 30세 초반 북경(北京)으로 이사하고 전대흔(錢大昕)과 지면(知面), 그의 추천(推薦)으로 진혜전(秦惠田)의 <오례통고(五禮通考)>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기균, 주균(朱筠), 왕명성(王鳴盛), 노문초 등의 소장(小壯) 유위(有爲)의 학자들과 교유(交遊)하여 그들의 지우(知遇)를 얻었다. 그후 양회염운사 노견증(盧見曾)의 초빙으로 수년간을 양주(揚州)에서 보냈으며, 이동안 한학(漢學)의 대가(大家) 혜동(惠棟) 등과 알게 되었다. 40세에 거인(擧人)이 되고 그 후 <직례하거수리서(直隷河渠水利書)> <분주부지(汾州符志)> <분양현지(汾陽縣志)>의 편찬과 <수경주(水經註)>의 교정 등에 종사하였고, 50세에 <4고전서(四庫全書)> 찬수관(纂修官)에 임명되어 경서부(經書部)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수경주(水經註)>의 교정을 완료하고 계속하여 수년간 사고관(四庫館)에 재직 중 죽었다. 그는 고증학(考證學)의 대가(大家)임과 동시에 우수한 이론가였다. 문자(文字), 음운(音韻), 훈고의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경서(經書)를 해명하고, 거기에 옛 성현의 도(道)를 찾아본다면 하는 고증학적인 경학방법론(經學方法論)을 주창하여, 고증학의 체계적인 기초이론을 수립하였다. 또한 주자(朱子)의 이(理)를 중(重)히 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에 반대하여 기(氣)의 철학을 주장(主張)하고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저작하여 객관적·실증적 방법론에 입각한 기(氣)의 철학의 이론 체계를 세웠다. 그의 학문분야(學問分野)는 극히 광범위하여 전기(前記)한 바 외에 많은 저서가 있으며, 그 문하에서 단옥재(段玉裁)·왕념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 등의 우수한 고증학자가 나왔다. 강영(江永)에서 시작되고, 대진(戴震)에 의하여 체계화되어, 단옥재(段玉裁) 등에 승계된 학문의 계통을 완파(晥派:安徽學派)라 한다.

맹자자의소증

[편집]

孟子字義疏證

청 중기(淸中期) 고증학자인 대진(戴震)의 저서.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다. 대진(戴震)은 주자(朱子)가 완성한 이기철학(理氣哲學:道學)이 본질적으로 기(氣)보다도 이(理)를 중(重)하게 여기는 이(理)의 철학이며, 사람의 성(性)에 대하여서도 의리(義理)의 성(性)을 말하고 기질(氣質)에 뿌리박은 정(情)이나 욕(欲)을 악(惡)의 근원(根源)으로 삼아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한 데 대하여 기(氣)의 철학(哲學)을 주장, 기질의 성(性)만을 성(性)으로 생각하고 정(情)이나 욕(欲)을 정당한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하였다. 그의 기(氣)의 철학에 관한 대표적 저작이 본서(本書)이다. 본서는 주자(朱子)의 문하(門下), 진순(陳淳:號는 北溪)의 저작인 <성리자의(性理字義)>(<北溪字義>)의 체재를 따라 맹자(孟子)의 글에 대하여 많은 고전(古典)의 용례(用例)를 근거로, 그 의미를 탐색하여 송대의 정주학자(程朱學者)의 오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객관적·실증적 방법론에 의거한 정주학(程朱學)의 비판이며 그 위에 구성된 철학 이론이다. 이러한 점(点)은 명대(明代) 심학(心學)의 주관적(主觀的)·직관적(直觀的) 사유(思惟)와는 전연 대조적인 청조(淸朝) 고증학의 입장(立場)을 반영하고 있어, 참으로 고증학의 대가(大家) 대진(戴震)의 저작이라 할 만하다.

본서는 이와 같이 고증학적 방법론에 의하여 송학(宋學) (程朱學)파의 이론적 근거를 전복시킴으로써 그들의 학설에 큰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정통관학(正統官學)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기(氣)의 철학을 확립함으로써 상층의 권력자에게 억압된 하층 사대부(士大夫)나 국민의 입장을 주장하는 역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