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사학·문예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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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학·문예사상〔槪說〕[편집]

이 시대의 사학과 문예 방면의 활동은 전(前)시대에 비하여 훨씬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점이 우선 눈에 띄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한문(漢文)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서는 신라의 향가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이두(吏讀)나 조선시대 이후의 한글이 그 사상의 표현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았으며, 거의 대부분 한문에 의한 활동만이 그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는 데에 시대적인 특색이 있다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사학·문학사상의 전반적인 특성은 처음에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점차 민족의 자주성을 의식해 가는 데 있다. 이런 변화는 우리사회의 발전과 국내 정세의 변천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사학 방면을 보면, 고려에서는 그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실록(實錄) 편찬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편찬사업 이외에 다른 사서(史書)들도 자주 편찬 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종 23년(1145년)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50권)는 현재 전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기전체(紀傳體)로 된 정사(正史)로서 가장 오랜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는 실제 <삼국사기>의 기사를 통하여, 중국 중심의 역사 서술을 곳곳에서 대할 수가 있다. 따라서 그 나타난 결과로서는 민족의 자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러한 사관(史觀)이 <삼국사기> 편찬자만의 허물로 이루어졌겠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김부식 개인을 탓하기에 앞서 그 시대 정신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즉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상적으로는 중국 문화의 짙은 영향과 중국적인 사고방식이 우리나라 사회 전체에 걸친 일반적인 추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학사상(史學思想)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소산이라 볼 것이다. 뒤이어 시대적인 상황이 바뀜에 따라 사학사상에도 커다란 전환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충렬왕(1274∼1308) 때에 편찬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그 구체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이 무렵에는 이미 시대적인 여건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한(漢) 민족이 세운 송(宋) 왕조는 멸망당하였으며, 그에 대신하여 북방민족인 몽고족이 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하여 고려왕조의 정치·사상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漢) 문화 중심의 사고에서 우리민족 중심의 사관(史觀)이 우러나게 된 것이다. 몽고의 군사적·정치적 위압에 직면하여 우리민족을 지켜야겠다는 민족의식이 역사의 서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령 <삼국유사>의 권두(卷頭)에 보이는 단군신화(檀君神話)도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노력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찬란하게 꽃피던 한(漢)민족의 문화가 미개한 북방민족에게 짓밟히고 문화적으로 암흑세계에 빠졌을 때 아시아에서 가장 문명한 나라는 다름아닌 고려(高麗)라는 민족적인 긍지마저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인 경향은 고려 후기의 사학(史學)·문학 부문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의 저술을 통하여 시대 정신의 변화를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학 부문에서는 <편년통록(編年通錄)>·<고금록(古今錄)>·<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등 수많은 서적이 간행되었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그 구체적인 사학사상(史學思想)을 살펴볼 수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한편 문학 방면을 보면, 이 시대에서는 관리의 등용문인 과거(科擧)에서 문장(文章)을 장려한 결과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학사상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음은 사학 부문의 경우와 동일하였다. 한(漢)민족인 송(宋)의 문화가 난숙한 시기에는 그 문학의 발상도 모두 중국적이었다. 즉 중국 문학의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에 송 왕조가 쇠퇴 멸망하고, 몽고가 대륙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 시대의 문학사상도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의 문학 작품 중에서,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노래한 많은 작품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문인들이 한문으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병행하여, 일반 민간에서는 우리말로 된 노래들이 고려 후기에는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청산별곡(靑山別曲)> <만전춘(滿殿春)> <이상곡(履霜曲)> <사모곡(思母曲)> <정읍사(井邑詞)>등은 모두가 일반 민중의 애환(哀歡)을 소박하고 곡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속가(俗歌)의 출현과 유행은 비록 미약하나마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중의식(民衆意識)이 점차 대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고려 사회의 시대적인 발전을 기반으로 가능하였던 것임을 주목해야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는 전기에 중국의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여 우리 사회와 문화를 더욱 발전시킬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뒤에 외세(外勢)의 도전을 받았을 때에는 민족의식을 지키고 가꾸어 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예를 이 시대의 사학·문학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싹튼 민족 중심의 사상은 다음에 오는 조선왕조 초기 세종대왕 때의 민족문화의 확립으로 연결지어진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김부식[편집]

金富軾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사록(司錄)·참군사(參軍事)·직한림(直翰林) 등을 거쳐 인종 원년(1122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로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의 탈선을 시정케 하였고,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가, 수사공(守司空)에 이르렀다. 인종 12년(1134) 묘청(妙淸)의 도참설(圖讖說)에 근거한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을 반대,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중군장(中軍將)으로 이를 토평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다. 1145년 현존하는 최초의 정사(正史)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의 편찬을 끝냈고, 의종(毅宗) 즉위 후에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을 주재하였다. 그밖에 문집(文集) 20여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시호는 문열(文烈).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그는 유교적인 성왕지치(聖王之治)의 왕도사상을 가져 왕의 유락(遊樂)을 개탄하였고, 권신 이자겸의 특별 우대에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2) 미신적인 음양도참설을 비판하고, 지식과 행동의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3) 대송(對宋) 외교사절로 왕래하는 동안에 그는 모화사대(慕華事大) 사상에 심취하여 사대사관(事大史觀)에 입각한 역사서술을 하였고,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 등의 민족자주론을 끝까지 반대 좌절시켰다.

