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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과학사상 〔槪說〕
[편집]고려의 과학과 기술은 통일신라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던 우리나라 고대 과학기술과 송(宋)·원(元)시대의 중국 과학기술을 이어받은 가운데, 그들 나름의 흐름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사상 색다른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아라비아와의 교역을 통한 이슬람 과학문화의 영향은, 조선 왕조에 이르러 세종대(世宗代) 과학기술의 발전에 고려 과학이 직접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새로운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또 고려의 과학은 고대로부터 이어 내려와 훌륭하게 꽃피운 신라의 과학과 기술을 잘 보존하여 조선에 물려 주었다는 것과 그것이 귀족문화 속에서 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운데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의 기술적 발전을 태표하는 목판인쇄와 고려청자는 그러한 귀족문화의 소산이었다. 사실 고려 목판인쇄는 인쇄의 기술사적 의의보다도 송판본(宋板本)을 몹시 좋아하는 지배층의 귀족적 취향을 충족시키려던 서예적이고도 서지적인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청자도 역시 고려 귀족들의 향락생활을 위해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기술적 소산이었다. 그것도 송자(宋磁)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한 것이지만, 그 기술은 송자의 제조기술을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아름다움을 창조하였다. 특히 고려인들이 자기에 상감법을 쓴 독특한 수법은 도자기 제조기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특기할 만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학문적인 면에서는 기술분야에서처럼 특이한 점이 뚜렷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고려의 과학은 언제나 중국의 발전을 꾸준히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은 이론적인 새로운 발전은 없었지만,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서는 꾸준히 업적을 쌓아 나갔다.
천문학과 역학
[편집]天文學-曆學
천문학과 역학도 확실히 그 실용성이라는 사회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천제 관측이 고려에서 발전하였다. 그렇다고 그 관측기계가 특히 훌륭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한 마디로 고려 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발달과 역계산(曆計算)을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 관측기록은 독자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천문지(天文志)> 등에 집약된 관측기록을 보면 고려인(高麗人)들은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운행,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중심으로 태양흑점과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을 관측하기에 힘쓴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중에는 132회에 걸친 일식의 관측이 있으며, 87회의 혜성 출현을 관측했다.
특히 1024년에서 1383년 사이에 34회에 걸친 태양 혹점의 관측은 주목할 만하다. 흑점도 자수정(紫水晶)으로 관측했는데 11세기에 이미 태양 흑점이 8년 내지 20년을 주기로 관측되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업적이다. 1343년 강보(姜保)가 편찬한 수시력(授時歷) 계산의 조견 수표(早見數表)인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이 출판되었다. 이 수표는 고도의 수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고려인의 손으로 수시력(授時歷)이 정확하게 계산되었다는 사실은 고려에서 이미 수시력의 이론과 그 계산법을 통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천문 관측과 함께 기상 현상의 관측도 꾸준히 행해지고 있었다. 고려사 오행지(五行志)는 그 결과를 모은 것이다. 거기에는 지진·비·바람·우박·서리·구름 등에 관한 것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기상관측이라기보다는 5행사상(五行思想)에 입각한 자연의 재상(災祥)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고려인들은 자연에서 일어난 재상이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5행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중요시했다.
지리학
[편집]地理學
신라 말에 형성된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불교에 대한 종교적 신앙심과 연결되어 고려 왕조를 일으킨 태조의 정치이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다. 불교와 풍수지리설에 관한 이와 같은 태조의 신앙심은 마침내 불교가 고려의 국교가 되게 했고, 반대로 풍수지리는 일종의 미신화하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고려의 지리학자들은 12세기경까지는 거의 오늘의 한반도의 윤곽에 가까운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어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지구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그 중심이 되는 것이었거나 동양 중세의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이른바 오천축국(五天竺國)에 걸친 것이었다. 또 고려에서는 원(元)을 통한 이슬람 지도 제작법도 영향이 미치고 있었으며, 고려인들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직접교역을 통하여 아라비아와 중동지역의 지리적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의학
[편집]醫學
신라 의약의 지식을 그대로 계승한 10세기 고려의 의약학은, 불교의 융성에 따라 인도 의약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 뒤에는 아라비아 의약과 그 지식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신라로부터 계승한 당(唐)의 의약학의 지식과 송(宋)과의 교유에서 얻은 송의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두 개의 국립 의학교가 창립되었고, 958년에 시작된 과거제(科擧制)에는 의학부문이 포함되었다. 1058년에는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을 비롯한 8종의 중국 의서(醫書)들이 간행되었다. 12∼13세기에 이르면서 고려에는 몇 가지 고려인에 의한 의서가 저술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국내산 약제에 의한 처방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180종의 국내산 의약에 대한 명칭과 약의 성질, 채집방법들이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국내산 약재의 개발과 연구는 종래까지 중국 의약 지식에 의존하던 고식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의약의 독자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후에도 계속되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등이 나왔다.
강보
[편집]姜保
고려말의 문신. 1298년, 세자 때 원(元)나라에서 <수시력법(授時曆法)>을 본 충선왕(忠宣王)의 명으로 <수시력첩법입성(授時曆捷法立成)>을 편찬하였다. 서운정(書雲正)에서, 뒤에 공민왕 때에는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에 이르도록 과학·기술 관서의 책임을 맡았다.
향약구급방
[편집]鄕藥救急方
고려 고종(高宗) 연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서(醫書).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조선 태종 17년의 중간본(重刊本)이 남아 있다. <방중향약목초(方中鄕藥目草)> 6장을 본문으로 하고, 부록으로 <방중향약목초부(方中鄕藥目草部)>에 향약 180종에 대한 설명이 있어, 고려 중기의 본초학 및 약용식물 등의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다.
삼화자향약방
[편집]三和子鄕藥方
고려말에 유행한 의학서. 조선 태조 때 나온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또 그 후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향약간이방
[편집]鄕藥簡易方
고려말 조선초에 권중화(權仲和), 서찬(徐贊) 등이 편찬한 의서. 중국의 약방에만 의거하지 않고 우리나라 출산의 약재로 간이하게 치료하도록 편찬된 것으로, 지금은 현존하지 않으나 뒤에 <향약제생집성방> 편찬에 주요한 대본이 되었다.
고려인의 독서열
[편집]高麗人-讀書熱
일찍부터 발달한 고려의 인쇄기술은 고려인들의 독서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인은 특히 강렬한 지식욕과 과거제도로 인한 유학(儒學) 서적의 급수요까지 더해 서적의 수입과 판각의 우수함이 중국과 어깨를 겨누고 있었다.
당시 송은 고려에 희서(稀書)가 많다는 것을 알고, 송의 철종은 송에서 없어진 백여종의 책을 고려에 구해 보내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1123년(인종 4년) 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의 서울 개경(開京)에 왔을 때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궁중 도처에 수만 권의 장서를 비롯 경사자집(經史子集) 도서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위기감을 느낀 송은 급기야 고려에 대한 책의 수출을 금지하기까지 했는데, 소동파(蘇東坡) 같은 유명한 문인도 고려에 책을 보내는 것을 금하라는 글을 송제에게 세 차례나 올린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