삼국사기[편집]

三國史記

김부식에 의하여 고려 인종 23년(1145)에 찬수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을 주로 다른 사서(史書). 그 체제는 중국의 정사체(正史體), 또는 기전체(紀傳體)이고, 내용은 신라·고구려·백제 각국의 본기(本紀) 이외에 연표(年表)·지(志)·열전(列傳) 등으로 합계 50권이다. 이 책의 특징을 든다면, (1) 삼국중 신라를 중심으로 다룬 것 (2) 중국측의 사료(史料)에 치중하여 우리의 문헌·기록을 무시한 것 (3) 유교적 사대주의의 입장에서 편찬되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일연[편집]

一然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학자.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일연은 자(字),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고종 1년 9세 때 절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중이 되고,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 맹주(盟主)를 거쳐, 1283년 국존(國尊)에 추대되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 고대의 신화·민간설화 향가(鄕歌)·불교관계 기사 등을 수록,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3계(三界)는 환몽과 같고, 대지(大地)는 섬호(纖豪)의 거리낌도 없다. (2) 중생 속에 들어가 자비행(慈悲行)을 하고, 국난(國難)극복을 위해 대장경 간행, 구국기도 등을 행한다. (3) 설화문학을 집대성하여 민족 고유의 신화·종교·풍속을 보존 창명한다. (4) 불교의 폐해, 유학승(留學僧)들의 사대주의 등을 비판하고, 모든 기록에 주관적인 비판을 첨가한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편집]

三國遺事

삼국시대의 유사(遺事)를 모아 고려 충렬왕 때의 명승 일연(一然)이 지은 책. 내용은 왕력(王歷)에서 삼국과 가락(駕洛)국의 왕대와 연표를 싣고, 기이(紀異)에서 고조선 이하 고대국가의 흥폐·신화·설화·전설 등과 통일신라시대, 후삼국(後三國)시대의 역사 62편의 글을 싣고, 홍법(興法)에서는 신라 중심의 불교기사를, 의해(義解)에서는 신라 고승들의 설화 13편을 감통(感通)에서는 일반 신자들의 신행(信行)설화를, 피은(避隱)에서는 고승들의 이적(異蹟)을, 효선(孝善)에서는 효행(孝行)한 5인의 이야기를 각각 수록하여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기록을 보여준다.

이승휴[편집]

李承休 (1224∼1300)

고려 시대의 학자·문인.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고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 구동(頭陀山龜洞)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후 상경, 서장관(書將官)으로 원(元)나라에 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일시 은퇴하여 <제왕운기(帝王韻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충렬왕 24년 재기용되어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승지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저서에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제왕운기>가 있다.

제왕운기[편집]

帝王韻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韻)을 붙여 적은 책으로 고려시대 이승휴(李承休)의 저서이다. 상·하 2권으로, 상권은 중국의 역사를,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를 시로 읊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한국사 부문인 하권을 1·2부로 나누어 제1부에는 지리기(地理記)를 붙이고, 이어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라는 이름으로 전후 조선(前後朝鮮)·위만조선·한사군·삼한·신라·고구려·부여·후고구려·백제·후백제·발해를 1460구절의 7언시로 기술하였다. 제2부는 본조군왕 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라 하여 700구절의 5언시로 고려초부터 충렬왕까지를 기록했다. 하권 제1부의 전조선(前朝鮮)은 단군시대의 고조선을 가리키는데,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 된 단군에 관한 기록이라 하겠다.

이규보[편집]

李奎報 (1168∼1241)

고려시대의 문신·문인. 초명 (初名)은 인저,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 1207년 태자대보(太子大保)로 치사하였다. 걸출한 시호(詩豪)로서 호탕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처음에는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나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詩格)을 이룩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서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하였고,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였고,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동명왕편(東明王篇)>등 8편이, 글로는 <모정기(茅亭記)> 등 2편이, 소설로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전한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시·술·거문고를 즐겨 선경(仙境)의 시정(詩情)을 읊었다. (2)

<동명왕편>이라는 서사시(敍事詩)를 통해서 민족사의 거룩한 사적을 읊어 민족정기를 고취시켰다. (3) 국난을 당하자 선비의 몸으로 출전·종군하였고, 정치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자기의 세계를 버리지 않았다. (4)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를 만들어 향가문학과 시조문학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5) 유교적인 명분론(名分論)이나 세속적인 예의규범을 초월하여 자유·활달한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였고, 상상력이 풍부한 도교적·불교적인 소설작품을 남겼다.

동명왕편[편집]

東明王篇

고려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서사시(敍事詩)를 5언시로 읊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속에서 (1)<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왕본기(東明王本記)>의 내용은 깊이 알고 보면 요술이 아닌 성(聖)이요 귀신이 아닌 신(神)이라고 찬양하고, (2)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동명왕 관계 기사를 소략(疎略)해 버린 것을 비판하면서, (3) 자기는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작품을 쓴다고 밝혔다.

정지상[편집]

鄭知常 (?∼1135)

고려의 시인·문신·본관은 서경(西京), 초명(初名)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서경출신. 예종 9년 문과에 급제, 인종 5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척준경(拓俊京)의 범궐(犯闕)죄를 탄핵, 유배케 하였으며, 인종7년 좌사간(左司諫)으로 윤언이와 함께 시정(時政) 의 득실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의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믿어 서경천도론,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을 함께 주장하다가 인종 13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연류자로 몰려 김부식에게 참살당하였다. 시(詩)에 뛰어나 고려 12인중의 1인으로 꼽혔고, 역전(易傳)·불전(佛典)에 정통하고, 그림·글씨에 능했으며, 노장철학(老莊哲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왕과 권신의 잘못을 직간(直諫)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였고, (2) 음양도참설을 혹신하고 국내정치의 유신(維新)과 칭제건원을 주장하였으며, (3)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즐겼으며 유학자들의 모화사대(慕華事大)사상을 반대하고 묘청의 8성(八聖)사상으로 주체적인 민족사상을 정립하려고 하였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